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강렬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6월 영국 워크샵 마지막 일정은
런던으로부터 남쪽에 위치한 Bexhill 지역 de la war
pavilion에서 진행된 <Willem Sandberg from type to
image> 전시였다. 갤러리를 많이 방문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생소한 이름일 수 있는 Willem Sandberg(1897-1984, Typographer & Graphic designer). 그러나
영국의 작은 바닷가 지역에서 열린 주인공의 첫 번째 회고전은 지역의 규모를 뛰어넘는 너무도 멋지고 훌륭한, 그리고
알찬 전시였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네덜란드 Stedelijk Museum 디렉터였던 Willem Sandberg는 전시의 첫 얼굴인 포스터를 직접 작성하며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 새로운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인물이다. 전시는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그의 주요 작품을 아우르며 어떻게 Sandberg가
단순한 텍스트에 불과한 문자를 독특한 이미지를 가진 그래픽 언어로 변형시키는지에 대해 보여주었다. 그가
가진 황금 눈과 재능이 묻어나는 전시 포스터는 당시 대중들과 세상을 자신들이 가진 촉으로 읽어내던 예술가들의 작품 사이에 연결고리가 되어 시대를
넘어 회자되는, 꼭 봐야 할 전시의 인 입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시장 입구 /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단하게 기획된 전시였다>
<Willem Sandberg의
모습. 그는 직접 전시포스터를 제작하며 철자가 주는 문자 조형을 보여주었다>
Sandberg는 1897년
네덜란드, Amersfoort지역에서 태어나 암스테르담에서 미술을 공부하였다. 젊은 시절 여행한 스위스, Herrliberg지역에서 인쇄업자의
견습생으로 일했던 그는 1927년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 1920년대
오스트리아의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가 만든,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최초의 기호인 아이소타이프Isotype 시스템을 접하였다. (참고로 아이소타이프는 오늘날에도 광범위하게 쓰이는데 주로 도로표지판, 지하철
내부, 경기장, 호텔, 관광지
등에서 언어를 초월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용, 그래픽 심벌(graphic
symbol)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픽토그램(pictogram)이란 용어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 이때 그는 바우하우스를 방문하여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인 나움 가보와도 인연을 맺는다. 이후 암스테르담에 돌아온 Sandberg는 그가 배운 인쇄기술과
노이라트의 아이소타이프를 활용해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1928년 그가 가진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Stedelijk
Museum과의 오랜 관계가 시작된다.
그가 기획한 전시 포스터들과 카달로그에 집중된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은 정해진 형식을 거부한 Sandberg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즐겁고 과감하며, 때로는 파괴적인 것들을 존중하였던 그는 정규 교육 없이 그가 아는 모든 것들을 경험과 실험으로부터 얻어냈는데, 전시포스터에서 보여지는 샌드버그의 독창적인 디자인- 철자의 폰트, 암호 같은 모습, 그리고 찢겨진 종이의 거친 윤곽선등이 기반이 되어
이루는 비대칭의 타이포그래피-은 관람객들이 그만의 작품임을 단번에 알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장치였다.
<Poster, 1949 / 유명 작가들의 이름이 새겨진 이 포스터는 달력에 제작이 되었다. 주간 아이돌 순위를 매기는 것 같은 디자인은 1940년대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것 같다>
샌드버그에 의해 만들어진 전시 카달로그들, 헨리무어와 피카소 카달로그가 눈에 들어온다.
헨리무어
포스터 / 1949년
현재 De La Warr Pavilion 에서 전시중인 the
Stedelijk Museum에서 진행한 전시포스터들.
모두 샌드버그 작품이다.
1945년 전쟁 후 Stedelijk
Museum 디렉터로 임명된 그는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 “뮤지엄에서
발행된 모든 것들, 심지어 카다로그 조차도 작품과 같은 성격, 생명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한 그의 말에, 작품이 뿜어내는
영혼의 단위가 그의 손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그의 섬세함과 꼼꼼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는데
매주 일요일마다 하루를 꼬박 투자하여 아이디어와 스케치 디자인 연구는 물론이고, 한 장의 카달로그 조차도
정교함을 위해 50시간에서 100시간을 투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De La Warr Pavilion에서는 시골의 작은 지역임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전시공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공간과 긴 벽을 멋진 포스터들이 다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축적된 인상이 가히 전시공간을 빛으로 채우는 듯 하였다. 샌드버그는 화려하거나 정해진 틀에 의해 포스테를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Cheerful
Simplicity”를 내세우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자유롭게 디자인을 뽑아냈다. 이러한
비정형에 대한 궁극적 표현은 찢겨진 글자와 모양으로 나타났는데 1946년 디자인한 OOG magazine 의 표지는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스스로 “anti-perfectionist”임을 자처하며 오래된
종이를 재활용하거나 가장 경제적인, 저렴한 프린팅 해결책을 발견하는 모습은 “I don’t like luxury in typography, I prefer the rough in contour
and surface, torn forms and wrapping paper.” 라는 그의 말에 대한 실천이자 즐거움이었다. 시각예술 분야의 많은
다른 20세기 예술가들처럼 샌드버그 또한 예술이 일상의 삶과 통합 되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의 생각을 삶과 일에
접복한 샌드버그는 시각 소통을 디자인하는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의 미적 요소로 관람객들을 연결시키면서
말이다. 디자이너이자 뮤지엄 디렉터로서 멀티역할을 수행했던 그는 자신의 목표였던 <예술가와 대중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자극하는 것>을 이루고 삶의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었다. 만약 이것이 오늘날 너무 평범하게 생각이 된다면, 우리는 샌드버그가
그 예전에 이를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 부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낯설게 들어간
전시장이었지만 그곳에 걸린 작품들은 예술가와 대중의 연결고리가 되어 또 다른 인입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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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에 진행된 워크샵 후기를 이제야 마무리 짓습니다.
빨리 후기를 올렸어야 했는데 늦어져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네요.
다 기억하고, 다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알맹이가 되어 나오는 것들은 아직도 미성숙한 파편들임을 깨닫습니다.
후기를 작성하며 현장의 사진들 및 자료, 교재를 정리하다 보니 짧은 시간에 너무도 많은 것을 얻어가지고 왔음을
발견합니다.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또 참석하여 눈에 담고, 체화된 지식으로 만들고 싶네요.
함께 수업 들었던 다른 분들 글도 볼 수 있다면 비교하고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기다려져요.
수업 프로그램 알차게 구성해 주셔서 그 체감 온도를 한국에 돌아와서야 서서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좋은 마무리입니다.^^
그동안 고생많으셨네요. 이렇게 정리를 하고나면 연수하고 체험한 것들이
더욱 가치로 본인에게 자리매김하고...새로운 시각이 열리며 이중 3중 연수를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줍니다.
다음 연수에 또 다른 눈이 열리겠죠.
미성숙한 파편들이라고 하기엔 알맹이가 많아서 유익한 정보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