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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聞道, 夕死可矣 里仁 0408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침에 도를 듣게 되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구나
다른 책 번역
1. 한글세대가 본 논어
'어느 순간에 도를 들어 깨달을 수 있다면,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진리에 대한 간절한 기원을 절실하
게 표현한 것이다.
공자의 길(道)은 '배움의 길'이다. 인생의 참된 의미는 자식 낳고 육신을 살찌우는 대 있지 않고 오로지 나의 '길의 의미'를 체득하는 데 있다고 본다.
2.논어 집주
도는 사물의 당연한 이치이니,진실로 그것을 얻어 듣는다면 살아서는 순하고 죽어서는 편안해서 다시 여한이 없을 것이다. 조석이란 그 때의 가까움을 심히 말한 것이다.
정자가 말하였다. "사람이 도를 알지 않으면 안되니 만일 도를 얻어 듣는다면 비록 죽더라도 가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정자가 또 말하였다. " 이는 모두 진실한 이치이니 사람이 이것을 알아서 믿는 것이 어렵다. 죽고 사는 것 또한 큰 것이니, 진실로 얻는 바가 있지 않다면 어찌 저녁에 죽는 것을 가하다고 하겠는가?"
3.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 우리가 자나 깨나 바라던 일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랄 때 '죽음'이라는 말을 내걸며 결의를 다진다. 공선생은 도를 목숨과 바꿀 만한 가치로 보고 있다.
- 저자는 번역에서 聞을 듣다에서 알다로 했다. 오늘날 듣는 것과 아는 것을 각각 다른 활동으로 간주한다. 유비쿼터스의 시대에 지식과 정보는 어디에서든 검색해서 알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특정한 인물만이 진리를 알고 있었기에 거기까지 가서 만나서 말을 들어야 했다. 즉 고대의 공부는 듣는 것이 아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글자 하나를 해석해도 진리,학문관의 차이가 끼어 들어 있으니 함부로 번역할 수 없는 것이다.
저자소개:
양명학 전공.
강화학파의 창시자 화곡 정제두 연구.
중종 때 양명학 도입. 퇴계가 이를 비판하는 세 개의 글을 발표하면서 대부분의 조선 유학자들이 등을 돌림
송명이학: 주희는 이를 기반으로 주자학을 정립. 동시대이긴 하나 약간 뒤에 나온 왕양명이 기를 중심으로 양명학을 정립
마음을 문제 삼고, 후에 강력한 실천철학으로 나아간다. 이 둘을 가리켜 송명이학이라 하고 국제적으로는 신유학이라 한
다.
현대 신유학: 송명이학을 새롭게 현대적으로 재조명한 작업을 일컬음.중국은 대부분 양명학의 전통을 계승. 일본도 근대를
이끌어 온 동력이 되었다. 한국은 조선유학의 전통의 영향으로 주자학적 전통이 강하다.
김교빈선생님: 신유복의 월하정인, 박지원의 하층인생을 주인공으로 내 세운 소설. 이는 을의 인생을,을의 욕망을 인정했다는 것. 이는 개인의 긍정으로 나아가고 근대의 사유가 되는 것이다. 양명학은 욕망을 긍정하였다. 주자학의 입장에서 여자가 감히 욕망을 드러 내~?하면서 근엄한 도덕의 잣대를 내세웠다. 그러니 양명학을 배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시천: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던 반면, 양명학은 마음(심)을 강조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욕망을 중시했다. 우주론적으로도 성리학이 천리를 궁구하고자 했다면 양명학은 구체적 현실에서 움직이는 기에 관심을 두었다.
겹쳐읽기
道에 대하여
이인편 04-09
子曰 士志於道,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선생님 말씀하시다. 도에 뜻을 두었다는 사가 허드레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한다면, 더불어 논의할 것이 없을 터.
- 志於道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志學을 의미한다. 여기서 士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겉치레에 신경
쓴다면 같이 어울리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無友不如己者(자기만 하지 않은 이를 벗삼지 말라)이다.
이인편 0415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선생님 말씀하시다. 증삼아 내 도는 하나로 꿰느니라.증자가 말하였다. 네! 선생님이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말
씀이신지?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충서일 따름일 것!
옹야편 0615
子曰 誰能出不由戶,何莫由斯道也!
선생님 말씀하시다. 누군들 방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 있으랴만, 어째서 이 길을 통하지는 않는 것인지!
옹야편 0610
염求曰 非不說子之道,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中道而廢. 今女畵
염유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길을 기버하지 않는 것이 아니건만 힘에 부칩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힘에 부치다는 것, (힘
껏)길을 달리다가 쓰러지는 것을 말한다. 지금 자넨 (마음으로부터) 선을 긋고 있구먼!
- 염유는 자로에 이어 공직에 나선 사람인데 계강자(?)의 가신이 되어 백성을 수탈하는 데 일조한다. 이 일로 공자로부터
파문을 당한다.(1116). 이 문장에서 염유는 호학의 자세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술이편 0706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선생님 말슴하시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며 인에 기대며 예에 노닐리라
공야장 0515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其使民也義
선생님 자산을 두고 이르시다. 군자의 도를 넷이나 갖추었네. 그이,처신할 적엔 삼갔으며,윗사람을 섬길 적엔 공경하였고,
성을 구휼할 적엔 은혜로웠으며, 백성을 부릴 적에는 의로웠더니.
- 자산은 정나라의 재상으로 제나라의 관중과 함께 춘추시대 걸출한 정치가로 이름난 사람이다. 공자 30세에 사망한 분으
공자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정나라는 윗쪽으로 위나라,아래로는 초나라라는 강대국에 끼여 있는 약소국이었다. 자
산은 원칙있는 외교력으로 두 나라를 설득하여 당시 외교의 규범을 만들어 냈고 정나라를 무시 못 할 강소국으로 만들어
낸 인물었다.
공야장 0506
子曰 道不行, 乘부浮于海. 從我者,其由與!
선생님 말씀하시다.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떼를 엮어 타고 바다로 뜰까보다. 날 따를 녀석은 자로뿐이겠지!
死에 대하여
태백 0807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任重而道遠.仁以爲己任,不亦重乎! 死而後已,不亦遠乎!
증자가 말하였다. 사는 뜻이 넓고 굳지 않아서는 안되리라. 맡은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으로써 자임하였으니 또 무겁지 아니한가! 죽어서야 마칠 것이니 또 멀지 아니한가!
그외, 귀신과 죽음에 대하여 자로가 묻자 공자가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느냐고 했고, 부귀와 생사는 천명에 달려 있다고 했다. 선진유학자들은 죽음을 염두에 두긴 하지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연연해 하지 않으려 했다.
관점
1. 도가 뭐냐
주희: 사물의 당연한 이치.
황의정?: 개인과 천지의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과 이상
신동준: 사람답게 사는 길
배병삼: 배움의 길. 나의 길의 의미를 체득해 나가는 것이 인생의 완성이다.
신창근?: 개인의 길,인간의 길,자연의 길, 모든 사물의 길.
도의 세가지 맥락: -문무지도,선왕의 도. - 인간의 마땅한 이치.따라야 할 도리 - 현대 학자: 서구적 개념을 도입하여 해
석: 진리,인생과 우주의 궁극적 의미(종교적 맥락으로 해석)
2. 조문도 문장의 의미
하안의 주석: 세상의 도가 행해진다면 죽어도 좋다. 우리의 영역. 듣다
주희의 주석: 도를 깨닫게 되면 죽어도 좋다. 개인의 영역. 깨닫다.
김교빈해석: 세상을 알리고 실천을 해야지.왜 죽냐? 공자 전체의 삶과 연관해서 본다면, 72명의 임금을 만나고 돌아 다니고 고초를 겪으면서 실현하려고 한 목적이 뭐냐? 세상의 도를 바로잡기 위한 것 아니냐. 나라에 도가 있으면 말과 행동을 높이고 도가 없으면 말은 삼가고 행동을 높혀라고 했다. 이는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가 지금 시대에 다시 나왔다면 뭐라 했을까? 생존을 위해 굴뚝에 사람이 올라가 있고, 직장에서 해고되어 20명 씩 자살하고 있고..이런 사회가 사람 살 만한 사회인가? 실천적 입장에서 우리 사회 현실의 맥락에서 이 문장을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시천보충설명: 주희의 주석은 사실 당시 유행하던 도교와 불교에 대항하여 유학의 가치를 부각시키려는 의미에서 한 것이다. 현대 학자의 주석은 서양과의 차이를 부각하기 위하여 동양의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한 바가 크다. 이택구는 이 장은 종교적 특징이 크다.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인생의 의미와 우주론적 가치로 해석되어야 한다. 서양이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라면 동양은 진리를 체득하고자 했다. 즉, 인격의 완성과 도덕적 사회의 실현이라는 방향으로 동양 지식인들을 살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교빈선생님은 타락하고 무도한 현실에 대해서 개탄해 하면서 고주의 주석의 입장에 서고 있다.
2부
동양철학이 과연 있었을까?
동양철학,전통철학을 서구식 개념의 철학의 범주로 포섭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전통철학이 서양철학의 폭보다 더 넓지 않았을까 싶다. 이유는 첫째, 서양철학은 신학을 배제하였다. 동양철학은 종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둘때,서양 철학을 사유한 사람은 일부 지식인층에 한정 되어 있었다. 동양철학은 당대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사유체계였다. 이런 이유로 서양 철학의 개념으로 동양 철학을 정의하고 분석할 수는 없다고 본다.
김교빈교수님이 처음 동양철학을 공부했던 시기의 분위기.
미아리 철학관 이미지,작명이나 하는 공부(술수학)로 이해. 철학의 서자같은 취급을 받았다. 한국 철학이라는 것도 생소한
용어. 한국철학사라고 정리해서 책이 나온 것도 1978년.
동양철학이라는 말도 조어법에서 문제. 동양안에서 일어난 다양한 범주의 학문적 내용을 좁은 개념의 철학이라는 말로 묶어 논 경향이 있다.(서양의 철학은 분과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의미. 이는 동양학문의 궁리학에 해당되는 분과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서양철학전공자들에게 동양철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는 언제? 아마도 1980년대 후반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만들어지고 활동하면서 이지 않을까? 서양철학 전공자들도 결국 공부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 땅의 학문 한국철학이나 나아가 동양철학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했다. 90년대 한국근현대사상연구화에 철학전공자들이 참여하면서 시작 된 것 같다.
식민지 철학: 독일 관념론 철학(데칸쇼어철학): 식민지 현실을 비판하는 관념을 제거하기 위함. 해방후 영미철학 대세.
동양철학과 한국철학은 마이너 취급 받음.
술수학에 대한 견해:
동양학에 다 포함되어 있었던 것. 레벨이 다른 것. 묫자리 보는 사람들을 지관이라 함.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들이 보는 시험이 잡과. 감룡경,의룡경이라는 텍스트가 있었다. 용의 변화를 통해 땅의 변화를 파악해 내는 것.동양의 기본적인 사유체계가 깔려져 있었던 것. 기술성과 합리성으로 나름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근대 비과학성이라는 명목으로 배제됨. 그러나 큰 틀에서는 같은 범주로 포함될 수 있을 것. 서구적 개념이 도입되면서 동양학이 낮은 것으로 취급됨. 그리고 그 근거를 대는 것으로 술수학이 거론 됨.
최근 술수학이 대학 교육과정에 들어 오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버려진 가치들이 다시 재조명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과도한 경향은 우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전체상을 균형있게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현대에 왜 동양철학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서구 발전모델이 한계에 도달하면서 그 대안을 동양에서 찾고 있다. 슈퍼차이나의 그 힘이 무엇인지. 그 힘의 중심에 당이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중국적 사회주의에서 도대체 중국적이 뭐냐를 연구하게 된다. 그 중국적이라는 것이 바로 중국전통의 사유체계일 것이다. 이 것을 동양을 연구하게 되는 근거가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당장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긴박한 사정으로 동양철학을 공부해야 되는 것이다.
전통적 가치와 현실의 문제를 결합시키는 중국 지식의 못급
1979년 전인대를 거쳐 개혁개방정책을 공식화 하면서 전통과 서구화,중국식 사회주의문제에 대하여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큰 논쟁이 일어남. 중국은 5.4신문화운동이후 어려울 때마다 전통의 문제와 오늘날의 문제를 결합하여 지식인 전체가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을 해 왔다. 당시 그 합의로 도출된 것이 바로 비판계승론이다.
문화심리구조
전통은 오늘날 어디에 남아 있는가? 바로 개인의 심리 구조와 사회문화의 시스템에 녹아 있다. 그것이 시대마다 상황이 달리 나타나긴 하지만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 심리구조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사회적 기제로 만들고 사회시스템개조와 법률,제도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택구는 공자재평가라는 논문에서 중국인의 가슴 속에 심어져 있는 중국 문명을 문명답게 한 틀거리가 바로 공자가 만들어 논 인학(仁學)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철학의 의미
모든 학문은 지역의 특성을 안 가질 수 없다. 원효가 깨달음을 갖고 교화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신라인> 아니면 전인류? 현실은 결국 경주의 시장바닥 사람들이었을 것. 그러나 그 내용은 인류보편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공자와 칸트전문가가 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에 대한 지식과 자신의 사유를 가지고 내가 사는 여기를 고민하는 것이 그이유다. 즉, 중국철학을 하든 서양철학을 하든 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문제를 얼마나 잘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얼마나 설득력있게 전개하고 있느냐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한 이론 싸움을 통해 다시 현실로 돌아와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가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한국에서 철학을 한다는 지식인은 모두 한국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곡 정제두에 대한 이야기
하곡이 34세에 중병을 앓고 스승인 박세채에게 유서 형식의 글을 통해 양명학을 공부했다고 밝힘. 근데 죽지 않고 살아나 결국 커밍아웃을 하게 된 꼴. 당시 그가 속한 소론은 노론에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는데 그 안에서도 양명학을 한다니 더 마이너의 신세가 되었다. 결국 40세에 안산으로 60세에 강화도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 여러 사람이 대거 같이 강화도로 옮겨 가서 강화학파가 되었다.
하곡은 당시 주자학이 당시 조선 현실을 제대로 이끌지 못 하고 있다고 하고,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받아 들이고 주자학을 넘어서는 틀거리를 만들려고 했다.
주자학은 각 사물에 각각의 이치가 있다고 했지만 양명학은 내 안에 이치가 있고 그 것이 밖으로 뿜어 나오면서 진실해 질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각각 사람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것이 집안과 민족으로 확대 되면서 민족주체성 개념까지 확장된다. 또한 내 주체성이 있으면 남의 주체성도 있으니 인정해 줘야 하는 평등의 개념도 가지게 된다. 양명학의 전통은 당시 시대상황을 큰 틀에서 인식하고 실천을 고민하는데로 전개된다. 진천의 홍참판과 안동 이시형 6형제는 간도로 넘어가 만족학교를 만들고 이것이 나중에 신흥무관학교가 된다, 이 학교 출신에 김좌진,이 청천이 있다. 그들은 훈민정음연구, 한국음악,역사역구, 당쟁사연구등을 했고 그들의 후예가 위당 정인보선생이다. 그는 동아일보에 조선의 얼이라는 것을 연재했고 그 내용의 핵심은 주자학비판이었다. 이것이 집대성된 것이 양명학 열전이다.
왜 기철학인가?
공부는 결국 현실의 문제에서 시작. 이니 기니 히는 논리도 현실을 설명하는 수단인 것. 이는 원칙과 불변,기는 그 안에서의 현상과 변화를 설명하는 것. 자. 현실은 우리의 이상에서 동떨어져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어떻게 현실을 바꿔야 하나? 이 설명을 전통에서 끄집어 낸다면 무얼 가지고 해야 하나. 변화와 변혁의 논리를 동양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기일 것이다. 그래서 화담의 기문제,율곡의 기문제,나아가 하곡으로 까지 연구가 진행된 것이다.
동양철학에세이에서 평등의 개념을 부각시켰는데 특히 묵자를 비중있게 설명하면서 그리하였다. 묵자의 정치적 겸애와 경제적 교리를 어덯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아쉬움은 그들이 나쁜 사회를 막는 역할을 조금 했지만 변혁의 논리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서화담은 변화는 이야기하지만 변혁은 이야기 하지 않았다. 율곡은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한 사람이다. 그 핵심에는 기가 있엇다. 그는 실학의 근원으로 변혁을 이야기 한 사람이다. 그 곳에서 실학자그룹이 나온 것이고 하곡 정제두그룹이 나온 것이다.
우리 철학의 길
다까시 도호루의 후광- 조선총독부 관리로 와서 경성제대 사학과 교수가 됨. 그의 박사논문. 퇴계 율곡,주리주기,기호.영남학파,그리고 당쟁, 조선의 멸망. 결론: 조선 망국의 주범은 유교다. 이러한 이분법적 틀거리에서 지금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우리 삶의 문제에 기반하여 역 추적하여 철학사 계보를 세우는 것이 중요. 기존의 구도속에 이루어지는 철학사와는 다른 학문적 태도라 볼 수 있다.
북한은 3분법으로 분류. 퇴계 이황은 이, 율곡이이는 이와기, 김시습과 화담은 기. 하여 대지주,중소지주,하충민옹호를 대표한다는 것. 이 점은 좀더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김상봉교수가 중국철학에서 젖떼기를 시도한 것이 동학이라 했고 이구성교수의 한국현대철학사론에서 함석헌과 유영모를 중시하기도 한 것이 우리 철학을 찾아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모든 철학사가 근대에서 끝나고 있는데 현대의 철학사를 정리하는 것이 주요. 좌와 우익의 이념성, 친일의 문제등 얽힌 실타래가 너무나 많이 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한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중국의 공자의 부활(공자학교,대전,서울)사업,한국사회 일각의 유교부흥활동의 문제
어느 가문의 조상 선양사업
중국의 공자학교사업은 스페인의 세르반테스,독일의 괴테선양과 같은 것.상품성,정치적 이용가치성이 높기 때문.
박통때 퇴계,세종,이순신을 선양. 박정권의 정통성에 이용. 사회의 보수화, 사회문제의 은폐및 호도.나아가 전통의 걸림돌
이 됨.
결국 이런 것이 문화보수주의, 민족주의 결탁. 기득권의 고착화로 연결 됨.
내 생각:
일전 두 선생님이 출연한 방송에서 '소명의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이 방송에서는 '학자의 태도'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것은 나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고 수 많은 책과 강연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지를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즉, "그래 그래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데~"라는 질문을 옆구리에 날 선 칼을 지닌 채 살아가는 무사 처럼 달고 다녀야 될 듯 싶다.
문화심리구조라는 개념을 접하면서 일전에 읽엇던 <경이로움>이라는 책에서 본 '형태장이론'이 생각났다. 정신분석학자 융의 집단무의식이라는 것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즉, 한 울타리 같은 법,규범,여론속에 살아가는 공동체의 집단체험이나 집단적 학습-새마을 운동등등-이 자손들에게 전수된다는 것이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교육을 받은 개의 자식이 익숙해 지는데 부모 개보다 더 빨리 해 낸다는 것이 형태장이론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부모세대에게 있었던 집단적 체험이 우리 무의식에도 침전되어 우리 삶과 태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씁쓸한 생각이 든다. 멀게는 정조대왕이후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망국의 길로 갔던 조선말. 갑신정변과 동학혁명의 좌절,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쟁터가 된 한반도, 식민지. 타의에 의한 해방,분단,청산하지 못한 친일잔재,그들 세력의 온존,독재정권의 방패막이가 된 반북이데올로기,운동권,나아가 종북논란,그리고 세월호사건, 회전문인사,끊임없는 비자금 사건,고위공직자의 반부패사건,그리고 이를 따르는 국민들,우리도 그들과 나을 것 하나도 없는 존재, 나도 역시 마찬가지. 이러한 전혀 영광스럽지 않은 사태에도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대단한 나라 한국. 하루 하루를 보면 뭔가 아닌데,역사를 보면 뭐 하나 해결해 놓은 거 하나도 없는 뭣도 아닌데, 세계 사람이 나름 부러워 하고 본 받으려는 나라 한국의 그 무엇이 우리의 문화심리구조,형태장 구성,집단무의식의 내용일 것이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언듯 떠 오른다. 우리 사회에는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치열함이 피를 부르기도 하지만 그 중에 하나는 시대를 잘 만나 결국 우리 사회 전체를 먹여살리는 바가 있는 것. 다들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시대정신을 만들어 나가자 하지만 우리의 문화심리구조에는 그런 것이 들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각자도생.그러나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통해 옳음을 증명받고 사회적 아젠다로 인정받는 것이 우리 한국인의 형태장이론이고 집단무의식이 아닐가 생각을 해 본다. 부패는 했어도 조금은 우리 사회를 걱정하는 이중성이 우리 개인의 문화심리구조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도 생각이 든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생각하는 심리구조가 그 이중성에는 들어 있을 것이다. 이 말은 평이 아니라 자서다. 내 이야기라는 거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나를 규정하는 바로 그런 것. 헤어나지 못 하지만 그래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발전과 성찰을 모색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그런 것. 문화심리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