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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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5 22:53
물빛 36집
이오타
조회 수 264 댓글 0
이 작품, 이렇게 썼다.
이 진 흥
꿈속의 잠깐 5
-데미안
들판을 걷는데 뒤쪽에서 커다란 시조새가 너울너울 날아온다. 약간 무섭다. 옆의 친구가 반갑게 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나도 용기를 내어 왼손을 내민다. 새는 빙그르 돌아서더니 큰 부리로 내 손을 문다. 아프지가 않다. 조금 겁이 나지만 나도 새를 쓰다듬어 주려고 오른 손을 내민다. 새는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내 손을 잡는다. 감촉이 따뜻하고 좋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맑고 기품 있는 백인 여자, 에바 부인이다. 그녀는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내 손을 놓고 옆의 친구와 함께 돌아선다. 웬일인지 나는 꼼짝 못하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목이 멘다.
(대구문학/2018/5-6월호)
수 년 전 나는 매일 꿈 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일기는 저녁 잠자기 전에 하루 동안 겪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꿈 일기는 잠이 깨는 아침에 지난 밤 잠 속에서 만난 것들(꿈)을 기록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전자는 의식세계에서 일어난 객관적 사실의 기록이고, 후자는 무의식 세계에서 만나는 주관적 진실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가지를 마치 “일어난 일의 기록”을 역사, “일어날 수 있는 일의 기록”을 문학이라고 구분한 아리스토텔레스를 흉내 내어, 일기는 역사이고 꿈 일기는 문학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 동안 열심히 꿈 일기를 썼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꿈의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꿈 일기가 그 자체로 시(문학 작품)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냥 꿈을 그대로 그려낸 것, 즉 모방(미메시스)이 시(포이에시스)가 되려면 거기에는 만드는 기술(art)이 더해져야하기 때문에 꿈 일기도 그것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원석(原石) 그대로가 아니라 약간의 제련과정(作詩)이 필요하고, 그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꿈은 우리들의 무의식을 드러내 보여주는데, 무의식세계는 의식세계보다 훨씬 더 크고 깊다고(예컨대 빙하의 수면 윗부분이 의식이라면 수면 아래 잠긴 부분이 무의식) 합니다. 의식은 이성의 통제를 받아 논리적인 질서를 보이지만, 무의식은 아무런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은 그야말로 원석(原石)이어서 원형적(archetypal)인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 무의식을 드러내는 꿈 중에서도 아주 크고 깊은 원형적인 꿈의 표현을 나는 신화나 종교 혹은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성경의 창세기나 그리스 신화는 물론이고, 단테나 괴테 혹은 피카소나 샤갈의 작품까지도 그러한 무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지요. 말하자면 무의식의 언어(미토스/신화언어)를 의식의 언어(로고스)로 번역해 낸다면 그것이 예술작품(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꿈의 표현인 신화이고, 시인은 신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나는 시조새가 등장하는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그것을 기록했던 꿈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예사롭지가 않은 느낌이 들어서 몇 군데 첨삭을 하여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시조새는 책이나 그림으로나 보았지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중생대의 하늘을 나는 익룡(翼龍)이지요. 나는 어린 아이들이 공룡에 열광하는 까닭은 아마도 인류의 먼 조상(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기 이전에)이 경험했던 크고 무서운 공룡의 이미지가 무의식에 각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꿈속에 등장한 시조새도 억년의 세월을 건너와 내 무의식에 나타난 원형적 이미지라 할 수 있겠지요. 특히 그 새가 에바 부인으로 변하고, 함께 들판을 걷던 옆의 친구가 데미안이라고 생각하니 그 꿈은 예사롭지 않은 신화의 한 장면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에바 부인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데미안의 어머니로서 매우 기품 있고 아름다운 부인인데, 학생 시절 나는 그녀에게서 매우 신비하고 강한 아름다움을 느꼈으며 그녀의 이미지는 내게 퍽 이상적인 여성성의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나의 <아니마>였지요.
이 꿈속의 나는 들판을 걸어가는 지상적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뒤쪽에서 너울너울 날아오는 시조새는 하늘에서 온 천상적 존재이지요. 나는 그 새에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옆에서 함께 걷는 친구(동반자이며 인도자)는 새를 쓰다듬어 줍니다. 그것을 보고 나도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왼손을 내밉니다. 왼손은 우뇌(감성)에 연결되어 나의 감성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새는 빙그르르 돌아와 큰 부리로 내 손을 무는데, 물어도 아프지 않음을 확인하고 나는 오른 손(좌뇌/이성)을 내밀어 쓰다듬으려 합니다. 그 때 시조새는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나의 두 손을 한꺼번에 마주 잡습니다. 감촉이 따뜻하고 좋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앞에는 시조새가 아니라 눈이 맑고 기품 있는 백인 여자, 에바 부인이 서 있었습니다. 아, 내가 아름다운 에바 부인과 손을 마주 잡고 있다니....! 이것은 나약한 지상적 존재인 나와 크고 강한 천상적 존재와의 <인카운터(참 만남)>의 장면이 아닌가요? 이런 만남은 더 이상 다른 느낌이 끼어들 수 없는, 한 마디로 <논 플루스 울트라(더 이상 최고는 없다)>이지요. 그런데 에바 부인은 내 손을 놓고, 내 친구(데미안)와 함께 돌아서서 걸어갑니다. 그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웬일인지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목이 멥니다. 이 장면은 아마도 나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 천상(이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지상(현실)에 발이 묶여 꼼짝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시조새와 만났던 그 꿈 일기를 <꿈 속의 잠깐>이라는 연작시의 하나로 써 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