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들은 제가 지난 1998년에 독도사랑동호회 게시판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여러 부분 업그레이드해야 할 부분이 있지만,
좋은 토론을 이루기 위한 제안의 마음으로 이 글을 다시 올립니다.
보다 풍성한 내용으로 개선시켜 나갈까 합니다.
---------------------------------------------------------------------
명명백백한 자국의 영토도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
왜?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인가? (ver1.0)
글 : 김윤배
---------------------------------------------------------------------
근래에 들어 한일어업협정 문제로 인해 다시금 독도에 대한 관심들과 함께,
동해가 '일본해(SEA OF JAPAN)'로 불리는 것이 새로운 관심사로 국민들
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 아쉬운 것은, 우리국민 대다수 중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
래가사말이 던져주었던 몇가지 인식이외에는 당장 일본인과 맞닥뜨렸을 때,
자신있게 왜? 독도가 일본땅이 아닌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으리란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그간 발간된 자료들을 참고로 해서,『독도가 왜 일본땅이 아닌지』에
대해 몇가지 밝혀보았습니다. 읽어보시면서 아시겠지만, 독도에 대한 일본
의 일방적 영토편입은 한 세기전 일제의 조선강탈의 시작이었으며, 아울러
오늘 다시금 그들의 독도영유권 주장이, 좀더 세련화된, 한 세기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들의 반성없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독도지킴이 운동은 민족의 역량을 성숙하는 일이며, 그것은 민족의 분단으
로로 인한 민족역량의 손실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하고 통일을 완성할 때
만이 가능한 일이며, 그래서 독도지킴이 운동은 통일운동으로 이어져야 함
을 다시금 강조하면서, 긴 글 풀어나갈까 합니다.
왜? 독도가 한국땅일까? 반대로 왜 독도가 일본땅이 아닐까?
논의의 중심을 ◀일본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잡아서 시작할께요~~
■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아니다.
~~~~~~~~~~~~~~~~~~~~~~~~~~~~~~~~~~~~~
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독도에 대한 명칭유래부터 알아보자. 물론 아직까
지 학계에서나 확정된 명칭에 대한 정리된 바는 없다. 크게 논점이 되고 있
는 것이 두가지. 첫째는 이 섬이 동해 한복판에 외로이 위치하기 때문에 독
도(獨島)로 하였다는 얘기이고, 둘째는 이 섬 전체가 바위 즉, 돌로 되어있
고, 전라도 사투리로 '돌'을 '독'이라 하므로 독도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
의견중 현재 두 번째 즉, '돌'이라는 '독섬'에 바탕을 둔 것이 거의 기정사실
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참고로, 이전에는 이 독도란 섬이 '독도'라 불리지 않고, 다른 몇 개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이 이름을 먼저 소개하면서, 동시에 [울릉도는 독도의
부속도서]라는 설명이 이루어 질 것이다. 참고로 독도라는 이름은, 고종18년
(1881년) 이후 울릉도에 정착하여 살게 된 개척민들 사이에서 통용되기 시
작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1)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이름들
◆ 우산도
★자료1-1: 一云 于山武陵本二島 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일운 우산무릉본이도 상거불원 풍일청명 즉가망견
"혹자가 말하기를, 우산과 무릉은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려사'의 '지리지'의 '울진현'조에서)
★자료1-2: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우산무릉이도 재현정동해중 이도상거불원 풍일청명 즉가망견
"우산,무릉 두 섬은 현(울진현)에서 바로 보이는 동쪽바다 가운데 있으며,
두섬은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세종실
록'-1454년-' 권153 '지리지' '울진현'조에서)
무릉(武陵)의 울릉도의 별칭임이 이미 확인된 사실이며, '우산(于山)' 역시
독도 이외의 다른 섬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 울릉도에서 맑
은 날 독도가 보인다.
★자료1-3: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에 있다. (우산도) 세
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
(울릉도에서도) 세 봉우리 위의 나무와 산 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이고,
바람이 잦아지면 이틀에 도착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권45 울진현조, 조선중종26년,1531년)
◆자산도(子山島)
★자료1-4: 松島卽子山島 此亦我國地 汝敢住此耶
송도즉자산도 차역아국지 여감주차야
"송도는 즉 자산도이다.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거늘 너희가 감히 이 곳에
사는가"(숙종실록:1696년) - 조선 숙종때의 안용복이 일본어부가 '송도'가
그들의 땅이라 주장함에 대해
자산도란 이름에 대해서는 우산도의 우(于)자를 모양이 비슷한 자(子)로 혼
돈함으로서 생긴 오기였다는 설명과, 모도(母島)인 울릉도에 대해 자도(子
島)관계에 있는 독도의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라는 설명이 있다.
◆삼봉도(三峰島)
★자료1-5: "9월 16일에 경성(鏡城) 배구미포(裴仇未浦)를 출발하여 25일에
서쪽으로 75리쯤에 '삼봉도'가 보였다. 섬 북쪽에 삼석(三石)이 나란히 서있
고, 다음에 소도(小島)가 있고 다음에 암석(岩石)이 나란히 서 있고, 다음에
중도(中島) 서쪽에 또 소도(小島)가 있는데 모두 바닷물이 유통하였다. 섬
사이에 사람 모양의 것이 서른개쯤 서 있으므로 다가자기 못하고 섬의 모
양을 그려 가지고 왔다." (성종실록)- 조선성종때 영안도(오늘날 함경도) 관
찰사 이극균의 지시에 따라 김자주(金自周)가 섬을 보고 목격담을 실은 것.
김자주가 전하는 섬의 외형은 현재 독도가 동도와 서도 그리고 지네바위,
독립문바위,가제바위등으로 불리워지는 36개의 암초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섬 북쪽의 세 바위는 지금의 서도 북방에 높은 솟은 세
개의 바위섬을 가리키며, 작은 섬과 암석은 동도와 서도 사이의 무수히 흩
어져 있는 바위들이며, 중도는 서도를, 중도 서쪽의 작은 섬은 동도를 ( 참
고로 서도의 높이는 98m, 동도는 168m), 그 사이로 바닷물이 통한다는 것
은 지금의 동도와 서도 사이에 폭 110~160m의 좁은 수도를 의미하는 것이
라 한다.
◆가지도(可支島)
★자료1-6: " 갑인년 6월 26일에 가지도(可支島)에 가 보니 가지어(可支漁)
너댓 마리가 놀라 뛰어나왔다. 그 생김새는 수우(水牛)를 닮았는데, 포수가
두 마리를 쏘아 잡았다"(정조실록 권40의 18년 6월 무오조, 1794년)
오늘날에도 울릉도 사람들은 강치를 '가제( 가제: 강치과에 속하는 바다짐승
강치의 별칭으로 물개나 바다표범과 비슷하되 좀 작으며, 낙지와 오징어,
물고기를 먹이로 한다)'라 부르며, 이를 한문으로 음역하여 '가지어'라고 부
른듯하며, 가지도는 강치가 많이 사는 섬이란 뜻으로 쓰였다. 아울러, 서도
북서쪽에 '가제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기도 하다.
◆ 독도(獨島)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독도'라는 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
장할때가 러일전쟁 때인 1904년 9월이라고 한다.
★자료1-7: 당시 일본은 러시아 군함활동을 정찰하기위해 우릉도에 2개의
군사용 망루를 설치했는데(1904년8월), 독도에도 설치할 목적으로 군함 니
다카호를 파견하여 조사토록 하였다. 9월25일자로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리앙꼬르도 암을 한인들은 '독도'라고 쓰고, 일본 어부들은 리앙꼬 도(島)라
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당시 국내 상황은 1904년 8월에 일본은 대한제국정부를 강요해 한
일협정서를 성립시켰으며, 그 협정서는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 부서들에 대
해 일본인 재정 고문관과 외국인 외교 고문관을 두게 함으로서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자료1-8 : 우리나라 문헌중에는 1906년 3월 29일에 작성된 울도(울릉도)
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서 '독도'가 처음 발견된다(의정부 외사국 《各觀察
道案》제1책 보고서 호외).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 결정을 거쳐, 2월 22
일 시네마현(도근현)고시 제40호를 통해 일본의 영토로 일방적으로 편입한
이후, 일본은 1906년 3월 28일에 이르러서야 독도의 일본영토 편입사실을
울도 군수 심흥택에게 알렸으며, 이에 놀란 심흥택 군수는 강원도 관찰사
서리 이명래에게 "본관소속 독도가 일본영토에 편입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라는 보고를 하였다. 이에 당시 참정대신은 1906년 4월 29일 지령 제3호를
통해 "독도가 일본인의 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며, 독도의 형편
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에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라고
지시하였다.
◆석도(石道)
★자료1-9: 울릉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법침입과 삼림벌채가 심각하게 대
두되자, 대한제국 정부가 고종37년 1900년 10월 25일에 칙령 제41호로 공포
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에 '석도'라는 이름
이 등장한다. 여기의 제1조는 울릉도를 울도로 고쳐부르고, 강원도 울진현
에 속해있던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고쳐서 하나의 독립된 군으로 설치한
다는 것이었다. 제2조는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
도와 죽도 및 석도를 관할할 사(事)"라고 하였다.
여기서 죽도와 석도에 대해 알아보면, "죽도는 울릉도 근방의 작은 섬 죽서
(竹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있으며,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죽도는 울릉
도 바로 옆의 바위섬 죽서도(竹嶼島)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규원의 [검찰일
기]에서 확인했다"고 하였다.즉, 울릉군 와달리 앞 바다에 존재하는 유인도
가 죽도이다.
한편, 석도에 대한 설명은 위에서 한 것과 중복되므로 생략하나,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첨가될 필요가 있다.
2)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들
◆ 송도(松島)
★자료1-10: 독도에 관한 일본의 기록들 중 최초의 것은 1667년에 편찬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이다. 여기에 독도를 송도로, 울릉도를 죽도(竹
島) 혹은 기죽도(磯竹島)이다. 이 책은 상당한 중요성을 가지기에 자세히 살
펴보자. 이 책의 편찬자는 사이토호센이었다. 그는 이즈모국에 속한 운주번
의 관리, 즉 번사(藩士)로서 상관의 명령으로 1667년 가을에 오키시마를 순
시한 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종합해서 [은주시청합기]라는 이름의 보고
서를 올렸다.
"은주는 북해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은기도(오끼섬)라고 말한다.... 술해 사
이에 두 낮 한밤을 가면 송도(松島)가 있다. 또 한 낮 거리에 죽도(竹島)가
있다. 이 두 개의 섬들은 무인도인데, 이 두 개의 섬들로부터 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에서 은기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경계는
은주(오끼섬)로써 끝이 난다."
일본의 서북경계를 은주라고 단정했기에, 따라서 서북경계 넘어 있는 두 개
의 섬, 송도(독도)와 죽도(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한 것이며,
그러므로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한 것이다.(즉 일본의 오끼섬에서 배를 타고
가면 먼저 송도(독도)가 있고, 한나절 거리에 죽도(울릉도)가 있다는 것이
다.)
일본인들이 소나무라고는 없었던 독도를 '송도(松島)'라고 부르게 된 것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라고 부른 것에 대한 대칭으로 해석된다.
◆ 죽도(竹島)
★자료1-11: 당시 일본의 대표적 학자였던 하야시(林子平)가 1785년 만든
[삼국통람여지노정全圖]에 독도를 '죽도(다께시마)'라 표시하였으며, 다께시
마, 마츠시마 옆에다가 "조선의 것으로"라는 문자까지 적어 넣었다. 참고로
이 지도는 국경과 영토를 구별하기 위해 나라별로 색깔을 칠했는데, 조선국
을 황색으로, 일본국을 녹색으로 칠했으며, 다께시마와 마츠시마는 물론 조
선의 색깔인 황색으로 칠하였다.
◆우산도(于山島)
★자료1-12 : 일본육군성 참모국이 1875년에 만든 [조선전도(朝鮮全島)]이라
는 지도에는 독도가 '우산도'로 나타나 있으며, 독도를 조선영토로 표기하였
다.
◆리앙꼬도
자료1-7에서와 마찬가지로 독도를 '리앙꼬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3) 기타 외국에서 부른 이름들
◆붓솔(Boussole)
1785년 5월 프랑스 해군 함정 붓솔호가 동해를 항해하다가 울릉도,독도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울릉도에는 그 섬을 가장 먼저 발견한 승무원의 이름을
따서, 다쥴레(Dagelet Island)라는 이름을 붙였고, 독도는 배의 이름을 따서
'붓솔'이라 하였다.
◆리앙쿠르 바위(Liancourt Rocks)
1849년 프랑스의 고래잡이 배인 리앙쿠르 호가 독도를 발견하고서 붙인 이
름이다. 이 이름은 세계 여러나라의 지도에서 독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가
장 널리 쓰이고 있다고 한다.
◆마나라이와 오리브차 바위(Manalai and Olivutsn Rocks)
1854년 러시아의 해군 함정 팔라다(Pallada)호가 독도를 측정한 후 붙인 이
름.
◆호넷바위(Hornet Rocks)
1855년 영국군함 호넷 호가 독도를 발견하고 붙인 이름이다.
이상과 같이 독도에 대한 다른 이름들을 알아보았다. 독도에 대한 역사적인
문헌에서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서 인정했음을
확인 할수 있었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자료1-2), 신동국여지승람(자료1-3)
의 경우, 이 책들은 조선왕조의 영토에 대한 지리책인데, 이들 책에서 조선
이 통치하는 영토에 대한 지리 해설을 편찬하여 널리 간행함으로서 통치
영토를 명확하고 면밀하게 규정하였으며, 여기에 우산로라는 이름의 독도와
울릉도가 함께 기입되어 있다는 것은 곧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셈이다.
여기에 첨가하여, 1722년 이와미슈현(지금의 돗또리현) 주민의 울릉도 도해
가 문제되었을 때, 당시의 에도막부는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의 위치 및 영
속관계를 대마도에 문의한 바 있다.
(문) 죽도(竹島,현 울릉도) 및 그로부터 40리정도 떨어져있는 작은 섬인 송
도(현,독도)의 두 섬은 모두 울릉도인가? 아니면 죽도는 울릉도이지만 송
도는 조선밖의 영토인가?
(답) 겐로꾸(元祿) 연간에 죽도 근처에 송도라는 섬이 있어 일본인이 어로
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죽도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이 건너가 어로
활동을하는 것을 정지한 섬으로 알고 있다....
(자료:대마도종가문서 고문서)
즉, 송도(독도)가 죽도(울릉도)의 부속도서 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마도는
원록 연간(1696년) 막부가 죽도 도해금지를 지시했을 때 죽도(울릉도)에 송
도(독도)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답변하고 있는 것이다. 즉, 17세기 후반 막부
의 결정 당시 일본측이 송도(독도)를 죽도(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인식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족하게나마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가 아니다]라는 일본측 주장을 주
제로, 몇가지 반박을 해보았다. 살펴본 봐와 같이 일제의 강제적인 한일합
방 시기 이전에는 일본에서도 독도를 한국땅이라 하였지만, 그 이후에는 일
방적으로 독도를 강탈하며 그들의 땅임을 주장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일
제가 조선을 강탈하기 5년전에(1905년 독도강탈, 1910년 한일합방) 독도를
우선 강점하였다는 사실이며, 독도가 일본의 조선침탈의 첫 번째 희생자 였
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독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몇가지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여
기에 있다. 한 세기 전처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일본의 한국침략을
알리는 첫 걸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독도에 관해서는 한일양국간에 아무런 조약이 없었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의 에도시대(1603∼1867년)와 메이지 시대(1868∼
1912년) 일본의 정부의 독도에 대한 인식을 알아봄으로서 이 부분을 살펴보
고자 한다. 이러한 일본정부의 인식을 알아봄으로서 일본정부가 독도문제에
대해 어떻게 결정을 지었는지 알아보면 이 부분에 대한 반박이 되리라 여
겨진다.
1) 에도(지금의 도쿄)시대 도쿠가와 막부 정부의 인식
이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조선 숙종때 2차에 걸친 안용복의 일본행적
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당시 일본 도쿠가와 막부 정부의 독도
에 대한 인식을 알 수있다.
독도하면 생각나는 안용복. "일본의 최고 권력자로 하여금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시인하게 하였던 안용복".
울릉도 도동 약수고원 한편에 우뚝 서있는 '안용복 장군 충혼비'.
"동해 구름 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아무도 내 땅이라 돌아보지 않을 적에
적굴 속 넘나들면서 저 임 혼자 애썼던가
상이야 못 드릴 망정 형벌 귀향 어인 말고
이름이 숨겨진다 공조차 묻히리까
이제 와 울릉군(鬱陵君) 봉하노니 웃고 받으소서..."
(노산 이은상 님의 비문 중에서)
비록 비문에는 '장군'이라 적혀있지만, 그는 결코 장군이 아니었다. 나라에
서 임명한 관리도 아니었으나, 그는 어떤 관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었
다.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 수많은 우리네 민초들. 그 또한 그
러한 평범한 민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독도역사의 가장 큰 획을 그은
자랑스런 조선인이었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때에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부산 좌자천리(지금의 좌천
동)에서 성장한 사노(私奴)로서 집근처에서 멀지 않은곳에 왜관이 있어 은
연중에 일본말을 배울 수 있었다 한다. 안용복의 원래 직업은 경상좌도 수
군절도사 관하 좌수영에서 전선의 노를 젓는 수졸(水卒)-당시 용어로는 능
로군-이었다. 좌수영은 동남해안을 방비하고 있어 그는 동해안 해역에 밝았
으며, 그로 인해 수졸을 그만 둔 뒤에 울산 어부들과 함께 울릉도 일대로
고기잡이를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은 건국 초, 아직 왜구 문제가 해결되지 않던 시기여서, 주민들의
울릉도 거주가 왜구의 침략을 불러들일 위험이 있음을 우려하여 울릉도에
대해 '공도정책(울릉도 거주를 금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울릉도의 공도
정책은 울릉도에 대한 영토적 포기가 아니라, 대외정책의 필요성에 따라 울
릉도를 비롯한 서남해안의 섬들까지를 공도로서 관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생계수단을 위해 어부들이 울릉도에 왕래하게 되었으며, 울릉도가
인삼, 대나무등 각종 물산이 풍부한 무인도로 알려지면서 동해해역을 둘러
싸고 조선, 일본 양국 국민이 뒤섞여 어로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자
주 발생하였다. 이러한 마찰은 단순한 충돌에 그치지 않고 울릉도·독도
의 영유권 및 어업권을 둘러싼 마찰도 비화되어, 조선으로 하여금 울릉도·
독도에 대해 관심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1693년 안용복 일행이 울릉도에 갔을 적 일본 상인들과의 마찰이었다.
1693년(숙종19년)에 울산 어부 안용복이 40여명의 어부들과 함께 어업활동
을 위해 울릉도에 거처를 마련하고 고기잡이를 하였다. 그런 하루는 같이
갔던 박어둔 만을 데리고 고기를 잡다가 당시 일본의 에도막부로부터 '죽도
(독도) 도해 면허'를 받아 울릉도를 넘나들던 일본상인들을 만났으며, 이들
과 마찰을 벌이는 와중에 일본상인들에 의해 인질로 붙잡혀갔다.
안용복은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호키슈(지금의 돗또리현) 태수를 통해 막
부에 항의하였으며, 호키슈 태수는 이 사건의 보고 및 안용복의 처리에 관
해 막부에 문의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최고 권력 기구였던 막부는 임진왜
란으로 인해 불편해졌던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국교를 수립함으로서
정권의 정통성과 대표성을 더욱 굳히고, 아울러 조선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쓰고 있던 터라, 작은 섬 문제를 가지고
양국의 관계가 불편해 지는 것을 바라고있지 않았다.
그래서 에도막부의 최고책임자는 "울릉도(현재의 울릉도)는 일본 땅이 아니
다(鬱陵島非日本界). 그러므로 일본어민의 출어를 금지시키겠다"는 서계를
만들어주고 안용복을 석방하여 조선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서계를 받은 안용복은 박어둔과 함께 귀국길에 올라 대마도에 도착했다.(당
시 대마도를 거쳐야만 조선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마도
도주(島主)는 어업을 주요한 산업으로 삼는 대마도로서 울릉도를 놓치고 싶
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일본 영토인 다케시마(현재의 울릉도)를 침범한
죄인'으로 물아 붙여 안용복을 구속하고,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라는 서계를 빼앗아 버렸다.
1693년 12월에야 겨우 풀려나 조선으로 송환되었다.(숙종실록) 이때 안용복
을 송환해 온 대마도의 사자 일행은 예조참판 앞으로 서계를 가져왔는데,
거기에는 중대사안이 기재되어 있었다.
"일본의 죽도(현재의 울릉도)에 조선인이 들어와 고기잡이와 벌목을 하는
일이 잦은데, 이번에 두명의 인질을 다시 조선으로 신병을 인도한다"는 것
이었다.(숙종실록). 즉 여기에는 대마도 도주의 '울릉도를 일본땅으로 기정
사실화 만들려는' 음흉한 속셈이 있었다. 이를 접한 조선 조정은 굴욕외교
로 대응하였다. 그때 조선은 장희빈을 앞세운 남인들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사람과 싸우면 많은 손해를 입는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제를
적당히 넘기기로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민이 바깝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 단속해 왔다. 그래
서 비록 우리나라의 울릉도일지라도~~~.지금 우리 어선이 감히 당신 나라
국경 안의 죽도(지금의 울릉도)에 들어가~~~~ 마땅히 엄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므로 범인들을 형률에 의거~~~~"라는 내용이었다.(숙종실록).
이 회서는 울릉도가 곧 죽도이며, 죽도가 곧 울릉도라는 1도 2명의 사실을
잘 알면서도 모르는체 하여 울릉도는 조선의 땅이라고 선언하면서도, 울릉
도의 일본 이름인 죽도는 일본땅이라고 인정해 준 잘못된 문서라고 할 것
이다.
이를 받아든 일본의 사신은 대마도 도주의 목적이 절반 달성됐음을 알았으
나, '울릉도는 조선땅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이 부분의 문구
를 삭제를 조선 조정에 요구하였다. 이 무렵인 1694년에 조정에서는 장희빈
의 모략으로 폐비되었던 민비가 복위하고, 인현왕후(민씨)의 복위를 반대한
남인이 제거되는 '갑술옥사'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남인정권의 나약한 외교정책을 비판하던 소론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들은 지난번 회서를 만든 관리를 처벌하고, 그 회서를 돌려받아
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숙종의 윤허를 받기에 이르렀다. 재차 회서 내
용의 울릉도 부분의 삭제를 요구하는 요청에, 소론정권은 "1차 회서를 취소
한다는 뜻을 담았을 뿐만이 아니라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죽도
는 바로 조선의 땅인 울릉도임을 당당해 밝히는 새로운 회서"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대마도의 사자 일행은 일본이 다시 조선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지 모른다는 전쟁 위기를 조성하면서 조선측의 답변에 불복하였으며, 부산
첨사영이나 동래부사 앞에 가서 항의하는 집단시위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울릉도 영속시비가 해결이 나지 않자, 문제를 일으킨 대마도 도주가
죽고난 후 새 도주가 들어서면서, 죽도 건의 교섭 사실을 막부에 보고하고,
그 처리를 문의하였다.
이에 에도막부는 자체 조사를 착수한 후 1696년 1월에 막부의 명의로 다음
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 ~~~처음부터 그 섬을 조선으로부터 뺏은 적도 없는데 지금 이를 돌려준
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일본인이 죽도(현,울릉도)에 가서 어로하는 것
을 영원히 금지한다. 그러므로 이를 조선에 알리도록 하라."('통항일람'에
서)
이처럼 일본 중앙정부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죽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
한 대마 도주는 막부의 결정을 조선에 알리지 않고 미적거리고 있었다. 이
무렵 동래부에 2년 넘게 갇혀 있다 풀려난 안용복은 자신이 다시 일본을
상대로 담판해 문제를 잘 해결할 결심으로 1696년 봄에 울산을 떠나 울릉
도로 건너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일본 어선들이 와서 정박해 있었다.
이에 안용복은 울릉도는 본래 조선의 경계지 인데 왜인이 어떻게 월경하여
침범하는가 "라고 항의하자, 일본인들은 " 우리는 본래 송도(현,독도)에 사
는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본소로 돌아가겠다"
고 하였다. 이에 안용복은 "송도(현,독도)는 자산도로 이 역시 조선땅이다"
라고 꾸짖었다.
다음날 안용복이 우산도(독도)에 가보니, 일본 어부들이 그곳에서 물고기를
조리하고 있었다. 안용복은 명백히 꾸짖고, 일본인들이 꽁무니를 빼자 그들
을 쫓아 일본 오키에 도착했다.(숙종실록)
오키를 거쳐 인바슈에 가서 안용복은 자신들을 '울릉.우산 양도감세장'(울릉
과 우산을 관리하는 장군)이라 사칭하고, 인바슈 태수를 통해 울릉도·독도
의 조선 영유 및 일본인의 불법 도해 금지를 막부에 항의해 줄것을 요청했
다. 이에 인바슈에서는 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양도(울릉도·독도)가 이미
조선땅인 이상 이 두 곳의 국경을 다시 침범하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횡침
하는 있을 경우, 국서를 작성하여 역관을 정해 들여 보낸다면 이를 처벌할
것이다" 라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죽도에 출어한 일본 어부들에 대한 처벌과 태수의 약조를 받는 등 참으로
큰 공로를 세운 안용복은 그해 8월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을 때 조정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에 대해 한쪽에서는 "한낱 상인이 관직을 사칭하면서 국경을 넘어 이웃나
라와 다투는 단서를 일으켰다"고 비난하여 사형을 주장하였고, 다른 쪽에
서는 "안용복이 아니었다면 대마도의 속임수를 모를뻔 했던 만큼 사형은 지
나치다"고 변호하여, 결국 그는 매를 맞은 뒤 귀향을 가게 되었다.
결국 1696년에 이미 막부의 결론이 나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697년 1월에야
조선정부는 막부가 죽도(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결정한 사실을 알게되었으
며 1699년에는 일본측이 다케시다(죽도, 현재의 울릉도)와 마츠시마(송도,현
재의 독도)를 조선 영토로 다시 확인하는 최종적 외교문서를 조선 조정에
넘겼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안용복의 활동에 대해 일본측은 안용복의 대일 담판을
'허구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거나 또는 "개인적 차원의 일이어서 구속력이
없다"라고도 주장을 하고 있다.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문서에도 명백히 나
와있는 그의 행적을 의도적으로 축소한다고 할 수 있다.
울릉도·독도가 우리땅임을 온몸으로 확인해줬던 안용복. 비록 그는 관리는
아니었지만, 그 어떠한 관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낸 조선의 진정한 장군,
안용복 . 17세기말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땅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시도는
그의 행적으로 인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
을 거듭하는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던 안용복. 3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의 행적을 통해 다시금 그의 나라사랑과 그리고 "지키지 않는 땅은 결코
권리가 돌아오지 않음을"을 확인하며 오늘 저 너른 동해바다 한 가운데 외
로이 떠 있는 겨레의 땅, 독도를 기억해 본다
2) 메이지 정부의 독도에 대한 인식
먼저 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메이지 정권 담당자들의 성격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19세기로 접어들어 일본의 민생고는 더욱 가중되고, 이에따라 도
쿠가와 막부의 위상은 추락하고, 외국세력으로부터 점증하는 문호개방의 압
력을 받던 일본은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Mathew Perry)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교역 요구에 응하였고, 이에 자국을 방어하지 못했다는 힐난의 목소
리가 커지고 혼란이 가중되자 1867년 메이지 왕이 실권을 쥐게 이르렀다.
막부의 개항정책에 반대하여 '존왕양이(尊王楊夷)'를 내세운 메이지 정권은,
이들의 정책이 '위정척사'라는 사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친서양
적으로 발전하였으며, 한편으로 '양이'의 대상이 서양이 아니라 동양 이웃나
라로 둔갑하였다. 여기에서 메이지 시대 한일관계사, 혹은 한일 역사왜곡사
를 검토할 때 특히 조슈(長州)세력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참고: 메이지
정부에서 주요 세력이 조슈, 사쓰마, 토사 세력이었다.) 사쓰마 세력은 유구,
대만 문제를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려 함에 따라, 조슈세력은 조선문
제를 통해 정치적 주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 당시 조슈세력은 1862년 이봉운동(대마가 척박한 대마도 땅 대신에 구주
의 땅 10만석을 달라는 청원운동. 막부의 개항정책과 서양 열강의 대마도
개항요구를 배경으로 행해짐)의 실패로 어려워하던 대마를 막부를 반대하
고, 서양 열강의 척결을 주장하는 운동에 끌어들여 원조 요구운동을 지원하
였다. 그 결과 막부는 대마에 3만석을 매년 주기로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마는 일본의 양이 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대마가 조슈세력과 손잡으면서, 지금까지 대마도가 조선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구폐 혹은 폐해라 표현하고, 전혀 근거가 없는 신공왕후의 삼한 정벌
론을 기정 사실화 하고, 임진왜란을 '명분없는 싸움'이라는 표현에서 '국위를
빛낸 쾌거'로, 통신사를 조공사절로 표현하면서 그들이 조선문제의 전문가
라 자임함녀서 역사왜곡을 일본정부에 세뇌시키게 된다.
또한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메이지 정부 초기의 분위기와 이러한
대마의 주장과 관련이 된다는 것이다. 즉 번벌 연합국가 체계를 강력한 중
앙집권적 체계로 바꿀 필요가 있었으며, 막부 말기의 양산된 무사들을 처리
하지 않고서는 내환의 우려마져 존재하였다. 이러한 내환의 위기를 극복하
기 위해 조선과의 긴장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으며, 함께 정한론(征韓論)의
분위기를 이끌어 내어, 외환을 통해 내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던 것이
다.
사학자들은 당시의 이러한 왜곡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오늘날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의 차이를 극복하는 중요한 작업이 되리라 여
기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울릉도.독도 문제가 다시 대두됨을 직
시할 필요가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 새로들어선 메이지 정부는 조선 전체에 대해 침략의 야욕
을 품기 시작하여 우선 일본 외무성으로 하여금 조선의 내부사정을 은밀하
게 정탐하게 하였다. 이때 외무성은 조사단에 맡길 임무들 가운데 다케시마
(현, 울릉도)와 마츠시마(현,독도)가 "조선 부속으로 된 시말"을 조사하는 임
무를 태정관에게 건의했다.(태정관: 특정 직제의 이름이 아니라, 오늘날의
일본 총리부에 해당하는 집합적 명칭)
그리하여 1870년 2월 22일부터 3월 초까지 머무르면서 임무를 수행하였고,
4월에 《조선국교제 시말 내탐서(朝鮮國交際 始末 內探書)》라는 제목의 보
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에는 "울릉도.독도가 조선에 부속하게 된 경위"라
는 것이 자세히 나와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무엇보다 일본의 외무성과 태
정관이 다케시마와 마츠시마가 조선의 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음을 반증한
다고 하겠다.
또 1877년 《공문록》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 내무성은 1876년 일본 전국의 지적(地籍)을 조사하고 지도를 편제하기
위해 각 현에 조사를 지시했으며, 이때 시네마(島根)현은 다케시마(현, 울릉
도)와 마츠시마(현, 독도)를 자기 현 지도와 지적조사에 포함시킬 것인가 제
외시킬것인가를 내무성에 질문하였다.
(문) '일본해(日本海) 내에 있는 울릉도 외 일도(一島)를 지적편찬에 넣을
것인가에 대한 품의'
(답) 질의한 바의 울릉도 외 일도(一島)는 우리나라(일본)와 관계 없다고 명
심할 것. 1877년 3월 29일 태정관.
자, 그러면 여기에서 일도(一島)가 독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히 알아보
자. 같은 사료의 첨부 서류를 보면,
"기죽도(울릉도)는 일명 죽도라 칭한다. 오키 북쪽 120리에 있다.......다음에
일도(一島)가 있는데, 송도(松島:독도)라고 부른다. 주위 약 30정보이며 울릉
도와 동일 선상로에 있다. 오키와는 80리 정도 떨어져 있으며, 나무와 대나
무는 드물고 역시 물개가 난다......"
즉, 당시 일본정부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간주하고 있었으며, 조
선의 영토라고 공식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