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최후의 만찬’에서 누가 소금통 쏟았나
경북 안동은 간고등어로 유명하다.
고등어가 잡히는 영덕 바닷가에서 안동까지는 무려 80킬로미터다.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생고등어는 내륙까지 가져가다가 썩기 일쑤였다.
보부상들이 나귀나 달구지에 봇짐을 싣고 하루 종일 걸으면 해질녘에
임동 장터에 닿는다. 안동에서 동쪽으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상인들은 임동 장터에서 고등어에 소금을 뿌렸다. 임동 장터에는 간고
등어를 사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소금에 절여져 숙성된 고등어는
더 깊은 맛을 냈다.
유대인들은 40~50도를 넘나드는 사막 기후에서 살아야 했다. 그들에게
소금은 목숨 같은 것이었다. 맛을 내는 건 기본이요, 음식을 저장하고
보존하는 데 필수였다. 소금에 절여야 음식이 썩지 않았고 오래 저장해둘
수 있었다. 구약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너희가 곡식 제물로 바치는 모든 예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가
바치는 곡식 제물에 너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소금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의 모든 예물과 함께 소금도 바쳐야 한다.”(레위기 2장 13절)
그만큼 소금은 각별한 것이었다. 신에게 바치는 곡식에도 소금을 뿌려야
했고, 제물과 함께 소금도 바쳐야 했다.
숙소에서 일찍 나와 갈릴리 호수로 해돋이를 보러 갔다.
오전 다섯 시 사십 분쯤 호숫가로 나갔다. 이렇게 어스름이 질 무렵 예수도
호숫가를 거닐지 않았을까. 만물이 잠들었을 때 예수는 홀로 일어나 종종
기도를 했다고 한다. 아직 해가 오르지 않아 약간 어둑했다. 대신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호숫가 산책로에서 조깅하는 사람도 더러 보였다. 예수는
갈릴리 호 주변 어딘가에서 ‘소금’을 예로 들며 설교를 했다. 그 유명한 ‘빛과 소금’ 일화다.
예수는 말했다.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가복음 9장 49~50절)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표현돼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
이다.”(마태복음 5장 13절)
예수는 ‘짠맛’을 역설한다. 그걸 잃지 말라고,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단순하게 풀어낸다. 소금
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일까. 예수가 말한 ‘소금’이란 무엇이며,
‘짠맛을 잃은 소금’은 또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릴 때 ‘짠맛을 잃은 소금’
이 되는 걸까. 또 예수는 왜 자신의 주머니가 아니라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라고
했을까.
예수는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라고 했다. 나는 이 말씀을
두고 ‘김장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배춧잎은 처음에는 빳빳하다. 그걸 배추의 고집,
배추의 에고라고 불러보자. 그런데 소금과 만나는 순간 배춧잎은 풀이 죽는다. 왜
그럴까. 배추의 고집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마가복음에서는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라고 했다. 왜 ‘불
소금’일까. 그리스어 성경에는 ‘en puri(in fire)’로 표현돼 있다. ‘불 속에서 소금에
절여지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불’일까. 내가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소금과
만나는 순간 에고는 녹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열린다. 그 틈으로 소금이
스며든다. 배추 안에 소금이 거하고, 소금 안에 배추가 거한다. 그것이 ‘절여짐
(Being salted)’이다.
절여진 배추는 달라진다. 한여름 뙤약볕에도 쉽게 상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
지난다고 변하지도 않는다. ‘짠맛’ 때문이다. ‘짠맛’을 품으면 성질이 바뀐다.
세상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그게 바로 짠맛의
속성이다. 부동성(不動性)과 영원성.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이다. 신의 속성은
흔들림이 없고 영원하다. 예수는 그걸 잃지 말라고 했다.
2000년 전에도 예수는 행여 우리가 ‘짠맛’을 잃을까 봐 걱정했다. “아무리 네가
‘세상의 소금’을 자처해도, 네 안에 ‘짠맛’이 없다면 어쩔 것이냐. ‘신의 속성’이
없다면 어쩔 것이냐. 어디에 가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너희 마음에
‘하느님의 속성’을 품어라. 그리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예수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도 소금 코드가 등장한다. 유월절을 맞은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사를 했다. 다빈치는 그 광경을 작품으로
남겼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수도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하자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는 장면이다. 비립(오른쪽에서 네 번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가리키며 “주님, 설마 그 사람이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되묻는다. 다혈질이
었다는 베드로(왼쪽에서 다섯 번째 머리)는 빵을 자르던 나이프를 든 채
예수를 향해 몸을 기댄다.
예수를 배반하는 가룟 유다는 유대 제사장에게 은화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팔아넘겼다. 그림 속 유다는 오른손에 은화 주머니를 쥐고 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소매 앞에는 조그만 통이 하나 넘어져 있다. 그게 소금 통이다. 유다는
팔로 소금 통을 쳐서 넘어뜨렸다. 그리하여 식탁 위에는 소금이 쏟아져 있다.
식탁 위에 흩어져 반짝이는 소금. 이는 유다가 ‘신의 속성’을 쏟아버렸음을
뜻한다. 이미 자신의 마음에서 ‘짠맛’을 잃어버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호숫가를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해 뜨기 직전의 갈릴리는 고요했다.
내 안의 소금 통, 우리 안의 소금 통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는 소금이 담겨 있을까 아니면 텅 비어 있을까.
소금이 담겨 있다면 짠맛이 날까. 행여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우리는 수시로 소금을 쏟아버리는 건 아닐까.
그렇게 우리도 예수를 배반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백성호의 현문우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