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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니마를 찾아서 : 환상, 시 그리고 죽음
---금기웅의 시세계
김석준
낯선 불길함에 포획된다. 환상인 듯 몽환인 듯 좀체 종잡을 수 없다. 매트릭스가 구현하는 알고리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 채 혹은 진실과 가상의 경계를 해체시킨 채 실재와 그것의 체계를 전복시킨다. 21세기의 시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전복에 전복을 거듭해 시말화가 가능하지 않은 곳에서 생성된 미지의 기호를 의미의 체계로 의식화시키는 것이리라.
클리셰의 거부 혹은 미적 신기원에의 열망. 언어의 한계를 극한까지 몰고 간다. 시말은 극한에 도달한 것만이 시의 체계로 포착된다. 더불어 의식화가 가능하지 않은 무의식을 의식화시키기에 이른다. 소통은 차선이고, 미적 구상력의 자의적 해석은 최선이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말한 그 교의를 시의 진리 삼아 현대성의 한복판을 무한 질주한다. 착란이 일어나고 환상과 그것의 구성물을 적극적으로 향락하며 언어의 심연을 불길하고 낯선 무의식으로 가득 채운다.
운명의 시말과 마주선다. 마치 페넬로페에게 이르는 오딧세우스의 일련의 여정이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금기웅 시인의 달에 응고된 일련의 상징적 알레고리도 자기 아니마를 찾아 떠나는 불길한 존재의 행로, 즉 시의 구성법인만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금기웅 시인의 “달”에 관한 일련의 신작시들은 죽음의식에 포획된 무의식의 심연을 “그녀”라는 환상의 주체에 응고시켜 의식화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달”에 포획된 일련의 서사적 실체이다.
자기 아니마를 찾아 환상과 그녀 사이를 배회하다 사랑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확인하게 된다.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 왜 시인은 달에 응고된 일련의 서사를 시와 관련지어 죽음의 욕망으로 전복시키는가? 아니 시인의 그것은 사랑이라는 미망에 갇힌 자기를 개방하는 과정에 생성된 시에 관한 일련의 담론적 사유를 시간의 서사로 응축시켜 내밀하게 그려 보이고 있는데, 이는 어떠한 환상을 충족시키는 존재의 여율인가?
광기가 서린 듯 불길했고, 서사의 행로 전체가 욕망의 죽음으로 향하는 환상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말하자면 시인이 묘파한 달의 서사는 풍요를 상징하는 인간학의 제의가 아니라, 죽음을 만족시켜야만 하는 타자의 욕망인데, 이는 시가 생성되는 또 다른 욕망의 체계, 즉 시인이 자기 아니마를 찾아가는 창조적 과정과 적확하게 대응된다. 말하자면 달에 관한 일련의 구성법은 장자의 호접몽과 유사한 체제를 이루고 있는데, 어쩌면 그것은 자기 운명을 지배하고 있는 무의식의 심연을 응시하는 혹은 죽음이라는 환상의 가면에 둘려 쳐진 은밀한 아니마를 포획하는 존재의 참된 과정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창조적 작가의 몽상은 바로 늘 결핍과 맞서 싸우는 자기 한계 너머의 환상을 의식의 심연에 결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마에 조종당하고 극적으로 포로가 된 채 시를 쓴다. 따라서 금기웅 시인에게 달은 풍요로움의 상징적 구성체가 아니라, 결핍, 즉 거세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유년기 억압의 상징체이거나 실패한 사랑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실패로만 중층 결정된 좌절된 사랑, 즉 황홀한 죽음본능일지도 모른다. 니르바나와 환상 사이의 거리 혹은 아니마에 이르는 그녀라는 타자. 달에 도달할 수도, 또 그것을 극적으로 소유하거나 전유할 수도 없다. 그저 바라다만 본다. 그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채 대도시를 밝히는 어둠의 달과 함께 몰락에 이른다. 그녀는 죽었고, 나(시인)는 이렇게 시를 쓴다. 그녀의 요구와 정반대의 시, 즉 생 아닌 죽음에 이른 일체의 과정을 서사화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내게 요구한 시어(詩語)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녀의 바람대로 써내려가지 못하는 내가 씁쓸해졌다.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나의 시의 해답을 깨닫지 못한 채
저 휘황한 도시의, 백화점의, 거대자본에게 고문당하다가
결국은 광장의 나무들 같이 서서히 말라갈지도 몰랐다. 「달의 입구」일부
그녀는 시다. 그녀가 시 아닌 그 무엇일 수 없다. 왜냐하면 달에 관한 일련의 연작들은 그녀, 즉 자기 아니마가 변주된 죽음의 광시곡을 지극히 애매한 서사의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금기웅의 그것들이 이미 죽어 소멸한 그녀를 달의 서사학으로 구축해 환상의 구성물로 재건했을 개연성이 농후하지만, 따라서 “달의 입구”와 “문” 사이의 거리를 다양한 의미의 공식으로 봉합해 그녀에 관한 서사를 오밀조밀하게 기입하고 있지만, 어찌 그것이 자기에게 이르는 시의 참된 길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요구”에 따라 위대한 시를 쓰고 싶다. 마치 파블로 피카소의 예술이 자기 아니마에 충실했던 에로티즘의 절대적인 향연에서 비롯했던 것처럼, 금기웅도 “그녀의 바람”에 응답해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학을 시말로 부조시키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요구한 “시어(詩語)”의 심연에 가닿지 못한다. 아니 시 「달의 입구」는 “지하역 입구” 어디쯤에서 헤매다 “시의 해답”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면에 당도하게 되는데, 어쩌면 그것이 바로 그녀가 처한 존재론적 위치, 즉 자기 아니마가 부재한 상황에서 비롯한 인간학적 아포리아인지도 모른다.
온전하게 자기를 표현하고 싶다. 자기 아니마를 표상하는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참나와 만나 위대한 예술혼을 꽃피우고 싶다. 물론 달에 관한 연작에 묘파된 일련의 서사가 생의 충족요율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나토스 어디쯤에 매개된 비존재의 역량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따라서 발레 지젤의 빌리(Wili), 즉 춤추다 죽은 원혼처럼 명계를 떠도는 환상에 고착된 정신착란에 이른 듯 불길하지만, 이는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통과의례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그녀는 외상성징후, 즉 시말이 생성되는 의식의 근원이자, 자본의 현대를 살아가는 소외된 자아의 또 다른 형상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를 온전하게 포획해 시의 위의를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기란 그리 쉬운 일 아니다. 아니 역으로 애초부터 자기 아니마를 발견하는 그 위대한 작업은 필생의 과제이자, 자기를 전부 걸어야만 포획될 수 있는 생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녀를 눈앞에 현전시켜 낱낱이 그 정체를 파헤친다거나 그녀의 서사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내 보여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위치는 뮤즈, 즉 시가 존재하는 방식과 정확하게 대응되는 정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필생의 시인이 되어 뮤즈가 육화시킨 정령의 언어를 시말로 발화시키고 싶다. 물론 늘 그녀의 요구와 반대되거나 “저항”의 포즈를 취하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겠지만, 따라서 시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아니마와 피 터지는 대결 끝에 얻어지는 어떤 깨달음의 상태인 것 또한 사실이지만, 금기웅에게 시란 포박된 채 “전기고문” 당하는 반어적 희열의 상태와 유사한 자학적인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방가르드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저항과 부정성에 친숙한 타자지향적인 욕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여 그녀에게 완벽하게 포박당한 채 시와 그것의 구성물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노예의 상태, 즉 아이러니한 상황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채 시에 매혹되는 기행이 극적으로 전개된다. 아니 역으로 금기웅에게 시는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이거나 자기 운명의 언어와 만나는 황홀한 절정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와 완벽한 합일이 가능하지 않다. 설령 시인이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더라도 “달의 입구”가 어딘지 모른 채 시의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따름이다. 왜 그런가? 왜 시인은 자기 아니마와 화해하지 못한 채 “검은 밤” 거리를 헤매며 불안한 환상을 꿈꾸는가?
어투는 언제나 쓸쓸하게 보였다. 말들을 볼 때마다, 나는 단지 그녀 주변부를 떠도는 한 마리 나비일 뿐이었다. 「달의 말」일부
희망은 희미한 별빛과 함께 어둠속으로 가라앉았다. 세상에서 찾고자 했던 것들, 찾지 못하고 떠날 것 같아 불안해졌다. 「달의 사진」일부
나는 꿈속에서 현실처럼 걸어갔다. 빛이 약하게 비추었고, 하늘은 흐릿했다. 꿈을 꾸면서도 아마 꿈속일 거라 생각했다. 「달의 꿈」일부
금기웅 시인의 달 연작이 문제적인 이유는 시와 환상 사이의 거리를 그녀라는 인칭대명사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비추어보고 있는데, 어쩌면 그것은 현대인이 간과한 자기 아니마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행로이거나 삶―시간―세계를 진리의 구성물로 성찰하는 존재 그 자체의 언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녀가 자기를 구성하는 절대적인 주체인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그녀가 말하는 “어법”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정확하게 모른 채, “안개(霧氣)?“라는 의문형 글귀”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도대체 “달의 말”은 어떤 의미의 진실을 지시하는가? 물론 나는 그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의문형의 “짧은 말”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따라서 그녀의 존재론적 위치가 아포리아 근방에 위치한 미궁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녀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자문자답의 말, 즉 진리에 도달하는 궁극의 길이라는 사실만은 짐작하고 있다.
만약 달의 말이 그와 같다면, 시인은 그녀와 관계를 통해서 어떤 의미의 실재와 조우해 하는가? 물론 그녀는 억압된 것의 실체이거나 시인을 지배하는 내적 인격의 강력한 주체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강력한 주체를 현전의 의식으로 포획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칼 구스타프 융 식으로 말해서 그녀의 의도를 “해석”하는 도처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말의 진실에 도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늘 페르소나로 은폐시킨 바로 억압의 그 자리로 되돌아가 자기 존재를 망각한 채 미망의 세계를 헤매다 자기 한계에 도달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금기웅 시인에게 그녀는 “혼자 성지를 순유(巡遊)하는 순례자”처럼 자기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나를 “주변부를 떠도는 한 마리 나비”처럼 미망의 세계에서 헤매게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이는 자기 아니마에 도달하기 위한 시련, 즉 통과제의임을 명심해야한다. 마치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육화된 험난한 구도의 과정처럼,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도 자기 아니마를 찾아가는 여정이 만든 환상의 어디쯤에서 생성된 것인데, 어쩌면 그것은 죽음의 전주곡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인지도 모른다.
까닭은 무의식의 침전물로 구성된 그녀가 “사진” 속의 그녀, 즉 영정사진 속의 그녀이자, 인간학적 제의를 죽음의식으로 고양시키는 “희망”의 저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론 “허기”에 지친 빈궁의 나날들을 견디어야 했고, 때론 “수고와 고통” 속에서 어둠을 응시하기도 했지만, 따라서 시말에 저당 잡힌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미망의 세계에서 헤매는 아포리아 그 자체인 것도 사실이지만, 어찌 그것이 온전한 자기를 찾아가는 존재의 과정이 아닐 수 있겠는가? 오늘도 완벽한 시를 찾아 길을 떠난다. 물론 시인의 그것이 환상과 죽음 사이에 매개된 그녀의 서사를 시말화한 것이지만, 따라서 그녀에 관한 일련의 서사적 사태가 징환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존재의 집, 즉 시말이 생성되는 의식의 가능적 조건이라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다시 말해서 금기웅 시인에게 나와 그녀 사이에서 빚어지는 일련의 “불안”은 사랑의 저쪽에서 파생된 죽음의식의 일종인데, 어쩌면 그것은 생에 속한 모든 것들이 영원히 봉합 불가능한 그 무엇으로 이미 조건 지어진 분열의 극한, 즉 시말의 생성 조건이라 하겠다. 마치 의식의 심연에 가로놓인 저 억압된 것의 실재가 생을 지배하는 궁극적인 상징체이듯이, 시인은 달이라고 지목된 여성성에 응고된 미지의 기호들을 서사적 공간에 재배치하여 자신에게 속한 시의 운명과 맞서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찾고자 했던” 의미의 기호들을 찾지 못한 채 저 미망의 세계에 닿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녀”, 즉 시에 관한 담론적 욕망의 체제가 처한 숙명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쓸쓸한 도시의 어디쯤을 배회하며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본다. 도대체 나는 어떤 시를 써야 하는가? “사진 속에 맑은 그녀”를 바라다보며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다. ‘그녀를 지켜주소서! 그녀가 영원에 닿지 않게 해주소!’ 대저 어떤 시의 해법에 이를 때 가장 완벽한 그녀의 구성법을 구축할 수 있는가? 간절한 마음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그녀가 이 땅 위에 굳건하게 두 발을 붙이고 서있을 리 없다. 아니 역으로 시의 완벽한 위의를 간직한 그녀는 시인의 기도와 달리 무를 만족시키는 적멸의 공간에 당도해 황홀한 환상을 꿈꾼 채 생에의 형식을 탈구시키고 있는 중일 게다.
완벽한 소멸에 가닿아 자기 목적지를 무로 설정하는 것이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인지도 모른다. 설령 달의 연작에 묘파된 일련의 서사가 자기 아니마를 찾아가는 숙명의 과정처럼 보이지만, 따라서 자연인 금기웅이 시인 금기웅으로 탈바꿈해 위대한 예술을 욕망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는 위치에 그녀가 자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지난한 삶이 색인된 예술가의 초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그것일 것이다. 예술은 저와 같다. 거개의 위대한 예술적 행위는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처럼 자기 숙명의 아니마와 만나 죽음제의를 만족시킨 채 찬란한 예술혼을 꽃피우는 것으로 서사를 종료하면 그만이다.
꿈을 꾼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장자처럼 꿈에 이른다. 현실은 꿈이고 꿈은 현실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적 성취가 그렇듯, 꿈은 진리에 도달하는 최단거리이자, 자기 망각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적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시 「달의 꿈」은 삶과 죽음 사이에 매개된 비의를 깨달음의 전언으로 전복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꿈이 지시하는 의미의 실재이다. 마치 프로이트의 꿈이 리비도에 응고된 인간학적 진실을 고도의 수사적 장치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듯이, 시인도 그녀에게 고착된 에로스적 대상리비도를 압축 전치된 환상의 형식으로 향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릿한 냄새”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풍겨져 나온다. “달의 꿈”이 심상치 않은 것은 단순하게 리비도의 충족요율을 만족시키거나 대리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비”의 “정화”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표면적으로 볼 때, 달에 관한 꿈 사상이 낯선 불길함이 표현된 희생 제의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것은 합일이 불가능한 아니마, 즉 타자화된 분열적인 자기 환상의 구성물을 통과제의로 고착시킨 억압의 형식인 까닭에 그러하다. 그녀는 모든 억압의 근원이다. 따라서 그녀를 향하는 꿈 내용은 시의 자료가 되는 궁극적인 참조목록이자, 리비도에 고착된 그 모든 인간학적 징후를 승화시키는 “성녀”의 고귀한 행위이다.
그러나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되는 그녀의 일련의 행위가 그리 숭고한 것으로 표상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분열, 즉 합일이 불가능한 자기 아니마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아니 금기웅 시인에게 그녀는 영원히 미제로 남은 시의 참조목록이자, 반드시 규명해야만 하는 억압의 상징체이다. “온몸을 땀에 흠뻑 적신 채” 혼몽 같은 꿈에서 깨어나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고 왜 이 시공간에 존재하는가? 대저 나는 달, 즉 그녀라는 상징적 존재 앞에 어떤 의미의 구성물인가?
시의 길이 미궁에 빠진다.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 전혀 모르고 그것이 어떤 의미의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말하지 못한다. 까닭은 꿈속의 그녀는 이미 비존재의 욕망을 만족시킨 환상의 타자로 물화되었기 때문이다. 현실과 꿈 사이의 경계가 모호했으며, 마침내 생에 속했던 모든 것들을 피안으로 이월시켜 그녀를 완벽한 진리의 구성물로 안치시키게 된다. 그녀는 시이고, 시인의 숙명이자, 자연인 금기웅을 시인 금기웅으로 변신시킨 자기 아니마의 위대한 예술혼이다.
순간 밤이, 그녀의 빛이, 운구차량 위로 내려왔다. 밤이 까맣게 익어가고 있었다. 차량 뒷 깜박이가 붉은 빛을 흔들었다. 그녀가 닫힌 밤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었다. 「달의 문」일부
결국 타나토스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자기 아니마와의 극적인 결별을 하며 화해 모드에 돌입하게 된다. 까닭은 달에 포획된 일련의 서사가 시간의 숙명과 마주선 운명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운구차”에 실려 굳건하게 “닫힌 밤의 문”을 열고 하데스의 명부에 등재되는 최후를 맞게 된다. 아니 역으로 그녀의 죽음과 함께 자기 아니마를 찾아가는 저 시의 길은 위대한 인간완성의 길이자, 온전한 자기와 대면하는 진리의 길로 전복된다.
그녀의 죽음이 그리 슬프지 않다. 다만 “먹먹”할 뿐, 완벽하게 차원변이가 일어났을 뿐, 더는 존재의 길 여기저기에 고통을 색인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달의 문”을 통과한 순간, 그곳은 완벽하게 진리가 구현된 별천지의 또 다른 세계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그녀의 빛”, 즉 혼불이 되어 진리를 만족시키는 미지의 기호가 참된 시의 길로 전이되었듯이, 시 「달의 문」은 존재에 관한 모든 것들을 “운구차”에 응고시켜 인간학적인 진실을 탈구시키게 되는데, 어쩌면 그 죽음의 길만이 생의 의미를 온전하게 반조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의 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죽음이고, 생이 소진된 최후이자, 시의 알파와 오메가를 포획한 의미의 완벽한 실재이다. 물론 영계에 진입한 그녀와 “작별인사”을 하며 점점 어둠의 심연으로 침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따라서 달에 포획된 일련의 서사적 징후가 예술혼을 투명하게 밝히는 자기 아니마와 절연하는 갈등처럼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어찌 저 죽음의 “운구차량”이 진정한 화해가 일어나는 상징물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먹먹하게 “까맣게 익어가”는 “밤”의 대열에 서서 “혼자” 묵상에 잠긴 채 그녀를 떠나보낸다. “달의 문”을 활짝 열어젖혀 그녀가 비존재의 욕망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황홀한 순간을 “빛”의 전언으로 밝혀 작별을 고한다. 안녕! 사랑과 애증이 교차했던 그녀를 떠나보내며 다시 혼자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설령 그 길이 그녀가 요구했던 시말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그 체제를 이루고 있을지라도, 시인 금기웅은 자기 내부에 여전히 존재하는 자기 아니마를 찾아서 시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또 다른 달의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서성거리며 시와 그것의 구성법에 침잠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인의 운명이고 언어의 접근법이다. 또 다른 자기 환상을 찾아 길을 떠난다. 자기 아니마와의 합일을 꿈꾸며 기행을 거듭한다. 시와 그것의 해석이 거기 있다. 아니마를 꿈꾼다. 황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