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빌 2장 5-11절
설교제목 : 품다-케노시스
희망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이제 남쪽 땅에서 봄소식이 전해지고 있고, 서울에도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자 교훈은 흘러가고 있고 변화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삶은 여전히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우연히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책으로만 알고 있던 김헌 교수님이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버지 필립포스 왕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로스는 땅 끝의 바다를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정복전쟁을 해나갑니다. 인류사에서 세 개의 대륙,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땅 일부까지 정복한 왕은 유일하게 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는 정복을 원했지만 실제 삶은 금욕과 청빈의 원칙을 따라 산 디오게네스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왕궁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습니다. 왕의 재산이 점점 고갈되어 없어져가자 부하들은 걱정했습니다. 그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을 걱정하는 부하들을 향하여 감동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에 괜찮다.” 부하들은 왕의 말에 감동받아 왕의 희망에 동참하겠다고 하며 알렉산드로스를 따랐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여전히 희망이 남아있다면 삶은 살아갈 만할 뿐만 아니라 생생할 것이며, 열정과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품어야 할 것
오늘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품으라고 권합니다. 국어사전에서 ‘품다’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①(사람이나 짐승이 사물을)품 속이나 가슴에 대어 안다. ②(사람이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마음 속에 가지다. 결국 ‘품다’는 ‘무언가를 가슴에 간직하며 안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품고 사는 것이 무엇이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음 안에 간직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인격과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포장하려 해도 우리 자신이 품고 있는 것은 삶에서 흘러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여러 정신적 위기의 배경은 품지 말아야 할 것을 품고 살고, 품어야 할 것을 품지 못하며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온갖 부정적 감정과 정서의 덩어리를 흘러 내보지 않고, 억제하고, 감추며 살고 있습니다. 그릇된 신화와 욕망을 가슴 가득 품고 삽니다. 이로 인해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은 오염되고 병들어갑니다. 품어야 할 것을 보듬어 안고 살면 우리 삶은 맑아지고, 요동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품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5)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주로 모신 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품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인간 정신의 가장 중심에 자아가 만들어낸 유사 신이 차지하고 있으면 인간은 누추해지고, 추악해지며 품위를 잃게 됩니다. 오히려 유사 신의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자아ego와 자기Self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에 그리스도를 품고 살면 당당하게 삶의 시간을 견디며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면 어떤 갈등의 상황에서도 평화를 도모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면 그분이 나를 도우시고,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이 채워집니다. 예수의 마음이 품어져 있으면 설교하지 않아도, 가르치지 않아도, 향기로 물들여 내 곁에 있는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 – 케노시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자기 비움입니다.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워”라고 합니다. ‘비우다’κενόω는 명사형은 ‘케노시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 비움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비워내셨을까요? 6절에서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모습’이라는 단어를 개역개정은 ‘본체’라고 번역합니다. 원어로는 ‘모르페’μορφῇ입니다. 사람이나 물건의 형태를 말할 때 ‘모르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순히 물리적인 형태가 아니라 자격과 신분, 그것의 본질을 담아내는 틀을 가리킵니다. 7절의 ‘종의 모습(형체)’에서 ‘모습’도 ‘모르페’ 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담아내는 형체, 하나님으로서 자격과 신분에 맞는 존재, 동등한 존재(이소스, 무게가 같다)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의 자격과 신분을 덜어내고 종의 형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자격과 신분을 비워내고 종의 자격과 신분을 취하신 것입니다. 결국 자기 비움, 케노시스란 자신의 신분과 자격, 특권을 비워 덜어낸다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지위와 세력,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갈등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케노스시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살면 살수록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덜어낸다는 것이 대단히 힘듭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은 공기업 직원들이 부동산투기입니다. 신도시 개발 정보를 자신의 특권적 지위로 빼돌려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여 큰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단 그 사람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인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서열과 지위를 차지하고 독점하려 듭니다. 자신을 알아달라고 아우성인 시대입니다.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안전한 보루를 쌓기 위해 더 많이 더 높이 오르려 안간힘을 쓰는 세상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비움이란 것이 언뜻 보면 시대착오적이고, 바보같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 하면 할수록 반드시 불안해집니다. 산정상은 높은 성취이지만 벼랑 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상을 유지하려하면 할수록 강박적이 되고, 내적, 외적 갈등에 시달립니다. 소유한 것을 계속적으로 셈하게 되고, 삶은 경쟁적으로 변해버립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는 영광과 지위, 신분을 버리고 인간의 모양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가 죽기까지 하셨을까요? 모든 것을 비워내고 덜어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자 위대한 종교의 신비입니다. 자기 비움의 동인은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6-8절에서 성도들에게 고백합니다.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기는 자기 비움을 통하여 사랑과 생명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데 있습니다. 돈의 논리, 힘의 논리가 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압도하기에 개인과 사회가 혼탁해지는 것입니다. 힘과 돈의 논리가 얼마나 심각하게 세상을 파괴했는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고, 지금 21세기에도 여전히 개인과 이 세계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발전의 미명하게 급속한 지구 생태계의 파괴, 부의 불균등).
종교의 본령은 자기 비움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의 유일한 목적은 교세 확장과 유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지위와 특권을 내려놓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비워내는 연습을 해야 할 때인 듯 합니다. 비워낼 때 영혼은 맑아지고 생명이 살아날 것입니다.
자기 비움 : 여백
자기 비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여백을 만드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자신을 덜어내어 여백을 만드신 삶입니다. 그리하여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그 여백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기 비움으로 여백을 만들어 모든 영혼들을 기꺼이 품으셨습니다. 디트리이트 본회퍼는 기독교인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이 타자는 일차적으로 우리 안의 낯선 인격을 수용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 내 밖에 있는 이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런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율법적, 형식적 제도 안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가 가르친 복음의 핵심이 아닌가!) 이렇게 더불어 살기 위해, 낯선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백이 필요합니다.
과속, 과장의 세상입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더 빠르게 가야하고, 남보다 우위에 있기 위해서 더 자신을 과시하고, 나의 것을 더 확보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백을 만드는 것이 점점 어렵습니다. 남의 시선을 깊이 있게 바라볼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자녀조차도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들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보려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본시 '나' 가 먼저이고, 다음에 '남'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꽉 채우려하면 할수록 질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이런 인간의 삶을 뒤집기하며 사셨습니다. 나로 꽉 차 있던 것을 덜어내어 여백을 만들어 나 아닌 너를 향한 빈 공간을 마련한 것입니다. 빈틈과 여백이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을 보여주신 것이 예수님의 마음, 자기 비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비움은 여백을 만드는 삶입니다. 예수님처럼 덜어내고, 비워내어 여백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나도 살고 남도 살고,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누군가를 내 삶의 경계 안으로 받아들일 여백을 오늘부터 조금씩 만들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난다 ’는 시의 구절들이 떠오릅니다.
제 몸을 때려 울리는 종은/ 스스로 소리를 듣고자 귀를 만들지 않는다
평생 나무와 함께 살아온 목수는 / 자기가 살기 위해 집을 짓지 않는다.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기도하는 어머니는 /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비워 비워내어 생명을 살리고, 내 영혼과 삶의 여백을 만들어 지친 영혼들의 그늘이 되어주고, 나를 낮추는 십자가의 방식으로 뒤집기의 삶이 가능함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