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미술, 추상미술 어떻게 감상할 것 인가?
미술용어로 ‘구상미술’, ‘비구상미술’, ‘추상미술’, 혹은 ‘반추상미술’이라는 말을 흔히 들었을 것이다.
낯설고도 구분하기가 쉬운 말이 아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구상미술은 자연물을 대상으로해서 그 인상이나 형상을 화면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구체적으로 담는 미술이며, ‘추상미술’은 자연물을 표현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미술이다.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소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구상미술에 비해 추상미술은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있는 대상(사람, 꽃, 동물 등)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비수상’이라는 것은 ‘추상’의 한 종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구상미술이 자연을 소재로 한 재현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추상은 재현적인 요소로부터 탈피하는데서 시작되는데, 아예 처음부터 작가가 재현의 대상이 없이 그려낸 것은 비대상미술, 어떠한 대상을 작가의 의도적인 왜곡으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표현한 것을 비구상미술이라고 하며 이런 것 등을 통틀어 ‘추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반추상’이라는 것은 그러한 면에서 추상화되는 정도의 문제에서 나누어진 경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반추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구상미술에서 추상화로 진행된 정도가 완전하지 않은, 일정정도 표현의 대상 형태를 화면에서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그림을 말한다. 1890년 모리스 드니는 “회와의 전쟁터의 말이나 나부이기 이전에 질서를 가진 색채로 덮여진 평면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회화가 지금까지 사물의 묘사에 치중했던 것을 벗어나는 상징적인 말이다.
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의 발전경로를 보면, 20세기에 들어와 야수파는 색채의 해방을 주장하고, 큐비즘은 사물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평면에 담았고 미래파는 속도감 있는 시각언어를 보여 주었다. 한편 러시아 구성주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강하고 격렬한 감정의 표현을 다룬 뜨거운 추상과 그 반대적인 개념의 차가운 추상 등등 무수한 추상미술의 갈래들이 생겨났다.
사실 아무렇게나 물감을 뿌린 것 같은 그림 또는 화면전체를 온통 빨간 색으로 칠한 그림을 보았을 때 미술에 대한 경험이 적은 경우 일반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라도 얻을까 싶어 작품제목을 살펴볼 수도 있겠으나 ‘작품번호 45’ 또는 무제라고만 적혀있으니 더욱 난감해질 뿐이다.
게다가 이런 추상미술은 지나치게 과장되어온 측면이 있다. 실제로 따져보면 현대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구상미술에 비해 의외로 작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도 현대미술하면 곧 추상미술로 등식화할 정도로 과도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앞에서 말한 당혹감에도 일정정도 책임이있다. 추상화를 볼 때 우리는 철저하게 거부당하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것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부당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림에 대해 일반인이 갖고 있는 막연하지만 매우 뿌리 깊은 기대가 좌절되었음을 뜻한다.
가령 우리는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정물화나 풍경화 인물화 등 구상화를 볼 때는 어렵지 않게 ‘좋다’ ‘싫다’라고 선뜻 말한다. 이것은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을 그림 바깥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실물과 얼마나 닮았느냐에 따라 그림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구체적이 형태가 없는 추상화는 그림 기준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칸딘스키가 석양에 비친 자신의 뒤집어진 초상화를 보고 형태가 없어도 색과 선만으로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독특한 추상미술을 개발하였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추상화를 감상할 때에는 어떤 현상이나 메시지를 잡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물감의 두께, 색채의 배열, 혹은 캔버스 전체 내의 균형 등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 눈을 집중시켜 그 감각적인 특성을 받아들이도록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흔히 구상미술이라 이르는 작품들도 정확하고 순수한 의미에서는 추상미술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네의 ‘수련’을 보면 구상적인 연못을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표현들은 연밭의 재현보다는 조형적 효과에 집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구상회화의 한 부분을 확대하여 본다면 추상미술과 구분할 수 없으리만치 추상미술의 표현적인 기법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도 구상과 추상미술의 경계를 명확히 긋고 구분하여 미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단편적인 수용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상작품을 하는 작가들도 그 출발점은 대부분 자연의 재현으로부터인 경우가 많으며 재현적 요소를 어느정도 없애가는가에 다라 구상과 반추상, 추상, 비구상으로 구분할 뿐이라는 것이다. 미술작품이 전하는 구상적 문학적 메시지를 찾으려는 것에 앞서서 구상, 추상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작품의 선, 색, 형태의 조화와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감상의 자세가 시각예술의 수용에 있어서 필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제 37회 부산 미술대전 관람자를 위한 미술 감상의 이해
일반적으로 미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가끔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일반인들이 느끼는 생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은 어떻게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이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도 않으면서 또한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닐 수 있다.
우선 이번에 시립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제 37회 부산 미술대전 작품들은 한사람의 작품만이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몇 백 명의 작품들이 전시되는 공모 입상작 전시라는 것을 참고 해야 할 사항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작품을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이 작품의 해석과 부합되기도 실사
어려운 일이다.
이번과 같은 공모전 입상작의 전시는 요즘의 시대적 미술의 흐름과 다양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가들마다의 다양한 표현 세계와 조형의 기법을 살펴보며 작가들의 다양한 표현 방법을 관찰하는 산책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우선 ‘미술’ 또는 ‘미술표현’ ‘미술행위’는 인간의 어떠한 대상을 바라보거나 느낀 감정을 시각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며 작품은 그 결과이며 행위에 따른 부산물이다.
마치 말이나 언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주체를 표현하는 것처럼 미술표현 또한 시각적언어(색채, 형태, 비례, 구도, 조형성등) 를 가지고 자기의 감정과 관심을 가진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미술의 양식이다.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제각각의 주제나 표현 방법을 갖고 있는데 특히 표현의 자연스러움과 주제나 조형성을 잘 부각시킨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 점은 바로 작품과 낙서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하는 대목이다.
조형적인 연구와 조화 그리고 작품에 표현된 작품주제의 설득력 등이 어떠한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는지 또한 표현하려고 하는 대상에 대한 표사는 적절하게 표현되었는지 종합적이면서도 상대적인 평가를 작품은 평가받게 된다.
*표현 재료적 분류
미술 일반에 있어 서양화, 한국화, 조각, 판화, 공예, 디자인, 서예, 문인화 등의 장르적인 구분이 있는데 이는
먼저 사용되는 재료와 전통에서 나누어진다.
여기에서 재료적 큰 분류는 다시 각기 세부적으로 분류 지을 수도 있으며 표현 양식상과 시대적 구분도 하기도 한다.
재료적 구분의 특징에는 각 분야마다 사용재료와 제작기법에 따라 분류한다.
예를 들면 서양화에는 수채화/ 유화/ 아크릴화/ 기와등, 기와한국화의 수묵화/채색화 등, 판화의 목판/동판/실크스크린 등의 재료와 판법의 차이등에 의해서 분류되고 공예는 조자, 목공예, 지(종이)공예, 섬유공예 등으로 디지인은 편집디자인, 제품 영상에니메이션등 조각은 철조, 브론즈, 목조 부조등과 서예에는 행초서, 전예서,해서, 한문, 사군자등 기타 세부적 분류를 적용한다.
반대로 다양한 재료의 선택과 접목으로 오히려 재료를 통한 장르의 구분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현대에 와서 작품표현에 있어 장르만의 구분과 재료적 한계가 희미해진 이유로 관람자에게 이런 재료구분은 무의미하게 느껴질수도 있다.
*구상과 비구상과의 분류
미술 표현은 통상 구상과 비구상(추상)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는데 구상계열의 작품등은 작품에 그려진 형태나 상황등을 통해 관람자의 정서를 자극하고 그려진 이미지들을 통해 설명되어지며 함축적으로 상징되어 보여지기도 한다.
반면 비구상(추상)은 구상에서의 구체적인 형상을 생략하거나 왜곡시키는 형태로 나타내기도 하고 상징화된 기호처럼 보여 지기도 하고 개념성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