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갈라짐 현상이란 해저지형의 영향으로 조석의 저조시에 주위보다 높은 해저지형이 해상으로 노출되어 마치 바다를 양쪽으로 갈라 놓은 것 같아 보이는 자연현상으로, 우리나라 남서해안과 같이 해저지형이 복잡하고 조차가 큰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조석현상'은 지구, 달 그리고 태양의 인력 효과와 지구의 구심력의 평형에 의해 발생하는 해수면의 주기적 승강운동을 의미한다. 조석으로 인하여 해면이 가장 높아진 상태를 '고조'라 하고 가장 얕아진 상태를 '저조'라한다.)
국립해양조사원에서는 진도, 무창포, 사도, 제부도의 갈라짐 현상에 대한 예보를 실시하고 있으며, 변산반도 등에서도 바다갈라짐 현상이 일어난다.
진도의 바다 갈라짐을 볼 수 있는 신비의 현장으로 그 규모와 크기가 세계적인 곳이다. 매년 바닷길이 가장 크게 열리는 음력 4월 중 한 날을 정해 축제를 개최하는데 이 모습을 보러 10여 만 명의 사람이 운집한다고 하니 단일행사로 최대 규모라 할 만하다. 진도 본섬인 회동에서 맞은편 작은 섬인 모도까지 2.8km 바닷길이 열리는데, 30~40m에 이르는 큰 폭으로 길이 갈라진다. 눈으로 바닷물이 갈라지는 것을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물이 빠지며 땅이 드러난다.
이곳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75년에 우리나라에 프랑스 대사로 와 있던 “피에르 랑디”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 마침 이 현상을 목격하고 프랑스 신문에 알리면서부터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이 바닷길을 주제로 노래가 만들어져 히트하는 등 유명해지는 바람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바닷물이 갈라지기 전에 축제가 펼쳐지는데 소리로 유명한 진도라 공연 하나하나 짜임새 있다. 축제는 영등제에서 가져온 것으로 바닷가 마을 대부분이 그렇듯 이곳도 해마다 바닷가 사람들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한다. 음력 3~5월이 바닷길이 크게 열리는 기간이라 해질 무렵에 오면 굳이 축제 때가 아니더라도 바다 갈라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다른 시기에는 밤이나 새벽에 바다가 열려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다. 혹 다른 철에 이곳을 찾았다면 가계 해수욕장과 함께 있는 진도해양생태관에서 영상을 통하여 바다 갈라짐을 볼 수 있다. 가계해수욕장은 진도 최고, 최대의 해수욕장으로 백사장 길이가 3㎞에 달하며 앞으로 보이는 섬과 육지가 운치를 더하는 곳이다.
진도는 한반도 서남단에서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909년 견훤과 왕건의 벽파 앞바다 전쟁, 1270~71년 여몽연합군과 삼별초 진도정부군 간의 공방전, 1597년의 명량해전, 1894년 동학항쟁 최후 격전,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등을 통하여 수많은 전사자를 낸 곳이다.이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진도사람들’의 발행인인 박주언이 주도하여 수장원혼들을 불러 씻기고 위로하고 모든 전사자는 국경, 계급, 종교, 인종, 이념과 관계없이 똑같은 생명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동시에 진도 연안뿐 아니라 한반도 바다를 평화와 생명의 바다로 만들자는 취지로 민간주도 축제를 설립하게 되었다.진도평화제(珍島平和祭)는 진도의 지리적 특성상 진도 앞바다 속에는 전쟁으로 인한 무주고혼(無主孤魂)이 잠들어 있어 이들의 고귀한 생명을 대상으로 국적을 초월한 수중고혼을 혼건짐으로 맞이하여 씻김굿으로 원한을 풀어 드리기 위한 합동제사 행사이다. 이는 전쟁의 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풍요로운 땅과 바다를 가꾸며 살고 있는 진도군민들의 평화 추구의 염원을 담고 있는 지역 축제이기도 하다.
1994년 음력 9월 16일(정유재란 명량대첩일) 고사를 지낸 후 이듬해인 1995년 같은 날 제1회를 진도평화제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주민 주도 축제를 주장하는 진도평화제 측과 진도군 당국의 견해 차이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해 오다가 2006년 제9회 행사부터는 진도군청과 사전 공동검토를 하는 등의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도평화제는 역사적 사실과 진도가 보유한 각종 민속예능을 접목시키면서 인류의 이상을 내세운 것으로 특히 전사자 혼건짐, 씻김, 출상행렬의 진도만가, 강강술래 등 국가 및 도지정 무형문화제와 전사자 합동제사를 전통적으로 보여주면서 평화한마당에서는 각종 국내외 민속예능도 선보여 국제적인 축제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축제 첫날은 국제학술회의나 전야제를 열고, 둘째 날에는 오전에 전사자 혼을 건져서 오후에 제사를 모신다. 그리고 밤에는 전사자를 씻기는 씻김굿을 실시한다. 셋째 날 오전에 합동출상이 있는데 진도의 출상행렬은 고구려 풍속대로 상여 앞에서 북 치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면서 운상하는 특징이 있다. 밤에는 국내외의 각종 민속예능을 펼치는 평화한마당을 개최한다.
축제를 민간주도로 개최하면서 많은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 왔으나 1950년 한국전쟁시의 UN참전국과 일본, 몽골, 북한, 중국 등을 포함한 20여 개 국가의 세계적 축제로 발전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진도 경제에도 크게 기여하리라는 진도평화제 측의 주장에 진도군 당국이 동의하여 2006년부터는 새로 거듭나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
이와 같은 민간주도의 축제행사야 말로 군민들을 능동적으로 참여케 하는 한편 행사를 통한 군민들의 단합에도 기여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재로 큰 섬인 진도 동쪽에 자리잡은 첨찰산(尖察山485m)은 정상에 봉화가 있어 봉화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높이 485m이다. 진도에서 제일 높은 바위산이다. 백제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山城)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설치한 봉수대의 유적이 있다. 산밑에 운림산방(전남기념물 51)과 쌍계사(전남유형문화재 121)가 있으며, 쌍계사와 운림산방 일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천연기념물 107)에 둘러싸여 있다.
◆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운림각(雲林閣)이라고도 하며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 옆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 1856년 9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이름은 운림각이라고 지었고 거실은 묵의헌으로 지었다.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고 다양한 화훼와 임목을 심었다. 하지만 허련이 사망하고 아들 허형이 운림산방을 떠나면서 매각되어 운림산방의 연못과 가옥은 예전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후 허형의 아들 허윤대가 운림산방을 다시 사들였고 1982년 허형의 아들 허건이 운린산방의 예전모습으로 복원하였다. 1992년과 1993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철산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 모습을 보고 이름지었다 한다.
경사지에 세워졌으며, 맨 위쪽에 허유의 화상을 모신 운림사(雲林祠)가, 오른쪽 뒤편에 사천사(斜川祠)가 있다. 돌담으로 둘러진 안쪽에 살림집이 있고 그 전면 우측에 허유가 머물던 사랑채가 있다. 살림집 앞에 1978년에 재건한 운림산방이 있다. 그 앞에는 가로 33m, 세로 27m 크기의 연못이 있고, 연못 중앙에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에는 허유가 심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운림산방은 ㄷ자형 한식 기와로 정면 우측 3칸은 화실이며 나머지는 방으로 꾸몄다. 구조는 장대석으로 외벌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굴도리집이다. 안채는 一자형 초가로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각 1칸씩 방, 부엌, 안방, 웃방, 광의 순으로 배치하였다. 중앙의 안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는 막돌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집이다. 사랑채는 4칸 규모의 一자형 초가집이다. 왼쪽 끝 1칸은 안채로 들어가는 통로로 만들었으며 오른쪽에는 2칸의 광과 1칸의 방을 배치하였다. 구조는 안채와 비슷한 민도리집이며, 기단은 낮은 토단이다.
운림사는 1983년 건립된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1고주 5량 구조이며, 공포는 주간마다 1구씩의 공포를 배치한 다포식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사천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구조는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원형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2익공식이다.
한국 남화의 고향,진도 여행의 일번지는 운림산방이다. 진도 그림의 뿌리이자 한국 남화의 고향이 바로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곳으로,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남화의 맥을 잇는다. 허련은 진도 태생으로 이웃 땅인 해남 녹우당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는데, 대둔사에 머물던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간다.
스승인 김정희가 죽은 후 허련은 고향으로 내려와 작품활동을 펼치며 한국 남화의 맥을 형성한다. 남화 또는 남종화라고 불리는 화풍은 전문 화원들이 그리던 북종화와는 대비되는 그림으로 수묵을 가지고 담대하면서도 자유로운 형식으로 선비의 마음을 담아 그리는 산수화를 말한다.
종종 영화나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해 눈에 익은 연못이 보이고 뒤로 허련이 살았던 운림산방이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에서는 허련의 작품을 비롯해 그의 손자인 허건의 작품까지 남화를 대표하고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관과 함께 있는 진도역사관에서는 진도의 옛 모습에서 지금까지 그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남도예술은행 토요경매, 특별한 볼거리매주 토요일 오전 11시에 운림산방에서는 남도예술은행이 개최하는 토요경매가 열린다. 남도예술은행이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해서 매입하고 그것을 경매에 내어 놓는데 한국화, 문인화, 서예 등이 대부분이다. 꼭 경매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좋은 볼거리가 되니 시간을 맞추어 찾아보면 좋겠다.
◆쌍계사는 진도읍에서 동남방으로 7km 거리의 첨찰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후 수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양편으로 하천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고 이름하였다는 이 사찰은 주변에 50여 종의 생태수림이 울창하게 우거쳐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 남쪽으로는 조선말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유 선생이 기거하던 운림산방이 인접하고 있고, 뒤쪽인 북편으로는 진도의 명산인 첨찰산(해발485m)이 둘러싸고 있어 섬중의 산골에 깊숙히 들어앉은 사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쌍계사의 대웅전은 전남 유형문화재 제 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실 산악회 2016년 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