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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지붕
고통을 주고받기에 골몰한 나머지,
겨울비를 맞으며 홀로 집을 나왔다.
그러나 결코 위쪽 창문의 특정 전등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멀리 가지는 않았다.
그 전등은 의미심장(意味深長)하였으니,
전등이 꺼지기 전에 나는 들어가지 않을 게고,
내가 들어가지 전에 전등은 꺼지지 않을 게다.
그래, 우리는 어느 쪽이 이길지 두고 볼 게다.
어느 쪽이 먼저 굴복하는지 두고 볼 게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암흑 들판이었다.
비는 추위 때문에 당연히 눈이었다.
바람은 또 눅눅한 흙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두툼한 옛 초가지붕이 신기했다.
그곳에서 여름에 부화(孵化)한 새들이,
먹이를 합창으로 받아먹고, 어른 새 되니,
일부가 여전히 은신하고 있었다.
내가 처마 밑을 지나갈 때에
너무 낮아 소매에 지푸라기가 스쳤고,
구멍과 구멍에 휙휙 새들을 내쫓으니,
암흑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사레는
구원의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니,
내 혼이 슬프고, 슬픔에 슬픔을 더했다―
그들은 다시 둥지를 찾아 이리저리 날 수도
없었고, 어떤 홰를 발견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나뭇잎 썩은 진창에 떨어져. 그곳에서
그들의 날개와 내열(內熱)을 믿고, 날이 밝아
비행이 안전할 때까지 웅크려야 할 게다.
둥지나 홰 없는 그들을 생각하는 사이에
크나큰 내 슬픔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런 연유로 그 슬픔이 녹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오두막은, 그 초가지붕이
바람에 찢긴 채, 방치되어 있는바,
바깥의 비가 방바닥까지 스며드니,
수백 년의 오두막 수명이 이제 끝이다.
-신재실 옮김-
단상(斷想): 사랑과 잔인은 동전의 양면인가? 사랑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도 있고, 부부는 헤어지면 남남이란 말도 있다. 애정은 감정의 교차에 따라 사랑과 증오를 넘나들기에, 때로는 풍요롭고 신기한 어떤 것으로 탈바꿈하지만, 때로는 악몽 같은 어떤 것으로 뒤바뀌어 잔인한 고통을 주고받는다.
비오는 어느 겨울 밤, 화자는 아내와의 말다툼 끝에 집을 나왔다. 아내와의 자존심 싸움에 이번만은 물러서지 않을 기세지만, 집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침실 창문에 비치는 전등불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어느 쪽이 먼저 굴복할지는 빤한 것 같다.
눈으로 바뀐 비, 눅눅한 흙먼지 날리는 바람, 칠흑처럼 막막한 들판, … 황망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어둠속을 헤매다가, 화자는 축 늘어진 초가지붕을 우연히 옷소매로 툭 친다. 그 바람에 둥지에서 잠자던 새들이 깜작 놀라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뜻하지 않게 집을 쫓겨난 새들이 어디서, 어떻게 밤을 지새울까? 까닭도 없이,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악몽의 고통을 새들에게 안기지 않았는가?
침실이 있고,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그의 슬픔과 청천벽력 같은 재난에 절망하는 새들의 슬픔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젖은 날개로 진창에 내려앉은 새들의 참상(慘狀)을 생각하니, 그의 슬픔은 아주 작아 보였다. 그는 얼어붙은 자신의 마음을 녹이기만 하면 된다. “둥지나 홰 없는 그들을 생각하는 사이에/ 크나큰 내 슬픔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런 연유로 그 슬픔이 녹기 시작했다.” 화해의 길이 열린다.
화자나 새의 슬픔보다 더욱 슬픈 것은 초가집의 운명이다. 화자는 슬픔을 녹이고 불 켜진 침실로 돌아가면 될 것이고, 새는 날이 새면 다시 둥지를 찾을 수 있으리라. 하지 만 비바람에 방치된 채 방바닥까지 빗물이 스며든 나머지, “수백 년 수명”을 마감하는 한 문명의 슬픔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으랴?
-신재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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