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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람사는세상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제임스좌
109.낙동강의 작가, 요산 김정한 ‘사람답게 살아라’
1.요산 김정한 선생, 선생이 늘 강조하시는 ‘사람답게 살아라’는 말씀이 가장 핵심이었고,
그렇게 살려고 하신분이다.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 냄새가 난다.
문학계의 큰 별이신 요산 김정한 선생은 평생 부산에서 부산을 위하여 사신분이다. 특히 선생은 낙동강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민족혼을 가지고 계셨으며, 사회와 사람에 대한 연민이 누구보다 많으신 분으로 그의 정신은 그가 늘 하시는 ‘사람답게 살아라’ 말속에 응축되어 있다.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의 모습과 주름진 모습은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더욱 요산 선생님에게는 따뜻한 사람냄새가 난다. 우리가 잘 모르고 관심이 없지만 부산의 토박이로 우리나라 문학계의 큰 별이시다.
2.요산 김정환의 모습, 60대 때의 사진(좌)과 어릴 때 사진(우)
요산(樂山) 김정한은 1908년(1세) 음력 9월 26일,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리(南山里)에서 김기수(金基壽)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13년(6세)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919년(12세) 사립 명정(明正)학교 입학하고 그해 3.1운동 일어난다. 1923년(16세) 중앙고보(中央高普) 입학하고, 동래(東萊)고보로 전학한다. 1927년(20세) 3월, 경남 양산군 하서면 화제리 풍양인 조희원씨의 장녀 조분금(趙分今)과 결혼하며, 1928년(21세) 동래고보 졸업한다. 9월에 양산 대현(大峴)공립 보통학교 교원 취임한다. 11월에 <동아일보>에 시를 투고하고, 11월 일본의 민족적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조선인교원연맹 조직을 계획하였으나 일경으로부터 가택 수색을 받고 피검, 울산서에서 동래서로 이관되어 심문을 받았다.
1929년(22세) 2월, 도일(渡日), 동경제일외국어학원에 1년간 수학, 일본문학과 서양문학을 탐독하고, 1930년(23세) 동경 조도전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 입학한다. 1931년(24세) 조선인 유학생회에서 발간하던 <학지광(學之光)>편집에 참가. <조선시단>, <신계단> 등에 시와 단편소설 발표하고, 이때 발표된 단편소설「구제사업」은 작품제목만 실리고 내용은 전부 삭제 당한다. 4월, 장녀 복선(福先) 출생.
1932년(25세) 일본서 귀향. 양산 농민봉기사건에 관련되어 피검도기, 9월에 학업을 중단함. 단편소설 「그물」을 <문학건설>에 발표함. 1933년(26세) 10월, 남해공립보통학교 교원 취임. 이때부터 농민문학에 뜻을 둔다. 1935년(28세) 2월, 차녀 복윤(福允) 출생. 1936년(29세) 1월, 단편소설「사하촌」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옥심이」를 <조선일보>에 연재 발표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하게 된다.
1937년(30세) 7월, 중일전쟁 일어남.「항진기」를 <조선일보>에 연재 발표함. 7월, 장남 남재(南宰) 출생. 1939년(32세) 남해군 남명南明 공립보통학교로 전근을 간다. 1940년(33세) 「낙일홍」,「추산당과 곁사람들」,「월광한」 등을 발표함. 3월, 교원직을 사직하고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인수하여 동래로 이사함. 지국일에 전념하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된다. 8월, <동아일보> 폐간됨. 이 시기부터 붓을 꺾고, 경남도청 상공과 산하 면포조합 서기로 취직하여 해방될 때까지 근무함.
1941년(34세) 11월, 차남 충(充) 출생. 1944년(37세) 사녀 복연(福延) 출생.
3.요산의 사진들, 동래고등학교시절과 남해 남명학교 교사시절(위), 부산대학교교수시절과 요산문학상시상식(아래)
1945년(38세) 8월 12일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된 사람들에 대한 위해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일시 구포 지인댁으로 피신함. 8.15해방과 더불어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 문화부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신고송과 함께「희망자」라는 연극단을 만들어 공연하는 한편 부산 동래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함. <민주신보>논설위원을 지낸다. 11월, 막내딸 銀淑 출생.
1946년(39세) 문학가동맹 및 부산예련위원회 회장 및 문화단체총연합회 경남지부 부지부장을 맡았으나 사상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중앙으로부터 비판받았다고 함.
1947년(40세) 부산중학교 교사로 취임함. 1949년(42세) 부산대학교에 출강함. 경남 중등교사 자격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1950년(43세) 부산대학교 조교수로 발령받음. 6.25가 발생하고 가족들 분산되었다.
1951년(44세) 청탁에 의하여 이시영 옹의 약전 「성제소전(省齊小傳)」을 집필함. 1954년(47세) 교육공무원법 개정에 의하여 부산대학교 강사로 전락됨. 1955년(48세) 3월, 교수자격심사위원회로부터 조교수 자격을 인정받음. 7월 부교수로 승진함. 1956년(49세) 창작집 「낙일홍」 출간한다.
4.요산 김정한의 문학비
1958년(51세) 경상남도 도지(道誌) 편찬위원에 위촉됨. 1959년(52세) 제3회 부산시문화상(문학상) 수상함. <부산일보>논설 집필. 칼럼, 수필 등 다수 발표함. 경상남도 지명 제정위원에 위촉됨. 1960년(53세) 4.19혁명 일어남. 5월부터 부산대학교 문리대 문학부장으로서 학장 일을 맡아 봄. 1961년(54세) 5.16으로 6월 학교에서 물러 남. <부산일보>상임논설위원이 된다.
1963년(56세) 9월부터 부산대학교에 출강함. 1965년(59세) 부산대학교 전임강사로 복직함. 11월 조교수로 승진함. 1966년(59세) 10월 「모래톱 이야기」로 문단에 공식 복귀함.「한국의 문학 센티멘탈리티」와「고시조에 반영된 농민」을 「인생론전집」(박영사)과 부산대학교 「문학 대학보」에 각각 발표함. 1967년(60세) 한국문인협회 및 예총 부산지부장으로 취임한다. 이후 71년까지 왕성하게 작품 발표한다.
1969년(62세) 부산대학교 부교수로 환원됨. 중편「수라도」로 제6회 한국문학상 수상함. 1971년(64세) 제2창작집 「인간단지」(한얼문고) 간행됨. 11월, 제3회 문화예술상 수상함. 1972년(65세) 전국 지방국립대학교 교수협의회연합회 회장에 피선됨. 1973년(66세) 문고판 「수라도, 인간단지」(삼성출판사) 간행됨. 1974년(67세) 부산대학교를 정년퇴직함. 「김정한소설선집」(창작과 비평사)간행됨. 만해문학상 심사위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 지낸다.
1975년(68세) 문고판 「수라도」(삼중당) 간행됨. 1976년(69세) 한국 엠네스트(국제사면위원회)위원. 문고판선집「모래톱 이야기」(범우사) 간행. 「김정한소설 선집」 재판이 「제3병동」으로 개제되어 나옴. 10월 문화훈장(은관)을 수상한다. 1977년(70세) 한국 엠네스트 고문. 문고판 「사밧재」와 「인간단지」(동서출판사) 간행됨. 장편소설 「삼별초」(민족문화대계 9, 동화출판공사)를 발표함. 1978년(71세) 수필집 「낙동강의 파숫군」(한길사) 간행됨. 1983년(76세) 「제3병동」 5판이 「김정한소설선집」으로 개제, 증보되어 간행된다.
1985년(78세) 5.7문학협의회 고문 맡음. 1987년(80세)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회장 맡음. 1992년(85세) 폐기종으로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 낙상하여 대퇴부 골절로 석달반 동안 입원, 입원 중 카톨릭 영세(영세명 요셉). 1994년(87세) 심산상 수상. 1996년(89세) 11월 28일 오후 3시 30분 타계, 부산 남천성당에서 사회장, 신불산 공원묘지에 영면하신다.
5.요산문학관, 요산의 생가(좌)와 요산문학관이 있다. 눈이 내린 요산문학관은 참 아름답다. 선생의 정신이 있어 역설적으로 눈이 더욱 따뜻하다.
*사하이야기
이 소설은 사찰 소유의 전답을 벌어 살아가는 사하촌 소작농민들의 빈궁과 삶의 고통을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의 무대가 되고 있는 사하촌의 농민들은 절대적인 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사찰의 횡포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세 가지의 고통이 늘 함께 한다. 첫째는 사찰 본래의 권능과 지위를 잃고 오히려 권력과 결탁하여 농민들을 착취하는 타락한 절과 승려들의 횡포, 둘째로는 일제의 억압과 강압적인 수탈, 그리고 셋째로는 운명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가뭄이라는 자연의 재난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의 시련 가운데 자연의 재난인 가뭄은 농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극복한다. 그리고 일제의 억압과 착취에 대해서도 농민들은 이를 악물고 견딘다. 이들에게 가장 혹독한 것은 동족의 입장이면서도 일제의 권력에 빌붙어 농민을 착취하는 사찰의 폭거이다. 이 소설은 대표적인 일제하 농민소설의 하나이다. 특히 카프 해체 이후 지주와 소작 관계의 대립을 다룬 작품이 농민소설에서 거의 사라지게 된 다음에 발표된 작품이라 문학사적 의의가 더욱 크다. 1930년대 초반의 농민소설에서 볼 수 있는 긍정적 주인공의 형상화나 낙관적 전망은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강도 높은 노동과 척박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여유와 낙천적인 세계관을 잃지 않는 농민들을 형상화했다. 단편이면서도 단선적 구성으로 전개되지 않고, 농민들의 삶의 단면을 드러내는 일화 중심으로 엮어나가는 특이한 구성방식을 택했다.
*모래톱 이야기
작가가 25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이다. 일제시대부터 낙동강하류에서 소작을 하는 농민들의 애환을 그린 작품. 김정한의 소설들은 주로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한 농민들과 그 주인인 지주와의 문제들을 파헤친다. 이러한 그의 농민 소설들은 소작인과 지주의 대립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 1930년대의 작품들과는 달리 소작인의 삶과 아픔 자체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다. 건우와 할아버지인 갈밭새 영감 그리고 윤춘삼 씨에게는 그들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가슴 속에 땅에 대한 원한이 깊이 서려 있다. 한편에는 이러한 분노를, 또 다른 한편에는 "없는 놈이 할 수 있나. 그저 이래 죽고 저래 죽는 기지 머!"와 같은, 삶에 대한 절망과 한탄을 동시에 머금고 있는 이들이 그들이다. 작품 후반부에는 작자의 현실에 대한 저항 정신과 고발정신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조마이섬이라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비뚤어진 시대상에 항거하고, 서민의 고난을 증언한 작품이다. '모래톱'을 휩쓴 홍수의 와중에서 그 섬을 구해내기 위하여 유력자가 만든 엉터리 둑을 파괴한 행동, 이를 저지하려는 유력자의 앞잡이를 살해한 갈밭새 영감의 저항은 부당하게 수탈당하고 억울하게 짓눌린 삶을 되찾으려는 행위로서 '자기희생을 통한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내 땅을 부당하게 빼앗고 섬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려는 유력자(有力者)에게 저항하는 한 농민의 처절한 투쟁을 통하여 비참한 농촌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옥심이
김정한의 초기 작품에는 항상 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범어사에서의 경험이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의 문학에서 불교는 당대 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알레고리로 작용한다. 그리고 「추산당과 곁 사람들」,「묵은 자장가」등의 초기 작품은 주로 사찰과 소작인의 삶이 등장하고 있어, 범어사에서의 체험이 바탕에 깔려있다.
*수라도
한말(韓末)부터 8.15광복 직후에 이르는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하여 허진사댁의 가족사와 한민족의 수난사가 실감 있게 표현된다. 시할아버지 허진사는 한일합방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서간도(西間島)에서 유골로 돌아오고, 시동생 밀양양반은 3.1운동 때 일제(日帝)에 죽임을 당하고, 일제에 반항해 온 시아버지 오봉선생은 고등계 형사의 미행을 당하다가 태평양전쟁이 고비에 다다를 무렵 이른바 한산도사건이라는 애국지사 박해사건에 걸려 갖은 고초를 겪어 그 여독으로 일찍 타계한다. 한편 일본에 건너가 대학을 다니던 아들은 학병을 피해 숨어 다녀야 했고, 집안일을 도우며 수양딸 구실을 하던 옥이마저 전쟁 말기에 여자정신대로 끌려갈 뻔 한다. 6남매의 어머니로 며느리와 손자를 거느리게 된 수난의 여인상 가야부인은 8.15광복을 맞이하고도 신통한 일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이름 없는 민중의 항거정신을 뚜렷이 부각시킨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화제리
소설「수라도」의 주 무대인 원동면 화제리 입구의 모습이다. 처조모를 모델로 했다는 작가의 말과 더불어 소설에 재현된 공간이 실제 공간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화제리 일대는 요산 소설 중 가장 명확하게 현존하는 작품현장이다.
*뒷기미나루
뒷기미는 낙동철교 부근에 있었던 조창 터에서 보았을 때 뒤에 있는 개울과 산, '뒷개울의'라는 뜻이다. 고기 잡는 배라도 매여 있어 그래도 이곳이 나루터였음을 간신히 생각하게 한다.
*사밧제
세계 2차 대전에 나가는 학도병들과 그들을 인솔해 가는 순사들 그리고 시골 노인과 시골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있고, 버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사건으로 인해 결말이 지어진다. 이 노인은 뱀술을 들고 버스를 타서 누이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때 그 버스는 학도병들을 인솔해 가는 버스였고, 거기서 순사가 자꾸 노인에게 말을 걸면서 귀찮게 한다. 노인의 말 실수로 순사가 뱀술을 뺏어 학도병들과 나눠 마신다. 갑자기 버스가 고장 나 노인은 버스에 앉아서 기다리고 순사와 학도병들은 나가서 버스를 민다. 노인은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누이 집까지 온다. 그때 누이집 근처 술집에서 버스에서 보았던 그 사람들을 만나, 이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듣고 있을 때, 일본순사들이 그들을 조사하러 온다. 노인과 한 청년이 몰래 빠져나와 동행을 하면서 끝이 난다.
*독매
외따로 떨어져 있는 조그만 산을 의미하는 순우리말, 고립촌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점이'라는 농촌주부의 이야기를 통해 국유지 불하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소설이다.
6.요산문학관의 요산 동상과 그의 문학전집
그의 문학은 낙동강을 배경으로 수탈과 억압에서 살아남고자하는 민중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삶의 의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권력자와 가진 자들의 이기심과 탐욕과 욕망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일까? 가난한 민중들의 아픔을 연민과 온몸으로 함께 하고자 한 그의 삶과 문학은 닮아있다.
요산 김정환은 자신의 시대와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남기고자 한 것은 ‘지역을 사랑하고 지역민들을 사랑하고 지역을 위해서 사람답게 살아라’는 말씀을 남기고자 하신 것은 아닐까? 선생께서 문학 속에 남기고자 하신 것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람답게 살아라’란 말씀은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을 떠올리게 된다. 결국 우리가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첫댓글 6월독서토론..<못난 것도 힘이 된다>의 배경자료입니다.
지은이 이상석님이 존경하는 스승이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