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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 하필 매국노의 집터에서 독립선언은 이뤄졌을까?| 역사
왜 하필 매국노의 집터에서 독립선언은 이뤄졌을까?
여느 때는 잠잠하다가도 해마다 3월만 되면 유달리 주목을 받는 공간이 몇 군데 있다. 우선은 '탑골공원'이 그 하나이고, '태화관'이란 데도 곧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모두가 삼일만세사건의 역사 현장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탓이다.
그런데 탑골공원은 잘 알겠는데, 태화관(太華館 또는 泰和館으로 표기)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곳은 어떤 내력을 지닌 장소이며,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은 왜 하필 여기에서 모이기로 했던 것일까? 예전의 흔적은 벌써 사라졌지만 태화관은 인사동 안쪽에 있던 요리점이었다. 지금은 '태화빌딩'이라는 이름의 건물만이 이곳에 남아 있다. 종로방면에서 인사동길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쯤에서 만나는 인사동네거리에서 홰나무길(태화관길)을 따라 왼쪽으로 꺾어들면 곧장 이 건물이 보이므로 이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구나 그 앞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고 새긴 제법 큼직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므로 위치확인에도 도움이 된다. 여기를 살펴보니,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집터는 본래 중종 때 순화공주의 궁터라 불행하게도 을사 경술 두 조약 때 매국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더니 삼일독립운동 때에는 그 조약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즉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대표 일동은 여기 명월관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미리 서명해 두었던 선언서를 요로에 발표하고 급히 달려온 일경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일제히 사로잡혔다. 그 뒤 남감리교회는 이 터를 매수하여 태화기독교사회관 건물을 지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침략의 도구로 징발되었으나 팔일오 해방과 더불어 이를 되찾아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새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줄잡아 둔다.
(*) 이 표지석은 원래 1982년 8월 13일에 세워졌던 것을 1997년 3월 1일에 재건립하였다고 표시되어 있다. 처음의 것은 갈물 이철경의 글씨였으나, 재건립되면서 이 와중에 해청 손경식의 글씨로 바뀌었다.
이 문안은 오리 전택부 선생이 지은 것인데, 외람된 표현인 지는 모르겠으나 썩 잘 정리된 구절로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히 사실관계의 오류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탓이다.
우선 이 집터를 "중종 때 순화공주의 궁터"라고 한 것은 아마도 순화궁(順和宮)을 가리키려는 듯하지만 순화궁은 헌종 때의 후궁 경빈 김씨(慶嬪 金氏, 1831~1907)가 생전에 거처하던 곳이었으므로 "중종 때 ......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 시절에 '순화공주'가 실존했는지도 의문이다. 무슨 근거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구절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을사 경술 두 조약 때 매국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었다고 한 것도 잘못이다. 을사조약이 있던 1905년 당시에는 경빈 김씨가 여전히 살아 있던 때이므로 순화궁이 매국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었을 까닭이 없었다. 아마도 이 구절은 나중에 이곳이 이윤용·이완용 형제의 집터로 바뀐다는 사실을 빗대어 말하려 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여하튼 시간 전후의 구분에 오류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본다면 "삼일독립운동 때에는 그 조약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고 한 구절도 매우 과장되거나 앞뒤가 어긋나는 잘못된 설명이라고 판단된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찬사와 해석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러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여기에는 "조선조 헌종(憲宗)의 후궁 경빈 김씨(김조근의 딸) 사당인 순화궁이 있었던 자리"라고 적혀 있다. 이 표지석은 서울특별시에서 1999년 11월에 설치한 것인데, 우선 경빈 김씨를 김조근(金祖根)의 딸이라고 한 것부터가 완전히 엉터리이다. 김조근은 헌종의 원비(元妃)인 효현왕후(孝顯王后)의 아버지이며, 경빈 김씨의 아버지는 김조근이 아니라 김재청(金在淸)이라야 맞다. 그리고 순화궁이란 것도 경빈 김씨의 사당이라고 하기보다는 이미 생전에도 사용하던 궁호(宮號)라고 설명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순화궁터, 나아가 태화관 자리에는 도대체 어떠한 역사의 굴곡이 숨어 있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궁금증은 다른 곳도 아닌 일개 요리집이 어째서 독립선언의 현장이 되었던가 하는 점이다. 고종임금의 인산일을 앞두고 종교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모의한 거국적인 독립선언의 거사는 당초에 1919년 3월 1일(토요일)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장소는 파고다공원 즉 탑골공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민족대표 33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전날 손병희 선생의 재동자택에서 별도의 모임을 갖는 자리에서 이들은 느닷없이 거사장소를 변경하기로 결정했던 까닭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할 경우에 과격한 행동을 야기하여 자칫 유혈충돌이 빚어질 수 있으므로 군중이 모인 파고다공원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것이 정말 사려 깊은 처신이었는지 아니면 꽤나 구차한 변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대신에 선택된 장소가 바로 인사동의 태화관이었다. 파고다공원과 매우 가까운 곳이라는 점이 고려된 듯도 하지만, 스스로 요리집이라는 폐쇄된 공간으로 비껴난 점은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 아닌가 싶다. 요컨대 요리집 태화관이 삼일독립선언의 역사적 장소로 귀결된 것은 이처럼 민족대표 33인의 막판 변심(?)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점은 이 태화관이란 곳이 다름 아닌 친일귀족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집터였다는 사실이다. 경술국치의 당사자이며 매국노의 대명사인 그가 살았던 장소에서 독립선언의 회합이 있었다는 것은 비록 우연의 결과였다고 할지라도 자못 역설적으로 들린다. 태화관이 있던 곳에는 원래 조선 헌종의 후궁이던 경빈 김씨가 생전에 살았던 '순화궁'이 있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하지만 1907년 6월에 경빈 김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당시 궁내부대신이었던 이윤용(李允用, 1854~1939)이 재빨리 이곳을 차지하였고, 다시 망국 직후인 1911년 초에 이 집은 그의 동생인 이완용에게 넘겨지는 과정을 거쳤다.
(*) 순화궁이 이윤용의 수중으로 떨어진 연유에 대해 <순종실록부록> 1911년 4월 24일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순화궁은 본래 중부에 있는 태화정(太和亭)이었는데 남작 이윤용이 궁내부 대신으로 재임할 때 그 집에 머물면서 반송방(盤松坊)의 택지를 순화궁의 자리와 바꿈으로써 반송방으로 옮겨 갔던 것이다." 그리고 김명수 편집, <일당기사(一堂紀事)> (일당기사출판소, 1927)에 정리된 연보(年譜)에 따르면, 이완용이 백씨(伯氏) 이윤용의 소유인 이문동(里門洞)의 새집(즉 태화궁)을 사들여 이사를 온 것은 1911년 3월 17일이고, 이곳에서 다시 옥인동의 신저택으로 이사를 나간 것은 1913년 12월 1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이완용의 집은 서소문 밖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에 있었으나 고종 퇴위 때 격노한 민중의 습격으로 1907년 7월 20일에 불타버렸고, 그 뒤로는 한때나마 남산 아래쪽을 전전하다가 1908년 봄부터 저동 남녕위궁(苧洞 南寧尉宮)에 겨우 터를 잡고 있던 차였다. 그러한 그가 순화궁으로 들어와서 산 것은 3년 가량이었다. 그리고 1913년 말에 옥인동(玉仁洞)에 대저택을 세워 이사를 나간 이후에도 이완용은 여전히 집주인의 신분을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무렵 이완용이 살던 곳에 요리집이 들어서는 과정은 이러했다. 시내 한복판의 큰집이 빈집으로 남게 된 마당에 그냥 놀려두기는 아까웠던 모양인지, <매일신보> 1913년 12월 12일자에는 "여관설치(旅館設置)의 교섭(交涉)"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벌써 등장한다.
백작 이완용씨(伯爵 李完用氏)가 자하동(紫霞洞) 신건축(新建築)한 가정(家庭)으로 철이(撤移)함은 이보(已報)한 바어니와 이왕(已往) 접(接)하던 종로통(鍾路通) 이문동 소재(里門洞 所在) 가정(家庭)은 모내지인(某內地人)이 여관(旅館)을 설치(設置)하기로 목하(目下) 이완용백(李完用伯)과 교섭(交涉)하는 중(中).
여기에서 나오는 이문동은 '순화궁'이 있던 곳을 가리키며, 1914년에 주변일대가 인사동(仁寺洞)으로 묶어짐에 따라 폐지된 지명이다. 그리고 이문(里門)이라고 하는 것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설치하는 시설로 일종의 방범초소와 같은 것이었는데, 일제 초기까지도 이러한 지명은 서울의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이곳 이문동 순화궁 자리, 다시 말하여 이완용 소유의 저택에 '태화관'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최초의 자료는 <매일신보> 1914년 12월 24일자에 수록된 광고문안이다.
"대규모적 신여관(大規模的 新旅館)"
광고문안을 살펴보니, 이 시기에 태화관은 아직 요리점이 아니라 '여관'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태화관의 한자표기가 '太華館'으로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철종 때의 세도가 김흥근(金興根)이 이곳에 살면서 지었다는 '태화정(太華亭 혹은 太和亭으로 표기)'이라는 정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그럼, 여관이 아닌 '요리집' 태화관은 언제부터 등장하는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정확한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윤치호 일기> 1916년 2월 6일자에 '태화관'(여기서는 泰和館이라고 표기)에서 식사를 했다는 내용이 나오므로, 적어도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요리집으로 용도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매일신보> 1917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근하신년' 광고문안에도 요리집 태화관의 흔적은 그대로 확인된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마다, 자료마다 자주 태화관과 명월관을 혼동하여 적곤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3.1운동이 일어날 당시에 이곳은 '명월관 지점'이었다. 정식으로는 '명월관 지점'이었으나 여러 해 동안 '태화관'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보니 대개는 그냥 '태화관'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관(本館)이 개업(開業) 십수재(十數載) 이래(以來)에 조선요리(朝鮮料理)에 원조(元祖)됨과 서양요리(西洋料理)에 박명(博名)을 득(得)하여 오락적 기관(娛樂的 機關)에 제일위(第一位)를 점거(點居)함은 실(實)로 강호제현(江湖諸賢)에 공인(公認)하심을 특몽(特蒙)하온 결과(結果)로 본영업(本營業)이 대발전(大發展)에 지(至)하온 바 경성내(京城內) 제일류 대가(第一流 大家)로 저명(著名)하던 전순화궁(前順和宮) 종로 이문내(鍾路 里門內) 전태화관적(前太華館跡)에 본관지점(本館支店)을 설치(設置)하고 금일(今日)부터 개시(開市)하오니 은일(隱逸)한 취미(趣味)와 담박(淡泊)한 요리(料理)에 편의(便宜)를 종(從)하시와 일차(一次) 왕가사영(枉駕賜榮)하심을 망(望)하옵나이다.
기존의 태화관이 명월관지점으로 편입된 내막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그럼에도 몇몇 자료에서는 명월관의 본점이 불타버려 새로운 장소를 찾아 태화관으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고 또한 그 시기 역시 1918년경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는 위의 광고문안으로도 확인되듯이 명백히 잘못된 내용이다.
그런데 '명월관'의 역사를 담고 있는 대부분의 자료에서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가령 황토현(즉 광화문네거리)에 명월관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09년이라고 하거나, 명월관 본점이 불탄 것을 1918년경이라고 한결 같이 적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이건 또 왜일까?
이러한 오류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거슬러 올라가 봤더니, 그 원출처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수록된 "명월관"이라는 글이었다. 이 내용은 원래 명월관 출신 기생인 이난향(李蘭香)이 1970년에 '중앙일보'에다 연재했던 것으로, 그 후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I> (중앙일보사, 1973)에 재수록되어 책으로도 묶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 책 자체가 엄밀한 고증에 따라 정리된 글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개인의 경험이나 구전에 의존하여 복원된 결과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당연히 군데군데 사실관계의 오류나 착각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글의 필자인 이난향은 평양출신으로 열 세 살 되던 1913년에야 비로소 명월관으로 옮겨오게 되는데, 이 때문에 명월관의 초기 역사에 대해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을만한 입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글의 첫머리에 "처음 명월관 주인은 안순환(安淳煥)씨, 그는 지금부터 61년 전이니 1909년에 명월관을 열었다"고 적고 있으나, 이 부분은 사실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잘못 전해들은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월관에 대해서는 변변하게 정리된 글이 없는 형편인지라 지금껏 이 회고담은 거의 유일무이한 인용자료로 치부되어왔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난향의 글에서 발견되는 기억의 혼선이나 기록의 오류가 다른 자료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말이 난 김에, 명월관의 내력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조선식 요리집의 대명사인 명월관(明月館)이 광화문네거리인 황토현(黃土峴)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3년 9월의 일이다. 그 위치는 '황토현 기념비전(紀念碑前)'이라 하였으니, 곧 지금의 동아일보사 자리였다. 개업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직접적인 신문자료 또는 광고문안을 미처 찾아내지는 못하였으나, 이 사실은 <대한매일신보> 1908년 9월 18일자에 수록된 "명월관 기념(明月館 紀念)"이라는 짤막한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대한매일신보>이나 <만세보>와 같은 신문자료를 뒤져보면, 이미 1906년이나 1907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명월관에 관한 기사내용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만으로도 1909년에 명월관이 생겨났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내용이라는 점이 입증된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만세보> 1906년 7월 13일자에 수록된 '명월관 광고'가 가장 시기가 빠른 신문자료인 듯하다. 여기에는 '김인식(金仁植)'이라는 사람이 명월관 주인(主人)으로 표시되어 있다.
명월관에서 작일(昨日)은 해관설시(該館設始)하던 제오기념일(第五紀念日)인 고(故)로 국기(國旗)를 고양(高揚)하고 기념식(紀念式)을 설행(設行)하였다더라.
이 말 대로라면, 이로부터 5년 전인 "1903년 9월 17일"이 명월관의 창립일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아울러 <매일신보> 1912년 12월 18일자에 수록된 '상점평판기(商店評判記)'에 '명월관'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엿보인다.
근십년전(近十年前) 조선내(朝鮮內)에서 요리(料理)라 하는 명(名)을 부지(不知)할 시(時) ...... 일개(一個) 신식적(新式的) 파천황적(破天荒的) 청결적(淸潔的) 완전적(完全的의) 요리점(料理店)이 황토현(黃土峴)에 탄생(誕生)하니 즉 조선요리점(朝鮮料理店)의 비조(鼻祖) 명월관(明月館)이 시야(是也)이다.
이 말은 즉 이미 10여년 전부터 명월관이 있어왔다는 얘기이므로, 앞에서 1903년에 명월관이 창립되었다는 내용과 크게 틀리지 않는다.
널리 알려진 대로 명월관은 궁내부 전선사(宮內府 典膳司)의 주사 출신(主事 出身)인 안순환(安淳煥)이 차린 것으로, 그의 요리솜씨가 뛰어난 점은 그가 명월관을 꾸려나가던 때인 1908년 12월에 전선사 장선과장(掌膳課長)으로 다시 특채된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궁중에서 벌어지는 연회 때마다 명월관은 음식과 기생의 공급을 도맡다시피 하였으니, 날이 갈수록 그 명성은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고급 궁중요리와 서양요리를 모두 제공했던 명월관으로서도 이 와중에 나름으로 운영의 어려움은 있었던 모양이었다. 1907년 10월말에는 명월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당시 여러 신문의 지면을 장식한 적도 있었다. 그 이유는 우습게도 외상값이 너무 쌓여 도저히 꾸려나갈 처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태가 잘 수습되었는지 며칠 후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문안이 신문지면에 다시 등장했다. 이것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13일자(국문판)에 수록된 "명월관을 계속하여 개업함"이라는 광고이다.
일기는 점점 춥사온데 관민간 각 사회 여러분 각하께서 만복하시기를 축수하옵니다. 폐관에서 개업한 본의는 비단 모리만 위함이 아니오 국가진보상에 일부분을 진력하와 각종 음식과 기명을 이해를 불구하고 진선진미하여 드리었삽더니 미개한 인사의 패행과 무뢰배의 속여먹은 것이 비일비재하오매 그만 두는 것만 같지 못하와 폐업하는 광고까지 하였더니 관원들과 각 사회에서 극진히 권고하시옵기로 이런 후의를 저버릴 수 없사와 다시 개업하오니 첨군자 각하께서 더욱 권고하여 주심을 복망하옵나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은 끝에 명월관은 더욱 그 명성을 더하는 지경이 되었으며, 그 사이에 비록 나라는 망하였으나 이곳만은 영업기반이 크게 확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1912년 여름에는 명월관의 일부가 종로통의 도로확장으로 인하여 헐어져나갔으나 곧이어 1914년 여름이 되어서는 건물을 3층양옥으로 증축하는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 이후 1917년 9월에는 태화관을 지점으로 흡수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때까지도 명월관의 명성과 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태화관을 명월관 지점으로 편입한 이유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잠깐 적었다시피, 명월관 본점이 불탔기 때문이 아니었고 그야말로 "장사가 잘되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명월관 본점이 불탄 사건은 흔히 잘못 알려진 것처럼 1918년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1919년 5월 23일에 발생했다. 우연찮게도 기미만세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두 달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날 발생한 화재사건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19년 5월 24일자에 비교적 소상하게 알리고 있으므로 그 내막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쨌거나 이날의 화재로 인하여 명월관 본점의 사무와 영업 일체는 즉시 인사동 195번지의 명월관지점 즉 옛 태화관으로 이전되었으며, 두 해 가량 이곳에 머물렀다가 돈의동(敦義洞) 145번지에 있던 장춘관(長春館) 자리로 다시 옮겨가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에서 말하는 돈의동의 명월관 자리는 곧 지금의 피카디리 극장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이곳에서 명월관은 1928년초에 건물을 크게 신축하였고, 서린동(瑞麟洞) 137번지에다가 명월관 지점을 개설하는 등 변함없이 그 명성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전쟁의 난리통에 이곳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으니 반세기에 이르는 근대사의 굴곡과 근대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담아냈던 조선요리점의 대명사 명월관은 그렇게 사라졌다.
▲ <대경성사진첩> (1937)에 소개된 돈의동 소재 명월관의 모습이다. 건물외형은 앞서 <매일신보> 1928년 1월 1일자 신축낙성광고에 수록된 그것과 동일하다. 오른쪽은 명월관의 객실내부를 담은 것이다. 명월관은 원래 황토현에서 출발하여 인사동을 거쳐 이곳 돈의동에 자리를 잡았다가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사라진다. 명월관의 마지막 자리는 곧 지금의 피카디리 극장이 있던 곳이다.
그렇다면 '졸지에' 삼일만세사건의 현장이 되어버린 태화관 쪽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필이면 자기가 살던 집에서 독립만세사건이 벌어졌다는 부담과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집주인 되는 이완용은 이 태화관을 끝내 처분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때가 바로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9월이었다. 태화관의 인수자는 남감리회 여선교부였다. 감리교회로 넘겨진 태화관 자리에는 이내 사회교육선교기관인 '태화여자관'이 설립되었다.
이덕주가 정리한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역사 : 1921~1993>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1993)에는 그 경위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이완용이 팔려고 내놓은 이 집을 산 새 주인이 바로 감리교회이다. 1915년 무렵부터 미국 남감리회 선교본부에 여성사회관 설립을 위한 기금을 요청하고 있었으며, 그 기금은 1918년부터 활발하게 전개된 감리교 선교백년기념 모금운동으로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었다. 장소가 문제였는데 마침 서울 중앙 요지에 있는 태화관이 매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건물에 대한 매입 논의는 1919년 9월에 처음 이루어졌다. 그러나 태화관 매입을 위한 구체적인 절차는 즉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마침내 1920년 9월 20일에 태화관 실소유주 이완용과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이때 구입한 땅은 2천 7백여 평에 달하였다. 값은 우리 돈으로 20만 원이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11일에 잔액을 치름으로써 역사적인 유적지 태화관의 소유권은 교회로 넘어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그곳에서 영업을 하던 명월관 지점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는데, 전 주인 이완용과 맺은 임대차 계약기간이 아직 남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때문에 뜻밖의 실랑이가 있고서야 이곳에 있던 명월관 지점은 결국 돈의동 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위의 이덕주가 정리한 자료에는 감리교회 측에서 명월관 지점 측을 물리친(?) 시기를 1920년 12월말이라고 적고 있으나, 정작 명월관 지점의 이전광고는 <매일신보> 1921년 5월 3일자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동이 있었던 것 같다. 위의 '광고문안'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이전급대확장급고(移轉及大擴張急告)"
이와 아울러 원래의 명월관 주인으로 알려진 안순환은 '명월관'의 상호(商號)를 이쪽으로 넘겨버리고, 자기는 남대문로 방면으로 자리를 옮겨 '식도원(食道園)'이라는 새로운 요리집을 차렸다고 전해진다. 그후 명월관과 식도원은 일제시대 후반기에 걸쳐 조선식 기생요리집의 쌍벽을 이루게 된다.
명월관 지점이 물러난 자리는 새롭게 정비되어 1921년 4월 1일에 정식으로 '태화여자관'의 일반공개가 이뤄졌다.
명월관 지점 및 태화관 시절은 물론이고 이보다 거슬러 올라가 순화궁 시절의 건물형태와 대부분의 부대시설은 태화여자관이 들어서고도 한참이나 유지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흔적은 태화여자관의 신축계획에 따라 말끔히 철거되고 말았으니, 이때가 바로 1937년 여름이었다.
이 당시의 건축공사는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다소간 지체되었다가 1939년 11월 4일에서야 완공을 보았다. 다시 한참의 세월이 흘러 1980년 6월 23일이 되어 이 건물마저 도심재개발계획에 맞물려 헐려지고 말았다. 이후 2년 가량의 공사기간을 거쳐 12층 짜리 건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으니 이것이 곧 지금의 '태화빌딩'이다. 지금은 매국노가 살던 때의 흔적도, 식민통치자들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모리배의 쑥덕거림도, 배부른 부호세력의 왁자지껄함과 그 자제들의 철없는 고함소리도, 기생들의 노랫가락도, 상다리가 휘어지던 산해진미의 향내도, 소심했던 민족대표들의 발길도 모두 끊어지고 잊혀졌지만, 그 '태화'라는 이름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리 : 2006.3.1,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
출처 :풍수와 함께하는 문화답사 원문보기▶ 글쓴이 : 이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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