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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집회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사람
4. 부름 받은 사람-아브라함
2014년 7월 29일 이현래 목사님
[창12:1~4]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1) 경륜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부르심
이 말씀 중에서 여러분들은 뭐가 제일 복이 되시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 나이 75세였더라”는 말씀이 제일 복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75세가 시작이다. 여기 나이 많으신 분들도 75세가 시작이니까 그렇게 알고 사시고 주님을 증거하기를 바란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경륜을 알고 해야 한다.
나는 열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그러니까 오래 다닌 셈이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사역을 10년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아주 공의로우신 분이다. 그리고 아주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다.”는 이런 것만 알았지, 하나님이 무슨 일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믿고 있기는 한데 지금 하나님이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사람의 생각으로만 열심히 하는 것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하나님의 경륜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려는 목적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뭘 하는 것인가부터 알자!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시는지,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고 불렀는지”를 먼저 알자는 것이다.
왜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되었던가? 다른 사람은 안 다니는데 나는 다니게 되었었다. 그리고 다 떨어졌는데 나는 다니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서 뭘하려고 그랬을까? 이런 것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내 소원이 뭔가? 내가 뭘 하고 싶은가? 나는 뭘 해야 하는가?’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뭘 하고 계시는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인이 뭘 하는지 알아야 종이 거기에 맞춰서 일을 한다. 주인이 뭘 하는지 모르고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고 열심히만 하면 오히려 주인의 일을 망칠 수 있다.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열심히는 하는데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열심히 하는 사람보고 잘 못한다고 할 수도 없고 참 딱하다. 목숨 바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사람보고 잘못하는 것이라고 하면 하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유태인들에게 말씀하는 것을 보면 잘한다는 말은 없고 못한다는 말만 하셨다. 그러니까 서기관과 바리세인들과 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분을 냈다. 자기들은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온 힘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저 구석에 살던 어린 녀석이 와서 지가 뭘 안다고 우리에게 이러고저러고 하냐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하고 믿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해놓으면 ‘네가 뭘 안다고 그러냐?’하면서 분노한다. 그들이 알기는 뭘 아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아주 공평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다.'는 이런 것만 안다. 하나님이 어디로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모르고 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 이것을 아는 것이 꼭 필요하다.
하나님은 자기의 목적과 계획이 있어서 사람을 지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없었다면 사람은 지어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있는 이 탁자는 왜 만들었는가? 오늘 이 강당에 말씀을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이 탁자는 아예 처음부터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이 탁자가 존재하는가? 그것은 이 탁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인간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축복이냐는 것이다. ‘나는 필요한 분이 있다. 나는 필요한 분이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이것이 축복이다. 다른 것이 축복이 아니고 이것이 축복이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 이것을 인생에서 빼고 나면 아무 축복이 없다. ‘하나님이 내게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이것을 빼버리면 인생은 아무 것도 없다. 인생이 별것인줄로 알지만 별게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목적과 계획안에서 지었다. 그냥 장난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에서 이런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일(하나님의 경륜)의 시작인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한 것을 일부러 먹고 하나님의 경륜에서 이탈하게 되었는가? 아담 이후에 하나님의 경륜에서 이탈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집안에 있어도 알기 어려운데 집밖으로 나갔으니까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다. 다른 세상에 나갔으니까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자기 생각에 좋을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을 표현하려고 사람을 지었다는 이 사실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 할 일이 없다. 그냥 먹고 살다 죽으면 그만일 뿐이다. 잘 먹고 살다 죽으나 못 먹고 살다 죽으나 죽으면 다 똑같다. 전도서에서는 악한 자와 선한자의 결국이 일반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이 없으면 잘 먹고 사나 못 먹고 사나 다 일반이라는 것이다. 무덤에 가서 보면 잘 먹고 살다 죽은 무덤도 있고 못 먹고 살다 죽은 무덤도 있는데 잘 먹었다고 표시가 나는 것도 아니고 못 먹었다고 표시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편안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정말 고생~ 고생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덤에 묻히면 아무 표가 안 난다. 그러니까 결국은 일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이 없으면 사람은 이래 살아도 되고 저래 살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전혀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혹시 무슨 상담을 하러 온다든지 할 때 ‘그래도 되고 저래도 됩니다.’이렇게 대답한다. 꼭 이래야 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목적이 없으니까 신성한 계획이나 목적이 없으니까 꼭 이래야 될 일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내 스스로 산다면 절대적으로 안해야 될 일도 없고 절대로 해야 될 일도 없다. 절대로 해야 될 일과 절대로 안해야 될 일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싸울 일이 없다. 내가 하나님 없이 세상을 산다면 싸우고 말고 할 일이 없다. 그냥 편안하게 살다가 죽는 게 제일 좋다. 이 말이 내 말이 아니라 전도서에 있는 말이다. 여러분이 읽어보시기 바란다. 읽어보면 다 있다. 신성한 목적이 없다면 잘먹고 잘살다가 편하게 죽는 것이 제일이라고 한다. 성경에 그런 말이 써있다. 왜 그런 말이 써있겠냐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 목적도 없는 것이니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꼭 이렇게 안 하면 안 될 일이 있고 꼭 이렇게 해야만 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목적이 없는 사람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살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면 된다. 아무 목적이 없으니까 자기 하고 싶은 대고 하고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왜 아담은 하나님의 동산을 떠났는가? 하나님의 동산에는 누가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과 아담만 있었는 게 아니고 거기에는 천사도 같이 있었다. 천사를 보니까 자기(인간)가 가지고 있지 못한 능력(能力)을 가지고 있다. 또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지 못한 지혜(知慧)를 가지고 있다. 그것(능력과 지혜)이 부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먹지말라고 한 것을 먹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먹었는가 하면 그 능력과 지혜가 너무나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먹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천사의 능력과 지혜가 부러우면 독생자의 영광, 인자의 영광, 어린양의 영광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를 믿어도 능력과 지혜가 보이면 천사의 능력과 지혜가 부럽지 어린양의 영광이 부럽지않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게 된다. 십자가에 못박힌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도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먹고 있다. 무엇이 보이는가? 천사의 능력과 지혜가 보이니까.
이것이 종교 안에 가면 확실히 드러난다. 왜 종교 안에서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는가 하면 이 능력과 지혜를 부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얻어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능력을 얻어 보려고 쫓아다니는 사람은 능력의 신을 찾아가고 지혜를 얻어 보려고 하는 사람은 지혜의 신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헛다리짚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소원이 ‘아~ 나도 천사같은 능력이 있었으면! 천사와 같은 지혜가 있었으면!’해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길로 가면 하나님의 동산은 없게 된다. 그 길로 가버리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보이겠냐는 것이다. 그 길로 가면 어린양의 영광이 보이겠냐는 것이다. 완전히 거꾸로이니까 보이겠냐는 것이다. 다니엘서에 보면 사자 곰 늑대 강철같은 이를 가진 짐승이 나온다. 이것은 제국을 의미한다. 그 제국을 강력한 힘을 가진 짐승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강력한 짐승들이 판을 치는 곳에서 인자가 보이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인자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더라고 한다. 인자는 사람이니까 곰 사자 늑대 강철같은 이를 가진 짐승들 속에서 사람은 아주 약한 존재다. 한 마리로 하면 한입감이다. 동물원에서 철망을 통해서본 호랑이는 정말 무섭게 생겼다. 그냥 한입감이다. 거기에 가면 그냥 한입감이다. 왜 다니엘서에서는 짐승들을 표현해놓았겠냐는 것이다. 아담이 부러워하던 것이 그런 짐승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사의 능력과 영광을 부러워하면 우리는 인자의 영광을 따라갈 수 없다. 오늘날 종교가 타락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인자의 영광을 따라간 것이 아니고 짐승의 영광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부패하게 된 것이다. 아담이 공연히 먹었겠냐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구원하셨다. 성경에 노아에 대해서 “노아는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의인이고 당세에 완전한 자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짐승들의 세계(짐승같은 세계)에서 노아는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다는 말이다. 짐승들로 비교한다면 사자(호랑이)와 어린양이고 짐승들과 인자, 이렇게 비교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 사람, 이 사람을 통해서 방주를 지어서 만유를 포함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이 노아의 사적이다. 노아는 만유를 포함할 방주를 지었다. 모든 것이 다 들어갈 방주를 지었다.
신기한 것은 마지막에 보면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다 넣었다고 한다. 우리 생각 같으면 정결한 짐승만 들여보내고 부정한 짐승은 빼야할 것같은데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도 들어가고 부정한 짐승도 다 넣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만유를 포함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구원할 수 있는 방주다.
유태인들은 하나의 방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태인의 방주에는 유태인만 들어갈 수 있고 그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 우리가 미국에 갔을 때 유태인들은 회당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고 싶어서 유태인 회당에 갔었다. 그런데 이방인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유대인외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서 들어가지 못했다. 정토유태교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약간 좀 떨어진 유태인 회당에는 들어가 봤는데, 정통유태인회당에는 들어 가보지 못했다. 그들은 한 여름인데도 까만 옷을 입고 까만 모자를 쓰고 회당에 가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들은 지금도 안식일날 차를 타지 않고 다 주변에 모여살고 있다. 그러니까 유태인을 방주로 해서 만유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민족을 내세워서 하나님이 어떻게 만유를 구원하겠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태인들은 당연히 꺼져야 하는 것이다. 한 가지 족속만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렇다.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들만 들어가니까 그 방주는 폐지시켜야 한다. 그 방주는 쓸모없게 되었다.
다음에 지어진 것이 교회다. 교회가 방주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만유를 포함하는 방주여야 한다. 이것을 노아에게 계시했다. 노아의 방주는 위대한 계시였다. 만유를 포함하는 교회의 예표였던 것이다. 만유를 포함할 교회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도 들어오고 저런 사람도 들어오고 다 들어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사람이 다 들어오면 그것이 난장판이지 무슨 교회가 되겠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것이 아니고 그냥 다 들어오면 안 된다. 교회는 시장판이 아니다. 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들어온다. 이런 사람도 구속을 통해서 저런 사람도 구속을 통해서 들어온다. 구속을 통해서 들어오면 이런 사람이나 저런 사람이나 다 한가지다. 그러니까 만유를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너무 중요하다. 그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관문이다. 이 문을 통해서 만유가 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교회는 구속을 통해서 만유가 구원을 받는 집이다. 이것을 노아에게 계시해 주었다.
오늘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불러내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능력과 지혜가 판을 치는 세계, 천사들이 판을 치는 그런 세계에서 바벨탑을 쌓으려고 하는 세계에서 아브람을 불러냈다. 새로운 나라를 이루려면 사람이 새로워야 된다. 이름만 바꾼다고 새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에 우리나라 정당을 보면 이름만 계속 바꿔왔다. 해방이후 우리나라 정당은 처음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 하나도 없고 이름이 계속 바꿔졌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바뀌었다. 이름이 바꿔진다고 달라지냐는 것이다. 앞에 “새”자 하나 붙인다고 달라지겠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도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새나라가 되려면 사람이 새로워져야 새나라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을 불러내야 한다.
기독교 안에 이런 문제가 있다. 사람을 교회로 불러내면 뭐하냐? 그냥 현장에 놔두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을 복음으로 살게 하면 되지 않냐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교회에 가보지만 모두 “주여! 주여!”하다가 가버리니까 그 보다는 교회에 올 필요없이 현장에서 하면 되지 않냐는 이런 생각이다.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지만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은 반드시 불러져 나와야 한다. 거기 있어서는 도저히 안 된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거기 있어서는 안 된다. 그 판에 있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 “나는 애굽땅에서 종되었던 너희를 불러낸 여호와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전도할 때 그냥 거기서 잘먹고 잘살라고 해서는 아무 소용없다. 그 사람이 방주 안에 들어오도록 불러내야 된다. 불러내야 된다. 안 불러내면 도로 그 판이 된다. 도로 그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 판에 있는 사람은 도로 그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전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기독교인은 아무 힘도 없고 아무 능력도 없다. 힘이 없고 영향력이 없다. 그러니까 새로운 나라가 되려면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고 이 새로운 사람을 하나님은 불러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불러내서 온 사람들이다. 내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나는 거기에서 불러내서 나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되면 지금이라도 나와야 된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다른 곳이 어디인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교회로 가야 한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교회로 가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그러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 했는데 그때 아브라함에게는 땅이 없었다. 쉽게 말하면 교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이 말을 듣고 따라 온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어디로 나오라는 말을 듣고 나와야 한다. 나오라는 말을 들으면 나가야 한다. 그 자리에 있으면 소용없다. 예수 믿고 성경말씀 듣고 거기서 잘 되고 그러고 그냥 거기서 산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조금만 들어도 세상을 아주 잘 살 수 있다. 아주 편하게 잘 살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한 말을 잘 들으면 직장에 가면 상사에게 잘할 수 있다. 내가 상사를 잘 섬기라고 한다. 다 잘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잘 사는 것이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살면 모범생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면 잘 사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싸운다. 그러다 쫓겨나고 하는데 여기서 말씀이 조금이라도 들리는 사람은 싸울 일도 없고 하니까 가면 잘산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거기서 나와서 따로 있고. 내 백성아 너는 거기서 나와서 따로 있고.”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200만명이나 되는 상당한 숫자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있으니까 그냥 애굽사람의 종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러낸 것이다. 거기에 그냥 있었으면 400년 아니라 4000년이 있어도 종만 되고 다음에 가면 애굽화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불러낸 것이다. “나오라 내 백성아 거기 있지 말고 나와라”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는 새로운 백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새로운 사람이 없이는 새로운 나라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면 새로운 사람을 불러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나라를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아브람의 때는 바벨의 때, 즉 혼잡의 때였다. 서로가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은 네피림의 패권주의가 극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런 때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불러내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때는 바벨의 때였다. 혼잡의 때였다.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한 때였다. 오늘날이 꼭 그렇다. 바벨의 때는 “서로 높아지자.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하늘에 오르자.”는 것이다. 지금이 그렇다. 혼잡의 때였다. 뭐가 뭔지 모르는 시대다. 서로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내말하고 너는 니말을 하고 각자 자기 말만한다. 아무도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점점 더 심해진다. 참 큰 일이다.
옛날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 얼굴을 보고 얘기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말은 건성으로 하고 눈은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그러니 점점 이렇게 가면 사람하고 같이 대면할 필요가 없고 스마트폰만 보고 있으면 되지 싶다. 젊은애들은 다 스마트폰만 보고 앉아있다. 자기들끼리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그렇다. 심각하다. 부모하고 같이 있어도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뭘 하는지 잠을 자는지 밥을 먹는지 모르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서로 말을 하지 않는 시대가 오지 싶다.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노아의 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네피림이 왕성했다는 말은 인간의 패권주의가 극도로 왕성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불러내셨다.
우리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우리는 거기서 나와야 된다. 그 세계에서 나와야 된다. 짐승들의 세계에서 나와야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666”이라는 기이한 숫자를 말해놓았다. 구원파에 있다가 오신 분들이 많이 있는데 “666”이라는 것을 아주 신비롭게 설명을 해서 그것을 “컴퓨터”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짐승의 수니 곧 사람의 수니라.”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짐승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니엘서에 나왔던 그 짐승들이다. 사자 곰 늑대 강철같은 이를 가진 짐승. 지금도 마찬가지로 세상은 짐승들이 판을 치는 곳이다. 강한 자가 판을 친다. 강한 자를 짐승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왜냐하면 짐승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대로 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네피림의 판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셨으며, 애급에서 노예 된 백성들 안에서 모세를 불러내셨다. 그는 지으시고 구원하시며 불러내시는 분이시다. 자신을 대신하게 하시려고 만유 중에서 사람을 지으시고, 네피림의 독주와 횡포 속에서 만유를 포함하는 은혜를 주시려고 노아를 구원하셨으며, 새 일을 하시려고 아브람을 불러내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네피림의 판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냈다. 애굽에서 노예 되었던 백성들 안에서 모세를 불러내었다. 하나님은 불러내시는 분이시다. 거기에 있으면서 죽니 사니 할 필요가 없다. 나오면 될 일인데 왜 거기 붙어서 같이 먹자고 싸우느냐는 말이다. ‘내 인생이 괴롭다. 괴로워서 못 견디겠다.’ 이런 사람이 많이 있다. 많이 있는데 보면 ‘나오면 좋겠구만...’ 안 나오고 그 자리에서 괴롭다고 하는 것이다. 이상하다. 거기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쪽 방은 차고 이쪽 방은 따뜻하니까 다른 방으로 옮겨가면 될 것이다. 춥다고 하니까 ‘그래요? 이쪽 방으로 옮기세요.’ 주인이 그랬다. 그런데 안 옮기고 계속해서 춥다고만 하면 어떡하는가? 옮기지도 않고 춥다고만 하면 말이다. 이것은 여름에 시원하게 살려고 해 놓은 방이고, 저것은 겨울에 따뜻하게 살려고 해 놓은 방이다. 그러니까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쪽 방으로 가고, 찬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쪽 방으로 가도록 만들어 놓았으니까 추우면 따뜻한 방으로 옮겨가면 된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 세상에는 차가운 방만 있는 게 아니고 따뜻한 방도 있다. 다 고통스러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행복한 것도 얼마든지 있다. 있으니까 행복한 쪽으로 옮겨가면 될 것인데 안 옮겨가고 그 자리에 앉아서 괴롭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괴로워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너무너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불러냈다. 모세를 통해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고 해서 불러냈다. 우리도 그렇게 기적을 보고 나오면 얼마나 쉽겠는가? 하지만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기적이라는 것이 꼭 그런 방식으로만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서 매를 때려서 나오라고 할 수도 있고, 모가지를 틀어서 나오라고 할 수도 있다. 머리끄댕이를 끌어서 나오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안 나오면 각오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불러내신 분이시다. 지으시기만 하고 놓아 둔 것이 아니고, 지으시고 구원하시고, 구원해서 놓아두신 것만 아니고 불러내신 분이시다.
사람들은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천당에만 가면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 천당으로 불러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로 불러낸다. 그 사람들은 곤란한 사람들이다. 구원받았으니까 천당 간다고 하고 있으면 하나님 창조의 목적과 계획이 빗나가 버리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땅 위에서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고 사람을 지었다. 그런데 구원받았으니까 천당 간다고 해 버리면 허당이다. 하나님은 헛일 한 것이다. 구원받고 천당 가지 말고 구원을 받았으면 하나님이 불러내신 땅으로 나와야 한다. 그 나라를 위해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진다. 다 천당으로 가 버리면 하나님의 경륜은 안 이루어진다. 천당도 만원이라 갈지 안 갈지 모르지만 다 가버린다면 하나님은 허당이다.
네피림의 독주에서, 횡포에서 만유를 포함하는 은혜를 주시려고 방주를 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은 피란처로서 교회를 우리에게 주셨다. ‘나오면 어디로 가나? 나오면 갈 데 없다.’ 이게 아니고 나오면 딱 갈 데가 있도록 정해 놓고 나오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낼 때 갈 데도 없이 불러냈겠는가? 갈 곳이 있으니까 불러냈다. 집을 지어 놓고 사람을 부르지 집도 안 지어 놓고 사람을 부르겠는가?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면 다 있을 자리를 만들어 놓고 불러내신다. 그냥 불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을 청할 때도 방도 없는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라고 하겠는가? 방이 있으니까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라고 한다. 내가 보니까 하나님이 불러내실 때 다 마련해 놓았다. 내가 모르지만 다 마련해 놓았다. 나는 ‘이런 문제가 있고 저런 문제가 있어서 어려울 텐데.’ 했는데 그런 문제는 미리 알고 다 해결해 놓았다.
CCC에 들어갔을 때 가 보니까 기라성 같은 청년들이 있는데 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몸도 약하고 능력도 없었다. 이런 사람으로 들어갔는데 쭐렸다. ‘따라가기는 해야 되는 데 어떻게 하나?’ 이런 염려가 있었다. 그랬는데 내 체질에 딱 맞는 곳으로 보내졌다. 아주 정확하게 맞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래서 남들이 못하는 일도 하게 하셨다. 내가 염려할 필요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보다 미리 하시고 준비해 놓으셨으니까 말이다.
나는 의정부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충주로 보냈다. 내가 의정부로 갔더라면 감당하지 못하고 중도하차했을 것이다. 그런데 충주로 가서 내가 거기서 4년간을 버티고 산 것이다. 충주로 갔기 때문이다. 충주에 가니까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다. 너무너무 신기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엑스폴로 74에 사람들을 동원해야 했는데 충주, 중원, 제천, 단양지구를 내가 맡았다. 이 지역이 얼마나 넓은가? 다 촌구석이고 말이다. 지금은 그래도 교통이 좋은 편이지만 그때는 한 교회를 찾아 가려면 하루 갔다가 오면 그만이다. 교회를 방문해야 하는 데 더운 여름날에 돌아다녀 보니까 딱 두 교회를 가보고 질려서 못 갔다. 더 이상 못 가겠다. 가봤자 될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돌아다녀서 도저히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서 3000명이 동원되어서 갔다. 어떻게 3000명이 동원되었겠는가?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했는데 3000명이 동원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아무 것도 안 하면 안 된다. 힘이 있는 사람이 그러면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내게 딱 맞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충주에 가니까 충주, 중원, 단양 제천 지구에서 제일 오래된 모 교회가 있다. 140년 이상 된 그런 교회인데 그 교회가 이 지역 전체의 중심교회, 모 교회다. 거기에 가니까 그 교회 강단을 비워놓고 나에게 맡기는 것이다. 나는 감리교 목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교단도 아닌데 6개월 동안 거기에 와서 설교를 하라는 것이다. 목사가 캐나다에 가면서 6개월 동안 나보고 거기에 와서 설교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 힘으로 된 게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렇게 큰 교회에서 6개월 동안 설교를 했다. 그 교회가 충주 안에 있는 기독교 유지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다. 여기는 온통 감리교 판이다. 장로교는 가끔 가뭄에 콩 나듯이 있다. 다 감리교 판이다. 그 교회에서 내가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충주, 중원, 제천, 단양지구에 있는 모든 감리교회가 다 감리교 목사인줄 안다. 자기 교단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방문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얼마 왔느냐고 물어보니까 3000명이 왔다고 한다. 내 생전에 3000명을 동원하다는 것은 내 명함에 없는 일이다. 절대 없는 일이다. 내가 무슨 수로 쫓아 다녀서 3000명을 동원하겠는가?
하나님은 다 아시고 내게 맞도록 그렇게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능력이 있는 것만큼 맡기고, 힘이 없는 사람은 힘이 없는 것만큼 맡긴다. 다 알아서 맡긴다. 그러니까 나오라고 하면 무조건 나오면 된다. ‘거기서 나와서 너는 따로 있고, 거기서 나와서 너는 교회로 들어오라.’ 그러면 들어오면 되는 것이다. 망설일 필요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봇짐을 싸서 나오면 안 된다. 그것은 절대로 안 되고 생활을 교회생활로 하라는 말이다. 살림 팔아서 보따리 싸서 교회로 들어오면 아주 곤란하다.
네피림의 세상에서 아브람은 가진 것도 없고 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부르니까 나왔던 것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 을 떠나라 하니까 떠났고, 내가 네게 지시한 곳으로 가라니까 갔던 것이다. 지시한 곳이 어디인지 몰랐으나 가라는 말만 듣고 갔던 것이다.
네피림의 세상에서 아브라함은 가진 것도 없고 하는 일도 없고 했는데 부르니까 그냥 나왔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 하니까 떠났다.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고 하니까 갔다. 지시한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 가라는 말만 듣고 온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다 준비해 놓았다.
가다보니 세겜의 하나님을 만났고, 벧엘의 하나님을 만났으며 헤브론의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은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었던가! 세겜에서 능력의 하나님을, 벧엘에서 집의 하나님을, 헤브론에서 교통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닌가!
그가 75세의 노인인데 처음에는 세겜이라는 땅에 도착했다. 두 번째는 벧엘이라는 땅에 도착했다. 세 번째는 헤브론에 도착했는데 이 지역이 아주 중요하고 의미있는 지역이다. 세겜은 어깨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이다. 벧엘이라는 말은 집이라는 뜻이다.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벧은 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이라는 땅에 도착했다. 세 번째는 헤브론인데 헤브론은 교통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 세 곳을 거쳐서 마지막에는 헤브론에 정착하게 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가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나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 다음에 그는 집의 하나님, 떠돌이로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하나님이 아니고 거처가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다는 분이 있다. 무소부재하다는 말은 피상적인 말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자기 집에 있어야 될 게 아닌가? 하나님의 집이 교회란 말이다. 이것은 디모데서에 있는 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에 계신다. 딴 데 가서 하나님을 찾아봐야 안 된다.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람을 뒤로 보면 햇가닥해서 이상해진다.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다. 기도원에 가서 바위 위에서 기도하다가 만났다는 사람들,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뒤로 가면 다 이상해져 버린다.
기도원을 통해서 부흥회를 갔더니 소나무 뿌리를 잡고 기도하라고 했다. 그래서 밤중에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다. 호랑이도 없는 산인데도 왜 그렇게 으스스 한지 모르겠다. 산에 앉아서 기도를 한다고 하는 데 부시럭거리는 소리는 왜 그렇게 많이 나는 지 오싹오싹했다. 그러니까 소리를 더 질러야 했다. 그런 소리가 안 들리도록 크게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렇게 하다가 무슨 소리를 듣는가 보다. 그러니까 그게 정상적인 소리인가? 가만히 있어서 들어야 정상적인 소리지 거기 가서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다 들은 소리인데 그게 정상적인 소리인가? 그래서 사람이 제대로 안 된다. 뒤로 가 보면 다 이상해져 버린다. 처음에는 믿음이 좋아서 한다. 다음에 가면 이상한 곳으로 가 버린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경험한 경로는 아주 정상적인 경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나를 지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집의 하나님이다. 어디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지 떠돌아다니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교통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교통을 통해서 알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인 헤브론에서 정착하게 되고 유명한 막벨라 굴이 헤브론에 있다. 삼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삼대가 묻혀 있는 막벨라 굴이라는 묘가 헤브론에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무개가 죽어서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이런 말을 할 때는 다 헤브론을 말한다. 거기가 조상의 묘소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가 가는 곳이 거기다.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열조에게로 돌아갔고...’라고 한다. 이 말은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헤브론으로 돌아갔고’ 이런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영원한 교통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런 뜻이다.
하나님은 집에 거하시는 분이시고 교통하시는 분이시다. 스스로 생각으로 찾아간 사람, 교리 지도를 보고 찾아간 사람, 전통을 믿고 찾아간 사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만났다고 해도 엉터리 다른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알 수가 없다. 어디에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생각 속에도 계시지 않고 교리 속에도 계시지 않고 전통 속에도 계시지 않는 분이다. 전통을 찾으면 있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교리를 잘 지키면 하나님이 거기에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이 생각을 잘 하면 하나님이 있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를 청종하고 따르는 사람 바로 앞에 계시는 분이시다. 어디서나 언제나 그렇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청종하고 따르지 않는 한 어디에 가도 없다.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라 하는 대로 가면 바로 앞에 가신다. 하나님이 ‘가라’ 해서 내가 가면 하나님은 바로 앞에 가신다. 바로 앞에 가시면서 길을 인도해 주신다.
‘나는 길이요’ 그렇지 않은가? 나는 어디로 갈 지 모르고 간다. 가라하기 때문에 간다. 가라할 때 가면 바로 앞에서 인도하신다. 신기한 분이시다. 우리가 확인해서 주님을 따라 가려면 못 따라간다. 모르는 데 어떻게 확인이 되는가? 사탄이 가라는 대로 가면 사탄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이 가라는 대로 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당연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불러내신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하나님이 가라는 말을 듣고 가는 사람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따로 동행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땅을 약속하심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도 땅이 필요하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땅을 찾아오셨다. 그에게는 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람에게도 땅이 필요했던 것이다. 땅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필요하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라면 땅은 그의 발등상이다(행7:49). 또한 하늘이 그의 거처라면 땅은 그의 기업이다. 이 원리는 사람에게도 동일하다. 사람은 땅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런데 네피림의 시대에는 그들의 강포로 인하여 땅은 황폐했고(창6:22) 바벨의 시대에는 땅이 혼잡하여 모든 교통이 단절 된 상태였다(창6:11,11:7참). 하나님의 나라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새 땅이 필요했고 부름 받은 사람에게 그 땅을 약속하셨다. 새 일을 위하여서 새 사람은 물론 새 땅도 필요한 것이다(계21:1~참).
하나님 나라는 새 땅에 세워진다(계21:1참). 땅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셨던 것이다(마6:10).
이렇게 불러낸 사람은 그냥 불러낸 것이 아니고 아주 중요한 것을 약속하신다. 땅을 약속하신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땅이 있어야 한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도 자신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늘에서가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땅을 찾아 왔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더라.’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찾아 왔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도 땅이 필요했다. 여호와께도 땅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땅은 사람에게나 여호와에게 똑 같이 필요한 것이다. ‘하늘이 보좌라면 땅은 발등상이다.’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이 그의 거처라면 땅은 그의 기업이다. 이 원리는 사람에도 동일하다. 사람은 땅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러나 네피림의 시대에는 그들의 강포로 인하여 땅은 황폐해지고 저주받았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을 것이고, 바벨의 시대에는 땅이 혼잡하여 모든 교통이 단절된 상태다. 하나님 나라가 설 자리가 없단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땅을 약속했던 것이다. 그 지정된 땅이 뒤로 알고 보니까 가나안 땅이었다. 이것은 꼭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필요한 땅이었다. 새로운 나라는 새 땅이 필요했다. 새 나라를 건설하려면 새 땅이 필요했다. 이것을 약속의 땅이라고 한다. 새 일을 위해서는 새 사람은 물론 새 땅도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을 불러내시고 난 다음에는 땅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셨다면 나에게 땅이 없이 불러내시겠는가? 땅을 놓고 불러내신다. 땅이 없이 그냥 공중에서 불러내신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나님의 나라는 새 땅에서 세워진다. 땅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천당에 가 버리면 헛일이다. 천당에 가면 나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허당인 것이다. 파랑새를 잡았다가 날아가 버린 것이나 똑 같다. 하나님이 사람을 겨우 건져 놓았더니 그만 천당을 간다고 가 버리면 하나님의 경륜은 땅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데 다 천당으로 가고 나면 하나님의 경륜은 어디에서 실현되는가? 그러니까 천당 가지 말고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여러분은 공로를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천당으로 가 버리면 하나님을 아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구원을 했는지 모르는 그런 분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천당에 가더라도 일단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고 그 다음에 천당을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해야 한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땅으로 임하라는 말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라고 한다. 주님이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다 천당갈 생각만 하고 있다. 천당에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 나라부터 봐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땅에 있고 땅에서 그 나라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기 위해서 정하신 곳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없었다. 이스라엘 안에만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은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나라 국회 안에도 있고 다 있는 것 같다. 거기에는 없다. 거기는 하나님이 가 있을 만한 곳이 못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교회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는 없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해야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교회는 옛날의 이스라엘과 같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자기들끼리만 사는 나라이고 교회는 만유를 포함한 방주다. 그러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거처는 훨씬 넓어진 셈이다.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거처는 교회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면 우리의 땅은 교회다. 교회가 우리의 땅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어디로 불러 모으는가? 교회로 불러 모으고 있다. 이 교회가 단순하게 예배드리고 이런 곳이 아니다. 촛불 켜 놓고 하는 이런 곳이 아니고 가서 기도나 하고 오는 이런 곳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순모임을 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나라다. 그게 하나님 나라다. 지금 보면 시시하다. 하지만 그게 시시한 게 아니다. 하나님 나라다. 그리고 점점 가면 갈수록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점점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순모임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지 않으면 그냥 사람들끼리 모였다가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해야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런데 순모임 안에 시시한 것 같아도 거기가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데가 없다.
어떤 사람이 어떤 형제와 불편하게 지내다가 순모임에 와서 자기가 도저히 못 견뎌서 고백을 하게 되는 이런 사람도 있다. 주일학교 아이들도 ‘세상 사람들 같으면 안보고 살지만 같은 교회에서 영원히 살 것인데 미워하며 살겠는가?’ 해서 화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냥 화해를 하는가? 안 한다. 세상에서는 안 한다. 세상에는 사탄의 통치가 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한다. 내가 미우면 미웠지 잘못했다고 말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밉기는 밉지만 미우면 같이 못 있다. 미우면 같이 하나님 나리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기가 고백을 하고 내려놓고 ‘야! 너와 내가 좋게 지내자. 우리는 평생 같이 살 사람이 아니냐?’ 이렇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해서 그렇다. 하나님의 통치가 별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간단한 일이지만 우리 안에서 화평을 이루는 일들이 다 하나님의 통치로 인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너희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요한 1서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통치 때문에 그렇다. 나 혼자 사는 데 고백하고 말 게 뭐가 있는가?
세상에 편한 것이 스님이다. 암자에 있어 봤는데 사람이 없다. 아무도 없다. 자기 혼자다. 그러니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산다. 간섭할 사람도 없고 싸울 사람도 없다. 세상 편하지 않은가? 내가 있던 절에는 보살 할머니가 한 분 있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좀 별나다. 그래서 주지 스님께 뭔가 잔소리를 많이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주지스님이 가끔 가다가 큰 소리가 나온다. 뒷방에서 막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런가 하면 밥해주는 보살 할머니에게 그러는 것이다. 보살 할머니도 없으면 소리 지를 일도 없을 것인데 있다 보니까 그런 것이다. 나올 때는 얼굴이 벌개서 나온다. 도가 다 깨지는 것이다.
부름받은 사람은 교회 안에 있어야 된다. 교회 안에 있어야 하나님의 통치를 볼 수 있다. 우리가 교회가 흘러가는 것이나 간증이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되면 통치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가? 세상에는 그런 일이 없다. 사람의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 없다. 죽을 때 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지 변화해 가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자꾸 사람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년의 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다. 어제 그 사람이 아니고 오늘은 다른 사람이다. 자꾸 변한다. 고정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통치가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교회를 지켜야 한다. 그런 집을 지켜야 한다. 자기가 살 집이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흉년이 들면 양식을 얻으려고 그 땅을 떠났던 적이 있었다. 남방으로 내려갔다고 하는 데 그것은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양식을 구하려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남쪽은 애굽 땅이다. 비옥한 땅이다. 그래서 흉년이 안 드는 땅이라 찾아가는 데 번번이 실패하고 돌아온다.
왜 번번이 실패하고 돌아왔을까? 우리가 생각하면 좋은 땅에 갔으니까 잘되어서 돌아왔을 텐데 번번이 실패하고 돌아왔다. 남방은 당시 부요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가면 실패하고 돌아오고 실패하고 돌아오곤 했다. 왜냐하면 ‘너는 이 땅을 지켜야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땅을 약속하지 않았느냐? 이 땅에서 내가 너를 복 주겠다 했다. 이 땅에 있으면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고 했는데 네가 이 땅을 떠나면 되겠는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우리에게 정해주신 땅이다. 그 땅에서 복을 주겠다고 했는데 다른 데 가서 복이 없다고 하면 되겠는가? 대구교회 교인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다른 곳에 가면 복에 오겠는가? 이 안에 있어야 하나님의 경륜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되고, 이 안에 있어야 하나님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어야 배급도 같이 받아먹게 된다. 다른 데 있는 데 어떻게 배급되겠는가? 안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번번이 실패하고 돌아왔다. 마지막에는 헤브론에 와서 살게 되었다. 이삭도 그랬다. 그랄에 내려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 야곱도 마찬가지로 애굽에 내려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표시하고 있다. ‘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할 때 그냥 약속한 게 아니구나. 이 땅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땅을 약속하신 것이로구나.’ 이것이 지금의 교회의 예표였다. 그의 후손들 역시 그 일을 반복했다. 결국 애굽에 내려갔다가 400년 동안 억류되었던 것이다. 억류된 사정을 보면 그럴 듯하다. 배고파서 내려간 것이고, 요셉이 잘 되어서 내려간 것이고 다 이유가 있다. 이유가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400년을 억류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은 거기서 나와야 했다. 출애굽을 해야 했다. 어디로 가려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말이다.
이것은 부름받은 사람은 약속의 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떠나서 다른 곳에 가 보라. ‘이제 나 혼자 떠나서 살아도 살겠다. 굳이 교회를 안 나가도 살겠어.’ 하고 나간다. 나가면 쥐엄 열매나 먹지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다. 돼지 막에서 일하는 것 외에는 일이 없다. 하나님나라에 살던 사람이 다른 데 나가면 돼지우리를 청소하는 일 밖에는 없다.
그의 후손들 역시 그런 일을 반복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에 살아야 되고 그 땅이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좀 못마땅한 사람도 있고 좀 시원찮은 사람도 있다고 해도 거기 살아야 한다. 좋아도 내 집이고 싫어도 내 집이다. 내 집이 제일 좋은 것이다.
여기 와서 살아보니까 시설이 참 좋다. 그래도 집에 계시는 것보다는 불편할 것이다. 자기 집은 자기에게 맞춰서 세팅을 다 해 놓았다. 그래서 아주 편하다. 그런데 남의 집은 자기 집과 다르다. 세팅이 잘 안 되어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차이가 많이 난다. 나는 내 몸에 맞춰서 가구라든지 시설을 다 배치해 놓았다. 그래서 화장실에 들어가면 딱 되어 있다. 비데가 있어서 나는 치질이 있지만 비데를 사용하기 때문에 치질이 안 나온다. 객지에 나오면 아예 없다. ‘아이고 이거 큰 일 났네.’ 이렇게 된다. 미국에 가니까 도상 형제 집에 비데가 없어서 비대 사지 않으면 오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자기 땅을 꼭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교회 안에서 흐른다.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 안에서 시행된다. 다른데서 하나님이 있는데 왜 이 모양인가 하면 안 된다. 거기는 하나님의 통치가 흐르지 않는 곳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보려면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3) 씨를 약속함
부름 받은 사람에게 땅을 약속하고 이어서 씨를 약속하셨다. 씨가 좋아야 한다. 농사의 제일 성패는 씨에 달렸다. 하나님 나라도 씨에 달렸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밭으로 지음 받았으나 사단의 꼬임에 빠져서 다른 씨를 먹고 바벨로 가고 말았다. 그는 이탈한 씨를 받아 이탈한 밭이 되고만 것이다. 새로운 나라는 새로운 씨로 경작된다.
두 번째는 씨를 약속한 것이다.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땅만 약속한 것이 아니고 씨를 약속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씨가 있어야 하니까 이 씨가 중요하다. 씨가 아주 소중하다. 농사의 제일 성패는 씨에 달려있다. 하나님 나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씨에 달려있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밭으로 지음 받았지만 사단의 꼬임에 빠져서 다른 씨를 먹어버렸다. 그러니까 바벨로 가고 말았다. 땅은 있는데 씨를 다른 씨를 받아버렸다. 이탈한 씨를 받아들여서 이탈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거역한 사람의 말을 들으면 나도 거역한 사람이 된다. 불순종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나도 불순종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교제를 해도 그런 교제는 하지 말아야 한다.사람이 부정적인 사람의 곁에 늘 있어서 처음에는 자기 꼴은 모르고 자기가 그 사람의 말을 들어준다고 생각을 하는데 들어준다고 들어주다가 자기가 물이 들어서 자기가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을 살릴 만한 능력이 있어야 들을 것이 있지 살릴만한 능력도 없으면서 들어준다고 다니다보면 나중에는 똑같아진다. 그러니까 자기 능력을 모르면 듣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은 왕따를 시켜버려야 한다. 그러면 자기가 부정적인 얘기를 계속 하다가 가만 보면 자기를 왕따 시켜 버리는 것을 알면 ‘내가 잘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영원히 왕따 될 수는 없으니까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자꾸 들어주면 잘하는 줄 알고 자꾸 한다. 자기가 뭘 잘하는 줄로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얘기, 거역의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왕따를 시키면 빨리 회개를 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좀 극단적으로 하는 얘기이다.
씨가 잘못 들어오면 잘못된다. 말은 씨다. 말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말이 씨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말을 계속 듣는다는 것은 부정적인 씨를 계속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흙이 별 대책이 없다. 어차피 씨를 계속 그런 씨를 받게 되면 나게 되어 있다. 자기만 거기서 안한다고 할 수 없다.
여호와께서는 이 씨를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셨고(창12:7,15:1~18:15) 아브람은 이 씨를 얻기 위해서 자기의 가능성이 다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씨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늘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이 씨를, 새로운 씨를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라함은 이 씨 때문에, 이 씨를 얻기 위해서 자기 가능성이 다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일생이 왜 100살까지 갔는가? 그것은 이 씨 때문이다. 인간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씨는 하늘에 속한 씨이기 때문에 내 가능성과 범벅이 되면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서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하나님이 씨를 주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고 빨리 주고 싶은데 내 속에 있는 것이 섞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야속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 속에 처리될 문제가 많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기력이 다 할 때에 비로소 아들을 얻었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죽고 다시 난 것이다. 새로운 씨는 죽고 다시 난 씨다. 이탈한 사람이 개서, 연장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기력이 다할 때 비로소 아들을 얻었다.100살이 되어서 얻었다는 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다 끝났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가 잘못된 것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자기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움직이니까 하나님이 일할 자리가 없다. 내가 다 해버리면 하나님이 일할 자리가 없다. 유능한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교회를 경영해버리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전혀 없다. 어디서 일하시겠는가. 가만히 놔두고 봐야 할 것인데 놔두고 볼 수가 없다.
어제도 친구 목사님과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분도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님이다. 환원운동, 그리스도 환원운동,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지금 교회들은 너무 부패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나보고 어떻게 이렇게 했느냐고 해서 나는 가만히 놔두고 봤다고 했다. 구경만 하니까 너무 신기하더라고 했더니 자기는 그것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씨를 얻었는데 어떤 씨를 얻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났는데 그 씨를 얻은 것이다. 죽고 다시 산 씨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류에게는 새로운 씨다. 죽고 사시 산 씨가 바로 새로운 씨다. 아담은 죽고 다시 산 씨를 받지 않고 선악과를 먹고 신이 될 것이라는 씨를 받았다. 그래서 빗나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씨를 주려는 것이 아니고 죽고 다시 난 씨를 주려고 불렀다. 오늘 우리를 부르신 것도 우리를 개선시켜서, 청소해서 깨끗한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이 되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고 다른 씨를 주려고 부르신 것이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씨를 내가 받아야 되지 자기 것을 가지고 갈고 닦으려고 생각을 하면 아무리 가도 안 된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그런 이상한 말이 왜 나오겠나. 차라리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빨리 씨를 교체하기가 쉽다. 그런데 자기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씨를 교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로운 씨를 주려고 우리를 불렀다. 대구교회, 왜 대구교회로 불렀는가? 그것은 새로운 씨 때문에 부른 것이다. 똑같은 씨면 우리는 할 필요가 없다. 씨가 새로워야 한다. 죽고 다시 난 씨로 세워져야 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씨는 죽고 다시 난 씨를 약속한 것이다. 100살이 되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다. 죽고 새로 났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려가서 제물로 드리려 했는데 뿔이 걸린 양을 발견하고 양을 잡아 드렸다. 그러니까 죽고 다시 났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 갔다 왔다. 이것은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고 다시 났다. 이 씨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의 씨가 되고 교회의 씨가 되고 전적으로 새로운 씨, 이 씨에 의해서 우리가 다시 난 것이다. 니고데모에게 말씀할 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이 씨로 나야한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새로운 씨에 의해 다시 난 것이다. 구약 세계는 아브라함이 얻은 씨의 나라였고, 신약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나라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언약은 씨-이삭에게서 나타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생명은 교회에서 확대, 재생산 되었다.
구약의 세계는 아브라함이 얻은 씨의 나라였다.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너의 후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통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이스라엘의 씨는 이삭이다.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네 씨로 말미암아서, 네 씨로 말미암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삭이 이스라엘의 씨고 근본이다. 구약세계는 이삭이라는 씨가 들어와서 생겨진 나라이다. 신약세계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씨가 된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씨가 된 교회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언약은 이 씨에서 성취되었다. 아브라함도 많은 복을 받았지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모든 맹세는 다 이삭에게 와서 성취가 되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교회에서 확대 재생산 된다. 그러니까 예수의 생명과 예수의 씨를 보려면 교회에서 봐야 한다. 다른데 가서는 볼 수가 없다. 교회에서만 나올 수 있다.
씨의 결과다. 믿는 이들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씨의 문제일 수 있고,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바다에 가서 범을 찾기 때문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땅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마6:10)
열매는 씨의 결과이다. 믿는 이들의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씨 없는데 만 갔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교회를 다 돌아다녀봤는데 하나님 나라가 없더라는 말은 씨가 없다는 말이다. 씨가 있다면 열매가 있을 것이고, 하나가 있더라도 열매가 열릴 것이다. 씨가 없으면 없는 것이다. 다른 것만 무성하게 있고 이 열매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불신자들이 하나님 나라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주인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하고 와서 첫 번째 하는 말이 내가 우주를 다 돌아봤는데 하나님 나라가 없더라고 말했다. 이 사람은 바다에 가서 범을 찾다가 온 사람이다. 우주공간에 가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계시겠는가. 그러니까 자기가 그래도 우주인이라고 내가 다 돌아봤는데 하나님이 없더라고 무신론자를 대변해서 말을 했다. 그때는 공산주의가 한창 득세하던 때였으니까 무신론자를 대변해서 한 말이다.
그러니까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사람은 씨를 못 본 사람이다. 불신자로서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것은 바다에 가서 범을 찾다가 온 사람이니 없을 것이 당연하다. 우주 공간에 가서 하나님을 어떻게 찾겠는가.
이 씨를 받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밭으로서 갈아엎는 과정을 되풀이 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를 온전하게 하셔서 그 씨를 주시고 만민이 이 씨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다.(창22:17-18) 복은 씨의 문제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을 불러 이 씨를 주시고 경작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 씨를 받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밭으로서 갈아엎는 과정을 계속 되풀이 했다. 성경을 읽으면 아브라함이 실패를 거듭한 것을 볼 수 있다. 왜 그 실패를 거듭하고 있을까? 그리고 왜 그 실패를 써놓았을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씨를 받기 위해서 갈아엎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풀이 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호와는 그를 온전하게 했다. 그래서 그 씨를 주고 만민이 그로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혹시 우리를 갈아엎더라도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해야 된다. 이것이 ‘나를 갈아엎으시네. 갈아엎어.’ 왜 갈아엎으시는가? 온전하게 하려고. 이런 저런 일들을 통해서 갈아엎으시는 것도 많이 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갈아엎는 경우도 많이 있다. 사건을 통해서 갈아엎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갈아엎어지면 참 좋다. 그런데 몸으로 때우면 괴롭다.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몸으로 때우려는 사람은 괴로움을 당해야 한다. 어느 것으로 하겠는가. 여기 오신 분들은 다 말씀으로 갈아엎어지려고 온 사람들이다. 말씀도 안 듣고 참석도 안하고 졸기만 하는 사람은 몸으로 때워야 한다. 언젠가는 때워야 한다. 그냥 지나가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공짜가 없다. 절대로 그냥 지나가는 법은 없고 꼭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말씀 듣고 하면 얼마나 좋은가. 편안하고 좋고 순모임 나가서 변화되면 얼마나 좋은가. 옆에서 누가 갈아엎어주면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가. 그리고 내가 미처 모르는데 옆에서 알려주면 얼마나 좋은가.
사람은 자기 얼굴은 못 보게 되어 있다. 우리가 거울이 있으니까 내 얼굴을 알지 거울이 없으면 절대로 자기 얼굴을 모른다. 우리가 거울로는 표면적인 얼굴은 보지만 속에 있는 얼굴은 못 본다. 그런데 그 속에 있는 얼굴을 누가 보여주느냐 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보여준다. 그러니까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모임에 가보면 옆에 사람이 다 말해주니까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옆에 있는 사람이 해주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기분 나쁘다고 하지 말고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면 빨리빨리 밭이 갈아져서 좋은 밭이 되게 된다. 그리고 씨를 빨리 받게 된다.
씨를 주시고 만민이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신다. 죽고 다시 난 생명 죽고 다시 난 씨는 우리인생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풍요로워진다. 새로운 씨이기 때문이다. 아담으로부터 받은 씨는 나도 옹색해지지만 다른 사람도 다 옹색해지게 만들어버린다. 내가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다 괴롭게 만들어버린다. 자기만 괴로우면 좋은데 자기만 괴롭고 있으려니 기분이 나쁘다. 다른 사람도 같이 괴로워야 한다.
불면증으로 잠을 못자고 있는데 옆에서 코를 골면서 자고 있으면 밉다. 나는 못자도 이 사람은 자면 좋을 것인데 나는 밤잠을 설치고 있는데 쿨쿨 잠을 자고 있으면 영감이라도 밉고 마누라라도 밉고 코를 비틀어버렸으면 한다. 자기가 괴로운 사람은 남을 괴롭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된다. 심지어는 자기가 괴로우면 자기 자식까지도 괴롭게 한다. 인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에게도 자기가 괴로우면 그 괴로움을 전염시켜 주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복해야 된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빨리 빨리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속에 가지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을 다 불행하게 한다. 다 옹색하게 만들고 다 불행하게 만든다. 전염병처럼 그렇게 된다. 행복도 전염되고 불행도 전염된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고 염병이라고 했다. 염병이라는 말은 전염병이라는 뜻이다. 복음이 전염되듯이 전염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충만한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 전염된다. 그런데 한 사람의 불의한 사람이 있으면 불의가 전염된다. 병아리들이 한 놈이 긁기 시작하면 다 긁는다. 다 날개 털기 시작하면 다 날개를 턴다. 참 이상하다. 닭장에서 닭이 한 마리 울기 시작하면 온 닭장에 있는 닭이 다 운다. 전염된다. 이상하게 이심전심 전염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복해야 한다. 복된 사람이라야 남을 복되게 할 수 있다. 복된 길은 간단하다.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형상으로 지어 자신의 계획을 두어 자신을 대신하게 하겠다는데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이 행복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다른 불행은 다 접어버려도 된다. 그것은 가져갈 것이 아니니까 이 한 가지만 해도 불행은 접어도 된다. 그런데 더군다나 나를 불러내시고 구속하시고 땅을 주겠다고 하고, 씨를 주겠다고 하고 오만 것을 다 주겠다는데 뭐가 불행할 일이 있겠는가.
그 불행이라는 것은 잠깐 지나갈 것들에 불과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질 것이다. 그것은 다 우리 육신에 속한 불행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하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영원하다. 그러니까 이 영원한 축복을 생각하고, 하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고, 그러면 밝은 세상이 보인다. 그런데 이 세상만 보고 있는 사람은 만날 신경질만 나는 것이다.
국회에서는 왜 매일 월급 받고 싸움질만 하는지, 다 신경질난다. 감사한 일이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처럼 경제가 이렇게 급성장한 나라가 없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밥을 못 먹었는데 지금은 밥이 남아돌아서 난리다. 이런 세계에 살아도 감사한 것을 전혀 모른다. 그리고 좋지 않은 것만 계속 보도하고 인터넷을 보니까 오만 소리가 다 올라온다. 불평불만 자들은 다 거기 올라온다. 감사하다는 사람은 거기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가는 바보 취급을 당한다. 그저 불평불만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감사하다는 사람은 헬렐레 바보로 생각한다. 이 감사하다는 놈은 하나도 안 올라온다. 그것이 세상에 꽉 차서 돌아다니고 그것만 보면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불평불만 자들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감사하고 사는 사람도 많은데 입을 벌리는 사람들은 다 그 사람들이니까 세상이 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교회가 어떤 경우에는 어두운 구석도 있고 시끄러운 구석도 있고 다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전체가 아니다. 전체는 지금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움직인다고 차바퀴가 지나가는데 먼지가 나지 않겠는가. 차바퀴 지나면 먼지는 나는 것이다. 사람이 성장하려면 성장 통이라는 것이 있다. 아이들이 크면서 공연히 아무 이유 없이 열이 날 때가 있다. 그것은 약을 먹지 않아도 그냥 놔두면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공연히 이상한 바람이 불 때가 있다. 그것은 그냥 구름 지나가듯이 지나가면 그만인데 그것을 붙잡고 교회가 어쩌니 하면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은 사탄에게 속은 사람이다.
사탄의 가장 큰 원수가 교회이다. 그전에는 예수가 적이었다. 지금은 예수하고는 싸움이 안 되니까 사탄은 어디에 싸움을 걸고 있느냐 하면 교회에다 싸움을 걸고 있다. 대상이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 부정적인 씨를 뿌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래서 그 씨를 뿌리려면 누구를 잡아야겠는가. 부정적인 사람을 잡아야 한다. 그 사람은 사탄의 교두보가 되는 것이다. 거기다 전송을 계속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퍼지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내가 CCC에 가서 김준곤 목사님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부정적인 생각은 버려라 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있는데 어떻게 버리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부정적인 일이 없다면 모르지만 부정적인 일이 있는데 어떻게 버리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세상은 반반이라고 한다. 반은 긍정적이고 반은 부정적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것을 택하고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것을 택하는 것이다. 다 긍정적인 것만도 다 부정적인 것만도 없다. 내가 무엇을 택하느냐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재미있으니까 얘기하는데 사과 한 상자를 사다가 파는데 한 상자에 100개가 들었다. 어떤 사람은 손님이 오면 어떤 좋은 것을 줄까 하고 제일 좋은 것을 골라서 판다. 한 사람은 반대로 어떻게 하면 나쁜 것을 팔아버리고 좋은 것을 내가 가지고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한다. 누가 장사가 잘되겠는가. 좋은 것을 골라 파는 사람이 잘 된다. 어차피 100개를 다 팔고 나면 똑같다. 좋은 것부터 골라 판 사람은 끝까지 좋은 것만 판 것이다. 그런데 나쁜 것만 골라 판 사람은 끝까지 나쁜 것만 판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인생이 정말 그렇더라.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고 살았네. 너무너무 쉬운 것을 너무너무 어렵게 살았다.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 그것이 아니고 반반이다.
사과 한 상자를 줄로 세워놓으면 100등까지 있을 것인데 일등부터 팔기 시작한 사람은 계속 일등만 파는 것이다. 일등 팔고 나면 다음 놈이 일등이고 일등을 팔고 나면 다음 놈이 또 일등이다. 그런데 꼴찌부터 파는 사람은 팔 때마다 꼴지만 파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가는 사람이 금방 안다. ‘이 주인은 나에게 좋은 것만 골라주려는 것이 아니고 안 좋은 것만 골라주려고 하는구나. 속았다.’그러면 그 집에 안가고 장사가 안 된다.
사과 장사처럼 인생을 살아라. 일등부터 계속 팔아라. 나는 그것을 감명 깊게 받았다. 그 이후로는 부정적인 일이 있어도 일부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혹시 부정적인 것이 있으면 부정적인 것은 일부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냥 없어져 버리고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것을 붙잡고 있으면 자꾸 커지는데 그것을 무시해버리면 남아있지 않고 없어져 버린다. 그러니까 인생은 아주 쉽다. 왜 쉽냐? 긍정적인 것부터 생각을 하고 긍정적인 것부터 생각을 하면 아주 쉽다.
사람에게서도 나쁜 것만 찾지 말고 좋은 것을 찾으면 아주 쉽다. 사람이 한 사람 속에도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그러면 나쁜 것만 찾는 사람은 계속 나쁜 것만 찾는다. 좋은 것만 찾는 사람은 계속 좋은 것만 찾는다. 기왕이면 좋은 것만 찾으면 관계가 좋은 것이다. 관계가 좋으면 인생은 행복한 것이다. 다른 것이 없다. 인생이라는 것은 사람끼리 사는 것이다. 사람끼리 사는 것인데 사람끼리 살면서 사람이 밉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다. 사람이 밉고 싫으면 그것이 불행한 것이다.
우리가 좋은 씨를 받은 사람들이니까 성경에 있는 모든 말이 나를 위한 말 같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도 나를 위한 말 같고 땅을 주겠다는 말도 나에게 한 말이고 씨를 주겠다는 말도 나한테 한 말이다. 좋은 길로만 골라서 좋은 길로만 데리고 왔다. 너무 신기하다. 어찌 그렇게 좋은 길로만 인도했는지 모르겠다. 어찌 그렇게 합당한 길로만 인도했는지 모르겠다. 여러분도 그러려고 부르셨으니까 합당한 길로 인도하시리라고 믿고 우리 교회 전체가, 지방교회도 모두가 그렇게 성장을 해서 이 부정적인 세상 속에 우리만이라도 긍정적인 세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나가면 다 부정적인 소리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만이라도 긍정적인 세계를 만들어서 그 사람들이 싸우다 싸우다 결국 안 되어서 교회로 올 것이 아니겠는가. ‘야 여기는 와보니 이상하네. 전부다 행복하네.’ 그럴 것이다.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느낀다. 얼굴이 참 밝네.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사람들이 와서 보는 첫인상이 그렇다. ‘사람들이 얼굴이 밝고 좋더라.’ 그렇게 얘기를 한다. 교회를 다니다 온 사람들은 무슨 파냐 양파냐 대파냐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녀서 인간을 베려 놨다. 순수성이 없어져 버렸다. 양파면 어떻게 대파면 어떤가. 각 지역교회마다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니까 너무 행복하고 우리 대구도 중심교회로서 세워지게 되기를 원한다.
지금 막대한 돈을 들여서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왜 그런 막대한 돈을 들여서 집을 짓느냐 하면 하나는 중심이 있어야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셋방살이를 하고 있지만 우리 큰집에 가면 좋은 집이 있기는 해야 될 것이다. 다 그러면 좋은데 지금 형편이 다 그렇지는 못하니까 ‘나는 셋방을 살지만 우리 큰 집은 아니야, 대골이고 궁궐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좋지 않겠나. 그런 효과가 있기를 바라고 모두 기도해주시고 후원하실 생각이 있는 분들은 후원도 해주시고 헌금구자를 사랑방에 올려놓았으니 은행에 얘기하면 자동으로 올려준다. 그전에도 많이 협조를 해주셔서 감사하고 아마 내년 여름집회를 잘하면 교회에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쩔지 확실히 몰라서 확답을 못하겠다. 대구에서 하게 된다면 너무 더우니까 8월 중순경에 해야 하는데 될지 안 될지 확답을 할 수 없다. 일 년간 공사를 할 것으로 예상을 하기 때문에 대구에서 하게 되면 그런대로 새로운 맛이 생길 것이다. 지금까지 온 곳 중에는 여기가 제일 좋은 것 같다. 숙소가 좁은 것만 빼고 아마 모든 것이 여기가 제일 좋은 것 같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하지 못하면 다시 내년에 여기서 보겠다. 내년에 다시 여기서 보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