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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韶]순(舜) 임금의 음악 이름.
♣ 소[箾]줄기만 남는.
♣ 소가구황[小家救荒]첩의 집을 먹여 살리려고 토색질하는 것을 조롱하는 말.
♣ 소가복[蕭家僕]소씨는 당 나라의 문인 소영사(蕭穎士)를 가리킨다. 10년 동안 그를 섬긴 종이 있었는데 모진 매를 자주 맞았다. 어떤 사람이 종에게 떠날 것을 권하자, 종은 “내가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훌륭한 재주를 사랑해서이다.” 하고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新唐書 卷二百二 蕭穎士傳》
♣ 소가부자[蘇家父子]송(宋) 나라 때의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 노천(老泉)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 동파(東坡) 소식(蘇軾)ㆍ소철(蘇轍)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문장이 뛰어나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들었는데, 아버지 소순을 노소(老蘇), 형 소식을 대소(大蘇), 아우 소철을 소소(小蘇)라 하였으며, 삼부자를 합하여 삼소(三蘇), 형제를 이소(二蘇)라 칭하였다.
♣ 소가예아[蘇家譽兒]소순(蘇洵)이 자기 아들 식(軾)과 철(轍)의 이름을 정한 명이자설(名二子說)에, 그 두 아들의 좋은 점을 각기 거론하였음. 《古文眞寶後集》
♣ 소각[邵閣]소옹(邵雍)의 인품을 표현한 말인 공중누각(空中樓閣)을 말한다. 정자(程子)가 소옹을 평하여 공중누각 같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명철(明澈)하고 통달(通達)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朱子語類 卷100》
♣ 소간[宵旰]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해가 진 뒤에 늦게 저녁을 먹는다[宵衣旰食]는 뜻으로,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을 뜻한다.
♣ 소갈사상여[消渴似相如]당뇨병처럼 목이 말라서 물이 자꾸 먹히는 병. 한(漢) 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사부(詞賦)에 뛰어난 문호인데, 일찍이 소갈병에 걸려 무릉(茂陵)에 살았다고 한다.
♣ 소갈위나군[消渴爲羅裙]당뇨병(糖尿病)을 앓던 사마상여가 중랑장(中郞將)으로 사절(使節)을 받들고 고향인 서촉(西蜀) 임공(臨邛)에 와서 과부 미인인 탁문군(卓文君)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았던 것을 말한다. 나군(羅裙)은 부녀자의 화려한 비단 치마로, 탁문군을 가리킨다.
♣ 소갑[梳匣]빗접.
♣ 소갑[素匣]소갑은 장식이 없는 상자이다.
♣ 소강[小康]예전 하(夏)나라의 왕이었다. 어려서 그의 아버지 상왕(相王)이 반역자인 예(睿)라는 사람의 손에 죽고 왕위를 찬탈당하였는데, 소강이 커서 예를 잡아죽이고 나라를 중흥시켰다.
♣ 소강[少康]하(夏) 나라 임금 상(相)의 아들 이름인데, 한착(寒浞)을 멸망시켜 부왕(父王)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복구하였으므로, 보통 중흥(中興)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 소강공[召康公]소강공은 바로 소공(召公)으로서, 이름은 석(奭)이고 강(康)은 시호(諡號)이다. 주(周) 나라 성왕(成王) 때 주공(周公)과 함께 삼공(三公)이 된 뒤 섬(陝) 이서(以西) 지방을 주관하였다. 《史記 卷4》
♣ 소강남[小江南]순천(順天)에 있는 지명인데, 산수(山水)가 워낙 수려하여 이렇게 이름했다고 한다.
♣ 소강절[邵康節]강절은 소옹(邵雍)의 시호.
♣ 소강호[小江湖]강호 자연을 그린 그림을 주는 것을 작은 강호를 주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 소객반원계수추[騷客攀援桂樹秋]가을철 산림(山林)의 정취가 시인 묵객이 유상(游賞)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말이다. 한(漢) 나라 회남 소산왕(淮南小山王)의 유안(劉安)의 시 ‘초은사(招隱士)’에 “계수나무 부여잡고 서성이며 머무르네.[攀援桂枝兮聊淹留]”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 소거[素車]상사(喪事)에 사용하는 백토(白土)를 칠한 흰 수레. 흉사(凶事) 때 쓰는 수레로, 주례(周禮)에 의하면 졸곡(卒哭) 때 타는 수레라고 하였다.
♣ 소거[巢居]새처럼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산다는 것으로, 곧 미개인의 생활을 말한 것이다.
♣ 소거[素車]친구의 장례에 감. 송장(送葬). 후한(後漢) 때 범식(范式)과 장소(張劭)가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 장소가 범식의 꿈속에 나타나 자기의 죽음을 알리자 범식이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몰고 호곡하고 갔다. 그러나 장사 지낼 때까지 범식이 미처 도착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발인하여 폄관(窆棺)하게 되었는데, 상구가 움직이려 하지 않다가 범식이 도착하여 상여 끈을 잡고서 끌자, 이에 상구가 움직여서 장사 지낼 수가 있었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式》
♣ 소거괴일송[素車乖一送]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범식(范式)의 친구가 죽어 장례를 행할 때 상여가 움직이지 않다가, 소거(素車)에 백마(白馬)를 매고 범식이 찾아와 애도를 하자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는 고사에서 연유된 것이다. 《後漢書 獨行 范式傳》
♣ 소거범장[素車范張]소거는 흰 천을 씌운 수레이며, 범장(范張)은 후한(後漢) 때 사람인 범식(范式)과 장소(張劭)이다. 범식과 장소는 친하게 지냈는데, 장소가 죽어 장사 지낼 때 범식이 미처 도착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발인하여 폄관(窆棺)하게 되었는데, 상구가 움직이려 하지 않다가 범식이 도착하여 상여 끈을 잡고서 끌자, 이에 상구가 움직여서 장사 지낼 수가 있었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式》
♣ 소겁[燒劫]불교 용어로, 괴겁(壞劫) 즉 말세에 일어나는 큰 화재를 말한다.
♣ 소겁[小劫]오랜 세월을 말하는데 불가와 도가의 말이 각기 다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큰 수재ㆍ화내ㆍ풍재(風災)를 모두 겪고 다시 인간이 생겨 순박해지는 것을 ‘소겁’이라 하며 이때마다 부처 하나가 나온다.” 하였다.
♣ 소겁[小劫]인간의 수명이 8만 살부터 1백 년마다 1살씩 줄어서 10세가 되는 기간, 또는 10세에서 1백 년마다 1살씩 늘어서 8만 살에 이르는 기간을 말한다.
♣ 소견[消遣]근심 걱정 따위를 떨쳐버리다.
♣ 소결[素訣]소왕(素王)의 비결(祕訣), 즉 도덕경(道德經)을 말한다. 유가(儒家)에서는 공자(孔子)를 도가(道家)에서는 노자(老子)를 각각 소왕(素王)이라고 한다. 《莊子 天道 疏》
♣ 소결청[疏決廳]죄수가 적체되어 오래도록 처결되지 않는 폐단이 있으므로 중죄(重罪)로서 장기간 미결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한 청(廳). 당상(堂上)들이 사건을 분담하여 맡고 대신(大臣)이 그 일을 총괄하였음.
♣ 소경[少卿]서한(西漢) 때 사람 이능(李陵)의 자. 그는 농서(隴西)의 이름 있는 가문 출신으로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와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항복하자 무제가 그의 집안을 적몰시켰다.
♣ 소경[蘇卿]소경은 자(字)가 자경(子卿)인 소무(蘇武)를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부절(符節)을 지니고 흉노(匈奴)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절조를 지키다가 19년만에야 귀국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李廣傳》
♣ 소경[疎磬]이따금 들려오는 풍경소리.
♣ 소경뢰지상망[蘇瓊雷之相望]송 철종(宋哲宗) 소성(紹聖) 연간에 소식(蘇軾)은 경주별가(瓊州別駕)로 폄척되고 그의 아우인 소철(蘇轍)은 뇌주(雷州)에 안치되었던 사실을 가리킨다.
♣ 소경백수우연옥[蘇卿白首憂燕獄]소경은 자(字)가 자경(子卿)인 한(漢) 나라의 충신 소무(蘇武)를 말한다. 소무가 젊은 나이로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온갖 고난을 겪고 나서 19년 만에 백발이 다 되어 돌아왔는데, 그의 아들인 원(元)과 안(安)이 연왕(燕王) 등의 모반 사건에 가담해 사형을 당하는 바람에, 갖은 핍박을 받고 끝내는 파면되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54 蘇建傳 附 蘇武》
♣ 소경분벽[素綆分碧]소식(蘇軾)의 시에 “대바구니에 나물 캐면 손톱 끝까지 향기롭고, 흰 밧줄로 퍼 담는 벽류(碧流) 은두레박이 얼 듯하네.[筠藍擷翠爪甲香 素綆分碧銀缾凍]”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9 同正輔表兄遊白水山》
♣ 소경설[蘇卿雪]소경은 자(字)가 자경(子卿)인 한(漢) 나라의 소무(蘇武)를 말한다. 무제(武帝)의 사신으로 흉노 땅에 갔다가 억류되어 온갖 고생을 다 하였는데, 땅속 움집에 갇혀 있을 적에 때마침 내리는 눈을 받아 먹고 담요를 씹어 먹으며 목숨을 유지하기도 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54 蘇建李廣傳》
♣ 소경장절심[蘇卿仗節心]소무가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면서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서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節)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漢書 卷54 蘇武傳》
♣ 소경절[蘇卿節]소경은 한 나라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가서 절개를 지킨 소무(蘇武)를 가리킨다. 소무는 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節)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漢書 卷54 蘇建傳 蘇武》
♣ 소고[小姑]남편의 서모(庶母), 또는 자매.
♣ 소고[召誥]상서(尙書) 서주고문(西周古文)의 오고(五誥) 중 하나로 소공(召公)의 고(誥)를 말함.
♣ 소곡[巢谷]열렬한 추종자(追從者)를 이른 것. 소곡은 송(宋)의 미산(眉山) 사람. 소식(蘇軾)ㆍ소철(蘇轍)이 유배를 당했을 때 걸어서 소철을 찾아보고 또 소식을 찾아보기 위해 해남(海南)으로 가다가 도중 신주(新州)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음. 《宋史 卷四百五十九》
♣ 소공[蘇公]적벽부(赤壁賦)를 지은 송(宋) 나라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 소공당[召公棠]예전 주(周)나라 때에 소공이 행정을 잘 하여서 민심이 감복하였다. 그 가 지방을 순행할 때에 어떤 아가위 나무[棠] 아래에서 쉬었는데, 백성들은 소공이 쉬던 나무라 하여 가지 하나 자르지 아니하고 잘 위하였다 한다.
♣ 소공수[蕭公綬]소공은 전한(前漢)의 소육(蕭育), 소육은 친구 주박(朱博) 등과 절친한 사이로 서로 추천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이보다 앞서 왕길(王吉)과 공우(貢禹)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장안(長安)에는 “소주가 인끈을 매자 왕공이 갓을 새로 썼다.[蕭朱結綬 王貢彈冠]" 하였다. 《漢書 蕭望之傳》
♣ 소관[蕭關]중국 관중(關中)의 4관(關) 가운데 하나로, 수자리 살러 간 변방 요새지를 말한다.
♣ 소관시[素冠詩]소관시(素冠詩)는 곧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행여나 보았던가 흰 관을 쓴 상주의 파리한 얼굴을[庶見素冠兮 棘人欒欒兮]”이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인심이 박절해져서 부모를 위해 삼년상 입는 것을 길다고 없애 버린 세태를 풍자하여 부른 노래이다.
♣ 소광영절[笑狂纓絶]소광은 웃는 미치광이란 뜻으로, 전국 시대 순우곤(淳于髡)이 제왕(齊王)의 어처구니 없는 말에 기가 막혀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자 갓끈이 뚝 끊어졌던 고사에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곧 세상일이 어처구니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史記 卷一百二十六》
♣ 소굉전우[蕭宏錢愚]육조(六朝) 때 양무제(梁武帝)의 아우 소굉(蕭宏)이 돈을 3억(億)이나 모으고도 인색하여 쓰지 않으매, 무제의 아들 수(綏)가 ‘돈만 모으는 바보론[錢愚論]’을 지어 기롱(譏弄)했다.
♣ 소교[素交]지금까지 지녀 왔던 맑고 순결한 교유(交遊) 관계를 뜻한다.
♣ 소구[騷九]전국 시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난 뒤 지은 이소경(離騷經)과 구가(九歌)를 말한다.
♣ 소군소재[蕭君蕭齋]소군은 남조 양(梁)의 명필 소자운(蕭子雲)을 말한다. 양 무제(梁武帝)가 절을 지은 뒤 소자운에게 큰 글씨로 소(蕭) 자를 쓰게 하였는데, 이약(李約)이 이 글자를 매입(買入)한 뒤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는 이름을 소재(蕭齋)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당(唐) 나라 장회관(張懷瓘)의 서단(書斷)에 전한다.
♣ 소군원[昭君怨]소군은 한 원제(漢元帝)의 궁녀인 왕장(王嬙)의 자.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 나라에 미인을 구하여 비(妃)로 삼기를 청하므로 그녀를 보냈다. 원제는 후궁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볼 수 없어 화공을 시켜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그림을 살펴보고 총애하였다. 그래서 궁인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어 잘 그리게 하였으나 소군만은 뇌물 주는 것을 즐겨하지 않아 총애를 받지 못했는데, 흉노로 떠날 때 불러 보니 후궁 가운데 용모가 으뜸이었다. 당 나라의 문인들이 그녀의 한을 기술하여 세상에 전해지는데 동방규(東方虯)의 소군원(昭君怨)이 유명하다. 소군의 한은, 한 나라가 당시 전성 시대로 훌륭한 무신들이 많았으니 흉노를 정벌했어야 할 것인데 하필 한낱 첩을 보내어 화친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이다. 《西京雜記, 漢書 卷九十四 匈奴傳》
♣ 소궁소상[少宮少商]거문고 음률의 명칭. 거문고는 원래 다섯 줄이었는데, 문왕(文王)이 두 줄을 더하여 소궁ㆍ소상이라 했다 함.
♣ 소귀지아희[所貴知我希]이 말은 노자(老子) 제70장에 “나를 아는 자가 드물고 나를 본받는 자도 적으니, 그러므로 성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속에는 보배로운 도를 품고 있는 것이다[知我者希 則我者貴 是以聖人被褐懷玉].” 한 데서 온 말이다.
♣ 소규[蕭規]소하(蕭何)의 법. 한(漢) 나라 유방(劉邦)이 나라를 세웠을 때 소하가 재상이 되어 나라의 율령과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한 나라 법의 근간이 되었다.
♣ 소균[韶鈞]소(韶)는 우순(虞舜)의 악(樂)이요, 균(鈞)은 진 조간자(趙簡子)가 꿈에 하늘에 올라가서 들었다는 균천악(鈞天樂)이다. 《列子 周穆王》
♣ 소귤[蘇橘]한 문제(漢文帝) 때의 선인(仙人) 소선공(蘇仙公)이 승천(昇天)하기 전에 모친과 이별하면서, “내년에 전염병이 크게 번질 텐데 우물의 물 한 되와 귤 한 조각을 먹이면 치료할 수 있다.”는 비방(祕方)을 알려 주어, 백성을 구제하게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神仙傳 蘇仙公》
♣ 소금[素琴]소금은 곧 무현금(無絃琴)이다. 도잠(陶潛)이 음성(音聲)은 알지 못하면서 소금(素琴) 한 장(張)을 가지고 있는데 줄이 없었다. 매양 술과 쾌적한 일이 있으면 문득 어루만져 희롱하여 그 뜻을 붙였다. 《晉書 陶潛傳》
♣ 소금[素琴]아무런 장식이 없는 거문고. 예기(禮記) 상복사제(喪服四制)에 “대상(大祥) 날에 소금을 타서 백성들에게 슬픔에 마침이 있음을 알림으로써 절제(節制)한다.” 하였으며,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에는 “도잠이 소금 하나를 갖추어 두었으나 줄이 없었다.” 하였다.
♣ 소금[素衿]타고난 본심(本心)을 말한다.
♣ 소금장[銷金帳]소금장은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장막, 즉 아름다운 장막이라는 뜻이다. 송(宋) 나라 때 학사(學士) 도곡(陶穀)은 첩(妾)이 있었는데, 이 첩이 본래는 태위(太尉) 당진(黨進)의 가희(家姬)였었다. 하루는 눈이 내리자 도곡이 설수(雪水)를 가져다가 차(茶)를 끓이면서 첩을 돌아보고 “당씨(黨氏) 집에도 이런 운치가 있는가?" 하니 첩이 “저 추한 사람이 이런 운치야 어떻게 알겠습니까만 소금장 밑에서 주연(酒宴) 베풀고 노래 부르며 양고기 안주에 좋은 술 마시는 것뿐이랍니다.” 하자 도곡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했다는 고사가 있다. 《書言故事 豪奢類》
♣ 소기[蘇己]주가 가장 사랑한 비(妃)인 달기(妲己). 달기는 유소(有蘇) 나라의 여자였기에 소기라고 쓴 것임.
♣ 소기비[小器非]논어(論語) 팔일(八佾)에 “관중의 그릇이 작구나.[管仲之器小哉]”라고 한 공자의 비평이 실려 있다.
♣ 소난[小難]난형난제(難兄難弟)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계씨(季氏)를 가리킨다.
♣ 소남[所南]소남은 송말의 충신인 정사초(鄭思肖)의 자. 그는 원병(元兵)이 남쪽으로 내려오자 오하(吳下)에 은거하면서 종신토록 장가도 들지 않았으며, 생전에 자기 위패(位牌)를 만들어 ‘대송불충불효정사초(大宋不忠不孝鄭思肖)’라고 써 놓았다 한다.
♣ 소남[召南]소남은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남국(南國)을 순행하면서 훌륭한 덕화(德化)를 입힘으로써 훌륭한 민요(民謠)들이 채집된 것이다.
♣ 소남당[召南棠]시경(詩經)에 소남(召南)의 감당(甘棠)편이 있는데, 소공(召公)이 지방에서 정치를 잘하였으므로, 그가 간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가 자주 쉬던 감당(甘棠)나무를 베지 말자고 노래를 읊은 것이다.
♣ 소내[素柰]하얀 능금꽃.
♣ 소내[苕水]정약용의 출생지인 광주군(廣州郡) 초부면(草阜面) 마현리(馬峴里) 소천(苕川).
♣ 소내한[蘇內翰]소내한은 곧 한림학사(翰林學士) 소식(蘇軾)을 가리킨 것으로, 소식의 이충시(二蟲詩)에 “그대는 수마아를 보지 못했나 흐르는 물을 걸음걸음 거슬러 오르되 큰 강은 날마다 동으로 천리를 흐르건만 이 벌레는 팔짝팔짝 뛰어 길이 여기에 있다오 그대는 안람퇴를 보지 못했나 폭풍을 따라 급히 나는데 바람 따라 한번 가면 어디에서 묵는지 바람맞으면 다시 쑥대밭으로 떨어진다오 두 벌레의 어리석고 지혜로움을 모두 헤아리지 못하니 강가에서 이것을 아는 사람 없음을 한번 웃노라[君不見水馬兒 步步逆流水 大江東流日千里 此蟲趯趯長在此 君不見鷃濫堆 決起隨衝風 隨風一去宿何許 逆風還落蓬蒿中 二蟲愚智俱莫測 江邊一笑無人識]”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二十一》
♣ 소녀[素女]옛날 신녀(神女). 노래를 잘하였다고 함.
♣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배우기 어려우니 젊을 때에 학문에 힘을 써라.
♣ 소년행[少年行]악부(樂府) 잡곡(雜曲)의 가사로, 흔히 소년의, 삶을 경시하고 의리를 중시하며 호쾌한 기분에 맞춰 여행을 즐기는 일을 노래하는 글인데 여기서는 타향에서 풍경을 노래하는 시를 뜻한다.
♣ 소노의[小魯意]공자가 동산(東山)에 올라가 노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太山)에 올라가 천하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 소단[蘇端]소단은 두보(杜甫)와 친지였는데, 두보의 시에 ‘우과소단(雨過蘇端)’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가 있다.
♣ 소단[騷壇]소단은 시단(詩壇)을 말한다.
♣ 소단조[燒丹竈]신선되는 단약(丹藥)을 연(煉)하여 만드는 것이다.
♣ 소단집이[騷壇執耳]문단을 좌우하는 종장(宗匠)의 지위를 말한다.
♣ 소당[召棠]시경(詩經) 소남(召南)의 감당(甘棠)을 말한 것이다. 주(周) 나라 소공 석(召公奭)이 남국(南國)을 순시하다가 팥배나무의 밑에서 민원을 처리해 주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팥배나무를 차마 베지 못하고 감당지시(甘棠之詩)를 지어 기렸다. 후세에 선정(善政)을 비유하는 고사로 쓰이고 있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 소당[燒當]한(漢) 나라 때 서강(西羌) 일파(一派)의 종호(種號)이다.
♣ 소대[蘇代]전국 시대 낙양 사람. 소진의 동생으로서 소진처럼 또한 합종ㆍ연횡설을 배웠다. 처음에 연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크게 등용되기를 구하다가 자식을 제나에 인질로 맡기고 나중에 송으로 갔는데 송나라가 그를 극진히 대우하였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함에 소대가 편지를 보내 연나라 소왕을 설득하였더니 소왕이 좋다 여기고 소대와 더불어 제나라 칠 것을 도모하여 제나라를 격파하였다. 그러고 나서 제후들에게 합종할 것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소씨의 종약을 으뜸으로 여기게 되었다. 소대 또한 이 일로 인해 제후들에게 이름이 나게 되었다. 《史記》
♣ 소대궁[昭臺宮]소대궁은 한(漢) 나라 때의 궁전 이름인데, 일찍이 선제(宣帝)의 곽 황후(霍皇后)와 성제(成帝)의 허 황후(許皇后)가 모두 폐(廢)해진 뒤에 거처하던 곳이다.
♣ 소동릉[召東陵]동릉은 소평(召平)을 말한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동릉후는 진(秦) 나라가 망한 뒤 벼슬을 잃게 되었고 따라서 생활이 가난하게 되어 장안성 동쪽에 나아가 외를 심었는데, 그 외의 맛이 매우 훌륭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동릉과(東陵瓜)라 불렀다.” 하였다.
♣ 소동파[蘇東坡]동파는 송(宋)의 문장가 소식(蘇軾)의 호.
♣ 소두[小杜]두목(杜牧)
♣ 소두[梳頭]머리를 빗다.
♣ 소두[召杜]지방민이 태수의 선정을 칭찬한 말. 전한(前漢) 때의 소신신(召信臣)과 후한(後漢)의 두시(杜詩)가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지방민들에 의해 소부두모(召父杜母)라고까지 일컬어졌다. 《漢書 召信臣傳ㆍ後漢書 杜詩傳》
♣ 소두양주몽[小杜揚州夢]소두는 곧 두목(杜牧)을 가리키는데, 두목이 일찍이 천하에 가장 번화한 양주에서 노닐었던 옛날을 회상한 시에 “십년 만에 양주몽 한 번 깨니, 박명한 청루의 이름만 남았구나[十年一覺揚州夢 贏得靑樓薄倖名]" 하였다.
♣ 소랑[蘇娘]진(晉) 나라 사람 사침(謝耽)의 첩인 소자궁(蘇紫藭)을 이르는데, 그가 사침을 사랑하나 가까이 할 길이 없자, 시아(侍兒)를 보내서 사침이 항상 입는 작은 적삼을 빌려다가 낮에는 이것을 속에 입고 밤에는 이것을 덮고 잤더니, 사침이 그 사실을 알고는 시를 부쳐 이르기를 “소랑과 한번 작별한 후 꿈마저 드물었는데 푸른 적삼을 빌려가니 목마름이 위로되누나 만일 그윽한 정을 거듭 펴고자 한다면 응당 사랑의 옷을 지어주기 바란다오[蘇娘一別夢魂稀 來借靑衫慰渴飢 若使閑情重作賦 也應願作謝郞衣]” 했다고 한다.
♣ 소랑[蕭郞]당(唐) 나라 때에 남자의 통칭(通稱)이다.
♣ 소랑[蕭郞]소씨의 남자. 양 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을 가리키는데, 그는 유교와 도교에 정통하고 불전(佛典)에 매우 탐닉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 소랑[蕭郞]양(梁) 나라의 소자운(蕭子雲)을 가리키는데,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 능하였다. 양 무제(梁武帝)가 절을 짓고서 소자운에게 명하여, 비백체(飛白體)로 소(蕭)자를 크게 쓰게 하였는데, 뒤에 절은 무너졌어도 이 글씨만은 남아 있었다 한다. 《梁書 卷三十五》
♣ 소래산[蘇來山]인천(仁川)의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인천의 진산(鎭山)이다.
♣ 소량주[小涼州]사조(詞調)의 이름이다.
♣ 소려작거[燒廬作炬]임진왜란 때 대가(大駕)가 임진강 나루터에 당도했는데, 밤을 밝힐 불이 없어 인가에다 불을 지르고는 그 불빛을 이용하여 나루를 건넜다.
♣ 소련[燒煉]단사(丹砂)를 아홉 번 단련하여 영단(靈丹)을 만드는 것임.
♣ 소련[少連]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소련과 대련은 거상을 잘 했는데, …… 동이의 아들이다.[少連大連善居喪 …… 東夷之子也]”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소렴[小帘]’帘’은 주기(酒旗)로서 작은 술집을 말함.
♣ 소렴운우[疎簾雲雨]두보의 시에 “楚江巫峽半雲雨 淸簞疏簾看奕棋"라 하였음.
♣ 소령[小令]사체(詞體)의 하나. 58자 이내의 사(詞)를 소령이라 함.
♣ 소로[邵老]송(宋)의 소옹(邵雍). 역리(易理)에 정통하고, 자기 사는 집을 안락와(安樂窩), 자호를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할 만큼 부귀공명을 초월하여 일생을 유유자적하게 살았음. 《宋史 卷四百二十七》
♣ 소로[蕭露]임금으로부터 잔치를 하사받은 것을 이름. 옛날에 제후(諸侯)들이 주(周) 나라에 조회하자, 천자(天子)가 사랑과 은혜로써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연주한 악가(樂歌)인 시경(詩經) 소아(小雅) 여소(蓼蕭)에 “기다란 저 쑥에 이슬이 농후하게 떨어졌네[蓼彼蕭斯 零露濃濃]” 한 데서 온 말이다.
♣ 소로와[邵老窩]송 나라의 소옹(邵雍)인데, 그는 낙양에 살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기로 유명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강절(康節) 선생이라고 불렀다.
♣ 소륵[疏勒]외로운 산성을 가리킨다. 동한(東漢)의 경공(耿恭)이 단약(單弱)한 병사로 소륵성(疏勒城)을 고수하면서 흉노의 수만 군사를 상대로 온갖 고초를 겪는 속에서 수년 동안이나 절의를 지키며 끝내 사명을 완수한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19 耿邯列傳 附 耿恭傳》
♣ 소릉[少陵]당(唐) 나라 두보(杜甫)의 별호이다. 소릉은 본래 한 선제(漢宣帝) 허후(許后)의 능인데 그 규모가 선제의 능보다 작았기 때문에 소릉이라고 한 것이다. 두보가 일찍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소릉야로(少陵野老)라고 불렀다.
♣ 소릉[昭陵]당 태종(唐太宗)의 능(陵) 이름임. 태종은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여 평생에 익힌 나머지, 천하에 흩어진 진적을 모두 수집하여 비부(秘府)에 두고서 자기가 죽거든 순장(殉葬)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그래서 난정첩(蘭亭帖)을 포함, 모든 명적이 소릉에 묻히게 되었음.
♣ 소릉[昭陵]소릉은 단종(端宗)의 생묘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으로 안산(安山)에 있었는데, 단종이 죽은 뒤 세조(世祖)의 꿈에 나타나 질책하였다 하여 능을 발굴해서 물가에 이장(移葬)하였다.
♣ 소릉[少陵]이가환(李家煥)을 가리킨다.
♣ 소릉간[少陵看]두보(杜甫)의 소한식주중작시(小寒食舟中作詩)에 “늘그막의 꽃구경은 안개 속에 보는 것 같네[老年花似霧中看]” 한 것을 가리킨다.
♣ 소릉남목[少陵楠木]소릉은 두보(杜甫)의 호이고, 남목은 두보의 시 ‘楠木爲風雨所拔歎’에 나오는 나무로 훌륭한 재목감이 비바람에 뽑힌 것을 슬퍼한 것인데, 자신의 신세를 비유하였다.
♣ 소릉사[召陵師]제(齊) 나라 군사. 제 환공(齊桓公)이 초(楚)를 정벌하고 군대를 소릉(召陵)에다 임시 주둔시켰었음. 《春秋 僖公 四年》
♣ 소릉탄유관[少陵歎儒冠]소릉은 두보(杜甫)의 별호이다. 두보의 시 봉증위좌승장이십이운(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에 “유관이 대부분 신세를 망치었네.[儒冠多誤身]”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바른 길로 가는 선비를 조정에서 알아주지 않아 일생을 궁하게 사는 것을 탄식하는 뜻이다.
♣ 소리[素履]꾸민 것이 없는 짚신이라는 뜻으로, 본분(本分)을 지키며 순박하고 청백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이괘(履卦) 초구효(初九爻)에 “꾸미지 않은 짚신을 신고 가니, 허물이 없으리라.[素履往 無咎]”라는 말이 있다.
♣ 소리[小李]당(唐) 이사훈(李師訓)이 산수 화가로 유명했고, 그 아들 소도(昭道)도 산수를 잘 그렸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아버지를 대리(大李), 아들을 소리(小李)라 불렀다. 또 전촉(前蜀)의 산수 화가 이승(李昇)도 촉(蜀)의 산수를 그려 절묘했는데, 당(唐) 이사훈(李師訓)의 필법을 얻고도 더 유려(流麗)했으므로 사람들이 소리장군(小李將軍)이라 불렀다
♣ 소리[素履]선비가 신는 신은 흰 신이므로 선비 노릇하는 것이다.
♣ 소리[疎籬]성근 울타리.
♣ 소리시[蘇李詩]한(漢) 나라 소무(蘇武)와 이릉(李陵)의 시.
♣ 소리장군[小李將軍]당 나라 화가 이소도(李昭道)를 가리킨다. 그의 아버지 사훈(思訓)을 대리장군(大李將軍)이라 한 데서 나온 것이다.
♣ 소리장도[笑裏藏刀]외면으로는 웃으면서 온화한 척 하지만, 마음 속에는 음흉하게 칼을 품고 있음.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지만 속에는 해칠 뜻을 품고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구밀복검(口蜜腹劍)
♣ 소린병[少鄰並]당 나라 가도(賈島)의 제이응유거시(題李凝幽居詩)에 “한적한 생활이라 이웃집 적고, 오솔길 거친 동산 뻗어 있구나[閒居少鄰並 草徑入荒園].” 하였음.
♣ 소림면벽[少林面壁]소림사는 중국 숭산(崇山)에 있는 절 이름이고, 면벽은 벽을 마주 대한다는 뜻이다. 양(梁)나라 때 인도의 중 달마(達磨)가 중국에 들어와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벽을 마주하고 좌선(坐禪)한 끝에 도를 얻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高僧傳》
♣ 소림선[小林禪]소림은 중국에 있는 소림사(小林寺)를 이르는데,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일찍이 여기에서 9년 동안 면벽 좌선(面壁坐禪)을 하였었다.
♣ 소림일지[巢林一枝]새는 숲 속에 둥지를 틀어도 단 하나의 나뭇가지에 한할 뿐임. 분수에 맞게 사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함 또는 작은 집에서 만족하게 삶을 비유
♣ 소마[疏麻]신마(神麻).
♣ 소만[小蠻]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시희(侍姬). 별명은 양지(楊枝). 허리가 가늘고 춤을 잘 추었다. 거이의 기생으로 번소는 노래를 잘하고, 소만은 춤을 잘했으므로 “앵두 같은 번소의 입이요 버들 같은 소만의 허리로다.”라는 백거이의 시가 있다.
♣ 소만[小滿]지방관의 3년 임기(任期)를 이름. 본래는 지방관의 임기가 6년이었는데, 송 문제(宋文帝) 때, 지방관의 임기 6년은 너무 오랜 기간이라 하여 임기를 3년으로 개정하고 이를 소만이라고 하였다.
♣ 소만요[小蠻腰]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를 말한다. 소만은 본디 백거이(白居易)의 무기(舞妓) 이름으로, 백거이의 시에, “앵도는 번소의 입이고, 양류는 소만의 허리이네.[櫻桃樊素口 楊柳小蠻腰]”하였다.
♣ 소망지[蕭望之]한 선제(漢宣帝)때 태자태부(太子太傅).
♣ 소매희[笑罵嬉]소매희는 시문(詩文)에 뛰어남을 비유한 말로, 소식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글 짓는 것을 마치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하여……비록 즐기며 웃고 성내어 욕하는[嬉笑怒罵] 말이라도 모두 써서 읽을 수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宋史 卷三百三十八》
♣ 소멱[素簚]흰 개가죽으로 덮은 수레의 손잡이. 흰색은 흉색(凶色)으로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의 복장에 흔히 쓰는데 신하가 임금에게 버림을 받아 쫓겨날 때 상인(喪人)으로 자처하여 흉복(凶服)을 차려 입는다고 함. 《禮記 曲禮下》
♣ 소멸천친[劭也蔑天親]소는 남조 송 문제(南朝宋文帝)의 장자(長子)로 일찍이 황태자에 책봉된 유소(劉劭)를 가리키는데, 뒤에 부왕(父王)을 무고(巫蠱)한 사실이 발각되어 폐태자(廢太子)가 되어서는 마침내 시역(弑逆)을 자행하여 스스로 즉위하였으나, 의병(義兵)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사가(史家)에는 원흉(元凶)으로 지목되었다. 《宋書 卷九十九》
♣ 소명태자[昭明太子]양 무제의 장자로 이름은 통(統)임.
♣ 소모[小毛]소모는 모형의 훈고전을 전수한 한(漢) 나라 때의 모장(毛萇)을 말한다.
♣ 소목[昭穆]사당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천자(天子)는 1세를 중앙에, 2세ㆍ4세ㆍ6세는 소라 하여 왼편에, 3세ㆍ5세ㆍ7세는 목이라 하여 오른편에 모시어 7묘[廟]가 되며, 제후는 2소ㆍ2목으로 5묘, 대부는 1소 1목의 3묘가 된다.
♣ 소무[蘇武]한(漢)의 두릉(杜陵)사람. 한 무제(漢武帝)때 중랑장(中郞將)으로서 절월(節鉞)을 갖고 흉노(匈奴)에게 사신 가 항복하라는 선우(單于)의 협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선우로부터, 큰 움 속에다 유치해 두고 음식을 주지 않거나 북해(北海)로 옮겨 양(羊)을 먹이게 하는 등 19년에 걸쳐 갖은 고초를 겪었으나 소무는 그때마다 모직물의 털을 뜯어 눈과 함께 씹어 먹거나 땅을 파 들쥐를 잡아먹는 등 모든 방법을 다 써가며 죽지 않고 한에서 가져간 절월이 다 닳도록 버티다가 소제(昭帝)가 즉위하여 흉노와 화친(和親)한 후 비로소 수염과 머리가 다 흰 몸으로 돌아왔음. 《漢書 蘇武傳》
♣ 소무간양[蘇武看羊]한 무제(漢武帝) 때 소무가 흉노(匈奴)에 사신 갔다가 억류되어 그들의 항복 권유에 굽히지 않으므로 끝내 북해(北海) 가에 안치되었는데, 흉노는 소무에게 그 곳에서 숫양[羝]을 기르게 하면서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한 나라로 돌려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19년을 지낸 뒤, 한 소제(漢昭帝) 때에 흉노와 화친을 하게 되어, 한 나라에서 소무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자, 흉노는 거짓으로 소무가 죽었다고 핑계대었다. 그러자 뒤에 한 나라 사신이 흉노에 가서 한인(漢人) 상혜(常惠)의 계책에 따라, 흉노 선우(單于)에게 “천자(天子)가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러기를 잡았는데, 기러기의 발목에 비단에 쓴 편지[帛書]가 매여 있었는바, 그 내용은 곧 소무 등이 아무 택중(澤中)에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함으로써, 마침내 소무가 한 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四》
♣ 소무내이대무외[小無內而大無外]“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고,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다[至小無內 至大無外].”는 말이 있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 소무서[蘇武書]한 나라 무제(武帝) 때 소무가 흉노(匈奴)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굴하지 않고 북해(北海)에 구금된 지 19년이 되었다. 흉노는 그가 이미 죽었다고 속였는데 본국에서 그것을 탐지해 알고 기러기 발에 글월을 매어 부쳐 소식을 통하여 왔고, 거짓말로 흉노를 힐책하여 돌려왔다.
♣ 소무설[蘇武雪]소무가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면서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서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節)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漢書 卷54 蘇武傳》
♣ 소무이릉[蘇武李陵]두 사람은 다 한 무제의 신하로, 소무는 흉노(匈奴)에게 사신갔다가 억류되었고, 이능은 흉노와 싸우다가 항복했는데, 두 사람은 흉노국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 뒤 한 소제(漢昭帝)가 흉노와 화친하자 소무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니. 이릉은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이별시를 지어 소무에게 주었다. “携手上河梁 游子暮何之 徘徊蹊路側 恨恨不得辭 晨風鳴北林 熠熠東南飛 浮雲日千里 安知我心悲” 소무도 이 능에게 다음과 같은 이별시를 지어 주었다. “雙鳧俱北飛 一鳧獨南翔 子當留斯舘 我當歸故鄕 一別如秦胡 會見何渠央 愴恨切中懷 不覺淚霑裳 願子長努力 言笑莫相忘”이상 시는 오언시(五言詩)의 조종이 되었다 함.
♣ 소무절[蘇武節]소무(蘇武)처럼 강직하고 절조 있는 인물을 오랑캐 땅에 사신으로 보내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 소무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가서 약 19년 동안이나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한절(漢節)을 몸에 지니는 동안 절모(節旄)가 모두 너덜너덜해졌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漢書 卷54》
♣ 소무절모[蘇武節旄]소무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19년을 억류되어 있는 동안에 깃발이 다 모지라졌으며, 머리는 쑥대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소무가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면서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서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節)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다. 《漢書 卷54 蘇武傳》
♣ 소무탈신기[小巫奪神氣]미숙한 무당이 노련한 무당을 만나면 자신의 미숙함을 실망하여 띠를 뽑아[拔茅]버린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학문과 기예의 미숙한 자가 노련한 자를 보고는 자신에 대하여 실망감을 갖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소문[昭文]거문고의 명수
♣ 소문[蘇文]고구려(高句麗)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말한다.
♣ 소문[少文]남조 송(南朝宋)의 은사(隱士)로 금(琴)ㆍ서(書)ㆍ화(畫)에 뛰어났던 종병(宗炳)의 자(字)이다. 노장학(老莊學)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형산(衡山)에 은거하면서 고조(高祖)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산수를 좋아하여 승경(勝景)을 찾아다니다가 병으로 강릉(江陵)에 돌아와 누운 뒤 그동안 유람했던 곳의 경치를 그림으로 그려 방 안에 걸어 놓고 감상했던 고사가 전한다. 《宋書 宗炳傳》
♣ 소문[召文]의성(義城)의 고호임.
♣ 소문고금[昭文鼓琴]마진(馬臻)의 시에, “마음껏 소문 거문고 두들기네.[任鼓昭文琴]" 하였음.
♣ 소문금[昭文琴]소문(昭文)의 거문고. 소문은 고대 중국의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 《莊子 大宗師》
♣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웃는 집에 온갖 복이 온다.
♣ 소문불고금[昭文不鼓琴]모든 것이 다 끝나 이미 체념 상태에 들어간 것을 말함. 여기 소문(昭文)은 왕휘지(王徽之)인데, 휘지가 자기 아우 헌지(獻之)가 죽었을 때 곧바로 그의 영상(靈牀)에 앉아서 헌지의 거문고를 들고 뜯었으나 곡조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휘지는 탄식을 하면서, “아! 자경(子敬)아, 거문고도 사람 따라 가버렸구나.” 하고 이어 기절하였다고 함. 《晉書 卷八十》
♣ 소문장소[蘇門長嘯]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에 “완적이 일찍이 소문산에서 손등(孫登)을 만나 신선 도술을 이야기했는데도 등이 대답하지 않으므로 물러나왔다. 그런데 반쯤 내려오다가 휘파람 소리를 들으니 난봉(鸞鳳)의 소리와 같았다.” 하였음.
♣ 소문휴성[昭文虧成]휴성(虧成)은 결함과 완전, 성공과 실패를 뜻하는 말로, 세상 일에 손을 대면 결함이 생기고 아예 손을 대지 않으면 완전해진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가야금의 명인 소문(昭文)이 연주를 하면 성(成)과 휴(虧)가 있고, 연주를 하지 않으면 성과 휴가 아예 없어진다.” 하였다.
♣ 소미[少微]소미성은 처사(處士)의 위치에 해당한 별로서 일명 처사성(處士星)이라고도 한다. 회계(會稽)의 사부(謝敷)가 약야산(若耶山)에 은거(隱居)하는데 홀연히 달이 소미성을 범하였다. 때에 대규(戴逵)의 이름이 사부(謝敷)보다 더 알려졌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대규가 죽을 징조가 아닌가?" 하였는데 조금 뒤에 사부가 죽었다. 그리하여 회계 인사(人士)들이 오중(吳中) 사람들을 조롱하기를, “오중의 고사(高士)는 죽기를 구하여도 되지 않는다.” 하였다.
♣ 소미[少微]송(宋) 나라 때에 임금으로부터 소미선생(少微先生)이란 호칭을 하사받은 처사(處士) 강지(江贄)를 이르는데, 전하여 은거하는 처사를 뜻한다.
♣ 소미서[少微書]소미는 송(宋) 나라 때 처사(處士)로서 소미선생(少微先生)이란 호(號)를 하사받은 강지(江贄)를 말하고, 책은 그가 저술한 통감절요(通鑑節要)를 가리킨다.
♣ 소미숙사[少微塾史]소미는 송(宋) 나라 때의 은사 강지(江贄)의 호이고, 역사책이란 바로 그가 저술한 통감절요(通鑑節要)를 가리킨다.
♣ 소미우[燒尾牛]전국 시대 제(齊) 나라 전단(田單)이 외로이 즉묵성을 지키고 있다가, 천여 마리의 소에 붉은 옷을 입히고 뿔에 칼날을 매단 뒤, 소 꼬리에 갈대를 묶어 불을 붙여서 성 밖으로 내몰아 연(燕) 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한 고사가 있다. 《史記 田單傳》
♣ 소미정광운[少微精光隕]처사(處士)의 죽음을 비유한 말. 소미는 별 이름으로, 이 별이 처사의 위치에 해당한다고 한다.
♣ 소미지급[燒眉之急]눈썹이 (불이 붙어) 타 들어가는 듯한 위급함. 매우 위급한 상황
♣ 소미회[燒尾會]새로 임명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선배들에게 주식(酒食)을 한턱내는 모임을 말함. 이 자리에서 상대별곡(霜臺別曲)을 가창(歌唱)하고 계축(契軸)을 만들어 제원(諸員)의 성명을 기록하고 나면, 비로소 허참(許參)을 하던 사헌부 내의 불문율(不文律)이었음. 꼬리떼기 모임.
♣ 소반[蔬飯]변변하지 못한 음식. 고기 반찬이 없는 밥.
♣ 소발[召茇]소발은 소공(召公)이 임시 머문 집. 문왕 때에 주공은 안에서 일을 하고 소공은 밖에서 일을 하며 문왕의 덕화를 펴게 했다. 그래서 소공이 임시 쉬어간 곳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시가 있다. 《詩傳 召南 甘棠》
♣ 소백[召伯]소백(召伯)은 본시 연(燕) 나라에 처음 봉한 소공(召公)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의 자손인 전국 시대의 연소왕(燕昭王)을 말하였다.
♣ 소백당[召伯棠]소백의 감당(甘棠)나무. 주(周) 나라 소공 석(召公奭)이 순행(巡行)하던 중 마침 농번기를 맞자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감당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등 인정(仁政)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감당나무를 베지 않고 기념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詩經 召南 甘棠》
♣ 소백온[邵伯溫]송 휘종(宋徽宗) 때 사람. 소옹(邵雍)의 아들로 자는 자문(子文). 저서에는 역변혹(易辨惑)ㆍ하남집(河南集)ㆍ견문록(見聞錄) 등이 있음.
♣ 소범[小范]소범은 송(宋) 나라 때 범옹(范雍)을 대범(大范)이라 일컫는 데에 대하여 범중엄(范仲淹)을 일컬은 말인데, 범중엄이 일찍이 서하(西夏) 지역을 수어(守禦)할 적에 하인(夏人)들이 말하기를 “소범로자(小范老子)는 가슴속에 수만의 갑병(甲兵)이 들어 있으므로, 속일 수 있는 대범로자(大范老子)와 비할 바가 아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소범흉[小范胸]소범(小范)은 송(宋) 나라 때 범옹(范雍)을 대범(大范)이라고 한 데 대하여 범중엄(范仲淹)을 일컫는 말인데, 범중엄이 수년 동안 변방을 지킬 적에 특히 하인(夏人)들이 서로 경계하여 침범하지 않으면서 “소범로자(小范老子)의 가슴속에는 수만의 갑병(甲兵)이 들어 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宋史 卷三百十四》
♣ 소별[小別]호북성(湖北星)에 있는 산 이름.
♣ 소보[小保]당 나라 설소보(薛小保)는 학을 잘 그리기로 유명하였다. 두보(杜甫; 杜陵)가 그 그림을 두고 시를 지었다.
♣ 소보[巢父]소보는 당(唐) 나라 때의 공소보(孔巢父)를 말하는데, 공소보는 벼슬길에 들어갔다가 뒤에 이회광(李懷光)의 반군(叛軍)에 의해 살해되었다. 《唐書 卷一百六十三》
♣ 소보[巢父]요(堯) 임금 때의 고사(高士). 요 임금이 천하(天下)를 양여(讓與)하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산에 들어가 숨어살았다.
♣ 소보세이[巢父洗耳]요(堯)가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사양하였더니 허유는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영수(穎水)에 귀를 씻었다. 소보(巢父)는 허유가 귀 씻은 물이 더럽다고 송아지를 상류(上流)에 몰고 가서 물을 먹이었다.
♣ 소본렴[篠本廉]자는 자온(子溫), 호는 신재(新齋)로 강호 사람인데, 시문(詩文)에 능하였음.
♣ 소봉[素封]벼슬 없이 받은 봉작. 즉 벼슬을 않고서도 전원(田園)을 즐기면서 부(富)를 누리면 결과적으로 벼슬하여 봉군(封君)이 된 자와 같다는 뜻임. 《史記 貨殖傳》
♣ 소봉[召封]연(燕)을 이름. 연 나라는 맨 처음 주(周)의 소공(召公)을 봉한 나라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 소부[小府]소부감(小府監) 혹은 소부시(小府寺)의 준말로, 내부(內府)를 뜻한다.
♣ 소부[疏附]아랫사람을 거느리고 임금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詩經 大雅 綿》
♣ 소부[少府]천자의 사부(私府)에 공양(供養)하는 것을 관장하는 관청 이름이다.
♣ 소부귀녕타녀교[少婦歸寧奼女嬌]부인을 쫓아내고 기생을 집 안에 들여왔다는 말이다. 귀녕(歸寧)은 보통 부인이 친정 집에 가서 문안하는 것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영원히 모가(母家)로 돌아갔다는 의미의 대귀(大歸)의 뜻으로서 출처(出妻)를 의미한다. 타녀(奼女)는, 동한(東漢) 환제(桓帝) 때에 유행한 “하간 땅 타녀는 어찌나 돈을 잘 세는지[河間奼女工數錢]”라는 동요에서 기인하며, 뒤에 가녀(歌女)나 창녀(娼女)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참고로 남조 양(南朝梁) 소강(蕭綱)의 대제(大堤) 시에 “길쌈 잘 하는 아내를 몰아내고, 돈 잘 세는 요망한 계집 들여왔네.[出妻工織素 妖姬悽數錢]”라는 표현이 있다.
♣ 소부환경경[蘇婦喚卿卿]소부는 진(晉) 나라 때의 재상 왕융(王戎)의 부인을 가리킨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경경(卿卿)은 아내가 남편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데, 진 나라 왕융의 아내가 왕융을 자네[卿]라고 부르자, 왕융이 말하기를, “부인이 남편을 자네라고 부르는 것은 불경(不敬)스러우니,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자네를 친하고 자네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네를 자네라고 부르는 것이니, 내가 자네를 자네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누가 자네를 자네라고 부르겠는가[親卿愛卿 是以卿卿 我不卿卿 誰當卿卿].”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소불[燒佛]중국의 고승(高僧) 단하(丹霞) 천연(天然)이 혜림사(慧林寺)에 이르렀을 때 마침 큰 추위를 만났다. 그가 법당에 들어가보니, 부처가 목불(木佛)이므로, 이를 도끼로 쪼개서 불을 놓고 있자, 그 절의 주인이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힐문하니, 단하가 막대기로 재를 뒤적이면서 “석가(釋迦)의 몸은 화장하여 많은 사리(舍利)가 나왔다기에, 나도 이 부처에게서 사리를 받으려 하오.” 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 하니, 단하가 “사리가 안 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님이오?”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소비[梳篦]머리를 빗는 빗과 머리에 가르마를 타는 빗치개를 이름.
♣ 소비[消髀]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에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내가 항상 안장을 떠나지 않아 볼기살이 다 빠졌는데 지금은 다시 타지 않으니 볼기에 살이 난다.’ 했다.” 하였음.
♣ 소사[少師]관직 이름으로 삼공(三公)을 보좌하는 삼고(三孤)의 하나이다.
♣ 소사[所思]그리운 사람. 산귀가 그리는 사람.
♣ 소사[蕭寺]남북조 시대 양(梁) 나라 때에 절을 많이 이룩하였으므로, 양 나라 황제의 성(姓)인 소(蕭)를 붙여서 소사(蕭寺)라고 하게 되었다.
♣ 소사[素沙]지금의 평택군 진위면(振威面).
♣ 소사[蕭史]춘추 시대 진 목공(秦穆公) 때의 피리의 명인으로, 목공의 딸 농옥(弄玉)과 결혼하여 봉대(鳳臺)에서 살다가 몇 년 후에 봉황을 따라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한다. 《列仙傳》
♣ 소사루[蕭史樓]진 목공(秦穆公) 때 소사(蕭史)가 퉁소를 매우 잘 불었는데, 목공의 딸 농옥(弄玉)이 소사를 좋아하므로 목공이 농옥을 소사에게 시집보내고 봉루(鳳樓)를 지어 주어 둘이 함께 살도록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소사명[少司命]아이들의 운명을 맡은 신으로 정의로움을 담당한다.
♣ 소사변[素絲變]춘추 시대 묵적(墨翟)이 흰 실은 물들임에 따라서 황색으로도 흑색으로도 변할 수 있듯이 인간의 성품도 환경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변할 수 있다 하여, 이를 슬피 여겨 울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소사비[素絲悲]옛날에 묵자(墨子)가 흰 실을 보고는 그것이 물들이기에 따라서 노랗게 될 수도 있고 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슬퍼하여 울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淮南子 說林訓》
♣ 소사전[素沙戰]선조 30년, 직산(稷山) 북방 소사평(素沙坪)에서 왜장(倭將) 흑전장정(黑田長政)의 군대를 대파한 싸움으로, 평양(平壤), 행주(幸州)와 더불어 왜란(倭亂) 육전(陸戰) 삼대첩(三大捷)의 하나로 꼽힌다. 9월 5일 새벽 명 나라의 부총병 해생(解生) 등이 왜군을 만나 하루에 여섯 번 회전(會戰)하여 모두 전승을 거두었고, 다음 날인 6일에도 전세를 만회하려고 달려든 왜군을 재차 대파하였다. 《燃藜室記述 卷17 素沙之捷》
♣ 소삭[銷鑠]마르다. 쇠하다. 파리해지다.
♣ 소산[小山]소산은 본디 한(漢) 나라 때 회남왕 안(淮南王安)을 사모하여 따르던 은사(隱士)들을 가리킨다. 초사(楚辭) 회남소산(淮南小山) 초은사(招隱士)에 “무덕무덕 계수나무 그윽한 산속[桂樹叢生兮山之幽]”이라는 구절이 있다. 본래는 회남왕(淮南王) 문객들의 문체를 소산(小山)과 대산(大山)으로 분류하였으나, 나중에는 산을 읊을 때의 표현으로도 곧잘 사용하게 되었다.
♣ 소산곡[小山曲]한(漢)의 회남왕 안(淮南王安)의 노래. 회남왕은 자가 소산(小山)인데,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하여 당시 방사(方士)들과 어울려 놀다가 뒤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 그 간 곳을 모른다고 함.
♣ 소산사[小山辭]한(漢)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문하(門下)의 대산(大山)ㆍ소산(小山) 등의 무리들이 초은사(招隱辭)를 지었는데, 산중에 숨어사는 선비더러 세상에 나오라고 부른 것이다.
♣ 소산송계감초은[小山松桂堪招隱]한(漢)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불러모은 시인 묵객들 가운데 이른바 소산(小山)의 무리가 굴원(屈原)을 애도하며 지은 시 ‘초은사(招隱士)’의 첫머리에 “계수나무 울창한 그윽한 숲 속[桂樹叢生兮山之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 소산옹[笑筭甕]망령된 계산. 옛날 가난한 옹기 장사가 옹기 속에서 자며 꿈속에 부자가 되어 기뻐하다 옹기가 깨졌다는 고사가 있다.
♣ 소산은[小山隱]세속을 피해 산림에 은거하며 절조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한(漢) 나라 회남 소산(淮南小山)이 초(楚) 나라 굴원(屈原)을 추모하여 지은 ‘초은사(招隱士)’라는 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 소산초[小山招]한(漢) 나라 때 회남소산왕(淮南小山王)이 박학하고 성품이 아담하고 또 옛 것을 좋아하여 천하의 은사(隱士)들을 불러모았던 데서 온 말이다. 《楚辭 招隱士》
♣ 소삼[櫹槮]잎이 지고 가지만 길게 있는 것.
♣ 소상[蘇床]송(宋) 소식(蘇軾)이 아우 철(轍)에게 부치는 시(詩)에, “밤 깊어 꿈의 혼이 먼저 날아가느니, 풍우에 상을 대하여 새벽 종을 들으리.[夜深魂夢先飛去 風雨對床聞曉鍾]”란 구절이 있다.
♣ 소상[瀟湘]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舜) 임금을 사모하며 흘린 눈물이 아롱져 대나무 무늬로 새겨졌다는 소상 반죽(瀟湘斑竹)을 말한다.
♣ 소상강[瀟湘江]중국의 상강(湘江)을 가리킨다. 그 강물이 깊고 맑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소상문묵[蕭相文墨]한 고조(漢高祖) 5년에 천하를 완전히 평정하고 논공행봉(論功行封)을 할 적에, 고조가 소하(蕭何)의 공이 가장 크다고 여겨 그를 찬후(酇侯)에 봉하고 식읍(食邑)을 가장 많이 떼 주자, 다른 공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들은 몸소 갑옷을 입고 창ㆍ칼을 쥐고 많게는 백여 전(戰), 적게는 수십전을 치렀는데, 지금 소하는 한남(汗馬)의 노고는 겪은 적이 없이 한갓 문묵(文墨)을 가지고 논의만 했을 뿐이요 싸움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신들의 위에 두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고 불만스럽게 여겼던 데서 온 말이 다. 《史記 卷五十三》
♣ 소상반죽[瀟湘班竹]중국의 소상강(瀟湘江) 일대에서 나는 자줏빛 반점이 있는 대나무. 전설에 의하면 순(舜) 임금이 창오(蒼梧)의 들판에서 죽은 뒤 그의 두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사모하는 정을 억누르지 못해 서로 통곡하면서 상강(湘江)에 빠져 죽었는데, 그때 흘린 눈물이 대나무 위에 떨어지면서 얼룩이 져 소상반죽(瀟湘班竹)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述異記》
♣ 소상위가[蕭相爲家]한 고조(漢高祖)의 신하 소하(蕭何)를 말한다. 한서(漢書) 소하열전(蕭何列傳)에 전답(田畓)과 저택을 사되 반드시 궁벽한 시골에다 사고, 담장과 집을 꾸미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후세에 나의 자손이 어질면 나의 검소함을 배울 것이고, 어질지 못하더라도 세가나 귀족들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 소상일안[瀟湘一岸]소상강(瀟湘江) 근처에는 반죽(斑竹)이 나는데, 옛날 요(堯) 임금의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舜) 임금의 비(妃)가 되었다가 순 임금이 돌아가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피눈물을 뿌린 자국이 반죽으로 화했다는 전설이 있다.
♣ 소상장[瀟湘丈]소상강에는 예로부터 반죽(斑竹)이 유명하므로, 즉 대를 미화(美化)하여 일컬은 말이다
♣ 소상환패[瀟湘環佩]주(周) 나라 정교보(鄭交甫)가 남쪽 초(楚) 나라 지방의 소상강 가를 거닐다가 신녀(神女)인 강비(江妃)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 신녀가 차고 있던 패옥[環佩]를 풀어 정교보에게 신표(信標)로 주고 떠나갔다는 전설이 있다. 《文選 郭璞 江賦》
♣ 소상후어[蕭相後語]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에 “담장과 집을 수리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뒤에 자손이 어질면 나의 검약함을 배울 것이고, 어질지 못하더라도 세가(勢家)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소서[素書]고시(古詩)의 “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에서 나온 것임.
♣ 소서[小序]소서는 자하(子夏)가 지었다는 시경의 각 편(各篇) 첫머리에 서경(書經)과 같이 쓰여 있는 서문을 대서(大序)와 소서로 나눈 것을 이른다.
♣ 소서[素書]진(秦) 나라 때 신인(神人) 황석공(黃石公)이 지어 장량(長良)에게 주었다는 비결(祕決)이다.
♣ 소선[小鮮]노자(老子) 거위(居位)에 “큰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마치 작은 생선을 삶듯이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두어야 한다.[治大國 若烹小鮮]” 한 데서 온 말이다.
♣ 소선[疎仙]소선은 호가 소암(疎菴)이었던 임숙영(任叔英)을 가리킨다.
♣ 소선[蘇仙]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식이 7월 기망(旣望)에 적벽(赤壁) 아래에서 배를 띄우고 놀면서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
♣ 소선적벽동소성[蘇仙赤壁洞簫聲]소선은 소동파(蘇東坡)를 가리킨다. 소동파가 적벽강(赤壁江)에서 배를 타고 놀 때 퉁소를 부는 자가 있었는데, 소동파가 이를 아주 좋아하였다.
♣ 소선학[蘇仙鶴]소동파(蘇東坡)의 후적벽부(後赤壁賦)에 나오는 이야기를 따다 쓴 것이다. 소동파가 적벽에서 놀 때 큰 학이 한 마리 날아와 뱃전을 스치고 지나갔었는데, 그날 밤 꿈에 한 도사가 찾아와 읍을 하며 인사하기에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으며, 이윽고 소동파가 정체를 알아차리고 어젯밤의 그 학이 아니냐고 하니 도사가 돌아보며 웃었다 한다.
♣ 소설암[小雪庵]국사 보우가 우거하고 있던 미원현에 있는 암자.
♣ 소성망기미[韶聲忘嗜味]소악은 순(舜) 임금의 음악.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가 제(齊)에서 소악을 듣고는 고기 맛조차 잊어버리고 ‘이처럼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했다.” 하였다.
♣ 소성재동[小星在東]시경(詩經)에 “희미한 저 작은 별, 셋 그리고 다섯 동천에 있도다.[嘒彼小星 三五在東]"를 인용한 것으로서, 후궁이 임금의 사랑을 받아 별이 보이기 시작하는 초저녁부터 임금의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詩經 召南 小星》
♣ 소소[小小]극히 작음, 나이가 어림
♣ 소소[所所]나무 베는 소리, 곳곳, 여기저기
♣ 소소[蘇小]남송(南宋) 때 전당(錢塘)의 명기(名妓) 이름인데, 그의 묘(墓)가 서호(西湖)의 서쪽 냉교(冷橋) 곁에 있다. 전하여 기예를 가진 기녀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소소소(蘇小小)라고도 한다.
♣ 소소[蕭蕭]바람이 나무를 스치며 나는 소리.
♣ 소소[慅慅]불안한 모양
♣ 소소[昭昭]빛나다. 밝다. 밝은 해.
♣ 소소[簫韶]소소는 순(舜) 임금의 음악 이름으로, 아름답고 묘한 선악(仙樂)을 지칭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소소(簫韶)가 구성(九成)이 되자 봉황이 와서 축의하였다.” 하였다.
♣ 소소[愬愬]잘못된 독음, 바른 독음과 뜻은
♣ 소소[少少]조금 약간
♣ 소소[笑笑]화죽(畫竹)의 명가인 송(宋) 나라 문동(文同)의 호.
♣ 소소구성봉래상[韶簫九成鳳來翔]순(舜) 임금은 덕이 높아 나쁜 사람이 감화되고 짐승들도 즐거워했다는 뜻, 소소(韶簫)는 순 임금의 음악. 순 임금 때에 삼묘(三苗)라는 만족(蠻族)이 있었는데 완악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순 임금은 우(禹) 임금을 보내어 정벌하였으나 이들은 계속 복종하지 않자, 우 임금은 회군(回軍)하였다. 순 임금은 더욱 문덕(文德)을 닦았더니, 그들은 마침내 감화되어 항복하였으며, 또한 덕이 높아 “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簫韶九成 鳳凰來儀]" 한다. 《書經 大禹謨 益稷》
♣ 소소단원악[蘇嘯但阮愕]진서(晉書) 완적전(院籍傳)에 “완적이 일찍이 소문산에 올라 손등(孫登)을 만났다. 신선술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손등은 듣지 않고 가면서 휘파람을 부니 마치 난붕새 소리가 암곡에 울리는 듯하였다.” 하였다.
♣ 소소문[嘯蘇門]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인 완적(阮籍)은 소문산(蘇門山)에서 은자(隱者) 손등(孫登)을 만나 선술(仙術)을 물었으나 손등은 대답하지 않고 휘파람을 길게 불었는데, 마치 난봉(鸞鳳) 소리와 같은 음향이 온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한다. 《晉書 阮籍傳》
♣ 소소봉래[簫韶鳳來]소소금적막(簫韶今寂寞). 언제나 한 번 봉황이 이르러 올꼬.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새가 이르러 왔다[簫韶九成 鳳凰來儀].” 한 데서 온 말인데, 소소는 바로 순(舜) 임금의 음악 이름이다.
♣ 소소성[蘇韶成]소소는 순(舜) 임금의 음악 이름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다는 말은 곧 음악 연주를 마치는 것을 뜻한다.
♣ 소소육미도불관[簫韶肉味都不管]마음이 다른 곳에 있어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관심이 가지 않음. 공자(孔子)는 제(齊)에 있으면서 순(舜)의 악(樂)인 소(韶)를 듣고는 너무 심취가 되어 석 달을 고기맛을 몰랐다는 것을 원용하여 한 말임.
♣ 소손[素飡]공(功) 없이 거저 밥을 먹는 일. 덕(德) 없이 나라의 녹(祿)을 먹는 것을 이름이다.
♣ 소송부창주[蘇頌赴滄州]반대파에 밀려 임금이 본의 아니게 외지로 내보냄. 소송(蘇頌)은 부필(富弼)로부터 고군자(古君子)라는 칭송을 받아온 사람인데, 그가 창주 지사(滄州知事)로 부임하게 되어 하직차 황제를 배알하자 황제가 이르기를, “짐이 경을 알고 지낸 지는 오래이나 경을 탁용하려고만 하면 꼭 무슨 일이 생겨 탁용을 못하게 되니 그도 아마 운명인가 보다. 앞으로 세월이 가면 경이 곧다는 것이 자연 밝혀질 것일세.” 하였다고 함. 《宋史 卷三百四十》
♣ 소수수[小垂手]의고악부(擬古樂府)임. 소수수는 대수수(大垂手)와 함께 춤을 출 때 손을 놀리는 동작에서 취해 온 것임.
♣ 소순[燒筍]소동파(蘇東波)가 일찍이 유기지(劉器之)를 요청하여 옥판화상(玉版和尙)에게 동참(同參)하자고 하니 기지는 혼연히 따라갔다. 염경사(廉景寺)에 이르러 죽순을 삶아서 먹는데 맛이 매우 좋아 기지가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동파가 “이것은 옥판이다. 이 노사(老師)가 설법을 잘하므로 그대로 하여금 선열(禪悅)의 맛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음.
♣ 소순[蔬筍]채소나 죽순만 먹고 육식(肉食)을 하지 않는 중의 맑은 풍기(風氣)를 뜻한다.
♣ 소순기[蔬荀氣]방악(方岳)의 시에, “소순의 기가 있어 시는 더욱 좋아지고, 비단옷 입은 사람 없어 산은 다시 그윽하이. “[有蔬荀氣詩逾好 無綺羅人山更幽] 하였음. 말하자면, 탁한 육식의 맛이 없다는 뜻임.
♣ 소순흠[蘇舜欽]송(宋) 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미(子美). 당시 학자들은 시를 짓는데 모두 대우(對偶)하기를 좋아했으나, 순흠은 그것을 병되게 여겨 고문(古文)을 숭상하였음.
♣ 소슬[蕭瑟]가을 바람이 쓸쓸히 부는 모양.
♣ 소슬요락[蕭瑟搖落]낙엽이 지는 쓸쓸한 가을을 말한다. 초사(楚辭) 구변(九辯)에 “悲哉 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 소슬추[蕭瑟秋]초사(楚辭) 구변(九辨)에 “悲哉 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라는 구절이 있다.
♣ 소승[小乘]소승은 불교(佛敎)의 두 가지 큰 교파 중 하나. 대승(大乘)의 교리가 고상하고 심원한 데에 비하면 소승의 교리는 비근하여 이해하기가 쉽다고 한다.
♣ 소승[蘇僧]일본의 중 현소(玄蘇)를 가리킨다.
♣ 소식담수월[蘇軾談水月]소식이 46세 때인 송 신종(宋神宗) 원풍(元豐) 5년(1082)가을 보름날 밤에 적벽강(赤壁江)에서 배를 타고 놀면서 지은 적벽부(赤壁賦)에서 “강물은 이처럼 흘러가지만 다시 계속 흘러가고 둥근달은 기울어졌다가 다시 둥글어지니,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온 천지에 한 순간이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큰 안목으로 보면 만물과 내 자신은 하나이다.” 하였고, 이어 “모든 물건은 각기 주인이 있어 내 것이 아닌 것은 함부로 가질 수 없으나 강상의 맑은 바람과 산 위의 밝은 달은 끝없이 쏘이고 쳐다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하였다.
♣ 소심익익[小心익익]마음을 작게 하고 공경한다는 말로, 대단히 조심하고 삼가하다란 뜻의 고사성어.
♣ 소씨구의[蘇氏舊意]진(晉) 나라 때 장군(將軍) 두도(竇滔)가 사막(沙漠)에 강제로 옮겨지자, 그의 아내 소약란(蘇若蘭)이 비단을 짜면서 거기에 즉 전후 좌우로 아무렇게 보아도 다 말이 되는 매우 처절한 내용의 회문선도시(回文旋圖詩)를 지어 넣어서 남편에게 보냈던 데서 온 말인데, 그 시는 모두 8백 40자(字)로 되었다고 한다. 《晉書 竇滔妻蘇氏傳》
♣ 소씨제[蘇氏弟]소식(蘇軾)의 아우 소철(蘇轍)을 말함. 소철이 소년 시절 공부하는 동안 자기 형 소식을 따라 독서하면서 하루도 서로 떨어져 있는 날이 없었는데, 그 후 벼슬길에 오르면서는 형제가 함께 있는 날이 적었다. 언젠가 위응물(韋應物)의 시, “누가 알리 비 오고 바람 부는 밤에, 또다시 침상을 마주하고 자련지.[那知風雨夜 復此對牀眠]”를 읽고서는 서글픈 생각을 금치 못하고, 일찍 벼슬을 버리고 한가로이 지내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자고 약속하였다는 것이다.
♣ 소아[素娥]서왕모가 남편에게 준 불사약(不死藥)을 훔쳐 먹고 달 속으로 도망가 달의 선녀가 되었다는 항아(姮娥)를 가리킨다.
♣ 소아난기강[小兒亂紀綱]소아는 이보국(李輔國)을 가리키며, 서내(西內)는 태극궁(太極宮)을 말하고 고 장군(高將軍)은 고역사(高力士)를 가리킨다. 상황(上皇)인 현종(玄宗)이 파촉에서 돌아와 흥경궁(興慶宮)에 거처했으며 장경루(長慶樓)에 자주 나오니 부로(父老)들은 그 앞을 지나다가 우러러보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숙종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한 이보국은 장후(張后)와 짜고는 황제의 명령이라 사칭한 다음, 상황을 대내로 옮기고 상황의 심복인 고역사를 무주(巫州)로 귀양보냈으며, 진현례(陳玄禮)를 강제로 치사(致仕)시키니, 상황은 기뻐하지 않아 이 때문에 고기도 먹지 않고 벽곡(辟穀)하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新唐書 肅宗本紀》
♣ 소아욕투비[宵雅欲投畀]참소를 입어 궁형(宮刑)을 받은 사람이 참언한 자를 지극히 미워하면서 이리와 호랑이, 북쪽의 불모지, 하느님에게 던져주고 싶다고 탄식한 노래를 말한다. 《詩經 小雅 巷伯》
♣ 소아유유음[宵雅有遺音]시경(詩經)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를 말한다. 10월에 들어서서 일식(日蝕)과 천둥 번개가 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은 군신(君臣) 상하가 정치를 잘못한 탓으로서 결과적으로 백성만 피해를 보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 소아치[小兒癡]동방삭(東方朔)이 서왕모(西王母)의 천도(天桃)를 도둑질하였다 한다.
♣ 소암[疎庵]임숙영(壬叔英)의 호로, 자(字)는 무숙(茂叔)이다.
♣ 소암자[疏庵子]소암은 임숙영(任叔英)의 호이다.
♣ 소애[少艾]젊고 아름다움을 이름. 맹자(孟子) 만장 상에, “人少則慕父母 知好色則慕少艾”라 했고, 조기(趙岐)의 주에, ‘少 年少也 艾 美好也’라 하였음.
♣ 소양[昭陽]소양전(昭陽殿)에 거처했던 한 성제(漢成帝)의 황후 조비연(趙飛燕)을 말한다.
♣ 소양[昭陽]십간(十干) 가운데 계(癸)의 별칭으로,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태세(太歲)가 계(癸)에 있는 것을 소양이라 한다.” 하였다.
♣ 소양전[昭陽殿]한 성제(漢成帝) 때 황후 조비연이 거처했던 궁궐 이름으로, 이후 총애를 받는 후비의 궁전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소언[蘇堰]소식(蘇軾)이 쌓은 제방. 소식은 광동(廣東)혜주(惠州)로 좌천되었을 때 서호(西湖)에 제방을 쌓고 그것을 사들여 방생지(放生地)로 삼았다 한다.
♣ 소여[所如]뱃놀이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전적벽부(前赤壁賦)’의 “한 조각 작은 배 가는 대로 맡겨 두고, 아득히 만경창파 건너가노라.[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라는 구절이 있다.
♣ 소여란봉[嘯如鸞鳳]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소문산(蘇門山)에서 손등(孫登)을 만났는데, 손등은 완적 묻는 말에 답이 없었다. 완적이 길게 휘파람을 불고 물러오며 산 중턱에 이르자 난봉(鸞鳳)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골짜기를 울렸는데, 그것은 손등의 휘파람 소리였다.
♣ 소연[蘇筵]소재(蘇齋)를 말함.
♣ 소염[疏恬]소광의 염퇴. 한(漢)의 소광(疏廣)이 태자 태부(太子太傅)로 있다가 관직과 명예가 너무 높으면 후회되는 일이 있을까를 염려하여 태자 소부(太子少傅)인 자기 조카 수(受)와 함께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와 여생을 즐겼음. 《漢書 卷七十一》
♣ 소영[韶韺]소는 순(舜) 임금의 음악이고, 영은 제곡(帝嚳)의 음악인데, 일반적으로 옛날의 음악을 칭한다.
♣ 소영[素榮]흰 꽃.
♣ 소영빈[蘇穎濱]영빈(穎濱)은 송(宋) 나라 소철(蘇轍)의 만년(晩年)의 호(號)이다. 태위(太尉) 한기(韓琦)에게 글을 올려서 자기를 소개한 일이 있다.
♣ 소옹[邵翁]송(宋) 나라 때의 유학자 소옹(邵雍)을 말한다. 주역(周易)의 수리(數理)를 좋아하여 태극(太極)을 우주의 본체로 보았는데 상수(象數)의 학문을 중시하였다. 낙양(洛陽)에 거의 30년이나 살면서 거처하는 곳을 안락와(安樂窩)로 명명하고 스스로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불렀다. 저서로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등이 있다. 《宋史 卷 427 邵雍傳》
♣ 소옹[邵雍]자는 요부(堯夫). 소옹은 유일(遺逸)로 추천을 받아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다 불고하고 소문산(蘇門山)에서 독서에만 심취하여 자기 거소를 안락와(安樂窩)라고 이름하고 자호를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 하였음. 《宋史 卷四百二十七》
♣ 소옹[疏翁]호가 소암(疏庵)인 임숙영(任叔英)을 가리킨다.
♣ 소옹루[邵雍樓]청빈함을 비유한 말이다. 소옹(邵雍)은 송(宋) 나라 때의 도학자로, 특히 주역(周易)에 정통(精通)하였고, 그가 거처하는 곳을 안락와(安樂窩)라 하였다.
♣ 소옹영해익탐선[蘇翁嶺海益耽禪]소옹(蘇翁)은 송(宋) 나라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이다. 영해(嶺海)는 그가 유배되었던 산하(山河)를 뜻한다. 동파가 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황주(黃州)의 적거(謫居)에서 여주(汝州)로 옮겼을 때,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 2세(世)인 동림 상총(東林常總)을 참알(參謁)하였는데,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이치를 듣고 깨달아 여명에 지은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示人”이라는 시는 특히 유명하다. 《續傳登錄 卷20ㆍ蘇東坡詩集 卷23 贈東林總長老》
♣ 소옹적벽[蘇翁赤壁]소옹은 송 나라 소식(蘇軾)을 가리키고, 적벽(赤壁)은 황강현(黃岡縣) 성밖에 있는 강으로 소식이 신종(神宗) 원풍(元豐) 5년(1082)에 당쟁으로 혁신당에게 몰려 조정에서 쫓겨나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 소옹조원량[蘇翁嘲元亮]소동파의 이행중취면정(李行中醉眠亭)이란 시에 “그대는 돌아가게 나는 자야겠네란, 도연명(陶淵眀)의 이 말을 천연하다고들 하지만, 취중에 손을 대하고 자는 게 무슨 해가 되랴. 이제야 알겠구나, 도연명은 어질다 할 수 없음을.”이라 하였다. 원량(元亮)은 도연명의 자이다.
♣ 소옹해상[蘇翁海上]소옹은 북송 시대의 소식(蘇軾)을 높여 이른 말. 소식이 일찍이 경주별가(瓊州別駕)로 폄척된 일을 가리키는데, 경주는 섬[島]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해상(海上)이라고 말한 것이다. 《宋史 卷三百三十八》
♣ 소와롱환[邵窩弄丸]소와는 소강절(邵康節)이 거처한 안락와(安樂窩)를 말한다. 그의 시에 “송계의 조행과 앵화의 문재, 강산의 기도와 풍월의 정회. 그대들에게서 얼굴 모양 차용하고 그대들에게서 형체를 빌린 이 몸, 구슬 가지고 노는 여가에 한가로이 갔다가 한가로이 오노라.[松桂操行 鶯花文才 江山氣度 風月情懷 借爾面貌 假爾形骸 弄丸餘暇 閑往閑來]”하였다. 《擊壤集 卷12》
♣ 소완[小阮]죽림칠현 가운데 완적은 대완(大阮), 완함은 소완(小阮)으로 불렸다.
♣ 소왕[素王]왕위(王位)는 없으나 왕의 덕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유가(儒家)에서는 공자(孔子), 도가(道家)에서는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 소요[逍遙]소요는 외물(外物)의 영향을 초탈하여 자기의 천성을 보존하는 것을 뜻한다.
♣ 소요[逍遙]소요는 장자(莊子) 첫 편의 이름인데, 그 주지(主旨)가 세상의 준칙에 얽매이지 않고 물외(物外)와 무위(無爲)에 멋대로 거닒에 있다.
♣ 소요[逍遙]어디에 매인 데가 없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 소요각석[蘇繇刻石]주서(周書) 이기(異記)에 “ 주 소왕(周昭王) 즉위 24년 4월 8일에 강ㆍ하ㆍ천(江河川)이 갑자기 범람하여 우물물이 넘쳐나왔으며 산천이 진동하고 오색빛이 태미(太微)로 들어가 꿰어 서방에 퍼져 다 청홍색이 되었다. 태사(太史) 소유가 아뢰기를 ‘대성인(大聖人)이 서방에 태어났는데 1천 년 후에는 성교(聲敎)가 여기까지 미치겠다.’고 하자, 소왕이 곧 영을 내려 돌에 새겨 이 사실을 기록하여 남쪽에 묻었다. 이것이 곧 부처가 태어난 때다.” 하였음.
♣ 소요결[逍遙訣]조선 승려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의 문집이다. 부휴(浮休)에게 장경(藏經)을 배우고 서산(西山)에게서 선지(禪旨)를 깨우쳤는데, 지리산 연곡사와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부도탑(浮屠塔)이 있다.
♣ 소요부[邵堯夫]요부(堯夫)는 송(宋) 나라 소옹(邵雍)의 자(字)이다.
♣ 소요유[逍遙遊]장주(莊周)의 저서인 장자(莊子)제일편의 편명으로, 그 내용은 모든 사물에 구애됨 없이 마음대로 유유자적하는 뜻을 기술한 것이다.
♣ 소요재[逍遙재]자가 국화(國華)인 최숙정(崔淑精)의 호임. 최숙경(崔淑卿)의 형.
♣ 소요형해외[逍遙形骸外]형체를 떠나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사귀는 것을 말한다.
♣ 소용[昭容]내명부(內命婦)의 하나로, 왕의 후궁에게 내린 정3품의 작호(爵號)이다.
♣ 소용단[小龍團]송 인종(宋仁宗) 때 채양(蔡襄)이 복건로전운사(福建路轉運使)로 있으면서 조정에 세공(歲貢)하기 위해 만든 차의 이름으로, 품질이 상품이었다 한다.
♣ 소용합부전[踈慵合賦廛]맹자(孟子) 공손추상(公孫丑上)에 “주택에 부포(夫布)와 이포(里布)를 부과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그 나라 백성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그 주에 “집터에 상마(桑麻)를 심지 않은 자에게는 벌금으로 일리 이십오가(一里二十五家)의 포(布)를 내게 하고, 일정한 산업이 없는 자에게는 벌금으로 일부 백묘(一夫百畝)의 세(稅)를 내게 한 것을 말한다.” 하였다.
♣ 소우[邵虞]소씨는 송(宋) 나라 소옹(邵雍)을 가리킨 것으로, 소옹은 특히 역리(易理)에 정통하여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저술하였고, 우씨는 곧 삼국 시대 오(吳) 나라 우번(虞翻)을 가리킨 것으로, 우번 역시 역리에 정통하여 역주(易注)를 저술하였다.
♣ 소우[蕭瑀]수(隋) 나라에 벼슬하였으나 당(唐) 나라에 귀순한 학자. 고조의 총애를 받아 송국공(宋國公)에 봉해졌음.
♣ 소운경[蘇雲卿]송대(宋代)의 사람. 일년 내내 해진 옷 한 벌 짚신 한 켤레로 채소 심고 신 삼아 팔아 그것으로 자급자족하고 틈이 있으면 온종일 문 닫고 누웠거나 아니면 무릎꿇고 하루를 보내 주위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젊은 시절에 장준(張浚)과 다정한 사이였는데, 그 후 장준이 재상이 되어 끊임없이 서한을 보내고 많은 선물이 답지하자 다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음. 《宋史 卷四百五十九》
♣ 소원[少原]선인이 산다고 하는 곳.
♣ 소월[疏越]종묘(宗廟)에 제사할 때 쓰는 아악(雅樂)을 말한다.
♣ 소월[素月]희게 빛나는 달
♣ 소위[素位]현재 처해 있는 자리를 말한다.
♣ 소유[小酉]대유(大酉)와 소유(小酉) 두 산에 동굴이 있어 그 동굴 안에다 고서(古書) 일천 권을 넣어 두었다 함. 《郡國志》
♣ 소유[巢由]소유는 요(堯) 임금 때의 두 고사(高士)로서 요 임금이 천하(天下)를 양위(讓位)하려 했으나 거절하고 일생을 산수(山水) 속에 은거했던 소보(巢父)와 허유(許由)를 합칭한 말이다.
♣ 소유[所由]연유, 근원.
♣ 소유[少游]후한(後漢) 때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의 종제(從弟)인 마소유(馬少游)를 가리키는데,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가 한 세상에 나서 의식(衣食)은 겨우 해결할 정도면 되고, 하택거(下澤車)에 관단마(款段馬)를 몰고서 군(郡)의 연사(猭史)가 되어 분묘(墳墓)를 지키고 살아서, 향리(鄕里)로부터 선인(善人)이라 일컬어질 정도면 충분하다.”과 하였다. 《後漢書 卷二十四》
♣ 소유관단[少游款段]관단마(款段馬)는 조그마한 말을 이르는데, 후한 때 마원(馬援)의 종제(從弟)인 마소유(馬少游)가 성품이 담박하여 일찍이 마원에게 말하기를 “선비가 한 세상을 살면서 의식(衣食)이나 겨우 떨어지지 않고 관단마나 타고 다니면서 …… 향리(鄕里)로부터 선인(善人)이란 말만 들으면 그만입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二十四》
♣ 소유동천[小有洞天]소유동천은 도가(道家)에서 전해오는 동부(洞府)의 이름으로, 대라천(大羅天) 안의 36개 동부 가운데 첫번째인 왕옥산(王屋山)의 동부를 말함. 그 안에는 신선이 산다고 한다.
♣ 소유방[小酉房]중국 소유산(小酉山)의 석혈(石穴) 속에 고서(古書) 천여 권이 소장되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장서(藏書)가 많은 서실(書室)의 뜻으로 쓴 것이다.
♣ 소유선사[小遊仙詞]선경에 마음을 놀리며 진속을 이탈한 것을 이름. 진(晉) 하소(何劭)ㆍ곽박(郭璞)이 다 유선시가 있는데 대개는 이 뜻에 근본하였으며, 그 뒤에도 조당(曹唐)이 소유선시를 지었는데 선인(仙人) 아녀(兒女)의 정을 많이 서술하였음.
♣ 소유어[少游語]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남정(南征)할 적에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독한 장기(瘴氣)로 고생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나의 큰 뜻을 애처로워하면서 그저 의식 걱정 없이 고향의 선산을 지키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하였는데, 지금 소유가 평소에 하던 말대로 해 보려 한들 어떻게 될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 소유언[少游言]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정벌하러 갔을 때, 남방의 찌는 듯한 더위와 독기(毒氣)로 인해 소리개가 물속으로 힘없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仰視鳥鳶跕跕墮水中] 그의 종제(從弟)인 소유(少游)가 평소에 “짧은 일생 동안 무리하게 큰 뜻을 품을 것이 없이 그저 고향 시골에서 마음 편히 살다 가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며 탄식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東觀漢記 馬援》
♣ 소유천[小有天]도가(道家)에서 전하는 동부(洞府)의 이름. 대천(大天) 안에 36개의 동(洞)이 있는데, 주위가 만 리나 되는 제일의 왕옥산동(王屋山洞)을 소유천이라고 한다.
♣ 소유택거[少游澤車]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평범한 삶 속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남정(南征)하여 교지(交阯)를 정벌할 때 무더운 기후 속에서 장기(瘴氣)로 고생하며 탄식하기를 “나의 종제(從弟) 소유(少游)가 큰 뜻을 품고 강개(慷慨)하는 나에게 늘 말하였다. 산택 간을 다니는 수레[澤車]와 조랑말[款段]을 타고서 고향을 지키며 편히 사는 것이 제일 좋다고.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해 보려 한들 어떻게 되기나 하겠는가.” 하였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馬援傳》
♣ 소유현[少游賢]소유는 송 철종(宋哲宗) 때의 문장가 진관(秦觀)의 자임. 문장이 뛰어나 소식(蘇軾)의 천거로 태학 박사(太學博士)가 되어 비서성(秘書省) 서적을 교감하였고 실록편수관(實錄編修官)으로 실록을 편수하였는데, 소인들의 미움을 받아 말단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수난을 겪다가 객지에서 죽었다. 그가 어질다는 것은 권세가에 아부하지 않고 자기의 소신대로 행동한 것을 뜻한 듯함. 《宋史 卷四百四十四 秦觀傳》
♣ 소윤[少尹]관명.
♣ 소율[素律]가을을 말한다. 가을이 오행(五行) 중 금(金)에 속하여 색깔로 보면 백(白)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 소율[小律]원래는 절구(絶句)를 가리키는 말이다.
♣ 소융[昭融]시경(詩經) 대아(大雅) 기취(旣醉)편의 “소명함이 매우 밝다.[昭明有融]”에서 나온 말로 제왕(帝王)의 예지(叡智)를 이른다. 두보(杜甫)의 투증가서개부이십운(投贈哥舒開府二十韻)에 “모책(謀策)이 시행되니 전쟁을 안 해도 되었고, 마음이 서로 맞으니 소융(昭融)을 움직였네.” 하였다.
♣ 소은[素隱]소은은 백거 신천익(愼天翊)의 자호(自號)이다.
♣ 소은[小隱]속세를 완전히 초탈하지 못한 은사(隱士)를 이름. 대은(大隱).
♣ 소은유원[小隱踰垣]소은은 작은 은자(隱者)로 대은(大隱)과 상대되는 말. 전국 시대의 은자였던 단간목(段干木)은 위 문후(魏文侯)의 예방을 피하기 위하여 담을 넘어 도망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맹자(孟子)는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 소은은릉수[小隱隱陵藪]옛날에 학문과 재주가 있으면서 세상에 나와서 벼슬길을 구하지 않는 사람을 은사(隱士)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산림(山林) 깊숙한 곳에 살았었다. 그러나 그 중에 특별한 인물은 하급 관료로 자진하여 일생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그것을 조은(朝隱) 혹은 관은(官隱)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인물은 저자에 들어가서 조그만 장사로 일생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시은(市隱)이라 하였다. 그래서 큰 은사는 조정과 저자에 숨고 [大隱隱朝市] 작은 은사는 산이나 수풀에 숨는다[小隱隱陵藪]는 말이 있었다.
♣ 소음[所愔]과도하게 술을 먹고 질탕하게 노니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좌사(左思)의 ‘위도부(魏都賦)’에 “잔치를 벌이고 흥겹게 술을 마시며 노닌다.[愔愔醧讌]”라는 말이 나오고, 그 주(註)에 또 “한시(韓詩)에 ‘음음야음(愔愔夜飮)’이라는 말이 있다.” 하였다.
♣ 소음[篠飮]육비(陸飛)의 호.
♣ 소의[宵衣]소의간식(宵衣旰食)의 약칭임. 날이 새기 전에 정장을 하고 날이 저문 뒤에 식사한다는 뜻임.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을 말함. 당서(唐書)에 “소한의 근심이 없다[無宵旰之憂].” 하였음.
♣ 소의간식[宵衣旰食]날이 새기 전[未明]에 일어나 옷을 입고, 해가 진 뒤에 저녁밥을 먹음. 임금이 정치에 부지런히 힘쓰고 걱정함을 뜻한다.
♣ 소이[蘇二]소이는 송(宋) 나라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 소이상[蘇二相]양곡(暘谷) 소세양(蘇世讓)이다.
♣ 소인[騷人]본래는 시인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선비, 사대부 등 지조 있는 지식인을 말한다
♣ 소인[騷人]소인의 소(騷)는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서 나온 말로, 즉 근심에 걸린 것을 뜻하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그냥 시인을 말할 때 쓰이게 되었다.
♣ 소인[小人]지위 낮은 백성을 말한다.
♣ 소인[騷人]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임금에게 쫓겨나 상강(湘江) 가에 방랑하면서 이소(離騷)를 지었는데, 소(騷)는 시름이란 뜻이다.
♣ 소인유[小人儒]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보면 공자가 자하(子夏)에게 “너는 군자 선비가 되고 소인 선비가 되지 말라.” 하였음.
♣ 소인택반음[騷人澤畔吟]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모함을 받고 조정에서 추방된 뒤에, 초췌한 얼굴 모습으로 택반을 거닐며 읊조렸던[行吟澤畔] 고사가 있다. 《史記 卷84 屈原列傳》
♣ 소자[蘇子]동파(東坡)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 소자[邵子]소옹(邵雍)을 높여 말한 것임.
♣ 소자경[蘇子卿]소자경은 한(漢) 나라의 충신 소무(蘇武)를 이름. 자경은 그의 자.
♣ 소자경뢰[蘇子瓊雷]소자는 송(宋) 나라 소식(蘇軾)을 가리키고, 경뢰는 경주(瓊州)와 뇌주(雷州)로, 지금의 해남도(海南島)와 뇌주반도를 가리킨다. 송 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안석의 뜻을 거슬러서 경주로 쫓겨났었는데, 소식의 기자유시(寄子由詩)에, “경뢰가 구름 바다에 막힌 것을 혐의 말라, 성상께선 오히려 멀리 서로 보는 것을 허락했다네.[莫嫌瓊雷隔雲海 聖恩尙許遙相望]”하였다.
♣ 소자미[蘇子美]자미는 송 나라 소순흠(蘇舜欽)의 자(字). 당시에 유행하던 변려문에 항거하고 고문시가(古文詩歌)에 발분, 호방(豪放)한 시로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음.
♣ 소자와[邵子窩]소자는 송(宋) 나라 때의 학자인 소옹(邵雍)을 이르는데, 그는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안락와라 이름하고 안락 선생(安樂先生)이라 자호하였으며, 특히 청빈(淸貧)하였다.
♣ 소자인중선[蘇子人中仙]소자는 송(宋) 나라 소식(蘇軾)을 말하는데, 그는 황정견(黃庭堅)ㆍ주희(朱熹) 등에 의해 소선(蘇仙)으로도 일컬어졌다. 소식은 평소 도잠(陶潛)ㆍ이백(李白)ㆍ백거이 등을 가장 사모하여 그들의 기절을 본받고 화운(和韻)도 많이 하였었다.
♣ 소자재거항[蘇子再居杭]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여 소(疏)로 통론(痛論)했다가, 안석을 거슬려 두 번이나 항주(杭州) 지주(知州)로 좌천되어 갔다.
♣ 소자첨[蘇子瞻]자첨은 소식의 자(字).
♣ 소자춘행도[邵子春行圖]소자춘행도란 송(宋) 나라 때 도학자인 소옹(邵雍)이 봄철에 조그마한 수레를 타고서 임의(任意)대로 출유하던 광경을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 소작[少作]소작은 연소(年少)할 때에 지은 시문을 가리킨다.
♣ 소작정[笑作霆]신이경(神異經)에 의하면, 신선의 영수(領袖)인 동왕공(東王公)이 옥녀와 투호(投壺)를 할 적에 그 화살이 혹 빗나가서 병[壺]에 들어가지 않을 경우에는 하늘이 웃었는데, 그 입을 벌리고 웃을 때에 흘러나온 빛이 바로 번개였다는 고사가 있다.
♣ 소잔자방[燒棧子房]소잔은 잔도(棧道)를 끊어버린다는 뜻이고, 자방(子房)은 한 고조(漢高祖)의 신하 장량(張良)의 자이다. 장량이, 한왕(漢王)이 다시 관중(關中)으로 돌아갈 뜻이 없음을 온 천하에 보여 항왕(項王)으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한왕을 설득하여 잔도를 불태워 끊어버렸던 일을 말한다. 《漢書 卷四十 張良傳》
♣ 소장[蕭墻]소장은 병풍이다.
♣ 소장공[蘇長公]소동파(蘇東坡)를 가리킨다. 노소(老蘇)인 소순(蘇洵)의 장자인 동시에 문장 또한 백대의 종장(宗匠)이 된다는 뜻에서 당시에 그를 장공(長公)이라 부르고 그의 아우인 자유(子由) 소철(蘇轍)을 소공(少公)이라고 불렀다.
♣ 소장공[蘇長公]소장공(蘇長公)은 송(宋)의 소식(蘇軾)을 말하는데, 소식은 당(唐)의 허혼(許渾), 송의 구양수(歐陽脩) 등의 뒤를 이어 안휘성(安徽省) 부양현(阜陽縣) 서쪽에 위치한 서호(西湖)의 승경을 탐하여 자주 그곳에 가 놀며 여러 편의 시를 남겼음.
♣ 소장공적벽[蘇長公赤壁]소동파(蘇東坡)가 칠월(七月) 16일에 적벽강(赤壁江)에 놀면서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
♣ 소장지화[蕭墻之禍]소(蕭)는 숙(肅)의 뜻이고, 장(墻)은 병풍이라 하였는데, 화가 밖에서가 아니요, 안에서 일어남을 소장의 화라 이른다.
♣ 소장후[蕭張後]한(漢) 나라 고제(高帝)가 자기의 공신(功臣) 삼걸(三傑)에 한신(韓信)을 장량(張良), 소하(蕭何)에 뒤에 두어 셋째로 쳤다.
♣ 소재[蘇齋]소재는 조선조 문신 노수신(盧守愼)의 호. 자는 과회(寡悔). 그는 문장과 서예에 능하고 특히 양명학(陽明學)에 조예가 깊어 주자학파에게 공격을 받았음. 저서에는 시강록(侍講錄)ㆍ소재집(蘇齋集)이 있음. 선조(宣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음. 명종(明宗) 때 대윤(大尹)으로 몰리어 19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였음.
♣ 소재[所在]있는 곳.
♣ 소재[蘇齋]조선 시대 문신이며 학자인 노수신(盧守愼)의 호이다.
♣ 소재도량[消災道場]국난이 있을 때 그 재난이 소멸되기를 축원하기 위하여 마련한 도량.
♣ 소저[燒猪]돼지고기를 굽는다는 말임. 소식의 희답불인시(戲答佛印詩)에 “佛印燒猪待子瞻"이라 하였음.
♣ 소전문[小篆文]유사(有史) 이전에 신(神)이 남겨 놓은 글인데, 현대 사람은 알지 못할 이상스러운 글자이므로 그것을 작은 전[小篆]이라고 부른다 한다.
♣ 소전유얼[小腆遺孽]여기서는 은(殷) 나라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을 이른 것임.
♣ 소절관영[笑絶冠纓]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으니 갓끈이 끊어졌다. 사기(史記)
♣ 소정[蘇鄭]소세양(蘇世讓)과 정사룡(鄭士龍)을 가리킨다. 두 사람 모두 이행(李荇)으로부터 대제학의 재목으로 인정을 받았다. 《燃藜室記述 別集 卷7 官職典故 大提學》
♣ 소정[蘇頲]자는 정석(廷碩). 당 현종(唐玄宗) 때 자미황문 평장사(紫微黃門平章事)를 지내고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짐. 그는 문장에 능했음. 《唐書ㆍ瑯琊代醉編》
♣ 소제상관후[昭帝上官后]한(漢)나라 소제(昭帝)의 상관황후(上官皇后)는 그의 할아버지 상관걸(上官桀)과 아버지 안(安)이 국가에 죄를 짓고 죽었으나 황후는 곽광(霍光)의 외손녀이므로 그대로 황후로 있었다.
♣ 소조[蕭曹]소조(蕭曹)는 한 고조 때 상국(相國)을 지낸 소하(蕭何)와 혜제(惠帝) 때 소하의 뒤를 이어 역시 상국이 된 조참(曹參)을 말하는데, 모두 진 나라 말기에 패현(沛縣)의 관리로 있었다.
♣ 소조량평[蕭曹良平]모두 한 고조의 공신들로서 소하(蕭何)ㆍ조참(曹參)ㆍ장량(張良)ㆍ진평(陳平).
♣ 소종[蕭琮]소종은 후량 명제(後梁明帝)의 아들로서 명제가 죽은 뒤에 그 자리를 이었다가, 뒤에 수 문제(隋文帝)의 부름을 받고 입조(入朝)하여 거국공(莒國公)에 봉해짐으로써 후량은 끝내 망하고 말았다.
♣ 소주[蘇州]당(唐) 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호이다. 소주 자사(蘇州刺史)를 지내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고, 고결한 성품에 시가 또한 한담간원(閒澹簡遠)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도연명(陶淵明)과 병칭되어 도위(陶韋)라고 불렸는가 하면,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위소주집(韋蘇州集) 권6 감탄(感嘆)을 보면 상서(傷逝)ㆍ왕부평상회(往富平傷懷)ㆍ출환(出還)ㆍ동야(冬夜) 등 무려 19개의 소제목 아래 먼저 떠나간 부인을 추억하며 자신의 절절한 심경을 기막힌 시로 토로해 내고 있다.
♣ 소준[蘇峻]진 원제를 도와 공을 세우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되었는데, 성제(成帝) 때에 반역하여 관군(官軍)을 차례로 물리치고 임금을 석두성(石頭城)에 내쫓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도간(陶侃) 등의 군대에게 패하여 죽었다. 《晉書 卷一百》
♣ 소중양[小重陽]중양절(重陽節)인 9월 9일의 다음날을 가리킨다.
♣ 소지[小至]동지(冬至) 하루 전날을 말한다.
♣ 소지[素志]순결하고 해맑은 마음.
♣ 소진[蘇秦]전국 시대 말엽의 종횡가. 주(周)나라의 도읍 낙양(洛陽) 사람. 근처의 귀곡(鬼谷)에 은거하던 수수께끼의 종횡가 귀곡 선생(鬼谷先生)에게 배웠음. 따라서 소진이 죽은 뒤 연횡책(連橫策)을 펴 합종책을 깨뜨린 장의(張儀)와는 동문이 되는 셈. 제(齊)나라에서 살해됨.
♣ 소진[蘇秦]전국 시대 변사(辯士)로 합종(合從)을 주장하였는데, 본래 낙양(雒陽) 사람으로 귀곡(鬼谷)에 살고 있던 종횡가(縱橫家) 왕허(王詡)를 사사하였다. 집을 나가 유학한 지 몇 해 만에 크게 곤궁을 당하여 집에 돌아오니, 형제와 형수, 처첩들 모두 비웃었다. 이에 그는 다시 공부하여 육국(六國)을 연합하여 육국의 정승이 된 다음 집에 돌아오니, 집안 식구들이 모두 존경하여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소진은 크게 탄식하며 “이 한몸이 부귀하면 친척들도 두려워하고 빈천하면 천대하니 하물며 타인이겠는가. 만일 나에게 낙양의 좋은 농토 2경(頃)이 있었다면 나는 육국의 정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史記 蘇秦傳》
♣ 소진왕[小秦王]당 태종(唐太宗)을 말함. 사패(詞牌)의 이름으로 곧 진왕의 소파진악(小破陣樂)이다. 송 나라 시인 진관(秦觀)이 말하기를 “근세에 또 노래하여 소진왕에 넣어 다시 양관곡(陽關曲) 속쌍조(屬雙調)라 이름했다.” 하였음. 여기서는 양관곡을 취하여 이별의 뜻으로 쓴 것임.
♣ 소진인폐구[蘇秦忍敝裘]전국(戰國) 시대 유세객(遊說客) 소진(蘇秦)이 처음 연횡설(連橫說)을 가지고 10여 차례나 글을 올려 진 혜왕(秦惠王)을 설득하였으나 그 말이 행해지지 않음으로써, 일찍이 집에서 입고 나간 검은 갖옷이 다 해지고 황금 백 근의 노자도 다 떨어진 채 초췌한 몰골로 고향에 돌아가자, 부모와 형수와 아내가 모두 그를 냉대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戰國策 秦上》
♣ 소착[疏鑿]우(禹)가 홍수(洪水)를 다스릴 적에 용문산(龍門山)을 파서 하수(河水)를 소통시켰다[疏鑿].
♣ 소찬[素饌]고기나 생선이 들어가지 아니한 반찬. 남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의 겸양의 말.
♣ 소찬[素餐]시위소찬(尸位素餐). 하는 일 없이 국록(國祿)만 축내는 것을 말한다.
♣ 소처[小妻]이 말은, “聽曲知寗戚 夷吾因小妻”라고 한 데 보임. 소사빈(蕭士贇)의 주에 열녀전(列女傳)을 인용했는데, 그에 의하면, “영척(寗戚)이 제 환공(齊桓公)에게 등용되기를 바랐으나 길이 없게 되자, 남의 하인이 되어 제 나라 동문(東門)에서 소의 뿔을 두드리며 노래를 했는데, 마침 제 환공이 듣고 이상히 여겨 관중(管仲)을 시켜 맞아 오게 하였다. 관중이 맞으러 가니, 영척이, ‘浩浩乎白水’라 하니, 무슨 뜻인 줄을 몰라 5일을 조회하지 않고 근심을 했다. 그의 첩(妾)인 천(倩)이 그 말을 듣고, 일시(逸詩) 백수(白水) 편에, ‘浩浩白水 儵儵之魚 君來召我 我將安居 國亂未定 從我焉如’라 한 것을 인용, ‘영척이 제 나라에 등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니, 관중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환공에게 말하니, 그를 등용했다.” 함. 여기서는 이 백의 시에 관중의 첩(妾)인 천(倩)을 아내[妻]라 한 것을 말함.
♣ 소처하기[蘇妻下機]전국 때 소진(蘇秦)이 집 떠나 돌아다니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꾀죄죄한 행색으로 돌아오니, 그의 처가 베틀에서 내리지 않았다가 그 뒤에 다시 육국 정승[六國相]이 되어 돌아오니 온 집안이 환영하였다.
♣ 소천[蘇天]후한(後漢) 때 소장(蘇章)이 기주 자사(冀州刺史)가 되어 청하 태수(淸河太守)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 주효(酒肴)를 가득 차려 놓고 서로 회포를 담론하며 즐길 때, 태수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하늘이 하나밖에 없지만 나는 유독 두 하늘이 있다.” 한 데서 온 말로, 소장을 하늘처럼 추켜올린 말이다.
♣ 소체[召遞]벼슬아치가 왕명을 받아 삼사(三司)나 경원(京院)으로 전임됨으로써 체직(遞職)되는 일.
♣ 소초[小草]소초는 원지(遠志)의 이명. 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이 처음엔 동산(東山)에 끝까지 은거할 뜻이 있었다가, 뒤에 환온(桓溫)의 사마(司馬)가 되었을 때, 환온에게 원지를 바쳐온 자가 있자, 환온이 사안에게 “이 약초의 또 다른 이름은 소초(小草)인데 어째서 한 약초에 두 가지 이름이 있는가.” 하고 물었으나, 사안이 즉시 대답하지 못했는데, 마침 곁에 있던 학융(郝隆)이 즉시 대답하기를 “이것은 알기가 매우 쉽습니다. 이 약초가 깊은 산에 있을 때는 원지이고, 밖으로 나오면 소초가 됩니다.” 하니, 사안이 부끄럽게 여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排調》
♣ 소초[小草]일관소초(一官小草)의 준말이다.
♣ 소초[巢鷦]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뱁새가 집을 짓는 것은 겨우 나뭇가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으니, 분수에 맞게 처신함을 말한다.
♣ 소축시[小畜詩]소축집(小畜集) 속에 있는 시를 말한다. 이는 송 나라 왕우칭(王禹偁)이 지은 것인데, 우칭이 직접 점을 쳐 주역(周易) 소축괘(小畜卦)를 얻고서 소축집(小畜集)이라 했다 한다. 《四庫提要 集 別集類》
♣ 소춘[小春]겨울철 첫달은 그래도 봄처럼 온화한 기운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옛날에 음력 10월을 소춘 혹은 소양춘(小陽春)이라고 불렀다.
♣ 소치지화[小癡指畫]소치는 허유(許維)의 호. 순조 때 사람으로 산수화를 잘 그렸음. 완당의 제자임. 지화는 지두화(指頭畫)를 이름.
♣ 소타[嘯咤]꾸짖다는 말이다.
♣ 소탁[宵柝]군중(軍中)에서 밤에 경계하기 위해 두드리는 조두(刁斗)를 이름.
♣ 소탐대실[小貪大失]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음을 뜻함. 즉, 작은 것에 욕심을 부리다가 도리어 큰 것을 잃음
♣ 소태부[蕭太傅]소 태부는 한 선제(漢宣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였던 소망지(蕭望之)를 말하는데, 그는 선제가 위독했을 때 유조(遺詔)를 받아 정사를 총괄하였고, 원제(元帝)가 즉위한 뒤에도 국사를 광정(匡正)한 것이 많았으나, 뒤에 환관인 홍공(弘恭)ㆍ석현(石顯) 등의 모함으로 인하여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 《漢書 卷七十八》
♣ 소통국[蘇通國]소통국은 한 무제 때 절신 소무가 흉노에 사신갔다가 억류되어 사는 동안에 호녀(胡女)와 살면서 낳은 아들인데, 소무가 풀려나 중국으로 돌아온 후 그 역시 중국에 들어와 선제(宣帝)로부터 낭중(郞中)을 제수받았다. 《漢書 卷五十四》
♣ 소파[小坡]소동파(蘇東坡)의 막내 아들 과(過)의 별칭이다.
♣ 소파오가[笑破吳家]서시(西施)는 춘추(春秋) 때 월(越) 나라 미녀의 이름.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패한 뒤에, 그의 모신(謀臣) 범여(范蠡)가 서시를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자, 마침내 오 나라의 정사가 어지럽게 되어서 멸망하기까지에 이른 사실(史實)을 인용하여 말한 것이다.
♣ 소평[少平]소평은 후한 때의 직신 동선(董宣)의 자인데, 광무제(光武帝) 때에 호양공주(湖陽公主)의 종[奴]이 사람을 죽였으므로, 당시 낙양령(洛陽令)으로 있던 동선이 그를 잡아다 죽이었다. 그러자 공주가 이 일을 임금께 하소연한 결과, 마침내 임금이 동선을 잡아다 놓고 공주에게 사과를 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자, 억지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니, 동선이 두 팔로 땅을 힘껏 버티어 끝내 머리를 숙이지 않으므로, 임금이 마침내 강항령(强項令)을 내보내라고 명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七十七》
♣ 소평[邵平]진(秦) 나라 동릉후(東陵侯)로, 진 나라가 망한 뒤에 포의(布衣)로 가난하게 살면서 장안(長安) 성 동쪽에 오이 밭을 일구며 유유자적하게 은사(隱士)의 생활을 즐겼다. 《史記 蕭相國世家》
♣ 소평과[召平瓜]소평과는 진(秦)의 유민인 소평(召平)이 장안성(長安城) 동편에 오이[瓜]를 심어서 그것이 유명하였으므로 과(瓜) 자를 붙여 소평과라 한 것인데 소하(蕭何)가 승상(丞相)이 되어 5천 호(戶)의 봉작(封爵)을 받자 소평이 소하에게 “임금에게 의심을 받기가 쉬우니 봉작을 사양하고 받지 말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화를 입었다. 《史記 蕭相國世家》
♣ 소평과포[邵平瓜圃]은거(隱居)하고 있다는 뜻 소(邵)는 소(召)로도 쓴다. 사기(史記) 권54에 “평은 진(秦)이 망하자 시골에 은거하여, 장안성(長安城) 동쪽에 외를 심었는데 외맛이 좋았으므로 세속에서 동릉과(東陵瓜)라 하였다.” 한다.
♣ 소평포[邵平圃]소평(邵平)이 진(秦) 나라 때 동릉후에 봉해졌는데,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가난한 선비의 신분으로 장안(長安)의 성(城) 동쪽에 오색과(五色瓜)를 심어서 생활을 영위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소풍군[小馮君]풍 부총이 명 나라의 이름난 집안의 자제로서, 그의 형과 함께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한 선제(漢宣帝) 때 대완(大宛)과 서강(西羌)을 정벌하여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진 풍봉세(馮奉世)의 아들 야왕(野王)과 입(立)에 대해, 백성들이 태수로 있을 때의 그들의 치적(治積)을 우러르며 형인 야왕을 대풍군(大馮君)이라 하고 동생인 입을 소풍군(小馮君)이라고 일컬었던 고사가 있다. 《漢書 卷79 馮立傳》
♣ 소하[蘇嘏]동래 고적에 소하정(蘇嘏亭)이 있었다. 소가가 늘 흰 사슴을 타고 금귀 선인(金龜仙人)과 거기서 놀았다는데, 새들이 깃들이지 않는다 한다. 《輿地勝覽》
♣ 소하[韶夏]소는 순(舜) 임금의 악명(樂名)이고 하는 우(禹) 임금의 악명이다.
♣ 소하[蘇賀]인명(人名).
♣ 소하원[遡河源]무제(武帝)가 장건(張騫)을 대하(大夏)에 보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가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고 한다. 《荊楚歲時記》
♣ 소하한중[蕭何漢中]소하는 한 고조(漢高祖)의 명상(名相)으로, 그는 만년에 전택(田宅)을 반드시 궁벽한 곳에 마련하고 집에 담장도 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후손이 어질면 나의 검소함을 본받을 것이고, 어질지 못하더라도 세가(勢家)들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史記 卷五十三》
♣ 소한[宵盰]임금이 정치에 부지런하여 밤중에 일어나 옷을 입고 때가 늦어서야 조반을 먹는다는[宵衣旰食] 말이다.
♣ 소한린호묘[蕭閒早已隣湖泖]소한은 원(元) 나라 때의 문인화가인 예찬(倪瓚)의 관명(館名)이고, 호묘(湖泖)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삼묘호(三泖湖)를 가리킨 말로, 즉 예찬이 이 삼묘호 가에 은거하면서 풍류를 즐겼던 것을 이른 말이다.
♣ 소한유난쇠[所恨幽蘭衰]자기가 가진 좋은 경륜(經綸)이 임금에게 쓰이기를 애원하는 말이다. 굴원(屈原)의 이소경에 “그윽한 난초를 두르고서 기다리며 서성댄다.[結幽蘭而延佇]" 한 데서 온 말이다.
♣ 소한화[消恨花]유사(遺事)에 “처음에 금원(禁苑) 안에 천엽도(千葉桃)가 있어 꽃이 만발하자 명황이 귀비와 함께 날마다 그 밑에 앉아 잔치했다. 임금이 ‘원추리꽃[萱花]만 근심을 잊게 할 뿐 아니라 이 꽃도 한을 해소시켜 준다.’ 했다.” 하였다.
♣ 소해[少海]태자(太子)를 가리킨다. 천자(天子)를 대해(大海)에다 비유하므로 태자를 소해라고 칭하는 것이다. 해록쇄사(海錄碎事)에 “천자는 대해(大海)에 비하고, 태자는 소해에 비한다.” 하였다.
♣ 소해가[少海歌]진(晋) 나라 때 오(吳)의 회계(會稽)에 살았던 은사(隱士) 하통(夏統)이 평소 굳은 지조로 벼슬을 거절하고 은거하였는데, 그가 한번은 병든 모친의 약을 구하기 위해 낙양(洛陽)을 갔던 바, 이때 그의 범상치 않은 행동을 본 태위(太尉) 가충(賈充)이 그를 괴이하게 여겨 오(吳)의 지방에 관한 풍속 등 여러 가지를 묻고, 이어서 그 지방에 관한 가곡(歌曲)을 지어 부를 수 있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 ……오자서(伍子胥)가 오왕(吳王)을 간(諫)하였으나 말은 쓰여지지 않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여 시체가 바다에 던져졌기에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가슴아프게 여기므로, 내가 소해창(少海唱)을 지었으니, 지금 노래를 하겠다.” 하고는 발을 구르며 힘차게 노래를 하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말하기를 “ ……소해창을 들으니 오자서ㆍ굴원(屈原)이 바로 곁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하였고, 가충은 말하기를 “이 오아(吳兒)는 바로 목인 석심(木人石心)이다.”며 감탄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晋書 卷九十四》 목인 석심은 곧 굳은 절조를 비유한 말이다.
♣ 소해성홍[少海星虹]태자의 탄생을 가리킨다. 천자를 대해(大海)에 비유하여 태자를 소해(少海)라 일컫는데,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공동산엔 살기가 까맣게 뒤덮였고, 태자의 깃발이 이젠 천자의 황색.[崆峒殺氣黑 少海旌旗黃]”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6 長遊》
♣ 소해응신극[少海膺宸極]현종이 사천으로 피난간 뒤에 황태자가 삭방(朔方)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서 여러 사람의 권고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니, 천자를 큰 바다라 하고 황태자를 적은 바다라고 한다.
♣ 소허[巢許]소부(巢父)와 허유(許由). 모두 중국 고대(古代)의 고사(高士). 요(堯)가 허유에게 천하를 양보하니, 유가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시냇물에 가서 귀를 씻었는데, 그 물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던 소부가 이 말을 듣고 또 딴 곳으로 가서 물을 먹였다는 고사가 있다.
♣ 소현서원[紹賢書院]율곡 이이(李珥)를 비롯해서 주자(朱子),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등을 모신 소현서원(紹賢書院)이 해주에 있다.
♣ 소혜선기도[蘇蕙璿璣圖]진서(晉書) 열녀전(烈女傳)에 의하면, “소혜(蘇蕙)의 자(字)는 약란(若蘭)이요 두도(竇滔)의 아내이다. 두도가 일찍이 죄를 입어 유사(流沙)로 귀양가자, 소혜는 남편을 생각하다 못해 비단을 짜서 회문선도(回文旋圖)를 만들어 시(詩)를 써서 주었는데, 그 시가 몹시 처량하였다.” 한다.
♣ 소호[少昊]상고 시대의 임금. 소호(小皥)라고도 함. 태호(太昊)의 법을 수행했기 때문에 소호라고 했음.
♣ 소호[韶濩]소(韶)는 순(舜) 임금의 음악이고, 호(濩)는 은(殷) 나라 탕왕(湯王)의 음악이다. 혹은 소(韶)는 우순(虞舜)의 음악이고 호(頀)는 탕왕의 음악이라고도 한다. 대호(大濩)라고도 함.
♣ 소호[召虎]소호는 주 선왕(周宣王)의 명을 받고 회이(淮夷)를 평정한 소목공(召穆公)으로, 그를 기린 내용이 시경(詩經) 대아(大雅) 강한(江漢)에 나온다.
♣ 소호[小戶]주량(酒量)이 작은 사람을 가리킨다.
♣ 소호사[少昊司]형조(刑曹)를 말함. 상고 시대 소호씨(少昊氏)가 금덕(金德)으로 왕(王) 노릇을 하였으므로 후세에 그를 가을을 맡은 신(神)이라 칭하였는데, 가을은 형(刑)을 주관하므로 이른 말이다.
♣ 소호주어롱[韶濩奏於聾]소(韶)는 순(舜) 임금의 악(樂)이고 호(濩)는 탕(湯) 임금의 악.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성인의 음악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 소호흘제유기미[小狐汔濟濡其尾]주역(周易) 미제(未濟) 괘에, “여우가 물을 건너다가 채 못 건너서 꼬리를 적셨으니, 이로울 것이 없다[小狐汔濟 濡其尾 旡攸利].”에 인용된 것.
♣ 소홍사[小紅詞]소홍은 송(宋) 나라 때의 시인(詩人) 범성대(范成大)의 비(婢)의 이름이다. 소홍은 재색(才色)과 문예(文藝)가 뛰어난 여인인데, 범성대가 뒤에 그를 강기(姜夔)에게 보냈었다. 강기의 과수홍시(過垂虹詩)에 “스스로 지은 새 시는 운치가 가장 아름다운데, 소홍은 조용히 노래하고 나는 퉁소를 부노라[白作新詞韻最嬌 小紅低唱我吹簫].” 하였다.
♣ 소화[小華]소화는 이광문(李光文)의 호. 자는 경박(景博)이고 우봉인(牛峯人)으로 벼슬은 이조 판서임.
♣ 소화[韶華]아름다운 계절의 경치, 보통 춘광(春光)을 가리키는 시어(詩語)이다.
♣ 소황[蘇黃]소는 소동파(蘇東坡), 황은 황산곡(黃山谷)이니 모두 송대(宋代)의 대문장가였다.
♣ 소황[蘇黃]송대(宋代)의 문장가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병칭한 말이다.
♣ 소황이두[蘇黃李杜]소황은 송 나라의 문학가인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의 병칭(幷稱)이고, 이두는 당 나라의 시인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병칭이다.
♣ 소후[昭后]주(周)나라 소왕(昭王).
♣ 소흥[昭興]송 철종의 연호, 1094~1097
♣ 소흥패[疏興粺]당 나라 때 한료(韓遼)가 건의해서 소흥의 3백 리 제방을 준설하여 조운(漕運)으로 곡식을 운반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크게 혜택을 주었다 한다. 《新唐書 卷五十三》
♣ 속건[屬鞬]오른쪽에 활집을 부착한다[右屬橐鞬]의 준말로 좌전(左傳) 희공(僖公) 14년 조(條)에 나오는 말이다.
♣ 속고각[束高閣]진(晋)나라 유익(庾翼)이 은호(殷浩)를 평하기를, “이 무리들은 난세(亂世)에는 쓸데가 없으니 마땅히 높은 시렁에 묶어서 엎어 두었다가 천하가 태평된 뒤에 천천히 쓸 것이다.” 하였다.
♣ 속국[屬國]대마도를 가리킨다.
♣ 속국종귀한[屬國終歸漢]한(漢) 나라에 전속국(典屬國)이란 벼슬이 있었는데 외국과의 교제를 맡은 벼슬이다. 무제(武帝)때에 전속국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자(使者)로 갔다가 억류(抑留) 되어 절개를 굽히지 않고 19년 만에야 마침내 돌아왔다.
♣ 속립아[粟粒芽]속립아는 싸라기처럼 생긴 초춘(初春)의 차싹[茶芽]을 말한 것으로, 소식(蘇軾)의 여지탄시(荔支嘆詩)에 “그대는 무이 시냇가의 속립아를 보지 못했나 전정 후채가 서로 농에 담아 진상하였네[君不見武夷溪邊粟粒芽 前丁後蔡相籠加]”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三十九》
♣ 속모[束茅]사슴을 가리킨다. 시경(詩經) 소남(召南) 야유사균(野有死麕)에 “숲에는 작은 나무가 있으며 들에는 죽은 사슴이 있구나! 옥 같은 여인에게 흰 띠풀로 싸서 주는구나.”에서 온 말이다.
♣ 속목감사[贖木監司]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목면(木棉)만 내면 죄를 속(贖)하여 준 탐오(貪汚)한 감사를 기롱하여 부른 말.
♣ 속미도야[粟米陶冶]농자(農者)와 상자(商者)가 서로 교역하는 것을 말함.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편에, “以粟易械器者 不爲厲陶治”라 하였음.
♣ 속미초[續尾貂]진(晉) 나라 때 조왕 윤(趙王倫)의 당(黨)이 모두 경상(卿相)이 되어 노졸(奴卒)들까지 작위를 받았으므로, 시중(侍中)ㆍ중상시(中常侍) 등의 관(冠)의 장식으로 쓰는 담비 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이어 대신 관을 장식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속백[束帛]숨어 있는 어진 선비를 초빙할 때에 예물로 비단 묶음을 보낸다.
♣ 속부족[續鳧足]장자(莊子)는, “오리 다리가 비록 짧으나 이으면 근심이요, 학의 다리는 비록 기나 끊으면 섧다.” 하였다. 이것은 자연(自然) 그대로 두자는 것이다.
♣ 속서[俗書]왕희지(王羲之) 글씨체를 말한 것. 한유(韓愈)의 석고가(石皷歌) 중에, “왕희지는 속된 글씨로 모양만 부렸지만, 그래도 그 몇 장으로 흰거위와 바꿨다네.[羲之俗書逞姿媚 數紙尙可博白鵝]”하였음.
♣ 속서덕협금[屬西德叶金]오행법(五行法)으로 서쪽은 금(金)에 해당하는데 남산은 중국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 속성[屬城]민중군(閩中郡)에 속한 현성(縣城).
♣ 속소[束素]한 묶음의 깁이란 뜻으로,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細腰]를 형용하는 말이다. 선화유사(宣和遺事)에 “한 묶음 깁인 양 가냘픈 허리는 꼭 한 줌이다.[束素纖腰恰一搦]"라는 시구가 있다.
♣ 속수[涑水]산서성(山西省) 하현(夏縣) 속수향(涑水鄕) 출신인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별칭으로, 보통 속수옹(涑水翁)이라고 한다.
♣ 속수[束脩]속수는 열 마리의 포(脯)로 지극히 박한 예물(禮物). 옛날에는 스승을 찾아뵈려면 반드시 예물을 갖고 갔다. 이 때문에 공자는 “속수 이상의 예물을 가지고 오는 자에게는 내 한 번도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다. 《論語 述而》
♣ 속수무책[束手無策]두 손이 묶인 것처럼 아무런 꾀(대책)가 없음. ‘어쩔 도리 없이 꼼짝할 수 없음’을 뜻함
♣ 속수일편[涑水一篇]속수는 송(宋) 나라 때의 사마광(司馬光)의 별호. 한 편의 글이란 곧 사마광이 찬한 가례(家禮)를 말한다.
♣ 속여경[粟如京]시경(詩經) 소아(小雅) 보전(甫田)에 “증손의 곳간은 마치 산과 같고 언덕과 같다.[曾孫之庾 如坻如京]”라는 말이 나온다.
♣ 속전속결[速戰速決](싸움을 오래 끌지 않고) 빨리 싸워서 빨리 승부를 냄
♣ 속차[屬車]천자(天子)의 부차(副車).
♣ 속초[續貂]좋지 못한 품질로 좋은 품질을 잇는 것을 이르는 말. 고대에 임금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고급 관리들은 관의 장식으로 담비 꼬리를 썼는데, 진(晉) 나라 때 월왕(越王) 사마륜(司馬倫)의 당(黨)이 모두 경상(卿相)이 되어 노졸(奴卒)들까지 작위를 얻었으므로, 시중(侍中), 중상시(中常侍) 등의 관(冠)의 장식으로 쓰는 담비 꼬리가 부족하여 개의 꼬리로 대신했다는 ‘초부족 구미속(貂不足狗尾續)’의 준말이다. 《晉書 越王倫傳》
♣ 속한서[續漢書]진(晉) 나라 사마표(司馬彪)의 찬(撰)으로 모두 18편이었으나 전해지지 않음. 현존 후한서(後漢書)의 팔지(八志)는 이를 취해서 보충한 것이라 함.
♣ 속함[速含]함양(咸陽)의 고호이다.
♣ 속현봉취[續絃鳳觜]십주기(十洲記)에 “도가(道家)에서 봉의 부리와 기린의 뿔을 합하여 달여 만든 아교를 속현교(續絃膠)라고 하는데 이를 사용해 끊어진 활줄을 잇는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끊어진 공자의 도통(道統)을 주자가 이었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속홍[續紅]연산군이 중외의 사족(士族)의 기생들을 빼앗아 부르던 이름.
♣ 손강영설[孫康映雪]손강(孫姜)이 집이 가난하여 기름을 구하지 못해서 쌓인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다는 고사. 어려운 가운데 고생하면서 공부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 손경폐호[孫敬閉戶]손경은 한(漢) 나라 사람으로 문을 닫고 글을 읽다가 졸음이 오면 상투를 천장에 매어달기까지 했는데, 문을 닫고 공부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를 폐호선생(閉戶先生)이라 일컬었다. 《尙友錄 卷五》
♣ 손곡[蓀谷]선조(宣祖) 때의 시인 이달(李達)의 호이다. 동문인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당시(唐詩)에 조예가 깊어 ‘삼당(三唐)’으로 일컬어졌는데, 그의 시집으로 손곡집(蓀谷集)이 현존한다.
♣ 손동조율[孫桐祖栗]손동(孫桐)은 즉 손자라는 뜻으로, 소식(蘇軾)의 글에, “무릇 나무는 본(本)이 차고 끝은 비는데, 오직 오동은 이와 반대다. 시험삼아 작은 가지를 깎아 보면, 속이 꽉 차서 납촉(蠟燭)과 같고 그 나무는 모두 속이 텅 비었다. 세상에서 손자를 귀히 여기는 것은 그 꽉 찬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라는 것이 보이고, 조율(祖栗)은 할아버지라는 뜻이나 그 출전은 미상.
♣ 손등[孫登]위ㆍ진(魏晉) 시대의 은사(隱士). 《晉書 孫登傳》
♣ 손등소[孫登嘯]진(晉)의 은자(隱者) 손등(孫登)의 휘파람 소리. 완적(阮籍)이 소문산(蘇門山)에서 손등을 만나 많은 옛날 얘기들 또는 서신도기(栖神導氣)하는 방법 등을 물었으나 손등은 일체 대답을 않고 휘파람만 길게 불면서 가버렸는데, 그 소리가 마치 암곡(巖谷)에 메아리치는 봉황의 소리와 같았다고 함. 《晉書 阮籍傳》
♣ 손랑장하아[孫郞帳下兒]손랑은 삼국 시대 오(吳) 나라의 손책(孫策)을 가리킨 것이고, 장하아(帳下兒)란 바로 병졸(兵卒)을 가리킨 것으로, 일찍이 유표(劉表)가 글을 지어 손책에게 주고자 하여 먼저 예형(禰衡)에게 보이자, 예형이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따위 글을 손책의 장하아에게나 읽게 하려는가.”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張昭傳注》
♣ 손목[孫穆]송(宋) 나라 사람. 그가 쓴 계림유사(鷄林類事)에 고려 시대의 어휘 3백 50 단어가 한자(漢子)로 표기되어 있음.
♣ 손사막[孫思邈]손사막은 음양(陰陽), 추보(推步), 의약(醫藥) 등에 정통했던 당(唐) 나라의 은자(隱者)로, 천금요방(千金要方) 등의 저술이 있다.
♣ 손생폐호[孫生閉戶]이 말은 초국선현전(楚國先賢傳)에, “孫敬字文寶 常閉戶讀書 睡則以繩繫頸 懸之梁上”이라고 보임.
♣ 손수경[孫守卿]충숙(忠肅)ㆍ충혜(忠惠)ㆍ충목(忠穆)ㆍ충정(忠定)ㆍ공민(恭愍) 다섯 왕대를 역사(歷仕)하였고, 충정왕 때 판삼사사(判三司事)였다.
♣ 손숙오[孫叔敖]손숙오는 춘추(春秋) 시대 초(楚) 나라의 처사(處士)로서 초 장왕(楚莊王) 때 우구(虞丘)를 대신하여 영윤 즉 정승이 되었는데, 세 번이나 정승이 되었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세 번 정승의 직책을 떠났어도 괘념하지 않았다 한다. 《史記 卷119》
♣ 손숙의관원시안[孫叔衣冠元是贗]춘추(春秋) 때 초(楚) 나라의 배우 맹(孟)이란 사람이 재상 손숙오의 의관(衣冠)을 본떠 그와 같은 옷차림을 한 데서 나온 말로, 겉은 비슷하나 내용은 다름을 말한다. 《史記 卷一百二十六 滑稽傳》
♣ 손술[孫述]손술은 후한(後漢)의 공손술(公孫述).
♣ 손신[損神]마음이 상하다. 허전하다.
♣ 손암[巽菴]다산(茶山)의 둘째형 약전(若銓)의 호임.
♣ 손양[孫陽]백낙(伯樂). 춘추 시대 진 목공(秦穆公) 때 사람인데 말[馬]을 잘 본다고 이름이 났다. 육덕명(陸德明)의 장자석문(莊子釋文)에 “백락의 성은 손(孫)이고 이름은 양(陽)인데 말을 잘 다루었다.”고 하였다.
♣ 손여패[損余珮]굴원(屈原)은 이미 방축(放逐)된 뒤에도 항상 임금을 생각하여, 혹시라도 임금이 다시 불러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예물로 패옥(佩玉)을 물가에 풀어놓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초사(楚辭) 구가(九歌)에 “나의 패옥을 풍포에 풀어 놓으리[遺余佩兮灃浦].” 하였다.
♣ 손염[孫炎]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유학자. 자는 숙연(叔然). 저서에는 이아음의(爾雅音義) 등이 있음.
♣ 손오[孫吳]손무(孫武)와 오기(吳起). 모두 춘추 시대 병법(兵法)의 대가(大家)로 그들의 저서에 손자(孫子)와 오자(吳子)가 있다.
♣ 손유[孫劉]손작과 유염. 모두 진(晉) 나라 때 사람인데, 손작은 본디 뜻이 고상한데다 시문(詩文)의 재주가 당시에 으뜸이었고, 유염은 특히 불굴(不屈)의 기개가 높기로 유명하였다. 《晉書 卷五十六, 卷七十五》
♣ 손유합[孫劉合]오(吳)의 손권(孫權)과 촉(蜀)의 유비(劉備)가 처음에는 서로 뜻이 맞아 처남 매부의 관계까지 맺었으나 서로의 입장이 달라 계속 적대관계에 있었다.
♣ 손이[巽二]고대 전설에 나오는 바람 귀신의 이름인데, 주역(周易) 설괘(說卦)에, “손은 바람이다.[巽爲風]”는 말이 나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손자빈각잉재여[孫子臏脚仍載輿]전국 시대에 손빈(孫臏)이 동문 수학했던 위(魏) 나라의 장수 방연(龐涓)에게 무릎뼈를 잘리는 혹형(酷刑)을 받은 뒤 제(齊) 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어 수레 안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방연의 군사를 크게 격파한 고사가 있다. 《史記 孫子吳起列傳》
♣ 손자삼우[損者三友]사귀면 손해를 보는 세 부류의 벗, 겉치레나 일삼는 벗, 굽신거리며 아첨을 잘 하는 벗, 빈말 잘 하고 거짓말 잘 하는 벗
♣ 손작[孫綽]진(晉) 나라 손작은 태원 중도(太原中都) 사람인데 젊어서 높은 뜻이 있었고 박학으로 시문도 잘하여 수초부(遂初賦) 천대산부(天台山賦)를 지었다.
♣ 손초[孫楚]진(晉) 나라 사람으로 글재주가 탁월하였으나, 자부심이 과하여 명예를 얻지 못하다가 나이 40에 비로소 석포(石苞)의 군사가 되었다. 《晉書 卷五十六》
♣ 손하[孫何]자는 한공(漢公). 송 진종(宋眞宗) 때 양절전운사 지제고(兩浙轉運使知制誥)를 지냈고, 저서에는 박사통(駁吏通) 10여 편이 있음.
♣ 손하려[飧霞侶]신선의 도를 터득한 사람을 말한다.
♣ 솔경서[率更書]솔경은 당(唐)의 구양순(歐陽詢)을 말함. 구양순이 일찍이 솔경 영(率更令)을 지냈으므로 그의 서체(書體)를 일러 솔경체라고 함.
♣ 솔무불시래의금[率舞不翅來儀禽]순(舜)의 음악인 소소(蕭韶) 아홉 곡을 연주하니 봉황이 이르러 왔고, 경쇠[磬]를 치니 온갖 짐승이 함께 춤을 추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書經 益稷》
♣ 솔선수범[率先垂範]앞장서서 먼저 모범을 보임.
♣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하늘이 명(命)을 통해 부여해 준 자신의 ‘본성(本性)’을 잘 파악하고 발달시키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道)’ 즉, 자신의 ‘길’이라고 한다.
♣ 솔야임위진[率野任圍陳]공자가 진(陳) 나라와 채(蔡) 나라 사이에서 곤액을 당했을 때 “사람이 외뿔소도 아니고 범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 너른 들판에서 곤욕을 당하게 하는가.” 하였다.
♣ 솔호서래[率滸西來]주(周)의 선조가, “서쪽 물가를 따라 부족을 거느리고 기산(岐山)으로 옮아왔다[率滸西來].”
♣ 송가장[宋家墻]전국 때 초(楚) 나라 송옥(宋玉)의 호색부(好色賦)의 일절에, “초나라에 미인이 많되 신(臣)의 마을만한 데가 없고, 신의 마을에 미인이 많으나 신의 집 동녘 집 처녀가 으뜸이온데, 그녀가 신의 담을 엿본 지가 3년이로되 신이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나이다.” 하였다.
♣ 송간갈도[松間喝道]관원이 출입할 때에 벽제(辟除)하는 것을 갈도(喝道)라 하는데, 소나무 사이에 갈도(喝道)하는 것은 당 나라 이의산(李義山)이 열거(列擧)한 몇 가지 살풍경(殺風景)의 하나이다. 그것은 산에 놀러가는 사람은 한가하고 맑은 취미를 찾는 것인데, 관원이 소나무 숲 사이에 벽제(辟除) 소리를 높이 하는 것을 조롱하는 말이다.
♣ 송강[松江]당나라 육귀몽(陸龜蒙)의 호(號)는 천수자(天隨子)인데, 송강(松江) 보리(甫里)에 살면서 집 전후에 기(杞)와 국화를 심어서 반찬하였으며, 차를 좋아하여 고저산(顧渚山) 밑에 다원(茶園)을 두었다.
♣ 송강[淞江]오군(吳郡)의 화정현(華亭縣)에 있는 강 이름으로, 특히 맛좋은 농어가 나와서 유명하다. 진(晉) 나라 때 장한(張翰)은 낙양(洛陽)에 들어가 벼슬을 하다가 가을 바람이 일자, 자기 고향인 오중(吳中)의 농어회가 생각나서 이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 송강어[松江魚]오(吳) 나라 송강에서 난 노어(鱸魚)를 말하는데, 이 농어회가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한다.
♣ 송강왕[宋康王]전국시대 송(宋)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이름은 언(偃). 그의 형을 밀어내고 스스로 왕이 됨. 사방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방탕무도했으며 여러 신하를 함부로 죽여 제후(諸侯)들이 그를 ‘걸송(桀宋)’이라 부름. 나중에 제(齊) 민왕(湣王)이 위(魏)‧초(楚)와 함께 송(宋)을 정벌하여 강왕(康王)을 죽이고 그 땅을 셋으로 나눠 가짐.
♣ 송강정[松江亭]전라남도 담양에 있는 정자.
♣ 송경[宋璟]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재상으로 요숭(姚崇)과 함께 현종의, 개원(開元)의 선치에 공이 많았음.
♣ 송경[松京]송경은 개성(開城)의 별칭이다.
♣ 송경[誦經]전택(田宅)과 노비를 팔아 죄수를 풀어달라고 뇌물을 쓰는 것을 말한다. 풍속 에서 이른바 신명에게 기도하여 명을 구한다는 뜻이다.
♣ 송경[宋牼]진(秦) 나라와 초(楚) 나라가 전쟁 준비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를 알리기 위해 유세 길에 나섰다가 맹자(孟子)와 석구(石丘)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孟子 告子下》
♣ 송경문[宋景文]경문은 송(宋) 나라 송기(宋祁)의 시호이다.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를 거쳐 사관 수찬(史館修撰)이 되어 구양수(歐陽脩)와 함께 당서(唐書)를 편찬하였는데, 본기(本紀)ㆍ지(志)의 표제(表題)는 구양수가 붙였고 열전(列傳)의 표제는 송기가 붙였다. 저서로는 송경문집(宋景文集)이 있다.
♣ 송곡[松谷]조선조 때 문신으로 성명은 이서우(李瑞雨). 자는 윤보(潤甫), 송곡은 그의 호. 그는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이름이 높았음.
♣ 송과우[宋寡尤]과우는 송언신(宋言愼)의 자이다.
♣ 송관[松關]산골 마을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늘어선 소나무가 자연적으로 이룬 문.
♣ 송광평[宋廣平]당 나라 피일휴(皮日休)가 말하기를, “송광평[宋璟]은 강직하기가 쇠마음 돌창자[鐵心石腸]인 줄 알았더니 그의 지은 매화부(梅花賦)를 본즉 맑고 고와서 그의 사람됨과는 다르다.” 하였다.
♣ 송구영신[送舊迎新]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 함
♣ 송국유존[松菊猶存]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 그동안 돌볼 이 없었는데, 그래도 솔과 국화 남아 있구나.[三徑就荒 松菊猶存]”라는 말이 있다.
♣ 송궁[送窮]송궁문은 당(唐) 나라 때 한유(韓愈)가 지은 글로서, 즉 궁귀(窮鬼)들을 내보내는 뜻을 서술한 것이다.
♣ 송궁문[送窮文]한유(韓愈)의 문장인데,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에도 보임.
♣ 송궁일[送窮日]음력 정월 29일을 이름
♣ 송귀봉작[宋龜逢灼]현명한 사람이 화를 당하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춘추 시대 송 원군(宋元君)의 꿈에 청강(淸江)의 사자(使者)라고 자처하는 자가 자신이 어부 여저(余且)에게 붙잡혔다고 말하자, 원군이 꿈을 깨고 나서 그 어부 여저를 불러다가 조사한 결과 그가 과연 신귀(神龜)를 잡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거북을 잡아 72회나 껍데기를 지져 점을 쳤는데 그때마다 점이 꼭꼭 맞았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서 공자가 말하기를 “그 신령한 거북이 원조의 꿈에 나타날 수는 있었으나 여저의 그물은 피하지 못하였고, 그 지혜는 72회의 점에서 길흉을 어김없이 맞추었지만 제 창자를 도려내는 근심은 피하지 못했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外物》
♣ 송귀장[送鬼檣]궁귀(窮鬼)를 보낼 때 쓰인 돛대.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 한 구절을 인용한 말이다.
♣ 송규암[宋圭庵]규암은 송인수(宋麟壽)의 호이다.
♣ 송기[宋祁]송 나라 때의 학자. 구양수(歐陽脩)를 도와 당서(唐書) 편찬에 종사했으며, 이 뒤에도 거의 전 생애를 사관(史官)과 한림직(翰林職)으로 일생을 마쳤다.
♣ 송기[宋祈]송(松) 나라 용도각(龍圖閣) 학사로서 구양수(歐陽修)와 함께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하였는데, 그가 당 태종을 탕(湯)과 무왕(武王)에 비하였다.
♣ 송대부[松大夫]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올라갔다가 창졸에 폭우를 만나 큰 소나무 밑에서 피하고 나서 그 소나무에 오대부(五大夫)의 벼슬을 봉해 주었다.
♣ 송도[松濤]소나무에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를 비유한 말이다.
♣ 송도계원[松都契員]자기 권세를 믿고 상대방을 얕보는 것을 일컬음. 한명회가 불우하였을 당시 만월대(滿月臺)의 부료(府僚)들 모임에 끼이기를 청하였다가 거절을 당했는데 그 후 세조(世祖)를 도와 원훈(元勳)이 되고 나자 그때 모임을 했던 사람들이 그를 거절했던 일을 후회하였다.
♣ 송도군[宋道君]송 나라의 휘종(徽宗)을 말한다. 휘종은 도군황제(道君皇帝)라고 자칭하였으며, 그림을 잘 그렸다.
♣ 송도육익[宋都六鷁]춘추(春秋)에, “여섯 마리 날아 송 나라 수도를 지나가다[六鷁退飛 過宋都].”라는 기사(記事)가 있는데, 여기의 뜻은 출세하지 못하고 후퇴(後退)만 한다는 것이다.
♣ 송뢰[松籟]바람이 솔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소리.
♣ 송료[松醪]송진(松津)을 넣어서 빚은 술을 이름.
♣ 송류[松留]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의 별칭.
♣ 송리[宋理]송(宋) 나라 때에 가장 성행했던 이학(理學)을 이름.
♣ 송림굴[松林窟]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말사(末寺)인 송림사의 석굴(石窟)로, 참선 기도를 하는 수행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 송림무촉녹[松林無觸鹿]묘소가 아무 탈 없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허자(許孜)가 양친의 묘소 주위에 소나무 묘목을 심어 놓았는데, 사슴이 망쳐 놓은 것을 보고서 “사슴이 어찌 유독 내 마음을 몰라 주는가.” 하고 탄식한 그 다음 날, 맹수에게 죽은 사슴의 시체가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孝友傳 許孜》
♣ 송모옥[松毛屋]소나무 가지로 지붕을 이은 집.
♣ 송무록촉[松無鹿觸]진(晉) 나라 때 효자(孝子)인 허자(許孜)가 자기 어버이가 죽었을 때 친히 흙을 져다가 봉분을 짓고, 곁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는데, 이 때 마침 사슴이 와서 그 심어놓은 소나무를 뿔로 받아버렸으므로, 허자가 슬퍼하여 말하기를 “사슴은 유독 생각할 줄을 모르느냐?”고 하였더니, 그 다음날 갑자기 그 사슴이 어느 맹수(猛獸)에게 잡혀 죽어 그 소나무 밑에 버려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八》
♣ 송무백열[松茂栢悅]소나무가 무성해지니 잣나무가 기뻐한다. 친구의 잘 됨을 기뻐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 송문[松門]외롭고 쓸쓸한 규방(閨房)을 가리킨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松門到曉月徘徊 柏城盡日風蕭瑟 松門柏城幽閉深 聞蟬聽燕感光陰”이라는 구절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4 陵園妾》
♣ 송백[宋白]송 태종(宋太宗) 때 문신으로 자는 태소(太素). 이방(李昉)과 함께 문원영화(文苑英華) 천여 권을 편찬하였음.
♣ 송백후조[松栢後彫]“송백(松柏)이 맨 뒤에 시든다.”이 말은 논어(論語) 자한(子罕) 편에, “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라 보임.
♣ 송백후조장[松柏後凋章]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위진 뒤에야 비로소 송백이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後凋]" 한 장을 말한다.
♣ 송백희[宋伯姬]송백희는 노 선공(魯宣公)의 딸로서 송 공공(宋恭公)에게 출가하였는데, 공공이 죽자 백희(伯姬)는 과부로 살았다. 경공(景公) 때에 이르러 백희의 집에서 밤에 불이 나니, 좌우에서 백희더러 불을 피하라고 말하자, 백희는 말하기를, ‘부인의 행동이 밤에는 당(堂)을 내려가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불에 타서 죽었다.
♣ 송부[松府]송경(松京) 즉 개성(開城)을 가리킨다. 송악산(松岳山) 밑에 있던 고려의 서울이란 뜻으로 조선조 때 불렸던 이름이다.
♣ 송부[宋賦]전국시대 초 나라 송옥(宋玉)의 사부(辭賦)로 고당부(高唐賦)를 말한다. 초 양왕(楚襄王)과 무산(巫山)의 선녀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 것을 노래하였다.
♣ 송부하시[宋賦何詩]송옥(宋玉)의 부와 하손(何遜)의 시라는 뜻이다. 송옥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사람인데 일설에는 굴원(屈原)의 제자라고 한다. 하손은 양(梁) 나라 사람으로 시를 잘 지었다.
♣ 송비공개[松飛孔蓋]공자가 길에서 정자(程子)를 만나 일산을 비스듬이 기울이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여기서는 솔이 일산과 같다는 말이다.
♣ 송비홍[送飛鴻]송비홍은 곧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낸다’는 뜻으로, 혜강(嵇康)의 형수재공 목입군증시(兄秀才公穆入軍贈詩)에 “……눈으로는 돌아가는 기러기를 보내고 손으로는 오현금(五絃琴)을 탄다……[目送歸鴻 手揮五絃]" 하였다.
♣ 송삼백[誦三百]사신의 임무를 맡을 만한 자질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공자가, “시경(詩經) 삼백 편을 외우고서도 사신으로 나가 혼자서 처결하지 못하면 비록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論語 子路》
♣ 송서[送西]서반(西班)으로 보냄. 본래 문관(文官)인 사람에게 무관(武官)인 중추부(中樞府)나 오위(五衛)의 벼슬을 주는 것.
♣ 송설[松雪]원(元) 나라 때 명필 조맹부(趙孟頫)의 호이며, 그의 서체를 또한 송설체(松雪體)라 한다.
♣ 송설체[松雪體]조맹부의 서체.
♣ 송섬[宋纖]송섬은 진(晉) 나라 때의 은사(隱士)로 일찍이 주군(州郡)의 부름에 전혀 응하지 않고 주천(酒泉)의 남산(南山)에 은거하면서 수천 명의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는데, 한번은 주천태수(酒泉太守) 마급(馬岌)이 그를 만나 보려고 찾아갔으나, 그가 굳이 거절하고 만나 주지 않으므로, 마급이 그를 사람 가운데 용[人中之龍]이라고 감탄하면서 시(詩)를 지어 석벽(石壁)에 새기었으니, 그 시에 “붉은 낭떠러지는 백길이요 푸른 절벽은 만길이나 되는데 기이한 수목들이 울창하여 등림처럼 무성하구나 옥 같은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오직 나라의 보배인데 집은 가까우나 사람이 머니 실로 내 마음을 애타게 하네[丹崖百丈 靑壁萬尋 奇木蓊鬱 蔚若鄧林 其人如玉 維國之琛 室邇人遐 實勞我心]”라고 하였다. 《晋書 卷九十四》
♣ 송성구[宋聖求]성구는 송상인(宋象仁)의 자(字)로,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장렬히 전사한 송상현(宋象賢)의 아우이다.
♣ 송송[悚悚]두려워하는 모양
♣ 송송[㩳㩳]잡는 모양
♣ 송시삼백[誦詩三百]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혼자서 임무를 훌륭히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시(詩) 삼백 편을 외우되, 사방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왼들 무엇하리오.”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시경(詩經)에 밝은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말을 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論語 子路》
♣ 송시전대[誦詩專對]전대는 외국에 사신가서 단독으로 응대하여 군명(君命)을 완수하는 것을 이른 말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시 삼백 편을 외우고도 정사를 맡기면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가서 전대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더라도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援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亦奚以爲]”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路》
♣ 송악[松岳]개성(開城)의 별칭이다.
♣ 송양지인[宋襄之仁]송(宋)나라 양공(襄公)의 인정.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부질없이 베푸는 인정. 곧, 쓸데없는 인정을 베품.
♣ 송연[松煙]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먹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 송옥[宋玉]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시인으로, 그의 스승 굴원(屈原)의 신세를 애닯게 여겨 구변(九辯)과 초혼(招魂)을 지었으며, 이 밖에 풍부(風賦), 고당부(高唐賦), 신녀부(神女賦),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 등을 지었다.
♣ 송옥부웅풍[宋玉賦雄風]송옥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제자로서, 그가 일찍이 초 양왕(楚襄王)의 교사(驕奢)함을 염려하여 풍부(風賦)를 지어서 임금을 풍간하였는데, 그 풍부에 “맑고 시원하여 이목(耳目)을 발명시키는 것이 바로 대왕(大王)의 웅풍(雄風)이다.” 하였다.
♣ 송옥비곤[宋玉悲鵾]송옥은 전국(戰國) 때 초(楚) 나라의 문장가로 그의 초사(楚辭) 구변(九辨)에 “곤계(鵾鷄)가 슬피 운다.” 하였다.
♣ 송옥비사[宋玉悲辭]송옥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 나라 사람으로 굴원(屈原)의 제자인데, 굴원이 추방당함을 민망스럽게 여겨 구변(九辯)을 지어 자기 선생의 뜻을 대신 나타냈다.
♣ 송옥시[宋玉詩]송옥이 대언부(大言賦)와 소언부(小言賦)를 지었는데, 대언부는 천지간에 가장 큰 것을 읊었고, 소언부는 천지간에 가장 작은 것을 읊었다.
♣ 송옥이생비[宋玉易生悲]송옥(宋玉)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굴원(屈原)의 제자이다. 굴원의 방축(放逐)을 슬퍼하며 지은 그의 유명한 시 ‘구변(九辨)’은 “悲哉 秋之爲氣也”로 시작하여 쓸쓸한 가을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다. 《楚辭 卷6》
♣ 송옥추[宋玉秋]처량한 가을빛을 보고 인생살이가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시인인 송옥이 굴원(屈原)의 일을 슬퍼하면서 지은 구변(九辯)에, “슬프구나 가을의 기운됨이여, 소슬해라 초목이 떨어져서 쇠하누나.” 하였다.
♣ 송운[松雲]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유정(惟政)의 호이다. 선조(宣祖) 37년(1604) 국서(國書)를 지니고 일본에 건너가 강화(講和)를 맺고 우리나라 포로 3천 5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 송원[宋遠]시경(詩經)에, “누가 송 나라 멀다더냐, 한 돛대로 건너가리.” 하는 구절이 있다.
♣ 송위일주관[松爲一柱觀]관(觀)은 집을 말한 것으로, 분재(盆栽)해 놓은 소나무가 마치 한 기둥으로 된 누각 같음을 의미한 말이다.
♣ 송일고[宋一股]대사간 송순(宋諄)이 임진왜란 때 아비를 버리고 도망갔다가 돌아와 보니 아비가 실종되어 없자 불에 타다 남은 다리뼈 하나를 찾아서 아비의 다리라고 표통(表筒)에 담아서 장사를 치렀는데, 당시 사람들이 ‘송일고’ 또는 ‘표통영장(表筒永葬)’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 송자[宋子]임진왜란 초기에 동래 부사로 장렬히 순국한 송상현(宋象賢)을 가리킨다.
♣ 송자애[宋子哀]춘추 시대 송(宋) 나라의 경(卿)인 고애(高哀)를 가리킨다. 고애는 송공(宋公)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기어 송 나라를 떠나 노(魯) 나라로 망명해 왔는데, 춘추(春秋)에서는 그의 망명을 옳게 여겼다. 《左博 文公十四年》
♣ 송적팔경도[宋迪八景圖]송(宋) 나라 화가(畵家) 송적(宋迪)이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그렸다.
♣ 송정백[宋定伯]남양(南陽)의 송정백이 밤길을 가다 귀신을 만났는데, 자신도 귀신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몇 리를 함께 간 후, 귀신은 걷기가 너무 피곤하니 교대로 업고 가자고 건의한다. 귀신이 정백을 업고 가더니 너무 무겁다고 여기며 정백의 신분을 의심하자, 그는 “나는 방금 죽어서 무거울 따름이요.”라고 해명하며 교묘하게 속인다. 강을 건널 때, 귀신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송정백 쪽은 물소리가 찰랑찰랑하고 울려 거듭 귀신의 의심을 샀다. 송정백은 다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을 건너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았다.”라고 하며 속인다. 송정백은 길에서 귀신과 한담할 때, 대화 가운데서 귀신이 사람의 침을 무서워한다는 약점을 알아낸다. 완시에 곧 도착할 즈음, 송정백이 귀신을 높이 들어올리자 귀신은 질겁하여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완시에 도착하여 귀신을 땅에 내던졌다. 귀신은 양으로 변하였고, 이에 송정백은 침을 뱉어 양이 다시 변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귀신을 팔아 1,500냥을 얻었다.
♣ 송조[宋朝]송조는 춘추시대 때 미남으로 이름난 송 나라 공자 조(公子朝)인데, 위(衛)나라에 벼슬하여 대부(大夫)를 지내면서 위 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인 남자(南子)와 간통하였다.
♣ 송주[送酒]도연명(陶淵明)이 중양절(重陽節)에 마실 술도 없이 무료한 가운데 국화꽃을 따며 시름을 달래고 있을 때, 자사(刺史)인 왕홍(王弘)이 백의사자(白衣使者)를 보내 술을 전달케 했던 고사가 전한다. 《續晉陽秋》
♣ 송죽지절[松竹之節]소나무, 대나무와 같이 변하지 않는 절개.
♣ 송창계[宋窓鷄]진(晉) 나라 때 연주자사(兗州刺史) 송처종(宋處宗)이 일찍이 닭 한 마리를 사다가 매우 사랑하여 길렀다. 닭장을 창 앞에 놓아두었더니 한번은 닭이 사람의 말을 하므로 송처종이 그와 함께 종일토록 현어(玄語)를 담론하였던 바, 이로 말미암아 그는 현도(玄道)에 크게 통했다고 한다.
♣ 송천[松川]양응정(梁應井)의 호로서 자는 공섭(公燮).
♣ 송추[松楸]소나무와 가래나무로, 이를 묘역(墓域)에 많이 심는다 하여 선대 무덤의 별칭으로 쓰인다.
♣ 송추만목배근원[松楸滿目培根遠]높은 덕을 쌓은 선조(先祖)들의 후광을 듬뿍 받고 뿌리가 굳건하게 자라나리라는 말이다. 송추(松楸)는 선영(先塋)의 나무들을 말한다.
♣ 송추비구[誦箒比丘]석가여래의 제자에 주리반특가(周利盤特迦)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머리가 매우 둔하여 잊기를 잘하였다. 한번은 여래가 그에게 모든 것을 잊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으로 ‘빗자루로 쓸어버리라’라는 말을 가르쳐주고 이것을 외게 하였으나 그는 빗자루가 생각나면 뒷부분인 쓸어버리라는 말이 잊혀지고, 뒷부분이 생각나면 다시 앞부분이 잊혀졌다. 이 때문에 송추 비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부처는 하도 딱하여 다시 그에게 안거(安居)를 가르쳐 선(禪) 공부를 시켰더니, 그는 마침내 도(道)를 통하여 훌륭한 제자가 되었다 한다. 《楞嚴經 卷五》
♣ 송파[松坡]송파는 조선 명종 때 문신 이중계(李重繼)의 호. 자는 술부(述夫). 광해군 때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춘추관 기주관(春秋舘記注官)을 겸임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에 유폐되자 이를 탄핵하다 삭탈 관직을 당했다. 선조실록(宣朝實錄) 편찬에 참여했음.
♣ 송풍입정[松風入鼎]차를 끓이는 법에 끓는 소리가 솔바람[松風]처럼 세게 하라는 말이 있다.
♣ 송한갈도[松閒喝道]갈도는 귀인이 출입할 때에 사람 비키라고 벽제(辟除)하는 호령이다. 당나라 이상은(李商隱)이 몇 가지 살풍경(殺風景)을 말한 한 가지에 송간갈도(松間喝道)가 들었다.
♣ 송현우상설[松縣憂霜雪]송백(松柏)은 원래 서리와 눈에도 끄덕 없으니 걱정할 것이 없는데도 걱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 송화[頌花]신년 축사(新年祝詞)를 뜻함. 유진(劉臻)의 아내 진씨(陳氏)가 총명하고 글을 잘 지었는데, 일찍이 정월 초하룻날에 초화송(椒花頌)을 지어 올린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列女傳》
♣ 송화양[宋華陽]송시열(宋時烈)을 말한다. 송시열이 충북 괴산(槐山)의 화양동(華陽洞)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 쇄[鎖]잠그다. 봉쇄하다.
♣ 쇄금[碎金]황금 조각이라는 뜻으로, 간단하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시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晉) 나라 환온(桓溫)이 사안석(謝安石)의 단문(短文) 한 편을 보고는 “이것은 안석의 쇄금이다.[此是安石碎金]”라고 찬탄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世說新語 文學》
♣ 쇄복[晒腹]쇄복은 햇볕에 배를 쬐는 것을 이름. 세설신어(世說新語) 배조(排操)에 진(晉) 나라 때 학륭(郝隆)이 7월 7일에 이웃 부잣집들이 비단 옷을 볕에 쬐는 것을 보고는, 그는 마당으로 나가 태양을 향해 누워 있으므로,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내 뱃속에 들어 있는 서책들을 볕에 쬐고 있다’.[郝隆七月七日出日中仰臥 人問其故 答曰 我曬腹中書耳]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쇄복중서[曬腹中書]진(晉) 나라 때 학륭(郝隆)이 칠석(七夕) 날 한낮에 밖으로 나가 배를 내놓고 누워있으므로,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학륭이 뱃속에 든 서책을 포쇄하려 한다고 대답했던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排調》
♣ 쇄부거[碎副車]부거(副車)는 다음 수레를 말한다. 시황은 육국(六國)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에 한(韓) 나라의 대대로 정승이었던 가문의 장량(張良)은 시황을 저격하여 조상의 입은 은혜를 갚고자 역사(力士)를 구하여 마침내 순시 나온 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철퇴(鐵椎)로 저격하였으나 시황이 타고 있지 않은 다음 수레를 잘못 때려 박살내었다. 《漢書 卷四十 張良傳》
♣ 쇄사[曬史]옛날에는 사초(史草)인 실록(實錄)을 산중에 감추어 두고, 간간이 관원을 보내어 그것을 꺼내어 볕에 쪼이고 바람에 쏘여서 좀먹는 것을 방지하였다.
♣ 쇄산호[碎珊瑚]진(晉) 나라 부호(富豪) 왕개(王愷)와 석숭(石崇)이 서로 호화(豪華)를 다투어 자랑하는데, 왕개는 무제(武帝)의 외삼촌이므로 무제가 왕개를 자주 도와주었다. 한 번은 무제가 왕개에게 한 자 높이가 넘는 산호수(珊瑚樹)를 내려 주었다. 왕개가 석숭에게 보이며 자랑하였더니 석숭은 쇠방망이로 그 산호수를 때려 부셨다. 왕개가 깜짝 놀라니 석숭이 자기 집에 있는 석 자 높이가 넘는 산호수 수십 개를 가져다 보여 왕개의 입이 딱 벌어지게 하였다.
♣ 쇄수[碎首]쇄수는, 백리해(百里奚)를 천거했는데도 진 목공(秦穆公)이 등용하지 않자 대문에 머리를 부수고 죽은 금식(禽息)의 고사로, 사간(死諫)의 정신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論衡 儒增》
♣ 쇄옥두[碎玉斗]옥두(玉斗)는 옥으로 만든 술을 뜨는 구기임. 초한(楚漢) 시대 항왕(項王)과 패공(沛公)이 홍문(鴻門)의 잔치에 회동했을 때, 항왕의 모신(謀臣)인 범증(范增)이 항왕에게 패공을 죽이라는 뜻으로, 자기가 차고 있던 옥결(玉玦)을 세 번이나 들어보이며 자주 눈짓을 하였으나, 항왕이 그 말을 속히 듣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신변의 위험을 느낀 패공은 몰래 그 곳을 빠져나가버렸는데, 이윽고 그 자리에 남아있던 패공의 모신 장량(張良)이 패공의 빠져나간 사실을 해명함과 동시에 항왕에게는 백벽(白璧) 한 쌍[一雙]을 각각 바치자, 항왕은 아무 말 없이 이것을 받았으나, 범증은 이것을 받아 땅에 놓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쳐서 부서버리고는 말하기를 “한탄스럽다, 어린 것과는 큰 일을 꾀할 수가 없구나. 항왕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틀림없이 패공이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項羽紀》
♣ 쇄우[鎩羽]쇄우는 새를 날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우모(羽毛)를 잘라 놓는 것임. 문선(文選) 좌사(左思) 촉도부(蜀都賦)에 “鳥鎩翮 獸敗足"이라 하였는데 쇄핵(鎩翮)은 쇄우와 같은 말임.
♣ 쇄일[曬日]책을 꺼내 볕에다 말리는 날.
♣ 쇄장참[碎長鑱]보습을 부수다. 농사나 짓고 산수 속에 조용히 사는 것이 옳았는데, 잘못 벼슬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 수[繻]옛날에 관문(關門)을 출입할 때 명주 조각을 부신(符信) 대신으로 썼다. 여기서는 부신을 가리킨다.
♣ 수[數]운명.
♣ 수가자[手可炙]세력이 불꽃같아서 손에 닿으면 손을 지질만큼 뜨겁다는 뜻이다.
♣ 수간개석준상고[須看介石遵常固]뜻을 굳게 지켜 상도(常道)를 따른다는 뜻. 개석은 지조가 돌과 같이 단단함을 말한다. 주역(周易) 예괘(豫卦)에 “지조가 돌보다 단단한지라 하루가 다 안 가니 정길하다.[介于石 不終日 貞吉]" 하였는데, 이것은 뜻이 굳어 안일(安逸)에 빠지지 않고 하루가 안 되어 회복하기 때문에 길하다는 뜻이다.
♣ 수간모옥[數間茅屋]몇 칸 안되는 초가집(띠집).
♣ 수간사마[授簡司馬]사장(謝莊)의 설부(雪賦)에, “양왕(梁王)이 토원(兎園)에서 놀다가 눈이 오니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간(簡)을 주면서 글을 지으시요.” 하였다.
♣ 수감[水鑑]수감은 곧 수경(水鏡)을 전용한 말로, 후한(後漢) 때 은사 방덕공(龐德公)이 양양(襄陽) 사마휘의 총명함을 칭찬하여 붙여 준 말이다.
♣ 수강성[受降城]한 무제(漢武帝)가 장군 공손오(公孫敖)를 시켜 새외(塞外)에 항복받는 성[受降城]을 쌓았다.
♣ 수거[鱐腒]물고기 말린 것과 새고기 말린 것을 합칭한 말이다.
♣ 수거감우[隨車甘雨]고통받는 백성에게 덕정(德政)을 널리 펴 주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백리숭(百里嵩)과 정홍(鄭弘)이 지방장관으로 나갔을 때와, 당(唐) 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이 감찰 어사로 나갔을 때, 모두 백성의 편에 서서 선정(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들의 수레가 향하는 곳마다 가뭄이 들었던 땅에 단비가 촉촉이 내렸다는 ‘수거감우(隨車甘雨)’의 고사가 전한다.
♣ 수견[隨肩]어깨를 따른다는 것은 곧 연장자(年長者)에 대한 예로서, 연장자와 함께 길을 갈 적에 연하자가 연장자와 나란히 서지 않고 약간 뒤로 물러서서 가는 것을 뜻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상편에 “오년의 연장자에게는 어깨를 따른다.[五年以長則肩隨之]"고 하였다.
♣ 수결[授玦]결은 패옥(佩玉)인데, 곧 임금과의 작별을 의미한다. 의례(儀禮) 상복소(喪服疏)에 의하면 “세 번 간(諫)하여도 임금이 듣지 않아서 경(境)에 나가 방척(放斥)을 기다리고 있을 때, 임금으로부터 환(環)이 하사되면 돌아오고, 결(玦)이 하사되면 떠난다…….” 하였다.
♣ 수결[受玦]결은 한쪽이 트인 옥고리. 상고 때 조정에서 쫓겨난 신하가 국경에서 추후의 명을 기다리다가 환(環)이 내려오면 되돌아가고 결이 내려오면 관계를 완전히 끊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곧 임금으로부터 축출된 것을 뜻한다.
♣ 수결천장[手抉天章]소동파(蘇東坡)가 지은 한문공(韓文公) 비(碑)에, “손으로 운한을 따내어 천장을 나누었다[手扶雲漢分天章].” 하였다. 운한(雲漢)은 은하수요, 천장(天章)은 하늘의 무늬란 말이다.
♣ 수경[水鏡]물은 가만히 있으면 맑아지고 거울도 닦으면 밝아진다.
♣ 수경[水經]수경은 한(漢)나라 상흠(桑欽)이 지었다는 중국의 강줄기에 관한 책 이름으로, 본디 1백 37조(條)이던 것을 북위(北魏)의 역도원(酈道元)이 1천 2백 52조를 보충하였다.
♣ 수경급고정[脩綆汲古井]많은 재능을 연마했음을 비유한 말. 장자(莊子) 지락(至樂)에 “작은 주머니로는 큰 것을 담을 수 없고, 짧은 두레박줄로는 깊은 샘물을 길을 수 없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수경신[守庚申]사람의 몸속에 함께 있으면서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기억해 두었다가 경신일(庚申日)마다 천제(天帝)에게 고자질한다는 귀신(屍蟲)이 있어, 이날이 되면 부부 관계는 물론이요, 언어나 면회도 금한 채 밤새도록 조용히 앉아서 재계(齋戒)를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수경신(守庚申)이라고 하였다.
♣ 수계[修禊]3월 3일[上巳日] 물가에 모여서 술마시고 노는 것을 수계(修禊)라 하는데, 왕희지(王羲之)가 3월 3일에 난정(蘭亭)에서 여러 명사들과 수계한 일이 있었다.
♣ 수계[修禊]수계는 음력 3월 상사일(上巳日 3월의 첫 번째 사일(巳日))에 불상(不詳)을 제거하기 위해 물가에서 지내는 제사.
♣ 수계산음[修禊山陰]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집서(蘭亭集序)에 “3월 초경에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계사(禊事)를 닦는다.” 하였다.
♣ 수곡주[羞曲肘]당 원결(元結)의 고사로 팔뚝이 구부러져 형체가 못난 것을 부끄러워함. 황정견(黃庭堅)의 시에 “마음은 원차산처럼 곡주가 부끄러워[心似次山羞曲肘]" 하였음.
♣ 수공[垂拱]천자가 덕이 거룩하면 옷을 드리우고 손을 들지 않아도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 수공묵수[輸攻墨守]수는 공수반(公輸盤)이고 묵은 묵적(墨翟). 초(楚)나라가 송(宋)나라를 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공수반은 운제(雲梯)라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묵적이 그 소식을 듣고는 달려가서 다른 재주로 송 나라의 성을 지켰다. 그리하여 공수반이 아홉 차례에 걸쳐 그 기계를 설치했지만 묵적이 그때마다 잘 지켜 내어 공수반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함. 《墨子公輸》
♣ 수공이천하치[垂拱而天下治]천자는 하는 바 없이도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옷을 드리우고 팔짱을 끼고도 천하가 다스려졌다[垂拱而天下治].” 《書經 武成》
♣ 수공장리[垂拱張理]옛날의 성왕(聖王)은 덕이 거룩하므로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서도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렸다.
♣ 수관[水官]즉 공부(工部)를 말하는데, 오행설(五行說)에 따르면, 수(水)는 오행(五行)에서 흑(黑)에 해당한다. 《晉書 職官志》
♣ 수관불[水觀佛]수관을 한 부처, 수관은 불교 용어로서, 먼저 물의 맑은 것을 관상(觀想)하고 차차 생각을 진취시켜 나가면 유리와 같은 정토(淨土)의 대지가 넓고 편편하여 높고 낮은 데가 없고, 또 그 물과 같은 투명한 광명이 몸의 안팎에 두루 비치는 모양을 관(觀)하기까지에 이름을 말한다.
♣ 수구[綉口]글 잘하는 이의 비단 같은 입
♣ 수구군[水口君]윤장(尹璋), 조계형(曺繼衡), 이우(李堣) 등이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수구(水口)로 도망쳐 달아났는데, 공신(功臣)에 참여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수구군이라고 불렀다.
♣ 수구성[首丘誠]근본을 잊지 않고 죽은 뒤에도 고향에 돌아가 묻힌다는 말인데, 여우가 죽을 때에는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 수구여병[守口如甁]입을 병마개 막듯이 봉함. 말을 극히 삼가는 것을 이름.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입 지키기를 병같이 하라[守口如甁]”하였다.
♣ 수구염[手灸炎]당 중종(唐中宗)의 막내딸 안락공주(安樂公主)가 외가(外家)인 위씨(韋氏)와 결탁하여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으므로, 당시에 “손을 델 정도로 뜨거워 행인들이 모두 겁을 내었다.[熱可炙手 道路懼焉]”라는 말이 유행하였다고 한다.《兩京雜記》 참고로 두보(杜甫)의 ‘여인행(麗人行)’에 “손을 델 만큼 뜨거운 절륜한 위세,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 승상이 성내실라.[炙手可熱勢絶倫 愼莫近前丞相瞋]”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
♣ 수구초심[首丘初心]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제가 살던 굴로 둔다는 데서 유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 수구함삼[守口緘三]말조심하는 것을 뜻함. 공자(孔子)가 주(周) 나라에 가서 태묘(太廟)를 구경할 적에 오른쪽 뜰에 입을 세 겹으로 봉한 금인(金人)이 있었는데, 그 금인의 등[背]에 ‘옛날에 말을 삼가던 사람이다.[古之愼言人也]’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說苑 敬愼》
♣ 수구호[首邱狐]고향을 잊지 않음. 여우가 죽을 때면 제가 살던 언덕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고 함. 호사수구(狐死首丘). 《淮南子 說林訓》
♣ 수국[水國]수국은 물나라라는 뜻으로 강이나 바다를 가리킨다.
♣ 수국사[酬國士]전국(戰國) 때에 조양자(趙襄子)가 지백(智伯)을 쳐서 멸하니, 지백의 신하 예양(豫讓)이 조양자에게 원수를 갚으려 하므로 조양자가 잡아 와서 말하기를, “네가 전일에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의 신하가 되었는데, 지백이 범씨와 중행씨를 멸할 때에는 네가 그들을 위하여 지백에게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지백의 신하가 되었는데, 오늘날 지백이 망한 뒤에는 왜 나에게 원수를 꼭 갚으려고 하는가.” 하니, 예양이 답하기를, “범씨와 중행씨는 나를 보통사람으로 대우하였으므로 나도 보통사람으로 갚았고,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하였으므로 나도 국사의 은혜로써 갚는다.” 하였다.
♣ 수궁[守宮]도마뱀 비슷한 파충류의 일종. 그것을 주사(朱砂)를 먹여 길러서 만 3 근이 되었을 때 잡아 가루를 내어 여인의 몸에다 발라두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데, 단 성교를 하고 나면 지워지기 때문에 여인의 정절을 지켜두기 위하여 그 가루를 여인에게 발라두었으며 그리하여 이름도 ‘수궁(守宮)’이라고 하였다고 함. 《本草 守宮》
♣ 수궁[壽宮]신(神)에게 제사지내는 곳을 이름. 곧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모두 장수를 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이곳을 수궁이라 명명한 것이라 한다.
♣ 수궁[數弓]활 쏘는 거리의 두 배 되는 거리를 말함.
♣ 수금진평[受金陳平]한 고조(漢高祖) 때 주발(周勃)ㆍ관영(灌嬰) 등이 고조에게, 진평(陳平)이 제장(諸將)들로부터 금을 받고서 금을 많이 낸 사람에게는 좋은 자리를 주고 금을 적게 낸 사람에게는 나쁜 자리를 주었다고 진평을 참소한데서 온 말이다. 《史記 陳丞相世家》
♣ 수금탈포[獸錦奪袍]당 나라 현종(玄宗)이 이태백(李太白)을 불러 악장(樂章)을 짓게 하고는 상으로 짐승 모양을 그린 비단 도포를 준다고 했다. 그런데 악장을 다 지은 뒤에 현종이 짐짓 장난삼아 그 비단 도포를 주지 않았다. 이에 이태백이 이를 빼앗으려고 하자 현종이 웃으면서 주었다는 말이 있다.
♣ 수급남명짐[手汲南溟斟]차라리 은둔 생활로 자유롭게 살겠다는 것.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그 새가 가면 장차 남명(南溟)으로 갈 것인데, 남명은 천지(天池)이다.” 했듯이 그 붕새처럼 웅지를 품고 넓은 천지를 마음껏 날아보고 싶다는 뜻임.
♣ 수기[洙沂]수기는 수수(洙水)와 기수(沂水)를 합칭한 말로, 공자가 수수와 사수(泗水) 사이에서 출생하여 평생 동안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기수 또한 산동성 추현(鄒縣)에서 나와 수수와 합해지는 물이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수기자[守其雌]노자(老子)에 있는 말인데,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 이치만 있는 것이란 말이다.
♣ 수낭[茱囊]수유(茱萸)를 집어넣는 주머니라는 뜻으로, 음력 9월 9일에 수유를 담은 붉은 주머니를 차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며 사기(邪氣)를 물리쳤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續齊諧記》
♣ 수다교[修多敎]불교(佛敎)를 가리킨다. 수다는 수다라(修多羅)의 준말로 불교의 경전(經典)을 일컫는 말이다.
♣ 수단[水團]유월 유두에 만들어 먹는 음식. 햇보리를 삶아 녹말을 묻혀 끓는 물에 데치거나, 흰떡을 잘게 썰어서 둥글게 빚어 꿀물에 넣고 실백을 띄운다.
♣ 수달[獸闥]한(漢) 나라 장안(長安)의 궁문(宮門) 이름인 백수달(白獸闥) 즉 백수문(白獸門)을 말한다. 원래는 백호문(白虎門)이었는데, 당 태조(唐太祖)의 성명이 이호(李虎)이기 때문에 이를 휘(諱)하여 호(虎)를 수(獸)로 고쳤다.
♣ 수담[手談]바둑 두는 것을 말한다. 안씨가훈(顔氏家訓) 잡예(雜藝)에 “바둑 두는 것을 수담이라고도 하고 좌은(坐隱)이라고도 하는데, 꽤 고상한 취미가 있다.” 하였다.
♣ 수당[垂堂]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는 경계를 말한다. 수당은 처마 끝 바로 밑으로, 이곳은 기왓장이 떨어질 염려가 있는 곳이므로 위험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한 문제(漢文帝)가 말을 타고 험한 언덕을 치달리려 하자, 원앙(袁盎)이 “귀한 집 아들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 법이다.[千金之子 坐不垂堂]”하면서 만류했던 원앙계수당(袁盎戒垂堂)의 고사가 있다. 《史記 袁盎晁錯列傳》
♣ 수당계[垂堂誡]수당(垂堂)은 떨어질 위험이 있는 섬돌 가까이에 앉는 것으로서, 귀한 집 자제일수록 자신의 몸을 아껴 위험한 곳에 가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漢書 爰盎傳》
♣ 수덕진군[水德眞君]송 나라는 화덕(火德)의 운을 탔다 하는 음양설이 있으므로, 여기서 벽력화선은 송 나라를 대표하는 신령이요, 금(金) 나라가 송 나라를 빼앗았으므로 화(火)를 이기는 수덕진군은 금나라를 대표하는 신령이다.
♣ 수도[豎刀]춘추 시대 제 환공(齊桓公)의 시인(寺人)으로, 환공의 총애를 받다가 환공이 죽은 뒤 역아(易牙), 개방(開方) 등과 더불어서 권력을 다투면서 제 나라를 어지럽혔다. 《春秋公羊傳 僖公十八年》
♣ 수도어행[水到魚行]물이 이르르면 고기가 그 물 속을 가게 된다. 무슨 일이건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는 의미.
♣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자신에게 주어진 명(命)을 파악하고 본성(本性)을 발달시켜야 하는 자신의 길(道)을 꾸준히 다듬어 나가는 것 그것을 일컬어 ‘본받음(敎)’이라고 한다.
♣ 수등[瘦藤]등나무 지팡이를 말한다.
♣ 수락석출[水落石出]흑막이 걷히고 진상이 드러남을 뜻하는 고사성어.
♣ 수롱진시희왕촉[垂隴陳詩希往躅]춘추 시대 정(鄭) 나라가 막강한 진(晉) 나라의 실력자 조맹(趙孟)을 맞이하였을 때, 그의 요구에 따라 정 나라 공자(公子)들이 각각 시 한 편씩을 읊고 평가를 받았던 일을 말한다. 《春秋左傳 襄公 27年》
♣ 수뢰[獸罍]짐승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술그릇.
♣ 수루[戍樓]변방의 군사들이 주둔한 곳의 전망대이다.
♣ 수륜마상분[隨輪磨上奔]개미가 맷돌 위에서 다닐 때에 맷돌은 왼쪽으로 돌고 개미는 오른쪽으로 가면 맷돌은 빠르고 개미는 느리기 때문에 맷돌을 따라 왼쪽으로 돌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즉 맷돌을 천체(天體), 개미를 일월(日月)의 운행에 비유한 것이다. 《晉書 天文志》
♣ 수륜장[垂綸莊]장자(莊子)를 말한다. 초왕(楚王)이 그를 재상으로 초빙하였는데도, 이를 거절하고 복수(濮水)에서 낚시질을 계속했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나온다.
♣ 수릉보[壽陵步]한단학보(邯鄲學步)의 고사로서 새로운 것을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채 기왕에 자신에게 있었던 기예마저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함.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저 수릉 땅의 미성년자가 한단에 와서 걸음걸이를 배우려 했던 일을 말일세. 한단의 걸음도 배우지 못한 채 옛날의 걸음마까지 잃어버렸다네그려.”라고 하였음.
♣ 수마[數馬]아주 근신(謹愼)한 것을 뜻한다. 진(晉) 나라 때 만석군(萬石君) 석분(石奮)의 아들 석경(石慶)이 태복(太僕)이 되어 육마(六馬)를 어거하고 나갔는데, 상(上)이 그에게 수레에 채운 말이 모두 몇 마리냐고 묻자, 석경이 채찍으로 말의 수를 하나하나 세어, 여섯 마리라고 대답한 데서 온 말이다. 즉 말 여섯 마리 정도는 세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토록 신중을 기했다는 것이다.
♣ 수마시[瘦馬詩]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양수마(養瘦馬) 시를 이름.
♣ 수마제[數馬蹄]한비자(韓非子)에 “초 장왕(楚莊王)이 궁문(宮門)의 출입을 규제하여 군신(群臣)ㆍ대부(大夫)와 여러 공자들이 입조할 때 말발굽소리가 처마밑[霤]까지 들리게 되면 정리(廷理)가 수레채[輈]를 자르고 마부를 베었다.” 했다.
♣ 수망[輸芒]바다에 떠내려가는 벼 까끄라기를 게[蟹]가 먹어야 독이 없어진다 한다. 오(吳)의 풍속에서, 게가 음력 8월, 즉 벼가 익을 때에 미쳐 벼이삭 하나를 가져다가 그들의 괴수(魁首)에게 바친다는 것을 이르는데, 그리고 난 다음에야 게를 먹을 수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수면앙배[睟面盎背]덕이 있는 자의 자태를 말함.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에 “군자는 타고난 본성인 인의예지의 덕이 마음에 뿌리박혀 있어서 그 드러나는 빛이 맑고 윤택하게 얼굴에 나타나고 풍후(豐厚)한 모양이 등에 나타난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 睟然見於面 盎於背]" 하였음.
♣ 수명장수[壽命長壽]수명이 길어 오래도록 삶.
♣ 수모탁마[修慕琢磨]시경(詩經) 衛風 淇澳에 “문채 있는 군자는 끊고 갈며 쪼으고 가는 것 같도다. 엄밀하고 굳세며 나타나고 성대하니 문채 있는 군자는 끝내 잊을 수 없도다[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琴兮僩兮 赫兮喧兮 有匪君子 終不可諼兮]"라 하였음.
♣ 수몽[守夢]정엽(鄭曄)의 호이다.
♣ 수묵수계[守墨守谿]아랫자리에 처하여 남과 다투지 않는 겸손한 덕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수묵은 수흑(守黑)과 같은 뜻인데, 노자(老子) 28장에, “수컷의 강함을 알면서도 암컷의 약함을 지킬 줄 알면 모든 시내가 모여드는 천하의 계곡이 되고, 분명하게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을 지키면 천하의 법도가 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는 말이 나온다.
♣ 수묵쟁[輸墨爭]서로의 재능을 시새우는 것. 수는 공수반(公輸盤)이고 묵은 묵적(墨翟). 수공묵수(輸攻墨守). 《墨子公輸》
♣ 수문[修文]소소(蘇韶)란 사람이 죽은 뒤에 현형(現形)하였는데, 그의 종제(從弟) 소절(蘇節)이 그에게 저승의 일을 물으니, 소소가 대답하기를 “안회와 복상(卜商)은 지하의 수문랑(修文郞)이 되었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수문이란 곧 문장을 관장함을 뜻한다.
♣ 수문[脩門]초(楚) 나라 도읍인 영(郢)의 성문 이름으로, 보통 도성(都城)의 문을 말한다.
♣ 수문거[修文去]진(晉) 나라 소소(蘇韶)가 이미 죽은 뒤에 다시 나타나서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안연(顔淵)과 복상(卜商)이 지금 수문랑(修文郞)이 되어 있는데, 수문랑은 모두 여덟 명으로 귀신 가운데 성자(聖者)이다.” 하였다 한다. 《太平廣記 卷319》
♣ 수문랑[修文郞]수문랑은 문인(文人)이 죽어 지하(地下)에서 문장을 손질하는 것을 말한다. 삼십국춘추(三十國春秋)에 “중모령(中牟令) 소소(蘇韶)가 죽었는데, 그의 종제 소절(蘇節)이 낮에 소소를 만나 유명(幽冥)의 일을 묻자, 그는 ‘공자(孔子)의 제자인 안회(顔回)ㆍ복상(卜商)은 지하의 수문랑이 되었다.’ 하였다.”
♣ 수문수의시[繡紋羞倚市]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가난한 자가 부유하게 되기 위해서는, 농업보다는 수공업이 낫고, 수공업보다는 상업이 나으며, 여자가 자수의 일을 하기보다는 시장 문에 기대어 웃음을 파는 것이 나을 것이다.[刺繡文不如倚市門]”라는 말이 나온다.
♣ 수문지하랑[修文地下郞]진(晉) 나라 소소(蘇韶)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말하기를,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과 복상(卜商)이 지하(地下)에서 수문랑(修文郞) 벼슬에 있더라.” 하였다.
♣ 수미[愁眉]후한(後漢) 때 경사(京師)의 부인들이 초생달 모양으로 가늘게 그린 눈썹 모양을 말한다. 《後漢書 五行志 1》
♣ 수미산[須彌山]불교의 전설 속에 나오는 서역에 있다고 하는 산으로, 수미산은 수미루(須彌樓)ㆍ소미로(蘇迷盧)라고도 하는데, 4주 세계의 중앙, 금륜(金輪) 위에 우뚝 솟은 높은 산이다. 주위에 7산(山) 8해(海)가 있고 또 그 밖은 철위산이 둘러 있어 물 속에 잠긴 것이 8만 유순 물 위에 드러난 것이 8만 유순이며 꼭대기는 제석천, 중턱은 4천왕이 사는 곳이라 한다. 이 산으로 들어가면 밤이 되고 나오면 낮이 된다고 한다.
♣ 수미시[首尾詩]송 나라 소옹(邵雍)이 지은 수미음(首尾吟)이란 시를 가리키는데, 이 시는 모두 135수나 되는바, 매수(每首)마다 첫 구절과 끝 구절이 모두 “요부는 시읊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堯夫非是愛吟詩]"로 되어 있어 수미(首尾)에 동일한 구절을 쓰고 있다. 《擊壤集 卷二十》
♣ 수미요시[愁未要時]소이전(小二殿)의 관할 하에 있는 지명으로, 박다(博多)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 수민[壽民]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로 선정을 베풀어 잘 살게 해서 백성들을 오래 살도록 함을 말한다.
♣ 수반[倕班]요(堯) 임금 때의 공수(工倕)와 춘추 시대의 공수반(公輸班)으로 모두 이름난 장인(匠人)이었다.
♣ 수발[溲勃]우수 마발(牛溲馬勃)의 준말인데, 우수는 소의 오줌을 말하고, 마발은 곧 습지(濕地)나 썩은 나무 등에서 생기는 말똥버섯을 말한 것으로, 이것들은 모두 가장 사소하고 천한 약재(藥材)에 해당한 것이니, 여기서는 즉 사소한 인재에 비유한 것이다.
♣ 수방영오색[隨方映五色]인간의 불성(佛性)을 상징하는 마니주(摩尼珠)는 아무런 색이 없으면서, 모든 색이 그 속에 비치어 나타난다고 한다.
♣ 수배류[水背流]물이 거꾸로 흐르다.
♣ 수배부동남산영[壽杯浮動南山影]시경(詩經)에, “남산과 같이 오래 사시어, 안 넘어지고 안 무너지소서.” 하는 축수(祝壽)의 구절이 있다.
♣ 수백[水伯]수신(水神)으로, 보통 황하(黃河)의 물 귀신을 지칭한다. 《孝經緯 援神契》
♣ 수변오국[愁邊五國]수심이 어린 듯해 보이는 호인(胡人)의 깊숙한 눈을 말하는데, 흔히 매의 눈을 형용할 때 쓰는 표현이다. 오국(五國)은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일대로, 호인들이 살던 지역이다.
♣ 수병[守甁]말을 극히 삼가는 것을 이름.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입 지키기를 병같이 하라[守口如甁]”하였다.
♣ 수복강녕[壽福康寧]오래 살고 복되며 건강(健康)하고 평안함. 모든 인간들이 누리고 싶어하는 것
♣ 수복진성야리행[繡服眞成夜裏行]귀한 신분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암행어사의 특수한 입장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부귀해져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는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으니[如衣繡夜行] 누가 알아주기나 하겠는가.”라고 한 항우의 말이 실려 있다.
♣ 수부[水部]공조(工曹)의 별칭이다.
♣ 수부[水府]당(唐) 나라 제도로 호조(戶曹) 또는 호부(戶部)를 가리키는 말이다.
♣ 수부[秀夫]서정연(徐挺然)의 자(字)이다.
♣ 수부[水府]용(龍)이 산다고 하는 수궁(水宮)을 이름. 수신(水神)의 궁전으로 신선 세계를 말한다.
♣ 수부사군[繡斧使君]임금으로부터 특별히 수의(繡衣)와 부월(斧鉞)을 하사받고 부임하는 지방 장관이라는 말이다.
♣ 수부삽주[繡鳧鈒舟]유사(遺事)에 “온천(溫泉) 어탕(御湯) 안에 옥련(玉蓮)이 있는데, 물은 그 옥련 밑에서 솟아 나 온다. 매번 목욕할 적에는 금수(錦綉)로 물오리와 기러기를 만들고 또 조그만 배를 조각하여 장난거리로 삼았다.” 하였다.
♣ 수부천활[樹浮天濶]중국의 계주와 요동 지방의 풍경을 묘사한 것임. 두시비해(杜詩批解) 권10 봉화엄중승서성만조십운(奉和嚴中丞西城晩眺十韻)의 “땅 편평해 가람은 촉에 흔들리고 하늘 넓어 나무숲 진에 떴도다[地平江動蜀 天闊樹浮秦].”에서 나온 말로서, 산천의 풍경을 멀리 바라볼 때 숲이 우거진 산이 하늘에 솟아 있는 모양이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평야가 끝없이 펼쳐져 구름이 땅에 닿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 수부흥[水部興]수부는 상서 수부랑(尙書水部郞)을 지낸 남조 양(梁)의 시인 하손(何遜)을 가리킨다. 그가 양주(揚州)에 부임했을 때 관사 앞에 매화 한 그루가 있는 것을 보고는 매일 그 밑에서 시를 읊으며 노닐었는데, 낙양(洛陽)에 돌아오고 나서도 그 매화를 잊지 못해 다시 그곳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하여 재차 부임한 뒤에 마침 활짝 핀 매화꽃 그늘 아래에서 하루 종일 소요(逍遙)하며 시를 읊었던 고사가 있다. 그런데 두보(杜甫)가 다시 이 일화를 인용하여 “동각의 관청 매화 시흥을 북돋우니, 하손이 양주에 있을 때도 아마 이와 같았으리.[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揚州]”라는 시구를 내놓으면서 이 고사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杜少陵詩集 卷9 和裴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寄》
♣ 수불석권[手不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않음. 부지런히 학문에 힘씀. 송나라 ‘사마 광[司馬 光)’이 어려서부터 책을 놓지 않고 독서했다함.
♣ 수불염심[水不厭深]물은 깊음을 싫어하지 않음.
♣ 수불점추[竪拂拈搥]불자(拂子) 즉 총채를 곧추세우고 몽둥이질을 한다는 말로, 선가(禪家)에서 사용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 수사[洙泗]노(魯)나라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말함.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孔子)가 수ㆍ사(洙泗)의 사이에서 설교(設敎)하여 시서ㆍ예악을 닦자, 사방에서 제자가 더욱 많이 왔다.” 하였음. 후세에 수사를 유가(儒家)의 대칭으로 삼았다.
♣ 수사[脩蛇]수사는 매우 길고 큰 뱀으로, 코끼리를 통채로 삼킨다고 한다.
♣ 수사관란[洙泗觀瀾]공자(孔子)의 학문을 닦음. 중국 산동성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사수(泗水)와 그 지류인 수수(洙水) 사이에서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함. 《史記 孔子世家》
♣ 수사미언철[洙泗微言輟]수사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모두 강 이름이다. 공자가 이 근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즉 공자의 문하(門下)를 지칭한 말이고, 미언(微言)은 정미하고 오묘한 말이라는 뜻으로 곧 공자의 도학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중니가 죽고 나서 미언이 끊어졌다.[仲尼沒而微言絶]" 하였다.
♣ 수사소[數斯疏]논어(論語) 이인(里仁)에 “친한 벗에게도 충고를 자주 하면 소원해지는 법이다.[朋友 數斯疏]" 한 데서 ‘數斯疏’를 따왔다.
♣ 수사화[水梭花]물고기의 별칭임. 중들은 주육(酒肉)을 금하기 때문에 은어(隱語)를 사용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 수산[守山]수산(守山)은 밀양(密陽)의 영현(領縣)이다.
♣ 수산[囚山]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과는 달리 오히려 산이 새장처럼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는 뜻인데, 당(唐) 나라 유종원(柳宗元)이 영주(永州)에 귀양가서 수산부(囚山賦)를 지은 뒤로 고달픈 유배 생활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수산부[囚山賦]문장의 이름인데, 당(唐) 나라 때 유종원(柳宗元)이 영주(永州)에 폄적(貶謫)되어 있으면서, 자신을 산에 갇힌 신세라 여겨 이 글을 지었다고 한다.
♣ 수산유자[囚山柳子]유자는 당(唐) 나라 때의 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킨다. 유종원이 일찍이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내다가 왕숙문(王叔文)의 당(黨)에 연좌되어 영주 사마(永州司馬)로 폄출당하자 인하여 스스로 산택(山澤) 사이에 방랑했던 것을 말한다.
♣ 수산초주상헌황[首山初鑄想軒皇]헌황(軒皇)은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를 가리킨다. 그가 수산(首山)에서 동(銅)을 채취하여 3정(鼎)을 만들었다고 한다.
♣ 수서[首鼠]수서양단(首鼠兩端)의 준말로, 쥐가 의심이 많아 동굴 속에서 머리를 밖으로 내놓고 형세를 관망하는 것처럼 양편 중에 어느 편을 택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을 말하는데, 곧 사람이 진퇴(進退)와 거취(去就)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수서양단[首鼠兩端]구멍에 머리만 내민 쥐가 좌우를 살피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분위기를 보며 눈치를 살피는 일
♣ 수서차[水犀釵]물소 뿔로 깎아 만든 비녀.
♣ 수석침류[漱石枕流]수석은 돌로 양치질하는 것이고, 침류(枕流)는 흐르는 물을 베는 것을 말한다. 진(晉)의 손초(孫楚)는 젊었을 때에 숨고자 하여 왕제(王濟)에게 “돌을 베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여야겠다.”는 말이 빗나가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겠다.” 하였더니, 왕제는 “어떻게 흐르는 물을 베며 돌로 양치질하겠는가?" 반문하자, 손초는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으려 하는 것이요, 돌로 양치질하는 것은 이빨을 가다듬으려는 것이다.”라고 꾸며 대답하였다. 《晉書 卷五十六 孫楚傳》
♣ 수석혹침류[漱石或枕流]자연 속에 사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때 손초(孫楚)가 왕제(王濟)에게 ‘돌을 베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한다.[枕石漱流]’고 해야 할 것을 잘못하여 ‘흐르는 물을 베고 돌로 양치질한다.[枕流漱石]’ 하였다. 그러자 왕제가 “물을 어떻게 베며 돌로 어떻게 양치질하는가?”하니, 손초가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고자 함이오, 돌로 양치질하는 것은 이를 단단하게 하자는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 수선[水仙]수중(水中)의 선인(仙人)이란 뜻으로 춘추 시대 오(吳)의 오자서(伍子胥), 또는 전국 시대 초(楚)의 굴원(屈原)을 말하기도 한다.
♣ 수선[手線]수중선(手中線)의 준말로, 자모(慈母)가 지어 준 옷이라는 말이다. 당(唐) 나라 맹교(孟郊)가 지은 ‘유자음(遊子吟)’에 “자애로운 어머님 손에 실을 쥐시고서, 길 떠나는 아들 위해 옷을 지어 주시누나.[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라는 표현이 있다. 《孟東野詩集 卷1》
♣ 수선첨난인[繡線添難認]낮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한 것을 몸으로 느끼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궁중의 여인들이 일하는 작업의 양을 가지고 낮 시간의 장단(長短)을 가늠한 데에서 온 말로, 동지 뒤에는 점점 낮이 길어지기 때문에 “바느질하는 일이 한층 더 늘어났다.[添線]”고 표현한 것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刺繡五紋添弱線 吹葭六琯動飛灰”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8 小至》
♣ 수성[愁城]근심을 성에 비유하여 수성(愁城)이라 한다.
♣ 수성[壽星]남극성(南極星) 또는 노인성(老人星)이라고도 하는데, 장수하는 것을 일컫는 데 쓰인다.
♣ 수성[水城]수성은 간성(杆城)의 옛 이름이다.
♣ 수세[守歲]섣달 그믐날 밤, 궁중에서는 폭죽(爆竹) 소리와 만세(萬歲) 소리가 가득하고, 사서인(士庶人)의 집에서는 가족들이 화롯가에 둘러앉아 밤을 지새는 것을 수세(守歲)라고 한다. 《東京夢華錄》
♣ 수세[守歲]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지 않는데, 이것을 해를 지킨다[守歲]고 한다.
♣ 수세중현필호전[繡帨重懸蓽戶前]여자의 생일을 뜻한다.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남자를 낳으면 활을 문 왼쪽에 달고 여자를 낳으면 수건을 문 오른쪽에 단다.” 한 데서 나온 것이다
♣ 수쇄[收殺]거두는 것.
♣ 수수[修修]갖추어져 있는 모양, 바람 소리의 형용
♣ 수수[樹樹]나무마다, 모든 나무
♣ 수수[囚首]수수는 죄수처럼 머리를 빗지 않아 지저분함을 이른 것으로, 송(宋) 나라 때 소순(蘇洵)이 변간론(辨姦論)을 지어 왕안석(王安石)의 표리부동하고 음험한 행위를 지적하여 “대체로 얼굴에 때가 끼면 씻으려 하고, 옷이 더러우면 빨아 입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인정(人情)인데, 지금 마치 죄수처럼 머리도 빗지 않고 상중에 있는 사람처럼 얼굴도 씻지 않으면서 시서를 말하고 있으니[囚首喪面而談詩書], 이것이 어찌 그의 정(情)이겠는가.”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嘉祐集 卷九》
♣ 수수[叟叟]쌀을 씻는 소리, 움직이는 모양
♣ 수수[垂手]악부잡곡(樂府雜曲)에 속한 곡제(曲題). 대수수(大垂手)ㆍ소수수(小垂手)ㆍ독수수(獨垂手)가 있는데, 대수수는 춤을 추면서 손을 드리우는 것을 말한다.
♣ 수수[搜搜]움직이는 모양, 구구한 모양
♣ 수수[垂垂]차츰차츰, 점점, 두 손을 드리우고 어른께 하는 인사
♣ 수수방관[袖手傍觀]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음. 직접 간섭하거나 거들지 못하고 옆에서 보고만 있음.
♣ 수수폭서루[秀水曝書樓]수수 사람인 주이준(朱彛尊)의 폭서정집(曝書亭集)을 가리킨다. 자는 석창(錫鬯).
♣ 수숙빈교의[嫂叔貧交誼]가난한 가운데 남편의 형제들을 알뜰히 돌보아준 것을 말한다.
♣ 수시[授時]수시는 백성에게 농사철을 알려주는 것이다.
♣ 수시체[數詩體]시체(詩體)의 하나로, 숫자를 시구 가운데서 넣어서 짓는 문자유희(文字遊戱)의 시이다. 잡수시(雜數詩).
♣ 수식태평연제력[誰識太平緣帝力]정치가 아주 잘 되어 백성들이 누구의 덕택에 잘 사는 줄도 미처 모른다는 뜻이다. 중국 고대 요(堯) 임금 때에 천하가 태평하여 백성들 중에 8,90세 된 노인이 흙덩이를 치면서 노래하기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자고, 샘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서 밥 먹는데 임금의 힘[帝力]이 나에게 무슨 소용 있느냐?"고 하였다. 《史略 帝王世紀》
♣ 수신[守申]1년에 여섯 번 돌아오는 경신일(庚申日)에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며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몸에 삼시(三尸) 귀신이 들어 있어 경신일마다 천제(天帝)에게 허물을 고해 바치기 때문에 이날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모면해 보려고 한다는 풍속이 있었다.
♣ 수신[受辛]이 두 글자를 합하면 사(辭) 자가 되므로, 즉 ‘말’을 의미한다. 《三國志 楊修傳》
♣ 수신자득[須身自得]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내가 몸소 나서서 일할 필요 뭐 있으랴, 나의 문하생이 장군이고 정승인걸.[何須身自得 將相是門生]”이라는 구절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2 洛下送牛相公出鎭淮南》
♣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자신의 인격을 닦아 행실을 바르게 한 후에,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그 후에 나라를 다스린 다음 세상을 태평하게 함
♣ 수신제가[修身齊家]행실을 닦고 집안을 바로 잡음
♣ 수심가지 인심난지[水深可知 人心難知]물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사람의 속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뜻
♣ 수심가지인심난측[水深可知人心難測]물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
♣ 수압[睡鴨]조는 오리 모양의 향로(香爐). 속이 비어 있어 그 안에 향을 피우면 연기가 입으로 피어나오므로 청한(淸閑)을 즐기는 사람의 애용물이다.
♣ 수애합주소[收艾合奏簫]음력 4, 5월의 온화한 때를 가리킴. 소(簫)는 순(舜) 임금의 음악인 소소(簫韶)를 말한 것으로, 순 임금이 지었다는 남풍시(南風詩)에 “남풍(南風)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들의 괴로움을 풀어 줄 만하도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수액[水厄]차를 무리하게 많이 마시게 됨을 이름. 진(晉) 나라 때 왕몽(王濛)이 차를 매우 좋아하여 손이 그의 집에 가면 반드시 차를 마시게 되므로, 당시 사대부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겨, 매양 왕몽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오늘은 수액(水厄)이 있을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수양[修攘]안으로는 정교(政敎)를 잘 닦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잘 방비하는 것을 말한다.
♣ 수양[隨陽]태양의 운행에 따라 기러기가 9월에 남쪽으로 왔다가 정월에 북쪽으로 가기 때문에, 기러기가 태양 뒤를 좇는다고 하여 수양(隨陽)이라는 별칭이 생기게 되었다.
♣ 수양[首陽]해주(海州)의 옛 이름이다.
♣ 수양가인반[垂楊可忍攀]송별(送別)을 뜻함. 한대(漢代)에 장안(長安) 사람들은 으레 손을 전송할 적에는 패교(霸橋)에 나와서 버들가지를 꺾어 주어 송별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수양사미궐[首陽死薇蕨]수양은 산명(山名)으로, 즉 은(殷) 나라의 충신 백이(伯夷)ㆍ숙제(叔齊) 형제가, 은 나라가 망하자 의리상 주(周) 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먹다가 굶어죽은 사실을 가리킨다.
♣ 수어지교[水魚之交]물고기가 물을 얻어야 살 수 있는 것과 같이 부부나 군신 관계의 서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친밀한 사이를 뜻한다. 변하지 않는 깊은 교우(交友]관계에도 쓰이고 있다.
♣ 수여[愁予]나로 하여금 수심에 차게하다.
♣ 수여위[守與爲]백성들이 지조가 있어 지킬 것은 지키고 할 것은 하는 것. 《書經 洪範》
♣ 수역[壽域]인수(仁壽)의 경역(境域)이란 뜻으로 태평한 세상을 말함.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에 “온 세상의 백성을 이끌어 인수(仁壽)의 지역에 오르게 한다.” 하였음.
♣ 수연[獸煙]부귀(富貴)한 집에는 숯[炭]가루를 짐승의 모양으로 만들어서 불을 피운다.
♣ 수영패[隨營牌]평안도의 관찰사(觀察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본영(本營)에 직속된 부대를 말한다.
♣ 수예[水裔]물가.
♣ 수오지심[羞惡之心]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 수오지심의지단야[羞惡之心義之端也]그릇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의(義)의 근본이다.
♣ 수와[水渦]수와(水渦)는 목욕하기 위한 조그만 물웅덩이. 궁녀들의 목욕터로 연못에 마련되었다.
♣ 수요와변[受饒瓦甂]공자가 진채(陳菜)에서 포위를 당하여 7일 동안을 굶다가 와증(瓦甑)의 밥을 받아먹었다.
♣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나무가 고요하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싶어도 이미 때 늦어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음을 슬퍼하는 말. 풍수지탄(風樹之歎)
♣ 수우[水虞]본디 소지(沼池)나 하천(河川)을 맡은 관명인데, 해산물(海産物)을 관장하는 기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 수우[邃宇]수(邃)는 심(深)이다. 깊숙한 집. 큰 집.
♣ 수우[守愚]수우는 당 나라 때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정곡(鄭谷)의 자이다.
♣ 수우사[需于沙]이 말은 주역(周易) 수(需)괘 구이(九二)에, “需于沙 小有言 終吉”이라고 보임.
♣ 수운[愁雲]사람으로 하여금 애수(哀愁)를 느끼게 하는 구름을 말함.
♣ 수운[水雲]수운은 수운향(水雲鄕)의 준말로, 안개가 피어오르는 곳. 은자(隱者)가 사는 청유(淸幽)한 지방을 가리킨다.
♣ 수운[需雲]수운은 주역(周易) 수괘(需卦)의 상사(象辭)에 “구름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기다림이니, 군자가 여기에 의거하여 음식을 먹고 연락을 하며 기다린다.[雲上於天需 君子以 飮食宴樂]” 한 데서 온 말이다.
♣ 수운[水雲]유수행운(流水行雲)의 준말. 종적이 일정하지 않음을 이름이니, 행각승(行脚僧)의 이칭(異稱)으로도 쓰인다.
♣ 수원[修遠]매우 멀다.
♣ 수원[脽圓]한(漢) 나라 제왕(諸王)인 양효왕(梁孝王)이 빈객(賓客)들을 맞이하던 토원(ꟙ園)을 말한다.
♣ 수원수구[誰怨誰咎]누굴 원망하며 누굴 탓할 것인가. 남을 원망하거나 책망할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 수원숙우[誰怨孰尤]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 군자는 하늘과 사람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수원수구(誰怨誰咎)
♣ 수월[授鉞]대장(大將)을 출정(出征)시킬 때에 임금이 도끼를 주는데, 그것은 생살(生殺)의 전권(全權)을 맡긴다는 뜻이다.
♣ 수월[修月]수월은 달을 수리한다는 뜻으로 유양잡조(酉陽雜俎) 천지(天咫)에 “태화(太和) 연간에 정인본(鄭仁本)이 숭산(嵩山)으로 놀러 갔다가, 어느 한 사람이 보따리를 베고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불러 깨우자 그 사람이 ‘당신은 달이 칠보(七寶)가 합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있는가? 나는 언제나 8만 2천 호(戶)의 달을 손질하고 있다.’면서, 보따리를 풀어 보여주는데, 그 속에 도끼와 끌이 있었다.” 하였다.
♣ 수월[水月]수월은 삽십삼관음상의 하나로 한가한 은거 생활을 말함.
♣ 수월경화[水月鏡花]불가의 말로 허환(虛幻)을 비유한 것이다.
♣ 수월관음[水月觀音]불가에서 말하는 33관음의 하나로 달이 비친 바다 위에 한 잎의 연꽃에 선 모양을 하고 있는 관음이라 한다.
♣ 수위옥[樹爲屋]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인 신도반(申屠蟠)이 한실(漢室)이 쇠퇴해짐을 알고는, 이에 양탕(梁碭)의 사이로 들어가 자취를 숨기고, 나무 끝에 인하여 지붕을 얽어 만들고 살면서 스스로 품팔이꾼처럼 행세했던 데서 온 말이다. 옥위수(屋爲樹)
♣ 수유[茱萸]수유는 수유나무의 열매로, 한방에서 약재로 쓰인다. 서경잡기(西京雜記)의 “한 무제(漢武帝)의 궁인(宮人) 가란(賈蘭)이 9월 9일에 수유를 몸에 차고 국화주를 마시면서 하는 말이 ‘이것들이 사람을 장수하게 만든다.’ 하였다.”에서 나온 것이다. 두시비해(杜詩批解) 권6 구일남전최씨장(九日藍田崔氏莊)에 “오는 해의 이 모임에 어느 누가 건장할꼬. 술에 취해 수유 잡고 자세하게 본다네[明年此會知誰健 醉把茱萸仔細看]”하였다.
♣ 수유[首濡]주역(周易) 미제괘(未濟卦) 상구효사(上九爻辭)에 “술을 마시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으나, 정도에 지나쳐 머리까지 담그게 되면[首濡] 잘못이다.” 하였다.
♣ 수유낭[茱萸囊]후한 때의 풍속으로, 음력 9월 9일이면 수유(茱萸) 열매를 따서 붉은 주머니에 담아가지고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면서 사기(邪氣)를 물리쳤던 고사가 있다.
♣ 수유만[茱萸灣]양주부(揚州府)에 있는 항만 이름. 거기에 수유촌(茱萸村)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수유양양회[茱萸襄陽會]왕우승집(王右丞集) 권14 구월구일억산동형제(九月九日憶山東兄弟)의 “아마도 우리 형제 높은 곳에 올라가 머리에 수유 꽂았는데 내 한 사람 빠졌으리.[遙知兄弟登高處 徧揷茱萸少一人]”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이 떠난 뒤 고향의 형제가 쓸쓸할 것이라는 것이다. 양양은 중국의 지명이다.
♣ 수유이[茱萸餌]음력 9월 9일이면 높은산에 올라가 수유 열매를 따고 국화주(菊花酒)를 마시어 사기(邪氣)를 물리치던 풍속에서 온 말이다.
♣ 수유회[茱萸會]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산에 올라가 산수유 열매를 따서 붉은 색 주머니에 담고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며 사기(邪氣)를 물리치는 세시 풍습의 일종이다.
♣ 수은[囚銀]각 아문(衙門)에서 거두어 들여 시중(市中)에 통용되지 않던 은(銀)을 백성들이 속칭으로 부르던 말.
♣ 수의[垂衣]곧 순(舜) 임금과 덕이 같다는 뜻. 수공(垂拱)과 같은 말로, 순 임금은 어진 사람을 선발하여 일을 맡겼으므로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한다.《書經 武成》 주역(周易)에, “황제(黃帝) 요순(堯舜)은 의상을 드리우고[垂衣裳] 있으매, 천하가 다스려졌다.” 한 말이 있다.
♣ 수의[繡衣]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부귀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수의(繡衣)를 입고서 밤길 걷기와 같다.” 하였음.
♣ 수의[繡衣]수놓은 화려한 옷이란 뜻으로,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영광스럽게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 수의공수[垂衣拱手]의상(衣裳)만 드리우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는 뜻. 서경(書經) 무성(武成)에 “하는 일이 없어도 천하가 잘 다스려지다.[垂拱而天下治]" 하였다.
♣ 수의낭군[繡衣郞君]한무제(漢武帝)가 지방에 어사(御史)를 보내면서 수의(繡衣)를 주었다. 그것은 특별히 대우하는 것이다.
♣ 수의랑[繡衣郞]암행어사(暗行御史)를 영화롭게 이르는 말.
♣ 수의상월[繡衣霜鉞]수의는 수를 놓은 호화로운 옷이고 상월은 서릿발같이 날이 선 도끼. 한 무제(漢武帝) 때 민간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많아 어사와 중승(中丞) 등 담당 관리들이 제압하지 못하자, 광록대부(光祿大夫) 범곤(范昆)과 각 보(輔)의 도위(都尉) 및 구경(九卿) 장덕(張德) 등에게 수놓은 옷을 입고 도끼를 손에 쥐고서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진압하게 했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임금으로부터 어느 지방의 분쟁이나 비리를 해결하라는 특명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 수의송[垂衣頌]주역(周易) 계사하(繫辭下)의 “황제(黃帝)와 요ㆍ순(堯舜)은 긴 의복을 입고 천하를 다스렸다.”에서 나온 말로, 애써 공들이지 않고 스스로 잘 다스려지게 하는 성군의 정치에 대한 칭송을 가리킨다.
♣ 수의정치[垂衣政治]무위(無爲)의 도에 입각하여 통치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하(下)에 “黃帝堯舜垂衣裳而天下治”라 하였다.
♣ 수인[愁人]근심에 차게 하다.
♣ 수인씨[燧人氏]전설 속에 나오는 고대의 제왕(帝王)으로, 나무를 비벼서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처음 발명고, 숙식(熟食)하는 방법을 창안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함.
♣ 수인장[數仞墻]두어 길 되는 담장으로, 인격과 도덕이 높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부자(夫子)의 담장은 두어 길이 되기 때문에 그 문(門)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훌륭함을 볼 수 없다.” 하였다.
♣ 수자부족여모[竪者不足輿謀]아이와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말로, 풋내기와는 큰일을 꾀할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 수작[酬酌]술잔을 서로 주고 받고 함. 말을 서로 주고 받음. 남의 말이나 행동을 업신여겨 일컫는 말
♣ 수잠[水蠶]누에의 일종으로 길이가 6~7촌이나 되고, 흑색에 인각(鱗角)이 있으며 서리나 눈이 내릴 때에야 고치를 짓는데, 고치는 길이가 1척이나 되고 오색실이 나온다.
♣ 수장[殳斨]사람 이름. 제가 수(垂)에게 공공(共工)의 책임을 맡기자 수는 수장 및 백여(伯與)에게 양보하였음. 《書經 舜典》
♣ 수장로사기천석[壽藏魯士蘄天錫]시경(詩經) 노송(魯頌)편에, “하늘이 공(公)에게 순수한 복과 오랜 목숨을 주사 노 나라를 보전케 하셨네.”라는 말이 있다.
♣ 수재[秀才]당(唐) 나라 섭법희(葉法喜)가 현진관(玄眞觀)에 살 때 찾아온 손님이 자리에 가득하여 술을 구하는데, 어떤 사람이 자리로 들어와서 ‘국수재(麴秀才)’라고 자칭하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법희가 도깨비인가 의심하여 칼로 쳤더니, 술병으로 변하였다. 그래서 모두 이 술을 마시고 ‘국수재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는 말이 있다. 《事文類聚 燕飮部》
♣ 수재[秀才]진(晉) 나라 반악(潘岳)을 가리킨다. 그의 한거부(閑居賦) 서문(序文)에 “수재로 천거되어 낭관이 되었다.[擧秀才爲郞]”하였고, 또 “여덟 번 관직을 옮기는 동안에 한 번 품계가 올랐으니 …… 이것이 비록 시운(時運)과 관계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졸렬하다는 하나의 증거이다.”라고 하였으며, 그의 ‘추풍부(秋風賦)’ 서문에 “나는 서른 두 살 때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余春秋三十有二 始見二毛]”라고 하였다.
♣ 수재귀지본[水哉貴知本]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유자(孺子)가 노래하기를 ‘창랑(滄浪)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나의 발을 씻는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공자가 ‘너희는 들으라.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게 되니, 이는 물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 하셨다.” 하였다.
♣ 수재수재[水哉水哉]공자가 자주 “물이여, 물이여.” 하면서 찬미하였다.
♣ 수재융[守在戎]오랑캐와 잘 화친하여 오랑캐들로 하여금 중국을 지키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23년 조(條)에, “옛날에 천자는 천하를 지킴에 있어서 사방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하였다.
♣ 수저[繡邸]수불(繡佛)을 모신 저택.
♣ 수적천석[水滴穿石]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종래에는 돌에 구멍을 뚫듯이,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 작은 것이라도 모이고 쌓이면 큰 것이 됨, 큰 힘을 발휘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점적석천(點滴石穿)
♣ 수전[水田]가사는 수전(水田)처럼 된 무늬로 만들었으므로 수전의(水田衣)라 한다.
♣ 수점[睡簟]대자리에 누워 자다.
♣ 수정[壽亭]관우(關羽). 한수정후(漢壽亭侯) 봉호를 받았음.
♣ 수정[修靜]육조(六朝) 때 송(宋) 나라 육견적(陸見寂)의 이름.
♣ 수정교[水精橋]얼음은 수정과 비슷하기 때문에 얼음이 많이 얼어붙어 다리처럼 생겼음을 말한 것이다.
♣ 수정궁궐[水晶宮闕]전설 속에 나오는 궁궐로, 달에 있는 궁궐을 가리키기도 하고, 물속에 있다고 하는 용궁(龍宮)을 가리키기도 한다.
♣ 수정배[水精杯]수정(水晶)으로 만든 술잔. 수정(水精)은 곧 수정(水晶)이다.
♣ 수정인[水晶人]새우와 게를 의인화(擬人化)한 것으로 수정처럼 투명하다 하여 이름한 것이다.
♣ 수정포도[水晶葡萄]열매가 수정처럼 하얀 포도를 말한다.
♣ 수제[水帝]물의 신인 전욱(顓頊)으로, 전욱이 수덕(水德)으로 왕이 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북방 수제가 되었다고 한다.
♣ 수제[隋隄]수 양제(隋煬帝)가 제수(濟水)와 하수(河水)의 지류(支流)를 소통시키기 위하여 양주(揚州)에 쌓은 둑[隄]을 말하는데, 거기에 수양버들을 많이 심어 놓아 경치가 좋다.
♣ 수제심지편망기[修諸心地便忘機]심지(心地)는 곧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기를 잊었다[忘機]는 말은 즉 마음에 꾸밈이 없이 담담한 것을 말한다. 당(唐) 나라 사공도(司空圖)의 시에 “말이 망기에 이르니 불심에 가깝도다.[語到忘機近佛心]" 라는 구절이 있다.
♣ 수제양류[隋堤楊柳]수 양제(隋煬帝)가 운하(運河)를 파고 운하에 따라 쌓은 둑에 버들을 줄지어 심었었다. “수제의 버들이 빛을 잃었다.”함은 당 태종의 위력에 수(隋)가 패망했음을 뜻한다.
♣ 수제하상당금포[手製荷裳當錦袍]은자의 소박한 복장이 마치 임금에게 하사받은 옷처럼 멋지기만 하다는 말이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마름과 연잎으로 윗옷 만들고, 부용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는다.[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라는 표현이 있으며, 이태백(李太白)이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금포(錦袍)를 입고서 배 안에서 술을 마시며 방약무인(傍若無人)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202 文藝列傳中 李白》
♣ 수조[水調]상조(商調)의 슬프고 애절한 곡조 이름.
♣ 수조[水曹]수부(水部)와 같은 말로서 공부(工部)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수부랑(水部郞) 중에 원외랑(員外郞) 각 한 사람씩 두었는데, 두보는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을 지냈다.
♣ 수조[受祖]수조는 임금 자리를 종묘(宗廟)에서 선위받는다는 뜻이다.
♣ 수조가[水調歌]악부(樂府) 상조곡(商調曲)의 이름. 수 양제(隋煬帝)가 변거(汴渠)를 개통한 뒤에 스스로 지어 불렀다는 노래로, 애절한 뜻이 담긴 것이라 한다. 수 양제(隋煬帝)가 강도(江都)에 갔을 때 처음 지은 것을 그 뒤 당(唐) 나라 때 신수조(新水調)로 발전시켰다고 하는데, 그 곡이 은근하면서도 애절한 음조를 띠고 있다 한다. 《碧鷄漫志 歌曲》
♣ 수조가두[水調歌頭]수조가두는 사패(詞牌)의 이름이다. 95자로 짜여져 있음. 《詞律 卷十四》
♣ 수조랑[水曹郞]수조랑은 상서수부랑(尙書水部郞)을 이르는 것으로, 소식(蘇軾)의 초도황주시(初到黃州詩)에 “쫓겨난 사람은 원외랑에 비치됨도 무방하지만 시인은 으레 모두 수조랑이 되었다오[逐客不妨員外置 詩人例作水曹郞]” 한 데서 온 말인데, 예를 들면 뛰어난 시인으로 양(梁) 나라 하손(何遜)이나 당(唐) 나라 장적(張籍) 등이 모두 수조랑을 지냈기 때문에 한 말이다. 《蘇東坡集 卷二十》
♣ 수족지애[手足之愛]형제 사이의 우애를 일컫는 말.
♣ 수종사[水鐘寺]수종사는 양주군(楊州郡) 와부면(瓦阜面)의 조곡산(早谷山)에 있는 절 이름이다.
♣ 수좌[首座]선종(禪宗)의 승당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중. 제일좌(第一座)ㆍ좌원(座元)ㆍ선두(禪頭)ㆍ수중(首衆)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원(禪院)에서 참선하는 스님을 수좌라 한다.
♣ 수주[守株]수주대토(守株待ꟙ). 변통할 줄 모르고 한 자리만 지킨다는 비유.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에 “송(宋) 나라 어떤 사람이 밭을 갈 때 토끼 한 마리가 달려오다가 나무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자, 그만 밭갈기를 중지하고 다른 토끼가 오기만 기다리면서 나무를 지키고 있었으나 토끼는 더 얻지 못한 채 남의 비웃음만 받았다.” 하였다.
♣ 수주[隋珠]수후(隨侯)의 구슬이란 뜻으로, 뱀이 수후(隋侯)에게 보은(報恩)했다는 명월주(明月珠)를 말한다. 수후는 주(周) 나라 때 한수(漢水)의 동쪽에 자리 잡은 제후(諸侯)인데 그는 큰 뱀이 창자가 끊긴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약을 붙여 주었다. 그후 뱀이 강에서 큰 구슬을 물고 나와 은혜를 갚았으므로 그 구슬을 수후(隋侯)의 구슬이라고 이름하였다. 《淮南子 覽冥訓》
♣ 수주대토[守株待ꟙ]구습에만 사로잡혀 변통할 줄 모른다는 비유이다.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에 “송(宋) 나라 사람이 밭을 가는데 토끼가 달아나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쟁기를 던져버리고 그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다시 와서 부딪치기만을 기다렸다.” 하였다.
♣ 수중동해[袖中東海]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등주(登州) 봉래각(蓬萊閣) 아래 석벽(石壁)에서 떨어져 나온 수석(壽石)을 얻고 지은 시 가운데 “이 수석 지니고 돌아오는 길, 소매 속에 동해 물결 출렁이누나.[我持此石歸 袖中有東海]”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1, 文登蓬萊閣下 …… 且作詩 遺垂慈堂老人》
♣ 수중명월경중인[水中明月鏡中人]당체(當體)의 진경(眞景)을 적시(摘示)하지 못한 채 허환(虛幻)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 수중미로[手中薇露]당 나라 유종원(柳宗元)이 한유(韓愈)가 부쳐온 시를 받으면 먼저 장미꽃의 이슬에 손을 씻고 옥유향(玉蕤香)을 뿌린 뒤에 읽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雲仙雜記》
♣ 수중포인[袖中庖刃]포정은 요리(料理) 하는 사람으로 특히 칼을 잘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하여 여기서는 관리(官吏)가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 수즉다욕[壽則多辱]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다는 뜻으로, 오래 살수록 망신스러운 일을 많이 겪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수즉다욕[壽則多辱]장수(長壽)를 하면 욕됨도 많이 당한다.
♣ 수증[修證]만행(萬行)을 수행하는 것과 진리를 증득(證得)하는 것.
♣ 수지[首止]제환공(齊桓公)이 제후(諸侯)들을 모은 땅이름이다.
♣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숨을 곳이 없으므로 살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야박하거나 지나치게 똑똑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피하여 벗을 사귀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 수집수[數集壽]수집은 수재(數載)와 같은 뜻으로 곧 나이가 많은 것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 말의 기원은 회남자(淮南子) 전언훈(詮言訓)의 ‘수잡(數雜)의 수(壽)’라는 데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회남자(淮南子)의 주에 의하면 수잡의 잡(雜)은 잡(帀; 12년 간임)의 뜻으로, 곧 60~70세의 나이를 말한 것이다.
♣ 수차유가우[隨車有嘉雨]동한(東漢)의 정홍(鄭弘)이 회음 태수(淮陰太守)가 되어 혜정(惠政)을 베풀었는데, 그의 수레가 지나가는 곳마다 단비가 내려 오랜 가뭄을 해갈시켰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33 鄭弘傳》
♣ 수창[水蒼]수창은 대부의 패옥(佩玉)인 수창옥(水蒼玉)의 준말이다.
♣ 수천라의[水濺羅衣]미인(美人)과 노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唐) 나라 함통(咸通) 연간에 회남(淮南) 이공(李公)이 강(江)에서 놀 때, 뱃사공이 상앗대를 잘못 놀려 이공 시녀(侍女)의 옷에 물이 튀기자 이공이 난색을 지으니, 마침 자리를 함께 했던 막좌(幕佐) 배여경(裵餘慶)이 문득 이공에게 시(詩)를 지어 바치기를 “아황처럼 얼굴 고와라 금사(金絲)의 옷이요, 물총새 깃 수식 흔들려라 옥비녀 드리웠네. 이왕에 물 튀겨 비단 저고리 젖었으니, 아마도 무산 신녀가 저녁 비에 돌아왔나봐.[半額鵝黃金縷衣 翠趐浮動玉釵垂 從敎水濺羅襦濕 疑是巫山行雨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수천지우[垂天之羽]명붕(溟鵬)은 북명(北溟)의 대붕(大鵬)이라는 뜻으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그 날개가 마치 하늘가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其翼若垂天之雲]”고 하였다.
♣ 수천지운[垂天之雲]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한번 힘을 내어 날아 오르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가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고 하였다.
♣ 수첨[繡添]수첨은 자수(刺繡)하는 바느질감이 더욱 늘어난다는 말로, 동지(冬至)가 지나 날이 점점 길어지는 때를 말한다.
♣ 수첩[壽帖]축수(祝壽)하는 글을 모은 시첩(詩帖), 또는 문첩(文帖).
♣ 수청무대어[水淸無大魚]물이 너무 맑으면 큰 물고기가 살 수 없다는 뜻으로, 사람이 너무 결백하면 남이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 수초[遂初]수초는 벼슬을 떠나 은거하여 처음에 가진 소원을 이루는 것을 말함. 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젊었을 때 허순(許詢)과 함께 세속을 초월하려는 뜻을 가지고 10여 년 동안 산수(山水) 속에 호방하게 살면서 수초부를 지어 자신이 만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서술하였다. 《世說新語 言語》
♣ 수초[遂初]수초는 은퇴하려던 처음 먹은 마음을 이룬다는 뜻이니, 진(晉) 나라 때 손작(孫綽)이 고상한 뜻이 있어 일찍이 수초부를 짓고 자신의 뜻을 이루었는데, 뒤에 산기상시(散騎常侍)의 벼슬을 지내면서 상소하여 환온(桓溫)의 전횡(專橫)을 저지하자, 환온이 좋지 않게 여겨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대의 수초부를 찾지 않고 남의 국사를 간섭하는가.” 한 고사와 춘추 시대 월(越) 나라의 명신(名臣)인 범려(范蠡)가 월 나라를 위해 오(吳)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는 더이상 벼슬을 하지 않고 오호(五湖)에 배를 타고 떠나서 제(齊) 나라로 가 성명을 바꾸고 은거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二十九, 晉書 卷五十六》
♣ 수초부[遂初賦]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당초의 소원을 이룬 것을 노래한 글. 한(漢) 나라 유흠(劉歆)과 진(晉) 나라 손작(孫綽)의 글이 유명하다.
♣ 수칭성[水秤星]미성(尾星) 끝에 나란히 있는 두 별을 가리키는데, 농가에서, 이 두 별이 나란히 있으면 그 해에는 비가 알맞게 내린다고 한다.
♣ 수타[酥酖]인도의 좋은 음식인데, 유락국(乳酪麴)으로 만듦. 산가청공(山家淸供)에 “소동파(蘇東坡)가 자유(子由)와 음식을 먹으면서 그 맛을 찬미하기를 ‘이것은 천축(天竺)의 수타인가 보다. 인간에는 이런 맛이 없다.’ 하였다.” 한다.
♣ 수탄[獸炭]가루숯을 짐승 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하기도 하고 짐승의 뼈를 태운 숯을 말하기도 한다.
♣ 수탄[獸炭]수탄(獸炭)은 석탄을 가루로 만들어 짐승 모양으로 뭉쳐 놓은 것인데, 도성의 호귀가(豪貴家)들이 이것을 가지고 술을 데워 마셨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晉書 外戚 羊琇傳》
♣ 수택[隋澤]회남자(淮南子)의 남명(覽冥) ‘수후(隨後)의 구슬[珠]’ 주(註)에, 수(隋)는 한수(漢水) 동쪽의 나라인데, 수후가 큰 뱀이 상해 끊어진 것을 보고 약을 발라 주었더니, 뒤에 뱀이 강 중에서 큰 구슬을 물고 나와 은덕을 갚았다. 그래서 수후의 구슬이라 했다.
♣ 수토은[水土恩]우물을 파서 물을 먹고 농사 지어 배불리 먹는 것을 말한다.
♣ 수판[手板]관리가 항시 띠 사이에 꽂고 있다가 임금의 명령이나 또는 임금에게 아뢸 일들을 기록하는 것, 즉 홀(笏)을 가리키는데 진(晉)ㆍ송(宋) 이후에 수판이라고 하였다.
♣ 수판[手版]관원들이 지시를 하거나 일을 기록하기 위하여 가지고 다니는 좁고 긴 판자를 말한다.
♣ 수편량해[受鞭梁海]진시황이 석교를 놓아 바다를 건너가서 해뜨는 곳을 보려고 하는데 신인(神人)이 바다로 돌을 몰아 넣었으나 돌이 빨리 가지 않자 채찍질을 하니 돌이 피를 흘렸다 한다. 《三齊略記》
♣ 수포[獸袍]조사(詔使)가 입은 적색(赤色) 도포에 짐승 형상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말한다. 당나라에서 글 잘하는 학사(學士)들에게 짐승을 수놓은 비단갖옷을 상으로 하사하였었다.
♣ 수포우선[手抛羽扇]전쟁을 일삼지 않음을 뜻함. 우선(羽扇)은 새의 깃으로 만든 부채인데,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일찍이 백우선(白羽扇)을 손에 쥐고 삼군(三軍)을 지휘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수풍[樹風]풍수지통(風樹之痛)과 같은 말인데 부모가 죽어 봉양하지 못하여 슬퍼한다는 뜻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는 고요히 있고 싶지만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 싶지만 어버이가 계시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고 하였는데, 후세에 이를 인용해 부모를 오래 봉양하지 못한 슬픔에 비유하였다.
♣ 수하[隨何]수하는 한 고조(漢高祖) 때의 변사(辯士)로서 공을 많이 세운 문신(文臣)이다.
♣ 수하탐환[樹下探環]진(晋)나라 양호(羊祜)가 다섯 살 때에 유모(乳母)를 보고, “내가 가지고 놀던 금가락지를 가져 오라.” 하였다. 유모는, “네가 원래 그런 물건을 가진 일이 없었다.” 하니, 양호가 곧 이웃에 사는 이씨(李氏)의 동산 뽕나무 속에서 금가락지를 찾아내었다. 주인이 놀래며, “이것은 나의 죽은 아이가 잃어버렸던 것인데 네가 왜 가져가는가.” 하니, 유모가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양호는 곧 이씨의 죽은 아이의 후신(後身)인 것이다.
♣ 수해[受醢]소금에 절이다.
♣ 수해[繡獬]수해는 해치(獬豸)를 수놓은 법관이 쓰는 관(冠)을 말한다.
♣ 수해[竪亥]우(禹) 임금의 신하로, 걸음을 잘 걸었다는 신화 속의 인물이다.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地形訓)에 “수해에게 북극에서부터 남극까지 걸어가게 하였더니, 모두 2억 3만 3천 5백 리(里) 75보(步)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 수해소[袖海蘇]소식(蘇軾)의 시에 “我携此石歸 袖裏有東海”의 구가 있음. 《詩人玉屑》
♣ 수행[遂行]멀리가다.
♣ 수향[睡鄕]가상적인 태평의 나라. 소식(蘇軾)의 수향기(睡鄕記)에 ‘……천하가 잘 다스려짐이 수향과 같다.” 하였다.
♣ 수향[睡鄕]잠 속에 들어간 꿈의 세계. 곧 잠자는 것을 뜻한다. 꿈나라.
♣ 수향후[睡鄕侯]수향의 공후(公侯). 수향은 잠자는 사이에 마음이 가 있는 곳 즉 꿈나라를 말한 것으로, 곧 모든 세상일을 잊고 무위(無爲)의 세계로 돌아감을 비유한 말이다. 소식(蘇軾)의 수향기(睡鄕記)에 의하면, 특히 황제(黃帝)와 요순(堯舜) 시대를 수향의 풍속으로 규정하고 있다.
♣ 수현[守玄]양웅(楊雄)의 해조부(解嘲賦)에, “나는 공명(功名)을 구하지 못하므로 잠자코 홀로 나의 태현(太玄)을 지키겠다.” 하였다. 태현은 그가 주역(周易)을 모방하여 지은 글이다.
♣ 수현문[守玄文]현(玄)은 곧 도(道)를 뜻한 것으로, 한 애제(漢哀帝) 때 양웅(揚雄)이 세상에 나가지 않고 꼭 들어앉아 초(草)했던 태현경(太玄經)을 이르는데, 양웅이 태현경을 초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八十七》
♣ 수형[水衡]수형은 한대(漢代)에 천자의 사유의 금전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 수형전[水衡錢]수형은 한(漢) 나라 때 세무(稅務)를 맡은 벼슬 이름. 이 수형의 관아에 저장한 돈은 모두 임금의 사장(私藏)이므로,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돈을 의미한다.
♣ 수호[愁胡]매는 원래 호지(胡地)에서 나왔기 때문에 호지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화응시(畵鷹詩)에 “몸 솟구쳐 교활한 토끼를 생각하고 곁눈질하여 호지를 생각하는 듯하네[▣身思狡兎 側目似愁胡]”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集 卷一》
♣ 수호[愁胡]수심이 어린 듯한 호인(胡人)의 깊숙한 눈을 말하는데, 흔히 매의 눈을 형용할 때 쓰는 표현이다.
♣ 수화[羞花]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양귀비(楊貴妃)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 수화지리[水火之利]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양(梁) 나라 하원(何遠)이 무창태수(武昌太守)가 되었는데, 여름에 마실 물이 나쁘므로 사람을 시켜 민가(民家)의 좋은 우물의 냉수(冷水)를 길어다 먹으면서 물 값으로 돈을 주었는데 주인이 받지 아니하니, “그러면 그 물은 길어다 먹지 않겠다.” 하며 기어이 돈을 주었다.
♣ 수후[隨侯]수후는 춘추 시대 한수(漢水) 동쪽에 있던 수 나라 임금인데, 그는 명월주(明月珠)라고 불리는 진귀한 구슬을 갖고 있었으므로 수후의 구슬[隨侯之珠]이라 하여 유명하였다. 《淮南子 汎論訓》
♣ 수훤당[樹萱堂]훤은 망우초(忘憂草)인데 본디 어머니가 거처하는 북당(北堂) 앞에 심는 것이므로, 즉 어머니의 걱정을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 수훤자이양[樹萱自頤養]원추리[萱草]는 근심을 잊게 하는 풀[忘憂草]로서 모든 시름을 씻어 준다는 데서 인용된 말이다. 《詩經 衛風》
♣ 수희[隨喜]수희는 남의 착함을 따라서 기뻐한다는 뜻이다.
♣ 숙계[叔季]말세(末世)라는 뜻이다. 숙(叔)과 계(季)는 끝[末]이라는 뜻이므로 쇠란(衰亂)한 세상을 숙세(叔世)라 하고, 망하게 된 세상을 계세(季世)라 한다.
♣ 숙계[夙契]숙계는 즉 전세(前世)의 약속이란 뜻이다.
♣ 숙근[宿根]다년생의 묵은 뿌리.
♣ 숙녹비대전[熟鹿皮大典]푹 익은 사슴 가죽에 써 놓은 법전이란 말로,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애매 모호한 법이라는 뜻임.
♣ 숙단[叔旦]숙단은 주(周) 나라 성왕(成王)의 숙부(叔父)인 주공 단(周公旦)을 말함. 《禮記 樂記》
♣ 숙도[叔度]숙도는 동한(東漢) 염범(廉范)의 자(字)이다. 그가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나가서, 금화(禁火)와 야간 통행 금지 등 옛 법규를 개혁하여 주민 편의 위주의 정사를 펼쳐 나가자, 백성들이 “우리 염숙도여 어찌 늦게 오셨는가. 불을 금하지 않으시어 백성 편케 되었나니, 속옷 한 번 못 입다가 지금은 바지가 다섯 벌[廉叔度 來何暮 不禁火 民安作 平生無襦今五袴]”이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後漢書 廉范傳》
♣ 숙류적상[宿瘤摘桑]숙류녀(宿瘤女; 혹이 달린 여자)가 뽕을 따다가 제왕(齊王)을 만나 착한 말을 하였으므로, 제왕이 기특히 여겨 왕후(王后)로 삼았다.
♣ 숙망[宿莽]겨울에도 그 뿌리가 죽지 않아 봄에 거기서 새로운 싹이 움튼다는 향초. 주자집주(朱子集註)에, “草 冬生不死者 楚人 名曰宿莽”라 했음.
♣ 숙맥[宿麥]가을에 파종해서 이듬해에 수확하는 보리를 말한다.
♣ 숙맥불변[菽麥不辨]콩(菽)과 보리(麥)를 구분하지 못함. 사리 분별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킴.
♣ 숙무[宿莽]겨울에 나서 얼어 죽지 않는 풀을 초(楚) 나라 지방에서는 숙무라 한다 함.
♣ 숙민[肅愍]우겸(于謙)의 고치기 전 시호(諡號)이다. 우겸은 영종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에 경제(景帝)를 세우고서 먀선(乜先)에게 대항하였으며, 영종이 귀국하여서는 먀선과의 화의(和議)를 성사시켰는데, 영종이 복위한 뒤에 서유정(徐有貞)의 참소를 당하여 살해되었다. 홍치(弘治) 연간에 숙민(肅愍)으로 추시(追諡)하였으며, 만력(萬曆) 연간에 충숙(忠肅)으로 개시(改諡)하였다. 《明史 卷一百七十 于謙列傳》
♣ 숙복[宿福]불가 용어. 전세에 이룬 복과 선의 뿌리.
♣ 숙봉관어청환[孰封關於請丸]후한서(後漢書) 외효전(隗囂傳)에 “원수(元遂)가 외효에게 유세하기를 ‘제가 흙덩어리 하나를 가지고 대왕을 위해 동쪽의 함곡관(函谷關)을 지키겠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 숙부기혁[孰腐其嚇]장자(莊子)에, “완추(鵷雛)라는 새는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를 아니하는 것인데, 올빼미가 썩은 쥐를 먹으려다 완추가 날아 지나가는 것을 보자 썩은 쥐를 빼앗을까봐 노하여 공갈하는 소리를 지른다.” 하였다.”
♣ 숙불환생[熟不還生]익힌 것은 다시 날 것으로 되돌릴 수 없다. 준비한 음식을 다 먹고자 할 때 쓰는 말.
♣ 숙산[叔山]월형(刖刑)을 당한 노(魯) 나라의 숙산무지(叔山無趾)가 공자(孔子)를 찾아오자 처음에는 거절하였다가 그의 말을 듣고는 받아들인 이야기가 전해 온다. 《莊子 德充符》
♣ 숙산월[叔山刖]노(魯) 나라의 다리 병신 숙산무지(叔山無趾)라는 사람이 공자를 찾아왔다가 공자의 책망을 듣고는 “내가 세상일에 무지한 나머지 내 몸을 함부로 쓰다가 다리 하나를 잃고 말았다.”고 한 이야기가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 나온다.
♣ 숙살[肅殺]엄혹하고 소슬한 계절, 즉 깊은 가을을 말한다.
♣ 숙석지간[宿昔之間]하룻밤 사이에. 짧은 시간을 의미함. ‘昔’은 ‘夕’과 통함.
♣ 숙손[叔孫]춘추 시대(春秋) 노(魯) 나라 숙손표(叔孫豹)를 가리킴. 숙손표가 여러 곳으로 사신을 다닌 일이 있으므로 이에 비유해서 쓴 말이다. 《左傳 成公ㆍ襄公》
♣ 숙수[菽水]자로(子路)가 집안이 빈한해서 어버이에 대한 효도(孝道)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탄식을 하자, 공자가 “콩죽을 쑤어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린다면 그것이 효이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위로했던 고사가 있다. 《禮記 檀弓下》
♣ 숙수락[菽水樂]콩죽을 먹고 물을 마시는[啜菽飮水] 빈사(貧士)의 생활 가운데에서도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려는 아들의 극진한 효(孝)를 받았다는 말이다. 《禮記 檀弓 下部》
♣ 숙수환[菽水歡]숙수는 콩과 물로서 매우 박식(薄食)이므로, 숙수의 즐거움이란 곧 가난한 중에도 부모를 잘 봉양하여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콩죽을 쑤어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그 속에서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효도이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실려 있다.
♣ 숙숙[淑淑]아름다운 모양, 물이 깊은 모양, 물이 맑게 괴어 있는 모양
♣ 숙숙[宿宿]이틀 밤을 묵음, 종종걸음으로 걷는 모양
♣ 숙식[熟食]한식일(寒食日)의 별칭임. 한식일에는 불을 금하게 되어 있으므로, 그 전일에 음식을 익혀 두었다가 이날 찬 음식으로 먹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숙야[叔夜]삼국(三國) 때 위(魏) 나라 혜강(嵇康)의 자.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으로 속절(俗節)에 초연한 태도로 금서(琴書)와 시화(詩畫)를 즐기며 살았다. 그는 성미가 괴이하여 큰 버드나무 아래서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들기기를 좋아하였다. 《晉書 嵇康傳》
♣ 숙야단류[叔夜鍜柳]숙야는 동진(東晉)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의 자이다. 혜강이 평소 대장일을 좋아하여 자기 집에 있는 큰 버드나무 밑에서 여름철이면 대장일을 하였는데, 동평(東平)의 여안(呂安)이 혜강의 고상한 운치를 매우 좋아하여 늘 생각한 나머지 문득 천리 길을 와서 혜강을 만나자 혜강이 그를 친구로 삼아 잘 대우했다 한다. 《晉書 卷四十九 嵇康傳》
♣ 숙야조제서[叔夜早題書]자신의 인생관을 일찍이 글로 써서 피력했다는 말이다. 숙야(叔夜)는 진(晉) 나라 혜강(嵇康)의 자(字)로 ‘양생론(養生論)’과 ‘군자무화론(君子無和論)’ 등의 글을 남겼다.
♣ 숙예[淑艾]수신(修身)을 잘한다는 뜻.
♣ 숙예관원[叔譽觀原]조문자(趙文子)가 숙예와 함께 진(晉) 나라 경대부의 무덤이 있는 구원(九原)을 가서 보고 “죽은 사람을 만일 되살릴 수 있다면 내가 누구와 함께 가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숙예에게 물은 일이 있고, 그 주에 “숙예(叔譽)는 숙향(叔向)이다.” 하였다. 《禮記 檀弓下》
♣ 숙예지종멸[叔譽知鬷蔑]숙예는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숙향(叔向)을 가리킨다. 숙향이 정(鄭) 나라에 갔을 때, 정나라 대부(大夫)인 종멸(鬷蔑)이 얼굴이 매우 못생겼었는데, 숙향을 만나보기 위해 숙향에게 술 대접하는 심부름꾼을 따라 들어가 당(堂) 아래에 서서 한 마디 훌륭한 말을 하자, 숙향이 마침 술을 마시려다가 종멸의 말소리를 듣고는 “반드시 종멸일 것이다.” 하고, 당 아래로 내려가서 그의 손을 잡고 자리로 올라가 서로 친밀하게 얘기를 나누었던 데서 온 말이다. 《左傳 昭公二十八年》
♣ 숙옹[肅雝]숙옹은 공경스럽고 유화한 모습을 뜻함. 시경(詩經) 소남(召南) 하피농의(何彼穠矣)에 “어찌 숙옹치 않으리요 가마 탄 왕희(王姬)를 보소.” 한 데서 온 말이다.
♣ 숙옹농리[肅雍穠李]시경(詩經) 소남(召南)에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운가, 복숭아꽃 오얏꽃 같구나! 어찌 온화하지 않겠는가 왕희(王姬)의 수레로다.” 하였는데, 여기서 인용한 말이다.
♣ 숙우초분애[淑郵超氛埃]초사(楚辭) 원유(遠遊)에 “絶氛埃而淑尤兮 終不反其故都”라 한 데서 온 말인데, 그 주에 의하면, 조상보다 더 훌륭하게 도를 행하고 선을 닦아서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되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 숙유[菽乳]숙유는 두부(豆腐)의 별칭이다.
♣ 숙자[叔子]진(晉)의 양호(羊). 숙자(叔子)는 그의 자(字)임. 오(吳)를 다스리면서 선정을 베풀어 그가 죽은 후 오의 백성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여 현산(峴山)에다 비를 세웠는데, 그 비를 바라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함. 《晉書 卷三十四》
♣ 숙재[叔載]이전(李㙉)의 자(字)이다.
♣ 숙종[肅宗]숙종은 현종(玄宗)의 아들로 천보(天寶) 14년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이 함락되자 현종은 파촉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마외(馬嵬)라는 곳에 이르자, 부로(父老)들의 간청에 의하여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 뒤에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다음 현종을 높여 태상황(太上皇)으로 모셨으나 간신들의 모함에 의하여 부자간에 불화(不和)가 생겼다. 《新唐書 肅宗皇帝本紀》
♣ 숙채종수별낙천[宿債終須別樂天]낙천(樂天)은 당 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호임. 백거이에게 번소(樊素)라는 기첩(妓妾)이 있어 노래를 매우 잘했었는데, 백거이가 늙고 병들었을 때 빚에 의하여 부득이 번소를 놓아주게 되어 서로 이별을 매우 아쉬워했던 데서 온 말이다. 《樂天集 卷十八》
♣ 숙초[宿草]1년 이상 묵은 풀을 말한 것으로, 즉 묘(墓)를 쓴 지가 1년 이상이 지났음을 뜻한다.
♣ 숙평[叔平]이준(李埈)의 자(字)이다.
♣ 숙피의 글[叔皮書]숙피는 동한(東漢)의 사학가(史學家)이며 문학가(文學家)였던 반표(班彪)의 자(字)로, 문선(文選) 권9에 그의 대표적 문학 작품인 ‘북정부(北征賦)’가 실려 있다.
♣ 숙피일론[叔皮一論]숙피는 한(漢) 나라 반표(班彪)의 자이며, 논문은 그가 지은 왕명론(王命論)을 가리킨다.
♣ 숙향구어주빙리[叔向拘圉疇憑理]억울하게 죄를 받아도 누구 하나 변호해 준 사람이 없었음을 비유한 말이다. 숙향은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대부인 양설힐(羊舌肹)의 자. 양설힐이 일찍이 부사(副使)가 되어 상사(上使) 한기(韓起)와 함께 초(楚) 나라에 갔을 때, 초왕(楚王)이 진 나라와의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원한을 풀기 위해, 한기는 궁중의 수위(守衛)로 삼고 양설힐은 거세(去勢)하여 내시(內侍)로 삼으려고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을 하자, 위계강(薳啓疆)이라는 신하가 왕에게, 여러 가지 사리를 들어 말하여 훌륭한 외국 사신들을 아무 잘못도 없이 그렇게 대해서는 절대로 안되니, 예의를 깍듯이 갖추어 대접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끝내 그들이 초왕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左傳 昭公 五年》
♣ 숙헌[叔獻]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자(字).
♣ 숙호돈[宿好敦]도공(陶公)은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의 ‘칠월야행강릉도중작(七月夜行江陵途中作)’이라는 시에 “시서야 진작부터 좋아했고 말고, 동산의 숲 둘러봐도 속된 뜻이 하나 없네.[詩書敦宿好 林園無俗情]”라는 구절이 있다.
♣ 숙홀[儵忽]숙(儵)과 홀(忽)은 신(神)의 이름.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남해(南海)의 신을 ‘숙’이라 하고 북해(北海)의 신을 ‘홀’이라 하며 중앙(中央)의 신을 ‘혼돈(渾沌)’이라 한다. 숙과 홀이 혼돈을 찾아갔더니 혼돈은 이들을 잘 대접하였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를 갚으려고 ‘남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이것으로 보고 들으며 숨을 쉬고 밥을 먹는데 혼돈만은 없으니 우리들은 시험삼아 한번 구멍을 뚫어 주자’ 하고는 하루에 한 구멍씩 뚫었더니, 혼돈은 7일 만에 결국 죽고 말았다.” 하였다. 혼돈은 땅을 말한 것으로 맨 처음의 혼돈은 형체가 없었는데 구멍을 뚫어 죽고나서부터 지금과 같은 지구의 형체가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 숙홀[儵忽]재빨리 달린다는 말이다. 홀연히. 갑자기.
♣ 숙후지음[叔后知音]숙후(叔后)는 진(晉)의 현대부(賢大夫) 숙향(叔向)으로 이름은 힐(肹). 숙향의 아우 양설호(羊舌虎)가 난영(欒盈)에 붙어 난리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숙향도 구속되었었는데, 집안 식구들이 걱정하자 숙향은 “우리를 구원해줄 사람은 반드시. 기대부(祁大夫)일 것이다. 그는 밖으로 천거할 적엔 원수도 버리지 않았고 안으로 천거할 적엔 친자식을 버리지 않았으니, 나만을 버리겠는가.” 하였는데, 기해(祁奚)는 퇴로해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급히 말을 달려 집권(執權)하고 있던 조선자(趙宣子)를 만나 숙향의 어짊을 말하여 사면하게 한 다음 숙향을 만나보지도 않고 갔으며, 숙향 역시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났다. 《春秋左傳 襄公 二十一年》
♣ 숙흥야매[夙興夜寐]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잔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곤하여 너의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 하였다.
♣ 순강실조추[蓴江失早秋]일찍 벼슬을 떠나지 못했음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장한(張翰)이 일찍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연(東曹掾)으로 있다가, 어느 날 가을 바람이 불어오자 자기 고향인 오중(吳中)의 특산물인 순채와 그곳 오강(吳江)의 농어회가 생각나서 이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二》
♣ 순갱[蓴羹]진서(晋書) 장한전(張翰傳)에 “진(晉)의 문장가 장한은 고향이 오군(吳郡)이었는데, 제왕 경(齊王冏)의 동조연(東曹椽)으로 있다가 가을 바람이 불자 갑자기 고향의 명산물인 순채국과 농어회[鱸膾]가 생각나므로 ‘인생이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좋으니, 무엇 때문에 벼슬에 얽매여 타향에 있겠는가.’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였다.
♣ 순갱로회[蓴羹鱸膾]진(晉) 나라 장한(張翰)이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는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蓴羹鱸膾]가 생각이 나서 곧장 사직하고 귀향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 순거[鶉居]주거(住居)가 일정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순(鶉)은 메추라기인데, 이 새는 항상 야거(野居)하여 일정한 곳이 없다.
♣ 순경[順卿]순경은 고려 때의 직신 이존오(李存吾)의 자이다.
♣ 순공오타운[郇公五朶雲]순공은 당(唐) 나라 때의 명필로 순공에 봉해진 위척(韋陟)을 가리키고, 오타운은 오색(五色)의 드리운 구름[垂雲]을 뜻하는데, 위척은 항상 오채전(五采牋)에 서찰(書札)을 쓰되 모두를 시첩(侍妾)에게 쓰도록 맡겨버리고 자신은 서명(署名)만 하고서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쓴 척(陟)자는 오타운과 같다.”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남의 서찰을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唐書 韋陟傳》
♣ 순구[純鉤]순구는 춘추 시대 월왕(越王)이 주조하였다는 명검(명劍)의 이름이다.
♣ 순군[巡軍]의금부(義禁府)의 별칭이다.
♣ 순군좌처형[荀君坐處馨]후한(後漢) 때 사람 순욱(筍彧)이 남의 집을 찾아갔다 오면, 그 앉았던 자리에서 사흘 동안이나 향기가 났다 한다. 《襄陽記》
♣ 순금[舜琴]공자가어(孔子家語) 변악해(辯樂解)에 “옛날에 순 임금이 오현금(五弦琴)으로 남풍시(南風詩)를 탔는데, 그 시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불평을 풀어 줄 것이고, 남풍의 때 맞춤이여 우리 백성의 재산을 늘려 주리라는 노래가 있다.” 하였다.
♣ 순랑[舜廊]순임금의 조정이라는 말이다.
♣ 순랑고음사사부[順浪高吟思謝傅]동진(東晉)의 사안(謝安)이 손작(孫綽) 등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는데, 마침 폭풍이 불어 물결이 크게 일어나자 일행 모두가 안절부절못했으나, 사안만은 노래를 높이 부르며 태연자약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雅量》
♣ 순량[循良]법을 지켜 백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을 가리킨 말로, 곧 순리(循吏)와 같은 뜻이다.
♣ 순령복[荀令馥]후한(後漢) 때 순령군(荀令君)으로 칭송되었던 고사 순욱(荀彧)이 앉았던 자리는 3일 동안 여향(餘香)이 서려 있었다고 한다.
♣ 순령향[荀令香]순령은 상서령(尙書令)을 지낸 후한(後漢) 순욱(荀彧)의 별칭인데, 그가 일찍이 기이한 향을 얻어 몸에 지니고 다녔으므로 그가 앉은자리에는 삼 일 동안이나 향내가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양양기(襄陽記)에 “순욱이 남의 집에 앉았다가 돌아가면 그가 앉았던 방에 쳤던 장막에서 3일 동안 향내가 났다.” 하였다.
♣ 순로[蓴鱸]순채(蓴菜)로 끓인 국과 농어(鱸魚)로 만든 회(膾)로, 고향을 그리워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진서(晉書) 제92권 문원전(文苑傳) 장한(張翰)에, “장한이 가을 바람이 부는 것을 보자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말하기를, ‘인생살이에 있어서는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한 법인데, 어찌 벼슬에 얽매여서 수천 리 밖을 떠돌면서 명예와 관작을 노리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수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였다.
♣ 순로삼오흥[蓴鱸三吳興]순로는 순채와 농어를 말하고 삼오는 장강(長江) 하류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때 깨끗한 지조로 이름 높았던 장한(張翰)이 가을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말하기를, “인생살이에 있어서는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한 법인데, 어찌 벼슬에 얽매여서 수천 리 밖을 떠돌면서 명예와 관작을 노리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수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 순로일적괴장한[蓴鱸逸跡愧張翰]일찍 벼슬을 그만두지 못했음을 한탄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장한(張翰)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연(東曹掾)으로 있다가, 가을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채와 농어회를 생각하여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한데, 무엇하러 천리 밖에서 벼슬에 얽매일 것 있겠는가.” 하고, 즉시 수레를 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순로(蓴鱸)는 순채와 농어임. 《晉書 卷九十二》
♣ 순로흥발[蓴鱸興發]고향을 잊지 못하고 생각하는 정의 비유. 진(晉)나라 장한(張翰)이 가을, 바람 부는 것을 보고. “고향인 강동(江東)의 순국과 농어회가 그립다.” 하고, 곧 돌아갔다.
♣ 순릉[順陵]조선조 성종비(成宗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능이다.
♣ 순리[循吏]순량(循良)한 관리로 보통 어진 고을 원을 가리킨다.
♣ 순리전[循吏傳]정사(正史) 열전(列傳) 중의 하나. 법을 잘 지키면서 매사를 사리대로 처리한 양선한 관리들을 소개해 놓은 열전.
♣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림. 곧 서로 돕던 이가 망하면 다른 한쪽 사람도 함께 위험해진다는 뜻으로, 서로 이해관계가 밀접해 한 쪽이 망하면 다른 한 쪽도 화를 면하기 어려움. 또는 서로 도우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ㆍ서로 도움으로써 성립되는 관계를 비유
♣ 순모[淳母]맛좋은 음식으로 팔진미(八珍味) 중의 하나라고 함. 《禮記 內則》
♣ 순목[瞬目]순목은 눈을 깜짝거리는 것, 선종(禪宗)에서 학인을 제접(提接)할 때 쓰는 일종의 선기(禪機)이다.
♣ 순문약[荀文若]문약(文若)은 순욱(荀彧)의 자이다. 후한(後漢) 말, 순욱은 조조에게서 벼슬하면서 많은 공을 세워 만세정후(萬歲亭侯)에 봉해지고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조조에게 역심이 있음을 알고 반대하다가 배척 당한 강직한 인물.
♣ 순백천우허[純白天宇虛]청허(淸虛)한 마음속에 도심(道心)이 절로 생겨나리라는 말이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저 텅 빈 곳을 보아라, 텅 빈 방에서 흰 광채가 뿜어져 나오지 않느냐. 길하고 상서로운 경지는 모든 것이 멈추어진 상태에 머무르게 되나니, 멈춘 상태가 되지 못하는 것, 그것을 앉아서 치달린다고 한다.[瞻彼闋者 虛室生白 吉祥止止 夫且不止 是之謂坐馳]”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 순부선[順付船]우리나라의 표류민을 일본에서 별도로 보내주지 않고 사신편에 붙여 보내오던 일. 우리나라의 표류민이 일본 대마도에 정박하게 되면, 연례입송사(年例入送使) 편에 보내오게 되었는데 이를 순부선(順付船)이라 하고, 일본의 어느 주(州)에 정박했다가 대마도를 거쳐서 오게 되면, 별도로 차왜(差倭)를 정해서 보내왔으니 이를 표차왜별송사(漂差倭別送使)라 하였다.
♣ 순상[馴象]순상은 잘 길든 코끼리이다.
♣ 순상[舜裳]임금의 정치. 주역(周易) 계사하(繫辭下)에 “황제ㆍ요ㆍ순은 의상을 늘어뜨리고서 천하를 다스렸다.[黃帝堯舜垂衣裳而天下治]"라 하였음.
♣ 순생동[筍生凍]효성이 지극함을 말한다. 진서(晉書) 권94에에 “맹종(孟宗)의 어머니가 죽순을 좋아하였는데, 겨울이라서 죽순을 얻을 수 없으므로 대숲에 들어가서 슬피 탄식하니, 죽순이 돋아났다.” 하였다.
♣ 순서[馴犀]길들인 무소. 남방의 무소가 북방인 중국으로 와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죽었다는 것으로, 정치는 끝 마무리를 잘하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하여 읊은 시의 제목. 풍유(諷諭)에 보임.
♣ 순석[筍石]죽순 모양으로 뾰족뾰족하게 된 돌을 이름.
♣ 순선[旬宣]순선은 왕명을 사방에 선포하는 것으로, 감사(監司)의 직무를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강한(江漢)의 “임금님이 소호에게 명하시기를, 왕명을 두루 선포하라 하시다.[王命召虎 來旬來宣]”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순성[順性]법원(法苑) 주림(珠林)에 “진(晉)의 사문(沙門) 법상(法相)이 혼자 산사(山寺)에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을 때 온갖 조수(鳥獸)들이 측근에 모여들었는데, 그 성질이 온순하여 가축(家畜)과 같았다.” 하였다.
♣ 순수[純粹]깨끗하다.
♣ 순수[鶉首]순수는 별 자[星次]리 이름인데, 고대의 천문학으로 진(秦) 나라의 분야(分野)에 해당한다 한다. 순수는 마치 메추리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정수(井宿)에서 유수(柳宿)까지를 순수의 별 자리라 하는데, 진 나라의 분야이다. 이 때문에 관중(關中)을 순거(鶉居)라 한다.” 하였으며, 진서(晋書) 천문지(天文志)에는 “동정(東井) 16도에서 유수 8도까지가 순수인데 진 나라의 분야이며 옹주(雍州)에 해당한다.” 하였다.
♣ 순순[沌沌]남을 꾸준히 가르치는 모양, 일에 전일하는 모양
♣ 순순[恂恂]삼가고 삼가는 모양, 진실한 모양,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모양
♣ 순순[淳淳]순박한 일, 유동하는 모양, 조용히 흘러가는 모양
♣ 순순[徇徇]질서 바른 모양, 정연한 모양
♣ 순순[啍啍]정성스럽고 친절한 모양
♣ 순시[旬時]순시는 본디 성명(星名)으로 황천(皇天)의 이름이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대인부(大人賦)에는 “垂旬時以爲幓兮”라 하여, 순시를 깃발[幓]로 삼는다고 했다.
♣ 순씨[荀氏]순씨는 동한(東漢)때 영천(穎川)의 영음(穎陰)땅에서 순열(荀悅)ㆍ순욱(荀彧)ㆍ순숙(荀淑)ㆍ순상(荀爽)등 당대의 명사를 많이 배출한 순씨 집안을 말한다.
♣ 순악문래동솔무[舜樂聞來同率舞]순 임금의 신하인 전악관(典樂官) 기(夔)가 순 임금께 아뢰기를 “아, 제가 경(磬)을 치고 두드리니, 온갖 짐승들도 다 같이 춤을 추었습니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태평 성대를 의미한다. 《書經 益稷》
♣ 순양[純陽]여자와의 관계가 없는 총각의 양기. 도가(道家)에서는 순양을 보유하여야 도를 이룬다고 한다.
♣ 순양[荀楊]전국(戰國) 때의 순자(荀子)와 한(漢)나라의 양웅(楊雄)을 말하는데 이들은 유학(儒學)의 문장으로 유명하다.
♣ 순양전[循良傳]순리(循吏)ㆍ양리(良吏)의 전기.
♣ 순오냉연[旬五冷然]전국 시대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원하게 잘 지내다가 보름 만에야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逍遙遊》
♣ 순우곤[淳于髡]전국 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변사(辯士)로 학문이 깊고 넓어서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뒤에 양 혜왕(梁惠王)이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벼슬을 주려 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기(史記)
♣ 순우기[珣玗琪]순우기는 옥의 유임. 이아(爾雅)에 “東方之美者 有醫無閭之珣玗琪焉"이라 하였음.
♣ 순우분[淳于棼]옛날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 남쪽에 묵은 괴화나무[槐]가 있었는데 술에 취해 그 밑에 누웠다가 잠이 들어 꿈에 개미 나라인 괴안국(槐安國)에 이르러서, 개미왕에게 쓰임을 받아 대관(大官)이 되어 무려 20여 년 동안이나 부귀공명을 누렸으나 깨어 보니 꿈이었다는 고사로, 곧 세상일은 모두 꿈과 같다는 말이다. 《異聞集》
♣ 순우선생[淳于先生]순우곤(淳于髡)을 가리킴이니, 그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제(齊) 나라 사람으로, 변론에 능하고 익살도 잘 부렸다. 《史記 卷七十四》
♣ 순원[巡遠]당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병칭으로,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리 때 이들 두 사람이 힘을 합해 저양(雎陽)을 사수하여 후세에 이름을 드리웠다.
♣ 순원[淳源]순원은 순화(淳和)한 덕의 근원을 말한다.
♣ 순유[荀攸]순유는 삼국 시대 사람으로 일찍이 황문시랑(黃門侍郞)을 지내고 뒤에 조조(曹操)에게 부름을 받아 많은 공을 세우고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고, 능정후(陵亭侯)에 봉해졌다. 그는 특히 지모와 정략이 뛰어나, 조조가 일찍이 “순유는 비상한 사람이니, 내가 그와 국사를 꾀한다면 천하에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하였다. 《三國志 卷十 荀攸傳》
♣ 순유오일반[旬有五日反]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의 “열자의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다니다가 열 닷새가 지난 뒤에야 돌아왔다.”에서 나온 말이다.
♣ 순음[純陰]여섯 효(爻)가 다 음(陰)인 곤괘(坤卦)가 차지한 10월을 말한다.
♣ 순의수[舜衣垂]의수는 의상(衣裳)을 드리우는 것으로 덕치주의(德治主義)를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하(繫辭下)에 “황제(黃帝)와 요순(堯舜)이 의상을 드리우매 천하가 다스려졌다.” 하였다.
♣ 순일[盾日]조둔(趙盾)의 해란 뜻으로, 여름날의 뜨거운 해를 말한다. 춘추 시대 때 어떤 사람이 조둔과 조최(趙衰)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은가를 묻자, 가계(賈季)가 “조최는 겨울날의 해이고, 조둔은 여름날의 해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傳 文公 7年》
♣ 순자강[鶉子江]전라남도 곡성(谷城)에 있는 강.
♣ 순자격[循資格]당(唐) 나라 때의 전제(銓制)로서 인재의 현우를 따지지 않고 일정한 재직 연한에 따라 승급(昇級)시키던 제도이다.
♣ 순장부구[循墻俯傴]조심해서 처세함을 말함.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7년에 “담장을 따라 달려가면 누가 업신여기겠는가.” 했는데, 그 주에 “감히 편안하게 걷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 순전[舜典]순전은 서경(書經)의 편명.
♣ 순절[諄切]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의 “너를 진지하게 가르친다.[誨爾諄諄]"와 논어(論語) 자로(子路)의 “간곡히 권면한다.[切切偲偲]"의 합성어임.
♣ 순절치상호[順節嗤桑扈]군신(君臣)상하(上下)사이에 예절 지키는 것을 세상이 비웃음.”날아오고 날아가는 산비둘기의 그 깃이 곱기도 하여라.” 하여, 산비둘기가 그 깃이 곱기 때문에 날아가고 날아올 때 사람들이 그 새를 사랑하듯이 조정(朝廷)에서도 군신 상하 사이에 서로 예절과 품위를 지켜나간다면 온 세상이 그를 보고 즐거워하며 우러러보리라고 비유하였음. 《詩經 小雅 桑扈》
♣ 순정[舜庭]우순(虞舜)의 궁전 뜰로, 성군의 궁전을 뜻한다.
♣ 순제갱가[舜帝賡歌]서경(書經)에, “순(舜)이 신하들과 서로 노래를 지어 하답하였다.” 하였는데, 갱(賡)은 화답하는 것이다.
♣ 순진[荀陳]순숙(荀淑)과 진식(陳寔). 동한(東漢)때의 명사들로, 순숙의 여덟 아들과 진식의 여섯 아들이 모두 훌륭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덕망 있는 가문이나 훌륭한 형제를 이들에 비유하였다.
♣ 순찬[荀粲]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인 순찬(荀粲)은 부부의 정이 매우 돈독하여 일찍이 겨울에 부인이 열병을 앓자, 자신이 밖에 나가 냉기(冷氣)를 몸에 받아와서 부인의 열을 식혀 주곤 하였고, 부인이 죽자 그 또한 얼마 후에 죽었는데, 일찍이 세인들이 그가 아내에게 너무 빠진 것을 조롱하자, 그는 말하기를 “부인에게는 덕을 따질 것이 없고 의당 색(色)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 순찬상생[荀粲傷生]상생은 곧 생명을 잃었다는 뜻이다.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순찬(荀粲)이 부인(婦人)에 대한 애정이 매우 두터웠는데, 한겨울에 부인에게 열병(熱病)이 들자, 순찬은 밖에 나가 스스로 자기 몸을 차갑게 해가지고 와서 자기 몸으로 부인의 열을 식혀 주곤 하다가, 부인이 그 길로 죽은 뒤 순찬도 따라서 젊은 나이로 병들어 죽고 말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부인의 색에 빠진 그를 조롱하였다.
♣ 순찬포아[荀粲抱疴]순찬은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그는 조홍(曹洪)의 아름다운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수년 동안 화락하게 지내다가 그녀가 죽자, 그 역시 너무 애통해하다가 겨우 29세의 나이로 죽은 것을 말한다.
♣ 순척[舜跖]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의 병칭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행을 닦는 자는 순 임금의 무리요,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만 생각하는 자는 도척의 무리이다.[鷄鳴而起 孶孶爲善者 舜之徒也 鶴鳴而起 孶孶爲利者 跖之徒也]”라는 말이 있다.
♣ 순체[筍彘]한(漢) 나라 사람으로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을 따라 여러 번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벼슬이 좌장군(左將軍)에 이르렀다.
♣ 순치[馴雉]꿩을 길들이다. 지방관의 선정을 비유한 말. 후한(後漢) 때 노공(魯恭)이 중모령(中牟令)이 되어 선정을 베풀자, 뽕나무 밑에 길들은 꿩이 있는 상서가 있었던 데서 온 말이다. 후한 장제(章帝) 때에 각 지방의 벼가 멸구의 피해를 입었으나 노공(魯恭)이 수령으로 있는 중모(中牟) 지방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소문이 나자, 하남 윤(河南尹) 원안(袁安)이 감찰관 비친(肥親)을 보내 그 사실을 알아보게 하였다. 노공은 그를 맞아 함께 들길을 가다가 뽕나무 밑에 앉아 쉬고 있을 때 꿩이 날아와 그들의 곁에 앉았는데 때마침 아이가 함께 있었다. 비친이 아이에게 묻기를 “아이야, 왜 잡지를 않느냐?"하니, 아이가 “꿩은 지금 새끼를 데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비친은 깜짝 놀라 일어나서 노공과 작별하며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은 당신의 정사 현황을 살펴보려 한 것인데, 이제 보니 해충이 고을을 범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이적(異迹)이고, 교화가 새짐승에게까지 미친 것이 두 가지 이적이고, 어린아이가 어진 마음이 있으니 세 가지 이적입니다. 오래 머무르면 당신에게 폐만 끼칠 뿐입니다.” 하고, 돌아갔다 한다. 《後漢書 卷二十五 魯恭傳》
♣ 순치[脣齒]이 곳이 포위당하면 저 곳도 위험한 것이 마치 입술과 이와 같은 관계라는 것이다. 입술이 결단나면 이도 결단난다는 말이다.
♣ 순치지국[脣齒之國]이해관계가 밀접하여 입술과 이와의 관계같은 나라.
♣ 순칙부지식[順則不知識]요 임금이 민정을 살피기 위해 미복 차림으로 길거리에서 노닐다가 동요를 들었는데, 그 동요에 “우리 백성들이 존립(存立)한 것은 그대가 세운 표준의 덕이었네. 이의할 줄 모르고 황제의 법만 순종한다네.”라고 하였다. 《史略 卷 1》
♣ 순풍이호[順風而呼]바람이 부는 곳을 따라 소리를 지른다.
♣ 순해지[循陔志]어버이를 봉양하면서 지내려 했다는 말이다. 가사가 없어진 시경(詩經) 소아(小雅) 남해(南陔)의 보망시(補亡詩)에 “남쪽 섬돌을 따라 올라가, 난초 캐어 어버이께 바쳐 올리리.[循彼南陔 言采其蘭]”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 순해환유채란편[循陔還有采蘭篇]어버이에 대한 봉양도 잘 할 수 있으리라는 말이다. 가사가 없어져버린 시경(詩經) 소아(小雅) 남해(南陔)의 시를 진(晉) 나라 속석(束晳)이 보완하여 만들었는데, 거기에서 “남쪽 밭두둑 따라 난초를 캐네. 어버이 생각할 적마다 마음이 왜 이리 설레는지.[循彼南陔 言采其蘭 眷戀庭闈 心不遑安]”라고 하였다.
♣ 순화[順和]시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은 ‘그대로 화답한다.’는 뜻으로 ‘순화’라 하였다.
♣ 순회세자[順懷世子]순회세자는 명종(明宗)의 아들로, 명종 12년(1557)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호군(護軍) 윤옥(尹玉)의 딸과 가례(嘉禮)를 올렸는데,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보지 못한 채, 계해년인 명종 18년(1563)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 순효일심절[舜孝一心切]서경(書經)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순 임금은, 아버지는 완악하고 후모(後母)는 어리석었으나, 능히 효도로써 화동케 하며 잘 다스려서, 간악한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는 대목을 인용한 말이다.
♣ 순효칭봉인[純孝稱封人]봉인(封人)은 국경을 맡은 관직으로 춘추 시대 정(鄭)의 봉인 영고숙(穎考叔)을 가리킨다. 정 장공(鄭莊公)은 어머니 무강(武姜)과 사이가 나빴는데, 아우태숙단(太叔段)을 시켜 반란을 도모하자 장공은 “어머니와는 황천(黃泉)에서나 만나겠다.” 하고는 결별을 선언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영고숙은 장공을 찾아가 풍간하여 마침내 모자간의 정의를 되찾게 했으므로 군자들은 “영고숙은 순수한 효도이다. 그 어머니를 사랑하여 장공에게까지 미쳤다.[穎考叔 純孝也 愛其母 施及莊公]" 하였다. 《春秋左傳 隱公 元年》
♣ 술랑[述郞]신라 효소왕(孝昭王) 때의 화랑으로, 이른바 사선(四仙)의 하나이다. 남랑(南郞), 영랑(永郞), 안상(安詳)과 함께 총석정(叢石亭)에서 노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삼일포(三日浦)에는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석각(石刻)이 있다고 한다.
♣ 술수화룡신칭섭[術邃畫龍神稱葉]춘추 시대 초(楚) 나라 섭공 자고(葉公子高)가 용을 좋아하여 실내(室內)에다 여기저기 용을 그려 붙여 놓으니, 참으로 천룡(天龍)이 그 소문을 듣고 내려와 실내에까지 들어왔다는 고사이다. 즉 섭공의 그림 솜씨가 그처럼 신기했다는 말이다.
♣ 숭강[崇岡]시경(詩經) 주남(周南) 권이(卷耳)에 “저 높은 묏부리에 오르려 하나 내 검은 말이 병들어 누렇게 되었으니 내 우선 저 뿔잔에 술을 부어 길이 서글퍼 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 숭고길보[嵩高吉甫]시전(詩傳)에 있는 숭고(嵩高)장을 말함이니, 윤길보(尹吉甫)가 지은 시로서 방숙(方叔)과 소호(召虎)의 무공을 찬양한 시이다.
♣ 숭구[嵩丘]중국 오악(五嶽) 가운데 중악(中嶽)으로 불리는 숭산임.
♣ 숭란[崇蘭]높은 지대에 나서 자란 난초를 말함.
♣ 숭문관[崇文館]숭문관(崇文館)은 위(魏) 나라 명제(明帝)가 글 잘하는 문사(文士)들을 모아서 거처시킨 집이다.
♣ 숭반[崇班]숭반은 고위 관원의 반열을 뜻한다.
♣ 숭백[崇伯]서경(書經) 순전(舜典)의, “백우가 사공이 되다[伯禹作司空].”에 대한 그 주에, ‘우(禹)가 곤(鯀)을 대신하여 숭백(崇伯)이 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서 천자의 사공(司空)이 되어 홍수를 다스려 공이 있었다.’ 하였음.
♣ 숭산[嵩山]숭산은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임.
♣ 숭선[嵩善]선산(善山)의 옛 이름이다.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고향이다.
♣ 숭숭[崇崇]높은 모양
♣ 숭악[嵩嶽]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산으로 오악(五嶽)의 하나인데, 고대(高大)하다는 뜻이다.
♣ 숭악신인[嵩嶽神人]숭악의 신인(神人)이란 곧 위대한 인물을 가리킴.
♣ 숭안책[崇安策]송 효종(宋孝宗) 건도(乾道) 4년, 건녕부(建寧府)에 흉년이 들었을 때, 주희(朱熹)는 당시 숭안현(崇安縣) 개료향(開耀鄕)에 있으면서 지현(知縣)에게 청하여 기근(飢饉)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그 곳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게 했던 것을 말한다.
♣ 숭양[嵩陽]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을 일명 숭양첩이라고도 함.
♣ 숭인전[崇仁殿]평양에 있는 기자(箕子)의 사당으로 단군(檀君)의 사당인 숭령전(崇靈殿)과 공자의 사당 사이에 있다.
♣ 숭정년간사[崇禎年間事]명이 멸망한 일. 숭정은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의종말에 이자성(李自成)이 명 나라 서울을 함락하자 황제는 자살하고 청(淸)이 들어섰다.
♣ 숭호[嵩呼]신민(臣民)이 천자의 만세(萬歲)를 부르는 일. 한 무제(漢武帝)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서 호숭(呼嵩)ㆍ산호(山呼)라고도 한다.
♣ 숭화[嵩華]중국의 숭산(嵩山)과 화산(華山). 여기서는 나라의 국운이 숭산과 화산처럼 우뚝하고 장구하길 빈다는 뜻으로 쓰였다.
♣ 슬갑도적[膝甲盜賊]남의 시문(詩文)을 표절하여 쓰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 슬관[蝨官]간악한 관리를 비유한 말. 관(官)의 폐해를 이[蝨]에 비유해서 이른 말이다.
♣ 슬관[蝨貫]활을 아주 잘 쏘는 것을 말한다. 기창(紀昌)이란 사람은 비위(飛衛)에게 활 쏘는 법을 배웠는데, 이를 실에 매달아 놓고 쏘면 화살이 이의 심장을 꿰뚫어 이가 실에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列子 湯問》
♣ 슬슬[瑟瑟]푸른 색깔의 구슬 이름.
♣ 슬하왕문도[膝下王文度]왕문도는 진(晋) 나라 왕탄지(王坦之)의 자(字)이다. 그의 아버지 왕술(王術)이 아들을 사랑하여 아들이 자란 뒤에도 무릎 위에 앉게 하였다.
♣ 슬해[瑟海]슬해는 바다 이름이다.
♣ 습[襲]밀려오다.
♣ 습[隰]지대가 낮고 습한 곳.
♣ 습[拾]습은 가죽으로 만든 팔싸개로서 활을 쏠 때 왼쪽 팔에 붙여 팔을 보호하는 기구이다.
♣ 습가지[習家池]호북성(湖北省) 현산(峴山)의 남쪽에 있는 못으로, 이곳의 토호(土豪)인 습씨(習氏)들의 원지(園池)인데, 고양지(高陽池)라고도 한다. 진(晉) 나라 때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을 맡고 있으면서 이곳에 와 술을 마시면서 놀았다고 한다. 진서(晉書) 산도열전(山濤列傳) 산간(山簡)에 “여러 습씨는 형양(荊襄) 지방의 호족(豪族)으로 아름다운 동산과 못을 가지고 있었는데,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을 진수할 때 늘 그곳에 나가 노닐며 술을 마셔 취하곤 했다.” 하였다.
♣ 습가지[習家池]후한(後漢) 습욱(習郁)이 현산(峴山) 남쪽에 범려(范蠡)의 양어법(養魚法)에 의해 못을 만들고 못 언덕에 대나무ㆍ부영 등을 심어 놓았는데, 진(晉)의 산간(山簡)이 이 못에 와서 술이 취할 적에는 으레 “이는 나의 고양지(高揚池)이다.” 외쳤다.
♣ 습가촌풍류[習家村風流]마을의 술자리에 참석해서 흠뻑 취해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에 있을 때, 그 지방의 호족(豪族)인 습씨(習氏)네 집 연못가를 자주 찾아가 술을 마시곤 번번히 만취해서 부축을 받고 돌아온 고사가 있는데, 이른바 습가지(習家池)를 고양지(高陽池)라고도 한다. 《晉書 山簡傳》
♣ 습감[習坎]험난함이 중첩된 것을 이름. 주역(周易) 감괘(坎卦)에 “습감은 신실함이 있어 마음으로 형통한다.[習坎有孚 維心亨]”하였다.
♣ 습기[習氣]물(物)ㆍ심(心)의 온갖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이른다.
♣ 습등선사[襲燈禪師]습등선사는 당(唐) 나라 등주(鄧州) 향엄산에 있던 지한선사(智閑禪師)의 시호인데, 법화(法化)가 성대하였다 한다.
♣ 습례조벌수[習禮遭伐樹]공자가 조(曹) 나라를 떠나서 송(宋) 나라로 갔는데, 큰 나무 아래에서 예를 익히다가 송 나라의 사마환퇴(司馬桓魋)가 죽이려고 그 나무를 자르자 떠나갔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 습매진[拾煤塵]공자가 진(陳) 채(蔡) 사이에서 곤궁한 상황에 처했을 때, 안회(顔回)가 쌀을 얻어 밥을 짓던 중에 재가 솥 안으로 들어가자 이것을 버리기가 아까워 손으로 집어먹었는데[拾塵], 이 행동이 몰래 밥을 훔쳐먹는 것으로 오인(誤認)되어 의심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呂氏春秋 卷17 審分覽 任數》
♣ 습수임류[拾穗林類]임류(林類)라는 사람이 나이 백세가 되었는데, 밭고랑에서 떨어진 벼이삭을 주우면서 노래를 하므로, 자공(子貢)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생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이 가며 노래하며 이삭이나 줍고 계십니까?”하였으나, 임류는 계속 가면서 노래를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天瑞》
♣ 습씨가[習氏家]진(晉) 나라 습욱(習郁). 그의 저택과 정원이 화려했고 특히 양어지(養魚池)가 있어 습가지(習家池), 일명 고양지(高陽池)로 유명했다.
♣ 습요[습燿]반딧불의 별칭임. 시경(詩經) 빈풍(豳風) 동산(東山)장에 “燿燿宵行”이라 하였음.
♣ 습유[拾遺]관명(官名)으로,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 습유귀부강[拾遺歸涪江]습유는 당 나라 때 우습유(右拾遺)를 지낸 진자앙을 가리키며, 부강(涪江)과 금화산(金華山)에 그가 독서하던 학당(學堂)이 있었다.
♣ 습유기[拾遺記]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후진(後秦)의 왕가(王嘉)가 지은 책으로 모두 10권임.
♣ 습유보궐[拾遺補闕]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 습유석호[拾遺石壕]두 습유는 당(唐) 나라 때 우습유(右拾遺)를 지낸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키고, 석호(石壕)는 두보가 지은 시편(詩篇)의 이름인 석호리(石壕吏)의 준말로, 이 시는 두보가 석호 마을을 지나다가 이 마을의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벼슬아치를 보고 그 정상을 읊은 것이다.
♣ 습재[習齋]권벽(權擘)의 호이다.
♣ 습주부[習注簿]진(晉) 나라의 습착치(習鑿齒)를 말한다.
♣ 습지[習池]습가지(習家池)의 준말로 일명 고양지(高陽池)라 한다. 진(晉) 나라 산간(山簡)이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을 때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와서 술을 마시고 갔다 한다.
♣ 습지[習之]습지(習之)는 당(唐) 나라 때 유학자(儒學者)인 이고(李翶)를 말하는데, 고승(高僧)인 유엄선사(惟儼禪師)와는 승(僧)과 속(俗)의 차이가 있었지만 유독 친했다 한다.
♣ 습지풍류[習池風流]술과 음식을 가지고 호수에 나가 배 위에서 마음껏 취하고 노닐다 오는 풍취를 말한다. 진(晉) 나라 산간(山簡)이 양양(襄陽)에서 호족(豪族)인 습씨(習氏) 집안의 연못[習家池] 위에 배를 띄우고 술마시며 노닐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蒙求 上 山簡倒載》
♣ 습착치[習鑿齒]습착치는 진(晉)의 문장가이다. 당서(唐書) 두심언전(杜審言傳)에 “나의 문장은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을 잡아다가 아관(衙官)으로 삼을 수 있다.” 하였다.
♣ 승가굴[僧伽窟]서울 삼각산에 있는데, 신라 중 수태(秀台)가 바위를 뚫고 굴을 만들었다.
♣ 승강왕래[升降往來]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영허(盈虛)ㆍ소식(消息)과 승강ㆍ왕래하는 이치를 이른 말이다.
♣ 승개[勝槪]훌륭한 경치
♣ 승건지세곤[承乾地勢坤]주역(周易) 곤괘(坤卦) 상(象)에 “지세가 곤이다.[地勢坤]”하였는데, 그 내용은 즉 지형(地形)은 방직(方直)하므로 불순(不順)하나, 그 형세는 하늘을 받듦으로 이것이 곧 순(順)이라는 것이다.
♣ 승겁해[僧劫解]혼례를 치른 신부가 사흘 저녁을 도승(道僧)과 잔 뒤에 신랑과 비로소 동침(同寢)하는 것을 말한다.
♣ 승견책비[乘堅策肥]튼튼한 수레를 타고 살찐 말에 채찍질을 함.
♣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이 시구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음. 어느 날 가도는 서울에서 나귀를 타고 가면서 고심 끝에 이 시를 지었는데, 처음에는 고(敲)자를 퇴(推)자로 쓰려 하였다. 그러나 퇴자가 나은지 고자가 나은지를 선뜻 결정치 못하고 열심히 생각하며 가다가, 당시 경조윤(京兆尹) 한유(韓愈)의 수레와 충돌하였다. 한유는 그를 힐책하였더니, 가도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한유는 고자가 좋겠다 말하고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시를 논하였다 함.
♣ 승교지[昇橋志]사마상여가 서촉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향할 때에 성도(成都) 북쪽의 승선교(昇仙橋)를 지나면서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不乘赤車駟馬 不過汝下]”라고 다리 기둥에 글을 써 붙였던 고사가 있다.
♣ 승기[承旗]깃발을 세우다.
♣ 승기[乘箕]은(殷) 나라 재상(宰相)부열(傅說)은 죽은 뒤에 기성(箕星)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 한다.
♣ 승납[僧臘]승(僧)이 수계(受戒)를 받은 뒤의 햇수를 말한다.
♣ 승당[升堂]벗을 친하게 사귀면 당(堂)에 올라 친구의 어머니에게 절하고 뵙는다.
♣ 승당[升堂]자로(子路)를 가리킨다. 당에 올랐다는 것은 학문이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로, 공자가 자로에 대해서 평하기를, “유(由)는 당에는 올랐고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하였다. 《論語 先進》
♣ 승두[升斗]남아 있는 술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달이 벌써 떴는데도 못 가게 막으면서, 술 얼마나 남았는지 큰 소리로 물어 보네.[月出遮我留 仍嗔問升斗]”라는 표현이 있다.
♣ 승두자[蠅頭字]승두자는 잘게 쓴 글씨를 말하며 자질구레한 이욕을 승두라고한다.
♣ 승두표[蠅頭表]파리 머리 만한 글씨로 쓴 표. 남사(南史) 제형양왕균전(齊衡陽王鈞傳)에 “균이 일찍이 오경(五經)을 잘게 써서 상자 속에 두었다. 시독(侍讀) 위개(衛玠)가 ‘무엇 때문에 파리 머리만한[蠅頭] 잔 글씨를 쓰는가?’ 물으니 ‘한 번 내 손으로 쓰면 길이 잊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는 말이 있다.
♣ 승란[乘鸞]사람의 죽음을 가리켜 한 말이다.
♣ 승로반[承露盤]승로반은 이슬을 받는 소반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일찍이 신선(神仙)이 되기 위하여 구리로 승로반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20장(丈)이나 되고 크기는 열 아름이나 되었다. 맨 꼭대기에 선인장(仙人掌)이 있어 이것으로 이슬을 받아 마시고 선술(仙術)을 익혔다는 고사이다. 《漢書 卷二十五 郊祀志上》
♣ 승로반[承露盤]이슬을 받기 위해 만든 동반(銅盤)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가 신선술에 미혹되어 감로를 받아 마셔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건장궁(建章宮)에 신명대(神明臺)를 세우고 동으로 선인장(仙人掌) 모양을 만들어 세워 동반(銅盤)을 떠받치고서 감로를 받게 하였다.
♣ 승로사랑[承露絲囊]명절 선물을 가리킨다. 당(唐) 개원(開元) 17년 현종(玄宗)의 생일날에 백관이 승로사랑을 바쳤는데, 이후로 민간에서도 이를 본받아 명절 때 예물을 주고받게 되었다 한다. 《封氏聞見記 降誕》
♣ 승룡[乘龍]용과 같은 훌륭한 사위를 얻은 것을 말한다. 옛날 황헌(黃憲)과 이 응(李膺)이 함께 태위(太尉) 환언(桓焉)의 딸에게 장가들매, 그때 사람이 이르기를 환 숙원(桓叔元)의 두 딸이 다 용을 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다.《楚國先賢傳》 두보(杜甫)의 시에 “사위가 용을 탄 듯이 훌륭하구나[女婿近乘龍].” 하였다.
♣ 승룡제[乘龍帝]황제(黃帝)를 가리킨다. 방술사(方術士) 공손경(公孫卿)이 한 무제(漢武帝)를 유혹하면서 “지금 보정(寶鼎)을 얻은 것은 황제(黃帝)의 일과 비슷하다. 황제가 봉선(封禪)을 행한 뒤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어 형산(荊山)에서 솥을 만들었는데 그때 용이 내려와 황제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요지의 말을 하였다. 《史記 卷28》
♣ 승류[承流]임금의 풍화(風化)를 받아서 백성들에게 펴는 것을 말한다.
♣ 승리[丞吏]장관을 보좌하는 관리.
♣ 승만[丞慢]한유(韓愈)의 ‘남전현승청벽기(籃田縣丞廳壁記)’에 “속담에 법도가 허술하면 언필칭 승이라고 하면서, 서로 흉보며 중얼거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諺數慢必曰丞 至以相訾謷]”는 말이 나온다.
♣ 승명[承明]승명은 한(漢) 나라 때 시종신(侍從臣)의 입직소(入直所)였던 승명려(承明廬)의 준말이다. 《漢書 嚴助傳》
♣ 승명려[承明廬]한(漢) 나라 때 천자의 노침(路寢)인 승명전(承明殿) 옆에 딸려 있던 집으로, 시종신(侍從臣)들이 직숙(直宿)하던 곳이다. 후대에는 조정에 들어가거나 조정에 있는 관원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승명전[承明殿]한(漢) 나라 미앙궁(未央宮)의 전각 이름으로 시신(侍臣)들이 숙직했던 곳이다.
♣ 승모리[勝母里]승모(勝母)는 마을 이름인데, 그 글자가 어머니를 이긴다는 뜻이므로 증삼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사기(史記) 추양전(鄒陽傳)에 “옛날에 고을 이름이 승모라 하자 증자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 승묵[繩墨]대목이 나무를 바로잡는 먹줄인데, 사람의 행동하는 바를 준칙에 비유한 것이다. 法, 法度, 準則.
♣ 승미[僧彌]승미는 진(晉) 나라 때 왕민(王珉)의 소자(小字). 왕민이 어려서 재주가 뛰어나 자기 형인 왕순(王珣)보다 이름이 높았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법호(法護 왕순의 소자)도 훌륭하기는 하지만, 승미의 형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하였다.
♣ 승복잔고[賸馥殘膏]원미지(元微之)가 두보의 시를 칭찬하며, “남은 기름과 남은 향기가 후세의 시인에게까지 혜택을 준다.” 하였다.
♣ 승부[乘桴]잘못된 세상을 탄식하며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는다. 나는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서 가리라.[道不行 乘桴 浮于海]”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승부사[乘桴事]난세(亂世)에 뜻을 얻지 못한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 볼까 한다.”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승부수[乘桴叟]공자(孔子)를 말함.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도(道)가 실현이 안 될 모양이니 떼를 타고 바다에나 뜨리라”하고, 공자가 말하였음.
♣ 승부옹[乘桴翁]뗏목을 탄 늙은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도를 실행할 수 없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고 싶다.”고 하였다. 《論語 公冶長》
♣ 승부지[乘桴志]떼를 타려는 뜻.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떼를 타고 바다로 떠가련다.[乘桴浮于海]" 하였다.
♣ 승부창해중[乘桴滄海中]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천하가 어지러움을 탄식하여, “도가 행해지지 않는구나.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리니, 나를 따를 이는 유(由)일 것이다.” 하였다.
♣ 승사[勝事]빼어난 일. 볼만한 일. 아름답고 좋은 사정. 흔히 뜻에 맞는 사람들과 경치 좋은 곳에서 술자리를 갖는 것을 뜻한다.
♣ 승사[乘槎]임금의 명을 받들고 외방으로 나갔다는 뜻이다.
♣ 승사[乘査]한(漢) 나라 장건(張騫)이 떼를 타고 은하(銀河)에 갔었다는 전설이 있다.
♣ 승사욕문천손사[乘槎欲問天孫梭]천손은 직녀(織女)를 가리킨다. 한 나라 때 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가서 직녀를 만났다고 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무제(武帝)가 장건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槎]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 승사천한[乘槎天漢]한 나라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면서 뗏목을 타고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았다고 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무제가 장건으로 하여금 대하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槎]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 승사한사[乘槎漢使]한(漢) 나라 때 서역(西域)의 무역로(貿易路)를 개척한 장건(張鶱)을 가리킨다.
♣ 승상[繩床]새끼줄을 맨 의자를 말한다.
♣ 승선[承宣]승선은 승지의 별칭이다.
♣ 승섭[僧涉]전진(前秦)의 고승. 서역(西域) 사람으로 부견(苻堅) 때에 장안(長安)에 들어와 미래를 예언했었는데 많이 맞았으며, 또 주축(呪祝)으로 비를 내리게 하였다. 《晉書 僧涉傳》
♣ 승승[承承]자손이 차례차례로 이어받아 전함
♣ 승승장구[乘勝長驅]싸움에서 이긴 기세를 타고 계속 적을 몰아침.
♣ 승시[乘矢]네 개가 한 묶음으로 된 화살을 말한다.
♣ 승심간서배[升沈看鼠輩]쥐새끼는 명리와 세력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말이다. 곧 세상의 험로에 명리와 세력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한때 영광을 누리다가 다시 몰락하는 일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 승여[乘輿]천자의 수레. 천자는 지존이라 신하가 감히 모독하여 말할 수 없으므로 승여라 칭탁하여 말함. 당률(唐律) 직제(職制)에 “指斥乘輿 情理切害者斬”이라 했음.
♣ 승영영[蠅營營]시경(詩經)에 “앵앵 날아다니는 청승, 울타리에 앉았도다.[營營靑蠅 止于樊]"의 인용으로, 아첨하는 소인들을 파리떼에 비유한 것이다. 《詩經 小雅 靑蠅》
♣ 승운[承雲]황제의 음악.
♣ 승전[乘田]승전은 춘추 시대 노(魯) 나라에서 가축(家畜) 사육을 맡던 직임으로 미관말직을 뜻한다.
♣ 승전[乘傳]역마
♣ 승전위리[乘田委吏]승전은 춘추시대에 노(魯) 나라에서 가축(家畜)의 사육(飼育)을 맡은 벼슬아치이고 위리(委吏)는 창고를 맡은 벼슬아치로, 모두 하찮은 낮은 벼슬이다. 성인(聖人)은 곧 공자를 가리킨 것인데, 맹자(孟子) 만장 하에 “공자가 일찍이 위리가 되어서는 ‘회계(會計)를 정확하게 할 뿐이다.’ 하였고, 승전이 되어서는 ‘우양(牛羊)을 살찌게 잘 기를 뿐이다.’ 했다.” 한 데서 온 말로, 공자 같은 성인도 가난을 해소하기 위해 벼슬하면서, 그런 낮은 직위에 있었지만 조금도 불만 없이 직무에 충실했다는 뜻이다.
♣ 승정종명후[僧定鍾鳴後]불교의 의례(儀禮)나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참선에 매진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보통 아침 저녁 예불하기 직전에 금고(金鼓)를 치면서 진언(眞言)을 외우고 장엄염불(莊嚴念佛)을 하는데, 이 동안에 법복(法服)을 입고 예불할 준비들을 한다.
♣ 승제[乘除]수학상의 용어인 곱하기와 나누기인데, 곱하면 득(得)이 되고 나누면 실(失)이 되므로, 전하여 영고 성쇠(榮枯盛衰)의 뜻으로 쓰인다.
♣ 승제[乘除]인사(人事)의 소장(消長), 성쇠(盛衰), 영허(盈虛)를 가리킨다. 참고로 송(宋) 나라 육유(陸游)의 시 ‘견흥(遣興)’에 “寄語鶯花休入夢 世間萬事有乘除”라는 구절이 있다.
♣ 승제익보[承帝翼輔]구루비(岣嶁碑)의 본문임.
♣ 승진[承塵]먼지를 받아 내는 작은 장막.
♣ 승천척지[升天拓地]황제(黃帝)가 봉선(封禪)을 행하고 보정(寶鼎)을 만든 뒤 용을 타고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와 한 무제가 서역(西域)을 개척한 고사를 말한다.
♣ 승청총[乘靑驄]한 나라 때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史)에 제수되어 당시에 국정을 농단하던 환관(宦官)들을 조금도 꺼리지 않고 탄핵하였는데, 항상 청총마를 타고 다녔으므로 경사(京師) 사람들이 모두 “길을 가다가 청총마를 보면 피해 가라.” 하였다. 《後漢書 卷37 桓典列傳》
♣ 승체[陞遞]벼슬아치가 승진으로 인하여 체직되는 일.
♣ 승총[乘驄]승총어사(乘驄御史)의 준말로, 곧 어사(御史)의 별칭. 후한(後漢)의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총마(驄馬)를 타고 다닐 때 처사(處事)가 매우 엄정하였기 때문에 간인(奸人)들이 항상 총마어사(驄馬御史)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문자이다. 《後漢書 桓典傳》
♣ 승추[繩樞]승추는 기둥에 노끈으로 지도리를 매단 문으로 가난한 집을 가리킨다.
♣ 승통[僧統]승통은 고려 시대 승위(僧位)의 제1품계이다.
♣ 승패와양각[勝敗蝸兩角]달팽이의 두 뿔에 있는 만(蠻)ㆍ촉(觸)의 두 나라가 서로 싸웠다는 고사로서, 이기고 지는 것 모두가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서 부질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莊子 則陽》
♣ 승평[昇平]김류(金瑬)의 봉호(封號)이다.
♣ 승평[昇平]승평은 전라도 순천(順天)의 별칭이다. 신라 통일 후에 바뀐 순천의 옛 이름.
♣ 승평공[昇平公]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를 말한다.
♣ 승평부[昇平府]승평은 순천(順天)의 옛 이름이다.
♣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김류(金瑬)의 봉호(封號)이다.
♣ 승평악곡[昇平樂曲]원제는 만세승평악곡(萬歲昇平樂曲)으로서 송(宋) 나라 이덕승(李德昇)이 지었음.
♣ 승풍[承風]풍도를 받들다.
♣ 승핍[承乏]승핍이란 말은 없다는 말인데, 사람이 없으므로 라는 말이 된다.
♣ 승학[升學]조선시대 서울에 있던 교육기관인 남(南)ㆍ중(中)ㆍ동(東)ㆍ서(西)의 사학(四學)에서 성균관(成均館)으로 승보(升補)된 자를 이름.
♣ 승학진[乘鶴晉]학을 탄 왕자진(王子晋).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 진(晋). 피리를 잘 불어 후령(緱嶺)에서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列仙傳》
♣ 승헌위국[乘軒衛國]춘추시대에 위(衛) 나라 임금 의공(懿公)이 학을 사랑하여 대부의 관작을 주어 헌거(軒車)를 태운 일이 있었다.
♣ 승환[承歡]임금의 환심을 사다.
♣ 승황[乘黃]승황은 용 날개가 달리고 황제(黃帝)가 타고서 신선 세계로 올라갔다는 전설상의 신마(神馬) 이름으로, 어마(御馬)를 가리킨다.
♣ 승회어[承誨語]가르침의 말씀을 받들다.
♣ 승흥[乘興]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눈발이 그치고 달이 청랑하게 빛나는 밤, 친구인 대규(戴逵)가 홀연히 생각나서 대규의 집 앞에까지 작은 배를 저어 갔다가 그냥 돌아온 뒤에, “흥취에 편승해서 찾아갔다가 흥취가 다했기에 그냥 돌아왔다.[乘興而來 興盡而返]”고 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任誕》
♣ 승흥거[乘興去]진(晋) 나라 왕자유(王子猶)가 산음(山陰)에 있었는데, 설월(雪月)이 밝은 밤에 문득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안도(戴安道)를 생각하고 배를 저어 찾아가서 새벽에 그 집 문 앞까지 갔다가는 다시 배를 돌렸다. 사람들이 물은즉 “흥(興)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하매 돌아왔다. 하필 안도(安道)를 보아야 하느냐.” 하였다.
♣ 승흥심안도[乘興尋安道]진(晉)나라 왕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에 있을 때에 밤에 설월(雪月)이 밝은 것을 보고 문득 흥이 나서, 섬계(剡溪)에 있는 대안도(戴安道)를 생각하고 밤새도록 배를 저어 가서, 그 집 문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이 물으니 답하기를, “흥을 타서 왔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가는 것이지, 하필 안도를 보아야 하는가.” 하였다.
♣ 시가조회[詩家藻繪]조회(藻繪)는 문채(文彩)이니, 시가들이 쓰는 시의 문채.
♣ 시가증광[詩家增光]시가들이 광채를 증가시킴.
♣ 시각해배수[始覺海杯殊]국량이 크고 작음이 있으니 얕은 식견(識見)으로는 큰 것을 헤아릴 수 없음을 알았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동방삭전(東方朔傳)에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린다.[以蠡測海]" 한 말에서 비롯한 것이다.
♣ 시강[時康]시경(詩經)에, 순(舜)의 정치를 말할 때에 시(時)와 강(康)이라 하였는데, 시(時)는 때에 순(順)한다는 뜻이요, 강(康)은 평안하다는 뜻이다.
♣ 시개선아영점점[時開鮮雅詠蔪蔪]아(雅)는 시의 한 체(體)이니 선아(鮮雅)는 조선(朝鮮)의 아(雅)란 뜻이며, 맥수(麥秀)는 보리 이삭이고 점점(蔪蔪)은 무성하다는 뜻으로 점점(漸漸)으로 쓰기도 한다. 기자는 뒤에 주 나라에 가서 멸망한 은(殷) 나라의 옛 도읍터에 벼와 보리가 무성함을 보고 슬퍼하여 맥수가(麥秀歌)를 지었는데, 여기에 “맥수가 점점함이여! 벼와 기장이 성하네.” 하였다. 《史記 卷三十八 宋微子世家》이 노래가 우리나라의 아(雅)가 됨을 말한 것이다.
♣ 시거[柴車]장식(裝飾)이 없는 수레. 전하여 나쁜 수레, 쓸모 없는 수레를 말한다.
♣ 시거안[試據鞍]마원(馬援)이 처음에 무계(武溪)의 만족(蠻族)을 토벌하러 가려 하매 광무제(光武帝)가 늙었다고 어렵게 여기니, 마원이 말에 올라 안장을 걸터타면서 기력이 쇠하지 아니한 것을 보였다.
♣ 시겹[兕韐]물소 가죽에 붉게 물들인 군복.
♣ 시경[詩境]옹방강의 서실 이름인 시경헌(詩境軒)을 이름. 시경 두 글자는 옹방강이 육유(陸游)의 친필을 탁본하여 서실에 걸었으므로 칭한 것임.
♣ 시경헌[詩境軒]시경헌은 옹방강의 서실 이름. 시경(詩境) 두 글자는 육유(陸游)의 글씨를 탁본하여 서실에 걸었으므로 인하여 이른 것임.
♣ 시골수생[詩骨瘦生]이백(李白)의 희증두보시(戲贈杜甫詩)에 “借問形容何瘦生 袛爲從前學詩苦”라는 구절이 있다.
♣ 시관만촉[試觀蠻觸]명리(名利) 다툼을 하는 속세의 실상을 한번 여실히 돌이켜 살펴보라는 말이다. 달팽이의 왼쪽과 오른쪽 뿔에 있는 만(蠻)과 촉(觸)이라는 나라가 서로 쟁탈전을 벌인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측양(則陽)에 실려 있다.
♣ 시굉[兕觥]외뿔소의 뿔로 만든 술잔인데, 옛날에 특히 벌주(罰酒)를 따르는 데에 쓰였다고 한다.
♣ 시구[鳲鳩]시구는 뻐꾸기인데, 시경(詩經) 조풍(曹風) 시구(鳲鳩)에 “뻐꾸기가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가 일곱이로다” 한 데서 온 말로, 많은 자식들을 자애로써 잘 기른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시구심균[鳲鳩甚均]뻐꾸기는 여러 새끼를 균평하게 잘 먹여 기른다는 데서 온 말이다. 《詩經 曹風 鳲鳩》
♣ 시구편[鳲鳩篇]시경(詩經)의 편 이름. 군자(君子)의 마음이 전일하고 공평무사한 것을 찬미한 시.
♣ 시구혜[鳲鳩惠]시구는 여러 새끼들을 골고루 잘 기른다는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곧 자식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이른 말한다.
♣ 시구혜균[鳲鳩惠均]시구는 뻐꾸기인데, 뻐꾸기는 본디 새끼를 잘 기르는 인애(仁愛)함이 있다 하여, 시경(詩經) 조풍(曹風) 시구(鳲鳩)에 “뻐꾸기가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가 일곱이로다[鳲鳩在桑 其子七兮]”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윗사람의 마음씀이 균평하고 전일함을 비유한 것이다.
♣ 시귀[蓍龜]시귀는 시초와 거북인데, 모두 옛날 점을 치는데 사용되었으므로, 국가에 어려운 일이 있을 경우 자문하여 결정하는 대상임을 말한 것이다.
♣ 시금[時禁]당시 금령.
♣ 시금여석[視金如石]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함. 지나친 욕심을 절제함. 견금여석(見金如石)
♣ 시기취[詩旣醉]시경의 기취(旣醉). 귀족들의 태평 주연(酒宴)의 노래인데, 이 노래에, “술이 이미 취했는데, 또 덕으로 배불리네.[旣醉以酒 叉飽以德]”라는 구절이 있다.
♣ 시남[市南]상고 때 초(楚) 나라의 고사(高士) 웅의료(熊宜僚)가 살았던 저자의 남쪽으로, 은자가 사는 곳을 뜻한다. 《莊子 山木》
♣ 시남[市南]춘추 시대에 초(楚) 나라의 용사(勇士) 시남웅의료(市南熊宜僚)가 초 나라와 송(宋) 나라와의 전쟁 때에 군전(軍前)에서 가슴을 열어젖히고 칼을 받으면서, 구슬 9개를 가지고 8개는 계속 공중에 띄워 올리고 1개는 손에 쥔 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교묘하게 잘 놀리자, 일군(一軍)이 그것을 보고는 싸움을 정지함으로써 송 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는 고사가 있다. 《莊子 徐無鬼》
♣ 시내경지파[詩乃經之葩]시경(詩經)은 내용이 꽃봉오리처럼 아름답다 한다.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시경(詩經)은 바르고 꽃봉오리와 같다.[詩正而葦]" 하였다. 이 때문에 시경(詩經)을 ‘파경(葩經)’이라고도 한다.
♣ 시능송[詩能誦]시(詩) 3백 편을 외우면 가히 사신(使臣)이 되어 외국에 가서 응대(應對)할 수 있다. 논어(論語)
♣ 시도[市道]도의(道義)로 사귀는 친구를 도의교(道義交)라 하고, 시장(市場)의 상인(商人)처럼 이해(利害)로 사귀는 것을 시도교(市道交)라 한다.
♣ 시도[市道]시도지교(市道之交)의 준말로, 상업상(商業上)의 교제, 즉 이익만을 위하여 맺은 교제를 말한다.
♣ 시동[尸童]제사때 신을 대신하는 아이. 후세에는 화상(畵像)을 썼음.
♣ 시랑[豺狼]적도 패좌 등을 비유한 말.
♣ 시령[詩令]시인들이 모여서 시를 짓는데, 시를 꼭 지어야 한다든지, 시간을 정한다든지, 어떤 조건을 정하여 어기면 벌을 받는 것을 말한다.
♣ 시례[詩禮]자식이 부친에게서 받은 가르침으로, 집안에서의 가르침을 말한다. 공자가 그의 아들인 백어(伯魚)에게 시(詩)와 예(禮)를 배우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시례발총[詩禮發塚]즉 유자(儒者)는 잗단 예절을 구실삼아, 생전에 은혜를 베풀지 않은 사람이 죽어서 어떻게 구슬을 입에 머금을 수 있겠는가 하여, 그 무덤을 파서 시체의 입을 벌리고 구슬을 꺼내는 나쁜 일을 한다고 풍자하는 말이다. 《莊子 外物》
♣ 시례환발총[詩禮還發塚]한(漢)의 양웅(揚雄)이 주역(周易)을 모방하여 태현경(太玄經)을 쓰고, 논어(論語)를 모방하는 뜻으로 법언(法言)을 썼음. 《漢書 揚雄傳》
♣ 시록[尸祿]옛날에 조상 제사를 지낼 때면 어디나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나이 어린 사람을 신위(神位)에 앉혀 제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벼슬에 비유되어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녹만 받아먹는 것을 말한다는 뜻으로, 시위 소찬(尸位素餐)과 같은 말이다.
♣ 시루[詩壘]시단(詩壇)과 같은 뜻이다.
♣ 시루고견정유인[詩壘高堅鄭有人]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집정(執政)한 뒤로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여 활용했는데 시문을 짓고 사령(辭令)을 담당하는 일은 자우(子羽)에게 맡겨 행인(行人)의 임무를 수행케 했던 고사가 있다. 《春秋左傳 襄公 31年》
♣ 시루종고만천풍[市樓鍾鼓滿天風]옛날에 동지(冬至)가 되면 조정(朝廷)이나 민가(民家)에서 모두 풍악을 울려 동지를 맞는 예(禮)를 행하였고, 또 동지가 되면 광막풍(廣漠風)이 불어온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시립[柴立]병들고 파리하여 몸이 마른 가시나무처럼 뼈만 서 있다는 뜻이다.
♣ 시마[緦麻]오복(五服) 중 가장 낮은 3월 복(服).
♣ 시망린출종수사[詩亡麟出終修史]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 “왕자(王者)의 자취가 사라지자 시가 없어졌는데, 시가 없어지고 나서 춘추(春秋)가 지어졌다.” 하였음.
♣ 시모[時毛]당시 또는 현재의 소식을 일컫는 말.’세모(世毛)라고도 하는데, 모(毛)는 모(耗)로 쓰기도 한다.’모(耗)’는 ‘소식’의 뜻으로 경모(京耗)는 서울 소식, 향모(鄕耗)는 시골 소식을 말하는 것과 같다.
♣ 시반[詩斑]당승(唐僧)의 시에 “머리털은 시를 짓다가 얼룩지었네[髮爲作詩斑]” 한 데서 온 말로, 즉 시를 짓느라 노심 초사하다가 머리털이 희어짐을 이른 말이다.
♣ 시방[十方]동ㆍ서ㆍ남ㆍ북ㆍ동남ㆍ서남ㆍ동북ㆍ서북ㆍ상ㆍ하를 가리킴.
♣ 시병연법[示病緣法]유마거사(維摩居士)가 보살들에게 설법하기 위하여 일부러 병든 척하며 문병을 오게 했던 고사가 있다. 《維摩詰經 方便品》
♣ 시불가실[時不可失]한 번 밖에 오지 않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뜻의 고사성어.
♣ 시비곡직[是非曲直]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
♣ 시비공색[是非空色]반야심경(般若心經)에, “색이 곧 공이요, 공이 즉 색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라는 말이 있다. 일체 형질(形質)과 모양이 있는 것을 색이라 이르는데 색은 기실 공이라 한다.
♣ 시비동일마[是非同一馬]천지 만물(天地萬物)의 사이에 시비의 차별이 없음을 말함. 하나의 말이란 바로 쌍륙(雙六) 놀이에서 쓰는 말을 가리키는데, 자세한 내용은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타나 있다.
♣ 시비지심[是非之心]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 시비지심지지단야[是非之心智之端也]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근본이다.
♣ 시사[詩史]시 가운데 사실(史實)이 있다 해서 시사라 한다. 안녹산(安祿山)난리로 인하여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두보(杜甫)는 그의 시 군데군데에 애끓는 우국 충정(憂國衷情)을 많이 담고 있어 그의 시를 일러 세상에서는 시사(詩史)라고 하기도 함. 《唐書 卷二百一》
♣ 시사[侍史]좌우에서 모시면서 문서를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 시사[豕蛇]탐욕을 부리며 난폭하게 덤벼드는 큰 멧돼지와 뱀, 즉 봉시 장사(封豕長蛇)의 준말이다.
♣ 시산[詩山]태인의 옛 이름이다.
♣ 시상[柴桑]고향을 가리킨다. 시상은 본디 심양(潯陽)에 있는 고을 이름인데, 도잠(陶潛)의 고향이 이곳이다.
♣ 시상[柴桑]산 이름. 중국 강서성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산으로 진(晉)의 도잠(陶潛)이 은거하던 곳이므로, 전하여 은거하는 곳을 뜻한다.
♣ 시상도[柴桑陶]심양(尋陽) 시상현(柴桑縣)이 고향인 도연명을 가리킨다.
♣ 시상일호유세계[市上一壺猶世界]선경(仙境)이나 승경(勝境)을 가리키는 호천(壺天)으로, 단지 안에 또다시 한 세계가 펼쳐진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 때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을 관리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시중에 어떤 노인이 약을 팔면서 가게 앞에 술단지[壺] 하나를 걸어 놓고 시장이 파하자 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비장방이 누각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그 노인에게 가서 노인과 함께 그 술단지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옥당(玉堂)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좋은 술과 기름진 안주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에 둘이 함께 마시고는 취해서 나왔다. 《後漢書 卷82 方術傳下 費長房》
♣ 시상자[柴桑子]시상은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산명(山名)인데, 진(晉) 나라의 고사 도잠(陶潛)이 이 곳에서 살았으므로, 즉 도잠을 일컫는 말이다. 도잠은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이 되었다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그만두고 돌아가서 평생 동안 벼슬하지 않았다.
♣ 시서기시구중주[詩書豈是口中珠]간교한 유자(儒者)가 고시(古詩)의 “푸르고 푸른 보리가 산 언덕에 무성하네 살아서 보시도 하지 않은 자가 죽어서 어찌 구슬을 입에 무는가[靑靑之麥 生於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라는 것을 인용하면서 남의 묘를 마구 파헤쳐 시체의 입속에 든 구슬을 빼낸다는 고사에서, 즉 유자가 경전(經典)을 핑계삼아 간교한 짓을 하는 것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곧 시서 자체는 구슬도 될 수가 없음을 의미한 말이다. 《莊子 外物》
♣ 시서자발총[詩書資發塚]언행(言行)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인 사이비 유자(儒者)들을 비평한 말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유자들이 입으로는 시와 예를 말하면서 무덤을 파헤친다.[儒以詩禮發冢]”는 말이 있다.
♣ 시서장[詩書將]학문과 장재(將才)를 겸한 유장(儒將)을 가리킨 말이다.
♣ 시선[詩仙]이백(李白)의 이칭(異稱). 일찍이 하지장(賀知章)으로부터 하늘 나라에서 유배당한 신선[謫仙]이라는 찬탄을 받기도 하였다.
♣ 시세장[時世粧]당(唐) 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글 이름. 곧 당시에 유행하는 여인들의 화장이라는 뜻이다.
♣ 시소[尸素]시위소찬(尸位素餐)의 약칭으로,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에 “태강(太康)이 시위(尸位)하여 안락으로 그 덕을 상실했다.” 하였는데, 이는 벼슬자리에 있어 그 직책을 다하지 못했다는 뜻이요, 시경(詩經) 위풍 벌단(伐檀)에 “소찬을 아니한다[不素餐兮]" 하였는데, 소(素)는 공(空)의 뜻이고 찬(餐)은 밥이니, 무위도식한다는 말이다.
♣ 시속[時俗]현재의 속세, 세상.
♣ 시수[詩藪]서명으로, 명(明) 나라 때 호응린(胡應麟)이 찬한 것인데, 역대의 작자(作者)들을 통론하여 시담(詩談)의 임수(林藪)가 될 만하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시수[詩囚]시수는 마음이 마치 구속되듯이 시경(詩境)에 깊이 빠져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 시승육룡[時乘六龍]하늘을 오르는 용이란 바로 임금을 가리킨 말로서, 주역(周易) 건괘(乾掛)에 “때로 여섯 용을 타고 하늘을 오른다[時乘六龍 以御天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시시[施施]나아가지 못하는 모양
♣ 시시[時時]때때로
♣ 시시[柴市]북평시(北平市) 교충방(敎忠坊)서북쪽에 있는 지명. 송(宋)의 승상 문천상(文天祥)이 순국(殉國)한 곳임. 《宋史 紀事本末 卷二十八》
♣ 시시[偲偲]서로 권면하며 기뻐하는 모양
♣ 시시[提提]새가 떼지어 나는 모양
♣ 시시각각[時時刻刻]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각마다.
♣ 시시비비[是是非非]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함. 여러 가지의 잘잘못 또는 옳으니 그르니 하고 여러 가지로 시비함
♣ 시시의열[柴市義烈]시시는 북경(北京)의 순천부학(順天府學) 곁에 있는 시장으로, 송 나라 때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이 이곳에서 원(元) 나라 사람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 시아[侍兒]시아는 계집종을 가리키는 말이다.
♣ 시어[侍御]시어사(侍御史)의 약칭. 백관을 사찰하고 궐내에서 천자의 조명(詔命)을 받드는 등의 일을 맡음.
♣ 시언[時彦]당시의 명사(名士)들을 말한다.
♣ 시여[詩餘]사(詞)를 말함. 고시(古詩)가 변해서 악부(樂府)가 되고 또 변해서 장단구(長短句)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시여임.
♣ 시연[柴煙]옛날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지낼 때 대축(大祝)이 옥벽(玉璧) 등 예물을 갖추고 시단(柴壇)에 올라 섶나무를 피우던 연기를 말한다.
♣ 시연즉태백[施鉛太白]본래의 모습 그대로가 완전무결하기 때문에 더 이상 덧붙일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송옥(宋玉)의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에 “나의 동쪽 이웃집 따님은 천하에 제일가는 미인이라서 얼굴에 분을 바르면 너무 희게 되고 입술에 연지를 바르면 너무 붉어진다.[著粉則太白 施朱則太赤]”라는 표현이 나온다.
♣ 시엽[柿葉]당(唐) 나라 정건(鄭虔)이 글씨를 익힐 때 종이가 없어 고민하다가 자은사(慈恩寺)에 감나무 잎이 많은 것을 알고 승방(僧房)을 빌려 거처하면서 날마다 감나무 잎을 따서 사용했다 한다. 《書斷》
♣ 시오설[視吾舌]내 혀를 보라. 곧 혀만 남아 있으면 천하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
♣ 시옹[尸饔]밥 짓고 나무하는 등 집에서 고생하는 것을 말한다. 《詩經 小雅 祈父》
♣ 시옹[時雍]백성들이 선도(善道)를 좇아 서로 화목함으로써 천하가 잘 다스려짐을 뜻함.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백성들이 아, 변화하여 이에 화목해진다.[黎民於變時雍]” 한 데서 온 말이다. 백성이 선정(善政)에 감화하여 풍속이 변화됨.
♣ 시외[始隗]전국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국력(國力) 회복을 위하여 곽외(郭隗)에게 인재(人才)의 등용책을 물었을 때, 곽외가 대답하기를 “먼저 외(隗)로부터 시작하시오. 그러면 외보다 더 어진이들이야 어찌 천리를 멀다 하겠습니까.” 하자, 소왕이 곽외를 위해 궁실을 짓고 그를 사사(師事)하니, 과연 악의(樂毅)ㆍ추연(鄒衍) 등 제국(諸國)의 명사(名士)들이 모여들어 훌륭한 정치를 펴게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三十四》
♣ 시우[時雨]철 따라 알맞게 오는 비
♣ 시우산[施愚山]우산은 청 나라 때의 학자인 시윤장(施閏章)의 호.
♣ 시우아[狋吽牙]한 무제(漢武帝) 때 곽사인(郭舍人)이 동방삭(東方朔)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시우아(狋吽牙)는 뭐냐?"며 알아맞히라고 하자, 동방삭은 “시우아는 개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이다.” 하여 대번에 알아맞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六十五》
♣ 시원[始元]한 소제(漢昭帝)의 연호.
♣ 시위[尸位]송장처럼 일은 못하고 자리만 지키는 것을 시위(尸位)라 한다.
♣ 시위소찬[尸位素餐]시동의 공짜밥. 능력이나 공적도 없이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서 한갓 관직만 차지하고 녹을 받아먹는 일, 또는 그런 사람.
♣ 시위시각충언험[時危始覺忠言驗]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선조 24년(1591) 일본에서 사신이 오자, 조헌이 옥천(沃川)에서 상경하여 일본 사신의 처단을 상소하고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력의 강화를 주장했던 것을 말한다. 《海東名臣錄》
♣ 시유부비흥[詩有賦比興]서경(書經)은 시의 체재(體裁)와 서술방식(敍述方式)을 가지고 부(賦), 비(比), 흥(興)으로 구분하고 있다. 부는 어떤 일을 그대로 서술하여 말하는 것이고, 비란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이고, 흥은 먼저 다른 사물을 말하여 읊을 말을 일으키는 것이다.
♣ 시율가능생난열[詩律可能生暖熱]연(燕) 나라 한곡(寒谷)의 토지는 비옥한데 기후가 한랭하자, 추연(鄒衍)이 율관(律管)을 불어 제쳐 따뜻한 기운이 감돌게 하였으므로, 그곳을 서곡(黍谷)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論衡 寒溫篇》
♣ 시의별[施衣別]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중 태전(太顚)과 작별할 때 의복을 시주했던 고사를 인용한 말.
♣ 시자[尸子]전국 시대 초(楚) 나라 시교(尸佼)가 찬한 책. 본래는 20여 편이었으나 산일되고 지금은 후인의 집본(輯本) 2권이 전함.
♣ 시자추정득[詩自趨庭得]공자의 아들 백어(伯魚)가 종종걸음으로 뜨락을 지날 때에[趨庭] 공자가 시를 배워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論語 季氏》
♣ 시전[詩牋]시를 쓴 종이를 말한다.
♣ 시전초성[詩顚草聖]시전(詩顚)은 시에 미쳤단 말이요, 초성(草聖)은 초서를 잘 쓴다는 말이다.
♣ 시점노두고[詩霑老杜膏]노두는 두보(杜甫)를 존칭한 것으로서, 두보처럼 시를 잘하는 것을 말한다. 문슬신화(捫蝨新話)에 “노두의 시는 동중서(董仲舒)의 책(策)처럼 글귀마다 전아(典雅)하다.” 하였다.
♣ 시제[柴帝]오대(五代) 시대 주 세종(周世宗) 시영(柴榮)을 이르는데, 그는 문무를 겸비한 영주(英主)로서 특히 유학(儒學)과 문장(文章)에 뛰어난 선비들을 맞이하여 제도(制度)를 고찰하고 예악(禮樂)을 바로잡는 등 후세에 본받을 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五代史 卷十二》
♣ 시제시[詩題柿]당 나라 때 정건(鄭虔)이 시(詩), 서(書), 화(畫)에 뛰어나서 정건삼절(鄭虔三絶)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일찍이 글씨를 연습할 종이가 부족한 것을 걱정하고 있던 차에 자은사(慈恩寺)에 감잎이 많다는 말을 듣고는 그 절에 가서 묵으면서 감잎에다가 글씨를 연습하였다. 《新唐書 卷202 文藝列傳中 鄭虔》
♣ 시종여일[始終如一]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이 한결 같음.
♣ 시종일관[始終一貫]처음이나 나중이 한결 같아서 변함이 없음.
♣ 시주전분[施朱傳粉]시주 전분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시인 송옥(宋玉)이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에서 동쪽 이웃에 사는 미인의 모습을 형용하면서 “분을 바르면 오히려 너무 희어지고, 연지를 찍으면 도리어 너무 붉어진다.[著粉則太白 施朱則太赤]”라고 표현한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 시주태적[施朱太赤]송옥(宋玉)의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에 “천하의 미인 중에서는 초(楚) 나라가 최고요, 초 나라 중에서는 신의 마을이 최고요, 신의 마을 중에서는 동쪽 집의 딸이 최고인데[臣里之美者 莫若臣東家之子] …… 분을 바르면 너무 하얗게 되고 연지를 찍으면 너무나 빨갛게 된다.[著粉則太白 施朱則太赤]”고 하였다.
♣ 시준골[市駿骨]연소왕(燕昭王)이 인재를 구하려고 곽외(郭隗)에게 물으니 곽외가 대답하기를, “옛날에 어느 임금이 사람을 시켜 천리마(千里馬)를 구하려고 천금(千金)을 주어서 보냈더니, 1년 만에 돌아오면서 살아 있는 천리마는 구하지 못하고 죽은 천리마의 뼈를 5백 금에 사왔다.” 하여, 왕이 꾸짖으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천리마를 5백 금에 샀다는 소문이 천하에 퍼지면 산 천리마를 몰고 찾아올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하더니, 과연 일 년이 못 되어 천리마가 세 필이나 왔다. “왕이 참다운 인재를 구하시려면 먼저 신(臣)을 후히 대접하면 참 인재가 올 것입니다.” 하였다. 연소왕은 그 말대로 곽외를 스승으로 섬기고 황금대(黃金臺)를 쌓았더니, 과연 악의(樂毅) 같은 인재가 외국에서 달려와서 강국(强國)이 되어 제(齊) 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 시진[時珍]시진은 명(明) 나라 때의 의학자(醫學者)인 이시진(李時珍)을 말함. 이시진이 저술한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수선화 조(水仙花條)에 의하면, 수선화는 비습(卑濕)한 땅에서 잘 된다 하였다. 《黃山谷詩集 卷十五》
♣ 시참[詩讖]무심코 지었던 시가 후일의 예언이 되는 것을 말한다.
♣ 시채[蓍채]시채는 시귀(蓍龜)와 같은 말로, 시초점이나 거북점과 같은 신기(神機) 묘산(妙算)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 시천몽몽[視天夢夢]시경(詩經) 소아(小雅) 정월(正月)의 “백성들은 지금 위태로운데 하늘 보면 흐리멍덩하기만[民今方殆 視天夢夢]"에서 나온 말임. 여기서의 하늘은 곧 임금을 가리키는데 백성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데도 임금의 행위를 보면 흐리멍덩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뜻이 없다는 것임.
♣ 시첨[時籤]대궐에서 당직을 설 때 일정한 시간마다 근무 현황을 기록하는 장부 따위로 보이나 자세치 않다.
♣ 시초[蓍草]옛날에 점을 칠 때 사용하던 풀로, 이것으로 괘(卦)를 벌인다.
♣ 시초[視草]왕의 제서(制書)를 초하는 것을 말한다. 구당서(舊唐書) 직관지(職官志)에 “명황(明皇)이 즉위하자 장열(張說) 등을 불러 한림(翰林)으로 삼고, 사방의 진주(進奏)ㆍ표소(表疏) 및 비답(批答)과 궁중에서 나오는 조서ㆍ신한(宸翰)도 그의 검토를 받고 시초라 한다.” 하였다.
♣ 시초대[視草臺]시초대는 조칙을 기초하고 수정하던 학사원(學士院)의 이름이다.
♣ 시충[尸蟲]사람의 몸속에 함께 있으면서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기억해 두었다가 경신일(庚申日)마다 천제(天帝)에게 고자질한다는 귀신 이름으로, 삼시(三尸) 혹은 삼팽(三彭)이라고도 한다. 이날이 되면 부부 관계는 물론이요, 언어나 면회도 금한 채 밤새도록 조용히 앉아서 재계(齋戒)를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수경신(守庚申)이라고 하였다.
♣ 시타림[尸陀林]일명 기시소(棄屍所)라고 하는데, 불가(佛家)에서 죽은 시신을 내다 버리는 곳이다.
♣ 시통[詩筒]시통은 시를 담아 전하는 대나무로 만든 통을 말한다.
♣ 시편욕보망[詩篇欲補亡]진(晉)의 문장 속석(束晳)이 시경의 남해(南陔) 이하에 누락된 시편을 지어 보충하였다.
♣ 시폐일언[詩蔽一言]공자가 말하기를, “시경 3백 편을 한 말로 덮으면[一言以蔽之] ‘생각이 사특함이 없음[思無邪]’이다.” 하였다.
♣ 시표[詩瓢]승려 등 방외인(方外人)의 시고(詩稿)를 말한다. 방외지사(方外之士)인 당(唐) 나라 당구(唐球)가 촉(蜀) 땅 미강산(味江山)에서 시를 지을 때마다 그 원고를 돌돌 말아 큰 표주박[大瓢] 속에 집어넣었다가, 병들어 눕게 되자 그 표주박을 물 위에 흘려보내면서 “이 글이 물속에 가라앉지 않고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면, 내가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표주박이 신거(神渠)에 이르렀을 때 이를 알아본 사람이 “당산인(唐山人)의 표주박이다.”라고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唐詩紀事 唐球》
♣ 시풍[時風]철에 알맞게 부는 순풍.
♣ 시한상[示韓湘]그대에게 보인다는 뜻. 한상은 한유(韓愈)의 조카인데, 이 조카에게 시를 지어준 일이 있으므로, 이에 견주어 조카에게 보인다는 말.
♣ 시해[詩奚]당(唐) 나라 때 이하(李賀)가 매일 밖을 나갈 적마다 해노(奚奴)에게 주머니를 들려 따르게 하고 시문(詩文)을 짓는 대로 그 주머니 속에 넣도록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시종(侍從)하는 동복을 가리킨다.
♣ 시해[尸解]도가(道家)의 죽음. 도가(道家)의 술수의 한 가지로서, 몸만 남겨 두고 혼백(魂魄)이 빠져나가 버린다는 뜻으로 즉 신선이 되어 감을 이른다.
♣ 시해도선[尸解逃禪]신선(神仙)이 되어 갔다는 말인데, 도가(道家)에서 신선술(神仙術)을 통하면 몸은 남겨두고 혼백이 따로 다니게 된다는 데서 온 말. 《後漢書 方術 王和平傳》
♣ 시향토실옹[尸鄕土室翁]세상을 피해 홀로 자득하며 살았던 축계옹(祝雞翁)을 가리킨다. 축계옹이 시향(尸鄕) 북쪽 산 아래 토굴에 살면서 백여 년 동안 1천 마리의 닭을 길렀는데, 닭마다 모두 이름을 붙여 준 뒤 그 닭 이름을 부르면 알아듣고 앞으로 나왔다 한다. 《列仙傳 祝雞翁》
♣ 시형[柴荊]땔감으로 쓰이는 작은 나무를 말한다.
♣ 시호[市虎]시호(市虎)는 저자에 범이 있다는 뜻인데, 이 말은 근거 없는 말도 여러 번 하면 남들이 믿게 된다는 비유.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에 “한 사람이 와서 저자에 호랑이가 있다 하면 믿지 않다가도 두세 사람이 잇달아 와서 저자에 호랑이가 있다 하면 그만 믿게 된다.” 하였다. ☞ 삼인성호(三人成虎)’
♣ 시화[枲華]수삽꽃, 도꼬마리꽃.
♣ 시회[時晦]시회는 정엽(鄭曄)의 자임. 정엽은 선조 35년(1602)에 대사간으로 재직중 성혼의 문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된 뒤에 계속 지방관으로 떠돌았는다.
♣ 시후지보[市侯之寶]항우가 한(漢) 나라 군사의 추격을 받으며 도망하여 오강(烏江)에 당도하니, 정장이 배를 대고 기다리다가, “대왕은 속히 건너시오. 강동(江東)도 지방이 천 리니 왕노릇 할 만합니다.” 하였다. 항우는 말하기를, “내가 처음 강동에서 8천 자제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왔다가, 지금 한 사람도 같이 가는 자가 없으니, 내가 무슨 면목으로 부로(父老)들을 대한단 말이냐.” 하고는, 목을 찔러 자살하면서 추격하여 온 한 나라 장수 여마동(呂馬童)을 보고, “너는 나의 친구가 아니다. 들은즉 한 나라에서 나의 머리를 가져 온 자에게는 금 천 근과 만호후(萬戶侯)를 상으로 봉해 준다 하니, 내 너에게 덕이 되겠구나.” 하였다.
♣ 식객병주리[食客屛珠履]문객(門客)들을 후히 접대하였음을 비유한 말.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춘신군(春申君)의 문객들이 모두 구슬로 장식한 신을 신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식괴[植槐]송(宋)나라의 왕우(王祐)가 뜰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는, “자손 중에 반드시 삼공(三公)의 벼슬이 나올 것이다” 했는데, 과연 그 아들 단(旦)이 정승이 되었음.
♣ 식교상우[息交尙友]식교는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를 그만두는 것을 말하고, 상우는 거슬러 올라가 옛날의 어진 사람들을 벗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 식금[食芩]손님을 대접하는 잔치의 노래. 시경(詩經) 녹명편(鹿鳴篇)에 귀빈을 사슴에 비유하여, “머머 우는 사슴은 들의 금풀을 먹누나[呦蚴鹿鳴 食野之芩].”라고 노래했다.
♣ 식덕[食德]선인(先人)이 남긴 은택을 향유하는 것을 말한다.
♣ 식로[息老]고려 중기의 문인으로 호가 식암(息菴)인 이자현(李資玄)을 가리킨다.
♣ 식마간[食馬肝]말의 간[馬肝]은 본디 독성이 있어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라고 하는데, 한 경제(漢景帝) 때 원고생(轅固生)과 황생(黃生) 두 선비가 경제 앞에서, 탕(湯)과 무왕(武王)이 걸(桀)ㆍ주(紂)를 주멸하고 자신들이 천자가 된 데 대하여 시비(是非)를 격렬하게 쟁론하자, 경제가 이르기를 “고기를 먹되 말의 간은 먹지 않아도 맛을 모르는 게 되지 않고, 학문을 논하는 자가 탕과 무왕의 수명(受命)에 관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어리석음이 되지 않는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二十一》
♣ 식마간[食馬肝]임금을 잘못된 길로 유도하는 신하를 풍자한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죽은 이부인(李夫人)을 잊지 못한 나머지, 귀신을 잘 부린다는 방사(方士) 소옹(少翁)을 후대하며 문성장군(文成將軍)에 임명하였는데, 뒤에 그가 속임수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처형하고 나서, 이를 숨기기 위해 그가 독성(毒性)이 강한 마간(馬肝)을 먹고서 죽었다고 둘러대었다. 《史記 卷28 封禪書》
♣ 식마불음주상인[食馬肉不飮酒傷人]너그러운 마음으로 은혜를 베푼다는 뜻의 고사성어.
♣ 식면[識面]식면은 얼굴을 서로 아는 사이를 말하고, 정신은 권력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천거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말하는데, 송(宋) 나라 때 손변(孫抃)이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평소 얼굴도 모르는 당개(唐介) 등을 천거하여 대관(臺官)으로 삼자, 혹자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대뜸 천거하는 것이 무슨 까닭이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옛 사람은 정신어사(呈身御史)를 부끄럽게 여겼는데, 지금 어찌 식면대관(識面臺官)을 구해서 되겠는가.”고 하였다.
♣ 식무어[食無魚]맹상군(孟常君)의 식객(食客) 풍환(馮驩)이 노래하기를, “밥에 생선이 없네.[食無魚]”라 했다. 사기(史記) 실세(失勢)를 말한다.
♣ 식무육[食無肉]소식(蘇軾)의 시에, “밥 먹을 때에 고기가 없을지언정 거처하는 곳에 대[竹]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 식미[式微]시경(詩經) 패풍(邶風)의 편명(篇名)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읊은 시이다. 그 시에, “쇠미하고 쇠미하거늘 어찌하여 돌아가지 아니하는가.[式微式微 胡不歸]”하였다. 옛날에 여후(黎侯)가 나라를 잃고 위(衛) 나라에 의탁해 있을 때 그를 수행한 신하들이 가엾은 처지를 슬퍼해서 지었다 한다.
♣ 식미지사[食薇志士]고사리 먹는 지사(志士)는 주(周) 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만 캐 먹다가 굶어 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 식미편[式微篇]시경(詩經) 패풍(邶風) 식미편은 여후(黎侯)가 나라를 잃고 위(衛) 나라에 우거(寓居)해 있자 그 신하가 여후를 위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 식불이미[食不二味]음식이 두가지 맛이 아니다라는 말로, 음식을 잘 차려먹지 못함을 이른다.
♣ 식성온태위[識聲溫大尉]진(晉) 나라 사람 온교(溫嶠). 환온(桓溫)이 나서 돌이 못 되어 온교가 보고 말하되, “이 애가 기특한 골상이 있으니 시험하여 울려 보자.” 하고는 그 우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참으로 영물(英物)이로다.” 하였다.
♣ 식소사번[食少事煩]먹는 것은 적은데 할 일은 많은 것, 결국 오래 살지 못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식속조교장[食粟曹交長]여기서 곡식 먹는다는 말은 곧 서민이란 뜻인데, 조교(曹交)가 맹자(孟子)에게 “나도 문왕(文王)만큼 키가 큰데 어째서 문왕이 못 되고 곡식만 먹습니까.”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孟子 告子下》
♣ 식식[式式]공경하는 모양
♣ 식식[湜湜]물이 맑아 물 밑까지 환히 보이는 모양,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모양
♣ 식신[息愼]숙신(肅愼)과 같음.
♣ 식실[飾室]궁녀가 거처하는 방.
♣ 식심방[息心方]번뇌를 다스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처방이라는 뜻이다. 중국 선종(禪宗)의 2조(祖)인 혜가(慧可)가 일찍이 달마(達摩)에게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청하자 달마가 그 불안해하는 마음을 가져오라고 하였는데, 혜가가 아무리 찾아도 그 마음을 찾을 수 없다[覓心了不可得]고 하자 달마가 “너에게 이미 안심의 경지를 주었다.[與汝安心竟]”고 한 안심법문(安心法門)의 고사가 있다. 《傳燈錄 卷3》
♣ 식암[息菴]고려 중기의 문인인 이자현(李資玄)의 호이다. 전국의 명산을 유력하던 중 춘천(春川)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선학(禪學)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청평산에 그가 쓴 ‘청평식암(淸平息菴)’이라는 해서체의 글자가 남아 있다.
♣ 식암자[息菴子]벼슬을 버리고 문수사에 들어와 37년 동안 머물렀던 고려 이자현(李資玄)의 호이다. 《金富軾 文殊院記》
♣ 식양[息壤]식양은 저절로 불어난다는 신비한 흙. 식토(息土)와 같은 말로서 모손과 감소를 모르는 땅임.
♣ 식언[食言]한 번 입에서 나온 말을 다시 입으로 들여보낸다는 뜻. 한 번 말한 것을 실행하지 않는다.
♣ 식영[息影]인위적인 허식을 버리고 자연의 진성(眞性)을 추구함을 뜻한다. 공자와 어부(漁夫)와의 대화에서 나온 것으로, 공자가 어부에게 묻기를 “나는 잘못한 일도 없이 여러 가지 비방을 받으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하자, 어부가 대답하기를, “제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제 발자국을 싫어하여 그것을 떼버리려고 달아난 자가 있었는데, 그러나 발을 자주 들수록 발자국은 더욱 많아지고 아무리 빨리 뛰어도 그림자는 몸을 떠나지 않았소. 그래서 그는 아직도 제 걸음이 느려서 그런 줄 알고 더욱 빨리 달리다 마침내는 힘이 지쳐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곧 그늘 속으로 들어가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조용히 쉬고 있으면 발자국도 멈춰진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莊子 漁父》
♣ 식우기[食牛氣]호랑이나 표범 새끼는 아직 털 무늬가 이루어지기 전에도 소를 잡아먹는 기상을 지니고 있다.[虎豹之駒 未成文而有食牛之氣]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비범한 소년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尸子 卷下》
♣ 식자우환[識字憂患]글자를 아는 것이 도리어 근심거리가 된다. 즉, 아는 것이 탈이라는 말. 학식이 있는 것이 도리어 근심을 사게 됨을 말한다.
♣ 식장[植杖]지팡이를 땅에다 꽂고서 김을 매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지팡이를 짚고 대바구니를 멘 장인(丈人)이 공자(孔子)의 행방을 묻는 자로(子路)의 질문에 몇 마디 면박을 주고는 곧장 지팡이를 꽂아 놓고 김을 매었다.[植其杖而耘]’는 기록이 있으며, 공자가 흐르는 물을 보고는 “가는 것이 이와 같나니, 주야에 그치지 않는도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탄식한 고사가 자한(子罕)에 실려 있다.
♣ 식장구[食場駒]시경(詩經) 소아 백구(白駒)에 “하얀 망아지 우리 장포(場圃)의 벼 싹 먹었네.[皎皎白駒 食我場苗]" 한 말이 있는데, 이는 현자(賢者)가 떠나는 것을 억지로 만류하기 위하여 타고 온 망아지가 자기 전원의 곡식을 뜯어먹었다는 핑계로 묶어 놓아,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읊은 것이다.
♣ 식재송설[息齋松雪]식재는 원(元) 나라 명필 이간(李衎)의 호이다.
♣ 식지동[食指動]집게손가락[食指]이 절로 움직이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조짐이라는 고사가 있는데, 전하여 욕심이 생김을 비유한 말이다.
♣ 식차거[識硨磲]차거(硨磲)는 서역(西域)에서 생산되는 옥(玉) 종류의 돌로서 그 지방에서는 보배로 여긴다고 한다. 《魏文帝 車渠椀賦序》
♣ 식채[食菜]채지(采地)와 같은 것으로, 나라에서 받은 땅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풍방전(馮魴傳)에 “풍성(馮城)에 식채(食菜)하여 관향을 삼았다.” 하였는데, 그 주에 “채(菜)는 채(采)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식천감대[食薦甘帶]좋아하고 싫어하는 맛이 각기 달라서 일정하지 않다는 뜻이다. 천은 짐승이 잘 먹는 풀이고 대(帶)는 곧 뱀을 가리키는데,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사슴은 천을 먹고 지네는 뱀을 즐겨 먹는다.[麋鹿食薦 螂且甘帶]" 하였다.
♣ 식초우[食草愚]공자가어(孔子家語) 집비(執轡)에 “풀을 먹는 짐승은 달리기를 잘하지만 어리석다.” 하였다.
♣ 식토룡건[拭吐龍巾]이백이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때에 당명황(唐明皇)이 글을 짓게 하려고 부르니 이백이 밖에서 술이 취하여 들어와서는 구토(嘔吐)를 하였다. 임금이 친히 수건으로 그것을 닦아주었다.
♣ 식파연[食破硯]벼루[硯]에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뜻이다.
♣ 식평[食苹]천자가 군신과 빈객(賓客)에게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녹명(鹿鳴)에, “화락하게 우는 사슴의 울음소리여, 들판의 대쑥을 뜯는도다[呦呦鹿鳴 食野之苹].” 하였다.
♣ 식형주[識荊州]한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우러르고 사모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말로, 형주는 당 현종(唐玄宗) 때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낸 한조종(韓朝宗)인데, 평소에 숨은 인재를 발탁하길 좋아하여 최종지(崔宗之)ㆍ엄무(嚴武) 등을 조정에 천거하였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그의 인정을 받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한조종이 형주자사일 때 이백(李白)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 “살아서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질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번 한 형주를 알기 원한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古文眞寶 後集與韓荊州書》
♣ 식형지원[識荊之願]훌륭한 사람을 사모하는 말. 이태백(李太白)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한조종(韓朝宗)에게 보낸 편지에 “만호후(萬戶侯)를 원치 않고, 다만 한 형주가 한 번 알아주기를 바란다.”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 식회[植檜]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쌍회(雙檜)를 두고 지은 시에 “……뿌리가 구천에 이르도록 굽은 곳이 없건만, 세간에서는 오직 숨은 용만이 안다오[根到九泉無曲處 世間唯有蟄龍知].” 하였는데, 신종(神宗) 연간에 소식이 어떤 죄로 대리옥(大理獄)에 수감되어 있을 때, 당시의 왕규(王珪)가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의 이 시구를 들어, 비룡(飛龍)은 자기를 알아주지 않고 숨은 용[蟄龍]만이 자기를 알아준다는 의미이니, 이것은 곧 폐하(陛下)께서 불신(不臣)의 뜻이 있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참소하자, 신종이 이르기를 ”시인의 말을 어찌 이렇게 논할 수 있겠는가. 그는 스스로 회나무[檜]를 읊었을 뿐인데, 그것이 집의 일과 상관이 있단 말인가. “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八》
♣ 신[申]겹치다.
♣ 신[紳]신(紳)은 큰 띠. 사대부(士大夫)의 상징이다.
♣ 신[新]왕맹의 국호(國號)다.
♣ 신가항만지유함[信可行蠻只有諴]공자(孔子)가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독경(篤敬)하면 비록 오랑캐 나라라도 행해질 수 있다.” 하였다. 《論語 衛靈公》
♣ 신각[申恪]조선시대 무신. 임진 왜란 당시 중위대장(中衛大將)으로서 서울 수호에 임했고,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휘하에서 부원수 자격으로 한강을 지키다가 패전,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양주(楊州)로 가 있다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의 응원으로 흩어진 병력을 다시 규합, 양주 해유령(蟹踰嶺)에서 왜군을 요격하여 대파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강에서 패전하고 임진(臨津)에 피신해 있던 도원수 김명원의 무고 장계(狀啓)로 인하여 참형(斬刑)을 당했다. 참형이 집행되던 날 오후에 양주의 첩보가 도착했는데, 그 첩보를 받은 왕은 급히 선전관(宣傳官)을 양주로 보내 그의 형 집행을 정지하도록 하였으나 선전관이 현지에 당도했을 때는 그의 참형이 이미 집행된 뒤였음. 《懲毖錄 卷一》
♣ 신거[宸居]임금의 거처하는 궁중을 신(宸)이라 한다.
♣ 신경[神京]서울로 임금을 가리킴.
♣ 신계부긍명[晨鷄不肯鳴]참고로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베옷 입고 긴 밤 지새우나니, 오늘은 새벽닭도 울지 않으려는 듯.[被褐守長夜 晨鷄不肯鳴]”이라는 구절이 있다. 《陶淵明集 卷3 飮酒 二十首》
♣ 신고[辛苦]괴로움.
♣ 신고[神皐]신명(神明)의 구역을 말한다. 한서(漢書) 교사지(郊祀志)에 “옛날부터 옹주(雍州) 지방은 지대가 높아 신명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하늘에 제사하고 여러 신(神)에게 제사하는 사당이 많이 있다.” 하였다.
♣ 신고[神瞽]천도(天道)를 알았던 옛 악정(樂正)이라고 함.
♣ 신고송한궁[辛苦送韓窮]살림살이의 곤궁한 것을 물리침을 말한 것으로서, 한유가 송궁문(送窮文)을 지은데서 온 말이다.
♣ 신공[神珙]당(唐) 나라 때 서역(西域) 중으로서 사성오음구롱반뉴도(四聲五音九弄反紐圖)를 편찬했음.
♣ 신공[申公]신공은 일찍이 제(齊) 나라 사람인 부구백(浮丘伯)에게서 시(詩)를 수학했고 그 후로는 평생 집에서 후진을 양성했는데, 문하에 모인 제자가 무려 천 여명이나 되었다. 그는 나이 80이 되어서야 한 무제(漢武帝)의 부름을 받아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漢書 卷八十八 儒林傳》
♣ 신공보[申功甫]공보(功甫)는 신민일(申敏一)의 자(字)이다.
♣ 신교[神交]정신적으로 사귀는 것. 뒤에는 피차 이름만 듣고 직접 만나지 못한 채 서신 따위로 교분을 맺는 것을 말한다.
♣ 신교유복호[神交游濮濠]속세를 떠나 자연에 동화된 상태의 차원 높은 교분을 나누자는 뜻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초왕(楚王)의 사신을 물리치고 복수에서 낚시를 했던 장자의 고사와, 친구 혜시(惠施)와 함께 호량(濠梁) 위에서 물고기의 뛰노는 것을 즐겼던 장자의 고사가 실려 있다.
♣ 신구[汛口]우리 나라 사신이 바닷길로 해서 중국에 갈 때 거치는 포구(浦口)의 이름이다.
♣ 신국[信國]신국은 송(宋) 나라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봉호(封號)이다. 추학(秋壑)의 일은 미상(未詳)이다.
♣ 신국풍첨독서의[信國風簷讀書意]송(宋) 나라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이 원(元) 나라에 잡혀가 옥중(獄中)에서 지은 ‘정기가(正氣歌)’의 맨 마지막에 “바람 부는 처마에서 책을 펼치고 읽노라니, 옛날 어른들 행한 도가 나의 얼굴을 비춰 주네.[風簷展書讀古道照顔色]”라는 구절이 나온다. 신국(信國)은 문천상의 봉호(封號)이다.
♣ 신군[神君]도가(道家)의 신(神)을 말한다. 《史記 封禪書》
♣ 신군[神君]현명한 지방관(地方官)의 미칭(美稱)으로 쓰이는 말이다.
♣ 신군강원약[神君降宛若]사기(史記) 효무본기(孝武本紀)에 “신군(神君)은 장릉(長陵)에 사는 여인이었는데, 그 아들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다가 죽어서 동서인 원약(宛若)에게 귀신으로 나타났다. 이에 원약이 집에다 사당을 짓고 모시자 백성들이 그 집에 가서 제사를 올렸는데, 한 무제가 신군을 데려다 상림원 속의 제씨관(蹄氏觀)에 모시도록 하였다.” 하였다.
♣ 신귀[新鬼]승문원(承文院)의 신진(新進)이 곤욕을 치르던 일. 고례(古例)에 새로 급제하여 괴원(傀院) 즉 승문원에 뽑히면, 밤에는 본원의 박사 이하의 관원에게 명함을 돌리고, 낮에는 장방(長房)에 갇혀서 출입을 못하게 되었으니 그것을 신귀라 부른다. 그는 여러 가지로 곤욕을 겪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10일 동안 회자(回刺)를 하는데, 만일 그가 공손하지 못할 때에는 그의 가동(家僮)의 종아리를 때리고 일수를 가산하게 된다. 이럴 때에 선생이나 유명한 관원이 찾아가서 요청하면 혹은 회자를 없애거나 혹은 일수를 감해 주기도 하였다.
♣ 신귀본자수류골[神龜本自愁留骨]세속적인 출세나 명예에 구속됨이 없이 소요자재(逍遙自在)하는 것을 말한다. 초(楚) 나라에서 죽은 지 3천 년 되는 신령스러운 거북이의 뼈를 묘당(廟堂)에 모셔 놓았는데, 장자(莊子)가 이를 빗대어 “죽어서 뼈다귀로 남아 귀하게 되려 하겠는가. 아니면 살아서 흙탕물 속에 꼬리를 끌고 싶어하겠는가.[寧其死爲留骨而貴乎 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라고 한 내용이 추수편(秋水篇)에 실려 있다.
♣ 신극[宸極]황제의 자리
♣ 신근[辛釿]노자(老子)의 제자로서 자는 문자(文子)
♣ 신근남간조[辛勤南澗藻]시경(詩經) 소남(召南) 채빈(采蘋)에, 제사 음식을 마련하는 주부(主婦)의 훌륭한 행실을 노래하면서 “남쪽 산골 시내에서 마름 풀을 뜯노매라.[于以采蘋 南澗之濱]”라고 하였다.
♣ 신급돈어[信及豚魚]돈어는 주역(周易) 중부(中孚) 단사(彖辭)에 “신이 돈어에 미치다.[信及豚魚]" 한 데서 온 말인데, 말하자면 돼지나 물고기는 동물 중에도 가장 감동시키기 어려운 것들이지만 그 신(信)이 그것들에까지도 미쳐간다는 뜻이다.
♣ 신기[蜃氣]이무기가 토해 낸 기운. 본초(本草)에 “이무기는 뱀 같으면서도 더 크고 뿔이 있어 용과 같으며, 갈기와 허리 이하에는 비늘이 거꾸로 되었고 제비를 즐겨 먹으며, 비가 오려면 기운을 토해 내어 누대(樓臺)와 성곽(城廓)의 모양을 형성한다.”고 하였다.
♣ 신기질[辛棄疾]송 나라 역성(歷城)사람으로 자는 유안(幼安), 호는 가헌(稼軒)이다. 대리시 소경(大理寺小卿)과 호남(湖南)ㆍ강서(江西)ㆍ복건(福建)ㆍ호북(湖北)ㆍ절동(浙東)등지의 안무사(按撫使)를 역임하였는데, 절개가 꿋꿋한 인물로서 일생 동안 금(金)나라를 배격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 신기취부[神奇臭腐]신기(神奇)는 좋은 평판을 말하고 취부(臭腐)는 나쁜 평판을 말한다.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 “호감이 가면 신기하다 하고 싫으면 취부하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서로 뒤바뀌는 현상이 벌어지곤 한다.[是其所美者爲神奇 其所惡者爲臭腐 臭腐後化爲神奇 神奇後化爲臭腐]”라 하였다.
♣ 신기혹취부[神奇或臭腐]신기와 취부는 각각 미(美)와 추(醜)를 뜻하는 말로, 유용한 것이 무용지물로 바뀌기도 하고, 진귀한 보물이 폐물(廢物)로 전락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莊子 知北遊》
♣ 신낭전[腎囊錢]조선 고종(高宗) 때 장정(壯丁)에게 매기는 세금을 비꼬아 하던 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원납전(願納錢)과 사대문(四大門)의 통행세(通行稅)까지 받아도 부족하므로 지방에서 장정의 수를 따져 돈을 받아들이니, 백성들이 이를 ‘신낭전’이라 비꼬았다.
♣ 신내폐외[愼內閉外]헌원씨(軒轅氏) 즉 황제(黃帝)가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가서 양생의 도리를 묻자, 대답하기를 “지도(至道)의 정수는 요요명명(窈窈冥冥)한 것이요, 지도의 극치는 혼혼묵묵(昏昏黙黙)한 것이다. …… 그대는 내부를 단속하고 외부를 폐쇄하라. 지각 활동이 많으면 몸을 상하게 마련이다.[愼女內 閉女外 多知爲敗] …… 나는 일자(一者)를 계속 간직하며 조화된 경지에서 살아 왔다.[我守其一 以處其和] 그래서 1200년이 되었지만 몸이 아직 쇠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莊子 在宥》
♣ 신녀협[神女峽]장강(長江) 중에 있는 무협(巫峽)을 가리킨다.
♣ 신농[神農]중국 고대(古代) 삼황(三皇)의 한 사람이니, 그가 백 가지 초목(草木)을 맛본 후에 비로소 의약(醫藥)이 있게 되었다. 《史記 三皇紀》
♣ 신누일과홍수평[神累一過洪水平]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린 공을 말한다. 우 임금이 그때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산에 올라갈 적에는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올라갔다. 《書經 益稷》
♣ 신단[神丹]신선이 된다는 영약(靈藥)이다. 남사(南史) 은일도홍경전(隱逸陶弘景傳)에 “홍경이 신부(神符)의 비결(祕訣)을 얻어 신단을 만들 수 있었으나 약물(藥物)이 없음을 고심하던 차에, 임금이 황금(黃金)ㆍ주사(朱砂)ㆍ증청(曾靑)ㆍ웅황(雄黃) 등의 자료를 내려 주었으므로 마침내 비단(飛丹)을 만들었는데, 빛깔이 눈처럼 희었고 그것을 먹으면 몸이 가벼워졌다.” 하였다.
♣ 신단재장[身短才長]안영(晏嬰)은 춘추 시대 제(齊) 나라의 명상(名相)이다. 사기(史記) 권62에 “안자(晏子)는 키가 6척(尺)이 못 되는데도 제 나라의 정승이 되어 이름이 제후들에게 알려졌는데, 당신은 키가 8척이나 되면서도 남의 마부 노릇이나 하고 있다.”고 하였다.
♣ 신도[神道]복희씨가 팔괘(八卦)를 처음 만들어 백성을 교화시켰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관괘(觀卦) 단사(彖辭)에 “성인이 신묘한 하늘의 도리를 관찰하여 교화를 베풀자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聖人以神道設敎而天下服矣]”라는 말이 나온다.
♣ 신도[申徒]신도적(申徒狄)을 말함. 그는 은주(殷紂)를 간(諫)하다 듣지 않으므로 돌을 지고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음.
♣ 신도[新都]왕망(王莽)을 가리킴. 한(漢) 영시(永始) 원년에 왕망을 봉하여 신도후(新都侯)로 삼아 남양(南陽) 신야(新野)의 도향(都鄕)을 다스리게 하였음.
♣ 신도반[申屠蟠]후한(後漢) 말의 영제(靈帝) 때에 사대부인 이응(李膺), 진번(陳蕃) 등이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100여 인이 피살되었다. 그러나 신도반(申屠蟠)은 벼슬을 버리고 양군(梁郡)의 탕산(碭山)에 은둔하여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아 화를 면하였다.
♣ 신도비[神道碑]옛날 종2품 이상의 관원의 무덤이 있는 근처 큰길 가에 세우던 비석(碑石).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가담석(加擔石)이 있다.
♣ 신도수옥[申屠樹屋]신도는 후한 때의 은사 신도반(申屠蟠)을 말하고, 수옥(樹屋)은 뽕나무를 의지해서 이를 마룻대로 삼아 지은 초막집을 말함. 신도반은 본디 집이 가난하여 칠공(漆工)으로 품팔이를 하며 살다가, 끝내 한실(漢室)이 무너져가는 것을 보고는 탕현(碭縣)에 들어가 초막집에 은거하였다. 당시에 그의 훌륭한 학덕(學德)을 존경하는 이들로부터 천거를 받아 수차에 걸쳐 조정의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었다. 《後漢書 卷五十三》
♣ 신도월[申屠刖]정자산(鄭子産)과 신도가(申徒嘉) 두 사람이 백혼무인(伯昏無人)에게서 함께 수업받을 때, 신도가가 절뚝거리는 것을 자산이 수치스럽게 여겨 함께 다니는 것을 꺼려했다는 우화가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 소개되어 있다.
♣ 신도팔경[新都八景]신도 곧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의 팔경.
♣ 신독[愼獨]자기 홀로 있을 적에 몸가짐을 삼가는 것을 말한다.
♣ 신독공부[愼獨工夫]신독은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을 조심하는 것으로 동(動) 공부에 해당한다.
♣ 신동회[申東淮]신익성(申翊聖)의 호이다.
♣ 신량[新涼]초가을의 서늘한 기운.
♣ 신뢰필변[迅雷必變]논어(論語) 향당(鄕黨)에 “천둥을 급하게 치거나 맹렬한 바람이 불 때는 반드시 변색을 했다.” 한 데서 온 말인데, 변색은 곧 하늘의 노염에 경의(敬意)를 표하는 뜻이다.
♣ 신룡검화진[神龍劒化津]부부가 모두 죽어 합장(合葬)할 때 만사(輓詞)에서 흔히 쓰는 말로, 검이 용으로 화해 두 마리가 합쳐졌다는 것은 죽어서 합장한 것을 뜻한다. 옛날에 오(吳)나라의 무고(武庫) 안에 두 마리의 토끼가 있어서 무기의 쇠를 모두 먹어치웠는데, 이를 잡아 배를 가르니 쇠로 된 쓸개가 나왔다. 오왕이 검공(劒工)에게 명해서 이 쓸개로 검 두 개를 만들었는데, 하나는 간장(干將)으로 수컷이고, 다른 하나는 막야(鏌鎁)로 암컷이었다. 오왕은 이를 돌 상자에 넣어서 깊숙이 감추어 두었다. 그 뒤 진(晉)나라 때 이르러서 오 땅에 자색 기운이 하늘의 우수(牛宿)와 두수(斗宿) 사이로 뻗침에 장화(張華)가 보물이 있는 것을 안 다음, 뇌환(雷煥)이 천문(天文)과 술수(術數)에 정통하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에게 가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니, 뇌환이 말하기를, “하늘 위의 우수와 두수 사이에 자색 기운이 있는 것은 보물의 정기이다.” 하였다. 장화가 뇌환을 풍성현(豐城縣)의 현령으로 보내 이 두 검을 얻은 다음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그 뒤에 장화가 화를 당하자 장화가 가지고 있던 검은 양성(襄城)의 물 속으로 날아들어가고, 뇌환이 가지고 있던 검은 뇌환이 죽고 나서 뇌환의 아들이 검을 차고 연평진(延平津)을 지나갈 때 갑자기 허리춤에서 빠져 나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잠수부를 시켜서 검을 찾게 하였는데, 물 속에는 단지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만 보일 뿐 검은 찾지 못하였다. 《拾遺記 卷十ㆍ太平御覽 卷三百四十四》
♣ 신루[蜃樓]신기루. 허망한 기운을 말함. 휘원(彙苑)에 “봄 여름철에 바다에 공기가 반사되어 성시(城市)와 궁실(宮室)의 형상이 만들어지는데, 큰 조개[蜃]가 기운을 뿜어 누(樓)를 만든다는 설이 있다.” 하였음.
♣ 신리[神理]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상(無上)의 위력을 발휘하며 재앙과 화복을 내리는 신령의 도를 말한다.
♣ 신립[申砬]조선 중기(1546~1592)의 무장.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있으면서 북변을 침입한 니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한 용장으로 우방어사(右防禦使)ㆍ한성 판윤(漢城判尹) 등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서 약한 병력으로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결했다가 참패를 당하고는 부하장 김여물(金汝物)과 함께 강물에 투신자결하였음. 《懲毖錄》
♣ 신마린순석출주[神馬嶙峋石出洲]신륵사 옆에 마암(馬巖)이 있는데, 전설에 여기에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나왔다 한다. 《東國輿地勝覽 卷六 驪州》
♣ 신마석[神馬石]여강(驪江)에 있는 마암석(馬巖石). 이색(李穡)의 시에, “물 막아준 공로는 마암석이 제일이고[捍水功高馬巖石]……" 하였음.
♣ 신망[新莽]신(新)은 왕망(王莽)이 한 평제(漢平帝)를 시해하고 한 나라를 빼앗은 다음 세운 나라 이름인데, 그 당시의 문장 양웅(揚雄)이 왕망의 공덕을 높이 칭찬하였다가 후세의 비난을 받고 있다.
♣ 신명[神明]정신. 귀신.
♣ 신목진의[新沐振衣]새로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갓을 털고, 새로 목욕한 자는 반드시 옷을 턴다. 《屈原 漁父辭》
♣ 신무[愼懋]조선조 숙종 때의 학자. 보민편(保民篇)을 지었음.
♣ 신무괘관[神武掛冠]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남조 제(齊)의 도홍경(陶弘景)이 관복을 벗어 신무문에 걸어 놓고 사직소를 남긴 뒤 고향으로 떠나갔던 고사가 있다. 《南史 卷76 陶弘景傳》
♣ 신무문[神武門]양(梁) 나라 도홍경(陶弘景)이 의관(衣冠)을 신무문(神武門)에 걸어 놓고 사직한 고사가 있다. 《南史 隱逸下 陶弘景傳》
♣ 신무회서상득시[神武淮西想得時]당 헌종(唐憲宗) 때 회서 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가 모반하여 그를 토벌할 적에 장군(將軍) 이소(李愬)가 마침 큰 눈이 내리던 밤에 회서를 쳐들어가서 오원제를 사로잡고 끝내 회서를 평정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唐書 卷154》
♣ 신물[神物]변화무쌍한 용(龍)을 가리킨다.
♣ 신물비입왕상리[愼勿飛入王祥里]잡힐까 두렵다는 뜻. 왕상은 진(晉) 나라 때의 효자. 한번은 계모가 병으로 누워 참새고기를 먹고 싶다 하였다. 왕상이 문앞에서 울부짖자 참새 수십 마리가 날아들므로 잡아서 공양했다. 《晉書 卷三十三 王祥傳》
♣ 신미비오토[信美非吾土]삼국 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이 난세를 만나서 고향을 떠나 형주(荊州)로 가서 유표(劉表)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에 누(樓)에 올라 지은 등루부(登樓賦)에 “강산 경치 참 좋다마는 내 고향이 아님이여, 어찌 좀 더 머물 생각 날 리가 있겠는가.[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遊]”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 신반[辛槃]오신반(五辛槃)의 준말임. 파ㆍ마늘ㆍ부추ㆍ여뀌잎ㆍ겨자를 섞어 만든 음식을 말하는데, 정조(正朝)에 이것을 먹으면 오장(五臟)이 건강해진다고 한다. 풍토기(風土記)에 “원단(元旦)에는 총(蔥)ㆍ산(蒜)ㆍ구(韭)ㆍ육호(蓼蒿)ㆍ개자(芥子)를 섞어서 먹는데 영신(迎新)의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음.
♣ 신백[申伯]신백은 주 선왕(周宣王) 때의 어진 재상인데, 시경(詩經)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은 사악이 신령을 내리어 보후와 신백을 내었도다 …… 신백의 덕이여 유순하고 은혜롭고 또 정직하도다[維嶽降神 生甫及申 …… 申伯之德 柔惠且直]”하였다.
♣ 신백거[愼伯擧]백거는 신천익(愼天翊)의 자(字)이다.
♣ 신번길방[申樊吉方]선왕(宣王)을 도와 난리를 평정한 공신들로서 선왕의 외삼촌인 신백(申伯), 번(樊)이라는 고을을 떼어받은 중산보(仲山甫), 오랑캐를 정벌하여 태원(太原)까지 쫓아버린 윤길보(尹吉甫), 형만(荊蠻)을 평정했던 방숙(方叔)을 이름.
♣ 신보[申甫]신보는 주(周) 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신백(申伯)과 보후(甫侯)로, 어진 신하를 가리킨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산악이 신명을 내어, 보후와 신백을 탄생시켰네.[維嶽降神 生甫及申]”하였다.
♣ 신부[神斧]신기로운 도끼. 우(禹) 임금이 용문(龍門)을 개착(開鑿)할 때 신부를 썼다는 고사가 있음.
♣ 신부[神符]신령한 부적(符籍)을 이름.
♣ 신부약[薪斧約]중매하는 일을 가리킴. 시경(詩經) 제풍(齊風) 남산(南山)에 “땔나무를 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끼가 아니면 벨 수가 없다 아내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매가 아니면 얻지 못한다[析薪如之何 匪斧不克 取妻如之何 匪媒不得]” 한 데서 온 말이다.
♣ 신분[神奔]신이 자빠른 모양.
♣ 신비[辛毗]신비는 삼국(三國) 때 위(魏) 나라 사람으로 자는 좌치(佐治). 문제(文帝) 때에 시중(侍中)이 되어 직간(直諫)을 좋아하였다. 한번은 문제가 기주(冀州)의 백성을 옮기려 하므로 직간하였으나, 문제가 듣지 않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자 임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만류하였다. 《三國志 魏志 辛毗傳》
♣ 신사[新死]막 죽다. 갓 죽다. 새로 죽다.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뜻.
♣ 신사참[辰巳讖]진(辰)과 사(巳)의 해에 현인(賢人)이 죽는다는 예언이다. 한(漢) 나라 정현(鄭玄)이 꿈속에서 “일어나라. 올해는 진(辰)의 해이고 내년은 사(巳)의 해이다.”라는 공자(孔子)의 계시를 받은 뒤 그해 6월에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통 용사지세(龍蛇之歲)라는 표현을 많이 쓰인다.
♣ 신상필벌[信賞必罰]상을 밝히고(명백히 하고) 반드시 벌을 줌.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줌. 곧 상벌을 규정대로 사사로움 없이 엄정히 하는 일
♣ 신서[神荼]신서는 악귀(惡鬼)를 물리치는 신(神). 산해경(山海經)에 “창해(滄海)의 도삭산(度朔山)에 큰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뻗은 가지를 귀문(鬼門)이라 하여 모든 귀신들이 이곳으로 출입하며, 이 위에 신서(神荼)ㆍ울률(鬱壘)이라 하는 두 신이 있어 나쁜 귀신을 잡아서 호랑이에게 먹인다.” 하였다.
♣ 신서[新書]병서(兵書)를 뜻한다. 삼국 시대 촉(蜀) 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이 지은 신서(新書)와 명(明) 나라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 등 병서가 있다.
♣ 신서[信書]오활하여 세속과 분합하지 못함을 뜻한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글을 쓰인 그대로 다 믿는다면 차라리 글이 없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孟子 盡心下》
♣ 신선굴[神仙窟]관각(館閣)을 가리키는 시어(詩語)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영주(瀛洲)라는 문학관(文學館)을 설치하고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등 십팔학사(十八學士)를 우대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신성[晨省]이른 아침에 부모의 침소에 가서 밤새의 안후를 살핌.
♣ 신손[神孫]왕위를 계승하는 자손을 높여서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라 칭한다.
♣ 신수화지[神水華池]도가서(道家書)의 양생술에서 신체의 각 수분 분필의 조절을 비유로 말한 은어(隱語)들.
♣ 신숙중[辛叔重]신숙중은 진(晉) 나라 때의 은사 신밀(辛謐)을 이름. 숙중은 그의 자이다. 신밀은 진 나라가 쇠망해 가자, 역적 유총(劉聰)과 석계룡(石季龍) 등의 세대에 수차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급기야 염민(冉閔)이 제호(帝號)를 참칭함에 이르러서는 그가 염민에게 잘못을 충고하는 글을 남기고 인하여 밥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晉書 卷九十四》
♣ 신숭[神嵩]고려(高麗)를 뜻한다. 개경(開京)의 진산(鎭山)인 송악(松嶽)을 숭산(崧山) 또는 신숭(神嵩)이라고 불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府上》
♣ 신시[蜃市]교룡의 종류인 신(蜃)이 만들어 낸 해시(海市)로 신기루(蜃氣樓) 현상을 말한다.
♣ 신식남정[新息南征]신식은 전공을 세워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진 동한(東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다. 마원이 남방의 교지(交趾)를 정벌할 때 무더운 날씨에 장독(瘴毒)을 견디다 못해 소리개마저 물 위로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옛날 향리에서 달구지나 타고 편히 지내는 것이 최고라고 말했던 종제(從弟) 소유(少游)의 말을 떠올리면서 “내가 지금 누워서 소유가 평소에 해 주었던 말대로 해 보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臥念少游平生時語 何可得也]”라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東觀漢記 馬援》
♣ 신신[伸伸]느긋하고 유유한 모양, 거침없이 자유롭게 늘어나는 모양
♣ 신신[信信]믿을 것을 믿음, 유연한 모양, 나흘 동안의 유숙
♣ 신신[侁侁]여럿이 걷는 모양이나 소리, 말이 앞을 다투는 모양, 미덥고 성실한 모양
♣ 신신[藎臣]임금이 등용하여 쓰는 신하, 곧 충성스런 신하를 말한다.
♣ 신신[新新]차차 새로워지는 모양
♣ 신실[新室]신실은 전한(前漢) 때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 나라의 왕실(王室)을 말한다.
♣ 신안[新安]평안도 정주(定州)의 속역(屬驛)이다.
♣ 신안천석의서수[新安泉石宜徐叟]남조 양(梁)의 고조(高祖)가 서리(徐摛)에게 “신안은 풍광이 무척이나 뛰어난 곳으로서[新安大好山水], 임방(任昉) 등도 예전에 여기를 모두 거쳐갔으니 경(卿)이 나를 위해 이 고을을 한번 다스려 주었으면 한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梁書 卷30 徐摛傳》
♣ 신야[莘野]유신(有莘)의 들. 이윤(伊尹)이 탕(湯) 임금을 만나기 전에 밭을 갈면서 은거하여 도를 즐겼던 곳이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맹자가 말하기를, ‘이윤이 신야의 들에서 밭을 갈면서 요순(堯舜)의 도를 좋아하여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면 천하로써 녹을 준다고 하더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였다.” 하였다.
♣ 신야노[莘野老]은(殷) 나라 탕(湯) 임금의 재상이윤(伊尹)이다.
♣ 신야별설옹[莘野蹩躠翁]이윤(伊尹)을 가리킨다. 신야는 이윤이 탕(湯) 임금을 만나기 전에 밭을 갈면서 은거하며 도를 즐겼던 곳이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이윤이 신야의 들에서 밭을 갈면서 요순(堯舜)의 도를 좋아하여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면 천하로써 녹을 준다고 하더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였다.
♣ 신양[神羊]법관(法官)이 머리에 쓰는 해치관(獬豸冠)을 이름. 신양은 바로 신수(神獸)인 해치(獬豸)의 별칭인데, 해치는 사람의 시비 곡직을 잘 알아 부정한 사람을 보면 뿔로 받는다고 하므로 법관이 해치관을 썼다 한다.
♣ 신양일선장[新陽一線長]동지는 일양지월(一陽之月)이라 하여 괘(卦)로 보면 순음(純陰)의 상태에서 아래에 양효(陽爻) 하나가 새로 소생하는 형상에 해당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 신언서판[身言書判]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네 가지 기준.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선발하는 데 활용되는데, 사람이 갖추어야 할 네 조건 용모와 풍채[身], 말씨[言], 문필[書], 판단력[判]을 말한다.
♣ 신연도[新淵渡]신연도는 곧 낭천(狼川)과 소양(昭陽)의 두 강물이 합류하는 곳이다
♣ 신오대거봉[神鰲戴巨峯]옛날 발해(渤海)의 동쪽에 오산(五山)이 있었는데, 오산이 뿌리가 없이 바다 위에 떠있어 항상 파도에 따라 이리저리 왕래하므로, 제(帝)가 큰 거북 15마리로 하여금 이 산을 머리로 이고 있게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湯問》
♣ 신우혈[神禹穴]석두(石竇) 즉 바위 동굴을 가리킨다. 우(禹) 임금이 황제(黃帝)의 책을 얻어 동굴 속에 보관해 두었다는 우혈(禹穴)의 전설이 전한다.
♣ 신운[身雲]신운은 정처가 없는 몸을 말한다.
♣ 신월[新月]보통 초생달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새로 가득 찬 보름의 만월(滿月)을 뜻한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십오일 밤 신월의 달빛, 이천 리 밖 벗의 마음.[三五夜中新月色 二千里外故人心]”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4 8月15日夜禁中獨直對月憶元九》
♣ 신월[辰月]진월(辰月)은 3월을 가리킨다.
♣ 신위[蜃衛]신위는 제왕의 영구차(靈柩車)이다.
♣ 신위계[薪爲桂]소진(蘇秦)이 초왕(楚王)에게 하는 말에, “나라의 쌀이 옥보다 귀하고, 섶[薪]이 계수보다 귀하다.” 한 말이 있다.
♣ 신유[神遊]꿈속에서 놀았다는 말로서, 직접 가보지는 않았으나 정신이 그 곳에 놀았다는 뜻.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황제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서 놀았는데, 수레나 배를 타고 가본 것이 아니고 신유하였을 따름이다.” 하였다.
♣ 신음완[呻吟緩]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정(鄭) 나라 사람 완(緩)이 구씨(裘氏)의 땅에서 신음(呻吟)하면서 3년을 보내고 유자(儒者)가 되었다.” 하였는데, 여기서 신음한다는 것은 유가의 경전을 열심히 독송하는 것을 말한다.
♣ 신응[神鷹]초 문왕(楚文王)이 운몽택(雲夢澤)에 사냥을 나갔을 때 아끼던 매[神鷹]가 솟구쳐 올라가 큰 새 한 마리를 잡았는데 박식한 자가 그 새를 보고는 대붕(大鵬)의 새끼라고 하였다 한다. 《幽明錄》
♣ 신이로[愼耳老]이로는 신후담(愼後聃)의 자(字). 도ㆍ불ㆍ병가(道佛兵家)에 두루 통했고, 20세에 진사가 된 후에는 벼슬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 정진했다 함. 저서에는 하빈집(河濱集)이 있음.
♣ 신인미대외[神人迷大隗]장자(莊子)에, “황제(黃帝)가 대외(大隈)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이 있다.
♣ 신인종[神印宗]범어(梵語) 문두루(文豆婁)의 번역어. 신라의 중 명랑(明朗)이 선덕여왕 1년(632)에, 당 나라에 가서 법을 배우고 돌아와 세운 종파(宗派).
♣ 신자응[神自凝]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정신이 전일하여 엉킨다는 뜻이다.
♣ 신작[申綽]조선 말기의 학자로, 일찍이 학문에 전심하여 경서(經書)들을 고증학적 방법으로 주석하는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호는 석천(石泉)이다.
♣ 신장[宸章]왕의 시문(詩文)을 뜻하는 말이다.
♣ 신적[薪積]섶나무를 쌓을 때는 나중에 쌓는 것이 계속 위로 올라가듯이, 나중에 벼슬한 자가 전임자보다 중용되고 전임자는 항상 미관말직에 있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 신전[信箭]신전은 진영에서 군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작은 화살인데, 화살 깃 아래에 신(信)자를 썼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신정[新亭]동진(東晉)의 왕도(王導) 등 명사(名士)들이 강녕현(江寧縣)에 있는 신정에 모여 연음(宴飮)하면서 국운의 쇠퇴함을 탄식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던 고사가 있다.
♣ 신정[新亭]서진(西晉)이 멸망한 뒤에 강남(江南)으로 도망친 사대부들이 연회를 베풀다가 “풍경은 특별히 다를 바가 없다마는, 산하는 어쩌면 이다지도 틀리단 말인가.[風景不殊 正自有山河之異]”라고 탄식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정자 이름이다. 《世說新語 言語》
♣ 신정상대읍[新亭相對泣]진(晉)나라는 외래 민족에게 중원(中原)을 빼앗기고 강동(江東)으로 옮겨갔는데, 하루는 여러 사람들이 신정(新亭)에 나와 놀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산하(山河)는 다르지 않으나 풍경이 예와 다르다.” 하면서 서로 보고 울었다.
♣ 신정수장루[新亭垂壯淚]시세(時世)를 근심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일찍이 동진(東晉)의 명사(名士)들이 신정(新亭)에 올라가 연음(宴飮)하면서, 쇠잔한 국운(國運)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던 데서 온 말이다.
♣ 신조[辛朝]고려 말의 우(禑)ㆍ창(昌) 두 왕을 중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조선조에 와서 그 당시의 고려조를 신조(辛朝)라고 혹평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 후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금오산(金烏山)을 지나면서 읊은 시에도, “신조의 주서였던 길야은[辛朝注書吉治隱]”이라는 구절이 있음. 《治隱集 言行拾遺 卷下》
♣ 신종모루[晨鍾暮漏]세월이 덧없이 흘러감을 뜻한다.
♣ 신좌모[申佐模]자는 좌인(左人), 호는 담인(澹人).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조정에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 신주[神州]중국을 말한다. 전국 시대 때의 학자 추연(鄒衍)이 중국을 신주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는 중국의 별칭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 신주환어수[臣主歡魚水]한(漢) 나라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얻은 뒤에, “내가 공명(孔明)을 얻은 것은 고기가 물을 얻음과 같다.” 하였다.
♣ 신지식곡[神之式穀]시경(詩經)에, “신이 들어서 녹으로 네게 주도다.[神之能之 式穀以女]”하였다.
♣ 신천[新阡]새로 쓴 무덤.
♣ 신천옹[信天翁]새의 이름. 제 스스로 고기를 잡을 줄 모르고 남이 잡은 고기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새라고 하는데, 스스로 창작할 줄은 모르고 남의 작품의 나머지나 모아서 글을 짓는 것에 비유한다.
♣ 신첩[臣妾]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 나라에 애걸하는 말에, “남자는 신하가 되고, 여자는 첩(妾)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 신체발부[身體髮膚]몸뚱이의 전체. 몸과 털, 피부.
♣ 신초[申椒]주자집주(朱子集註)에, “椒 木實之香者 申 或地名 或其美名耳”라 하였음.
♣ 신출귀몰[新出鬼沒]귀신과 같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짐. 자유자재로 출몰하여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일. 홀현홀몰(忽顯忽沒)
♣ 신토불이[身土不二]몸과 땅이 둘이 아님. 신토불이는 원래 불교용어로, 불교에서는 윤회를 하면서 한 生을 살 때마다 몸을 새롭게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느냐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디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막에서 몸을 받을 수도 있고, 깊은 산 속, 혹은 멀리 떨어진 바다의 외딴 섬에서 몸을 받을 수도 있다. 이때,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때 몸의 종류와 함께 그 몸이 태어날 땅까지도 함께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과 땅은 별개가 아니고 하나라는 것이다
♣ 신통칠십자[身通七十子]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몸소 육예를 통달한 제자가 72인이었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 70이라고 한 것은 곧 성수(成數)만 들어 말한 것이다.
♣ 신포[神庖]신통(神通)한 백정(白丁)을 가리키는 말인데, 도(道)에 능통한 것을 비유함이다. 장자(莊子) 양생주( 養生主)에 “훌륭한 백정은 매년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자르기 때문이요, 보통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칼은 19년이 되었고 그동안에 잡은 소는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낸 것처럼 예리합니다.” 하였다.
♣ 신포[神布]함경도와 강원도에만 있던 세금으로 군민(軍民)에게 호(戶)마다 베 1필씩을 거두어 관찰사나 절도사에게 바치기도 하고, 또는 상납이나 관부의 비용으로 쓰기도 하였는데 명분 없는 세금으로 민폐가 많았다.
♣ 신포서[申包胥]초나라의 대부
♣ 신풍[晨風]새매의 별명임. 시경(詩經) 진풍(秦風) 신풍(晨風) 장에, “鴥彼晨風 鬱彼北林”이라 하였음.
♣ 신풍[新豐]신풍은 한 고조(漢高祖)가, 자기 고향 풍(豐)이 그리워 그리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태상황(太上皇)을 위하여 풍과 비슷하게 새로 만든 고을이다.
♣ 신풍[迅風]질풍.
♣ 신풍절비옹[新豊折臂翁]신풍(新豊)에 출정함을 기피하려고 스스로 어깨를 부러뜨린 늙은이가 있는 것을 보고 읊은 시제(詩題). 백장경집(白長慶集) 제3권 풍유(諷諭)에 보임.
♣ 신현옹[申玄翁]현옹은 신흠(申欽)의 호이다.
♣ 신호숭악[神呼嵩嶽]한 무제가 화산(華山)에서 숭산(嵩山)에 이르러 직접 산을 제사 지낼 때 어디선가 만세 삼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漢書 武帝紀》
♣ 신호천청지자아민혜[信乎天聽之自我民兮]서경(書經)에,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으로부터요, 하늘이 듣는 것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으로부터라.” 하였다.
♣ 신혼[晨昏]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린다는 뜻[昏定晨省]으로,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 신화[薪火]도(道)의 계승을 이름.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指窮於爲薪火傳也 不知其盡也"라 하였음.
♣ 신화[新火]옛날 사계절마다 각각 다른 나무로 불을 일으켜 그 불씨를 전해 주던 일. 개화(改火)라고도 한다.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살구나무, 늦여름에는 뽕나무, 가을에는 떡갈나무와 참나무, 겨울에는 홰나무와 박달나무를 썼다. 《禮記 月令》
♣ 신화작청명[新火作淸明]청명(淸明) 하루 전인 한식(寒食) 날에 예전의 불씨를 일단 껐다가 청명일에 새 불씨[新火]를 일으켜 나눠 받던 풍속이 있었다.
♣ 신확[伸蠖]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하(下)에 “자벌레[尺蠖]가 몸을 구부리는 것은 장차 펴기 위해서이다.[求信]”라고 하였다.
♣ 신환[新懽]새롭게 맺은 우정을 뜻하는 말이다.
♣ 신후다거상[薪後多居上]섶나무는 뒤에 오는 자가 위에 쌓이는 것이니, 자기도 그 섶나무와 같아서 뒤에 오는 사람이 모두 상관으로 있고 자기는 밑에 있다는 말이다.
♣ 신후명[身後名]진(晋)나라 장한(張翰)의 자(字)는 계응(季鷹)인데, 제왕(齊王)의 동조연(東曹椽)으로 있다가 가을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인생은 뜻에 쾌한 것이 제일인데 하필 수천 리 객지에서 이름과 벼슬을 구할 것이 무엇인가.” 하고, 곧 돌아가서 술마시기를 즐기었다. 친구가 그에게, “신후(身後)의 이름을 생각하지 않는가.” 하니, 그는 답하기를, “안전 일배주(眼前一盃酒)를 즐길 뿐이다. 어찌 신후 천재명(身後千載名)을 생각하랴.” 하였다. 얼마 후에 제왕(齊王)이 패하니 사람들이 그가 기미를 알았다 하였다.
♣ 신후수위부귀진[身後誰爲富貴眞]백거이(白居易)의 시에 “귀인(貴人) 되어 높은 수레 으스대는 건, 아마도 진짜 부귀 못 될 듯싶네.[爲報高車蓋 恐非眞富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8 郡中卽事》
♣ 실[悉]모두.
♣ 실고보[失故步]연(燕) 나라 수릉(壽陵) 땅의 여자(餘子)가 조(趙) 나라 서울 한단(邯鄲)에 가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본래의 자기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린 나머지 엉금엉금 기어올 수밖에 없었다는 ‘한단학보(邯鄲學步)’의 이야기가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실려 있다.
♣ 실록[失鹿]임금이 나라를 잃은 것을 비유하였다. 진(秦) 나라의 간신(奸臣) 조고(趙高)가 임금 앞에 사슴을 끌고 와서 말[馬]이라고 한 일이 있었으므로, 진나라가 망한 것을 사슴을 잃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 실리추구[實利追求]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함
♣ 실마[失馬]인생의 길흉 화복은 무상하여, 화가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화가 될 수도 있어 도무지 예측할 수 없음을 말한 것으로, 즉 새옹마(塞翁馬)의 고사에서 온 말인데, 자세한 내용은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에 나타나 있다.
♣ 실마옹[失馬翁]실마옹은 말을 잃은 노인이란 뜻으로 세옹실마(塞翁失馬)를 가리킨다.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에 북쪽 변방에 살고 있던 어떤 노인이 이유 없이 말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쳤다가 뒤에 여러 마리의 말을 데리고 온 일을 인용하여 화복(禍福)의 무상함을 말했으므로, 현재 탄핵을 당한 것이 후일에 복이 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 실비망도[失匕罔圖]유비(劉備)가 조조(曹操)와 술을 마시며 천하의 영웅을 논하다가, “지금 천하 영웅은 오직 그대와 나뿐.”이란 조조의 말에 놀라 손에 들었던 숟가락이 저도 모르게 땅에 떨어졌는데, 마침 우레가 요란했으므로, “아, 천둥소리에 혼이 났군.” 하고 핑계했다. 《三國志演義》
♣ 실사구시[實事求是]실제 일로써 옳은 것을 구함. 실제적인 일에서 올바름을 찾음. 즉,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함. 실제로 있는 일에서 진리를 구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성리학의 연구 태도가 지나치게 관념적인 세계에 치중하여 그 폐단이 드러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구체적인 학문의 방도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제시하였다
♣ 실상[實相]불가(佛家)의 용어로, 생멸(生滅) 무상(無常)의 상(相)을 떠난 만유제법(萬有諸法)의 진상(眞相), 즉 본체(本體)를 말한다.
♣ 실소[失笑]참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
♣ 실솔[蟋蟀]귀뚜라미과에 속하는 곤충. 첫가을부터 밤에 움.
♣ 실솔[蟋蟀]매우 검소함을 비유한 말. 실솔은 시경(詩經) 당풍(唐風)의 편명인데, 그 내용은 요(堯) 임금의 옛 도읍지인 당(唐) 나라가 아직도 요 임금의 남긴 덕이 있어, 백성들의 풍속이 매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서로 본분을 잃지 말자고 경계하는 뜻을 노래한 것이다.
♣ 실솔입상하[蟋蟀入床下]날이 추워질수록 귀뚜라미는 다스운 곳으로 들어감을 이르는데, 시경(詩經)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시월에 귀뚜라미가 나의 침상 밑에 들어온다[十月蟋蟀 入我床下]” 한 데서 온 말로, 즉 10월이 되어 해가 곧 바뀌게 되었음을 뜻한 말이다.
♣ 실솔편[蟋蟀篇]시전(詩傳)의 편명. 그 시에 “귀뚜라미 마루에 있으니 해가 저물어 가네. 이제 내가 즐기지 않으면 세월은 흐르기만 하리라.” 하였음.
♣ 실실[實實]광대한 모양, 친절한 모양, 확실한 모양
♣ 실위[室韋]종족(宗族)의 이름. 몽고(蒙古)의 동쪽, 만주(滿洲) 흑룡강(黑龍江) 북쪽 지대에 사는 거란(契丹)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그들이 사는 지역을 말한다.
♣ 실유조과객[室有操戈客]후한(後漢)의 하휴(何休)가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정현(鄭玄)이 이것들을 바로잡아서 더욱 잘 발휘하였으므로, 하휴가 보고 탄식하기를, “정강성(鄭康成)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 나의 창을 집어들고 나를 치는구나.” 하였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 실이인비원[室邇人非遠]시경(詩經) 정풍(鄭風) 동문지선(東門之墠)에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를 멀리함을 두고, “그 집은 매우 가까우나 그 사람은 매우 멀도다.[其室則邇 其人則遠]”라고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가까이 있고 또 그가 나를 멀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실인쟁석지무아[室人爭席知無我]덕이 높음을 비유한 말. 옛날 양자거(陽子居)란 사람이 여관에서 노자(老子)를 만나뵈자, 노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눈을 치뜨고 내리뜨고 부릅뜨며 거만하니, 누가 너와 함께 있으려 하겠느냐. 참으로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은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법이다.” 하므로, 양자거가 본래의 모습을 고친 결과, 처음에는 그에게 대단히 공경을 하던 동숙자(同宿者)들이 그제야 그와 좋은 좌석을 서로 다툴 정도로 친해졌다는 데서 온 말이다. 《莊子 寓言》
♣ 실제[實際]실제는 불교의 용어로 우주(宇宙)의 본체(本體)로서 불변하는 진실, 즉 진여 실상(眞如實相)을 말한다.
♣ 실지빈[實之賓]“이름은 실상의 손이다[名者實之賓].”라는 옛사람의 말이 있다.
♣ 실천궁행[實踐躬行]말로 하지 않고 실천하며, 남에게 시키지 않고 몸소 행함.
♣ 심가비[沈家脾]서씨는 당 나라 때 강직하기로 이름난 서회(徐晦)이고, 심가는 그와 같은 시대의 심전사(沈傳師)인데, 한림학사(翰林學士)ㆍ중서사인(中書舍人) 등 청직과 여러곳의 지방관을 오랫동안 지냈으나 세상의 영욕에 관심이 없어 권세가에 아부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서회는 술을 즐겨마시고 심전사는 음식을 잘 먹어 당시의 재상인 양사복(楊嗣復)이 말하기를 “서가의 폐장과 심가의 비장은 참으로 편안한가.”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唐語林》
♣ 심계[心溪]이광석(李光錫)의 호.
♣ 심기[心旗]심기는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여 마치 깃발처럼 동요하는 것을 말한다. 전국책(戰國策) 초일(楚一)에 “초왕(楚王)이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누워도 자리가 편치 않고 먹어도 맛이 달지 않고 마음이 흔들리어 마치 달아놓은 깃발[懸旌]과 같다’ 했다.” 하였다.
♣ 심기일전[心機一轉]마음의 틀(심기; 마음의 기능이나 활동)을 한 번 바꿈. 어떤 계기로 이제까지 품었던 마음이나 생각을 완전히 바꿈
♣ 심덕용[沈德用]덕용은 심명세(沈命世)의 자(字).
♣ 심덕잠[沈德潛]청 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확사(確士), 호는 귀우(歸愚)이다. 시문에 능할 뿐만 아니라 역대의 시(詩)의 원류에 조예가 깊어 변석(辨析)이 정심(精審)하였다. 저서로는 오조시별재집(五朝詩別裁集)ㆍ시원(詩源) 등이 있다.
♣ 심덕현[沈德顯]덕현은 심광세(沈光世)의 자(字)이다.
♣ 심도도[心忉忉]시경(詩經) 제풍(齊風) 보전(甫田)에 나오는 말인데, 원문은 “큰 밭 경작하지 말지어다, 가라지가 무성해지리라. 멀리 떠난 사람 생각하지 말지어다, 마음만 우울해지리라.[無田甫田 維莠驕驕 無思遠人 勞心忉忉]”로 되어 있다.
♣ 심동양[沈東陽]양(梁) 나라 때 뛰어난 문장가로 일찍이 동양 태수(東陽太守)를 지낸 심약(沈約)을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났고, 높은 관직을 지내면서도 매우 검소하여 처사(處士)와 같은 풍류가 있었다.
♣ 심두육[心頭肉]심장(心臟) 위의 살을 이름. 몹시 아끼는 사람이나 물건. 섭이중(聶夷中)의 전가시(田家詩)에 “이월에 새 실을 팔고 오월에는 새 곡식을 내어서 눈 앞의 상처는 다스렸으나 심두육을 깎아내었네[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剜却心頭肉]” 한 데서 온 말로, 즉 먹을 것이 없어 심장병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
♣ 심등[心燈]불교에서 인간의 심령(心靈)을, 일체의 사물(事物)을 환히 비추는 등불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 심랑구[沈郞癯]양(梁)의 문장가인 심약은 몸이 약하여 늘 앓았는데, 그의 친구인 서면(徐勉)에게 준 편지에 “요즘 병이 더욱 심하여 백여 일 동안에 몸이 야위어 허리띠 구멍이 넓어지고 한 달 동안에 팔목이 반 푼이나 줄었다.” 하였다. 《梁書 沈約傳》
♣ 심류철[深旒綴]면류관 줄이 눈 앞을 가로막아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로, 중국의 황제가 상황 판단을 잘 하여 사태를 적절하게 타개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참고로 당(唐) 나라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에 “면류관에 드리운 구슬줄이 눈 앞을 가릴지라도 임금은 아직 채 드러나지 않은 조짐까지도 볼 수가 있어야 하며, 면류관에서 드리워진 노란 솜방울이 귀를 막을지라도 임금은 아직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지 않은 백성들의 목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雖冕旒蔽目而視於未形 雖黈纊塞耳而聽於無聲]”는 구절이 있으며, 두보의 시에 “충신이 억울하게 죄를 받았건만, 궁중은 면류관 줄에 깊이 가려졌네.[忠貞負寃恨 宮闕深旒綴]”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6 贈祕書監江夏李公邕》
♣ 심맹[心盲]심맹은 감각병(感覺病)의 일종으로서, 즉 시각(視覺)의 기관은 결손됨이 없으나, 시각의 인식이 완전하지 못하여 마치 맹인처럼 시각으로 인해 물체를 알아보지 못함을 뜻한다.
♣ 심번려란[心煩慮亂]마음이 괴롭고 생각이 어지럽다.
♣ 심병기소희[心兵起小姬]심병은 색정(色情)이 동하는 것을 이른 것으로, 송(宋)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희영난족병시(戲詠煖足甁詩)에 “소희가 발을 따뜻하게 해주니 때로는 심병을 일으키기도 한다[小姬煖足臥 或能起心兵]” 한 데서 온 말이다.
♣ 심복지환[心腹之患]인체의 중요한 부분인 가슴과 배에 생긴 병으로 받는 고통, 외부가 아닌 내부의 화근으로 생긴 병폐를 뜻하는 고사성어.
♣ 심비분감[沈臂分减]나이가 들수록 건강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남조(南朝) 양(梁)의 심약(沈約)이 노쇠하여 병든 나머지 1백여 일이 지나는 사이에 허리띠의 구멍을 자꾸만 새로 뚫게 되고 손으로 팔뚝을 만져 보면 부쩍부쩍 말라만 갔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梁書 沈約傳》
♣ 심비석[心匪石]변치 않는 지조를 뜻함. 시경(詩經) 패풍(邶風) 백주(柏舟)에 “내 마음이 돌이 아니라 구를 수가 없도다[我心匪石 不可轉也]”하였다.
♣ 심사[心事]마음속에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일.
♣ 심사숙고[深思熟考]깊이 생각하고 자세하게 살펴 봄. 깊이 잘 생각함을 뜻한다. 심사묵고(深思黙考), 심사숙려(深思熟慮)
♣ 심산유곡[深山幽谷]깊은 산과 그윽한 골짜기. 깊고 험한 산과 깊숙하고 고요한 골짜기
♣ 심삼[沈三]심삼은 곧 중당(中唐)의 이름 높은 시인이었던 심전기(沈佺期)를 가리키는데, 특히 그의 시는 대(對)가 정밀하면서도 화려하기로 유명하였다.
♣ 심서가[沈徐家]심서가는 곧 당(唐) 나라의 심전사(沈傳師)와 서회(徐晦)를 합칭한 말인데, 심전사는 음식을 잘 먹었고 서회는 술을 잘 마시는 주호(酒豪)로서 일찍이 양사복(楊嗣復)이 말하기를, “서가(徐家)의 폐장(肺腸)과 심가(沈家)의 비장(脾腸)은 참으로 편안한가?" 한 데서 온 말이다.
♣ 심석전[沈石田]심석전은 명(明) 나라 때 은사(隱士)인 심주(沈周)를 가리킴. 심주는 시ㆍ서ㆍ화에 모두 뛰어났고, 풍류가 당세에 제일이었는데, 당시 수차에 걸쳐 벼슬의 권유를 받았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모친을 떠날 수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었다. 《明史 卷二百九十八》
♣ 심성[心星]심성(心星)은 천자의 상징이다.
♣ 심송[沈宋]심송은 당(唐) 나라 때 유명한 시인(詩人)인 심전기(沈佺期)ㆍ송지문(宋之問)의 병칭이다. 심전기ㆍ송지문의 시체(詩體)를 심송체(沈宋體)라고 한다.
♣ 심수권조비[心隨倦鳥飛]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새도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을 안다.[鳥倦飛而知還]”는 구절이 있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심수지[深遂之]수지는 심기원(沈器遠)의 자(字)이다.
♣ 심심[深深]고요하고 희미한 모양, 깊숙하고 어둠침침한 모양, 깊고 깊음
♣ 심심[伈伈]두려워하는 모양
♣ 심심[心心]마음과 마음
♣ 심심[心心]불꽃의 중심 부분.
♣ 심심상인[心心相印]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함.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 심아청청[深莪菁菁]새발쑥이 우거졌다는 것은 인재를 잘 양성한다는 말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무성하고 무성한 새발쑥이여, 저 언덕 가운데 있도다.[菁菁者莪 在彼中阿]”하였는데, 이에 대한 모서(毛序)에, “청청자아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즐거워한 시이다.” 하였다.
♣ 심약[沈約]남조(南朝) 양(梁) 나라 때 학자이며 시인. 자는 휴문(休文). 당시 문단의 영수로서 사조(謝朓)ㆍ왕융(王融)등과 함께 영명체(永明體)를 창출하여 후세 격률시(格律詩)의 서막을 열어 놓았다. 저서에는 진서(晉書)ㆍ송서(宋書)ㆍ사성보(四聲譜) 등이 있음.
♣ 심약의관[沈約衣寬]양서(梁書) 권13에 “심약이 서면(徐勉)에게 진정하기를 ‘약한 몸으로 정무(政務)에 시달려 몸은 병들고 잘못은 중첩되며, 날이 갈수록 허리띠가 줄어든다.’ 했다.” 하였다.
♣ 심약팔영[沈約八詠]양(梁) 나라 때 시인 심약(沈約)이 원창루(元暢樓)에 대하여 읊은 8편의 시를 가리킴.
♣ 심양[潯陽]고향 시골 등 은거지(隱居地)를 뜻하는 말이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과 주속지(周續之), 유유민(劉遺民) 등 3인이 심양 땅에 은거하였으므로, 심양 삼은(潯陽三隱)이라고 일컬었던 고사가 전한다. 《宋書 隱逸傳 周續之》
♣ 심온[燖溫]고기를 삶을 때 뜨거운 물로 털을 벗기고 다시 끓는 물에 넣어 삶는 것으로 곧 그와 같이 정열적으로 학문을 한다는 것임.
♣ 심원[心猿]심원은 설레이는 마음을 말함. 참동계(參同契)의 주에 “심원이 안정되지 못하고 의마(意馬)가 사방으로 달려 신기(神氣)가 밖으로 흩어진다.” 하였음. 산산(山山)은 출(出) 자의 파자(破字)로서 마음이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것임.
♣ 심원[深源]조선 성종 때 왕족인 주계군(朱溪君).
♣ 심원객[尋源客]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아 사신으로 갔던 장건(張騫)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장건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다.
♣ 심원염비훤[心遠厭卑喧]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전원 생활을 노래한 시에 “사람 사는 고장에 움집 엮었으나 그래도 거마의 시끄럼 없네.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소 마음 멀어 지역이 절로 외지오[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하였음. 《陶淵明集 卷三 飮酒 其五》
♣ 심원이매수[心遠已埋愁]후한(後漢) 중장통(仲長統)이 자신의 호방하고 원대한 뜻을 표현하여 “백 가지 생각이 무슨 필요 있으랴, 지극한 요체는 내 맘속에 있는 걸. 시름일랑 하늘 위로 날려보내고, 근심일랑 땅속에 파묻어 두리.[百慮何爲 至要在我 寄愁天上 埋憂地下]”라고 시를 지은 것이 있다. 《後漢書 仲長統傳》
♣ 심원창생기[深源蒼生起]심원(深源)은 진(晉) 나라 은호(殷浩)의 자(字)이다. 은호가 누차 조정의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다가 “심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창생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深源不起 當如蒼生何]”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고서 소명(召命)에 응해 양주 자사(揚州刺史)와 중군장군(中軍將軍)이 되었는데, 뒤에 환온(桓溫)의 참소를 받고 서인(庶人)으로 축출되고 나서 하루 종일 공중에다 ‘그것 참 아무리 생각해도 괴상한 일이다.[咄咄怪事]’라는 네 글자만 손가락으로 계속 쓰곤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77 殷浩傳》
♣ 심위형소역[心爲形所役]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있는 문구인데, 마음이 육체의 사역(使役)을 당하여 본심을 지키지 못하고 생활에 부리어진다는 말이다.
♣ 심유유봉[心猶有蓬]장자(莊子)가 자기 친구인 혜자(惠子)에게 말하기를 “자네[夫子]에게는 아직도 막힌 마음이 있구려[夫子猶有蓬之心也夫]"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逍遙遊》
♣ 심은후[沈隱侯]심은후는 양(梁) 나라 때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심약(沈約)을 이름. 은(隱)은 그의 시호임. 심약은 일찍이 양 고조(梁高祖)의 노염을 사자 이를 몹시 두려워한 나머지 그것이 병이 되어 끝내 죽고 말았다. 《梁書 卷十三》
♣ 심응봉[心應捧]월(越) 나라 서시(西施)가 미인이었는데, 가슴이 아파서 가슴을 움켜쥐고 찡그리니 그 태도가 더욱 예뻤으므로 이웃의 못난 여자가 그것을 모방하여 저도 가슴 아픈 척하고 움켜쥐고 찡그리니 더 못생겨 보였다 한다.
♣ 심인[心印]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불타의 내심(內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뜻의 선종(禪宗)의 용어이다.
♣ 심인사[沈麟士]남조(南朝) 때의 은사(隱士). 그는 여러 사람의 추천을 뿌리치고 늙도록 독서에 힘썼으며, 일찍이 흑접부를 지어 자기의 뜻을 부치었다. 《南史 沈麟士傳》
♣ 심인해일용[深仁諧日用]주역(周易) 계사(繫辭)에, “인자(仁者)는 역(易)을 인(仁)이라 하고, 지자(知者)는 지(知)라 하고, 백성들은 날마다 그것을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하였다.
♣ 심자향[心字香]노향(爐香)의 이름. 반쯤 핀 소형화(素馨花)와 말리화(末利花)를 가지고 제조하는데, 심(心) 자 모양으로 만든다고 한다.
♣ 심재[心齋]마음의 재계. 즉 마음을 텅 비워 외물의 욕심을 물리쳐서 전일정정(專一定靜)하게 함을 말한다. 안회(顔回)가 터득했다는 심재(心齋)의 경지.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심재는 마음을 재계(齋戒)한다는 뜻으로서 마음을 비우고 외물(外物)을 대하는 것이다.[虛者 心齋也]”하였다.
♣ 심재홍곡[心在鴻鵠]바둑을 두면서 마음은 기러기나 고니가 날아오면 쏘아 맞출 것만 생각한다면 어찌되겠느냐는 맹자(孟子)의 언질에서 비롯된 말이다. 학업을 닦으면서 마음은 다른 곳에 씀을 일컫는 말이다.
♣ 심전[心田]마음속에 선과 악의 종자를 간직하고서 어떤 연관된 일을 따라 불리고 키워나가는 것이 마치 밭과 같기 때문에 비유한 것이다.
♣ 심제[心齊]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뜻을 한결같이 하고, 마음을 비워서 도(道)에 합한다는 뜻이다.
♣ 심진[尋眞]진(眞)은 이상경(理想境)을 뜻하는 말로, 이상경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 심진보벌[尋津寶筏]피안(彼岸)을 건너는 배를 말한 것인데 마음으로 통하기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고서 외래의 힘을 말미암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다 비유하여 이와 같이 말 할 수 있음. 한유의 송문창사북유시(送文暢師北遊詩)에 “開張篋中寶 自可得津筏"의 구가 있음.
♣ 심처호[深處胡]백두산 북쪽에 살면서 조선에 친부(親附)하지 않은 오랑캐.
♣ 심청천[沈聽天]조선조의 문신 심수경(沈守慶). 그의 호가 청천당(聽天堂)이고 자는 희안(希安),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관직이 우의정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 심파공백비[潯琶空白悲]심양강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강. 당(唐) 나라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그곳에 귀양갔었는데, 가을밤에 비파 소리를 듣고 지은 비파행(琵琶行)이 있다. 그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비파를 탄 주인공은 본래 장안(長安)의 창녀(娼女) 출신인데, 그녀의 젊었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백낙천은 귀양와 있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서글픔을 깨닫고 비파행을 지어 그녀에게 주었다 한다. 《白香山集 卷十二 琵琶引序》
♣ 심하[深河]무령현(撫寧縣) 동쪽 산해관(山海關) 근처의 진(鎭) 이름.
♣ 심하사적도[深河射敵圖]좌영장(左營將) 김응하가 요동(遼東) 심하(深河)에서 후금(後金)의 군사를 맞아 고군분투한 것을 그린 그림이다.
♣ 심하역[深河役]후금(後金)이 요동(遼東)을 침범하였을 때 명(明) 나라의 요청으로 원병(援兵)을 보내 싸운 일을 말한다. 광해군 10년(1618)에 강홍립(姜弘立)이 1만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명 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부차(富車)에서 명군(明軍)이 전멸하자 전군(全軍)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했다.
♣ 심향[心香]정성스런 마음. 원래는 불가(佛家)의 말로서 자기 마음속으로 지성을 다하면 자연히 부처가 감동하는 것이, 마치 부처 앞에서 향을 피워[焚香] 정성을 표하는 것과 같다 하여 생긴 말로 지극한 숭앙(崇仰)을 가리킨다.
♣ 심혈신구[深穴神丘]들쥐[鼷鼠]가 신구(神丘) 밑에 깊이 구멍을 파고 있어서 사람의 해침을 피한다. 장자(莊子)
♣ 심휴[沈休]심휴는 양(梁) 나라 학자 심약(沈約)을 가리키는데 그의 자 휴문(休文)을 약하여 쓴 것이다.
♣ 심휴문[沈休文]휴문은 양(梁) 나라의 문인(文人) 심약(沈約)의 자이다. 심약은 학문에 널리 통하고 시문(詩文)에 특히 뛰어났었다.
♣ 심희수[沈喜壽]자는 백구(伯懼)이고 호는 일송(一松)이다.
♣ 십가[十駕]둔한 말이 열흘 동안 달리는 것을 이른 말로,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준마는 하루에 천 리를 가지만, 둔마도 열흘 동안 부지런히 가면 역시 천 리를 갈 수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십가유추[十駕猶追]둔한 말로도 열흘을 달리면 하루 천리를 닫는 준마(駿馬)를 따를 수 있다는 뜻.
♣ 십건[十愆]십건은 임금의 정사를 그르치는 열 가지 허물이니, 즉 ①춤[舞] ②노래[歌] ③재화[貨] ④여색[色] ⑤놀이[游] ⑥사냥[畎] ⑦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김[侮聖言] ⑧충직을 거스림[逆忠直] ⑨덕 있는 노성한 이를 멀리함[遠耆德] ⑩못된 자를 가까이 함[比頑童]을 말함이요, 삼풍(三風)은 십건(十愆)을 묶어 말한 정사를 그르치는 세 가지 풍인데, 곧 무풍(巫風)ㆍ음풍(淫風)ㆍ난풍(亂風)으로 위의 십건(十愆)의 ①ㆍ②가 무풍, ③~⑥이 음풍, ⑦~⑩이 난풍이다. 서경(書經)
♣ 십경[十頃]약 3만 평의 면적을 말한다. 참고로 1묘(畝)는 30평(坪), 1경(頃)은 백 묘이다.
♣ 십고십상[十考十上]수령 임기 5년 동안의 최고의 성적이라는 말이다. 매년 2회에 걸쳐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것을 고(考)라 하고, 그 성적을 상ㆍ중ㆍ하로 표시하였는데, 10회 평가에 모두 상의 성적을 얻는 것을 십고 십상이라 하였다.
♣ 십곡[十谷]곡산의 고호인데 고구려 때의 이름임.
♣ 십난[十亂]난(亂)은 치(治)의 뜻으로, 주 무왕(周武王)에게 난신(亂臣) 10인이 있었는데, 그중에 무왕의 처 읍강(邑姜)이 들어 있다. 《書經 泰誓》
♣ 십년좌박산령초[十年坐博山靈誚]산골에 칩거하며 은자(隱者)인 척 행세한 속인의 작태를 산신령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남조 제(齊) 공치규(孔稚珪)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이란 글에 상세한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 십년지계[十年之計]십년의 큰 계획(나무를 심는 일).
♣ 십년지기[十年知己]여러 해 친하게 사귀어 온 친구.
♣ 십년호해신은중[十年湖海新恩重]박동량이 광해군 5년(1613)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에 저주했다는 무고를 시인하여 폐모(廢母)의 구실을 삼게 했다는 혐의로, 인조반정 직후에 부안(扶安)으로 유배되고 다시 충원(忠原)에 양이(量移)되었다가, 10년만인 인조 10년(1632)에 풀려나 전리(田里)로 돌아간 것을 말한다.
♣ 십년훈유[十年薰蕕]향취와 악취는 군자와 소인을 비유한 것으로, 좌전(左傳) 희공(僖公) 4년에 “하나의 향내 나는 풀과 하나의 악취 나는 풀을 같이 놓아두었을 경우, 십년이 가도 악취만 남게 된다.[一薰一蕕 十年尙猶有臭]”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곧 군자의 도는 사라지기가 쉽고, 소인의 도는 득세하기가 쉬움을 뜻한 말이다.
♣ 십동[十桐]청 나라 고밀(高密) 사람 이희민(李懷民)의 호인데, 그는 장위(張爲) 주객도의 예에 따라 원화(元和) 이후 제가(諸家)의 오율(五律)을 수집하여 장적(張籍)ㆍ가도(賈島)를 받들어 주인으로 삼고 중만당(中晩唐)의 주객도를 증정(增訂)한 일이 있음. 저술로는 십동초당집(十桐草堂集)이 있음. 《淸史列傳》
♣ 십란[十亂]주 무왕(周武王)이 말하기를 “나에게 난신 열 사람이 있다.[予有亂臣十人]” 한 데서 온 말인데, 난(亂)은 곧 치(治)와 같은 뜻이고, 열 사람이란 바로 주공 단(周公旦)ㆍ소공석(召公奭)ㆍ태공망(太公望)ㆍ필공(畢公)ㆍ영공(榮公)ㆍ태전(太顚)ㆍ굉요(閎夭)ㆍ산의생(散宜生)ㆍ남궁괄(南宮适)과 그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무왕의 후비인 읍강(邑姜)이었다고 한다. 《論語 泰伯》
♣ 십력[十力]부처가 갖추어 간직하고 있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열 가지 지혜의 힘을 이른다.
♣ 십맹일장[十盲一杖]열 소경에 한 막대기. 어떠한 사물이 여러 곳에 다같이 긴요하게 쓰임을 가리키는 말.
♣ 십목소시[十目所視]모든 사람이 다 보고 있어 세상 사람을 속일 수 없음.
♣ 십묘지[十畝地]벼슬을 버리고 전원에 돌아가 은거하는 생활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성곽 안에 밭 10묘만 있으면, 농사를 지어 옷 해 입기에 충분하다.[郭內之田十畝 足以爲絲麻]”는 안회(顔回)의 말이 나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십무[十畝]십묘(十畝)는 시경(詩經) 위풍(魏風)의 편명인데, 이 시는 곧 나라의 정사(政事)가 어지럽고 위태로워지자 현인(賢人)이 벼슬을 버리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부른 노래이다.
♣ 십벌지목[十伐之木]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라는 뜻
♣ 십붕[十朋]한 자 두 치의 큰 거북은 값이 십붕(十朋)이나 간다. 붕(朋)은 옛날 화폐(貨幣)의 수량이다.
♣ 십사관[十四貫]주인의 시(詩)가 일련(一聯; 14자)으로 된 때문이다.
♣ 십삼십일두[十三十一頭]전설에 의하면 천지가 개창(開創)될 때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의 삼황이 나타나 다스리기 시작했는데, 천황은 머리가 열 셋, 지황은 열 하나, 인황은 아홉이라 하였다.
♣ 십상팔구[十常八九]열이면 여덟이나 아홉은 그러함
♣ 십승거[十乘車]전국 시대 양 혜왕(梁惠王)이 “앞뒤로 각각 수레 12승(乘)을 비춰 주는 보배로운 구슬이 10개나 있다.”고 제 위왕(齊威王)에게 자랑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
♣ 십승지지[十勝之地]기근이나 병화(兵禍)의 염려가 없다고 술가(術家)에서 일컫는 열 군데의 땅으로, 모두 충청ㆍ전라ㆍ경상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십시일반[十匙一飯]밥 한 그릇에서 열 숟가락씩. 여러 사람이 조금만 도와 주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큰 힘이 됨을 이름.
♣ 십신[十身]불(佛)의 덕을 상징(象徵)하여 십신(十身)이 있다 한다.
♣ 십신[十臣]주 나라의 무왕을 도와서 주(紂)를 치게 한 자는 모두 열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주 나라의 큰 공신이었다.
♣ 십실[十室]십 호(十戶)쯤 되는 작은 마을을 가리킨다.
♣ 십실전성양[十室專城養]십실이란 열 집으로, 작은 고을을 뜻한다.
♣ 십육자[十六字]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명한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의 열 여섯 자를 말하는데, 이는 성학 심법(聖學心法)의 요결이다.
♣ 십육천마[十六天魔]불가어(佛家語). 욕계(欲界) 제6천(天)의 파순(波旬)을 위주한 16 마군(魔軍)들.
♣ 십이가[十二街]당(唐) 나라 장안성(長安城)이 남북으로 일곱 거리이고 동서로 다섯 거리여서 도합 열두 거리인데, 후세에는 왕성의 거리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 십이가[十二街]십이가는 당(唐) 나라 서울 장안성(長安城)의 거리임. 장적(張籍)의 봉가도시(逢賈島詩)의 “십이가 길 위에 봄눈이 덮였는데 이제 떠나는 말발굽 누구 집에 들어갈꼬[十二街中春雪遍 馬蹄今去入誰家]"를 인용하였음.
♣ 십이경루[十二瓊樓]선경(仙境)에 있다는 구슬로 장식한 열 두 누대(樓臺)를 이르는데, 전하여 대궐(大闕)을 가리킨다.
♣ 십이도[十二徒]고려 때의 사학(私學)에 십이도(十二徒)가 있어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었다.
♣ 십이도[十二徒]십이공도(十二公徒)라고도 하는데, 고려 문종 이후 개경(開京)에 있었던 12사학(私學)의 생도(生徒)를 총칭한 것. 당시 최충(崔冲)의 구재(九齋)를 모방하여 11인의 유신(儒臣)들이 학교를 열어 제자를 가르쳤는데, 11인의 도(徒)에 최충의 도를 합하여 십이공도라 불렀다. 십이도는,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 정배걸(鄭倍傑)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노단(盧旦)의 광헌공도(匡憲公徒), 김상빈(金尙賓)의 남산공도(南山公徒),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西園徒), 은정(殷鼎)의 문충공도(文忠公徒), 김의진(金義珍)의 양신공도(良愼公徒), 황영(黃瑩)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柳監)의 충평공도(忠平公徒), 문정(文正)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서석(徐碩)의 서시랑도(徐侍郞徒),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龜山徒)를 말한다.
♣ 십이루[十二樓]십이루는 대궐 안에 있는 누각을 뜻한다.
♣ 십이만구천륙백[十二萬九千六百]송(宋) 나라 소옹(邵雍)이 주장한, 즉 천지가 순환하여 원시의 상태로 복귀될 때까지의 일기(一期)를 말한다.
♣ 십이문도[十二門徒]고려 시대에 개경(開京)에 있었던 열두 사학(私學)의 생도를 총칭한 것인데, 당시 최충(崔沖)의 구재(九齋)를 모방하여 11인의 유신(儒臣)들이 사학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11인의 문도(門徒)에 최충의 문도를 합하여 십이문도라고 불렀다. 십이공도(十二公徒).
♣ 십이봉[十二峯]청량산(淸涼山)의 산봉우리는 모두 열두 개로, 장인봉(丈人峯), 외장인봉(外丈人峯), 선학봉(仙鶴峯), 축융봉(祝融峯), 경일봉(擎日峯), 금탑봉(金塔峯), 자란봉(紫鸞峯), 자소봉(紫宵峯), 연적봉(硯滴峯), 연화봉(蓮花峯), 탁필봉(卓筆峯), 향로봉(香爐峯)이 있다.
♣ 십이신장[十二神將]불가의 말로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열 두 신명(神明)을 말하는데, 즉 자(子)ㆍ축(丑)ㆍ인(寅)ㆍ묘(卯)ㆍ진(辰)ㆍ사(巳)ㆍ오(午)ㆍ미(未)ㆍ신(申)ㆍ유(酉)ㆍ술(戌)ㆍ해(亥)의 열 두 방위(方位)에 있는 신장(神將)이라 한다.
♣ 십이율[十二律]육률(六律)과 육려(六呂)를 이름. 주례(周禮) 춘관(春官) 전동(典同)에, “律十有二 陽六爲律 陰六爲呂 律爲統氣類物 呂以旅陽宣氣”라고 보임.
♣ 십이제[十二齊]전국 시대 진(秦) 나라의 함곡관은 워낙 지형이 험하여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으로 유명하였으며 제(齊) 나라 역시 멀리 떨어져 있고 땅이 비옥하여 공격하기 어려운 나라로 일컬어졌다. 사기(史記) 한고조기(漢高祖紀)에 “진 나라는 백이(百二)를 얻었고 제 나라는 십이(十二)를 얻었다.” 한 말이 있는데, 이는 진 나라 지형은 두 명이 적병 백 명을 당할 수 있고 제 나라는 적병 열 명을 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 십이지지[十二地支]자(子)ㆍ축(丑)ㆍ인(寅)ㆍ묘(卯)ㆍ진(辰)ㆍ사(巳)ㆍ오(午)ㆍ미(未)ㆍ신(申)ㆍ유(酉)ㆍ술(戍)ㆍ해(亥).
♣ 십이진[十二辰]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말하는데, 이 시에서도 이에 해당하는 쥐[鼠], 소[牛], 범[虎], 토끼[兎], 용(龍), 뱀[蛇], 말[馬], 양(羊), 잔나비[猿], 닭[鷄], 개[狗], 돼지[猪]가 차례로 등장한다.
♣ 십이천[十二天]불교에서 말하는 범천(梵天), 지천(地天), 월천(月天), 일천(日天), 제석천(帝釋天), 화천(火天), 도마천(熖摩天), 나찰천(羅刹天), 수천(水天), 풍천(豐天), 비사문천(毘沙門天), 대자재천(大自在天)을 말한다.
♣ 십일모[什一謀]십일의 계책이란 곧 장삿군이 십분지일(什分之一)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이르는데, 남조 송(南朝宋) 때에 유백룡(劉伯龍)이 워낙 빈궁하였으므로, 한번은 식구들을 불러놓고 장차 장사를 해볼 계책을 하였더니, 한 귀신이 곁에서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그러자 유백룡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빈궁한 것도 본디 운명인 것인데, 공연히 귀신에게 비웃음만 받았구나.” 하고는 그 계책을 그만두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십일정민[什一征民]십일세. 삼대(三代) 때 농경지(農耕地)에 적용한 정전법(井田法)에서 수입의 십분의 일을 조세(租稅)로 국가에 납부하던 제도를 말한다.
♣ 십일지국[十日之菊]국화는 핀 지 9일 되는 날이 절정이므로 이미 때가 늦었다는 말이다.
♣ 십전[十銓]인재를 가리는 데 있어 한 사람에 대하여 열 차례의 전형을 거치는 제도임. 당(唐) 나라 때 본래는 삼전(三銓)이었으나, 호부 시랑 우문융(宇文融)이 건의하여 십전의 제도를 만들어서 예부 상서 소정(蘇頲) 등에게 나누어 주관하도록 했었다. 《唐書 選擧志》
♣ 십전구도[十顚九倒]여러 가지 고생을 겪음.
♣ 십주[十洲]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신선들이 산다고 하는 열 개의 산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선경(仙境)을 가리킨다. 해내십주기(海內十洲記)에, “한 무제(漢武帝)가 이미 서왕모(西王母)가 말한 팔만(八萬)의 큰 바다 가운데에 조주(祖洲), 영주(瀛洲), 현주(玄洲), 염주(炎洲), 장주(長洲), 원주(元洲), 유주(流洲), 생주(生洲), 봉린주(鳳麟洲), 취굴주(聚窟洲) 등이 있다고 한 말을 들었는데, 이 열 개의 주는 인적이 아주 드문 곳이었다.” 하였다.
♣ 십주삼도[十洲三島]바다 가운데의 신선이 산다는 곳.
♣ 십중팔구[十中八九]열이면 여덟이나 아홉은 그러함.
♣ 십천경[十千輕]왕유(王維)의 시에 “신풍 땅 맛 좋은 술 한 말에 만 전(錢)[新豐美酒斗十千]”이라는 표현이 있다. 《王右丞集 卷14 少年行》 또 이백(李白)의 시에 “마음껏 미주(美酒) 마셨나니 한 말에 만 금[斗酒十千恣歡謔]”이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集 卷2 將進酒》
♣ 십천전[十千錢]십천은 곧 천 전(千錢)의 10배인 만 전(萬錢)을 뜻한다.
♣ 십철[十哲]십철(十哲)은 안연(顔淵)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苒伯牛)ㆍ중궁(仲弓)ㆍ염유(苒有)ㆍ계로(秀路)ㆍ재아(宰我)ㆍ자공(子貢)ㆍ자유(子游)ㆍ자하(子夏)이다.
♣ 십칠잔편[十七殘篇]한(漢) 나라 초기에 노(魯)의 고당생(高堂生)이 진화(秦火)에 타다 남은 예경(禮經) 17편을 전수함으로써 뒤에 대덕(戴德)ㆍ대성(戴聖)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전(傳)이 편찬되었다 한다. 《漢書 卷八十八》
♣ 십팔공[十八公]솔[松]을 십팔공(十八公)이라 하는데, 송(松)자를 파자(破字)한 것이다.
♣ 십팔기[十八技]십팔기는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에 훈국랑(訓局郞) 한교(韓嶠)에게 명하여 무예보(武藝譜)를 편찬하고, 곤봉(棍棒)ㆍ등패(藤牌)ㆍ낭선(狼筅)ㆍ장창(長槍)ㆍ당파(鐺鈀)ㆍ쌍수도(雙手刀)의 육기(六技)를 정하였는데, 영조(英祖) 기사년(1749)에 죽장창(竹長槍)ㆍ기창(旗槍)ㆍ예도(銳刀)ㆍ왜검(倭劍)ㆍ교극(交戟)ㆍ월도(月刀)ㆍ협도(挾刀)ㆍ쌍검(雙劍)ㆍ제독검(提督劍)ㆍ본국검(本國劍)ㆍ권법(拳法)ㆍ편곤(鞭棍) 등 십이기(十二技)를 보태어 십팔기를 만들었다. 《武藝圖譜通志》
♣ 십팔청함[十八淸銜]오(吳) 나라 정고(丁固)가 상서(尙書)가 되었을 때, 꿈에 소나무가 배 위에서 났었다. 사람에게 이르기를 “송자(松字)는 십팔공(十八公)이니 18년 뒤에 내가 공(公)이 될 것이다.” 하였다 한다. 《吳志 孫皓傳 注》
♣ 십팔학사[十八學士]십팔학사는 당 태종(唐太宗)때 문학관(文學館)에서 전적을 강론하던 18인의 학사로, 두여회(杜如晦)ㆍ방현령(房玄齡)ㆍ우지녕(于志寧)ㆍ소세장(蘇世長)ㆍ설수(薛收)ㆍ저량(褚亮)ㆍ요사렴(姚思廉)ㆍ육덕명(陸德明)ㆍ공영달(孔穎達)ㆍ이현도(李玄道)ㆍ이수소(李守素)ㆍ우세남(虞世南)ㆍ채윤공(蔡允恭)ㆍ안상시(顔相時)ㆍ허경종(許敬宗)ㆍ설원경(薛元敬)ㆍ개문달(蓋文達)ㆍ소욱(蘇勗)등이다.
♣ 십허[十許]열 마리 남짓.
♣ 십현[十玄]열 가지의 현묘(玄妙)한 연기(緣起)를 뜻하며 불법(佛法)의 근본 원리로 삼는 ‘십현연기 무애법문(十玄緣起無礙法門)’을 가리킨다.
♣ 십홀[十笏]1척(尺) 6촌(寸)이 1홀(笏)인 즉, 십홀은 가까운 거리를 말한다.
♣ 십홀[十笏]매우 좁은 범위를 말한다.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홀의 길이는 2척 6촌이며 한가운데의 넓이는 3촌이다.” 하였으므로 홀 10개를 펴놓은 것만 하다는 뜻이다.
♣ 십홀[十笏]홀(笏) 10개를 용납할 정도의 넓이를 말한 것으로, 아주 작은 면적을 뜻한다. 홀은 속대(束帶) 시에 허리에 꽂는 수판(手板). 등운재(鄧雲齋)의 수옥재부(漱玉齋賦)에 “가만히 보니 네 벽 뿐이요, 헤아리니 십홀이 차지 않네.[窺之止存四壁 量出不滿十笏]" 하였다.
♣ 십홀방[十笏房]홀은 척(尺)과 같은 뜻으로, 즉 사방 일장(四方一丈)의 조그마한 방을 말한다.
♣ 십홀지[十笏地]홀 10개 넓이란 뜻으로 매우 작음을 말한다.
♣ 쌍각반룡[雙角盤龍]송 나라 때에 임금에게 진상하는 차[茶]를 용의 형상으로 뭉쳐서 만들었다.
♣ 쌍감두주[雙柑斗酒]두 밀감과 한 말 술을 이름. 운선잡기(雲仙雜記)에 “戴顒春日携雙柑斗酒 人問何之曰 往聽黃鸝聲"이라 하였음.
♣ 쌍검곡[雙劍曲]만가(挽歌)를 이름. 쌍검은 바로 춘추 시대에 간장(干將)ㆍ막야(莫邪) 부부(夫婦)가 만들었던 자웅(雌雄) 이검(二劍)을 이르는데, 그 칼이 일찍이 서로 떨어져 있다가 수천 년 뒤에 다시 서로 만나서 용(龍)으로 변화하여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부부가 다 죽어 합장한 것을 뜻한다.
♣ 쌍검합[雙劍合]고향 땅에 부부가 합장(合葬)된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보검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가 연평진(延平津)에서 다시 만나 두 마리의 용으로 변한 뒤 물 속으로 사라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張華傳》
♣ 쌍검합[雙劍合]진나라 장화(張華)가 뇌환(雷煥)을 시켜 풍성(豐城)의 옥터[獄基]를 파서 보검(寶劍)한 쌍을 얻었는데, 하나는 장화가 가지고 하나는 뇌환이 가졌었다. 장화가 화(禍)를 당하여 죽은 뒤에 칼이 어디 간지를 몰랐다. 뇌환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이 그 칼을 차고 연평진(延平津)을 건너가다 칼이 문득 칼집에서 빠져 나와서 강물 속에 뛰어 들어갔다. 잠수부(潛水夫)를 시켜 물속에 들어가 보니 두 용[雙龍]이 서리어 있었다. 뇌환의 아들이 말하기를, “전일에 선공(先公)이 이 칼은 신물(神物)이므로 반드시 끝에 가서는 서로 합쳐질 것이라 하더니, 과연 오늘에 두 칼이 서로 합친 것이다.” 하였다.
♣ 쌍검회중연[雙劍會重淵]춘추 시대 오(吳) 나라의 장인(匠人)인 간장(干將)ㆍ막야(莫邪) 부부가 명검(名劍) 두 자루를 만들어 웅검(雄劍)을 간장, 자검(雌劍)을 막야라 하였는데, 진(晉) 나라 때에 와서 장화(張華)와 뇌환(雷煥) 두 천문가(天文家)가 천문(天文)을 인하여 이 쌍검(雙劍)을 풍성현(豐城縣)에서 발굴한 다음 둘이 한 자루씩을 나누어 가졌던바, 그들이 죽은 뒤에는 결국 그 쌍검이 연평진(延平津)의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쌍룡(雙龍)으로 변화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晋書 卷三十六》
♣ 쌍궐[雙闕]옛날 궁전, 사묘(祠廟), 능묘(陵墓) 등의 앞 양쪽 높은 대 위에 세웠던 누관(樓觀).
♣ 쌍궐풍운[雙闕風雲]예측 불허의 상황에 처해 있는 도성의 분위기를 표현한 말이다. 쌍궐(雙闕)은 경도(京都), 풍운(風雲)은 변화무쌍한 국세(局勢)를 가리킨다.
♣ 쌍극[雙屐]남조 송(南朝宋)의 사영운(謝靈運)이 명산을 빠짐없이 돌아다니면서 산에 오를 때는 나막신의 앞굽을 떼어 내고 내려올 때에는 뒷굽을 떼어냈던 고사가 있다. 《南史 謝靈運傳》
♣ 쌍금[雙金]쌍남금(雙南金)의 준말로, 보통의 금보다 두 배의 가치가 나가는 남쪽 지방의 금을 말한다.
♣ 쌍기[雙冀]후주(後周)에서 무승군 절도순관(武勝軍節度巡官)으로 있다가, 고려 광종(光宗) 7년(956)에 후주의 사신 설문우(薛文遇)를 따라왔다가 귀화한 사람. 광종 9년에 당(唐)의 관리 임용 제도를 창설하게 하고 여러 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과거의 시작이다.
♣ 쌍남[雙南]쌍남금(雙南金)을 말함. 두보의 시에 “袞職曾無一字補 許身愧比雙南金"의 글귀가 있음.
♣ 쌍남금[雙南金]두 배의 가치가 나가는 황금(黃金)을 말한다. 장재(張載)의 의사수시(擬四愁詩)에 “가인이 나에게 녹기금을 끼쳐 주었으니 어찌하면 쌍남금으로 그에 보답할거나[佳人遺我綠綺琴 何以報之雙南金]”하였는 바, 그 주석에 의하면 남금을 충의(忠義)에 비유한 것이라고 하였다.
♣ 쌍남금[雙南金]품질이 좋은 황금. 증답하는 시문(詩文)을 뜻한다.
♣ 쌍대[雙對]사율(四律)의 중간 두 연구(聯句)를 말함.
♣ 쌍동[雙銅]이교(李嶠)의 하설표(賀雪表)에 말하기를, “쌍동(雙銅)의 조화로운 음악이 눈 앞의 일이요, 먼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 쌍룡검[雙龍劍]쌍룡검은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보검이다. 진(晉) 나라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 두 명검을 얻어 하나는 자기가 차고 하나는 장화(張華)에게 주었는데, 그 뒤에 장화가 복주(伏誅)되면서 그 칼도 없어졌다. 그런데 뇌환의 칼을 아들이 차고 다니다가 복건성(福建省) 연평진(延平津)에 이르렀을 때, 차고 있던 칼이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면서, 없어졌던 장화의 칼과 합하여 두 마리의 용으로 변한 뒤 사라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張華傳》
♣ 쌍룡기[雙龍氣]나중에 두 마리의 용으로 변했다는 용천(龍泉)과 태아(太阿) 두 보검의 기운이라는 뜻이다. 《晉書 張華傳》
♣ 쌍륙몽[雙陸夢]쌍륙은 장기의 일종으로 쌍륙(雙六)이라고도 한다. 신당서(新唐書) 적인걸전(狄仁傑傳)에 “한번은 무후가 적인걸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요즘 자주 꿈에 쌍륙을 두어 지는데, 어떠한가?’ 하고 묻자, 인걸은 함께 자리에 있던 왕방경(王方慶)과 동시에 대답하기를 ‘쌍륙을 두어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들이 없을 조짐이니 하늘이 폐하를 경계하는 뜻인가 합니다.’ 하여 중종(中宗)을 복위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였다.
♣ 쌍리[雙鯉]편지를 말한다. 잉어는 기러기와 함께 소식을 전하는 방편으로 여겨져 왔다. 고악부(古樂府)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 “손이 멀리서 와, 나에게 잉어 두 마리를 주었네. 아이 시켜 잉어를 삶으라 했더니, 뱃속에서 척서가 나왔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童烹鯉魚 中有尺素書]" 하였다.
♣ 쌍리어[雙鯉魚]한쌍 잉어는 중국의 옛 악부(樂府)에 “나그네가 멀리서 찾아들어와 나에게 한쌍 잉어 주고 가기에 아이 불러 잉어를 삶게 했더니 뱃속에는 한 자의 비단의 편지[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童烹鯉魚 中有尺素書]”라고 한 데서 나온 것으로, 서찰을 뜻한다. 한(漢) 나라 때 풍속에는 서찰을 보낼 때 비단폭에다 내용을 적어 그것을 두 마리 물고기 모양으로 접어 보냈다고 한다.
♣ 쌍림[雙林]석가모니가 열반(涅槃)한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숲으로, 보통 사찰의 별칭으로 쓰인다.
♣ 쌍모[雙旄]당(唐) 나라 때 절도사나 관찰사 등 지방 장관이 부임할 적에 위에서 내리던 의장(儀仗).
♣ 쌍미[雙美]쌍미는 둘이 함께 뛰어나다는 뜻. 충(忠)과 효(孝). “어여쁠시고, 충과 효, 쌍미로 기린각에 그렸도다[可憐忠與孝 雙美畵麒麟].” 《杜甫詩》
♣ 쌍배[雙排]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 쌍벽[雙璧]한 쌍의 구슬. 여럿 중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뛰어난 둘 또는 두 사람의 아주 뛰어난 인물을 말함
♣ 쌍봉사[雙峯寺]두보(杜甫)의 일백운시(一百韻詩)에 “내 몸은 쌍봉사에 허여하였고 교문은 칠조의 선종을 구하노라[身許雙峯寺 門求七祖禪]”하였다. 《杜少陵集 卷十九》
♣ 쌍부[雙鳧]한 나라 때 섭령(葉令)으로 있었던 왕교(王喬)를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 왕교에, “왕교는 하동(河東)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 섭령이 되었다. 왕교는 신술(神術)이 있어서 매달 삭망(朔望)에 대(臺)에 나와 조회하였다. 황제는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였다. 태사가 엿본 뒤에 왕교가 올 때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상방(尙方)에 명하여 자세히 살펴보게 하니 전에 상서원(尙書院)의 관속들에게 하사한 신발이었다.” 하였다.
♣ 쌍부[雙鳧]후한(後漢) 때 하동(河東) 사람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자주 도성(都城)에 드나들었는데, 올 때에 수레나 말도 보이지 않고 오직 두 마리의 집오리만 날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그물로 잡은 결과 그물 속에 신발 한 짝만 있더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보통 현령의 고실(故實)을 이야기할 때 부석(鳧舃)이라는 표현을 쓴다. 《後漢書 方術 王喬傳》
♣ 쌍부[雙鳧]후한(後漢) 때에 신술(神術)이 있었던 왕교(王喬)가 섭현령(葉縣令)으로 있으면서 매월 삭망(朔望)으로 조회를 올 적에 그의 거기(車騎)가 보이지 않자, 임금이 몰래 태사(太史)를 시켜 그를 엿보게 한 결과, 그가 올 때마다 반드시 오리 두 마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오므로, 이를 그물로 잡아놓고 보니 바로 신 한 짝이 있을 뿐이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전하여 쌍부는 지방관의 뜻으로 쓰인다. 《後漢書 王喬傳》
♣ 쌍비[雙扉]문짝이 두 개인 사립문.
♣ 쌍비[雙碑]원(元) 나라의 황후가 보낸 불경(佛經)을 문수사(文殊寺)에 수장(收藏)할 때,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문(碑文)을 말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6 春川都護府》
♣ 쌍석[雙舃]동한(東漢)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수령으로 나간 뒤 서울에 올 때마다, 예전에 상서(尙書)의 관속으로 있을 적에 받았던 신발을 오리로 변하게 하여 그 위에 올라타고 왔다는 전설이 있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傳上 王喬傳》
♣ 쌍선[雙扇]오작교 앞에 달려 있는 사립문을 말한다. 당 나라 조황(趙璜)의 ‘칠석시(七夕詩)’에, “오작교 머리의 두 부채가 열려짐에 해마다 한 차례씩 은하 건너오누나.[烏鵲橋頭雙扇開 年年一度過河來]”하였다.
♣ 쌍성[雙成]서왕모(西王母)의 시녀인 동쌍성(董雙城)을 말한다. 서왕모가 한 무제(漢武帝)의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때 그녀에게 명하여 운화(雲和)의 피리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한다.
♣ 쌍성[雙星]은하(銀河)의 서쪽에 있는 견우성(牽牛星)과 은하의 동쪽에 있는 직녀성(織女星)을 이름이다.
♣ 쌍성가절[雙星佳節]쌍성은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을 지칭하는데, 매년 7월 칠석(七夕)에 은하수를 건너 만난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므로 7월 칠석을 말한다.
♣ 쌍성격강하[雙星隔絳河]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을 말한다.
♣ 쌍수[雙樹]사라쌍수(沙羅雙樹)의 준말로, 학수(鶴樹)라고도 한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입멸(入滅)한 장소에 서 있었던 나무 이름으로, 사찰 경내에 있는 거목을 가리킨다.
♣ 쌍아탁곤[雙鵝坼坤]병란(兵亂)의 조짐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진 혜제(晉惠帝) 때 밑으로 내려앉은 땅속에서 푸른 거위와 흰 거위가 나와 하나는 날아가고 하나는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이를 보고서 동양(董養)이 병란을 예언했는바, 과연 그 뒤에 유원해(劉元海)와 석륵(石勒)의 난이 잇따라 일어났다고 한다. 《晉書 卷28 五行志中ㆍ世說新語 賞譽》
♣ 쌍어[雙魚]쌍어는 곧 잉어 두 마리라는 뜻인데, 보통 서신을 가리키나, 상사(相思)의 정(情)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고악부(古樂府)에 “먼 데서 온 손이 나에게 잉어 두 마리를 주었네. 동자(童子)에게 시켜 잉어를 삶으니, 뱃속에서 척서(尺書)가 나왔네.” 한 데서 온 말이다. 쌍리(雙鯉), 혹은 이소(鯉素)라고도 한다.
♣ 쌍어척소[雙魚尺素]서신(書信)을 말한다. 진(晉) 나라 육기(陸機)의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이라는 악부시(樂府詩)에 “멀리서 온 손님, 잉어 두 마리 전해 주네. 아이 불러 요리하라 부탁했더니, 그 속에서 나온 한 자 비단 글.[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兒烹鯉魚 中有尺素書]”의 구절이 있다.
♣ 쌍운[雙韻]시를 지을 때 두 가지의 운(韻)을 내어 안 구절과 바깥 구절에 각각 나누어 다는 것을 말한다.
♣ 쌍운회문[雙韻廻文]한시(漢詩)의 별체(別體)인데, 시구를 위에서 내리읽거나 밑에서 거슬러 읽거나, 평측(平仄)과 운(韻)이 알맞게 구성되어 있는 데다 매구(每句)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에 각기 운자(韻字)를 붙인 것이다.
♣ 쌍인주의[雙引朱衣]학사(學士) 이상이 양부(兩府)에 들어올 때에 주의(朱衣) 입은 두 사람이 말을 끄는데, 이를 쌍인이라 한다.
♣ 쌍일[雙日]짝수[偶數]인 날을 말한다. 구당서(舊唐書) 문종기론(文宗紀論)에 “고사(故事)에는 천자(天子)가 척일(隻日)에 일을 보았는데, 제(帝)가 재상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卿)들과 쌍일이면 매일 서로 만나려 한다.’ 했다.” 한다.
♣ 쌍정[雙旌]사자(使者)가 가지고 다니는 기(旗), 또는 관찰사의 의장(儀仗)을 가리킨다. 당(唐) 나라 때 절도사나 관찰사에게는 조정을 하직하는 날 쌍정(雙旌)과 쌍절(雙節)을 하사하였던 고사가 있다. 《新唐書 百官志 4下》
♣ 쌍정행리[雙旌行李]임금의 명을 받들고 지방으로 부임하는 수령이라는 뜻이다. 쌍정은 당(唐) 나라 때 지방 장관의 의장(儀仗), 행리는 사자(使者)를 가리킨다.
♣ 쌍조[雙鳥]한유(韓愈)의 오언 고시(五言古詩) 가운데 ‘쌍조시(雙鳥詩)’라는 장시(長詩)가 있는데, 이 쌍조(雙鳥)를 두고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불교(佛敎)와 도교(道敎), 한유 자신과 맹교(孟郊)라는 각각 다른 주해(注解)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이백과 두보라는 설을 채택하여 해석하였다. ‘쌍조시’는 한창려집(韓昌黎集) 권5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 가운데 “化爲兩鳥鳴相酬 一鳴一止三千秋”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동파(東坡)가 이백(李白)의 화상(畫像)을 접하고 지은 시로서, 여기서의 양조(兩鳥)는 분명히 이백과 두보를 가리키고 있다. 《蘇東坡詩集 卷37 書丹元子所示李太白眞》
♣ 쌍주[雙珠]형제 두 사람이 모두 출중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한(漢) 나라 공융(孔融)이 위원장(韋元將)과 중장(仲將) 두 형제를 보고는 그 부친 위휴보(韋休甫)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늙은 조개 속에서 진주 두 알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不意雙珠生于老蚌]”고 한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 쌍척후[雙隻堠]후(堠)는 곧 흙을 쌓아 돈대를 만들어서 이수(里數)를 표기한 것인데, 10리마다 쌍후(雙堠)를 두고 5리마다 척후(隻堠)를 두었다고 한다.
♣ 쌍청[雙淸]마음가짐과 하는 일이 다 깨끗함.
♣ 쌍충[雙忠]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것에 항의하여 자결한 민영환(閔泳煥)과 조병세(趙秉世) 등 두 충신을 가리킨다.
♣ 쌍충묘[雙忠廟]이대원(李大源)과 정운(鄭運)의 위패를 모신 쌍충사(雙忠祠)로, 순천도호부 관내 흥양원(興陽縣)에 있다.
♣ 쌍학계영기[雙鶴啓塋基]부부가 합폄(合窆)하는 것을 뜻함. 조식(曹植) 선제시(先題詩)에 “쌍학이 함께 놀다가 동해 곁에서 서로 잃었다[雙鶴俱遨遊 相失東海旁]" 하였음.
♣ 씨의[氏儀]삼국 시대 오(吳) 나라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