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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와 산마을
-231화 가죽신의 전생 이야기-
설용수
어느 마을에 코끼리를 손주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코끼리에게 묘기를 가르쳐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어요. 코끼리가 긴 코로 할아버지를 번쩍 들어서 공중돌기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세상이 떠나가라 박수를 치곤했어요.
“할아버지와 코끼리는 전생에 연인이었을 거야. 저렇게 호흡이 척척 맞다니.”
하며 둘의 사이를 부러워하기도 했어요.
할아버지와 코끼리가 처음 만난 것은 먼지바람이 폭풍처럼 불어오던 2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어요. 그 해에 할아버지네 마을엔 봄부터 여름까지 단 한 방울도 비가 내리지 않았어요. 마을의 샘물은 말랐고 멀리 있는 냇물도 바닥에 돌멩이만 굴러다녔어요.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매일 물통을 들고 물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어요.
그날도 할아버지는 웅덩이를 찾아 헤매고 있었어요. 햇살이 어찌나 뜨거운지 저 먼 곳에서부터 이글거리는 열기가 할아버지를 삼키려고 달려드는 것 같았어요. 하늘에선 이글거리는 태양이 불화살을 들고 달려드는 것 같아서 얼른 눈을 감았지요. 하지만 현기증이 일어 다시 눈을 뜨니 저 멀리서 검은 구름 한 덩이가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이상하다. 구름이 왜 땅위로 오지?’
그런데 마주오던 구름이 방향을 바꿔서 숲을 향해 가고 있어요.
아! 그건 검은 구름이 아니라 코끼리 떼였어요. 대장 코끼리가 어디선가 물냄새를 맡은 모양입니다. 아기 코끼리들을 재촉하며 빠르게 걷고 있는 그들 뒤로 희뿌연 먼지구름이 일었어요. 할아버지는 얼른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에겐 오늘이 정말 행복한 날입니다. 코끼리 덕택에 제법 물이 남아있는 큰 웅덩이를 찾았거든요. 물가엔 먼저 도착한 코끼리와 얼룩말, 기린, 코뿔소 들이 물을 마시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동물들을 피해 풀이 많은 곳으로 가서 되도록 맑은 물을 떴어요. 벌떡벌떡 마시고나니 기운이 펄펄 나는 것 같았어요.
“빨리 가야지.”
할아버지가 물통을 채워서 등에 지고 벌떡 일어서니 다리에 굵은 힘줄도 불끈 일어섰어요.
얼마나 걸었을까요? 할아버지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어요. 앞에서 다가오는 아기코끼리를 봤거든요. 한 발, 두 발 힘없이 걷던 아기코끼리도 할아버지를 봤어요.
“일행을 놓쳤구나. 부지런히 가렴. 엄마가 기다린단다.”
할아버지가 애타게 말했지만 아기는 그 자리에서 푹 쓰러졌어요. 깜짝 놀란 할아버지는 얼른 물통을 내려놓고 바가지를 꺼내서 아기의 입에 물을 흘려줬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멀리서 큰 먼지폭풍이 밀려옵니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피할 겨를도 없었어요. 할아버지는 얼른 무릎을 꿇고 아기의 얼굴을 온 몸으로 감쌌어요. 흙과 모래와 마른 나뭇가지들이 팔과 다리를 치고 지나갔지만 아픈 줄도 몰랐어요. 아기코끼리가 살아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휴우~ 바람이 많은 먼지를 남기고 사라졌어요. 할아버지는 얼른 일어나 아기코끼리의 몸에서 먼지를 털어냈어요. 가만가만 눈가의 먼지를 쓸어내고 있는데 아기가 눈을 반짝 떴어요. 아, 어찌나 기쁜지 할아버지는 그만……
할아버지는 아기에게 식구들을 찾아주려고 다시 웅덩이를 찾아갔지만 코끼리들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어요. 그때부터 아기는 할아버지네 식구가 되었습니다.
아기는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일을 거들었어요. 코로 할아버지가 베어놓은 나무둥치도 옮기고 큰 귀를 펄럭이며 할아버지의 땀을 식혀주기도 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영리한 아기에게 묘기를 가르쳐보라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거절했어요. 그런 걸 배우면 아기가 힘들어진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마을 청년들이 할아버지 몰래 쉬운 묘기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손짓을 보며 앞으로가, 뒤로 가, 제자리에서 돌아 등을 어찌나 잘 따라하던지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어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아기코끼리를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한 발 들기, 코로 사람 들어올리기, 뒷걸음질 치기 등을 가르쳤는데 아기는 휘파람 소리와 손짓만으로도 훌륭히 잘 해냈어요. 소문은 바람을 타고 윗마을 아랫마을로 퍼져나갔어요.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코끼리를 데리고 할아버지를 찾아왔어요.
“저에게 코끼리 묘기를 가르쳐 주십시오.”
할아버지는 젊은이에게 물었어요.
“코끼리는 어디서 구했는가?”
젊은이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답했어요.
“샀어요.”
“사다니, 어디서?”
“산 너머 마을에서요.”
할아버지는 젊은이에게 묘기를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어요. 코끼리를 판 사람이 불법으로 사냥을 했거나 젊은이가 직접 사냥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자 젊은이는 아주 불쌍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어요.
“제게는 늙은 부모님과 많은 동생이 있어요. 장남인 제가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할아버지는 젊은이가 데려 온 코끼리를 찬찬히 살펴봤어요. 눈에는 생기가 없고 전체적으로 힘이 없는 걸 보니 코끼리에게 먹이를 충분히 주지 않고 일만 시킨 것 같습니다.
“코끼리가 묘기를 배우면 잘 먹이고 험한 일은 안 시킬 거지?”
할아버지가 묻자 젊은이는 꼭 그러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했어요.
코끼리들에겐 이름이 생겼어요. 할아버지의 코끼리는 바람 속에서도 살아났다고 해서 바람, 젊은이의 코끼리는 산 너머 마을에서 왔다고 산마을이라고 불렀어요. 산마을은 바람이 보다 두 살 많아 보입니다. 그러니까 바람이 동생이고 산마을이 누나인 셈이지요. 다행히 바람과 산마을은 사이좋게 지냈어요. 묘기도 잘 배웠고요.
석 달이 지나자 코로 붓을 잡고 그림도 그리고 코로 훌라후프도 돌렸어요. 또 석 달이 지나자 바람과 산마을은 공을 차기도 하고 맨 땅에 털썩 주저앉아 아이들과 놀기도 했어요. 이제 코끼리들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을 만큼 훌륭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젊은이가 할아버지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산마을을 데리고 떠날까 합니다.”
“고향으로 갈 테냐?”
“왕궁으로 가서 대왕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할아버지가 젊은이에게 소개장을 써주자 젊은이는 의기기양양해서 임금님을 찾아갔어요.
“왕이시여, 저는 제 스승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제 코끼리는 세상에서 가장 묘기를 잘 부립니다. 저를 왕궁의 코끼리조련사로 취직시켜 주십시오.”
임금님이 젊은이에게 물었어요.
“너는 얼마를 원하느냐?”
“저는 제 스승과 같은 실력을 가졌습니다. 스승님과 같은 급료를 주십시오.”
젊은이의 당돌한 대답에 임금님이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어요.
“내일 네 기예를 보고나서 결정하겠다.”
젊은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떠나자 임금님은 신하에게 편지를 한 통 써주며 빨리 할아버지 댁으로 가라고 일렀어요. 그리고 다른 신하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일은 스승과 제자가 코끼리 묘기를 보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북을 쳐서 알려라.
임금님의 편지를 받은 할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겼어요. 내일 제자와 함께 묘기를 보이는 것도 신경 쓰였지만 제자가 자기와 같은 봉급을 요구한 것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더구나 임금님의 요구는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바람이를 데리고 연습장으로 갔어요. 그리고 바람이의 긴 코를 쓰다듬으며 속삭였어요.
“바람아, 우리에겐 하루밖에 시간이 없단다. 그 하루에 너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해. 그래야 임금님 체면도 살리고 나의 제자에게 큰 깨달음도 줄 수 있단다. 날 좀 도와다오.”
할아버지의 말에 바람이는 긴 코로 할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다음 날 왕궁 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저마다 얼굴에 호가심이 가득했습니다. 스승이 이길 것인지 제자가 이길 것인지에 대해 서로 의견들이 달랐으니까요.
“젊은이가 이길 거야. 젊은이들은 행동도 생각도 빠르니까”
“천만에. 스승은 경험이 많으니까 코끼리를 다루는 요령이 좋잖아.”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어요. 이어서 임금님과 대신들이 들어와 앞자리에 앉았어요. 다시 북소리가 들리자 할아버지가 바람의 등에 앉아 굳은 얼굴로 등장했고 이어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제자가 산마을의 등에 앉아 손까지 흔들며 들어왔어요.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큰 박수를 보냈어요.
사회자가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알렸어요.
“이제부터 코끼리 묘기대회가 열리겠습니다. 먼저 젊은이가 시작하겠습니다.”
젊은이와 산마을이 나와서 스승님께 배운 묘기를 보이기 시작했어요. 두 다리로 서기, 코로 사람 안아 올리기, 코로 악수 신청하기, 붓으로 그림그리기, 공굴리기 등 산마을의 묘기가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큰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어요.
“젊은이 만세!”
“역시 젊은이는 나라의 기둥이야.”
그 소리에 젊은이는 스승을 보며 씨익 웃었어요. 그 웃음 속에는 스승을 이겼다는 자만감이 가득했어요.
할아버지와 바람이의 차례입니다. 할아버지가 ‘앞으로’ 하며 손짓을 했더니 바람이가 뒤로 갔어요. ‘뒤로’ 했더니 앞으로 갔어요.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어요. ‘저게 뭐지?’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순식간에 왕궁 뜰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어요. 할아버지가 ‘앉아’ 하고 부드럽게 말하니 바람이는 벌떡 일어섰어요. ‘일어서’ 라는 소리에는 두 다리를 구부리더니 자리에 앉았습니다.
“쟤는 반댓말을 알고 있어.”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를 보냈어요.
“바람이 만세!”
“스승님 만세!”
그때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왔어요.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빨간 옷을 입고 악기를 든 궁중음악대가 들어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가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코를 휘두르며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다리를 흔들면서 온 몸으로 리듬을 타기 시작한 거예요. 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덩실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하자 왕궁은 순식간에 축제장으로 변했어요. 음악이 끝나자 바람이가 코로 할아버지의 모자를 벗겨서 흔들며 한 다리를 구부려 인사를 했습니다.
“바람이 만세!”
하며 외치던 사람들이 젊은이를 향해 외쳤습니다.
“엉터리 제자야. 꺼져!”
또 다른 사람이 외쳤습니다.
“스승을 욕보인 놈은 혼나야 합니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자 젊은이는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놓았어요. 사람들이 따라가자 할아버지가 그들을 막으며 큰소리로 외쳤어요.
“여러분, 진정하세요! 제자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나쁜 아이는 아니니까 나이 들면 잘 깨달을 거예요. 훌륭한 코끼리조련사가 될 겁니다. 한 번 만 용서해 줍시다!”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들어 헹가래를 쳤어요. 그리고 할아버지와 바람이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줬어요.
할아버지가 임금님께 가서 절을 한 뒤 정중하게 말했어요.
“대왕님, 기예를 배우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섭니다. 근데 기예를 잘 못 배우면 잘 못 만든 나쁜 신을 신은 것처럼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하며 다음과 같은 계송을 읊었습니다.
마치 즐거움을 위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이 산 신이 닳아서
그 밑의 뜨거움에 타서
그 발을 물어뜯는 것 같다.
그 가문과 성질이 나쁜 사람
네 스승과 학문과 지식을 빌어
그 지식 때문에 도리어 그 몸을 망쳤나니
성질이 나쁜 이는 나쁜 신에 비유된다.
● 이 이야기는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 제자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배반하고 적이 되었고 그래서 큰 파멸에 이르렀는데 이는 지금만이 아니요 전생에도 그랬음을 코끼리 묘기를 비유해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생각키우기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 수 없어요.
남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남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며 살지요.
도움을 받았을 때는 감사한 마음을, 도움을 주었을 때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면
서로의 마음에 예쁜 꽃 한송이를 간직할 수 있을 거예요.
산들이 주인처럼 조금 배웠다고 잘난 척을 하거나 스승님을 무시하는 태도는
배우는 사람으로써의 자격이 없지요.
배울 때는 바른 마음가짐으로, 배움을 펼칠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여러분은 그렇게 잘 배우고 익힐 자신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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