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千祥炳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계획된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당시는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을 방문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무려 6개월이나 되는 억울한 옥살이를 치러야했습니다. 선고 유예를 받아서 석방되기는 하였지만, 전기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은 평생 그를 괴롭혔습니다. 몸무게는 40kg까지 빠졌습니다. 성적인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치아도 빠져 버렸습니다. 심지어 말을 더듬는 버릇까지 생겼습니다. 정신적인으로도 헤어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정신착란에 가까운 증세까지 나타냈습니다. 전기 고문으로 인해 나타난 심각한 후유증과 함께 지나친 음주와 극심한 영양실조로 길거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행려병자行旅病者, 무연고자無緣故者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결국 서울시립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친구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가 죽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서 “새”라는 제목의 유고 시집을 발간했습니다. 살아서 유고 시집을 낸 유일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귀천歸天”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노래했습니다. 호흡이 다하는 날, 순리대로 본래의 자리인 하늘로 돌아가겠다고 노래했습니다.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가난이 자신의 직업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누구보다 가난했었고 한恨도 많았으며, 쉼 없이 반복되는 불행들을 벗 삼아 고달프게 살아야 했던 인생이 마치 소풍처럼 설렜었다고, 즐거웠었다고 노래했습니다. 소풍을 끝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날, 소풍처럼 잠시 다녀온 세상살이가 너무나 아름다웠었다고 고백하리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민사회 운동가인 동시에 시인이었던 그咸錫憲는 “거룩한 자의 노래”라는 뜻의 번역 시집Bhagavad Gita을 통해서 “마음이 한번 자유를 얻어 거기에 대한 관심을 내버리고 신비의 가라앉음 밑에 빠져들게 되면, 즉 그 의식이 밝아짐을 얻으면 그런 것들(곧 기쁨과 슬픔 등)은 오고 가는 것이지 그 자신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그다음에 어떤 것이 와도 (모든 것을 달관한 사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단 마음이 자유로워지게 되면 어떤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만나게 되더라도 얽매이지 않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원래의 자리였던 하늘로 돌아가겠노라고 노래하는 시인은 다른 어떤 것보다 큰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까지도 뛰어넘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소풍을 끝내야합니다. 다시 하늘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예비 되어 있었던 원래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는 감정을 붕 뜨게 만들고,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해서 눈먼 채 살아가게 만드는 망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복된 소망입니다.
산 소망입니다.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롬5:5a)라는 증거대로, 이 소망은 결코 저와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진실한 그리스도인만 유일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만 유일하게 무장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나, 원래 자리인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외칠 수 있어야합니다. 한편, 구약학자로 유명한 그Gerhard Hasel는 하루는 저녁으로부터 시작해서 저녁에 끝나야 옳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여러 가지의 성경 구절들을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유대인, 로마인, 헬라인 등은 하루가 저녁에 시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버금갈 정도로 저명著名한 또 다른 학자Umberto Cassuto는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에 끝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시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이집트인은 하루가 아침에 시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도 하루가 아침에 시작해서 아침에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른 오전인 영시로부터 시작해서 늦은 오후가 되는 스물네 시에 끝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표현이 훨씬 적절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라들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점이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대 속죄일과 관련해서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라.”(레23:27),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키라.”(레23:32)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해마다 지키고 있는 대 속죄일은 칠월 열흘날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하루 전날이 되는 칠월 아흐렛날 저녁부터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튿날”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칠월 아흐렛날 저녁과 칠월 열흘날 저녁은 서로 완전히 다른 날 저녁을 가리킨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앞뒤의 많은 시간이 잘려나가기는 했지만, 하루를 아침에 시작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틀이 됩니다. 더 정확하게는 1박2일이 됩니다. 하루가 저녁에 시작해서 저녁에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하루입니다. 스물 네 시간을 기준으로 할 때는 훨씬 더 정확합니다. 꽉 채운 하루가 됩니다. 입장에 따라서 하루가 되기도 하고 이틀 더 정확하게는 1박2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무교절과 관련해서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날을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지키라. 첫째 달 그 달 열나흘 날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이레 동안은 누룩이 너희 집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출12:17-19a)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매년 무교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간은 정월 열닷새 날부터 스물 하루 날까지입니다. 이레 동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나흘 날 저녁 곧 유월절 저녁부터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열나흘 날부터 스물 하루 날까지는 모두 팔일이 됩니다. 7박8일입니다. 저녁에 하루를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에누리 없이 꽉 채운 이레입니다. 두 가지의 예를 통해 하루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정해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을 찾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침부터 아침까지 또는 저녁에서 저녁까지라고 할 때, 아침과 저녁은 각각 몇 시를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 역시 명확하지 않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저녁 해질 때 곧 오후 여섯시 경을 기준으로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해가 넘어갈 때가 계절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의 기준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침과 저녁 또는 하루라는 개념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었다.”(마28:1)라고 증거 합니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를 직역하면 “이제 안식일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입니다. 하루가 아침에 시작되어서 아침에 끝난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하루 개념과는 사뭇 다릅니다. 날은 어두움이 깊은 한밤중을 지나 밝은 아침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아침은 아니었습니다. 이른 오전 영시를 하루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동트기 직전의 시점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개념으로는 안식일을 다 보내고 이미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안식 후 첫날 새벽이었습니다. 토요일을 다 보내고 새롭게 시작된 주일 문턱에 들어선 새벽을 가리킵니다. 그래도 여전히 안식일이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안식일이 다 지나갑니다. 새로운 날 곧 안식 후 첫날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날을 계수하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성경은 또 “안식일이 지났다...(여인들이)...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료를 사 두었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갔다.”(막16:1-2)라고 증거 합니다. “안식일이 지났다.”는 “이미 금요일 오후 여섯시 경에 시작된 안식일이 전날 저녁 곧 토요일 오후 여섯시 경에 이미 끝났다.”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하루에 대한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 후 첫날”은 안식일과는 완전히 구별된 전혀 다른 날입니다. 토요일 오후 여섯시 경에 시작된 새로운 날입니다.
매매를 금지하는 안식일 규정에 구애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랑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에 바를 향료香料를 미리 사 둘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은 시간에 대해서도 헷갈리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정확하게 특정할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그랬을까요? 아니면 성경 기록자들이 날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었거나 몰랐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이도저도 아니라면 두루뭉술하게 기록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굳이 날을 특정하지 않아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을까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면 너무나 이상한 일일까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궁극적인 소망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누구처럼 십일조를 계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야할 정도로 천문학적인 물질을 소유하는 것일까요? 누구나 다 부러워하는 명예와 권세를 누리는 것일까요? 무려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무병장수無病長壽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마음에 품은 모든 생각을 다 이루는 것일까요?
어떤 일에 손을 대든지 무조건 형통하게 되는 것일까요?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가 상존하는 힘겨운 세상에서 무조건 다 이기는 것일까요? 하루가 다르게 이루고 이루고 또 이루고, 커지고 커지고 또 커지고, 높아지고 높아지고 또 높아지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따르는 것일까요? 언제 어디서나 걱정과 염려와 슬픔과 절망과는 전혀 상관없이 환호성을 지를 정도로 기쁘고 즐거운 것일까요? 아니 고해苦海라고 불리는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과연 이런 삶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열거한 것들 가운데 가능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모두 다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호흡하는 동안만 지극히 제한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둬 가시는 순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간절한 마음으로 붙들고 싶어도 붙들 수 없습니다. 목이 터져라 부르짖어도 소용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누리던 그것들 때문에 영원한 저주와 죽음과 불과 유황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는 지옥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질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같이 궁극적인 소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궁극적인 소망은 무엇일까요? 구원입니다. 있는 것 같았는데 환경에 따라 없어져 버리고, 확실하게 없었는데 감정에 따라 있는 것 같은 구원이 아닙니다. 스스로 가졌다 버렸다 할 수 있는 불완전한 구원도 아닙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은 영원히 이어지는 구원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하나님 안에 내가 있는 곧 하나님과 내가 완벽한 하나가 되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쉬지 않고 일하실 필요가 전혀 없는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새 하늘입니다. 새 땅입니다.
새 예루살렘입니다. 시온입니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이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어둠이 없는 나라입니다. 바다가 없는 나라입니다. 저녁이 없는 나라입니다. 당연히 캄캄한 밤도 없는 나라입니다. 영원한 빛만 찬란하게 빛나는 나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는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을 완벽하게 구원하기 위하여 지극히 짧은 시간인 찰나刹那의 순간조차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입니다. 여섯 번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과정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졌고 또 살아내고 있는 삶을 가리킵니다. 더 이상의 창조 활동 없이 누리게 되는 안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시기까지, 단 한순간 식어본 적이 없는 뜨거운 열정을 쏟아 부으며 쉬지 않고 일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함께 저와 여러분에게 반드시 선물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림자 같고, 희미하기는 하지만 오늘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소망은 과연 무엇입니까? 힘겨운 오늘을 살아내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창1:4b-5a)라는 증거대로,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 “빛”에게는 “낮”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지극히 밝습니다. 환합니다. 생동감이 넘칩니다. 생명력이 넘칩니다. 활력이 넘칩니다. 저와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의 총칭입니다. 무엇보다 창조의 근본입니다. 능력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어두움”에게는 “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적막寂寞입니다.
혼돈입니다. 공허입니다. 깊은 흑암입니다. 정체입니다. 꽉 막혀 있습니다. 당연히 답답합니다. 지극히 어둡습니다. 생동감, 생명력, 활력이라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의 총칭입니다. 구원받기 전의 저와 여러분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b)라고 이어집니다. “저녁ערב(에레브)”은 “캄캄한 밤ליל(라일)”이 아닙니다. “환한 낮יוֹם(욤)” 곧 날도 아닙니다. 빛줄기가 작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지러져서 거의 다 사라져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열나흘 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으라.”(출12:5-6)라는 증거를 통해서, 조금 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은 반드시 해가 질 때쯤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해질 때”는 합성어입니다. 하나는 “사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בּין(벤)입니다. 또 하나는 “저녁”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ערב(에레브)의 쌍수הערבים(하아르바임)입니다. 저녁들을 가리킵니다. 결국 “해질 때에”는 “(두 개의) 저녁들 사이에”를 가리킵니다.
두 개의 저녁들 가운데 하나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일몰日沒입니다. 또 하나의 저녁은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는 여명黎明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새벽으로 부르는 바로 그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을 일몰과 여명 사이에 잡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아침은 낮입니다. 어떤 저녁이든 곧 일몰이든 여명이든 저녁은 반드시 아침 곧 낮을 향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은 밝은 빛을 향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곧 해처럼 밝은 낮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창세전부터 그렇게 역사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자세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여섯 번씩이나 지루하게 반복되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창2:1-2)라는 구절에 따르면,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곧 해가 높이 떠오른 한낮)이 되었다는 표현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던 창조가 완벽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셔야할 이유가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밤도 없고, 저녁도 없고,)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우는 것도 (없고, 절망도 없고, 미워할 일도 없고, 저주할 일도 없고,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죽여야 할 일도 없고), 아픔도 없고(, 낮만 영원히 계속 이어지는, 하나님과 다시는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복된)”(계21:4a) 상태에서, 이후로 영원까지 이어지는 안식을 누리는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아내고 있는 삶도 역시 이렇게 놀라운 일을 반드시 이루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거룩한 약속을 품고 있습니다. 사탄의 집요한 유혹 속에서 신실하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정말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배교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가져야할 영원하고도 유일한 소망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규례와 관련하여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출20:9)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행하라מְלָאכָ֡֜ה(멜라카)”를 직역하면 “그 곧 하나님이 하시던 모든 일”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개역 개정의 “힘써 네 모든 일”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엿새 동안 (하나님이) 모든 일을 행하신다.”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엿새는 말씀 곧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저와 여러분이 힘겨운 삶을 살아내고, 쉽지 않는 사람을 견뎌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변하지 않던 존재 자체가 완전히 바뀝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뀐 이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값없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축복입니다. 절대로 놓치지 말고 반드시 붙잡아서 누려야하는 축복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결코 쉽지 않은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세 가지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먼저, 오직 자기만족 하나만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간절하게 바라던 소원을 이뤄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정도는 됩니다. 삶은 거의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 기대 이상으로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입니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꾸려나갑니다.
건전한 수고를 통해 마련하게 된 물질과 건강은 물론 여러 가지 분야에서 맺고 있는 각종 좋은 관계들을 바탕으로 만족스러운 비혼 생활을 즐기기도 합니다. 자아 완성을 위한 여러 가지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만족이 채워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굳이 불편을 감수하거나 또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힘겹게 마련한 자신의 소유 가운데 일부를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합니다. 또 조금은 가벼운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원과 영원한 내일을 위해서 치르신 거룩한 희생에 대해서 감사할 정도는 됩니다. 자신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시려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즐거움도 있습니다. 세상 끝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는 기쁨도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 감정들을 모두 합친다 할지라도 죄의 유혹에 무릎 꿇을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쾌락보다는 적습니다. 이미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죄에 대한 설렘과 동경과 환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아니 비교할 대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들도 때로는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합니다. 한동안에 불과합니다. 버텨 봐야 짧으면 기껏 며칠뿐입니다. 길어 봤자 겨우 몇 달 정도입니다. 다시 또 굴복합니다. 항상 실패하지는 않지만, 자주 실패합니다. 대단히 많이 실패합니다. 하나의 습관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지극히 무기력하고 불가항력적인 실패의 시간들이 반복됩니다. 불안에 떨면서도 지극히 육신적인 기쁨을 버리지 못합니다. 추잡한 쾌락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마음이 발동하면 언제든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편을 몰래 준비해둡니다.
그런 자신에게 실망하면서도 완전히 돌아서지는 못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그야말로 독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을 위한 말과 행동을 극도로 조심합니다. 아니 자신을 위한 말과 행동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보다는 하나님과 이웃의 기쁨이 되고 싶은 소망이 훨씬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걷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랍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각종 복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또 누립니다. 그렇다고 지극히 제한적으로 누릴 수밖에 없는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작정하셨고 완성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신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합니다. 하나님과 자신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완벽한 하나 되는 날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꿈꿉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 나라로 완벽하게 거듭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날을 소망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 추구를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죄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세상은 절대로 줄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희미하게나마 누리고 있습니다.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지극히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해당됩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신앙생활 한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기 자신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하루하루 하나님으로 충만해 지는 복된 삶, 하나님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복된 삶, 고해 같은 힘겨운 인생까지도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