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오후
양선호
한 뼘 넉넉해진 텃밭에서
소슬바람이 놀고 있다
설핏 깨어난 달개비 꽃이
가을 닮아 더 푸르다
높아진 하늘 위로
고추잠자리 붉게 물들어
한줄기 바람이
고추를 말리고 있다
내 삶이 머문
텅 빈 자리 한 이랑에
가지런히 골을 파고
가을 파 씨를 심는다
노란 촛불
-복수초-
양선호
촛불 한 자루
봄 길 밝힌다
얼었던 동토(凍土)에
뽀송한 솜털 차려 입고
해맑은 웃음으로
아이처럼 피어 있다
겨울 침묵을 깨우는
꽃바람으로 다가 와
닫혀 있던 마음들
나비처럼 가벼워진다
긴 터널의 각(殼)을 뚫고
피어난 촛불 하나
동백은 지고
양선호
봄의 혈관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부픈 꽃망울들
서로 팽팽히 힘을 겨루더니
짙푸른 나무 잎 사이로
동백 붉게 피어
한 생을 뜨겁게 살다가
미련 없이 지고 마는
봄날 같은 꽃이여
나도 한때는
붉은 꽃 이었지
떨어진 꽃 한 송이
내 가슴속에 다시 핀다
전주 향교
양선호
한벽루 아래
은빛억새 바람에 일렁인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소리에
고즈넉한 향교 앞마당 은행나무
수백 년 세월을 살아온 나무는
바람 불고 서리 내리면
유생들의 못 다한 언어들이
노란 은행잎 되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앞서거니 뒷 서거니
떠나가는 가을 오후
날빛이 아직 붉은데
머뭇거리는 나그네 발걸음
가을이 되어도 익지 못한
내가 거기에 서 있네
주차금지
양선호
오랜 세월 묵묵히 발 노릇 해주던 낡은 자동차
세월의 강을 다 건너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났다
언제 어디든 한 몸이 되어 함께한 시간들
정든 자동차와 헤어질 결심을 하던 날
봄꽃이 유난히도 어여뻤다
딸 시집보내는 심정이 이랬던가
허전한 마음 다독이며 헤어진 후를 생각한다
달리느라 놓쳐버린 것들
두 발로 걸으며
이제 천천히 들여다보자
우회전 좌회전 아내의 잔소리도
주변의 염려와 불안도
모두 떠나보냈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푸른 하늘을 걷자
항상 네가 있었던 텅 빈자리
하루에도 몇 번씩 주차금지 표시판을 놓고 있다
카페 게시글
온글 24집
온글 24집/ 가을 오후 외 4편/ 양선호
금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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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5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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