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장군묘
금관가야의 왕손이었던 김유신은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다.
15세에 용화향도를 이끄는 화랑으로 서라벌의 산천을 다니며 수련을 했다.
그로부터 20여년 후 고구려 낭비성 전투를 시작으로 김유신은 고구려, 백제와의 영토싸움이 치열했던 전장에서 무용담을 쌓아 나갔다.
그 중에서도 김춘추와의 끈끈한 인연을 만들었던 계기가 된 전투가 있다.
642년,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 대야성이 함락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군사요청을 하러 가면서 김유신에게 뒷일을 대비하라 부탁했고, 김춘추가 고구려에 붙잡히자 김유신은 결사대 3천을 꾸려 국경지역에서 고구려를 압박했다.
당장 신라와의 전투가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던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와 김유신은 서로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었다.
한반도에 통일된 나라를 세우자는 대의를 공유했던 두 사람.
김유신은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본래 왕으로 추대되었던 알천과 상의한 끝에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660년에 신라의 최고 관직 상대등이 되었고, 그 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동반자 무열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 문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673년 79세의 나이로 죽은 김유신은 후대에 그 업적을 기려 ‘흥무대왕’ 또는 ‘흥호대왕’으로 추존되었다.
치열하게 살았던 그는, 송화산 기슭의 야트막한 구릉에 잠들어 있다. 정문인 흥무문을 지나 잘 가꾸어진 산책로를 지나면 김유신묘와 만난다.
무덤은 신하의 묘치고는 거대하고 화려하다.
지름이 30m에 달하고, 봉분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둘레돌과 돌난간을 둘렀다.
무덤 둘레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왕릉의 무덤양식이다.
후대에 흥무대왕(혹은 흥호대왕)으로 추존되었기에 김유신의 묘도 왕릉의 양식을 갖춰 꾸민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