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침’ 대갈선생
고 김문호를 회상하다
육신을 벗은 영계라고 어디 다를까요. 부단한 정진으로 아쉬운 전생을 새롭게 담아 밝힐 윤회의 뱃머리에 다시 앉았습니까?
며칠 전 당신도 잘 알고 계신 조정일 전 진사련 의장님과 함께 봉하마을에 다녀왔습니다. 하늘을 뒤덮던 현수막들은 이제 여정이 조급하지 않은 관광객들의 안내글이 되어 펄럭이고 허기를 달래는 기념품으로 전락한 과자와 빵들이 길 양쪽 가게마다 진열되어 있습니다.
백척간두에 선 애국의 심회는 아랑곳없이 부엉바위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초가삼간의 전형적인 시골집 생가가 아직 복원중인 마을. 그토록 집요하게 물어뜯고 왜곡하던 기득권 언론들의 피비린내 진동하던 잔치가 뒤늦게 파한 듯 무거운 구름장만이 초하의 하늘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오히려 준엄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법칙이 새삼스레 떠오르는 시절입니다.
이리 시절이 하수상하니 옛 선인들의 청록한 산수에 베였던 향수가 더 그립기만 합니다. 삼베옷고름 휘날리던 한창기선생의 샘이 깊은 물맛에 갈증이 나며 기와집 열채 값으로 선뜻 청자 그릇 하나를 사 간직하시던 간송 전형필 선생은 또 다른 우리 민족의 기틀이었습니다. 술 없이도 단원(檀園)의 붓자락에 흠뻑 취해 술잔을 마주하고 팠던 오주석선생, 호랑이의 입을 빌어 양반들의 썩은 세태를 질타하던 박지원선생들의 표표한 흔적들은 어디에 남아있을까요?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내가 언덕에 서서 한없이 울었기 때문만은 아니다”며 “大同江水何時盡고 別淚年年添綠波”의 시적 경지를 훌쩍 뛰어넘었던 천상병시인의 ‘아름다운 소풍’인생이 더더욱 그립기만 합니다. 지천명을 깨치지 못한 외로움 때문이기도합니다.
결연한 자세로 단지(斷指)를 하고서 이등박문의 가슴에 민족의 이름으로 ‘쇠알’을 박아 넣었던 안중근 장군의 거사가 이뤄졌던지 벌써 일백년이 되는 해를 맞아 나는 “까닭 있는 슬픔”에 젖어봅니다.
진도에도 어려운 시절, 엄혹한 세상을 견뎌 낸 인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늘 우리시대를 함께 엮어왔던 한 사람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오직 나만의 새로운 소식(오마이뉴스)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사람. 자신에겐 단호하고 부정한 세상에 뼈아픈 일침을 놓아 활인구세의 법을 외롭게 추구했던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기억을 모처럼 되살려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은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 경연장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선각의 역사 고리를 쉽게 끊을 수 없는 법이 아닙니까?
고 김문호 동지는 진도읍 산월리 산자락에 말없이 누워 이 사회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던 열정과 형형한 눈빛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뛰어넘어 하나의 지침으로 남아있습니다.
기적이라 할 정도로 강력한 의지로 불가능하던 수술을 마치고 회복했던 놀라운 의지를 담담히 받아 누른 채 아들과 함께 진도의 산천을 주말마다 되살펴보았던 이유는 이미 그의 숙명을 간파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직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금골산 지력산 등 고향 산야를 둘러보며 이순신의 외로운 고뇌와 결단을 다시 떠올리며 아들이 그 뜻을 언젠가 알게 되리란 희망을 놓치지 않았던 김문호 동지. 누구든지 예감에 사로잡히면 고요함속에 서늘한 눈빛을 품게 되는 것일까요.
군내면 둔전리의 금골산(金骨山193m)은 진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명산이다. 산 중턱에는 쌀구멍의 전설이 서린 굴암이 있으며, 아래로 둔전평야와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산과 봉우리 역시 한 폭의 그림 같다. 산에 올라보면 바위벼랑을 깍아 들어간 3개의 석굴을 보게 되며 맨 왼쪽굴 북쪽 벽에는 1470년경 조상한 것으로 알려진 좌우 3.5m 크기의 미륵불이 있다.
이 미륵불 배꼽에는 쌀이 나와 석굴에서 깨우침을 얻으려는 수도자들의 양식이 돼왔었으나, 그 중 한 사람이 욕심을 부려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연산군 시절 이주가 금골산으로 유배되어 금골산록을 써놓은 것이 서거정의 동문선에 남아있는데 '영험이 많은 금골산이 매년 빛을 발해 유행병 등의 재앙을 막았으나 미륵불이 조상된 후 빛을 발한 적이 없다'고 적혀있다. 어느 날 이주는 술에 취해 스님의 간청에 따라 글을 써 이후부터 금골산은 진도의 조종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문호는 바로 이 조종산에 아들과 함께 올라 진도의 사위와 바다를 보며 감개무량하면서도 아직 성장이 늦은 아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세상을 떴다.
병을 치유하기 위해 매일 자전거를 타고 이모 전 군의원이 운영하는 왕고개의 목욕탕으로 가 몸을 씻으며 강열한 회생의지를 불태우던 노력도 허사가 되었다.
나는 한탄한다. 신문이고 나발이고 정치고 다 때려치우고 오직 ‘살아야 한다’라는 의지만으로 뭉쳐야 할 사람에게 반잔의 막걸리를 권하고 뒤틀린 세태를 논했던 내 속 좁은 처사를 한탄하고 또 한탄할 뿐이다. 내 스스로 가장 소중한 동지를 세상과 절연케 했으니 어찌 후회가 없겠는가.
한 발 앞선 예측력, 언제나 뚜렷한 관점, 오만한 권력을 감시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던 그에게도 삶은 냉혹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도목리 앞바다에서 처남과 아내를 한 배에서 잃어야 했으며 성실한 농민으로 유망한 차세대 농민지도자의 역할도 애써 지워버렸던 김문호.
대취하면 읍내 철마광장 한 복판에서 가방을 베개 삼아 그대로 잠이 들던, 거칠 것 없던 곰 한 마리가 영면에 든 지도 수년이 지났습니다.
절친한 벗이었던 농민 조성문 동지는 “자신을 다 바치며 하느님께 귀의”하려던 그에게 의식의 자각과 공유를 통해 ‘투사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 오히려 후회스럽기까지 하다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했습니다.
“청초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해마다 초여름이 오면 진도사랑연대회의 동지들은 진도읍 산월리 묘소를 찾아 벌초한 뒤 헌작하고 상념에 젖는다. 이곳은 김문호동지가 태어난 곳으로 한 때 진도의 관문 역할을 했던 쉬미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소포갑문이 훤히 보이는 곳으로 간척된 농지엔 백로 왜가리가 친환경농업으로 되살아난 물고기를 찾아 원무를 그리곤 한다.
진도 최초로 진도민주시민단체협의회가 주관, 민주시민장으로 철마광장에서 치러졌던 장례식장은 붉은 만장으로 뒤덮여 그를 추모했다. 용산 철거민이 불에 타 죽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작은 비석 아래 한줌의 재로 화하고 건국이 불과 50년으로 축약된 민간독재의 오늘을 김문호 일침선생은 어떻게 생각할까?
가장 어려운 시기에 몸담았던 한겨레신문 진도지국장을 내놓고 진정한 지방자치제의 정착과 발전을 위한 지역언론의 중요성을 깨달아 일하면서 소위 ‘죽이 맞아’ 대낮부터 쇠전 막걸리집, 비끼내 감나무집 그늘에서 술타령을 해 대거나 격론에 몸이 달아오르게 했던 전력은 결국 무쇠같은 위장을 펑크나게 했으니 이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진도군의회의장단 선거에서 절차상의 하자를 지적, 뼈아픈 일침을 가하며 질타를 하던 그 기백. 장죽수로 건너 상하조도 골기미를 휘저어 돌면서 핵발전소 건설을 온몸으로 막아냈던 여정의 스펙트럼이 여름날 무지개처럼 떠오르기도 합니다.
다시 또 기억해봅니다.
아무도 손을 쓸 수 없을 상태가 되었다며 수술을 마다할 때 이전 인연에 따라 서울 삼성병원 수술대에 올랐을 때도 “원이나 없게 해 보자”는 주변의 인식과는 달리 놀라운 인내와 강력한 생명력으로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회복력이 아주 빨라 담당 의사들을 오히려 놀라게 했던 일화도 일각의 방심으로 다시 찾아온 병마에 결국 숨을 거둬야 했습니다.
속주머니도 거덜난 가족( 처제는 언니의 어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조카들과 살았다 ) 들의 성화에 마지막 숨결을 지탱하던 산소호흡기를 떼자 비로소 응급실엔 통곡소리 가득하고 당신은 오히려 편안한 영면에 들었습니다. 진도한국병원 응급실 밤 열시 무렵이었다. 우리는 비좁은 병원 영안실을 고려해 전남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한국병원측에서도 흔쾌하니 동의해주었다. 사흘 동안 진도전남병원 영안실은 당신과 진도에 얽힌 수많은 일화를 나누느라 밤을 지새우고도 쉬이 기억을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농민회와 민주화운동 등에 매진하느라 정작 농토를 다 팔아먹은 뒤 농민의 진정한 벗으로 우뚝 섰던 당신. 진도초등학교 앞의 집까지 탈탈 턴 뒤 쌍정리 낮은 집으로 이사가 채소밭을 일구며 몸을 추스르던 당신. 새로 만난 두 번째 아내는 말을 제대로 못하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속내를 숨기지 못하던 여인으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 가는데 온 힘을 다했다. 아이들이 많아 진도고교 신민식선생과 전교조 진도지부에선 이들의 교육비 지원과 면제를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 왔었다.
나도 이 집을 몇 차례나 들러 아이들에게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쥐어주며 생색을 내기도 했다. 이도 김문호 동지의 얼굴을 잠시나마 마주하고 싶었던 욕심에 술기운을 얹혔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그때 부인에게 너무 매몰찼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삶도 결국 빠르게 소진할 수 밖에. 일언이폐지라.
부질없는 회억이다. 지금도 상설시장 뒤쪽으로 원불교 진도교당 골목을 지나다 보면 아직 그 집의 낮은 담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 집도 어느 지독한 사내가 사기를 쳐 빼앗다시피 해 버렸다니 어찌 이리 세상이 야박하단 말인가! 노래방 청소부를 다니고 읍장날 막걸리집 설거지 일, 차철웅 전 진도농민회장의 주선으로 농산물 간이집하장 일 등을 하며 먹고사는데 전력하던 그 분의 소식도 뜸하기만 하다.
나는 외롭다. 나는 무기력하다. 블렉홀같은 이 모욕의 시대에 살아남은 슬픔을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
정치판에 앞장서 창작의 신선한 고뇌를 털어버린 창준이도 안타깝고 아카시아 향을 따라 새벽길 찾아가던 세방의 한 여인은 고아한 중년의 관조와 비애를 많이 지워냈다.
아내는 새섬무리를 벗어나 후투티처럼 여귀산에 깃들더니 둥지를 떠나 도시를 향해 날개짓을 해댄다. 참담한 세태풍자로 비주류의 아픔을 노래하던 정형철 형도 왕고개의 정령이 되었다.
사람은 가고 오지만 옛 정은 남는 법이 어디 인환의 노래에만 모던하게 남아있을까?
김문호동지를 떠올리는 많은 이들은 늘 새로운 각오를 품는다. 진정한 ‘사람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던 촌놈 김문호. 타협을 몰라 저 혼자 황소처럼 씩씩거리던 그 산월 머시매.
산빛이 푸를수록 더 선명하니 떠오르는 그대. 육신은 흙이 되었어도 그 정신 올곧아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어” 저 험한 세상의 다리를 건너 우리에게 돌아오라.(박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