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0(금)_시편10.1-18_겸손한 자의 소원_
시작기도.
사랑의 주님, 다시 새아침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시간 주의 보혈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말씀으로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옵소서. 오직 성령충만하여 주의 뜻에 따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해묵상.
10편 1절은 시인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여기서 ‘숨으시나이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는 ‘타흘림(תַּעְלִים)’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몸을 어디론가 숨겼다는 뜻을 넘어, ‘고의로 눈을 감아버리다’, ‘못 본 척 외면하다’라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지금 몰라서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다 알고 계시면서, 내가 이 고통 속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다 보시면서 왜 눈을 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계십니까!”라는 처절한 항변입니다.
6절로 넘어가면 악인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도다.” 악인은 자신의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과 ‘악인’은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 기준, 즉 ‘착한 일 많이 한 사람’과 ‘나쁜 짓 많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날마다 그분과 교제하는 자’이며, 악인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 없이도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자’입니다.
지금 악인은 계략을 세워서 약한 자들을 뒤쫓습니다. 그리고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고 욕심과 탐욕을 부리며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합니다. 그들은 너무도 교만해서 그들의 모든 생각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시인이 고발하는 악인들의 특징은 너무나도 생생합니다. 그들은 드러내놓고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자신의 이름을 바꾸어 사람들의 양심이 둔해지게 하고 정확한 사실을 애매하게 왜곡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멋진 성취와 대단한 능력으로 포장합니다. 악을 합리화하고 3A를 숭배합니다. 그것은 외모(Appearance), 성공(Achievement), 그리고 풍요(Affluence)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을 떠나 비참한 존재로 전락한 자신을 가리기 위한 무화과잎입니다.
외모와 평판은 사람들의 눈에 번듯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삶입니다. 성공은 자기 분야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사람들에게 칭송과 높임을 받는 삶입니다. 풍요는 육체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윤택하고 안락을 누리는 삶입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비참하고 벌거벗은 존재가 된 인간이,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엮어 만든 ‘현대판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세상에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현실은, 이 3A의 원리가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으로도 고스란히 들어와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했던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시고 그분의 십자가 길을 묵묵히 따르는 듯 보이나 은연 중에 세상의 성공 방정식을 끼워 넣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저 집사님은 기도를 열심히 하더니 사업이 대박이 났대”, “저 권사님 자녀는 명문대에 붙은 걸 보니 하나님 복을 많이 받았어.” 은연중에 현실이 번듯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거나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고,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성공과 동일시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현대판 무화과 나뭇잎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들은 인생의 성공을 강조하고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과 동일시합니다. 실제로 그들의 이 성공의 끝에는 풍요롭고 안락한 삶이 잠시나마 있습니다. (서형섭)
그러나 성경은 명확히 경고합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의 무화과잎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교회 안에서조차 육신의 정욕을 뽐내는 자들, 성경은 바로 그들을 향해 ‘악인’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의인은 스스로 강한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께 맡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이 이해할 수 없는 환난과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처절하게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여기서 ‘일어나옵소서’의 히브리어 ‘쿠마(קוּמָה)’는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이나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기 위해, 혹은 군대가 대적을 진멸하기 위해 출정할 때’쓰던 전쟁 용어입니다. 또한 ‘손을 드옵소서’의 ‘네사 야데카(נְשָׂא יָדֶךָ)’는 대적을 치기 위해 권능의 팔을 높이 쳐드는 심판주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은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반드시 심판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속한 자, 악인이 다시는 그분의 자녀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세상에서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외로운 자’, ‘고아’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에선 비빌 언덕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오직 하늘 아버지만을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주님은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를 위하여 완전한 공의의 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속한 악인이 다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실 그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이 멀리 서 계시는 것 같고, 내 고통에 눈을 감으신 것 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 외에 의지할 것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에서 도우시고 보호하십니다. 세상이 아니라 우릴 도우시는 우리 주님만 의지하는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샬롬.
나의묵상.
주님은 내가 어려울 때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내 안에 계신다.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은 거의 나의 이 육체의 소욕 때문이다. 환난과 곤고(θλῖψις καὶ στενοχωρία)는 의롭지 못함의 증거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 환난과 곤고가 있으니 그것은 분명 3A로 가득찬 세상에 눈길을 준 결과다(롬2:9).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바른 교제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생의 증표다. 선인은 그렇게 산다. 매일 매일 주의 십자가에 죽고, 주의 무덤에 묻히고, 주와 함께 부활하여 이웃에게 나가 주를 전한다. 오직 이 땅에 오신 주께서 행하신 대로 나도 행하여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더함교회가 ‘환난과 곤고’의 무덤에서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사람들 앞에 나아가기 원한다.
묵상기도.
주님, 육체의 소욕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의 뜻대로 사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 아침을 오직 주를 의지하여 시작합니다. 주께서 새날 주셨으니 주께서 인도하여 주옵소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세상에 나아갑니다. 십자가에 죽고 ‘환난과 곤고’의 무덤에서 부활하여 세상에 발을 딛습니다. 주님, 만나는 모든 이에게 복을 주시고 영생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