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돈점논쟁
여지껏 같은 것, 다른 것만 배워왔는가?
강옥구/샌프란시스코 거주, 수필가
보조스님은 입적하시기 하루 전날에 목욕하시고 새벽에 시자에게 물으셨다. "오늘이 며칠이냐?" "스므 이레입니다." 스님은 곧 일어나 세수하시고 법복을 정장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눈이 조상으로부터 받은 눈이 아니며, 이 코가 조상으로부터 받은 코가 아니며, 이 입이 어머니에게 받은 입이 아니다." 하시고는 법고를 울려 대중을 모이게 했다. 그런 후 향을 사르고 예불을 한 뒤 법상에 오르시어 평일처럼 문답하시었다.
"산승의 목숨이 오로지 대중의 손에 있노라. 찢든지 짜르든지 대중에게 맡기니 힘줄, 뼈도 다 나올 것이다."하시고, 다리를 펴서 상위에 얹으시고 청중의 물음에 따라 대답하시는 데 조금도 장애가 없었다. 그 때 마지막으로 물은 어느 승려와의 대담은 이러하다.
"엿날 유마거사께서 병을 보이신 것과 오늘 조계의 병환 보이심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너는 이제까지 같은 것, 다른 것만 배워 왔는가."
하시고는 주장자를 세번 울리신 뒤 "천가지 만가지가 다 이 가운데 있도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주장자를 상에 놓으신 뒤 법상에 앉으신 체 그대로 입적하셨다.
한 사람의 생애을 그의 죽음에서 결산하는 것이라면 입적하시기 전 순간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무명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신 보조스님의 생애가 그대로 자비의 수행, 곧 자비이었음을 보게 되니 나는 지극한 감동의 순간을 이 대목을 읽으면서 맛보았다.
보조스님께서 만일 이자리에 계셔서 지금 계속되는 돈오돈수나 돈오점수간의 논쟁을 지켜 보신다면 너희들은 여지껏 같은 것, 다른 것만 가지고 시비를 하느냐고 하시면서도 또다시 그 자애로움 안에서 말에 얽매이지 말고 그 말뒤에 있는 뜻을 알아 차리도록 법문을 내리실 것 같다. 도대체 보조스님께서는 왜 돈오돈수를 가르치셔서 후에 일어날 이러한 혼란과 논쟁을 피하시지 않고 유독히 돈오점수를 가르치셨으며 과연 돈오점수의 돈오는 지해로써 우리의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것일까? 그간 박성배교수님의 논문을 비롯하여 여러 교수님들의 논문을 읽어가면서 대략 윤곽이 잡히는 듯 하지만 스스로 알아보는 것 또한 소중한 일인듯 하여 보조스님의 수심결을 읽어 보았다. 그 수심결에서 보조스님께서는 <돈오한 자는 범부가 어리석었을 적에 四大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 자성이 법신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가 참으로 부처인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매는 중 홀연히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일념에 빛을 돌려 자기의 본성을 보면 이 성품의 바탕이 원래 번뇌가 없고 절대 지혜의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돈오라고 한다.
점수하는 자는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無始습기를 한꺼번에 없앨 수 없으므로 悟에 의해서 오래 닦아 성인을 이르므로 점수라 한다. 그러나 비록 뒤에 닦는다고 해도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이 본래 깨끗함을 먼저 다 알았기 때문에 악을 끊되 끊어도 끊음이 없고 선을 닦되 닦아도 닦음이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닦고 끊음이노라. 그러므로 돈오점수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를 잃으면 옳지 않으니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념념수습하여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자연히 담백해지고 자비와 지혜가 밝게 드러나니 업이 끊어지고 공행이 커져서 번뇌가 다할 적에 생사가 다 끊어지는 것이니 근본 번뇌가 다 끊어지고 원각대지가 뚜렷이 독존하면 천백억 화신이 나타나고 중생의 기틀따라 응용이 무궁하도록 인연이 있는 중생을 제도하므로써 오직 쾌락하고 근심이 없어지니 이를 이름하여 大覺세존이니라.
위의 가르침을 배경으로 하여 보조스님의 돈오점수가 내표하는 뜻을 헤아려 본다.
보조스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육조단경에서 <진리의 본바탕인 자성 자리가 생각을 일으켜 육근으로 보고 듣고 자각하고 인식하지만 객관 경계에 물들지 않아 참된 성품은 항상 자제하다>와 화엄경의 여래 출현품에서 <한 티끌이 大千經을 머금고 있듯이 여래 지혜가 중생 몸 가운데 다 갖춰있지만 범부가 어리석어 알지 못한다>와 이 통현 장자의 화엄론의 한 대목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법열을 크게 느껴 경책을 머리에 이고 춤을 추었다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보조스님께서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런 선지식을 만나 홀연히 깨닫게 되는 깨달음의 내용이 <일체중생이 있는 그대로 완전히 부처님이다>였다.
그것이 곧 돈오인데 우리에게 있는 무시습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점수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여기서 나는 무시습기의 無始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습기면 습기이지 왜 하필이면 시작이 없는 습기라고 표현하셨을까? 시작이 없다는 것은 곧 끝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습기가 시간을 초월함을 표현한다.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시작안에 끝이 있고 끝 안에 시작이 있음을,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임을 의미한다. 중생의 자리가 부처라면 이 무시습기의 자리가 곧 증오(證悟)의 자리임을 보게 되며 습기가 무시하므로 그 습기가 제거된 증오의 자리 또한 무시하며 습기와 증오, 미혹과 지혜 양자 다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니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추월한 무념의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러한 무시습기를 보조스님은 아무렇게나 닦는 것이 아니고 에 悟의해서 닦는다고 하셨다. 그렇다면悟의 내용이 <중생이 곧 부처>이라면 수의 내용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悟에 의해서 닦는 修란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종밀스님의 제시하신 열가지의 수행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종밀스님은 돈오(Sudden Enlightenment)에서 증오로 가는 과정에서 행하는 수행을 10가지로 분류하였는데
그 첫째는 돈오로 좋은 선지식을 만나 마음의 본성을 봄으로써 미혹을 깨치며,
둘째로 발심을 일으켜 자비와 지혜를 일으켜 증오에 도달할 결심을 하고
셋째로 修五行으로써 보시, 계, 인내, 정진, 선정(선정과 지혜)을 닦으므로 업을 깨뜨리고
넷째는 開發로써 지혜와 자비를 개발하여 오염을 타파하고
다섯째는 我空으로써 스스로 자아가 없음을 보아 아집을 깨뜨리고,
여섯째는 法空으로써 모든 현상에 자성이 없음을 보아 사물에 대한 집착을 깨트리고,
일곱번째는 色自在로서 대상에 대한 우리의 자각이 우리 마음의 반영임을 보고 그들을 다스려 지각된 대상에 대한 반영을 깨뜨리고
여덟번째는 心自在로써 지각하는 주체를 다스리므로써 그 지각하는 주체가 일어남을 깨뜨리고
아홉번째는 斷念으로써 미혹된 생각의 근원을 보고 마음의 본성이 영원함을 보는 것으로 기신론에 서술된 구경각의 단계로 생각이 일어남을 깨뜨리고
열번째는 成佛로 마음을 궁극적인 본원으로 돌아가게 하여 마음이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깨달은 과정의 여러단계 사이에 차이가 없으므로 그들이 모두 시초부터 다르지 않으며,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는 본각과 같음을 보아 이 단계에서 부처로 된다.
그러므로 종밀은 도포를 그려 미망에서 벗어나는 것과 깨달음의 견성은 서로 분리되거나 평행이거나 일직선에서 반대로 가는 것이 아니고 둘이 연속체로써 서로의 원인으로 되어 본각이 0도이고 증오는 360도이며 180도에서 좋은 선지식을 만나 돈오를 하게 되니 생사에서 벗어나 그의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면 증오의 자리가 궁극적이 최초의 자리로써 시작과 끝이 하나로 되는 원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열가지 수행은 180도에서 360도 사이에서 이뤄지는 수행의 내용이다. 종밀은 돈오와 증오의 관계를 기신론에서의 물과 파도의 비유를 사용하여 <모든 것들이 투명히 비치는(본각) 물의 수면이 무지의 바람에 의해서 흔들려(미혹의 과정) 파도를 일으키는 데 그 바람이 갑자기 그쳐도(돈오) 그파도의 움직임이 점차적으로 그쳐(점수) 그 수면이 다시 조용(증오, 성불)하게 된다. 그러니 수면이 잠잠하거나 요동하거나 파도가 크거나 작거나 그것은 동등한 물(Absolute mind)이며 수면을 변하게 하는 조건들이 모든 것을 반영할 수 있는 근본 본성(본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보조스님은 모양이 없는 본성에 대해서 <비록 미와 오가 다르나 그 근본은 하나니 법이란 곧 중생심이거니와 이 공적한 마음은 성인이라 해서 더 하지 않고 범부라고 해서 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의 지혜라고 해서 빛나지 않고 범부의 지혜라고 해서 덜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보조스님과 종밀스님의 글을 읽어보면 깨달으면 곧 부처라는 등식이 실제로 옮지 않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깨닫는다고 할 적에 일반적으로 그 깨달음 안에는 깨닫는 행위와 깨달음의 내용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 깨달음의 행위가 우리의 지각과 감각기관과 판단력과 지적 분석에 의해서 일어날 때 즉 우리의 지혜가 이 깨달음의 내용을 분석적으로 감각기관을 통해서 조사할 때 우리는 이것을 유분별지(有分別智)라고 하며 이때에는 깨닫는 행위와 그 내용사이에 간격이 있게 되니 곧 주객이 분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성제, 무아, 무상, 연기 그리고 공등을 깨닫는 때 이것은 有分別智에 속하니 그것은 깨닫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을 통하여 그러한 간격이 사라지는 때 즉 깨닫는 행위와 그 내용을 서로 분리 할 수 없이 하나로 되는 때 그것이無分別智로써 이 지혜가 바로 如來자체로 된다.
그러므로써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의 돈오는 유분별지에 속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나안에 불성이 있음을 보는 때 그때는 불성을 보는 나와 불성이 하나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는 무분별지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분별지는 여래의 씨가 뿌려질 바탕이며 수행이 그 씨가 자라는 과정이고 무분별지가 그 열매로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오돈수의 돈오는 무분별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돈頓을 홀연히(Sudden)라고 풀이하는 때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수는 닦음을 의미하므로써 시간을 포함하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초월하는 돈과 시간을 내포하는 수의 결합은 우리의 상식에 용납되지 않는 단어이다. 그런데 수심경에서 보조스님은 <수심인의 해오처에서 다시 더 계급과 차례가 없으므로 돈頓이라고 한다. >하셨다. 그러므로 보조스님의 의미하는 돈은 홀忽로써 시간을 초월하며 계급차례가 없으므로 상대적인 일체차별이 떨어져 법성과 증감이 없는 자리이다. 만일 돈수가 그런 자리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무분별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진정한 구경각의 경지라면 돈오돈수를 하는 내가 없으면 돈오점수를 의식하는 내가 없으며 공을 견성했다고 하는 내가 없으므로써 공의 공(Emptiness of Emptiness)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돈오점수를 의식하는 돈오돈수는 어떤 의미에서 공을 깨치는 지혜안에서 돈오점수와 함께 不一不異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돈오점수의 과정에서 돈오돈수를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조스님께서 돈오돈수나 증오의 경지에 대해서 그렇게 별로 언급하시지 않는 이유는 증오는 어떻게 도달되어야 되는 곳이 아니고 수행이 잘 익어진 상태에서 오는 것이므로 수행과 증오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수행이 따르는 깨침에 대해서 보조스님은 <깨친 다음 오염되지 않는 공부일 뿐 아니라 만행을 함께 닦는 것이니 자신과 남을 함께 제도하는 것이다. 요즈음 참선하는 이들이 불성만 투철하게 보아버리면 이타행이 저절로 원만하게 성취된다고 하나 목우자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다.>라고 하셨다. 보조스님께서는 깨달아야 될 이유 곧 부처가 되고 싶은 이유는 중생을 제도하고 이타행을 베풀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점수를 강조하시는 보조스님은 이타행을 베풀수 있다면 증오에 도달할 필요나 부처가 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 즉 이타행, 자비가 증오의 표현이니까.
부처님 당시 인도불교는 출가승을 중심으로 한 수행중심의 불교로 깨달음과 고통의 멸이 그 목표였다. 그러므로써 독각승처럼 자신의 깨달음이 이타행보다 더 중요하였다. 그것에 반대하여 대승불교는 출가승보다도 재가불자들 위주로써 수행보다는 믿음, 각성보다는 보살의 이타행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상적인 인물로써 보살의 수행이 중요하게 되므로써 출가승의 위치가 다시 대두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불교는 출가승들에게 열려진 엘리트적이고 특수한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왼종일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은 재가불자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신 보조스님은 그러한 특수적인 간화선보다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육바라밀을 수행하므로써 지혜를 얻어 이타행을 할 수 있는 돈오점수설을 주장하셔서 재가불자들에게 문을 다시 열어주시려는 의도를 지니셨다고 볼 수 있다.
티벳 승려들의 기강의 문란을 개혁하기 위해 겔륵파를 창시한 종가파에 의하면 경대승과 만트라대승에 있어서 최고의 목표는 자신의 깨달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가 됨은 다른 목표를 성취하기 수단에 불과하다고 했다. 다른 목표는 곧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보살행의 전과정은 대자비로써 모든 중생이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게 하는것이며 궁극적인 상태인 부처는 곧 그들이 이타행을 하도록 해주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보살의 주된 의도는 타인의 안녕을 위해서 자신의 깨달음을 구하니 그들의 법신과 색신 중 色身을 취함은 그러한 육체적인 몸안에서 타인의 복지가 성취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를 완벽하게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사랑과 자비로 보았다.
보조스님은 바로 그 사랑과 자비를 가능케 하는 방편으로 돈오점수를 택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점수를 택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좋은 스승을 만나 우리의 참 본성을 보고 그 본성을 본 지혜에 의지해서 닦고 닦아 무시습기를 제거하여 이타행을 이루도록 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면 여지껏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돈오점수의 돈오와 증오와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을 나는 돈오점수의 돈오는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음을 중생의 입장에서 보는 지혜이고 증오는 그것을 부처의 입장에서 보는 지혜라고 생각해본다. 그러한 구경각 안에는 돈오점수를 포함하는 후득지의 한결같은 여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풍토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진리 또한 그것이 표현되는 시대의 역사적 배경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것이 불교나 기독교 혹은 회교의 가르침으로써 나타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 또한 그의 體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의 用은 시대적, 역사적 배경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그것에 맞추어 나타나게 마련이다. 보조스님이 사신 고려시대에서는 보조스님 보시기에 돈오점수가 더 필요하고 성철스님이 사시는 20세기에는 돈오돈수가 더 필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신문명에 비해서 너무도 앞장서 가는 물질문명의 균형을 잃은 발달은 21세기를 향하는 이 시대를 개인주의적 탐욕의 시대로 만들어 물질에 비해 사람의 목숨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보다 못하게 가치없이 되어 버렸는데 깨우침을 강조하는 가르침보다 오히려 이타행을 강조하는 보조스님의 가르침이 이 시대에 더 시급히 요청되지 않을까.수심결을 읽어가면서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철스님께서 선문정로를 쓰신 것은 스님의 커다란 자비행으로써 보조스님의 가르음을 참으로 옳바르게 보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박성배 교수님의 귀한 논문 또한 나의 어두운 눈을 뜨이게 해준 계기가 되어 감사를 드리며 미주현대불교에 좋은 논문을 실려주셔서 나에게 배울 기회를 주신 여러 교수님께도 독자로써 감사를 드린다.
1992년 4월호. 24호
--------------------------------------------------------------------------------------------------------------------------------------------------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관련 신문기사 (92년 3월 16일자 법보신문)>
"두 스님 가르침 이념화 곤란"
在美 이경재씨, <돈점오수론....>서 당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어쩌면 영원한 논쟁을 불려일으킬지도 모르는 성철스님과 지눌스님의 이 주장은 과연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성철스님과 지눌스님이 그들의 사상전개에 있어서는 비록 다른 양태를 보이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구도자자적 삶은 모두 '誠'에서 만날 수 있으며 그들 자신들이 처한 상황안에서 보여주는 '誠'의 태도는 모두 절실한 것이기에 존경스럽기까지 하다."는 내용의 글이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
화제의 글은 스토리부룩 뉴욕주립대 한국학과 강사인 이경재씨가 [미주현대불교]1992년 2월호 3월호에 기고한 '돈점오수론에 대한 放外者의 견해'.
자신을 불교에 대해 약간의 이해를 갖고 있는 철학자요 종교학자라고 소개한 李씨는 "역사적으로 불교가 불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한국문화사의 한 전통에 속할 것일 진대 그 전통을 존중하는 한국인의 한사람으로써 나도 논쟁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면서 성철과 지눌이 각각 다른 철학적 사유구조속에서 사상을 전개시키고 있음을 소개했다.
李씨는 "성철을 읽어 가노라면 우리는 性이 사무치어 한마리 白虎가 된 호랑이 너털웃음을 듣게 된다. 마조가 달리고 백장이 꿈틀대는 성철의 맥박은 자상한 지눌의 천지이기(因地而起)의 처방을 거부한다."면서 "성철의 사상은 강자의 철학으로 땅에 넘어져 코가 깨져도 껄껄대는 장부의 철학이요 상근기의 쳘학"이라고 성철스님을 평가했다.
李씨는 또 "지눌을 읽노라면 우리는 살아 숨쉬는 따뜻한 스승을 만나게 된다. 앎이 태산을 버금해도 모자라 다 겸하며 배우고 정진하는 후학의 사표, 근기따라 가르치는 한국인의 자상한 스승이기에 지눌의 끊임없는 의 마음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지눌스님을 치하했다.
그러나 李씨는 두 스님의 제자들이 진정으로 이들 스님을 위한다면 "스승의 교서를 이데올로기화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誠에서 하나가 되는 그 한마음을 배워야 할 것"이라며 "心卽佛이요 我是佛을 悟하는 것이 불교일진대 스승의 마음은 곧 우리들의 마음이요 의 마음이며, 그들의 정신, 곧 의 정신이 우리의 정신이 돼야한다"는 말로서 방외자의 견해를 피력했다.
<天> 1992년 4월 24호. 11page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