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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묵상글 들 ( 부활 제2주간 목요일 )
오늘 새벽미사 다녀왔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2달여 전에 봤던 교우들 눈인사만으로도 반갑기 그지 없었고,
영성체는 너무나 가슴이 벅찼습니다. 평화와 선.
< 이수철 신부님 >
오늘 새벽 프란치스코 교종의 강론* 서두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미치도록(madly) 사랑하신다. 어느 성인은 말하곤 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미친 듯(like madness)' 보인다. 십자가는 이런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요, 모든 크리스천의 지혜를 함축한다. 십자가를 관상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계시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미치도록(madly)’, 정말 대단히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표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평생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정말 미치도록 하느님을, 예수님을, 모두를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열렬한 사랑이야말로 성덕의 잣대입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 라는 말도, 또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廢人이 된다’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사랑에 제대로 미친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들이 바로 사도행전의 사도들이요 교회의 성인들이요 우리 주변의 무수한 익명의 성인들입니다. ---, ---. ---.
* 2020. 4. 22. 산타마르타 아침미사 ( 참조 붙임 :김 루도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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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부활 제2주간 목요일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사도들이 성령 강림 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은, 마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활동을 전하는 신문 보도 또는 지울 수 없는 드라마 속 명장면과 같습니다.
최고 의회의 수장 대사제의 질문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매우 담대하게 답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베드로 외에 다른 사도들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사도의 개념과 범위를 짐작해 보면, 분명 예수님 생전에 줄곧 함께하였던 이들로서 그분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때부터 사도들을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함께한 이들 가운데, 특히 앞서 성전에서 베드로의 첫 기적과 솔로몬 주랑과 최고 의회의 증언 때 침묵 속에 지켜보았던 요한 사도가 함께 있었음은 매우 확실해 보입니다.
대사제 앞의 베드로와 달리 요한 사도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는데,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하는 것이다.
대사제는 예수님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전하는 사도들의 말에 크게 충격받습니다. 이제껏 자신을 포함한 최고 의회의 모든 사제가 하느님을 위해서 증언하였을 때 그 자부심이 대단히 커서, 자신들보다 더 크고 높은 권위와 힘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하였는데, 사도들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순종하겠다고 하여, 쉽사리 그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대사제 앞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들었던 증언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하여 확신합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진정으로 예수님의 이 증언을 믿고 기도하며 실천한다면 하느님을 굳건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믿음에 따른 행동에 의문을 가지게 하는 사회 제도나 결정에 맞서 우리는 얼마나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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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2주 목요일-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는 강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는 강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 경구는 '어리석은 자는 작은 것도 크게, 현자는 큰 것도 작게'와 함께
제가 좋아하는 표현이며 인생 철학이고 그저 철학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신앙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데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과 맥이 통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에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우리가 산 정상에 올라가 느끼는 것이 내가 그 힘든 산을 정복했다는
뿌듯함뿐이라면 그 영적인 수준은 낮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뿌듯함보다는 위에서 내 살던 곳을 내려다보며 내가 저곳에서
그렇게 지지고 볶고 살았음을 반성하고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초월 정신을 배울 때 그 수준이 높다 하겠지요.
그리고 이 수준을 기도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요.
예를 들어 청원 기도의 측면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제게 필요한 것을 주십사고 기도할 수 있지만
프란치스코가 생애 말년에 형제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보나벤뚜라가 '하느님께 이르는 정신의 여정'을 얘기한 것처럼
우리의 정신이 하느님께 이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겠지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우리로 하여금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늘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타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만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할 정상은 어디이어야 할까요?
하느님 당신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 기도는 이 정상을 향해 가게 해달라는 기도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금은 땅 위의 기도를 하지만 간혹 하늘 여정의 기도를 하다 보면
'간혹'이 '자주'로 바뀌게 되지 않을까요?
또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우리 기도의 여정과 정신의 여정이 마침내
초월에 초월을 더하여 하느님께 도달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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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삼위 하느님의 관계성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요한 3,34).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성자 예수님은 보내신 분의 뜻을 아시고 그분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의 말로써 스스로의 영광을 들어높이시지 않으시고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바로 아버지의 말씀이시지요.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그런 아드님을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모든 것"에는 그야말로 다 들어 있습니다. 권한과 소유를 포함해 성령까지 주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를 잇는 사랑이고, 사랑의 유대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주실 가장 크고 중요한 존재는 바로 당신 자신이십니다. 사랑하는 존재 사이에서는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증여가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온전한 자기 증여가 아드님을 향해 일어납니다. 성부 하느님은 성자 예수님과 하나이시고 또 성령과 더불어 한 분이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1).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당신들끼리의 완전한 사랑 안에 취해 계시지 않고 우리를 그 관계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은 스스로의 충만함에 고립되어 계시지 않고 우리에게 당신을 열어젖히신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음으로써 삼위 하느님의 관계 안에 참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삼위 하느님과 누리는 지고의 행복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는 우리가 해야 할 실천적 몫이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감사하게도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없지 않지요. 오늘 독서 대목에서 이스라엘의 최고 의회 구성원들과 사도들이 맞닥뜨린 대립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 명백합니다. 비록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많은 것을, 생명까지 잃는다 해도 순종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이처럼 성 삼위 하느님 안에 참여하는 우리의 믿음은 구체적인 선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누구에게 순종하느냐에 따라 우리 존재와 방향성은 크게 달라지지요.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사도 5,32).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성령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게 "한량없이 주신 성령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그 성령의 현존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모신 그분의 사람임을 증언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아드님의 증인이시고, 우리가 참여한 사랑의 관계의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삶은 우리에게 무수히 선택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누구를, 무엇을, 어떤 방식을, 언제, 어디를 선택할지 우리는 매순간 고민하고 움직이지요.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순종하는 이는 자기 잇속이나 안위, 편리 등의 세속적 가치를 넘어서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느님의 뜻에 제 뜻을 합치는 사람입니다. 제게 해가 돌아올지라도 그렇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기회들 안에서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어 선택하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작고 소박해 보여도 그 안에 구원이 있답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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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제2주간 목요일>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3,32)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분'은 누구실까? 사도 요한은 그분을 '하늘에서 오시는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애쓰시는 예수님!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고뇌에 찬 마음과 그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우리들의 부족한 모습을 함께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또한 작은 불편함 앞에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모습이지 아닐까?
어제 오후에 앞산인 '함박산'이라는 곳을 정상까지 다녀왔습니다.
어제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습니다.
'지구의 날'(4.22)에 마치 지구가 시위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강한 바람 때문인지 맑은 하늘과 좋은 공기를 마음껏 구경하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 보였습니다.
이번 바람에 쓰러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뿌리가 튼튼하지 않은 나무들이 세찬 바람에 쓰러진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최고 의회에서 담대하고도 당당하게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사도5,29) 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차게 증언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붙잡히신 예수님을 두고 도망치는 그들이었지만, 성령을 받고 나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 곧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 증언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고, 이 믿음과 순종과 증언이 바로 어떠한 불편함 앞에서도 우리를 그 자리에 서 있게 하는 뿌리(힘),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는 뿌리입니다.
이 뿌리를 위하여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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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5,27-33
요한 3,31-36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프로젝트를 요약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공식이자
신조(信條)가 있습니다.
언젠가 나이 들어 머릿속이 흐려지고 기억력이 감퇴하더라도, 이 공식만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달 외워둬야겠습니다.
그 공식의 저자는 요한 복음사가인데, 정말이지 군더더기 하나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아무런 부연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①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② 그 극진한 사랑의 표시로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③ 예수님이 이 땅에 파견되어 오신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④ 이 세상 그 누구든, 그 어떤 대역 죄인이든 상관없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받고 멸망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표현에 제 마음이 한참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밥먹듯이 죄를 짓고, 동일한 잘못을 평생토록 반복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종말에 펼쳐질 무시무시한 광경이 자주 등장합니다.
읽을 때 마다 끔찍한 생각과 함께 밀물처럼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큰 일이네 이거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며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사실 종말에 펼쳐질 무시무시한 광경들에 대한 성경 저자들의 표현은 유다교 묵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산책하다가 길잃고 헤매는 어린 강아지 한 마리를 발견했다고 칩시다.
이제 겨우 눈을 뜬 한달된 강아지입니다.
낑낑대며 어미를 찾아 사방을 헤매다닙니다.
그냥 두고 갈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사악한 우리 인간도 이런데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연민과 측은지심의 하느님, 사랑과 자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연약한 죄인인 우리 인간, 방황하고 헤매는 우리 인간들을 절대로 모질게 몰아부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요한 복음 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기 보다 우리 인간 각자가 자초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 혹은 불신의 결과로 구원 또는 멸망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각자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해 신앙이냐? 불신이냐?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는가 여부에 따라 심판과 구원, 단죄와 영원한 생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어떻게서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그 간단한 공식, 신앙의 신조(信條)를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으로 굳게 믿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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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5,27-33
요한 3,31-36
내가 편한 곳이 내가 살 곳이다
1979년 미국 오하이오주, 지역 일관지에 뜻밖의 광고가 실립니다.
노인들에게 7일간의 무료 여행을 보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행에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뉴햄프셔주의 오래된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규칙을 듣게 됐습니다.
먼저 청소나 빨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고, 1979년이 아닌 20년 전인 1959년처럼 지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원의 모든 환경은 1959년처럼 꾸며져 있었습니다.
노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20년 전에 살았던 것처럼 보고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이후 일주일간의 체험이 끝나자 노인들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훨씬 젊어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보호자의 도움 없이는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던 노인들이 혼자 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등 건강해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실험 이후 그들은 시간을 거슬러 젊어진 것처럼 신체적 나이 역시 50세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하버드대학교 엘렌 랭어 교수가 계획한 ‘시계 거꾸로 돌리기’라는 실험이었습니다.
환경의 변화가 어떻게 몸의 변화를 끌어낸 것일까요?
환경의 변화가 먼저 믿음의 변화를 끌어낸 것입니다.
70대 노인들이 나이를 잊고 50대라는 착각에서 오는 믿음을 갖게 만든 것입니다.
믿음은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믿는 대로 자신을 변화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자신이 사는 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생긴 정체성이 곧 자신이 사는 세상과 직결됩니다.
정체성과 맞는 세상에 살아야 마음이 편합니다.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니언으로 가벼운 하이킹 등반을 떠났던 자신만만한 청년 애론 랄스턴은 그만 호박돌을 잘못 짚었다가 돌과 함께 떨어져 절벽 사이에 손이 끼이게 됩니다.
그는 음식과 물 없이 5일을 버팁니다.
가진 칼로 자신 팔을 짓누르고 있는 돌을 긁어보지만, 칼만 무뎌질 뿐 손은 빠지지 않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돌아가야만 하지만
남은 방법은 자신의 손을 그 뭉툭하게 된 작은 칼로 잘라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뼈 때문에 팔목이 잘리지 않을 것이기에 먼저 자신의 팔꿈치를 거꾸로 꺾어서
부러뜨려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기절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거기서 멈추어야 할까요?
그는 먼저 팔을 부러뜨립니다.
칼로 살과 힘줄을 자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칩니다.
“만세! 내 팔을 잘랐다. 이젠 살았어!”
실화를 다룬 영화 ‘127시간’의 내용입니다.
애론은 블루 존 캐니언의 협곡에 있었지만 실제로 그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어머니와 친구들 곁에 있었습니다.
그는 5일 내내 자신이 속해있던 세상을 상상하며 그 자리가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님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속해있게 만드는 팔을 잘라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할 인간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하늘에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십니다.
이것을 믿으면 자신이 속한 세상이 바뀝니다.
돈이나 명예, 쾌락이 있던 이런 세상에 머무르는 것이 고통으로만 여겨집니다.
그러면 자아라는 팔을 자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로 태어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계속 ‘새로 남’에 관한 말씀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믿음으로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리스도의 피로, 즉 물과 성령으로 생깁니다.
그러면 자신이 속해야 하는 세상이 바뀌고 이를 위해 자신의 팔을 자르는 노력이 시작됩니다.
이제 미사가 재개되려고 합니다. 우리는 미사가 그동안 얼마나 그리웠습니까?
‘왕이 된 남자’란 영화에서 왕과 똑 닮은 거지가 왕노릇을 하게 됩니다.
처음엔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자신도 왕일 수 있다는 생각이 일자 오히려 그 자리에 편안함을 느끼고 진짜 왕처럼 행동합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바뀌면 그 정체성이 합당한 공간에 머무는 것이 편한 법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하느님 백성이 됩니다.
내가 편한 곳은 세상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이 계신 하늘입니까?
집입니까, 성당입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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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이영근 신부님.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한 3,36) -양주 올리베따노
우리는 자주 “무엇을 했느냐, 어떤 것을 했느냐?”, “잘 했느냐, 못 했느냐?” 하며, 따지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갈망하고 어떤 열망을 품느냐?”,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삶의 질이 달려 있습니다. 곧 돈에 열망을 품은 사람은 탐욕스러워 지고 돈의 노예가 될 것이고, 사랑하기를 열망한 사람은 사랑스런 사람이 되어 갈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면 생명이 충만해지고, 하느님을 열망하면 하느님이 되어 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곧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인 "CREDO"라는 단어 역시, 'CRO'라는 ‘가슴, 심장, 생명’이라는 말과 ‘DAER'라는 ’주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곧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너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곧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됩니다.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됩니다. 구원이 현재가 됩니다. 현세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하늘나라를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 입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골로 3,1-2)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주님!
항상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 머리 위에 올라 당신을 조정하지 않게 하소서.
제 이성 위에 지혜로 계시고, 제 판단 위에 자비로 계시소서.
당신에 신비, 그 놀라움 우러러 주님이신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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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새벽을 열며.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빠다킹신부님.
드디어 오늘부터 정부의 방역지침 준수 사항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사를 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체온도 측정해야 하고, 연락처도 적어야 하는 등 많은 불편함이 있지만 그래도 미사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에 대해 커다란 기대를 하게 됩니다. 아무튼, 하루빨리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면서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희망일 것입니다. 저 역시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인터넷으로 강좌 하나를 신청했습니다.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그래픽 강좌입니다. 사진을 보정 하거나 원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사용하던 프로그램인데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손을 놨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억나는 것이 없어서 강좌를 새롭게 신청했습니다. 문제는 강좌를 봐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거의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프로그램이기에 새 버전의 프로그램은 화면 구성도 많이 바뀌었고 또 복잡해서 익히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이틀 강좌에 빠지면서 전과 똑같아졌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말했습니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이다.”
지금과 다르게 살겠다면 어제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저절로 다른 삶이 되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정신병 초기 증세에 들어선 것입니다.
어제와 다른 무엇인가를 해야지만, 지금과 다른 삶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어제와 똑같이 한다면, 어제와 같은 신앙인으로 살게 됩니다. 더 나은 신앙인이 되겠다면, 어제와는 다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며,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는 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어떤 순간에서도 굳은 믿음이 필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여기에 믿는 대상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르는 실천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어떤 아이 두 명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서로가 자기 아빠가 이렇게 말했다면서 서로 자기가 맞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아빠가 그랬어.”라면서 자기 말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자기 말이 맞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빠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어제와 다른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의 길에 더욱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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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생은 밖에서 구하거나 운에 의지해서 얻으려 하면 안 된다.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한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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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
성소국장과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했었기 때문에 후배 신부들을 많이 알고 있으며, 또 개인적으로도 아주 친합니다. 그런데 한 젊은 신부로부터 어떤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같은 지구라서 함께 하는 자리가 종종 있는데 이 신부님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후배 신부를 무시하는 것 같고, 가끔 기를 죽이는 말씀도 너무 많이 하신다고 하더군요.
사실 힘들게 한다는 신부님은 제게도 선배 신부님이 되십니다. 하지만 후배 신부가 말하는 것처럼 못된 신부가 아닌 정말로 열심히 사는 멋진 신부입니다. 신학생 때부터 친한 관계를 유지하며 만났으니, 3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을 들을 분이 아니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친구란 그냥 아는 사람과 다릅니다. 나만 알고 있는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저는 그 신부님의 특별함을 알고 있기에 좋아하는 것이고, 후배 신부는 그 특별함을 보지 못하기에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특별함을 보지 못하니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면서 멀리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특별함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특별함을 찾아야 굳게 믿을 수가 있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특별함을 찾지 못하면, 주님에게서 어떻게 그 특별함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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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부활 제2주간 목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 공간에서 기사와 글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보지만 글을 읽은 사람의 ‘댓글’도 볼 때가 있습니다. 칭찬과 격려의 댓글이 있습니다. 응원과 희망의 댓글이 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방역과 정책에 대한 외국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국의 방역과 정책이 코로나19의 확산을 방지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기사입니다. 한국의 정책은 ‘투명성, 개방성, 자발성’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했다고 합니다. 극심한 사재기도 없었고, 마스크를 착용하였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실천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살고 있기에 이런 기사를 읽으면 한국인으로서 자부심도 느끼고, 기분이 좋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에도 댓글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원로사목자께서 저의 글에 댓글을 주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영성과 열정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따뜻한 사목으로 신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실 때면 언제나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셨습니다. 신자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고, 신자들도 기쁜 마음으로 신부님의 나눔에 함께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신학생 양성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거금을 기부하셨습니다. 원로사목자로 사목 일선에 있지는 않지만 지금도 매년 한센 인을 위해서, 요셉의원을 위해서 기부를 하신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격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앙은 ‘이어달리기’와 같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사도였고, 그분들이 순교자였고, 그분들이 성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살다가 하느님께로 간 박경리 데레사 선생님의 마지막 작품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옛날의 그 집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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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파스카 예수님과 ‘우정友情의 여정’
-주님을 증언하는 삶-
오늘 새벽 프란치스코 교종의 강론 서두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미치도록(madly) 사랑하신다. 어느 성인은 말하곤 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미친 듯(like madness)' 보인다. 십자가는 이런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요, 모든 크리스천의 지혜를 함축한다. 십자가를 관상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계시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미치도록(madly)’, 정말 대단히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표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평생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정말 미치도록 하느님을, 예수님을, 모두를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열렬한 사랑이야말로 성덕의 잣대입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 라는 말도, 또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廢人이 된다’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사랑에 제대로 미친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들이 바로 사도행전의 사도들이요 교회의 성인들이요 우리 주변의 무수한 익명의 성인들입니다.
어제 아침 산책중 목격한 열심한 자매도 생각납니다. 미사는 참석 못하는 대신 멀리서 아침 일찍 운전하여 수도원에 와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요셉상 앞의 봉헌초 상자 안과 밖을 한참토록 말끔히 청소하였습니다. 미치도록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 물끄러미 바라보다 사진도 찍어 드렸고 강복도 드렸습니다. 이런 분들이 진정 미치도록 사랑스런 익명의 성녀聖女입니다. 이런 익명의 성녀聖女같은 무수한 자매들이 모여 세계 영적 일류의 국가를, 국력을 이룸을 깨닫습니다. 전송한 사진에 대한 답신입니다.
“신부님, 오늘 너무 너무 기쁘고 축복 받은 날이예요.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 조심하시고 평안하게 지내시길 기도드립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반갑고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하느님을 닮아 예수님은 당신 사도들은 물론 우리들을 미친 듯이 사랑하십니다. 항구하고 간절히 사랑하십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이런 미친듯한 사랑으로 담대히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합니다.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사도들을 대표하여 담대히 주님을 증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참으로 유익한 가르침이기에 그대로 전문을 인용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편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얼마나 담대하며 확신에 넘치는 증언인지요! 참으로 미치도록 사랑하셨던 주님께 대한 증언이요, 사도들 역시 미치도록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셨음을 봅니다.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이 우리를 부단히 회개하여 죄를 용서 받게 함으로 당신과의 우정을 깊이하십니다. 사도들만 증인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증인이요, 이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 또한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베드로의 증언이라면 오늘 복음은 요한의 예수님께 대한 증언입니다. 베드로의 증언과 요한의 증언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파스카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요한의 증언 역시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는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바로 요한 사도의 파스카의 예수님께 대한 체험적 고백입니다. 참으로 파스카 예수님의 미친듯한 사랑을 체험했기에 요한 사도의 이런 체험적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우리의 평생 여정의 영원한 도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도자이시자 구원자이신 이런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해주시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은총으로 파스카의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땅에 속한 우리들은 점차 하늘에서 오신, 모든 것 위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저절로 초연한 이탈의 사랑, 자아초월의 사랑이, 삶이 실현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늘 말씀드리다시피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요 평생 도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 ‘예닮의 여정’입니다. 하여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살아갈수록 날로 파스카의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사랑과 신뢰의 우정이 깊어질수록 성령충만한, 영원한 생명의 삶이요 이런 삶자체가 파스카의 예수님께 대한 참 좋은 증언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의 평생 도반이신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해주십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2와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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