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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세상] 20세기 대한민국 10대 서예가 10인
A. 解放前 近代書家 5名
(1) 안중근 (응칠, 1879∼1910)
안중근 의사가 남긴 붓글씨는 대부분 1910년 2월부터 순국하기 직전인 3월 26일까지 뤼쑨감옥에서 쓰여졌으며, 모두 230여 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파악된 유묵은 40여 점에 달하며, 대체로 해서나 해서에 가까운 행서체로 되어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논어> 제14편의 글귀로 국내최대 자연석에 음각되어 남산에 세워져 있는(높이10m) 보물 제 569-5호 <견리사의 견위수명>(동아대학 소장)과 보물 제1150호로 지정된 <위국헌신 군인본분>(안중근 의사 기념관 소장) 및 보물 제1150-1호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보물 제569-11호, 제569-12호 등 국보급 유묵이 전해지고 있어 안의사의 충정 어린 애국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들 유묵에는 한결같이 낙관 대신 1909년 1월 애국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손가락을 자른 왼쪽손바닥 도장이 찍혀 있어 안의사의 비장한 의지를 느끼게 한다.
안의사의 필묵은 서예적인 가치는 물론 글에 담긴 애국정신과 역사적인 교훈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서예의 시대가 아닌 올곧은 선비정신이 서품의 우열을 좌우하던 시대의 한 전형으로써 안의사의 붓글씨는...
대한제국의 민족혼 그 자체로 충절의 내용과 먹빛 또한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고 민족이 노예로 전락하려는데, 진정한 문필정신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우리들에게 재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2) 김구(白凡, 1875∼1949)
3.1독립운동에 가담한 뒤 그 해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하며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대륙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을 맞아 귀국하기까지 4반세기동안 노심초사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통일에 앞장선 정치인이었다.
백범 선생의 붓글씨는 인생을 통해 국내외로 많은 수를 남기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충절의 정신으로 필획을 이루지 않은 작품이 없다. 만년의 수전증도 운필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을 만큼 선생의 일자 일획은 鐵骨을 이루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국보적 보물로 지정되어 있듯 백범 선생의 遺墨이라고 해서 국가의 보물에 값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세기 10대서예가선을 마치고 원로 평론가 석도륜 선생을 찾아 10여명의 명단을 보인 적이 있다.
선생은 "대체로 맞는다"는 한 말씀만 하고 나서 "우남 이승만도 넣어줘" 하던 것이었다. 이대통령이 처음부터 논의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서예가에 '민족정기'를 염두에 두다보니 백범 선생이 들어가고 자연 이박사가 빠지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독립운동가 건국공로와 상관없을 수도 없으나 만년의 실정과 독재로 인한 4.19 학생의거를 초래한 장본인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도 응시한 바 있는 당대의 명필 중의 일인이었다.
마치 20세기 중국의 10대 걸출 書法家에 뽑힌 모택동 주석의 기백 있는 초서가 중정 장개석 총통의 문약한 해서에 비교될 수 있는 것처럼, 굳이 백범의 필묵과 비교한다면 골기 면에서는 우남이 뒤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吳世昌(葦滄, 1864∼1953)
1919년 3월 1일은 기미독립운동으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린 날이다. 33일 민족대표 중에는 위창 오세창 선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전의 위창은 1886년 <한성주보>의 기자를 지냈고, 1902년에는 개화당사건으로 잠시 일본에 망명하기도 했다.
돌아와서는 <만세보>와 <대한민보사>의 사장으로 개화운동과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의 개화사상과 서예/전각 및 저술활동의 배경에는 한어역관으로 淸國을 13차례나 내왕한 부친인 역매 오경석(亦梅 吳慶錫)의 영향이 지대하였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위창은 일찍이 그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소장품의 감식과 연구를 착수하였으며, 전서체와 전각예술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천착한 보람이 있어 그를 두고 '근/현대 전각의 개창자'로, 혹은 '한국미술사 연구의 아버지'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저서 가운데 역대서화가의 사전격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과 <근묵(槿墨)>, <근역인수(槿域印藪)>,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畵彙)>등이 있다. 이처럼 문필겸전의 다양한 그의 면모는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해 보인 근대서화사 내지 한국미술사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로 기록되고 있다.
(4) 김규진(海岡, 1868∼1933)
평남 인으로 18세에 유학하여 역대 중국 명첩을 두루 연구하고 돌아와 왕세자의 시부가 되어 서예를 가르쳤다. 서는 五體에 모두 능하였고 畵는 산수, 화조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죽의 대가였던 만큼 저서로 <난보>와 <죽보>를 남겨 후학들의 교본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해강의 묵난과 묵죽은 그의 초서체를 연상하리만큼 속도감과 리듬감이 돋보인다. 그이 글씨는 지금도 전국 사찰에서 현판이나 주련 등 쉽게 만날 수 있으며, 특히 금강산 구룡연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 세 자는 동양 최대의 글자로 유명하다.
1911년 서화미술회 강습소가 처음으로 생기고, 1915년에는 김규진 독자적으로 서화연구회를 설립하여 서와 文人畵(사군자 위주)를 3년제 수업과정의 학원체제로 운영하였다. 1918년 제1회 졸업생 중에는 뒷날 국전 등에서 문인화가로 활약한 송은 이병직이 포함되어 있었다.
20세기 후반의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미술가 고암 이응로 역시 그의 제자였다. 해강은 1922년 제1회 선전부터 9회까지 줄 곧 심사위원을 맡을 만큼 일제하에서도 비중 있는 예술가로 활동하였으며, 서화교육가로서도 크게 공헌한 선각자의 한 사람이었다.
(5)서병오(石齋, 1862∼1935)
석재는 조선말기 영남이 낳은 기재이자 걸출한 서화가였다. 시대의 풍운아 대원군이 대구에 신동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불러 만나니 그 때 석재의 나이 17세였다. 운현궁에서 함께 시를 짓고 서화와 바둑으로 소일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대원군은 그의 호 석파(石坡)에서 한 자를 따서 석재라는 아호를 하사할 만큼 그의 재주를 알아주었다. 자고로 천재라야 천재를 알아본다고 하였던가, 석재는 과연 天質이 빼어나서인지 여덟 가지 재주에 능통하다하였다.
하여 그의 별명은 팔능거사(八能居士)로도 통했을 정도이다. 글씨는 석파를 통한 추사체 영향을 받았으며, 그림은 <개자원화보(介子園畵譜)>와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석재는 서화문화의 창달과 후진양성을 위해 가산을 기울여 1922년 대구에서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서화교육 뿐만 아니라 한시를 현상모집 심사하여 1등에서 10등으로 구분하여 상금을 주기도 하였다.
당시 대구에서 시회가 열리면 전국으로부터 김규진, 김돈희, 고희동, 오세창, 황용하, 김유택, 허백련, 지차한 등 당대 최고의 시인 묵객이 다 모일만큼 석재는 석화계의 영수로서 영남뿐만 아니라 조선8도 문화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본과 두 차례의 중국 묵림계를 주유하여 명성을 날렸다. 대원군의 권유로 58세 때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교류한 제백석, 왕석, 포작영 등 거장들 외에도 손문 같은 정치인도 교류하였으며, 그들로부터 화국지재(華國之才)란 칭송을 받았다.
B. 解放後 現代書藝家 5名
(6) 손재형(소전, 1903∼1981)
소전은 시/서/화를 두루 겸한 전방위적인 예술가로 한국 현대서예의 창시자였으며, '추사 이후의 일인자'로 불리운다. 일제치하에서 사용하던 서도라는 명칭에서 탈피하여 '서예'라는 새로운 용어로 바꿔 쓰도록 함으로써 서를 현대적인 예술개념으로 승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가학으로 조부 玉田으로부터 안진경 해서를 익힌 후, 양정고보에 입학하여 당시 교장이었던 석정 안종원에게서 전서와 초서를 배우고, 성당 김돈희로부터 황산곡과 예서를, 오세창에게는 전각과 서화 감정을 배웠다.
그는 외국어학원 독어과를 졸업하고, 잠시 북경에 유학하여 당대 최고의 갑골학자 나진옥에게 문자학을 사사한 바도 있다. 1945년 조선서화동연회를 조직, 회장이 되었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창설되자 서예수교가 되어 정환섭, 서세옥, 조수호 등 제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는 성당문하에서 황산곡 서법을 계승, 그것을 다시 그의 高弟 김기승에게 轉敎, 행법 전법에 있어 독보경을 일구었으며, 특히 한글서법을 전획필법으로 전개시켜 초유의 성황을 보았는데 한글서법을 繼走하는 자로 서희환이 있다.
이른 바 이 나라 서단 및 국전서예부를 망라하는 일대권위자로서 전후 30년 그의 영향을 입지 않은 층이 한소(罕少)할 정도이다."(<한국현존서예가10인선> 석도륜 평문 중에서 발췌). 그는 2차대전말 목숨을 걸고 일본 동경으로부터 지금은 국보가 된 추사의 <세한도>를 찾아온 일화로도 유명하다. 예술원 부회장, 예총회장, 민의원과 국회의원을 지냄.
(7)金忠顯(一中, 1921∼)
일중은 20세기 한국대표서예가 중 빠질 수 없는 단골작가로 여기 10대가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왕조 고종때, 형조판서를 지낸 안동의 김석진의 증손자로 세도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중심이 하나여야 된다'며 일중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경성 삼흥보통학교 시절인 15세 대는 집안인 영운 김용진으로부터 안진경의 <다보탑>등을 배웠다. 어릴 대부터 가학으로 익힌 글씨는 그의 아호가 의미하는 바와같이 평생 문질빈빈의 학자적 태도로 교육과 창작을 겸수하였으며, 국한혼용체와 예서필의 섞은 행초서가 일품이다.
일중의 작품세계에 대해 평론가 석도륜에 의하면 "안노공은 그의 가전인 듯하고 예법은 <조전비>등 한예를 밑자리한 것 같으나 행예와 더불어 완연 쇄탈무애(灑脫無碍)로운 자가일성, 더구나 정운판본서체의 한글서법은 응현과 더불어 초유의 창안자이다."
(<계간미술>1978 제5호>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중은 국문판본체. 고체란 용어는 일중이 붙인 이름이다)연구 이전에 일찍이 궁체연구에 몰두하여 남 먼저 저서를 내는 등 지속적인 한글서체 개발에 미증유의 업적을 남겼다.
예술원 회원이며, 그의 저서로는 <우리글씨 쓰는법(1942)>, <우리 글씨체(1945)>, <중등글씨체(1946)>, <중학서예> 및<고등서예>(1955), <초등글씨체 쓰기(1956)>, <일중서예강의(1963)>, 편저<국한서예(1970)> 등이 있다.
(8)柳熙綱(劍如, 1911∼1976)
검여는 인천출신의 서예대가로 동정 박세림과 쌍벽을 이룰 뿐만 아니라, 국전 초기에는 공히 소전의 영향을 받았다. 명륜전문을 졸업하고 1938년 중국유학, 북경동방문화원에서 1년간 서화 및 금석학을 수학했으며, 해방직전에는 한 때 상해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 공부를 한 적도 있다.
1945년 귀국하여 중국어판 <한성일보> 기자를 거쳐 인천시립박물관장과 시립도서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제2회(1953) 국전에서 서양화부 유화과 서예부를 출품하여 각각 입선한 바 있다. 필자가 80년대 초 검여의 작품세계를 논하였다.
그러면서 "젊을 때 색을 좋아하셨는지 서양화도 몇 점 그리시고...." 한 대목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검여는 국전 5회, 6회 연속 특선(문교부장관상)을 거쳐 1958년에 추천작가, 50세 되던 1960년 초대작가가 되었다.
그는 북위와 예서를 섞은 조지겸과 소동파, 황산곡을 좋아하였으며, 특히 유석암을 즐겨 썼다. 그는 스스로 장대하고 힘찬 검여 서풍을 이루었으나 애석하게도 만년 오른쪽 수족을 못쓰게 되어 좌수서로 대신했다.
한학자 임창순은 "강유위의 <광예주쌍집>의 서론에 공명하고 북위의 웅강기초한 골수를 완전히 자기물로 만들기까지의 노력을 쌓아 전중하면서도 호방한 개성을 이루기에 이른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하지만 완강한 보수주의적 기질과 성격의 검여는 법파의 영수이자 김응현의 스승격으로 여초의 초기 육조서와 과작인 전각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저서에 <중등서예>와<고등서예>(1965)가 있다.
(9) 이철경(갈물, 1914∼1989)
갈물 이철경은 월북한 그의 언니인 봄뫼 이각경과 동생 꽃뜰 이미경과 더불어 세 자매 모두 우리 글씨예술 발전에 기여한 특출한 한글서예가들이다. (1991년 5월, 북경에서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코리아선화전>과 토론회장에서 남북서예인이 한 자리에 만났다.
그때 북쪽 서예가 최용진으로부터 그의 평양예술대학생 시절 이각경 선생으로부터 궁체를 배웠다는 말을 직접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부친 이만규는 서울의대 전신인 대학의원 부속의학교를 졸업하고 외과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교육자로 변신, 3.1만세운동 참여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로 <가정독본>과 <조선교육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따라서 그들은 가친으로부터 크게 영향 받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갈물은 네 살 때부터 부친에게 <천자문>으로 한문서예를 배웠다고 한다.
1928년 15세부터 한글서예를 시작, 60년의 세월을 이 나라 궁체글씨 연구와 교육에 일생을 받친, 사임당선생 이후 500년 역사에 가장 존경 받을만한 여성 예술가임을 아무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실제 1969년 주부클럽이 제정한 제1회 신사임당상을 수상하였으며, 국민훈장 목련장(1974)과 외솔상(1979)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의 업적은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목적으로 한 갈물 한글서회 창설(1958)이다.
갈물 선생은 갔어도 40여 년을 헤쳐 온 갈물의 물결은 그 무늬만큼이나 아름답기만 하다. 저서로는 최초의 우리 글씨교본인 <궁체쓰는법>(상권, 1933)을 비롯, 1946에 발간된 <초등글씨본>과 <중등글씨본> 각3권, <한글글씨체>2권, <한글습자 가정편지틀>(1947) 등 다수가 있다.
(10) 李基雨(鐵農, 1921∼1993)
철농 이기우는 교육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세정은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한글학회 임원과 세종대왕기념 사업회회장을 지낸 진명여고 교장이었다. 철농이 서예가이자 전각가로 성장하게 된 배경도 그의 가계와 무관하지 않다.
철농 선생의 글씨 공부의 사부였던 무호 이한복은 부친이 교장으로 있던 진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니, 그의 첫 한묵 인연은 이렇게 맺어진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약관에도 못 미치는 15세(1935)때의 일이다.
당시 이한복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한국 서화계의 엘리트로서 전각계의 태두 오세창과도 교유하고 있었던 터로, 1944년 그를 위창에게 소개, 정식 제자가 되었다. 철농이라는 호도 전각의 스승인 위창이 내린 것이다.
1945년 9월 '한국서예인의 합심과 민족예술운동'을 목적으로 조선서화동연회(회장 손재형)가 창립되고, 그 이듬해에 8월 해방전람회가 현재의 신세계 백화점화랑에서 개최되었을 때, 오세창, 안종원, 김용진 등 원로들을 비롯하여...
서예가로는 손재형, 김기승, 황용하, 원충희 등과 더불어 이기우도 참가하고 있다. 이것이 철농의 공석적인 서단활동의 시작이 된 셈이다. 초기의 철농 전/예는 무호의 영향을 받았으나 위창으로부터 전각을 배우고 나서는 전각의 장법에 영향을 받았다.
하여 그만의 독특한 현대적 조형어법을 터득하게 된다. 전각 역시 처음에는 위창을 통해 오창석을 배우고 진한을 거쳐 자성일가했다. 필자가 직접 참관한 1972년 이기우 陶刻書藝展은 도자와 전각 그리고 불이라는 자연이 만나 이루어낸 철농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던 감명 깊은 전시였다. 저서로는 <鐵農印譜>(제3권197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