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5월 어느 날, 나는 김포국제공항에서 세계 일주 첫 목적지인 대만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는 만으로 스물일곱, 한창 꿈 많은 젊은이였다. ‘박성기 특파원, 격동의 세계를 가다’는 좀 거창한 주제로 세계 선교 현장을 둘러보는 기획이었다. 말이 선교 취재였지, 내심은 배낭여행으로 짠 것이었다.
이십 대 초반부터 내 꿈은 세계 일주였다. 오지 여행가, 김찬삼 교수의 여행기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김 교수는 전 세계를 돌며 낯선 풍물을 소개해 주었다. 외국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던 그 시대, 또다른 세상을 배웠다. 훗날 김 교수처럼, 손오공처럼 세계를 주유하고 싶었다.
대만을 시작으로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동남아 6개국 순방을 끝내고 네팔, 인도 등 서아시아 2개국을 더 여행했다. 그 사이 석 달이 훌쩍 지났다. 내 입에서는 한국말이 아닌 영어가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고, 배낭은 점점 너덜너덜해졌다. 배낭족 티가 서서히 나기 시작했다. 선교사를 만날 때마다 후한 대접을 받기는 했지만 취재가 끝나면 외로운 늑대 같은 배낭족 신세로 돌아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내 나름대로 결심한 게 하나 있었다. 여행 기간 내내 면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그 참에 한번 수염을 길러보겠다는 뜻이었다. 8월까지 면도 한 번 안 하고 지냈다. 자연히 얼굴은 수염으로 가득 찼다. 그렇다고 서양 사람처럼 멋진 수염을 길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냥 봉두난발이 얼굴까지 이어졌다고 보면 좋다. 내 딴에는 여행자, 아니 진정한 배낭족이라면 장 수염은 필수 요건이라고 생각했다.
8월 염천에 태국 수도 방콕에서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사촌 형이 대한항공 파리 지점장을 하고 있었다. 파리에 도착한 날, 사촌 형 집에 갔다. 형수가 반갑게 맞아줬다. 샤워를 대충 하고 여독을 풀기 위해 낮잠을 잤다. 밤 여덟 시나 됐을까, 사촌 형이 집에 들어왔다. 보자마자 “반갑다”, “잘 왔다”는 따뜻한 말보다 “야, 이 새끼야. 수염이 그게 뭐냐. 빨리 짤라” 하며 지청구부터 해댔다. 나보다 열 살 많은 사촌 형 눈에 새파랗게 젊은 놈이 수염을 기르고 다니는 게 못마땅해서 그랬다.
“아니, 형님요. 그래도 명색이 배낭족인데 이 정도는 용서해줄 수 있는 것 아니에요.”하고 대들었다. 사촌 형은 어이가 없다는 듯 “너 우리 집에 있으려면 그 잡초부터 정리해. 면도하기 싫으면 시내 배낭족 숙소로 가든지. 니 맘대로 해” 하며 말을 잘랐다.
그날 저녁, 백일 고이 기른 내 수염은 처참히 잘려나갔다. 사촌 형 눈에 나이도 어린 게, 게다가 어울리지도 않는 게 겉멋이 들어 수염을 기르고 다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옹다옹 다툼을 옆에서 지켜보던 형수는 “왜 어때요? 배낭족인데 그러고 다녀도 되는 것 아니에요”하며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 나를 향한 형수의 눈웃음 속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하지 않았어요’하는 표정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날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 정숙한 배낭족, 아니 깔끔한 여행자로 말이다.
1995년 8월 초, 뉴질랜드 이민 살이가 넉 달이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8월 5일 마운트 로스킬에 있는 방 네 개짜리 집을 은행 융자 70퍼센트를 끼고 18만 달러에 샀다. 그 다음 날, 둘째 아들이 세상에 나왔다. 또 그 다음 날, 우리 집에 ‘초대받지 않는 손님’이 와서 살림살이를 다 쓸어갔다. 도둑이 찾아온 것이다. 집 사고 애 낳고 도둑맞고…. 그 짧은 사흘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집은 초토화됐다. 출산 때문에 새로 산 집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병원에 갔었는데 와 보니 더 어지럽혀져 있었다. 몇 개 안 되는 패물, 내가 아끼던 210mm 망원렌즈가 부착된 사진기, 일 년 간 세계 일주를 하며 모은 전 세계 동전들이 사라졌다. 그 밖의 소소한 물건들이 밤새 자취를 감췄다. 그 가운데 하나가 면도기였다.
뉴질랜드를 빛내주겠다고 이민까지 왔는데 도둑님들이 먼저 환영해주니까 좀 기분이 언짢았다. 뉴질랜드 지역 사회에 반항하기로 했다. 삭발 투쟁으로 울분을 드러내는 대신, 저항의 표시로 수염을 기르기로 했다. 면도기를 훔쳐가 홧김에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달 넘게 수염을 길렀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세 살이었는데, 한국적인 관점에서 보면 젊은 놈이 왜 수염을 기르고 다니느냐고 퉁박을 받을 만도 했다. 그래도 외국에 산다는 점 때문에 묵시적으로 이해해 주지 않았나 싶다. 수염을 기른 채, 아니 깍지도 않은 채, 교회에도 버젓이 갔고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분들 집도 방문했다. 예의가 아니었지만, 내 딴에는 그 참에 수염을 제대로 한번 길러보고 싶었다.
복병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 그 당시, 나는 한 교민신문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몇 달 준비 끝에 드디어 창간호를 내고, 몇 주 지나 온 직원이 모여 기념 파티를 했다. 시내 유명한 호텔에서 가족까지 초청해 자리를 같이할 만큼 격이 있었던 회식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신문사 실세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회장’으로 불리던 중년신사가 회식 장소에 나타났다. 어깨에 후카시가 꽉 차 있었다. 신문사 자금줄이었던 사람이다. 그분은 나를 처음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 수염 좀 자르지? 젊은 친구가….” 그러면서 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비싼 밥을 먹었지만 속은 불편했다. ‘뉴질랜드까지 와서 수염도 맘대로 못 기르다니. 지가 회장이면 회장이지, 내가 좋아 기른다는 수염 가지고 웬 난리야’하며 불만을 속으로 삭였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난 그 사건 뒤에 회사를 그만뒀다. 또 꼭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회장이라는 분은 몹쓸 병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염 하면 생각나는 영화배우는 나와 동갑인 브래드 피트다. 그가 주연한 영화 ‘가을의 전설’과 제작자 겸 카메오 배우로 나온 ‘노예 12년’에서 그는 참 멋진 수염을 보여줬다. 모름지기 남자라면 그의 거칠 것 없는, 그러면서도 모든 세상 풍파를 휩쓸어버릴 것 같은 은빛 수염을 부러워해야 할 것이다.
내게 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시 배낭 하나 메고 세계 일주를 해보는 일이다. 예순 넘어 그 언저리에서 그래도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한 남자가 은빛 수염을 길게 기른 채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였던 잘츠부르크에 서 있다면, 그게 ‘고독한 자유인 박성기’이리라.
박성기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재외동포문학상 수필대상·수필집 공씨책방을 추억함 등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