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변산성지
변산성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내변산에 위치한 제법성지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4년 10월에 변산으로 입산해 변산 봉래정사에서 5년여를 머무르며 교법제정과 새 회상 공개를 준비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봉래정사에 머무르며 원기 5년 새 회상의 교강인 사은사요와 삼학팔조를 발표했으며, 원불교 초기교서인 조선불교혁신론과 수양연구요론을 초안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변산성지에서 익산총부 건설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서중안, 서동풍 형제를 비롯한 초기교단 창립인연들 다수를 만났다
소태산 대종사가 익산충부 건설로 봉래정사를 떠난 후 원기 33년에 오창건의 발의로 성지 수호를 위해 석두암을 중수했으나 원기 35년 소실되었다
원기 65년 봉래정사 석두암 터에 교강 선포 60주년을 기념하여 일원대도비를 건립했다
"변산대성지는 천하의 대도요 만고의 대법인 일원의 원만한 진리에 근원하여 세계평화의 원리로 사은의 신앙과 보은의 법을 밝혀 주셨고, 만 생령 부활의 원리요 대도인 삼학의 원만한 수행법을 밝혀주신 대성지이다" [대산종사]
봉래정사
봉래정사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교법을 제정한 곳이다 전북 부안군 봉래산 실상사지 옆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일원대도비가 위치한 석두암 터와 석두암 아래의 실상초당을 함께 봉래정사라 한다
실상초당 터
원기 4년 소태산 대종사가 부안 변산으로 거처한 이듬해 마련하여 제자들과 함께 사용한 집이다 이 집을 실상초당 또는 실상초옥이라 부른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5년 이곳에서 교리의 강령인 사은사요와 삼학팔조를 제정 발표했으며, 조선불교혁신론과 수양연구요론을 차례로 초안했다 특히 실상사에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실지불공의 법문을 한 곳이기도 하다
석두암 터
원기 6년 소태산 대종사는 찾아오는 제자들을 실상초당에서 다 수용하지 못했고 이때 백학명과 한만허의 후원으로 실상초당 바로 위쪽에 제자들과 함께 초가삼간을 지어 석두암이라 이름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서 창립인연들을 만나 새 회상 공개를 준비했다
변산 월명암
원기 4년 영산에서 법인성사 후 정산종사가 소태산 대종사의 명을 받고 월명암 주지였던 백학명 스님의 상좌로 약 2년여 간 머문 암자이다
월명암이라는 절 이름은 부설거사의 딸 이름에서 유래된다 부설거사가 창건한 월명암은 신라 때 의상대사가, 조선조에는 진묵대사가 중창했고, 1915년에는 학면선사가 4창했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후 용성, 고암, 서옹, 해안 등의 고승대덕이 머물렀다
변산원광선원
원기 63년 변산성지를 수호하고, 순례인의 편의 제공과 교도들의 훈련을 담당하기 위해 건립했다 정산종사의 성해를 모셨던 구 성탑의 석재를 옮겨 건립하고 정산종사 추모탑이라 이름했다
인장바위
변산 실상동 계곡 건너 산 중턱에 위치한 바위로 도장을 세워놓은 것처럼 생겼다하여 도장바위 또는 장군바위라고 불린다
참선을 하지 않는 제자를 크게 나무라는 노승들의 하소연을 듣고 소태산 대종사는 인장바위를 가리키며 "저 인장바위에 금이 들어있으니 내 말을 듣고 금을 채굴하겠는가?"라 묻고, '먼저 실행하여 모범을 보이라'는 참된 제도의 방편을 전해주었다
용두샘
소태산 대종사를 시봉하던 16세의 주산 송도성 종사가 샘에서 차 탕기 꼭지를 깨고 실심하여 한나절을 앉아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용두샘은 당대에 봉래정사에서 사용하던 우물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무슨 일을 당부할 때면 매사에 정성스럽고 진지했던 주산종사의 이야기를 비유하여 "도성이 깨진 그릇 붙이듯 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일원대도비
변산 성지사업회의 제법성지 장엄공사 1차 사업으로 교강(敎綱)반포 60주년을 기념 하여 원기 65년(1980) 7월 17일 교강 반포의 땅(석두암 터)에 세운 기념비다.
전면에는 제법성지를 기념하는 대산종사 휘호[일원대도 (一圓大道)]를 음각으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제법성지 비문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