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 국립대학은 고구려 '태학'
유교 교육 통해 왕권 강화하려 설립
귀족의 자녀 중 남자만 입학 가능… 평민은 경당에서 독서·무예 배워
신라 국학, 고려 국자감, 조선 성균관… 시대마다 비슷한 교육기관 있었죠
얼마 전 조선일보와 영국의 글로벌 대학 평가 기관 QS(Quacquarelli Symonds)가 실시한 '2014 조선일보·QS 아시아 대학 평가' 결과가 발표되었어요. 올해는 카이스트(KAIST)가 아시아 2위 대학으로 껑충 뛰어올랐고, 서울대, 포스텍(포항공대), 연세대, 성균관대, 고려대가 아시아 20위 안에 들었다고 해요. 아시아 대학 평가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한국 대학 6곳이 '톱 20'에 포함되었어요. 우리나라 대학들이 점점 좋아지는 것이죠.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오늘날에는 이러한 대학(大學)이 고등교육을 담당하는데, 먼 옛날에도 이와 같은 교육기관이 있었을까요? 오늘날의 대학과는 그 성격이나 규모에서 차이가 있지만, 우리 역사 속에도 시대마다 지금의 대학과 비슷한 여러 교육기관이 있었답니다. 오늘은 우리 역사 속 최초의 국립 교육기관을 찾아 고구려로 여행을 떠나볼까요?
◇ 국가의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371년 고구려의 제16대 왕인 고국원왕이 평양성을 공격해 온 백제군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어요. 당시 태자였던 구부가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고구려 제17대 왕인 소수림왕이 되었지요. 소수림왕은 신하들과 나라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우리 고구려가 어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나라 안은 백성의 불만이 커 혼란스럽고, 나라 밖에서는 북쪽의 선비족과 남쪽의 백제가 위협해 오니…. 참으로 안타깝도다!"
"송구하옵니다. 모두 신(臣)들의 잘못이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다시 튼튼하게 하겠소?"
"불교를 수입하여 왕실의 안녕을 빌고, 불교를 통해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으면 어떨까 하옵니다."
"인재를 키우고, 그 인재를 관리로 등용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 국가의 장래 위해 멋진 학교를 세웁시다!
"좋소! 중국 진(전진)나라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국가에서 직접 훌륭한 인재를 키울 수 있는 교육기관을 세우도록 하시오."
소수림왕의 명령에 따라 고구려는 372년에 중국 전진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에 '태학(太學)'이라는 국립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태학은 지금으로 보면, 국가에서 책임지고 운영하는 국립대학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지금처럼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요. 상류 계급 즉, 귀족의 자제만 입학할 수 있었어요. 귀족의 자제 중에도 남자만 들어갈 수 있었고요.
고구려의 태학은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 역사 최초의 정식 교육기관이에요. 교육 목표는 당시 중국에서 받아들인 유교적인 정치 이념에 충실한 사람을 기르는 것이었어요. 유교 이념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왕권을 강화하고 그를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딱 어울리는 학문이었거든요.
◇ 평민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도 있었어요!
"국내성에 귀족의 자녀만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며? 우리 같은 평민은 공부도 할 수 없다는 건가?"
"천만에! '경당(扃堂)'이라고 들어 봤어? 평민 자녀를 위해 경당이라는 학교도 생겼대."
태학이 세워진 후 고구려에는 경당이라는 교육기관도 생겨났어요. 평민층 자제를 대상으로 독서와 무예를 가르치는 민간 교육기관이었지요. 그렇다면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를 이룬 백제와 신라에는 태학 같은 교육기관이 없었을까요? 백제의 교육기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어요. 다만 백제에 박사(博士) 제도가 발달한 것으로 보아 교육기관이나 교육제도가 상당히 발달했을 것으로 짐작하지요.
신라는 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주로 화랑도를 통해 인재를 키웠고, 삼국통일을 이룬 뒤에는 '국학(國學)'이라는 교육기관을 설치했어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국학은 682년(신문왕 2년)에 세워졌고, 경덕왕 때 '태학감(太學監)'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국학이 되었다고 해요.
◇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교육기관을 세워 인재를 키웠어요!
발해에는 중국 당나라의 '국자감(國子監)'이라는 교육기관을 본떠 만든 '주자감(胄子監)'이 있었어요. 주자감 역시 오늘날의 국립대학과 같은 곳으로, 왕족과 귀족을 대상으로 교육했지요. 훌륭한 인재가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중에는 당나라 유학생도 많았다고 해요.
고려 역시 초기에 수도였던 개성에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어요. 992년에 '국자감'으로 개편되었고 1362년에 그 명칭이 성균관으로 바뀌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지요. 또한 1055년에 문하시중으로 있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최충이 '9재학당'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우자 그 뒤에 유학을 따르는 선비들이 11개의 사학을 세워 개경에 사립학교 12개가 있었어요. 이를 '사학 12도'라고 불러요.
조선시대에는 중앙의 성균관(成均館)과 4부 학당, 지방의 향교 등 국가가 운영하는 국립학교인 관학(官學)과 서원(書院), 서당(書堂) 등 개인이 운영하는 사립 교육기관이 있었지요. 서원은 지방에 있는 향교 수준으로 1543년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이 그 시초였어요.
[함께 생각해봐요]
고구려의 태학뿐 아니라 고려·조선시대의 학교는 남자만 입학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여자는 언제부터 교육을 받았는지 알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