전어와 달빛
윤상운(1947-)
전어 한 쌈에
달빛 한 쌈
작년에 떠났던 가을
파도에 실려 돌아오네
가족들 모두 병이 없으니
떠난 것들 생각에 밤이 깊어도 좋으리
창 밖에
먼 곳 풀벌레 가까이 다가오누라
▷ 시집 <달빛 한쌈에 전어 한쌈>(시학, 2005)
전어는 제 이름을 모르고 살아간다
서지월(1955- )
진해 와서 알았다
돌섬횟집에서 여럿이 회를 먹는데
누군가가 '봄도다리 가을전어'라 하기에
한 점 집어드는 순간, 문득
전어는 제 이름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밀물결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멈춰버린 그의 헤엄
토막난 몸뚱이마저 이제 내 몸안에서
편안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한 건
우리들이었다
▷ 시집 <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천년의시작, 2004)
가을전어
정일근(1958-)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전어나 듬뿍 썰어 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 달라 하자
바다는 떼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르레 익어
제 몸속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
제철을 아는 것들만이 아름다운 맛이 되고 약이 되느니
가을 햇살에 뭍에서는 대추가 달게 익어 약이 되고
바다에서는 전어가 고소하게 익어 맛이 된다
사람의 몸속에서도 가을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법이니
그 빈자리에 가을 전어의 탄력 있는 속살을 채우자
맑은 소주 몇 잔으로 우리의 저녁은 도도해질 수 있으니
밤이 깊어지면 연탄 피워 석쇠 발갛게 달구어 전어를 굽자
생소금 뿌리며 구수한 가을 바다를 통째로 굽자
한반도 남쪽 바다에 앉아 우리나라 가을 전어 굽는 내음을
아시아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즐겁게 피워 올리자
가을 전어를 살리다
정일근(1958- )
용주사에서 하안거 마치고 오신 현전 스님 앞에
두툼한 가을시편들 자랑처럼 펼쳐 놓았는데
시 수십 편 읽으시다 한 줄*에 놀라 물러서신다
칼로 썰어달라니! 시에 피냄새 진동하는구나!
스님 주장자 들어 내리 치신다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마음에 피 흘리지 않고
그분의 길 조용조용 따라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내 시에서 풍기는 피냄새 내가 알지 못했구나
어쩔거나, 시가 처 착한 것들 모두 썰어버렸구나
어쩔거나, 무심한 시가 칼이 되어 생명 저미었구나
가을 전어들 시로 죽였으니 시로 살리기 위해
가을이 오는 바다에 시를 용서처럼 풀어놓는다
가을전어들이여, 너희들 살아서 바다로 돌아가시라
몸 속 서 말 깨는 탈탈 털어 세상에 던져 버리고
현전 스님 들려주시는 화엄경 뼛속 살 속에 담고
그분의 바다로 돌아가 극락왕생 하시라
▷ <현대문학>2003년 10월호
(*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전어나 듬뿍 썰어달라 하자”
필자의 시 '가을 전어'의 첫 행.)
가을 전어
반기룡(1961- )
길 모롱이에 포장마차
불빛을 내뿜고 있어
무엇하나 살며시 들여다보니
도마에서 바다 내음 모락모락 피어오르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고추장에 푹푹 찍어 맛을 넘기고 있네
침을 꿀꺽 삼키며 기웃거리니
전어 아줌마 나를 보고
어여 들어오라 손짓하네
못 이기는 척 발을 디밀고
초고추장에 가을을 푹푹 찍어
허기진 식도를 자극했네
소주가 짜릿하게 내장을 적신 후
한 첨의 전어는
꿀처럼 새콤달콤
그 맛 무인지경이네
아, 요맛이구나
임금님한테 진상한 전어라고
우리 모두 가을 전어로
늦은 밤을 맛있게 숙성시켰네
가을 전어(錢魚)
반기룡(1961- )
가을이 푸드덕거린다
포장마차마다 웃음이 흐르고
전어 씹는 소리가 지천 이룬다
소주 한잔 알싸하게 목을 축이면
쌓였던 피로가 솜사탕처럼 사그러지고
찌든 짜증이 수증기처럼 승천한다
그 옛날 수라상에 올렸던 전어를
초고추장에 쓰윽 묻혀 아기작거리면
가을 냄새가 후각을 파고 들고
파도소리 물컹물컹 들리는 듯 하다
가을 밤이 오랫동안 고소하다
전 어
김혜경
전어 몸에 기름이 돌고
사람들은 가을을 씹는다
매암섬 밑
수천 마리 물고기떼 붙은
자루가 발견되었다
살이 다 차지도 않은 어린 가리비처럼
열려 있는 소녀의 젖
전어 몸보다
가시가 더 많은 세상
우리가 발라내야 할 살의 무게는
자루 한 자루
어미의 통곡 소리
파도에 부딪혀 갈라지고
현장 수사 끝낸 형사들
선창에 앉아 매운 양념 소주
전어무침을 오독오독 씹고 있다
▷ <시와시학> 2005년 가을문예 당선작
전 어
유응교
봄 조기
여름 은어
가을 전어라고
제철에 맞는 음식이
역시 꿀맛!
가을 전어 머리에
깨가 서 말이라고
전어 굽는 냄새에
집나간 며느리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네.
세상을 하직하고 강물에
몸을 던지려는 사람도
자살을 포기한다는 전어
홍원항 가을 햇볕 아래
고소하게 퍼지고 있네.
사람들도 저렇게
고소하다면
등 돌리고 떠나가는 사람도
되 돌아 오련만
전어는 어시장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전어처럼 고소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드네.
전어
권오범
소슬바람이 을씨년스럽게 집적거려
뒤죽박죽 된 마음 달래려고
창창한 남 목숨 에누리하게 부추겼으면서
죄책감마저 없는 중생
초장에 자맥질 시켜 우물거리다
소주로 쇳소리 나게 입가심하니
막무가내로 촐싹대던 그리움들을
그냥 깔끔하게 죽여준다
가족끼리 물살 헤집어
아슬아슬 연명했을 태평양 추억들을
그물에게 구속되기 전
어떻게 고소하게 갈무리했을까,
투가리 속 절단 난 야채
밥과 고추장 참기름으로 정신없게 달달 볶아
꿀떡대는 해넘이
오매오매 눈마저 씀벅거려 환장 하겠다
가을 전어
박태원
가을 하늘에
새털이 흩어져
새털구름 높은데 걸어놓고
아침 안개 사르르 내려와
손에 닿을듯
시야에 뿌연 너울 씌우는
아침시간
자동차로 드라이브 달린다
마산에 이르러
일행들과 들어선 다복횟집
잘게 쓴 전어에 초장 씌워
어금니로 야금야금 씹으니
음~
당기는 감칠 맛
비릿한 어시장에
가을 냄새 스며들어
전어 찾는 손님들로 북적될 때면
도마 장단이 다듬이 소리처럼
신이 날테지
■ 전어 축제
안양 서천 홍원항 무창포 광양 보성 강진 마량 부산 명지 삼천포
* 전어(錢魚)
청어목 청어과의 바닷물고기이다. 맛이 좋고 많이 잡히기 때문에 중요한 수산 자원이다. 가을에 특히 맛이 좋으며, 구이, 뼈회, 젓갈이 유명하다.
《자산어보》에는 ‘기름이 많고 달콤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 문헌에는 전어(箭魚)로도 표기하였다. 강릉에서는 새갈치, 전라도에서는 되미, 뒤애미, 엽삭, 경상도에서는 전애라고 불린다. 크기에 따라 큰 것은 대전어, 중간 크기의 것은 엿사리라고 하며, 강원도에서는 작은 것을 전어사리라 부른다.
뼈째로 썰어서 회로 먹거나, 소금구이, 무침 등으로 먹는다. 젓갈을 담그기도 하는데, 전어 새끼로 담근 것은 엽삭젓, 혹은 뒈미젓, 내장만을 모아 담근 것은 전어 속젓이라 한다. 내장 중에서도 위만을 모아 담은 것은 전어 밤젓 또는 돔배젓이라 하며, 양이 많지 않아 귀한 젓갈에 속한다. 호남지방에서는 전어 깍두기를 담가 먹기도 한다.
- 두산백과사전
<속담> 전어 굽는 냄새에 나가던[나갔던] 며느리 다시 돌아온다.
전어 굽는 냄새가 하도 고소해서 시집을 버리고 나가던 며느리가 마음을
돌려 돌아온다는 뜻으로, 전어가 대단히 맛이 좋음을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