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직역을 하면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학은 배움이나 이론적 탐구라는 의미로 통용됩니다.
사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로도 읽을수 있지만 경험적 사고로 읽을수 있습니다.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 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학교 연구실에서 학문에만 몰두하는 교수가 현실에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반대로 자기경험을 유일한 잣대로 삼거나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일을 처리하면 위험한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이론을 이끌어 내는 사람들은 대단히 완고합니다.
자기 경험만을 고집합니다.
경험적 지식은 매우 완고합니다.
따라서 경험주의를 주관주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관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참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동(크게 같음) 은 멀고 소이(작은차이)는 가깝습니다.
자기의 처지에 눈이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사회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학과 사를 적절히 배합하는 자세를 키워가야 합니다.
공자가 이 구절에서 이야기 하려고 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입니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특수한 경험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과 필연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학이>편에 학즉불고學則不固 란 구절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학學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입니다.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게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전 과정 속에 그것을 놓을수 있어야 합니다.
온고와 지신을 아울러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신영복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강의>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