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에 “꼬맹아” 부른 동기…이한림 체포, 혁명 완성됐다 (1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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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의지로 쓰여진다. 5·16의 성패는 인간 의지로 갈렸다. 거사의 설계자인 김종필(JP)은 “성공 요체는 의지”라는 확신을 전파했다. 전격적으로 실천했다. 이한림 1군사령관의 체포는 그가 주도했다. 장면 정권 쪽에도 반격의 기회와 역전의 공간이 있었다. 저지의 수단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 세력의 진압 의지는 허약했다. 그들은 분산된 채 파산했다.
5·16 당일은 격랑(激浪)의 24시였다. 우리는 목표를 점령했고 상황을 잡아챘다. 박정희 장군이 이끈 궐기군은 한강다리를 돌파했다. 수도 서울, 군의 심장부를 장악했다. 새벽 KBS 라디오 방송은 군사혁명을 역사의 운명으로 진입시켰다.
하지만 거사는 미완성이었다. 그 물결 속에 불길한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주한 미군사령관 매그루더의 비판적인 자세,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의 모호한 처신, 1군사령관(중장) 이한림의 거부 언동은 주요한 장애물로 등장했다.
1961년 12월 서울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열린 송년파티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앞줄 왼쪽)과 재건복을 입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한국군 작전 지휘는 주한미군 매그루더(대장)의 권한이었다. 매그루더는 궐기군 출동을 작전지휘권의 이탈과 훼손으로 규정했다. 그는 저지와 진압 작전을 구상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진압군 동원에 반대했다. 내각제의 총리는 실질적인 군 통수(統帥)권을 갖고 있었다. 장면 총리는 피신 상태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여건으로 작용했다.
나는 “의지가 핵심이고 병력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한림의 1군 존재는 우리 혁명 세력을 긴장하게 했다. 다음 날인 17일 ‘이한림 야전군’의 반격설이 퍼졌다. 이한림(40세)은 우리의 거병을 쿠데타로 규정했다. 1군(당시는 3군이 없었음)은 대규모 야전부대로 구성됐다. 5개 군단, 20개 전투사단을 보유했다. 우리 병력은 3600명, 1개 사단도 못 된다. 1군의 1개 군단이 진압군으로 나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육군본부 혁명지휘소에 초조와 불안감이 감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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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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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8일 저녁 어스름. 혁명의 성공이 확신으로 예감됐다. 육본에 있는 나를 미8군 정보장교 몰 대위가 찾아왔다.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1900~88) 미군 사령관이 보냈다. 사령관이 19일 오전에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옷은 사복 차림을 원했다. 중령 계급의 군인이 아닌 혁명 지도자로 나를 예우하려는 뜻이라고 했다.
나는 5월 16일 오후 육군 중령으로 복귀했다. 강제예편 3개월 만이다. 몰 대위의 방문은 매그루더의 첫 반응이다. 쿠데타를 인정할 수 없다며 진압의 의지를 드러내던 매그루더다. 나를 만나자는 건 태도 변화를 의미한다. 이날 있었던 이한림 중장 체포, 육사생도 시가행진, 장면 내각 총사퇴가 그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이튿날 양복에 넥타이를 맸다. 청파동 집을 떠나 용산 미8군 사령관실로 향했다. 혁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혁명군과 미군의 대좌 순간이다.
돌이켜보면 미8군은 3600명의 혁명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5만6000명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 사령관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매그루더는 박정희 소장을 의심했다.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박 소장을 강제예편시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