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 해 동안 문예지에 발표된 중·단편소설 중 한국현대소설학회에서 선정한 12편의 작품을 수록한 『2024 올해의 문제소설』(푸른사상). 초연결 시대에 접어든 오늘의 현실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작가들의 다채로운 문제작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2024년 2월 25일 간행.
■ 엮은이 소개 : 한국현대소설학회
현대소설 분야를 전공하면서 ‘한국의 현대소설’을 강의하고 있는 교수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연구학회이다. 이 학술단체는 현대소설을 연구하고 자료를 발굴·정리하며 연구 결과의 평가를 통해 이론을 정립, 한국 현대소설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책머리에 중에서
2023년,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들은 대체로 여성 서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성 서사는 최근 우리 소설의 큰 흐름이기도 하지만, 올해는 조금 더 다양한 여성의 문제에 주목하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중년이나 노년 여성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이 작년에 비해 많이 늘어났다는 점도 눈에 띄었고, 한국 사회의 현실(세태)을 날카롭게 그려낸 소설, 그리고 환상성을 바탕으로 한 실험적인 소설의 비중도 적지 않았다.
2023년, 문예지 게재 작품들을 톺아보면, ‘코로나 시대’에 다소 위축되었던 서사의 활기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최종 선정된 소설의 작가 대부분이 신인에 속한다는 사실은 한국문학의 미래가 마냥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듯도 하다. 그러나 초연결 시대에 접어든 오늘의 현실을 살펴보면, 창작의 현장은 그리 녹록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중략)
『2024 올해의 문제소설』이 우리의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들과도 즐겁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 목차
권여선|안반
[작품 해설] 닮은 사람들_ 노태훈
기준영|신세계에서
[작품 해설] 대화의 에스노메소돌로지_ 석형락
김기태|롤링 선더 러브
[작품 해설] 연애 예능과 프랜차이즈 자아의 시대를 굴러가는 ‘나’의 이야기_ 김건형
김지연|반려빚
[작품 해설] ‘호모 데비토르’가 된 청춘의 초상_ 연남경
박민정|전교생의 사랑
[작품 해설] 소설의 안과 밖에 걸쳐 있는 아이러니의 겹들_ 손정수
박솔뫼|투오브어스
[작품 해설] 말하는 자를 듣기, 말하는 자의 듣기_ 유서현
성해나|혼모노
[작품 해설] 만신의 추락과 선무당의 도약, 혼모노적 삶의 분출_ 민선혜
이미상|자갈 선생의 상담일지
[작품 해설] 버렸지만 버려지지 않은 것_ 문예지
이주혜|이소 중입니다
[작품 해설] 끝나지 않는 동행_ 김보경
전하영|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작품 해설] 통념의 감옥과 생명에 대한 감각_ 현순영
정영수|미래의 조각
[작품 해설] 낙관적인 이야기는 없다_ 최성윤
최미래|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작품 해설] 엄마라는 배역과 아빠의 욕망_ 강도희
■ 책 속으로
할머니는 어떤 엄마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기에 안반 도둑년 어미 속곳 같은 말을 그렇게 술술 염불 외듯 외며 살게 되었을까. 얼마나 자기 삶에 지독한 증오를 품었기에, 자신의 딸에게도, 그 딸의 딸들에게도 시시각각 경계하듯 그런 말들을 전염시키며 살았을까. 자신이 딸인 게, 자신이 딸을 낳은 게, 그 딸이 또 딸들을 낳은 게 그렇게 부끄럽고 두려웠던 것일까.
(권여선, 「안반」, 32쪽)
“고모는 지옥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이 있어?”
이원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크게 굴렸다. 이열음이 성큼 다가와 “없어?” 하고 고쳐 물었다.
“누군들 왜 없겠어. 책에서도 보고, 영화로도 보고.”
“그치. 힘들면 ‘사는 게 지옥이다’라는 말도 하니깐. 만약에 ‘사는 게 지옥’이라는 빌딩이 있다 쳐봐. 그럼 난 일 층부터 팔십칠 층까지 한 층 한 층 걸어 올라가서 잠깐씩이라도 안을 보고 싶을 거 같아.” (기준영, 「신세계에서」, 45쪽)
맹희는 그 무해하게 외로운 세상 앞에서 때때로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날에는 짐 같았고 어떤 날에는 힘 같았다. 버리고 싶었지만 빼앗기기는 싫었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 (김기태, 「롤링 선더 러브」, 94쪽)
그날 밤 꿈에 정현은 반려빚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목줄을 쥔 쪽이 반려빚이었던 것이 좀 다르긴 했지만 개와 산책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정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목이 말라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어져 반려빚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카페에 잠깐 들를까? 반려빚은 정현이 꽤 가엽다는 듯이, 그러나 목줄을 쥔 자로서 단호해야만 한다는 듯이 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집에 믹스커피 있잖아. (김지연, 「반려빚」, 107쪽)
오늘에서야 이세리를 떠나보내고, 자신은 끝내 돌아갈 수 없었던 중학교 스탠드에서부터 시작하겠다고 세리는 비장하게 말했다. 제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저는 이세리입니다! 십 대 초반에 세리는 그 말을 어디에서나 외쳤다. 이제 세리는 자신을 잊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중이었다. (박민정, 「전교생의 사랑」, 154쪽)
잘 듣는다는 거요. 그 사람은 어떻게 잘 듣는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끄덕이기도 하고(애리 웃음). 모르겠다. 모르겠어요. 설명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듣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듣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잘 듣고 잘 들으면서 필요할 때 그 사람을 바라보고 그리고 계속 듣는 거 같아요. 아니 아니다. 잘 모르겠어요. (박솔뫼, 「투오브어스」, 170쪽)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성해나, 「혼모노」, 213쪽)
“하나 가져갈게요.” 중수가 상담 테이블 옆 화분에서 돌을 집어 호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저작권료 지불하라고 할까 봐 말 안 했는데 사실 우리끼리 해요.” 중수가 장식장에 놓인 단지를 보았다. “우리끼리 고통의 땅에서 돌을 가져오고 서로의 돌을 가져가요. 그러곤 이렇게 말하죠. ‘당신의 돌은 나에게 있습니다.’” 아직 고통을 품지 않은 산뜻한 돌이 중수의 호주머니에 실려 멀어졌다. (이미상, 「자갈 선생의 상담일지」, 241쪽)
철학자는 왜 육지 끝에서 멈추었을까?
자는 줄 알았던 시인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추락하지 않으려고.
뒷자리의 소설가가 말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말해 살려고. (이주혜, 「이소 중입니다」, 264쪽)
밍밍이가 죽고 난 뒤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작고 연약한 생명체의 온기인가. 숙희는 아기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가볍게 부볐다. 숙희의 마음속에 서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기억이 다시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숙희가 사랑했던 그러나 잃어버린 온갖 것들에 대한 기억이. 다시 삶을 달라고, 다시 자기를 봐달라고. (전하영,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300쪽)
어머니에게만큼 나에게도 나만의 믿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머니가 그리는 괜찮은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과거가 괜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미래도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낙관이 가능한 이유는 미래는 언제까지고 미래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영수, 「미래의 조각」, 333쪽)
비참함. 그냥 슬픈 게 아니라 슬프고 또 참혹해. 나는 참혹해. 비참함이 꾸역꾸역 항아리를 터뜨릴 듯이 비어져 나오고 있어. 나는 밑 빠진 독을 등으로 막고 있는 두꺼비인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금이 간 사람에 불과했구나. 어디서부터 무엇을 주워 담아야 할까. 괜찮을 거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하나둘 내게 등을 돌리는 기분이 들었다.
(최미래,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3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