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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23
마태복음 5:21-26
살인에 대하여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성취할 완성자라고 밝히셨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라고 말씀하심으로 율법의 의가 아닌 본질적인 의를 설명하고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래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21, 27, 33, 38, 43절)라는 형식으로 살인(21-26절), 간음과 이혼(27-32절), 맹세(33-37절), 보복(38-42절), 이웃 사랑(43-47절)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전했던 모세보다 더 완전한 권위와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지신 분으로서 지금 산에서 율법의 본질적인 뜻을 밝히신다.
먼저 예수님께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21절)라고 말씀하셨는데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너희가 계명을 잘못 들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율법을 잘못 이해하여 잘못 가르쳤다는 것이다. 계명을 문자로 보고 윤리 도덕적으로 받아들이면 종교 행위가 된다. 인간들은 율법을 받으면 자기 행위로 지켜서 의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을 폭로하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22절)라고 말씀하셨다. “살인”은 헬라어로 ‘포뉴오’인데 ‘살해하다, 죽이다’라는 뜻으로 70인역에서 히브리어 ‘라차흐’(살해하다, 죽이다)와 ‘라카’(죽이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에서는 소위 말하는 십계명, 즉 열 말씀이 기록된 출애굽기 20:13과 신명기 5:17에서 언급되고, 그에 따른 심판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1:12과 레위기 24:17에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선언하신다. 율법의 본질을 드러내시는 왕권적 선언이다. 살인에 대한 말씀을 꺼내신 후 “형제”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관사가 붙은 ‘그 형제’(헬, ‘호 아델포스’)라고 하였기에 혈육적인 관계가 아니라 구약에서 말씀하는 구체적이고 특별한 형제를 지칭한 것으로 단수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 라가라 하는 자, 미련한 놈”이라고 한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노하는”이라는 말은 ‘오르기조’로 ‘자극하다, 성나게 하다, 화나다’라는 뜻이고, “라가”는 ‘라카’로 아람어 ‘레카’(텅 빈 머리, 멍텅구리, 히브리어로는 ‘리크’)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멍텅구리, 어리석은, 머리가 텅 빈’이라는 뜻이며, “미련한”이라는 말은 ‘모로스’로 ‘우둔한, 어리석은, 부주의한’이라는 뜻으로 3개의 단어가 한 세트를 이루는 표현으로 살인이 무엇인가를 비유하는 말이다.
“형제”를 특정한 형제를 지칭한 것이고 단수로 표현하였다면 창세기에서 가장 최초로 언급된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말씀하는 형제로 보아야 한다. 가인과 아벨의 형제 관계를 통해 이 땅에 진짜 형제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가인에게 맞아 죽는 형제 아벨의 모습으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4-16)
결국 구약에서 “살인하지 말라”(출 20:13, 신 5:17)라는 말씀은 언약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 땅에 죄인들의 형제가 되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지 말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로 알지 못하여 형제로 대하지 않고 노하며, 라가라 하고, 미련하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살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적 행위로 자기 의를 쌓기 위한 종교 생활에 몰두하여 율법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형제로 대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이다.
그리고 “심판, 공회, 지옥 불”도 ‘크리시스, 쉬네드리온, 게엔나 퓌르’라는 3개의 단어로 한 세트를 이루어 형제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한 자의 결국을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우리 성경에 “받게 되고, 잡혀가게 되고,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다르게 번역하였지만 헬라어로는 같은 단어 ‘에노코스’를 쓰고 있다. ‘에노코스’는 ‘에네코’(붙잡히다, 함정에 빠뜨리다)에서 온 단어로 ‘죄가 있는, 위험이 있는, ~에 복종하는, ~할 책임이 있는’이라는 뜻인데 ‘에네코’는 ‘엔’(~안에)과 ‘에코’(붙잡다, 소유하다, 간직하다, 보관하다, 취하다)의 합성어로 ‘나의 안으로 취하다, 소유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심판과 공회, 지옥이 모두 내 안에 뒤얽히고 매여서 꼼짝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심판, 공회, 지옥 불”은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로 알지 못하고 살인한 그 자체의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지옥 불”이란 ‘게엔나 퓌르’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이다. 즉 끝이 없는 욕심이 죽지 않고 항상 불로 타오르는 곳이다. 욕심이 불타오른다는 것은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으니 율법적 행위로 자기 의를 쌓겠다는 욕심만 끝없이 나오고 그 욕심에 끌려 살게 된다.
구약에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 곧 교회는 더 이상 살인하지 않는 자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십자가, 성경이라는 용어들은 사용하면서 스스로 제자라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노하고 라가라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3종 세트의 살인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증거가 주일 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하며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믿고 그 건물 안에서 봉사 충성하면서 온갖 율법적 행위에 매여 꼼짝하지 못하는 것 자체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예물”은 ‘도론’으로 ‘선물, 하사품, 희생 제물’이라는 뜻이고, “제단”은 ‘뒤시아스테리온’으로 성전의 ‘번제단, 향단’을 뜻하는데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한다(히 13:10-12).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0-14)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교회요 성도에게 주신 선물이 믿음이다(엡 2:8). 그렇다면 이제 교회가 된 자, 성도는 죽은 제사가 아닌 산 제물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받은 자만이 산 제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제사 다름 아닌 말씀의 섬김이다(우리 성경에는 “영적 예배”라고 번역하였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원망들을 만한 일”이라는 말은 ‘카타’로 ‘~아래, ~에 관하여, ~에 반하여’라는 뜻이고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은 ‘므나오마이’인데 ‘생각하다, 기억하다’라는 뜻이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모형이요 예표였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를 행하다가 하나님께서 본래 주시고자 하셨던 언약의 말씀이 기억난다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24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두고”는 ‘아피에미’로 ‘내보내다, 버려두다, 떠나다, 용서하다’라는 뜻이고 “화목하고”는 ‘디알랏소’로 ‘철저하게 변화시키다, 조정하다, 화해하다’라는 뜻이고, “드리라”는 ‘프로스페로’로 ‘데려가다, 인도하다, 바치다, 취급하다’라는 뜻이다. 즉 예물을 제단 앞에 둔다는 것은 나 자신(마음)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 주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변화된 상태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온전히 인도가 될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25절). 이 말씀은 앞에서 잘못된 예물을 드리는 자의 상태를 이어서 설명하시는 것이다. “고발하는 자”란 ‘안티디코스’라는 말로 ‘대항자, 고소 상대자’라는 뜻이다. 언약의 말씀은 늘 우리를 고발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4-46)
이런 점에서 우리의 죄를 고발하시는 분은 말씀이신 예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십자가의 길을 가다가 다시 율법적 행위로 돌아선다면 고발하는 자, 곧 진리의 성령께서 다시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사화하라”라는 말의 헬라어 ‘유노에오’는 ‘호의를 품다, 화해하다, 일치하다’라는 뜻으로 다시 하나의 길 십자가의 길로 일치가 되게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라는 말씀은 율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성취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구별하는 재판관에게 넘겨지고 던져져서 심판 아래 있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라는 말씀의 “염려하라”라는 말의 ‘메포테’는 ‘결코 ~아니다. ~않도록, 전혀 ~않다’라는 뜻으로 비진리의 세상에 갇히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그것 자체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옥에 갇히는 것이고 그것은 곧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있을 것이나 거기서 결단코 스스로 율법을 완성함으로 다 갚아서 나올 수 있는 자는 없다는 뜻에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26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은 믿음이 주어지기 전까지 율법의 행위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제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진리, 율법의 행위에서 나와서 은혜의 자리에 있게 된 자가 된 교회요 성도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4-8:2)
(2024092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