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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교회 시대의 강해(2부)- 밧모 섬에서의 환상.
*소 개*
월리엄 매리언 브래넘 형제는 1960년 12월 4일부터 11일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요한계시록1~3장까지
일곱 교회 시대에 관한 메시지를 연속으로 설교했는데, 이 지면을 통해서 시리즈로 소개해 드리고자합니다.
윌리엄 매리언 브래넘 형제님의 놀라운 사역은 말라기4장:5~6절, 누가복음17장:30절, 계시록10장:7절, 등등,
성경에 예언된 말씀에 대한 성령께서 입증하신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계적인 사역은 다른 여러 성경 예언들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이 마지막 때에 성령께서 그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그의 사역은 신부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시켜 휴거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로 이 메시지를 읽는 동안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비(마음 판=고후3:3)에 쓰이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정확하면서 편집하지 않은 번역을 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하였지만, 영어 오디오 파일들이
브래넘 형제님이 하신 설교를 있는 그대로 전해 줄 것입니다. 브래넘 형제님이 설교한 1,100여개의 설교들은
여러 언어로 통역과 번역이 되어 있으며, www.messagehub.info 에서 다운로드 받고 인쇄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메시지 책자들을 보고자 하시면 한국성서교회 (biblechurch.kr) 를 방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 책자에 대해서 문의하실 일이 있으신 분들은 이 메일 주소는 biblechurch77@gmail.com 입니다.
이곳에서 인용된 성경은 바이블 애플 KJV 흠정역이며
메시지 책자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도록
편집하였음을 미리 알립니다.
* 요한계시록1장9~20절
계시록1:9.나 요한은 또한 너희 형제요. 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으로 인해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노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하여 계시된 일련의 환상들은 요한이 밧모라 하는 섬에 유배되어 있을 동안 요한에게
온 것입니다. 이 조그마한 섬은 에게 해에 있는 소 아시아 해변에서 48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돌이 많고,
뱀, 도마뱀, 전갈들이 우글대는 상업적 가치가 그다지 없는 섬이어서 로마 제국이 흉악범 정치범 등등을
수감하는 유형지로 사용했던 섬이었습니다.
요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환난가운데 있는 형제라고 말하고 있는 걸 보십시오. 초대 교회가 심한 핍박을
겪고 있었던 때가 이 시기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딜 가든지 비난받는" 무리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한도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인하여
지금 옥에 갇혀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요한을 체포했을 때, 그들은 요한을 스물 네 시간 동안 기름에
넣고 끓여서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힘을 못 쓰게 되어 화가 난 관리들은 그를 마법사로 몰아세워
밧모 섬 행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한과 함께 하시사 그 섬을 떠나 에베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목숨을 보존하셨습니다. 에베소로 돌아온 요한은 그곳에서 목사로 일을 계속하다가 죽었습니다.
요한이 받은 환상들은 주후 95년에서 96년까지, 2년에 걸쳐 본 환상들입니다. 그것들은 말씀 가운데 있는 모든
환상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입니다. 계시록 전체는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비평과 논란의
대상이 되는 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으로 인봉되어 있어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계시될 수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책의 그 성스런 페이지를 읽거나 듣는 모든 이에게 엄청난 축복과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계시록1:10.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을 때에 내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는데
"나는 성령 안에 있었다." 그것은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정말로, 저는 그 말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그 말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우리는 그의 성령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요한은 자기 영 안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이 이런
환상들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만 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허사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영 안에서 기도하고
영 안에서 찬미하고 영 안에서 살리라." 제게 뭔가 좋은 게 온다면, 그것은 성령에 의해 계시되어져야 하고,
말씀으로 확증되어야 하고, 그 결과 말씀이 표명되어져야 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로부터 이런 엄청난 계시들을
직접 받으려면 성령 안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가 그의 말씀 속에서 붙들고 살도록
주신 계시들을 이해하려면 성령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동일한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이런 관점에서 살펴봅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2장38절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말씀을 읽고
그대로 지나쳐 버립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만약 그들이 성령 안에 들어가 있어 그것을 보았다면,
그들은 성령을 받고 싶으면,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하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채워주심으로써 그의 말씀을 성취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령 안으로 결코
들어가질 않습니다. 들어간다면 말씀이 말한 그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질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계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게 첫 단계입니다. 성령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제가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병고침이 필요 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님 말씀이 뭐라고
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그 말씀을 수도 없이 읽었지만 그것을 읽을 때 성령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그 말씀의 진짜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 보셨습니까? 만약 우리가 간구했다면,
우리는 장로들을 불러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기름부음을 받고 기도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병이 금세 낫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영 안에서는 모두 끝난 일입니다. 다른 데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선 그의 말씀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 우리는 성령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행동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성령 안으로 들어가시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기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지켜보십시오.
여러분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영들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는지 지켜본 적 있습니까?
그들은 구기 경기장이나 스포츠 행사나 댄스홀엘 갑니다. 그들은 그것의 영 안으로 곧장 들어갑니다.
그들은 벽에 그려진 꽃이나 말라비틀어진 막대기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환경의 분위기 속으로
쑥 들어가 그것들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나 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영 안으로 들어가는 걸
싫어합니다. 그들은 우릴 광신자나 미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증오와 부인(否認)을 나타내 내보이려고
온갖 저주와 막말과 별 짓을 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아시므로 그런 일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계속 예배의 영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우리의 영은 순수하고 정결한 영입니다. 우리의 영은 신선한 영입니다. 진짜이며 정신이 맑고 진지하면서도
주의 기쁨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그들의 쾌락을 맛보고 즐거워할 때 기운이 넘쳐흐르는
것처럼 주 안에서 즐거움으로 충만하여 활기에 차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세상은 다 인간입니다.
둘 다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점은 세상은 육신을 만족시키는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감정은
순수하게 영광의 주님과 그의 사랑에게로 쏠려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정말로 반론을 야기 시키는 구절이 있습니다. 꼭 반론이 일어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일어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닌 구절인데 사람들이 말씀이 정말로 말씀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반론이 생기는 겁니다.
먼저 우리는 주의 날을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들에게는 토요일이 안식일입니다.
또 주의 날을 한 주의 첫 날인 일요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성령에 감동하여 2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그 환상들을 받았는데, 어찌 주의 날이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하나나 둘 다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뭐냐면, 요한은 성령 안에서 들림을 받아 앞으로 올 주의 날 안으로 옮겨졌던 것입니다.
성경은 장차 있게 될 주의 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요한은 지금 그 미래의 날에 있게 될 일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하여, 정확하게 오늘날 안식(일)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안식(Sabbath)이란, 우리가 신약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특정한 날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라는 계명을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한 주의 첫 날인 일요일을 지키라는 계명도 받지 않았습니다.
여기 "안식"을 뜻하는 Sabbath의 진리가 있습니다. 히브리서4장8절, "만일 예수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았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도 쉬느니라." 마지막 절의 마지막 부분의 중요한 구절을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일을 쉬셨다." 하나님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를 멈추셨던
그의 일을 기념하려고 이스라엘에게 일곱 번째 날을 안식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쉬셨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 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안식일 안식을 주신 일은 맞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날을 다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의 반쪽은 어둠에 있고, 반쪽은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혀 이치에 맞아 들어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 문제는 육적인 생각을 하는 자에게서
나온 논쟁일 뿐입니다. 다 같이 성경이 이 안식일 안식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지 봅시다.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이 들어간다는 것은 들어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그 안에서 머무른다.
쉰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안식'이고 일곱째 날은 그것의 모형일 뿐입니다. `일곱'은 완결입니다.
`여덟'은 다시 `첫'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 중 첫 날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안식일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 중 어떤 특정한 날을 안식일(안식)로
주실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안식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리가 즐기고 있는 참된 실체의 그림자만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처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지금 실체를 가지고 있는데, 왜, 어리석게 다시 그림자로 돌아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 안식을 지속시키는 안식(Sabbath)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은 예수의 초청을 보면 됩니다.
그는 마태복음11장28~29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혼이 쉼을 얻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이란 어떤
날을 지키는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 쉼(Sabbath)을 얻는 겁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죄짐을 지고 수고하였든지
간에, 십 년 또는 삼십 년 또는 오십 년이든지 아니면 더 오래든지, 지치고 피곤한 삶을 가지고 오십시오,
그러면 그의 안식(진정한 안식일)을 찾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참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실 그 안식은 정확하게 무엇입니까? 이사야28장8~12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그러므로 생소한(더듬거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Sabbath)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그의 안식을 지키는 것)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안식이 여기에 이사야서 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오순절날인 700년
뒤에야 이루어졌고 예언된 그대로 오순절 날 사람들은 다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약속된 진정한 안식
(또는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세상적인 일과 행위와 악한 길을 그쳤습니다.
성령이 그들의 삶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찾는 안식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안식일입니다. 그것은 한 날이나 한 해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되고 성령 안에서 축복받는
영원입니다. 여러분은 이제는 손을 떼고, 여러분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뜻을 두시고 자기의 기쁘신 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장10절입니다.
10.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우리가 주중 첫 날인 일요일에 만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토요일주의자들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2세기 때 져스틴이 말한 내용이 있습니다, "일요일에는 도시와 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모인다. 사도들이 기록한 말씀 한군데를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읽어주고 낭독이 끝나면 설교자가
그 고귀한 일들을 본받으라는 훈계와 권고를 한다. 그 다음에는 모두 일어나 전체 기도를 한다.
그 기도가 끝나고 나면, 앞에서 기술했듯이, 빵과 포도주가 우리 앞에 놓여 있고 감사 기도를 드리면 회중은
"아멘"으로 답한다. 그 후 빵과 포도주는 각자에게 나누어져 참여시키고 집사들은 참석하지 않은 자들의 집에
그것들을 가지고 간다. 부유한 자들과 원하는 자들은 그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내고 이 모여진 헌금은
설교자가 맡아두었다가 고아와 과부들, 죄수들과 도움을 청하는 나그네들에게 나눠준다."
그래서 우리는 주 중 마지막 날에 모여 유대 전통을 고수하면서 초대 교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역사가
실제로 시사하는 것도 도무지 모르고 있으므로 믿을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압니다.
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 안식을 찾는다면 좋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 안식을 갈구하는
외침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답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날들을 지키거나 교파적인
신조와 독단적 교리를 받아들이는 종교적 과정으로 그 외침을 진정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데서 실패하면,
많은 사람들은 세속적인 쾌락으로 만족이 생길 수 있다 생각하여 술을 마시거나 흥청망청 대거나 온갖 육체적인
과용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 가운데는 쉼이 없습니다. 그들은 신경을 진정시키려고 담배를 피우고 약을
복용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는 어떠한 것도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하늘에서 온 치료약인 성령이 필요합니다.
[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육신이 자연적인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음식을 날마다 먹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살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사람은 하늘로부터 오는 음식을 먹지 못하면 살수가 없습니다.
교파교회의 교리들과 신조들과 전통들과 신학적인 가르침 등의 인간의 지식에 의해서 오염되어진 음식들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의 영적인 입맛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들의 거룩한 성령의 필터는 그것을 걸려냅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바로 직접 주어진 순수한 살아 있는 말씀만이 그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그 시대에 주신 말씀만이 그들의 갈급함을 만족시켜줍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찾는 안식입니다. ]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갑니다. 그건 좋은 일이지만 거기에서 조차도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다가가며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4:24절에 진정한 경배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조금밖에 몰라 성탄절엔 산타클로스를, 부활절 땐 토끼들을
올려놓는 교회에 무슨 경배를 배울 수 있을까요? 어디서 그들이 그런 산타클로스나 토끼들을 가지고 왔습니까?
그들은 이교도들에게서 그것을 가지고 와서 교회의 가르침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와서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런 모든 것들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혼속에 안식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살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경배하기 시작합니다.
자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이제 주의 날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 그것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자, 이런 식으로 말해야겠습니다. 오늘날은 분명히 주의 날이 아닙니다. 지금은 인간의
날입니다. 인간의 행위, 인간의 일, 인간의 교회, 경배에 대한 인간적인 생각, 모든게 인간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인간의 세계(cosmos, 세계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의 날이 오고 있습니다. 네, 정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때에, 요한은 성령에게 들려올려져 성령에 의하여 장차 올 그 위대한 날로 옮겨졌던
겁니다. 주의 날은 인간의 날이 끝나는 때입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은 그때 우리 하나님의 왕국들이 될 겁니다.
주의 날은 심판이 내리는 때이고 그 후에는 천년 왕국이 옵니다. 지금은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그리스도인에게
행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온갖 이름으로 부르며 조롱합니다. 그러나 어린 양이 세상을 심판하러 진노한
가운데 오시기 때문에 그들이 울며, 불며 할 위대하고 주목받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때는 의로운 자들이
주와 함께 자신들의 왕국을 갖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불에 타고 의인들은 그들의 재를 밟고 천년 왕국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라기4장3절에,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나팔 소리 같은 음성.
계시록1:10.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을 때에 내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는데
요한은 성령에 감동하여 성령 안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주 예수의 위대하고 놀라운 날과 그의 거룩한 권능을
다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지금 보여주려고 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줄 순간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음성이 나팔이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팔소리 같았습니다. 나팔이 불면, 그것은 긴급함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그것은 왕의 사자가 온다는, 메신저와 같습니다. 그는 나팔을 붑니다. 그것은 긴급한 호출입니다.
사람들은 들으려고 모입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나팔 소리를 듣고 모였습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들으라." 그래서 이 음성은 나팔과 같이 급하게 호소했습니다. 분명하게 강력하며 경각심을 주는 일깨워
흔드는 소리였습니다. 오, 오늘날 어두운 이 시대에 나팔 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나팔'이 우리로 앞으로 이 땅에 찾아올 것에 대하여 인식하고 준비하게 할 `예언의 말씀'을
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적으라는 명령.
계시록1:11.이르시기를,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라. 하시더라.
바로 이겁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알파요 오메가, 그는 모든 것이 되는 분입니다.
한 분이며 진정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음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실재와 진리가 가까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것일까요. 정말, 하나님 존전에 있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 에덴동산에서 그리고 시내산 위에서 그의 말씀을 소리 낸
그 음성은, 변화산의 지극한 영광 가운데서도 들렸던 그 음성은, 다시 한 번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지막 완전한 계시를 일곱 교회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요한아, 환상들을 적어라. 장차 올 시대들에 대한 환상들을 기록하라. 그것들은 꼭 이루어질 진짜 예언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적고 보내어 알려라." 요한은 그 음성을 알아보았습니다.
오, 그가 부를 때 여러분도 그 음성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께 속한 분들이라면 말입니다.
* 일곱 금 등대.
계시록1:12.내가 돌아서서 나와 말씀하신 그 음성을 알아보려 하니라. 돌아설 때에 내가 일곱 금 등잔대를
보았는데. 요한은 그가 들은 음성의 주인을 보려고 몸을 돌렸다라고 말한 게 아니라 음성을 보려고
몸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오, 저는 그게 맘에 듭니다. 그는 그 음성을 보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그 음성과 그 사람은 하나이고 동일합니다. 예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장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약 여러분이 정말로 말씀을 보게 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요한은 몸을 돌렸을 때 일곱 금 등잔대를 보았습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등을 놓는 등대입니다. 20절을 보시면,
그것들은 “일곱 교회”입니다. "네가 본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 교회를 나타내려면 그것들은 초일 수가
없습니다. 초는 잠시 타다가 꺼져 버립니다. 그것은 죽습니다. 자취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등대는 초에서는 볼 수 없는 지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등에 대한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싶으시면 스가랴4장1~6절을 읽어보십시오. “1.나와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웠는데 나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노라. 2.그가 내게 이르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매 내가
이르되, 내가 보니, 보소서, 전부 금으로 된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잔이 하나 있고 그것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일곱 등대와 연결된 일곱 관이 그것의 꼭대기에 있나이다. 3.또 그것의 옆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잔의 오른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왼쪽에 있나이다. 하니라. 4.나와 말하던 천사에게 내가
이같이 대답하고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은 무엇이니이까? 하니 5.그때에 나와 말하던 천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것들이 무엇인지 네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6.그때에 그가 내게 응답하며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내 영(성령)으로 되느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여기 또 순금으로 된 등대가 나옵니다. 그것은 양 옆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을 충분히 얻기 때문에
밝게 타고 있습니다. 두 나무는 구약과 신약을 나타내고 물론 기름은 성령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줄 수 있는 건 성령뿐입니다. 스가랴에게 말한 천사는, "네가 보는 이것은 교회는 자기의 힘이나 능력으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며,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하려 했던거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이 등대를 조사해 봅시다. 그것은 커다란 주발 또는 저장통을 가지고 있고 그 통은 거기서 나가는 일곱
팔의 중앙에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이 주발은 감람유로 가득 차 있는데 여기서부터 일곱 팔 속에 놓여 있는
일곱 심지로 흐릅니다. 그 일곱 관의 끝에서 불타고 빛을 내는 것은 똑같은 기름입니다. 이 빛은 결코 꺼지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그 주발에다 계속 기름을 부었기 때문입니다. 그 등은 특별한 방식으로 켜졌습니다.
먼저, 제사장은 맨 처음에 하나님의 불에 의하여 켜진 거룩한 제단에서 불을 가지고 옵니다.
제사장은 맨 먼저 주발의 꼭대기에 있는 등에 불을 붙입니다. 그 다음에는 첫 번째 등의 불꽃을 두 번째 등에
붙입니다. 세 번째 등은 두 번째 등에서 불을 이어받고 네 번째는 세 번째로부터 그렇게 쭉 해서 일곱 등이
다 불이 붙게 됩니다. 등에서 등으로 옮겨지는 제단에서 가져온 이 거룩한 불은 일곱 교회 시대의 성령에 대한
멋진 모형입니다. 오순절 날의 최초의 성령의 퍼부음은(속죄소에 있는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모든 일곱
시대를 통하여 그의 교회에 부여하고 있고 완벽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그의 본질과 행하시는 방법에 있어서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5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 포도나무인데,
그것은 속에 생명을 가진 원(原) 씨에서 나온 원 뿌리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고,
열매를 맺는 건 가지들입니다. 자 이걸 보십시오. 오렌지 나무 같이 생긴 밀감나무를 가지고 거기에다 자몽가지,
레몬 가지, 탄젤로 가지, 다른 여러 종류의 가지를 접붙이면 그 가지들은 전부 다 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접붙여진 가지들은 오렌지를 맺지 않을 것입니다. 레몬 가지는 레몬을 맺고 자몽가지는 자몽을 맺고
각 가지마다 자기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들은 모두 다 밀감 나무 안에 있는 생명을 취해 잘 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밀감 나무가 가지를 하나 내면 그 가지는 오렌지 가지일 것이고 오렌지를 맺을 것입니다.
왜죠? 접붙여진 가지들과는 달리 그 새로 난 가지 속에 있는 생명과 나무 몸통에 있는 생명은 똑같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접붙여진 가지들은 다른 나무, 다른 뿌리, 다른 씨에서 다른 종류의 생명을 뽑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 그것들은 열매를 제대로 맺을 것이지만 오렌지는 맺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 오렌지가 아니므로 오렌지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나무는 쪼개어져 잔가지들이 접붙여졌습니다. 침례교 가지들, 감리교 가지들, 장로교
가지들, 오순절 가지들을 접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잔 가지들은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교, 장로교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교파의 열매를 만들어내는 교파의 씨들입니다). 하지만 그 포도나무 자체에서 싹이 나와서 가지를
하나 내면, 그 가지는 틀림없이 그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순절날 나왔었던 가지와 똑같은
가지일 겁니다. 그것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하며 그 안에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표적을 가질 겁니다.
왜죠? 그 가지는 포도나무 자체에서 자연스런 생명을 취해 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죠?
그 가지는 그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에서 태어난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가지들이 접붙여지면, 그것들은 그 포도나무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자신들의
열매를 맺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원 생명과 원 열매를 모릅니다. 포도나무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가지들이 거기서 태어났다면, 원줄기(예수)에 있던 그 동일한 생명이 그 가지들을
통해 와서 그 가지들을 통해 표명했을 겁니다. 요한복음14:12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희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사람들의 인도를 받는 교파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는 것은 인간들의 가르침과 신조들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곱 개의 등이 가운데 있는 주발 속에 심지를 푹 박고 있기 때문에 그 주발에서 생명과 빛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전율이 느껴집니다. 각 교회 시대의 사자는 여기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의 생명은
성령과 함께 불타고 있습니다. 그의 심지는 그리스도 안에 깊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 심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끌어당기고 있으며, 그것으로 교회에게 빛을 내주고 있습니다. 어떤 빛을 주고 있습니까? 타고 있던
첫 등에 있던 바로 그 동일한 빛입니다. 그리고 쭉 시대를 내려오면서 마지막 시대의 사자의 현재 시점까지도
그 동일한 생명과 그 동일한 빛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춰져 있는 생명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일곱 사자들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진실된 신자들도 여기서 멋있게 묘사됩니다.
그들은 동일한 원천에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 동일한 주발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하여는 죽고,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춰집니다. 그들은 성령에 의하여 인쳐져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에베소서4장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느니라." 아무도 그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생명은 누구도 앗아가지 못합니다.
밖에 보이는 생명은 타오르고 빛을 내고 있고, 성령의 빛과 표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고, 주님의 말씀을 먹고 있습니다. 사탄은 그들을 손댈 수 없습니다.
사망도 그들을 손댈 수 없습니다. 사망은 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무덤이 승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런 승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멘. 아멘.
* 더 이상 제사장이 아니심.
계시록1:13.그 일곱 등잔대의 한가운데에 인자 같은 이가 발까지 내려온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거기에 인자 같은 이가 서 있습니다. 반지가 위로 튀어나올 때 보석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듯이, 그는 교회들
가운데에서 영광을 한층 더 받게 됩니다. 그때는 주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그분이 제사장이 아니라
장차 올 심판자로 서 있는 걸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띠는 이제 허리에 둘려 있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수종들 때는 그 띠를 허리에 차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띠는 이제는 그의
어깨 부근에 있습니다. 이제는 제사장이 아니고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한복음5:22절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는 수종드는 일을 마치셨습니다.
제사장 임기는 끝났습니다. 예언의 날들이 마감되었습니다. 그는 심판자로서 가슴에 띠를 띠고 서 계십니다.
* 예수님의 일곱 겹의 영광.
계시록1:14.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희고 눈같이 희며 그분의 두 눈은 불꽃같고
15.그분의 두 발은 용광로에서 달군 듯한 정제된 놋 같으며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16.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별이 있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달린 날카로운 검이 나오고 그분의 용모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더라.
말씀을 인하여 유형지에 있던 요한에게,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었을까요, 보십시오,
그 살아계신 말씀이 이제 요한 앞에 서 계십니다. 묘사되고 있는 속성이 다 중요성을 띠고 있는 걸 보면,
그 환상은 굉장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영광스런 존재에 대한 계시는 정말 놀랍습니다.
1. 눈(양털)처럼 흰 머리털.
요한은 예수님의 머리털을 주목하고 그 머리털은 희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눈처럼 희고 반짝였습니다.
이건 나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반짝이는 흰 머리털은 나이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체험과
성숙과 지혜를 의미합니다. 영원하신 이는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재판하게 지혜를 달라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그는 온 땅의 심판자로 오고 계십니다.
그는 지혜의 면류관을 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희고 빛나는 머리털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것을 또 다니엘7:9~14절에서 보십시오, "9.그 보좌들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내가 보매 옛적부터 계신 이가
앉아 계시는데 그분의 옷은 눈같이 희고 그분의 머리털은 순결한 양털 같으며 그분의 보좌는 맹렬한 불꽃같고
그분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같더라. 10.불 같은 시내가 그분 앞에서 흘러나오고 천천이 그분을 섬기며 만만이
그분 앞에 서 있더라. 그분께서 심판을 베푸시는데 책들이 펴져 있더라. 11.그때에 내가 그 뿔이 내는 엄청난
말들의 소리로 인하여 보았으니 곧 그 짐승이 죽음을 당하고 그의 몸이 파멸을 당하여 타오르는 불꽃에 넘겨질
때에 내가 바라보니라. 12.그 나머지 짐승들로 말하건대 그들이 자기들의 통치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들의 생명은
한 시기와 때 동안 연장되었더라. 13.내가 밤의 환상들 속에서 보는데, 보라, 인자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들과
함께 와서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가니 그들이 그를 그분 앞에 가까이 데려가니라. 14.그분께서 그에게
통치와 영광과 왕국을 주시니 이것은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 그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그의 통치는
영존하는 통치요, 없어지지 아니할 통치며 그의 왕국은 멸망하지 아니할 왕국이라.
그렇죠. 다니엘은 양털 같은 흰 머리를 가지신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책들을 펴 심판하시는 심판자였습니다.
다니엘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보았던 것과 똑같습니다. 둘은 다 그분을 똑같은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판의 띠를 가슴부근에 두른 심판자를 보았습니다. 깨끗하고 거룩하며, 지혜가
충만하시고 온 세상을 의로 심판하시기에 적격이신 그 심판자를 본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심지어 세상도 이 상징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심판자는 흰 가발을 쓰고 긴 두루마기 옷을 입고 나와
법관들을 소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머리부터 발끝에 이르는) 긴 두루마기 옷은 공정하게 재판하는 그의
완전한 권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불꽃 같은 눈.
그 눈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때는 슬픔과 연민의 눈물로 가려졌던 눈을. 나사로의 무덤에서 불쌍히 여기시어
우셨던 그 눈을.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살인자들의 악을 보시고 슬퍼하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고 외쳤던 그 눈을. 이제 그 눈은 타오르는 불꽃이며, 그를 거절한 자들을 보복하실 심판자의 눈입니다.
그가 인자로 나타나셨을 때 인간의 감정 중 가장 많이 나타내셨던 감정은, 그는 자주 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과 그 슬픔 뒤에는 여전히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또 그 눈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두 눈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시고 그들의 생각을 읽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아셨습니다. 우수에 찬 인간의
그 눈에는, 그의 본 모습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외치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한복음8장24절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요한복음10장37절, 38절에. 옛날 예레미야처럼,
예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시를 밀쳐 버렸기 때문에 항상 우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이제, 심판자의 그 불같이 타오르는 두 눈은 지금도 모든 육체의 삶을 기록하고 계십니다. 온 땅을 이리 저리
다니면서, 그가 모르는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는 우리 마음의 소원과 각자가 하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모든 일이 그분 앞에서는 벗겨지므로, 우리는 그분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차 드러나지 않고
감춰질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아신다는 사실을. 네, 그는 공정하게 심판하실, 불꽃같은 눈을 가진 심판자로서 서 계십니다.
자비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동안에, 사람들이 회개하고 의로움 가운데서 그의 얼굴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세상이 불 가운데 녹기 전에 그분의 가슴을 베개로 삼아 안식했으면 좋겠습니다.
3. 놋쇠 같은 발.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놋쇠 같고." 놋은 놀랄 만큼 단단함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놋만큼 담금질하기
좋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을 말하는 이 놋쇠는 불타는 풀무의 시험을,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한 시험을
이기고 서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사실입니다. 놋은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이
정하시고 이루신 심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3장14~19절에,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
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15.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6.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 19.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민수기21장8~9절에, "8.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를 위해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시니라. 9.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은 죄를 지었습니다. 죄는 심판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모세더러
장대 위에 놋 뱀을 달으라고 명하셨고, 쳐다보는 모든 자는 자기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으로 만든 뱀은 에덴동산 때부터의 죄를 상징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이브를 꾀어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놋은 심판을 뜻합니다, 죄의 벌이 놋으로 만든 제단 위에 놓인 제물로 연결되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이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셔서 비가
내리지 않게 하고 불같은 하늘은 놋처럼 변했습니다. 이제 이 설명을 통해 우리는 장대 위의 뱀은 이미 심판을
받은 죄를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죄 위에 내렸음을 보여주는 놋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그것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장대 위에 있는 뱀을 쳐다본 자는 다 몸이 온전해졌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역사 또는 주님의 구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대 위에 있던 뱀은 예수께서 성취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던 것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는 자기 몸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하시려고 육신이 되셨습니다. 제단의 기초는 단단한 놋이었는데, 그것은 창세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모형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직 죄인들이 없었을 때에 심판이 이미 그분 위에 내려졌었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는 혼자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았습니다.
그의 옷은 자기 자신의 피로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진노의 불같은 용광로가 그의 분깃
이었습니다. 그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오 하나님의 어린 양이여, 당신이
우리를 당신의 피로 구속하셨으니 당신이 합당하신 분이시나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께서 우리들 모두의 죄악을 그분 위에 놓으셨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도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혈관에서 피가 분리되기 전에 혹독한 시련에 대한 극심한
번민 가운데 계셨으므로 그는 몸에서 피 방울과 같은 커다란 땀방울을 흘리셨습니다. 누가복음22장44절에서,
"예수께서 번민가운데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하지만 앞으로 어느 날엔가는 놋으로 된 그 두발이 이 땅을 딛고 설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온 땅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고 공평과 완전무결로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 판결을 번복하는 일도 없습니다. 적당히 넘어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불의한 자는 여전히 불의할 것이고
더러운 자는 여전히 더러울 것입니다. 불변하시는 이는 그때도 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는 변하지 않았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놋으로 된 두 발은 대적을 짓밟을 것입니다. 그 놋 같은 두발은
적그리스도와 짐승과 우상과 자기 눈에 더럽게 보이는 것은 다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는 그의 이름을 취해
그 이름의 광채를 더럽히기만 한 교회 체제들을 멸망시키고 적그리스도와 함께 그것들을 짓밟으실 것입니다.
모든 악인들과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과 현대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다 거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사망과 지옥과 무덤이 거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오실 때, 책들이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미지근한 교회와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나타날 때입니다. 그는 염소와 양들을
분리할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그는 왕국을 양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그의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에게 수종드는 그의 신부들이 수천천 수만만 명이 올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오, 지금 회개하십시오! 해야지 생각만 하지 마시고, 지금 안하면 평생 못합니다. 이미 때가 지나가기 전에
회개하십시오. 잠자는 자들 가운데서 깨어나 그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영원한 생명을 놓칠 것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 지금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4.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
자 물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계시록17장15절에서 말하는 걸 들어 보십시오, "또 그가 내게 이르되, 네가 본 물들
곧 음녀가 앉아 있는 물들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니라." 그의 음성은 무리가 말하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심판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이 음성들은 무수한 증인들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증인들은 일곱 교회 시대를 걸쳐 내려오면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음성은 경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죄인에 대하여 각 사람이 일어나 심판하는 음성일 것입니다.
일곱 사자들의 음성이 더욱 크고 명확하게 들릴 것입니다. 예수의 구원의 능력을 설교했던 충실한 설교자들,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물 침례를 설교했던, 성령을 채워주심과 능력을 전하고, 자기 목숨보다 말씀을 더 소중히
여겼던 그 충실한 설교자들은 다 시대를 걸쳐 내려오면서 성령으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습니다.
요한복음17장20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거대한 폭포를 향해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사람에게 그 많은 물소리가
얼마나 겁에 질리게 하는 소리일지 생각해 본적 있습니까? 그가 기정사실이 된 다가오는 최후로 다가갈 때
들을 그 노호 소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와 꼭 같이 심판의 날이 옵니다. 그때에는 수많은 음성의 포효가,
때가 늦기 전에 유의하지 않음에 대해 여러분을 꾸짖게 됩니다. 지금 바로 이 시간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생각들은 하늘에서 녹음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여러분들의 생각들이 여러분의 말보다 더 크게 말합니다. 입으로는 너무도 많이 선전하였지만
주님의 말을 듣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처럼, 그의 마음은 때가 늦어버릴 때까지 더럽고 악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을 가지라고 부르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많은 심판하는 음성들의 노호와 최후의 순간에 다가갈 때에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그런데 잔잔한 물소리는 부드럽게 마음을 쉬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저는 낚시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물이 잔잔하게 속삭이는 곳에 낚시대를 드리웁니다. 거기에 누워 있으면 마치 물소리가 제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분리의 물인 말씀이 선언하듯이, 주님의 음성이 평안을
말하는 곳, 안식의 항구에 마음의 닻을 내리고 있는 게 저는 너무도 기쁩니다. 그분의 사랑과 관심과 인도와
보호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얼마나 감사히 여겨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느 날엔가 우리는 그 동일한
부드러운 음성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심판의 포호소리가 아니라,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성령
충만된 삶을 살고, 말씀 안에서 행한 우리를 환영하는 물소리와 같은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수많은 무리의 환영하는 음성을 듣고 영생에 이르도록 믿어온 그 무리들에게 둘러싸이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 그와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하게 굳히지 말고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어 그분을 여러분의 왕으로 모셔 들이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 여러분이 이해하실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멸망시켰던 것은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를 구원했던 그리고 노아를 위해 온 세상을 구원하기도 했던 것은 그 동일한 물이었습니다.
그의 음성, 그의 종들의 음성이 회개와 생명을 외칠 때, 그 음성을 귀 담아 들으십시오.
5.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더라.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물론 우리는 20절을 통하여 이미 그 일곱 별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일곱 별의 비밀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사자들)이라."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어떤 이유로든지 실수를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해석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곱 별은 연이어 있는 일곱 교회
시대에 보냄을 받은 사자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에베소시대부터 이 라오디게아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자들은 각기 사람들에게 진리의 메시지를 가져왔고, 그 특정한 교회시대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수하는데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그것을 고수했습니다. 그들은 최초의 빛에 충실하고
확고히 섰습니다. 각 시대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의 충실한 사자는 그 시대를 다시 말씀에로 돌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았습니다. 안 그랬으면 그들은 결코 시대의 조류를 막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안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어떤 것도 그들을 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질병이든 위험이든 헐벗음이든, 기근이든, 칼이든,
죽음이든, 사망이어도 말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그의 전능하심으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들 앞에 닥치는 핍박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아픔과 멸시는 그들이 그를 위해서 고통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졌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구원에 감사드리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빛으로 불탔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온유와 절제와 자비와 충실함을 반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표적들과 이적들과 기사들로 그들을 지지하셨습니다. 그들은 광신자라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조직들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조롱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붙들었습니다.
지금은 교회들의 신조편에 서서 신조를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끝은 사망이며,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넓은 길인데, 마귀가 그 모든 것들의 배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히 행하고 오순절날 이후 하나님의 말씀이 본래 산출해냈던 것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얘기가 다릅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지만 생명의 길이며, 계시의 길이요. 성령께서 확증해 주시는 길입니다.
얼마 전 한 남자분이 제게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오랜 세월동안 믿어오던 것에 진실되고 계속 성장하여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된 교회임에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떤 교회라도 정부가
배후에 있고,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신조를 가지고, 마귀가 놀라 깨어나게 할 표명된 사역을
가지지 않는데도 정말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판단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톱에 잘리고, 사자 밥이
되고, 핍박을 받고 여기저기 정처 없이 쫓겨 다녔어도 말씀에 진실히 행했던 동료들을 가진 그 조그만 무리를
생각해 보면--그건 정말로 하나님이셨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어떻게 승리했으며, 여전히
전진하였는지, 그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위안은 오로지 일곱 교회 시대 사자들을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진실된 신자는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그의 사랑과 권능을 끌어낼 수 있고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모든 혜택을 다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자에게 주시는 것과 어떻게 축복하시고 그 사자를 사용하시는 가는 모든 믿는
자에게, 그의 몸의 모든 지체들에게 보여주실 그의 선하심과 관심의 한 예입니다. 아멘.
6. 좌우에 날선 검.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히브리서4장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좌우에 날선 검이 나갔는데 그 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계시록19장11~16절에서.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타신 분은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불리더라. 그분은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느니라. 12.그분의 눈은 불꽃같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었으며 또 그분께 기록된 한 이름이 있었으나 그분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
13.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느니라. 14.하늘에 있던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따르더라. 15.그분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는데
그분께서 그 검으로 민족들을 치시고 또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리라. 또 그분께서는 전능자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시며 16.그분께는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 왕들의 왕, 주들의 주라고 기록된
한 이름이 있느니라.“
요한복음1장48절에서, "나다나엘이 그분께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 그렇습니다.
그가 오실 때, 그 말씀은 만국과 만인을 대적하러 오실 것입니다. 아무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가 나다나엘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말씀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있던 것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했고 누가 행하지 않았는지 보일 것입니다. 또한 말씀은 각 사람이 비밀리 행한 일들과
그 이유를 알릴 것입니다. 말씀은 분리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2장3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심판하실 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절로 17절까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은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행위는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동기가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 말씀으로 판단을 받을
것이며 아무도 그걸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듣고도 귀담아 듣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들은 내용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말씀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 말씀을 행치 않고 산 사람들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비밀들이 환히 드러나고 지붕 꼭대기에서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오, 우리는 그때서야 역사를 진실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때는 전 시대를 통해 비밀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남자들과 여자들의 마음 속 비밀들을 드러내고 계심을 아십니까?
말씀, 그분 자신을 제외하고 다른 어느 누가 마음 속 비밀들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4장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이 그런 일을 합니다. 말씀은 능력이 많으시므로
보냄을 받은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렇게 행하십니다. 사람들을 심판에 이르지 않게 이끌어내려고 애쓰는 마지막
징표로서 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에 다시 계시는 것은 예수님(말씀)안에 계셨던 동일한 영입니다.
(말씀인)그를 거절한 사람들은, 그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6장6절에서,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자 바울은 말씀은 음성과 더불어 능력으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전파된 말씀은 사실 자신을 스스로 내보입니다.
번뜩이는 절단하는 검처럼 말씀은 사람들의 양심에로 가고, 시술하는 의사의 메스처럼 말씀은 질병을 도려내
갇힌 자들을 자유케 했습니다. 그 초대 신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복음(말씀)을 전파하며 다녔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에 연이은 이적들로 그 말씀을 확증하셨습니다." 병자들이 나음을 입었고, 마귀가 쫓겨나가고, 그들은
새로운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것은 활동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믿는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결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시대에 있어서 말씀은 진실한 말씀인 신부들 안에서 이전보다 더 여기서
강하고 위대합니다. 오, 적은 양 무리여, 소수로 모인 여러분, 말씀을 꼭 붙드십시오, 여러분의 입과 마음에
말씀을 채우십시오, 그러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왕국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7. 해 같은 얼굴.
"그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마태복음17:1.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그분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분의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더라.
3.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분과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그때에 베드로가 응답하여 예수께
이르기를,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온즉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게 하옵소서. 하더라.
5.그가 아직 말할 때에,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보라, 그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므로
6.제자들이 그 음성을 듣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더라.
7.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매
8.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인자가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날 때까지는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 10.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하나이까? 하매
11.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참으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
12.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그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다 그에게 행하였도다. 인자도 그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당하리라. 하시매
13.그제야 제자들이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침례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그런데 마태복음17:1~13절 말씀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6장28절에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28.“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인자가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그 세 사도들이 바로 그것—그의 두 번째 재림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산 꼭대기 위에서 변형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절정에 이른 해처럼 빛났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희게 빛났습니다. 그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도 그분의 양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의 모습입니다. 진실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자녀들(신부들)의 마음을 아비들인
초대 사도들에게 계시되었던 원래의 순수한 말씀의 계시로 다시 회복(Recovery)시키실 것입니다.
말라기4장5~6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지금 이스라엘은 이미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군대와 해군과 우편 제도와 국기와 국가 성립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66:8절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그 예언이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그날은 머지않아서 올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이미 싹을 내어, 가지가 나오고
잎사귀가 나오고 꽃을 피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취되지 않은 여호와의 일곱 절기 중 나팔절과 속죄일이 곧
그들에게 성취될 것이며 그때 이스라엘은 메시야의 왕국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며 십사만 사천 명의 열매가
무화과나무에서 열릴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들이 고대하는 것은 이루어질 찰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신부들처럼 성령에 의해서 거듭날 것입니다,
영적으로, 그 나라의 빛과 생명 되시는 이가 얼마 안 있어 이스라엘 나라에게 계시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21장23절에, "그 성은 해와 달이 안에서 빛을 비출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성)를
밝혀주었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성)의 광체이시기 때문이라." 천년왕국 후에 살게 될 새 예루살렘성입니다.
어린양이 그 성 안에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계심으로 빛이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그가 곧 그곳의
해요, 빛이 되시므로 더 이상 태양이 떠서 빛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오는 만국은 다 그분의 빛
가운데서 걸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날이 오는 게 좋지 않습니까? 요한은 그 날이 오는 걸 보았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말라기4장1~3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는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나왔죠. 가진 힘을 다해 빛을 내는 해입니다.
오, 하나님의 아들의 힘이 일곱 금 등잔대 가운데서 빛을 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가 심판자로서 서 계시는데,
그는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를 직접
담당하셨습니다. 그는 홀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셨습니다. 우리가 앞서 말했듯, 죄인에게는
그의 음성은 폭포 소리나 바위가 많은 해변에 출렁이는 죽음의 파도 소리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그분의
음성은 누워서 쉬고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해하고 있을 때, 듣는 달콤한 노래를 부르는 시냇물 소리와
같습니다. 우리 위에 그의 따뜻한 사랑의 광선을 비추시며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전에도 있었고 이제도 있고 장차올 자요 전능한 자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노라.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그 모든 것 되느니라." 그는 골짜기의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입니다. 그는 내 영혼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 위대한 날이 동트려하고 있고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입니다.
* 승리하신 그리스도.
계시록1장17~18절에,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니 그분께서 오른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내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나는 살아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
어떤 사람도 그 환상의 영향을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요한은, 탈진하여, 죽은 것처럼 그의 발 앞에 엎드려졌
습니다. 그러나 주의 손이 다정하게 그를 만졌고, 부드러운 음성은,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나는 산 자요 죽었었노라. 보라 내가 세세토록 살리라."고 말했습니다.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무덤에서, 그리고 그가 내려가셨을 때, 그에게 임했던 심판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죄의
상처를 한 몸에 다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제 아무 정죄함이 없습니다.
확실히 얘기해서, 우리의 "변호사"는 우리의 "판사"입니다. 그는 "변호사"인 동시에 "판사"이십니다. 판사로서
"그 소송은 판결이 났습니다."--끝이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교회가 어째서 두려워
해야 하겠습니까? 그가 우리 앞에서 어떤 약속을 이루어 표명하는데 실패하셨습니까? 왜 교회가 형벌이나
사망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그런 것은 다 정복당했습니다. 여기에 강한 정복자가 계십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 정복하신 분이 여기 계십니다. 그는 서른셋의 나이에 세계를 정복하고 더 이상 정복할
곳을 찾지 못했던 알렉산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알렉산더는 죄와 분방한 생활의 희생자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럽 전체를 정복했지만 마침내 워털루에서 패하고 엘바로 추방당하고 급기야는 자신이 정복당한
자임을 깨달았던 나폴레옹 같은 자도 아닙니다. 아무도 그리스도를 정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땅 끝까지 내려온
그분은 이제 만물 위로 올려 지셨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모든 이름보다 나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사망과 음부와 무덤을 정복하셨고 그것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열면 열리고, 묶으면 묶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를 정복할 다른 정복자는 없으며 그 분 밖에는 다른 정복자가 없습니다.
그가 홀로 구세주이시며, 구속자이십니다. 그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입니다.
"요한아 두려워 말라. 적은 양무리여, 두려워 말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너희는 유업을 이을 자니라. 나의 모든
권능은 너희 것이라. 나의 전능함은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 너희의 것이라. 나는 두려움과 실패를 가지고
온 게 아니라 사랑과 용기와 능력을 가지고 왔도다.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고 그것은 네가 사용할 것이다.
네가 말씀을 말하라. 그러면 내가 그것을 행하리라. 그게 나의 언약이고 그것은 결코 폐하지 않으리라." 아멘.
* 일곱 별과 일곱 등잔대.
계시록1:20.곧 네가 본, 내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등잔대의 신비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사자들=메신저) 네가 본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
우리는 이미 이 두 신비의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곱 명의 사자가 누구인지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나타낼 것이고
그 비밀은 참 교회(신부)에게는 지금 계시될 것입니다. 일곱 교회 시대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여기서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마지막 시대에 올라오기까지 각 시대를 다룰 것입니다.
저는 이 장(章)을 끝내기 전에, 오른 손에 일곱별을 들고 일곱 등대 사이에 서 계시는 그분을 잠시 보십시오.
오, 최고의 신성의 모습으로 거기에 서 계신 그를 바라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는 심판자요. 제사장이시오.
왕이시오. 독수리이시며 어린양이고 사자이며 알파요 오메가며 시작이요 끝이며 아버지시고 아들이시고 성령이며
이전에도 계셨던 분이고, 지금도 계신 분이며, 앞으로 오실 분이시고, 전능하신이시며, 모든 것 되시는 분입니다.
시작하신 자요, 끝내시는 분입니다. 그 어린 양이 합당하십니다! 그는 혼자서 우리의 구원을 사심으로 자신이
합당함을 증명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심판자로서 모든 것을 심판하시며, 모든 권세와 영광가운데 서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서 그는 손에 일곱별을 쥐고 등대들 사이에 서 계십니다. 지금은 밤입니다. 밤에 빛을 내려고
등을 사용하고 별들이 태양빛을 받아 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둡습니다. 교회는 어둠 속에서
믿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님은 이 땅을 떠났지만 성령은 여전히 교회를 통해, 이 낡은 죄로 저주받은
세상에 빛을 내며,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곱 별들도 그분의 빛을 반사합니다. 그들이 가진 빛은 바로
그분의 빛입니다. 지금은 얼마나 어둡고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입니까? 그러나 그가 중심에 오시면 주위는
빛을 내고 그의 열기로 따뜻해지며 교회는 권능을 입고 그분을 통해서 그가 행했던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요한처럼 우리도 그분을 조금만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날 그분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여러분이 아직 여러분의 삶을 그분께 드리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돌리고 지금 계신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십사 간구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그분께 바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 함께 일곱 교회시대에 접근해 보도록 하겠는데 저는 하나님께서
이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종이 그분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나타내는 일에 도와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일곱 교회 시대와 일곱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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