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두들마을 -5-
정부인 안동장씨와 음식디미방 책
영양의 한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온 요리책이 있다.
이 책의 이름은『음식디미방』
고어에서는 '지'를 '디'로 발음했기 때문에 '지미방(知味方)'이 '디미방'이 된 것이다. 영양의 정부인(貞夫人) 장(張)씨(1598~1680)
가 쓴 책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여성이 쓴 최초의 요리책이다. 자신의 경험을 한글로 보기 쉽게 기록해 놓은 이
『음식디미방』을 통해 330년 전 조선시대 양반가의 음식 문화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현재 『음식디미방』이 보관되어 있는 곳은 경북대학교 도서관고서실(古書室), 이 책의 표지에 정부인 장씨의 남편 이시명이
나중에 책의 외형적 품격을 높이느라 '규곤시의방(閨壼是議防)'이라 써 붙여 놓았는데 '규곤(閨壼)', 즉 규방에서 옳게 풀이한
방법이라는 의미다. 이 표지를 넘기면 장씨가 한글로 직접 쓴 '음식디미방'이라는 책이름이 나온다. 여러 가지 음식과 그 조리
방법이 빼곡이 기록된 이 책은 그 글씨체부터 눈길을 끈다. 종이 가득 써 내려간 글씨가 반듯반듯해 책을 쓴 이의 정성과 성품이
오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음식디미방』은 각각의 음식에 대한 조리 과정이 구체적일 뿐 아니라 국수와 만두를 포함한 면병(麵餠) 류 15종, 고기와 생선을
아우르는 어육류 46종, 채소와 과자를 모아 놓은 소과(蔬果)류 31종, 그리고 주류 53종 까지 모두 146가지 음식을 체계적으로
정리 · 분류해 놓았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원하는 종류의 음식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어떤 재료로 무슨 음식을 어떻게 만들어 먹었는지를 알 수 있는 생활문화사적 가치가 큰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음식디미방』을 처음으로 현대어로 풀이한 이는 황혜성(궁중음식 무형문화재 제38호)씨 이다. 궁중음식에 경도 되어 있던
황씨는 이 책을 통해 당시 시골의 양반 음식에 눈뜨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엔 이『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음식 중 46가지를 직접
만들어 보고 슬라이드 자료까지 남겨 두었다.
책 처음에 나오는 요리는 만두와 국수류인데 재료나 모양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석류 모양의 만두인 석류탕, 요즘의 찐빵 같은
상화(霜花), 그리고 숭어로 만두피를 만든 숭어 만두도 있다. 그 외에 밤설기, 앵두와 설탕을 졸여서 응고시킨 요즘의 젤리 같은
앵도편도 있다.
육류 중엔 특히 개고기와 생치(꿩고기) 요리가 많은데, 농사에 소가 귀하게 쓰이던 시절에 비교적 흔한 개와 꿩이 육류 음식을
대신한 것이다. 가령 국수를 해먹어도 오미자국에 띄운다든가, 떡을 만들 때도 석이 가루 같은 귀한 재료를 많이 쓰는 등 특별한
날 맛있게 해먹는 별미들이 많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또한 이 책에는 음식을 보관하는 요령까지 적혀 있는데, 가령 복숭아를 밀가루죽에 넣어 두면 겨울에도 싱싱하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복숭아는 숨을 쉬면서 영양이 소모되고 수분이 날아가는데 이걸 밀가루죽에 넣어 두면 수분 이탈을 막고, 설사 수분이
빠져나가더라도 다시 흡수되며, 복숭아가 밀가루죽의 탄수화물을 빨아들여 복숭아와 밀가루풀 사이의 영양 균형을 맞춘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가지를 보관할 때엔 뽕나무 재에 넣어 두라고 했는데 이는 재의 살균력을 이용한 것이며, 생(生) 전복을 참기름에 넣는
것은 공기를 차단시켜 전복을 싱싱하게 보관하기 위함이다. 그런가하면 '비시(非時)나물 쓰는 법'처럼 겨울에 야채와 과일을
즐기기 위한 지혜도 담겨 있다. 마굿간 앞에 움을 파고 거름과 흙을 깔아 쉬엄취 · 산갓 · 파 · 마늘을 심고 그 움 위에 거름을 더
퍼부으면 움 안이 더워져 그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 겨울에도 쓸 수 있다고 적혀 있다. 당시에도 요즘의 비닐하우스 기법을 이용해
겨울철에 싱싱한 채소를 먹었던 것이다.『음식디미방』은 이처럼 당시 양반가에서 즐겨 먹던 146가지의 음식과 음식을 보관하는
다양한 지혜까지 꼼꼼히 적어 놓은 일종의 요리 백과사전인 셈이다.
『음식디미방』에는 특히 술 종류가 유난히 많은데 146가지의 음식 중 1/3 가량인 53가지가 술이다. 안동소주로 유명한 소주,
배꽃 피는 시기에 담는 이화주, 대나무 잎을 술독 위아래에 깔아 댓잎의 향과 색을 내는 죽엽주 등은 요즘에도 전승되고 있다.
대개 술은 보름 이상씩 숙성시키는데 아침에 담가 저녁에 먹는 '일일주'도 있다. 당시 양반가에선 재료나 숙성 기간별로 상당히
다양한 술을 만들었 던 것이다.
『음식디미방』에 가장 많이 소개된 술은 천주다. 전통주는 제조법에 따라 크게 청주·탁주·약용주·합주·소주 등의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고급주에 속하는 청주는 여러 번 걸러 맑게 뽑아내 '맑은 술'로도 불리며,『음식디미방』에는 24종 정도가 소개되어
있다. 짧은 기간에 숙성시킨 뒤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마시는 탁주는 청주에 비해 급이 낮은 술로 일일주가 여기에 속한다. 그 밖에
약용주로는 오가피주·차주, 합주로는 과하주(過夏酒-소주와 약주로 섞어서 빛은 술), 소주로는 밀소주·찹쌀소주 등이 소개 되어
있다.
지금도 안동의 일부 종가에선 전통주를 만든다.『음식디미방』에도 소개되어 있는 안동 소주도 그중 하나다. 소주는 증류주의
일종으로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반 청주보다 독해 여름철에도 잘 상하지 않기 때문에 1년 내내 술을 보관해야
하는 양반가의 여름용 술로 사랑을 받았다. 소주 외에도 정월에는 솔술, 2월에는 매화주, 3월에는 진달래술, 4월에는 난초뿌리술,
5월에는 배술, 6월에는 더덕술 등 양반가에선 사시사철 때마다 다양한 술을 빚었다. 정부인 장씨가『음식디미방』에 53가지의
술 제조법을 소개해 놓은 것도 조선 중기의 이런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인 장씨가 나이 일흔에 쓴『음식디미방』의 뒷장에는 이 책을 잘 보관하라는 당부의 말이 씌여 있다. 그 첫머리에 "이리 눈이
어두운데"라고 쓴 것처럼 침침한 눈으로 평생의 경험을 되살려 이 책을 써내려간 것이다. 대대손손 가문의 음식 조리법을 전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쓴 이 책은 정부인 장씨가 80평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정표이기도 하다.
『음식디미방』의 146가지 음식 중 16가지 음식 이름 밑에는 '맛질방문(方文)'이라고 적혀 있다. 맛질은 정부인 장씨의 외가인데
장씨의 외갓집이 있었다는 경북 예천읍 제곡동에는 '맛질마을'이 있다. 이 맛질에는 안동 장씨의 외가인 안동 권씨가 살았는데
지금도 일부 안동 권씨들이 남아 있고 정부인 장씨의 외가 집터도 전해온다. '맛질방문'은 그러니까 정부인 장씨가 어린 시절 친정
어머니에게 듣고 배운 요리인 셈이다. 장씨 부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요리에 대한 지식을 모두 동원해 이 책을 쓴 것이다.
한문 실력이 뛰어난 정부인 장씨가 굳이 한글로 써 내려간 것은 후손들이 늘 가까이 두고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가족과 사회 공동체에 대한 정부인 장씨의 마지막 봉사가 이 요리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146가지 음식의 조리법을 한 자 한 자
꼼꼼하게 써 내려 갔을 부인은 이 한권의 요리책에 자신의 치열한 삶을 고스란히 담아 놓았다.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지기를
바랐던 정부인 장씨의 간곡한 마음과 바람은 『음식디미방』구절마다 따스하게 스며있다.
♦정부인 안동장씨(1598-1680)는 임진왜란이 끝나지 않은 1598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의 봄파리 마을에서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아버지 경당 장흥효와 어머니 권씨부인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정부인 안동장씨는 아버지에게 “소학”과 “십구사략”등을
배웠다. 40대의 아버지 경당 장흥효는 당시 영남사림의 최고의 학자였고, 수많은 학인이 경당에게 배움을 청하였다. 정부인 안동
장씨는 이러한 가운데 학문을 틈틈이 배웠으며 특히 학인들이 모르는 부분까지 정부인 안동장씨가 깨우쳐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19세 때 정부인 안동장씨는 아버지 장흥효의 수제자인 8살 연상의 이시명과 혼인을 치른다. 이시명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해의 딸과 혼인한다. 혼인 후 정부인 안동장씨는 전 부인인 김씨 부인의 자녀 1남 1녀 포함하여 모두 7남 3녀를 둔다. 정부인
안동장씨는 퇴계의 학통을 잇는 학봉 김성일 - 경당 장흥효 - 석계 이시명 - 갈암 이현일 - 밀암 이재로 이어지는 중심에 있었던
여성이었다. 말하자면 경당 장흥효를 아버지로, 석계 이시명을 남편으로 갈암 이현일을 아들로 둔 딸이자 부인이자 어머니였다.
조선 후기 여성은 성리학적 인성론으로 말미암아 여성은 편벽한 성격을 가졌다는 편성론이 일반화되었다. 내외구분이 심화하여
남자는 정치사회활동에, 여성은 가사와 직조, 육아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럼에도 농사와 같은 생산 활동은 남녀가 공동으로
부담하게 됨으로써 여성에게 사회적 부담이 편중된다. 17세기를 살다간 정부인 안동장씨는 이런 어려운 사회적 정황 속에서
정부인 안동장씨경북 안동군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는 참봉을 지내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친 성리학자였으며, 어머니는 첨지 권사온의 딸이었다. 안동장씨는 19세에 영양군의 재령이씨인
석계 이시명(李時明)의 계실로 출가하였다. 이시명은 전실 김씨로부터 일남일녀를 얻었으며 둘째 부인인 장씨로부터
육남 이녀를 두었다. 특히 셋째 아들 이현일은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貞夫人安東張氏實記)』를 썼는데, 이 책을 보면
부인의 행실과 덕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안동장씨는 회임함에 언행을 옛 법도대로 하였고 자애로움과 엄격함으로 자
녀들을 훈도하였으며, 서화와 문자에 뛰어나 훌륭한 필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흉년 기근으로 민생이 참혹할 때 굶주린 사람의
구휼에 정성을 다했다. 사방에서 모여든 행인이 집 안팎을 메워 솥을 밖에 걸어 놓고 죽과 밥을 지어 먹이기도 했고, 의지 없는
늙은이를 돌보았으며 고아들을 데려다가 기르는 등 인덕과 명망이...m.term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