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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Présentation): <시간관념, 1901-1902 강의록>
벩송: 시간관념(L’idée de temps),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1-1902)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 편집, PUF, 2019, pp. 7-12(P. 256).
이 강의의 참석자로서 프시카리(Ernest Psichari, 1883–1914)(당시 18살), 샤를 빼기(Charles Peguy, 1873-1914)(28살), 마리땅(Jacques Maritain, 1882-1973)과 그의 누나 (Jeanne)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초기 강의에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는 참석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1900년에 교수자격 시험을 3등으로 통과하였고, 설에 의하면 페기와 플로티노스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1903년 시간관념의 역사(Histoire de l’idée de temps)의 플로티노스 부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55UKF)
- 12강(67쪽)의 주에서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도 이 강의를 들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슈발리에는 1900년[열여덟] 파리고등사범 입학이니 벩송 강의를 들었을 수 있다. 참조로 슈발리에는 1903[스물셋]년 교수자격시험에서 2등으로 졸업했다. 슈발리에는 이 강의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만남이 시작되어 벩송의 생애의 마지막(1940년) 겨울에까지 따로 갈탄을 보내려고 노력했었다. 벩송의 사망원인은 독일의 파리 점령 하에서 갈탄 분배가 적어서 추위로 독감사망으로 알려졌다. 참조로 독일 점령군은 벩송에게 노란별을 달지 않아도 좋다고 했으며, 상당한 대우를 하였다고 하지만, 전시 갈탄 배급은 벩송에게도 정상적이었지만, 여든이 넘은 노인으로서 파리의 추운 겨울을 보내기에는 부족한 양이었다고 한다. (55V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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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에 이어서 시간관념(1901-1902 강의록, 2019)을 그리고 철학사를 따라가면서, 시간관념의 역사(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1902-1903)(출판 2016), 기억이론의 역사(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1903-1904)(2018), 자유문제의 역사(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1904-1905)(2017)로 이어지는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들은 이미 출판된 그의 저술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기도 하고, 또한 미래의 작품(EC, 1907)에 대한 줄거리를 잡는 노력의 기간이었다.
나로서는 ‘원인 관념’에 대한 벩송의 반성은 서양 철학사를 보는 시각에서 아르케에 대한 재해명이었다고 느껴진다. 아르케는 원래 형상으로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름 또는 다양체로서 개념적 ‘존재’라기보다 실재적 ‘현존’이다.
그리고 ‘시간관념’에서는 원인의 풀어짐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며,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공간을 다루는 방식과 달라야 한다. 고대에서 운동과 근대에서 상대성의 운동을 통한 시간의 번역은 시간-지속을 알지 못한다. 지속은 심리학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들 중에서 남은 기록들이다. ‘시간관념’ 이후 강의는 샤를 뻬기가 속기사에 부탁하여 작성된 것이다. 샤를 뻬기에게 고마움을!
원인관념(L’idée de cause)(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 1900-1901)(2019 출판)
시간관념(L’idée de temps)(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 1901-1902)(2019)
시간관념의 역사(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1902-1903)(2016)
기억이론의 역사(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1903-1904)(2018),
자유문제의 역사(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1904-1905)(2017) (55U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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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첫째 강의가 여기 소개된 강의와 연관된 설명인데, 편집자는 강의와 연관된 여러 이야기를 쓰면서, 19과에 대한 해설을 너무 간략하게 해서, 우리는 좀 더 길게 설명할 것이다.
1과 2과는 “시간”과 “개념적 인식”을 대립시켜 문제제기를 한다: 입문(1.2강)
3과 4과는 시각과 지각(3,4강)
5과 6과, 운동개념 비판(5,6강)
7과 8과, 운동 상대성에 대한 비판(7,8강)
9과 10과, 등속도 운동과 가속도 운동에 대한 비판과 심리적 상태들
11과 칸트의 시간 비판: 시간과 공간의 혼동.
12과, 칸트의 시간 비판: 순수이유 비판, 「선험적 감성론」
13과, 칸트의 안티노미에서 첫 두 가지에서 시간비판: 순수이유 비판, 「선험적 변증론」
14과, - 여기서부터 뻬기의 부탁으로 속기록을 시작하여, 강의 원본 그대로이다.
새로운 형이상학에서 지속. 그리고 두 갈래로 탐색: 개념작업과 지각작용
15과, 따라야 할 방법: 기억 문제를
16과, 형이상학은 심리학적 기원이라기보다 추론상으로 추리능력인 지성의 기원에 대한 고찰일 것이다. 벩송은 심리학적으로 먼저 다루고(14장), 심리학적 과정과 논리학적 과정의 개념화의 혼동을(15장)을 지적하고 난 뒤에, (16장에서) 문법학의 범주와 문헌학이 개념화의 기원에서 발생과정을 추론하여 다루어 보아도, 개념과 관념은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자연적에서 인위적으로 이행이 사회적 삶과 연관이 크다고 보아서 도덕적 개념까지 언급하였다.
17과, 언어가 둘로 분화[이분법]되는 것은 한쪽에는 무매개적이고 닮음의 인식이 있고[지각작용의 과정에서], 다른 쪽에는 개념작업이 있다.
18과, 19과, 제18강의에서 고대철학이 진행하는 경향을 소개하였고, 제19강의에서는 다시 고대철학의 경향을 요약하면서, 고대철학이 불변에서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더 이상의 철학적 진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19강에서 칸트까지도 개념작업에 머물렀음을 비판한다. (55WKG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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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기(Charles Peguy, 1873-1914), 프랑스 애국 시인, 벩송 강의를 충실히 들었고, 그는 속기사에게 부탁하여 벩송 강의록의 속기록을 남겼다. 강의 수강에서 빼기와 더불어 프시카리, 쟈끄 마리땡, 라이사 마리땡과 함께 수강했다.
그는 1894년 ENS에 24명중 6등으로 입학했고, 그의 사범학교 학창시절에 벩송이 철학을 가르쳤다. 군대를 마친 1898년 드레퓌스 편에 선 인성자유주의적 사회주의에 속했다. 이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그는 1898년 교수자격시험에 낙방했으며, 이런 이유로 대학과 멀어졌다. 1900년에 보름간 노트(Cahiers de la Quinzaine)를 출판한다(1914). 이때부터 그는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벩송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1902년부터 속기사를 불러서 속기를 했다(시간관념(L’idée de temps)(14과에서19과: 6과). 그 이후로 시간관념의 역사(1902-1903), 기억이론의 역사(1903-1904), 자유문제의 역사(1904-1905), 세 강의의 속기록 강의를 남겼다. - 특히 1902, 1903, 1904년의 세 강의는 생생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벩송의 사상형성과 발전을 밝일 수 있는 소중한 내용들로 되어 있다. (55U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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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Présentation): <시간관념, 1901-1902 강의록>
모든 철학은 방법의 시기라는 첫째시기를 갖는다.
둘째 시기는 형이상학적 시기이다.
시간관념(1901-1902 강의록, 2019)의 미출판 강의는 1901년에서 1902년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강의 한 것이다. 이 강의는 원인관념(1900-1901)에 이어서 행한, 이 강의는 벩송이 앞선 문제거리의 제시와 해결에 의해 우회 없이 직접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이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원인에 관한 반성들이 이끌었던 것과는 다른 철학적 문제에 공격하는 것이다. (7)
원인성의 전통적 용어가 불가분의 실재성을 인위적으로 조각내는 것을 가정하는데, 원인성의 문제 해결의 조건은, MM에서 소개되듯이, 벩송을 시간의 관념 자체의 연구로 나아가게 한다. 만일 지속이라는 분가분의 연속성이 우리를 회피한다면, 이때부터 지속의 그것(지속)의 순수성 속에서재발견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 알맞다. (7-8)
시간의 관념을 연구하는 것, 따라서 그것은 순수 지속을 재발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속을 방해하는 것을 제시하고, 또는 앞선 작품들이 했던 것보다 더 엄격하게, “지성의 자연적 경사”를 따를 때 우리가 속게 되는[기만당하는] 우리 능력을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유사 문제들(les pseudo-problèmes)의 기원에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8)
따라서 벩송이 첫 강의에서부터 지속의 연구와 개념의 본성의 연구를 연결하려 할 것인데, 미리 통보받지 못한 독자들은 이 연결을 필연적으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두 문제들 사이에서: 지속의 본성은 어떤 것이며, 개념적 사유의 본성은 어떤 것인가?, 내밀한 연대성(une solidarité)이 있다.” (8)
그런데 이 두 문제가 연결되어 있다면, 실재적인 것에 대한 개념의 우선성은 직관을 질식시킬 우려가 있다. ... (8) 기억이론의 역사(1903-1904)에서 개념은 임의적 분할에 의해 진행하는 것을 실재성을 다루지 못한다고 한다. 이 강의에 잘 설명되어 있다.]
시간관념(1901-1902)의 강의는 “형이상학 입문(1903)”의 전개들을 여러 방식으로 예상하게 한다. 시간의 연구는 인식의 비판을 가정할 뿐만 아니라 이 연구는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허용하는 방법의 형성작업으로 인도한다.(9)
그는 강의의 전개를 독자에게 제시하는데, 이 강의는 “추상적(abstrait)”, 즉 “독단적(dogmatique)”이라 판단했고, 또한 철학의 흐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9) [새로운 형이상학이전의 철학사는 추상이며 독단이고, 진솔한 철학사가 아니다.]
입문으로 제1,2과 이후에, 벩송은 시간관념(1901-1902)의 연구의 첫 부분에서 “순수 지속”을 재발견한다. .. 상식과 과학에서 시간은 실재적 시간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운동의 분석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 과학의 개념화를 보면서, 개념화작업의 정복하려고 시도 할 것이다. (9)
여기서부터 운동 또는 운동의 지속은 의식을 가정한다고 분명하게 내 보인다. 이런 점은 시론(DI 1889)의 분석에 충실하며, 지속의 재발견은 심리학으로 또는 자아의 연구로 이행을 가정한다. (9)
시간관념의 강의는 EC의 길을 분비하는 것이고, 이점에서 지속의 연구는 이제부터 세계가 “이질적 공간”으로, “불평등하게 펼쳐진, 불평등하게 풍부한” 지속으로, 구성된 것으로 가정한다. (9-10) [구성된 것(constitué)도 구축하는 것도 아닌, 나중에는 혼성하는(composant) 것으로 설명할 것이다.]
지속의 본성의 연구는 시간에 대한 칸트의 개념작업의 제시와, 11과와 12과에서 안티노미를 제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칸트는 형이상학의 막다른 골목(난관)을 보여주었고 – 그리스인들에서 라이프니츠까지 실천적인 형이상학적 난관이었는데 – 이 난관이 시간의 실재적 본성의 길에 잘못 들게 된 것이다.(10)
벩송은 이 강의의 후반부에서 그가 개념의 본성이라 부르는 것을 다룬다. .. 이 후반부의 전개는 「형이상학 입문」(1903)과 창조적 진화(EC 1907)에 접근할 것이라 한다. 즉 개념의 본성에 대한 연구는 명제들의 논리적 분석의 단순한 관점(une perspective)에 위치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하고 순수하게 지성론(une noétique, 추론)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형이상학적 개념작업을 몰아내려 하는 것이다. 그리스 사유에 뿌리를 둔, 그리고 갈릴레이로부터 강화된, 보편 수학(mathesis univeralis)의 이상에 의해 인도된, 지성에 맞는 개념화 작업의 능력에 절대적 신뢰를 하는, 형이상학, 즉 이런 형이상학을 추방하려는 것이다. (10)
칸트에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해결할 수 없는 모순들을 폭로했다. (10)
주목해야 할 것으로서, 벩송의 이런 정식화된 분석이 개념화작업과 그 작업의 직관과 연관에 대하여 사유와 운동자(PM, 1934)과 「형이상학입문(1903)」의 방법론적 고찰들을 밝혀준다. (10)
다음 주목할 만 것으로, 부정에 대한 반성인데, 창조적 진화에서 무(le néant)의 관념의 분석에서 다시 나타날 것이다. (10),
이 후반의 강의들은 간단한 방법으로 언급되지만 장차 나올 작품들에 접근하게 하는 데 중요하다.(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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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반부[14강 이후]는 속기록으로 되어 있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서, [이때부터] 뻬기(Peguy, 1873-1914)가 법원 속기사였던 꼬르꼬스 형제(Raoul Corcos, s.d. et Fernand Corcos, 1875-1959)에게 벩송 강의의 속기를 부탁했다. .. 이 강의록의 전반부는 프시카리(Ernest Psichari, 1883–1914)의 수고본(필사본) 노트이다. 프시카리는 뻬기와 마르땡 남매와 같이 강의를 들었다.
벩송의 강의가 느리고 규칙적이라 강의의 받아쓰기가 쉽다고 하더라도, 노트에는 빈틈이 없을 수 없다. .. [14강 이전의 노트로서] 프시카리는 다음 강의에서 앞선 강의 반복을 아마도 노트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꼬르코스 형제의 전사는 벩송 말투를 충실하게 옮겨 놓았기에 프시카리의 노트와는 차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1)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결함들이 철학사가의 작품을 그리고 원문들의 과학적 판본의 시도를 복잡하게 만들며, 이 결함들은 “지속의 연속적 흐름”을 베끼기만을 원하는 노트작성의 안면이다. (12) [강의를 들으면서 지속의 흐름과 받아쓰기 하는 지속의 전개는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교수들이 “항상 근원들(les sources)을 말하는”것과 달리, 뻬기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벩송은 “지하수맥탐사가(sourcier)”를 말한다. (12) [이 용어는 매우 중요하다. 내가 심(深)층 형이상학이라 하는 이유와 맞닿아있다. 들뢰즈가 상층에 대해 심층의 차히라는 것을, 박홍규의 페라스와 아페이론의 구별에서 찾을 수 있었듯이 말이다.]
벩송이 따르드(Gabriel Tarde, 1843-1904)에 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겉보기 방법 없이” “정신은, 모든 (정신) 관념들이 관념들 사이에 자연적으로 일치하는 것처럼, 사물들을 통합(l’unisson)에 매우 잘 일치한다.” 그리고 결국 의도의 단일성(l’unité)이 있다. (12)
뻬기, 마리땡 부부와 더불어 프시카리가 있어서, 스승의 목소리를 통해서 절대(l’absolu)에 접근의 수단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12) - [나로서는 절대가 아니라 지속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개자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가 마리땡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한다. - 뻬기의 각주가 더 많았어야 할 것인데...] (55UKF)
* 13쪽 주의사항
페이지 매김에서 주목할 것. 우리는 여러 경우들에서, 특히 어떤 단어를 읽기 어려운 경우, 몇몇 생략에 관해서 의심스러울 때, 원문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꺽쇠[]{}를 통해 변경을 지적했다. (13) (55U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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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 따르드(Jean-Gabriel Tarde, 1843-1904) 프랑스 사회학자, 사회심리학자. 현대 범죄학의 창시자. 비교 범죄성(La Criminalité comparée, 1886)
1873 기요(Jean-Marie Guyau, 1854-1888) 프랑스 철학자, 인성자유 시인. “프랑스의 니체« Nietzsche français »”라 불린다. 시간관념의 발생(La genèse de l'idée de temps, 1890)(avec une introd. par Alfred Fouillée).
1873 빼기(Charles Peguy, 1873-1914), 프랑스 애국 시인, 벩송 강의를 충실히 들었고, 그는 속기사에게 부탁하여 벩송 강의록의 속기록을 남겼다. 강의 수강에서 빼기는 프시카리, 쟈끄 마리땡, 라이사 마리땡과 함께 수강했다.
1894년 ENS에 24명중 6등으로 입학했고, 학창시절에 벩송이 철학을 가르쳤다. 군대를 마친 1898년 드페퓌스편에 선 인성자유주의적 사회주의에 속했다. 그는 1898년 교수자격시험에 낙방했으며, 이런 이유로 대학과 멀어졌다. 1900년에 Cahiers de la Quinzaine를 출판한다(1914). 이때부터 그는 벩송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1902년부터 속기사를 불러서 속기를 했다(시간관념(L’idée de temps)(14과에서19과:6과). 그 이후로 시간관념의 역사(1902-1903), 기억이론의 역사(1903-1904), 자유문제의 역사(1904-1905), 세 강의의 속기록 강의를 남겼다.
1874 따로 형제(Jérôme Tharaud, 1874-1953, Jean Tharaud, 1877-1952), 프랑스 작가. 사랑하는 우리 뻬기(Notre cher Péguy, 1926)
1882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 프랑스 카톨릭 철학자. 1900년 ENS. 1903년 교수자격 2등. 베르그송(Bergson, 1926), 벩송과 대담(Entretiens avec Bergson, 1959).
1882 마리땡(Jacques Maritain, 1882-1973) 프랑스 철학자, 20세기 토미즘 철학자. 소르본에서 화학, 생물학을 공부했다. 1904년 라이사와 결혼, 1905 철학교수 자격. 악시옹 프랑세즈와 도미니크 신부인 클레리삭(Humbert Clérissac, 1864-1914)의 영향으로 1906년 카톨릭으로 개종. 1945-1948년에 바티칸 대사. 누나 쟌느(1876-?)가 있다. / 벩송 철학(La Philosophie bergsonienne, 1914)(rééd. augmentée d'une préface en 1930 et d'un post-scriptum en 1948),
1883 라이사 마리땡(Raïssa Maritain, 1883-1960, née Raïssa Oumansoff), 우크라이나 유대계(hassidique) 프랑스 철학자, 시인. 동생 베라(Vera Oumancoff, 1886-1959)와 함께 쟈끄 마리땡은 « les trois Maritain »로 불린다. Les Grandes Amitiés, 1949.
1883 프시카리(Ernest Psichari, 1883–1914)[서른하나], 그리스계 가정 출신, 소르본에서 철학학사. 식민지 보병장교. 1914년 일차대전 전선에서 사망하다.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의 외손자이다. 장교(백부장, 대대장)의 여행(Le Voyage du centurion)(préface de Paul Bourget de l'Académie française, Paris, Louis Conard, 1916). 1901년 벩송의 강의 수강에서 샤를 빼기를 만나고, 그 때 마리땅 가족들도 만났다. 그 중에 자기보다 일곱 살 많은 쟌느(Jeanne Maritain)에게 사랑에 빠졌는데, 쟌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그는 두 번이나 자살(약물로, 권총으로)을 시도했으며, 그를 두 번 다 구출해 준 이는 레끌뤼이다. [fr.wiki는 그가 특히 콩고 식민지에서 호모였을 것이라 한다. 게다가 토마스 전공자인 플루까(Yves Floucat, 1950-)는 프시카리와 자끄 마리땡 사이에도 내밀한 관계, 호모필(homophile)이라 한다.]
1883 레끌뤼(Maurice Reclus, 1883-1972) 프랑스 역사가, 제3공화정의 정치가. 프시카리의 친구.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 <시간관념의 역사, 1901-1902 강의록> 편집자. 2016년부터 학위 준비 제목. “L'éclat de la gloire ou la raison cachée. Etudes des concepts de gloire et d'honneur dans la philosophie de G.W. Leibn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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