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이었다. '개창'이라 불리는 선생이 있었다. 걸렸다 하면 최소한 기절 아니면 혼절 수준으로 만드는 무서운 체육선생이었다.
어느 날, 나는 교문 앞에서 두발불량으로 개창한테 걸리고 말았다. 개창은 쥐고 있던 '바리캉'으로 사정없이 내 머리를 밀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마치 내 몸 속의 피가 툭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교 후 이발소로 향하는데 자꾸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발소에 들어서자마자 소리쳤을 것이다.
반란군은 이제야 울지 않는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울음을 멈춘 게 아니었어요
그들은 머리카락으로 몰래 울기 시작했거든요
스님처럼 빡빡머리로 깎아주세요!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내 의중을 재확인했다. 내가 어금니를 깨물자 이발사는 마지못해 작업을 서둘렀다.
머리를 다 자르고 면도만 남겨놓았을 때였다. 개창이 이곳에 나타날 줄이야. 개창은 나를 보자마자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총명한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리갈겼다.
이 자식, 진즉에 이렇게 하고 다니지. 아주 보기 좋구먼!
그러고는 내 머리통을 싸쥔 채 뒤흔들더니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게 아닌가.
헌데 더 가관인 것은 이발소 아저씨가 내 양해도 없이 개창의 머리부터 손질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여기는 교실이 아니므로 먼저 온 손님이 우선이다. 헌데 이 무슨 상도가 이 따위란 말인가. 꼭지가 돌아 사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이런 내 평생 오지 않을 거라고, 발길을 하면 그땐 개××라고.
지금도 그런 저항정신을 가졌던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왜냐면 세월이 흐르면서 갖가지 결심이 '무너지고 몽개지고 뽀개졌지만' 아직도 이 맹세만큼은 지키려고 노력 중이니까.
물론 그 길이 시련과 고난의 가시밭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단골로 가던 미용실 주인이 김치를 찢던 손으로 내 비범한 머리를 자르는 통에 발을 끊기도 했고, 머리털 대신 살점을 자르는 바람에 마음을 접었으며, 심지어 담배 냄새를 너무 심하게 풍기는 바람에 돌아서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꽤 오래 단골이 된 곳이 몇 있긴 했다.
신혼 초, 아내가 운영하던 가게 옆의 미용실이 그 중의 한 곳이다. 솔로일 때는 헤어스타일은 혼자 만족하면 끝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면 두 사람이 동시에 만족해야 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미적 안목이 출중한 아내에게 그 선택권을 넘겨주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내의 추천서를 들고 그 미용실을 찾았다. 주인이 예뻐서일까. 목소리도 예쁘게 냈고, 머리도 예쁘게 깎았다.
헌데 어느 날, 우연하게 그 미용실에서 나오는 직장 상사를 목격했다. 아니, 저 양반이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상사의 집은 꽤나 먼 곳이었다. 헌데 이곳까지 그깟 머리털 하나 자르려고 왔단 말인가. 그도 나처럼 청춘의 아픔이 있단 말인가.
문제는 아내는 그 상사를 나보다 더 잘 꿰고 있다는 거였다. 이곳에 자주 오며, 주인 마담과는 데이트도 하는 애인 사이란 거였다.
이후 나는 과감하게 발을 끊었다. 아이 둘의 유부남과 놀아나는 여자의 손에 내 신성한 머리를 내맡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세월이 흘러 상사는 퇴직했고, 나 또한 그때의 상사 나이만큼 먹었다. 그런 탓인가. 이상하게 그 상사가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마누라가 아프면 골치가 아프고 애인이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고 해도, 머리털 빠지는 중년이 되면 솔직히 가슴이라도 아파봤으면 하는 게 '로망'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나는 신랑초보였다. 그러니 어찌 용납할 수 있으랴.
아무튼 그 일이 있은 후, 또다시 미용실을 찾아 헤매는 수난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미용실을 고르고 자시고 하는 게 성가셨다.
하루는 아파트 근처의 상가로 향했다. 다행히 상가미용실 여주인의 수수한 외모는 연애질 따위는 하지 않을 듯했다. 머리를 자르고 집에 왔을 때, 아내의 반응은 의외였다.
어머, 생각보다 예쁘게 깎았네? 그 말에 오호라, 이제 나의 방황도 마침표를 찍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곳도 오래가진 못했다. 어느 일요일, 오줌보가 탱탱하도록 늦잠을 자고 미용실에 갔더니 이게 웬걸? 문은 철통같이 닫혀 있고 "주일은 쉽니다" 하는 문구만 나붙어 있는 게 아닌가. 이건 마치, "일요일에는 절대 오지 마세요!" 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미용은 서비스업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더군다나 남자가 머리를 자르는 것은 주말에 할 수 있는 여가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일까지 요일을 의식하며 의식 치르듯이 한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좋다, 당신은 당신 뜻대로, 나는 나의 뜻대로!
이런 결정을 부추긴 데에는 근처에 또 하나의 미용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바로 나를 최장수 단골로 등극하게 만든 '백조헤어숍'이다.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이 아줌마도 비범을 넘어서지 못한 평범한 솜씨를 지녔겠구나,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백조를 찾게 된 것은 그녀의 활달한 성격 덕이었다. 그녀의 솔직하고 쾌활한 성격은, 나로 하여금 '줌마'로 부르게 만들었고, 아들 녀석까지 고객으로 만들게 했으니까.
세상을 살다보면 친한 것이 화를 자초할 때가 있다. 줌마하고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 한번은 미용실을 찾았더니, 쉬는 날이 아닌데도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면 그녀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어 상호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냈다.
감기가 콜록, 심하게 달라붙었나 봐요, 어제부터 약 먹고 조리 중인데 콜록, 당최 몸이 낫질 않네요.
코 막힌 소리에 간간히 기침까지 하면서 하는 말이었다. 정말 몹시 아픈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병마와 싸우는 그녀를 응원하듯 흰소리를 치고 말았다. 그럼 후딱 나으세요, 그래야 정신적 애인을 만날 거 아닙니까? 고마워요, 콜록. 무슨 일이 있어도 콜록, 내일은 나갈게요.
다음 날, 백조를 찾았다. 약속하지 않았으면 오늘도 못 나올 뻔했어요. 그녀는 아직 여파가 남았는지 찡찡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머리를 자른 다음날, 사태가 터졌다. 내 몸이 오슬오슬 떨려오는 거였다 아, 이 일은 어쩐담. 내가 몸이 안 좋다는 걸 눈치 챈 아내가 말했다. 아니, 멀쩡한 사람이 어디서 감기를 옮아온 거야? 아내의 말에 나는 엉뚱한 대꾸를 해야 했다. 간밤에 당신을 너무 오래 안은 게 무리였나 봐.
줌마와 십년 가까이 인연을 맺은 것은 아이엠에프가 한몫 톡톡히 했다. 우리 가족은 그놈에게 사정없이 옆구리를 쥐어 박혀 이사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그런 영향 탓인지 내 머리카락도 급격히 기운을 잃어갔다. 다행인 것은 아내의 끈질긴 재테크 덕분에 이삿날을 앞당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사를 앞둔 주말, 나는 그녀의 가게를 찾았다. 줌마는 내 일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어쩜, 좋으시겠다. 넓고 좋은 집을 다 장만하시고. 어디요, 다른 유부남 나이에 비해 늦은 거죠. 암튼 이사 갔다고 발 뚝, 끊는 건 아니죠? 당근이죠, 몸은 새집에, 머리는 여기서. 그럼 됐나요?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약속대로 이사를 하고서도 때가 되면 줌마의 미용실을 찾았다.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종종 우연히 만나곤 하던 기회가 없어진 것을 아쉬워했다. 그래도 좋았다.
헌데 어느 날, 미용실에 갔더니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젊은 아가씨가 가게에 앉아 있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가게를 내놓을까 생각 중이란 말을 그냥 흘려들었음을.
"어떤 마을이 있었대요. 그 마을사람들은 반란으로 왕이 죽자 모두 슬퍼했어요. 그러자 이 사실을 안 반란군들이 달려와 운 사람들을 죽였어요. 심지어 눈에 물기만 맺혀도 죽였지요. 그러니 슬퍼도 울지 못했어요. 반란군은 이제야 울지 않는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그들은 절대 울음을 멈춘 게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머리카락으로 몰래 울기 시작했거든요."
그녀는 기억할까. 내가 들려준 소설 속 이야기를. 그녀를 생각하면 내 머리카락 또한 축축하게 젖는 기분이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백조헤어숍을 찾지 않았다. 그게 그녀를 위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예절이 또 이렇게 미용실을 찾아 헤매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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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섭 소설가 |
◇약력=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02년 제5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소설집 '슬픔의 두께' '그곳에는 눈물들이 모인다' '바닷가 그 집에서, 이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