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애숙 qqwwses@daum.net
1969년 경북 안동출생. 화가, 시민운동가, 사회교육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효성여대87)미술대학 동양화과, 동대학원 회화과,
경안신학대학원 사회복지 학석사(지역정책학전공)
안동 월요수필 회원.
저서: 『지방소멸 청년.문화.마을에서 답을 찾다』 (공저)
<수상 소감>
적지 않은 세월 그림을 그렸습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금세 찾아온 어느 날 새벽,
조심스레 내미는 차 한 잔의 기억이…. 목이 메입니다.
42년생 나의 어머니
이제 그녀를 또박또박 그려 가겠습니다.
인생을 송두리째 자식에게 쏟아부은 그녀!
시대의 아픔에 웅크리고 서글퍼하던 그녀!
상처 난 그녀의 영혼을 달래주는 가끔은 대견한 딸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세상을, 그리고 나의 영혼을 더 깊이 돌아볼 수 있도록 이끄는 길일 것입니다.
새롭게 만날 문우님들이 도와주리라 믿어봅니다.
<당선작>
42년생 나의 어머니
“배고팠던 시절을 니들이 알아?”
엄마가 이렇게 말문을 열면 언젠가 텔레비전 광고에 나왔던 “니들 이 게 맛을 알아?”가 떠올라 웃고 만다.
1942년 6월 팔라우섬 출생인 나의 엄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일본 유학 중이었다. 산달이 가까워진 외할머니는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부산에 입항하지 못하고 팔라우섬으로 갔다. 다행히 그 곳에서 엄마를 낳았고 다섯 살 된 아들과 갓난쟁이 딸을 데리고 도쿄의 외할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들의 행복은 길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장손을 데리고 귀국하라는 시부모님의 부름으로 1945년 흩날리는 분홍색 벚꽃을 뒤로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외할아버지의 생사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나 외할아버지의 지인이라는 분이 몇 차례 학용품, 옷가지, 오르골 등 귀한 선물을 일본에서 보내오긴 했지만…
큰 부잣집의 큰 애기씨였던 외할머니는 그해 남편의 생사를 모른 채 해방을 맞았고 같은 해 아들을 돌림병으로 잃었다. 외할머니는 어린 내 엄마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큰 애기씨가 낳은 귀한 딸인 내 엄마지만 교육의 혜택은 받을 수 없었다. 여학교에 합격했지만 입학조차 하지 못하고 도시의 ‘조산소’ 오늘날의 산부인과 병원에 취업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어린 소녀는 상당히 치열한 삶을 선택한 것 같다.
엄마는 70여 년이 흐른 옛일을 어제 일처럼 이야기한다.
“원장님이 ‘한숙자’는 안부려 먹고 내만 힘든 일을 시켰어.” 밥을 편히 앉아 먹지 못할 만큼 바쁘게 일해야 했단다. 그 시절 태 어나는 아가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자다가도 “이 간호사” 부르면 왕 진 가방을 챙겨서 쏜살같이 따라나서곤 했단다. 하루는 유산된 아가 를 버리고 오는데 아가가 살아서 ‘응애응애’ 울며 따라오는 것 같았다고, 훌쩍훌쩍 울기도 했단다. 10대 소녀에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을까. 눈물을 쏟아내 는 어린 소녀의 하얀 슬픔이 엄마의 머리 위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애처롭다. 가끔 인근 성당 수녀님과 성당 구석에서 나눠 먹었던 가루우유가 참 맛있었다는 작은 행복의 기억을 찾아내는 날은 온 방이 환하다.
지금 엄마는 소녀가 되어가고 있다. 치매 초기증상이란다. ‘경증 인지장애’ 그래서 자꾸만 옛날얘기를,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나는 또 듣고 또 듣는다.
“포탄이 쾅 하고 터졌는데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여자아이를 엄마가 안고 울고 있었어.”
수레 밑에 숨어 있다가 쏙 나와서 “엄마”하고 불렀는데, 외할머니는 피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엄마를 안고 오열을 했단다.
“외할배도 울고 외삼촌들도 다들 껴안고 한참을 울었어. 엄마는 내까지 그때 죽었는 줄 알았나 봐.”
피난에서 돌아온 집에는 소도 없고 닭도 없고 개도 없고 과수원과 논밭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 후 여러 해 힘들었단다. 외할머니가 홀로 사셨던 외가에 가면 엄마의 외가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내 외가는 부엌이 붙은 작은방이 있었고 대문 옆 변소 앞에는 대추나무가 있었는데 대추 맛이 아주 달았다. 마당에는 채소들이 소복이 자라고 있었다. 담 하나 너머 엄마의 외가는 말을 타고 들어가도 될 정도의 큰 대문에 2, 30개가 넘어 보이는 방들이 있었고 수십 개의 독들이 있는 장독대와 축구를 해도 좋을 만한 넓은 마당이 있는 그야말로 고래 등 같은 집이었다. 엄마는 그 집에서 남편을 잃고 아들을 앞세운 비련의 큰애기씨 딸로 자랐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민족의 아픔도 친일도 반일도 아니다. 단지 1942년생 한 여자와 그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저 학자가 되고픈 꿈을 안고 유학길에 올랐던 나의 외할아버지와 통역사가 되고 싶었던 신여성 내 외할머니를 한 번쯤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소중한 딸! 내 엄마의 부서진 별들의 조각을 함께 맞춰 주고 싶을 뿐이다
첫댓글 손애숙작가님,
청룡을 타고 비상하는 2024에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로 등단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세상이 쳇GPT를 말하지만, 그것의 결과물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임으로,
글쓰기는 끝까지 희망을 줍니다.
수필가로 출발을 하게 됨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