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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개
진고개 (1072m)
진고개는 비만 오면 땅이 질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기도 하고, 또 고개가 길어서 긴고개라 하다가 진고개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 진고개를 지난다고 하여 진고개로라고 이름하였다.
진고개로는 백두대간 줄기의 오대산 국립공원 구역 내에 위치한 동대산[1,434m]과 노인봉[1338m] 사이에 있는 높은 고개인 진고개[1,072m]를 넘어 영서의 진부, 평창 방면을 연결하는 국도 6호선의 일부로 개설되었다.
진고개로는 정상 휴게소에서 송천 약수터, 부연동 입구 삼거리, 소금강 입구 삼거리를 지나 연곡 사거리 동해 대로에 이르는 도로이다. 송천 약수터를 지나 부연동 입구 삼거리에서 국도 59호선[부연동길]과 연결되며, 소금강 입구 교차로에서 소금강 길과 연결된다. 연곡 사거리에서는 연주로 및 동해 대로와 연결된다. 진고개로는 진고개 정상에서 연곡 방향 송천 약수터 구간은 급경사 커브길이다.
이 구간은 해발 700m 이상 고지대를 지나기 때문에 짙은 안개도 자주 발생한다. 도로 곳곳에 가드레일과 미끄럼 방지 포장, 과속 방지턱, 교통 안내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올 때 이 구간은 통행이 전면 제한된다. 송천 약수터에서 연곡 삼거리에 이르는 구간은 도로 주변에 펜션,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여름철 이 구간 도로는 노견에 차를 주차하고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최근 이 구간의 도로를 확장하고 직선화하는 공사를 시행 중이다.
진고개로는 오대산과 연곡, 주문진을 연결하는 관문 도로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교통량이 많고, 특히 봄가을에는 등산객 차량, 여름에는 해수욕객 차량의 통행량이 매우 많다. 진고개로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이 인근에 있는 소금강을 찾는 관광객이다. 소금강에는 무릉 계곡, 십자소, 명경대, 식당암, 구룡 폭포, 군자 폭포, 만물상 등이 있고, 신라 마의 태자(麻衣太子)가 신라 부흥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전해 오는 금강 산성[아미 산성] 등 많은 명승이 있다. 연곡, 주문진 지역을 방문한 사람들이 영동 고속 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자주 이용하는 노선이 연곡-소금강-진고개-오대산-영동 고속 도로 노선이다.
진고개는 대동여지도와 기타 문헌에 니현( 泥峴) 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긴고개”가 “진고개”로 변음 되었다가 니현 (진흙(泥)과 재현(峴)=泥峴)으로 한자화 된 것으로 보인다.(긴 고개를 (長嶺)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어떤이들은 긴고개는 고개가 길다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진고개는 땅이 질퍽거려 걸어넘기 힘들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거리 : 진고개 1.8km - 동대산 2.7km 차돌백이 4.0km - 두로봉'
동대산
동대산 東臺山 (1434m)
오대산의 오대(五臺)란 주봉인 비로봉(1,563.4m)을 비롯하여 호령봉(1,560m), 상왕봉(1,491m),
두로봉 , 동대산 이렇게 다섯 봉우리를 일컫는 말이다. 이 다섯 봉우리의 정상이 모두 평평한 대(臺)를 이루고 있어
오대라고 한다. 동쪽 사면의 수계가 연곡천의 수원을, 서남쪽 사면의 수계가 오대천·송천의 수원을 이룬다.
오대산국립공원 권역에 포함되어 관광지로 보호·관리되고 있으며, 서쪽으로 월정사, 동쪽으로 소금강과 인접해 있다.
오대산을 이루는 다섯 봉우리 중 하나이다.
태백산맥 줄기인 해안산맥에 속한 산으로 북쪽에 두로봉(頭老峰, 1,422m), 서쪽에 서대산(西臺山)·호령봉(虎嶺峰, 1,042m), 동쪽에 노인봉(老人峰, 1,338m) 등이 솟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오대산월정사사적기(五臺山月精寺史蹟記)』 등에 의하면
오대산은 동쪽의 만월봉, 서쪽의 장령봉, 남쪽의 기린봉, 북쪽의 상왕봉, 중앙의 지로봉 등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봉우리마다 편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쪽의 만월봉은 오늘날 동대산으로 불린다.
동대산과 동쪽의 노인봉은 백악기에 생성된 북동-남서 방향의 대규모 주향이동단층인 월정사단층으로 구분된다. 월정사단층의 동쪽은 쥐라기의 흑운모화강암이 분포하고, 서쪽으로 동대산 일대는 선캠브리아기의 혼성편마암이 분포한다. 혼성편마암은 주로 우흑질대와 우백질대가 공존하는 호상구조가 우세한 호상편마암과 고온의 변성작용으로 암석이 용융된 화강암질편마암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혼성구조가 특징적이다.
동대산 일대의 산계 발달 양상은 백두대간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동대산을 거친 후 동쪽으로 이동하여 진고개, 노인봉(1338.1m), 소황병산(1338m)과 매봉(1173.4m)를 거쳐 다시 남으로 진로를 바꾼다. 노인봉에서 북으로 다시 분지되는 산릉은 백마봉으로 이어지고 매봉 부근에서 북으로 분지된 산릉은 천마봉(999.4m)으로 이어진다.
동대산의 동쪽 사면으로 흐르는 수계(水系)는 연곡천(連谷川), 서남쪽 사면으로 흐르는 수계는 남한강의 상류인 오대천(五臺川)과 송천(松川)의 수원(水源)을 이룬다.
거리 : 진고개 1.8km - 동대산 2.7km 차돌백이 - 두로봉4.0km
차돌백이
신선목이
두로봉
두로봉 (1422m)
두로봉은 한강기맥의 시작점으로 오대산, 계방산 등 영서내륙을 지나 남한강 북한강을 양분하는 남양주 양수리까지 160km를 내려와 멈춘다.
강원도 평창군 珍富面과 홍천군 內面 및 강릉시 連谷面 사이에 있는 산. 높이 1,422m.毘盧峰, 象王峰, 虎嶺峰, 東臺山 등과 함께 태백산맥의 지맥을 이루는 五臺山脈 중에 솟아 있는 고봉이다.
산은 동사면을 흐르는 연곡천(連谷川)과 서사면을 흐르는 홍천강의 발원지를 이룬다. 상원사(上院寺)와 미륵암은 계곡과 더불어 명승지를 이루는데, 최근 오대산국립공원에 포함되었다.
[두로령] 1310m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진부면의 경계. 비포장도로이지만 명색이 446번 지방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신배령
신배령新梨嶺 (1173m)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강릉시 연곡면 삼산동 부연동을 이어주는 고개이다.
명개리 사람들이 신배령을 넘어오면 부연동사람들과 합류하여 전후치(앞과 뒤가 같다고 하여 “전후치”라 한다)고개를 넘어 주문진으로 장을 보러 다니던 고개로 신맛이 나는 돌배가 많아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신배령은 연곡면 삼산 3리와 홍천군 내면 조개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예부터 맛이 신 돌배가 많이 자생하여 신배령이라 불리운다.
이 지역의 역사를 되짚어보니 갑오농민항쟁의 피어린 역사가 되새겨진다.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대접주였던 차기석(車基錫)은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한 강원지역의 뛰어난 동학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풍암리 전투에서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의 최후의 전투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차기석은 관동대접주 이원팔,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과 함께 1893년의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고,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있었음)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1894년 농민항쟁에서 세를 떨쳤다. 홍천군 서석지방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한강기맥의 구간 구분지점인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쪽으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다. 토벌군은 신배령·응복산·응복령·약수산 등 험산준령을 넘어 봉평에서 내면에 이르는 보래령·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응복령을 장악하고 협공했고,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결국 생포 당하고 강릉으로 압송되어 효수 당했다.
농민군 수천명 조직 '反봉건·침략' 항쟁
1894년 갑오농민항쟁은 봉건제도와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침략반봉건 투쟁으로, 봉건제를 타도하여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인 동시에 반식민지 사회로의 길에서 이탈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즉, 그 이전까지 진행되어가던 봉건제 해체의 과정이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에 의해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강화되자 봉건지배층과 피지배농민층 사이의 모순이 첨예화됨으로써 폭발한 농민항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민족의 자주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열고자 한 내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갑오농민항쟁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894년 농민항쟁에서 보여준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영웅적인 반침략 반봉건투쟁은 봉건지배층과 일본침략자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애국적 기개와 민족적 단결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특히 군사적으로 우세한 일본 침략자에게 맞서 총알이 비 오듯이 퍼붓는데도 불구하고 공격을 계속했던 농민군들의 용감성과 희생정신은 그 후 우리 민족의 반침략 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갑오농민항쟁에서 차기석(車基錫)은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한 강원지역의 뛰어난 동학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풍암리 전투에서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함으로서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의 최후의 전투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강원도 지역에도 일찍이 동학이 포교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제우에 의해서 홍천 북방면 지역에서 포교활동이 있었고,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곧은골 지역에도 동학당이 설치되어 몰래 동학이 포교되고 있었다. 또 최제우가 체포되고 동학이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강원도로 피해 온 많은 동학교도들에 의하여 강원도 각지에도 널리 동학이 포교되었다.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동학의 조직과 활동이 어떠했는지 잘 드러나지 않으나 홍천대접주 차기석이 관동대접주 이원팔,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과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대접주로 불리워지던 차기석은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있었음)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1894년 농민항쟁에서 세를 떨쳤다. 그는 9월 말경에 군대를 일으켜 창고를 불지르고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모아, 포목·어곽·화우(貨羽) 등 상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물자를 충당하는 등 세력을 모았다.
한편 내면에서 가까운 봉평면에서도 차기석의 영향아래 윤태열·정창해·조원중·정헌심 등이 백성을 결집하여 군대를 이루어 창사 곁에 목책을 세우고 각 촌락의 집집마다 좁쌀 6말과 미투리 1쌍씩을 거두어들이는 등 농민항쟁을 준비하였다.
이렇게 농민항쟁을 준비한 차기석은 박종백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10월13일 밤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東倉)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동창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중요한 사창으로, 세곡을 거둬 보관해 두었다가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면 뗏목에 실어 한강을 통해 서울로 보내던 곳이었다.
동창을 치고 보은 장내로 향하던 차기석은 동창이 농민군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경기도에서 홍천으로 들어온 농민군 토벌대 지평현감 맹영재와 10월 21일 장야평에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장비의 열세로 3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서석으로 후퇴하였다.
서석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10월 22일 홍천 서석 풍암리 진등위에 진을 친 차기석은 농민군을 이끌고 맹영재의 토벌군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농민군은 총이 모자라 버드나무를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을 하기도 했고, 주문을 외우면 토벌군의 총에서 총탄이 아니라 빨간 물이 흘러나온다고 하면서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식무기로 무장을 하고 경기도 일대에서 농민군 토벌에 맹위를 떨치고 있던 맹영재와 접전을 벌인 차기석의 농민군은 많은 희생은 치르었다. 이 날 희생당한 농민군과 동네사람들의 수는 800여명에서 1,000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있는 `자작고개'라는 이름도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고 해서, 또 이곳에서 싸우다 죽은 농민군들을 묻은 시체가 썩어 땅이 내려앉으면서 잦아진 고개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자작고개를 중심으로 진퇴를 거듭하며 토벌대에 맞섰던 차기석은 홍천군 내면으로 퇴각하여 다시 세를 모으기 위해 기린·양양·간성의 농민군에게 봉평을 치자는 통 문을 보내었다. 그러자 봉평의 농민군을 토벌한 포군대장 강위서가 11월 6일 토벌군을 이끌고 내면 1리로 들어왔다.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차기석은 산위에 매복해 있다가 밤중에 강위서 토벌대를 습격하여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강위서의 포군 부대는 8명의 부상자를 이끌고 패배한 채 내면에서 쫓겨났고, 그 후 전열을 정비한 토벌군은 각 지역의 관군과 연합작전을 펴면서 사방에서 농민군을 조여들었다.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계방산과 오대산 기슭의 자운리, 흥정리와 계방천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잡은 원당리·청두리·약수포 등지에서 차기석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농민군을 이끌고 토벌군을 맞아 치열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청두리에서 약수포까지는 토벌군도 70리를 벽을 기어오르며 전진하였다고 할 정도로 험난한 곳이다. 이 계곡은 구룡령에서 오대산 두루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를 이루어 양양·강릉의 영동과의 경계선이 되며, 그 사이에 모두 해발 1,000m가 넘는 신배령·응복산·응복령·약수산 등 험산준령이 놓여있다. 잎이 무성한 계절이라면 험난한 이곳 지형이 유격투쟁을 벌이기 적합할 것이나 활엽수의 잎이 모두 지고 눈이 쌓이기 시작한 11월 중순이어서 사방에서 협공하는 토벌군을 맞아 농민군이 싸우기에는 매우 불리하였다. 봉평에서 내면에 이르는 보래령·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응복령이 토벌군에게 장악된 상태에서 협공을 당한 농민군은 토벌군 뿐 아니라 지형에도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11월 11일, 내면 자운의 농민군은 보래령을 넘어온 봉평 포군대장 강위서와 60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합세한 홍천의 허경의 공격을 받아 접주 위승국 형제와 접사 심성숙, 박군오, 정창호 등 17명이 포살 되었다.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12일, 운두령을 넘어온 강릉의 박동의와 양양의 이석범이 이끄는 토벌군의 협공을 받아 생포되었다. 이때 성찰 오덕현, 집강 박성원, 지덕화 3인은 포살 당했다.
13일에는 내면 청두리에서 홍천의 농민군 지도자 권성오, 권수청 등 12명이 포살 당하였다. 약수포 쪽으로 쫓겨간 500여 명의 농민군은 청두리 쪽에서 추격한 토벌대와 신배령을 넘어온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 응봉령을 넘어 온 이석범의 부종 김익제의 토벌군에게 세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여 접주 김치실 등 11명이 포살 당하고 접사 박학조는 생포되었다. 농민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3처의 별당과 37채의 집도 불태워졌다. 자운·흥정·신흥 등의 농민군도 강위서가 이끄는 토벌군에 밀리면서 임정호 등 38명이 포살 당했다.
차기석은 생포된 뒤 강릉으로 압송되어 11월 22일 박학조와 함께 강릉 교장에서 효수 당하므로 일생을 마쳤다. 강원동학군의 지도자인 차기석이 이끌던 동학혁명군의 전투는 강원동학혁명군 전투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엄찬호(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문학박사)
만월봉
만월봉 滿月峰 (1280.9m)
약200년전 조선조 말 어느 시인이 이 봉을 바라보고 시를 읊었는데 시중에 바다에 솟은 달이 온산에 비침으로 만월이 가득하다 하여 만월봉이라 한다.
- 소양강, 강원도 인제군과 춘천시를 남서류하는 강
길이 169.75㎞. 한강의 제2지류이며, 북한강의 제1지류이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 만월봉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며 계방천이라 불리다가 척천천·자운천·방대천 등을 합류하고 내린천이라 불린다.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에서 서화천이 흘러들며, 소양호를 이룬 뒤 춘천시 우두동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 건설된 소양강 댐은 다목적 댐이며,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서 인제읍까지 배가 운항하여 강원도 내륙산간지역의 교통로뿐만 아니라 설악산국립공원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유역 내에는 대승폭포·12선녀탕계곡·구성폭포·용소폭포·쌍룡폭포·황장폭포 등의 폭포와 백담사·청평사·봉정암·오세암·영시암 등의 명승 사찰이 있다. 유역의 연평균강수량은 1,100~1,200㎜이며, 강에는 어름치·열목이 등의 냉수성 어종을 비롯하여 쏘가리·뱀장어·메기·붕어·잉어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인제읍 합강리에서 뗏목을 타고 소양강, 북한강, 한강 본류를 따라 서울의 노량진까지 내려오면서 부른 〈합강리 뗏목아리랑〉이 전한다.
위치 : 두로봉 5.4km - 만월봉 - 응복산 1.5km
응복산
응복산鷹伏山 (1369.8m)
산의 모양이 매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매복산 또는 응복산이라고 함. 강원도 양양군 서면과 현북면, 홍천군 내면에 걸쳐 있는 산. 설악산과 오대산을 잇는 중간 지점에 있는 산으로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해당한다. 이 산에서 오대산 두로봉까지는 약 10km 정도로, 두로봉과 약수산·구룡령을 잇는 구간을 산행코스로 잡을 수도 있다.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한계령과 대관령의 중간에 있어 미천골·통마람골·약수골·합실골 등 사방에 골짜기가 발달해 있다. 산행은 명개리에서 구룡령을 넘어 갈천으로 이어지는 56번 국도가 포장됨에 따라 구룡령을 기점으로 하는 당일 산행이 가능해졌으나, 미천골을 따라 불바라기약수까지 다녀오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산행 시간은 구룡령에서 정상에 오른 뒤 통마람골을 따라 약수동까지 가는 데 7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에는 주목 한 그루만이 있어 전망이 좋다. 주변에 708년(신라 성덕왕 7)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水墮寺)와 철분을 비롯한 유리탄산·불소·칼슘 등이 들어 있어 만성위장병과 고혈압·빈혈·당뇨 등에 효과가 있다는 삼봉약수터가 있다.
'708년(신라 선덕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와 철분을 비롯한 유리탄산, 불소, 칼슘 등이 들어있어 만성 위장병과 고혈압과 빈혈,당뇨등에 효과가 있다는 삼봉약수터가 있다
높이 1,360m이다. 설악산과 오대산을 잇는 중간 지점에 있는 산으로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해당한다.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한계령과 대관령의 중간에 있어 미천골·통마람골·약수골·합실골 등 사방에 골짜기가 발달해 있다. 산행은 명개리에서 구룡령을 넘어 갈천으로 이어지는 56번 국도가 포장됨에 따라 구룡령을 기점으로 하는 당일 산행이 가능해졌으나, 미천골을 따라 불바라기약수까지 다녀오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산행 시간은 구룡령에서 정상에 오른 뒤 통마람골을 따라 약수동까지 가는 데 7시간 정도 걸린다.'
마늘봉
마늘봉 1126m
약수산과 응복산의 한가운데 독립적인 하나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다. 마늘처럼 동그랗게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대간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 몇 안되는 우리말 이름이다. 규모가 작은 봉우리인데도 별도의 이름을 가진 것이 의외다. 남쪽으로 오대산의 비로봉과 상왕봉, 호령봉, 계방산 등이 건너다보인다. 북쪽계곡 1.5Km 지점에 유명한 불바라기약수가 있지만 내려서는 길은 마땅치 않다. 응복산 방향으로 10분 거리에 평평한 야영장과 샘터가 있다.
거리 : 응복산 1.93km - 마늘봉 - 약수산 3.4km - 구룡령 1.38km
약수산
약수산 (1306m)
위치 : 강원도 홍천군 내면 명개리
수종:주목.전나무. 분비나무. 구상나무. 종비나무.
약수산이란 이름은 흔히 명개리 약수라 불리는 이 산 남쪽 골짜기의 약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약수산의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淵源을 좇으니, 약수산에서 발원하는 미천골에는 불바라기약수(미천약수)가, 약수산과 갈전곡봉 사이 구룡령 계곡에는 갈천약수가 있다. 갈천이라는 이름은 칡뿌리로 허기를 달랠 때 냇가에 칡물이 떠날 날이 없다는 데서 유래했다. 「양양군지」에 함께 실린 오색약수에 눌려 늦게 알려졌지만, 양양 주민들은 이 약수를 더 쳐주는 편이란다. 예부터 내려온 갈천의 4가지 보물(葛川四寶)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치는 약수인데 약수가 솟는 너럭바위 주변은 용출되는 철분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어 쇳물 맛이 많이 나는 편이며 톡 쏘는 맛이 강하단다. 성분은 철분,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 칼륨, 망간 등으로 빈혈, 충치예방에 효과가 있는데 주민들은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강원도 홍천군 내면(內面)에 있는 산. 높이는 1,306m이다. 산이름은 남쪽 골짜기에 있는 명개약수에서 생겨났다고 전해지며, 명개약수 외에도 이 산에서 발원하는 미천골계곡에 불바라기약수(미천약수)가 있고, 갈전곡봉(葛田谷峰:1,204m)과의 사이에 있는 구룡령계곡에 갈천약수가 있다. 많은 용이 뒤엉켜 있는 것 같다고 하여 九龍嶺(1,100m)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개 동쪽에 솟아 있다.구룡령 너머 서쪽으로 갈전곡봉, 동남쪽으로는 응복산(鷹伏山:1,360m), 만월봉(1,279m)이 나란히 솟아 있어 약수산과 함께 종주하는 산행코스가 있다.
약수산에서 바라본 풍경
구룡령
구룡령(九龍嶺) 1013m
백두대간 구룡령은 북으로는 설악산과 남으로는 오대산에 이어지는 강원도의 영동(양양군)과 영서(홍천군)로 가르는 분수령이다.
구룡령은 일만골짜기와 일천봉우리가 일백이십여리 구절양장 고갯길을 이룬곳으로 마치 아홉마리 용이 서린 기상을 보이는 곳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양양군 서면 갈천리와 홍천군 내면 명개리를 넘는 고개로 해발1013m이다.
구룡령은 명개리와 갈천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아흔아홉 고개가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구룡령의 옛길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72년경으로 임산물과 자철광을 운반하기 위해 개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94년에 아스팔트 포장된 현재의 구룡령은 일제 강점기에 자원찬탈을 목적으로 개설 된 도로를 확포장 한 것으로 옛날 사람들이 넘나들던 옛 구룡령은 현재 샛령으로 불리는 곳이다.
신구룡령에는 동물이동통로가 있고 휴게소가 있었으나, 운영이 되지않아 산림청에서 인수하여"산림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설명
강원도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양양군 서면 갈천리 경계에 위치한 구룡령은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마치 용이 구불구불 기어오르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룡령은 높은 고도로 인하여 밝은 날에도 엷은 안개가 끼어 있으며 비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은 날에는 정상 부근에 짙은 안개로 시야를 가리는 일이 많다고 한다.
구룡령 정상주변으로 가을에는 단풍이 절정을 이루며 특히 봄철에는 철쭉꽃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백두대간 조침령에서 구룡령을 거쳐 진고개로 연결되는데 구룡령 옛길은 사람과 노새가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완만하게 이어져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광산이 개발되면서 일대 주민들이 강재로 징집되었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리
갈전곡봉 3.6km-구룡령 1.1km-약수산3.1km - 마늘봉 1.8km - 응복산
진고개 (1072m)
진고개는 비만 오면 땅이 질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기도 하고, 또 고개가 길어서 긴고개라 하다가 진고개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 진고개를 지난다고 하여 진고개로라고 이름하였다.
진고개로는 백두대간 줄기의 오대산 국립공원 구역 내에 위치한 동대산[1,434m]과 노인봉[1338m] 사이에 있는 높은 고개인 진고개[1,072m]를 넘어 영서의 진부, 평창 방면을 연결하는 국도 6호선의 일부로 개설되었다.
진고개로는 정상 휴게소에서 송천 약수터, 부연동 입구 삼거리, 소금강 입구 삼거리를 지나 연곡 사거리 동해 대로에 이르는 도로이다. 송천 약수터를 지나 부연동 입구 삼거리에서 국도 59호선[부연동길]과 연결되며, 소금강 입구 교차로에서 소금강 길과 연결된다. 연곡 사거리에서는 연주로 및 동해 대로와 연결된다. 진고개로는 진고개 정상에서 연곡 방향 송천 약수터 구간은 급경사 커브길이다.
이 구간은 해발 700m 이상 고지대를 지나기 때문에 짙은 안개도 자주 발생한다. 도로 곳곳에 가드레일과 미끄럼 방지 포장, 과속 방지턱, 교통 안내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올 때 이 구간은 통행이 전면 제한된다. 송천 약수터에서 연곡 삼거리에 이르는 구간은 도로 주변에 펜션,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여름철 이 구간 도로는 노견에 차를 주차하고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최근 이 구간의 도로를 확장하고 직선화하는 공사를 시행 중이다.
진고개로는 오대산과 연곡, 주문진을 연결하는 관문 도로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교통량이 많고, 특히 봄가을에는 등산객 차량, 여름에는 해수욕객 차량의 통행량이 매우 많다. 진고개로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이 인근에 있는 소금강을 찾는 관광객이다. 소금강에는 무릉 계곡, 십자소, 명경대, 식당암, 구룡 폭포, 군자 폭포, 만물상 등이 있고, 신라 마의 태자(麻衣太子)가 신라 부흥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전해 오는 금강 산성[아미 산성] 등 많은 명승이 있다. 연곡, 주문진 지역을 방문한 사람들이 영동 고속 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자주 이용하는 노선이 연곡-소금강-진고개-오대산-영동 고속 도로 노선이다.
진고개는 대동여지도와 기타 문헌에 니현( 泥峴) 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긴고개”가 “진고개”로 변음 되었다가 니현 (진흙(泥)과 재현(峴)=泥峴)으로 한자화 된 것으로 보인다.(긴 고개를 (長嶺)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어떤이들은 긴고개는 고개가 길다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진고개는 땅이 질퍽거려 걸어넘기 힘들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거리 : 진고개 1.8km - 동대산 2.7km 차돌백이 4.0km - 두로봉'
동대산 東臺山 (1434m)
오대산의 오대(五臺)란 주봉인 비로봉(1,563.4m)을 비롯하여 호령봉(1,560m), 상왕봉(1,491m),
두로봉 , 동대산 이렇게 다섯 봉우리를 일컫는 말이다. 이 다섯 봉우리의 정상이 모두 평평한 대(臺)를 이루고 있어
오대라고 한다. 동쪽 사면의 수계가 연곡천의 수원을, 서남쪽 사면의 수계가 오대천·송천의 수원을 이룬다.
오대산국립공원 권역에 포함되어 관광지로 보호·관리되고 있으며, 서쪽으로 월정사, 동쪽으로 소금강과 인접해 있다.
오대산을 이루는 다섯 봉우리 중 하나이다.
태백산맥 줄기인 해안산맥에 속한 산으로 북쪽에 두로봉(頭老峰, 1,422m), 서쪽에 서대산(西臺山)·호령봉(虎嶺峰, 1,042m), 동쪽에 노인봉(老人峰, 1,338m) 등이 솟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오대산월정사사적기(五臺山月精寺史蹟記)』 등에 의하면
오대산은 동쪽의 만월봉, 서쪽의 장령봉, 남쪽의 기린봉, 북쪽의 상왕봉, 중앙의 지로봉 등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봉우리마다 편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쪽의 만월봉은 오늘날 동대산으로 불린다.
동대산과 동쪽의 노인봉은 백악기에 생성된 북동-남서 방향의 대규모 주향이동단층인 월정사단층으로 구분된다. 월정사단층의 동쪽은 쥐라기의 흑운모화강암이 분포하고, 서쪽으로 동대산 일대는 선캠브리아기의 혼성편마암이 분포한다. 혼성편마암은 주로 우흑질대와 우백질대가 공존하는 호상구조가 우세한 호상편마암과 고온의 변성작용으로 암석이 용융된 화강암질편마암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혼성구조가 특징적이다.
동대산 일대의 산계 발달 양상은 백두대간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동대산을 거친 후 동쪽으로 이동하여 진고개, 노인봉(1338.1m), 소황병산(1338m)과 매봉(1173.4m)를 거쳐 다시 남으로 진로를 바꾼다. 노인봉에서 북으로 다시 분지되는 산릉은 백마봉으로 이어지고 매봉 부근에서 북으로 분지된 산릉은 천마봉(999.4m)으로 이어진다.
동대산의 동쪽 사면으로 흐르는 수계(水系)는 연곡천(連谷川), 서남쪽 사면으로 흐르는 수계는 남한강의 상류인 오대천(五臺川)과 송천(松川)의 수원(水源)을 이룬다.
거리 : 진고개 1.8km - 동대산 2.7km 차돌백이 - 두로봉4.0km
두로봉 (1422m)
두로봉은 한강기맥의 시작점으로 오대산, 계방산 등 영서내륙을 지나 남한강 북한강을 양분하는 남양주 양수리까지 160km를 내려와 멈춘다.
강원도 평창군 珍富面과 홍천군 內面 및 강릉시 連谷面 사이에 있는 산. 높이 1,422m.毘盧峰, 象王峰, 虎嶺峰, 東臺山 등과 함께 태백산맥의 지맥을 이루는 五臺山脈 중에 솟아 있는 고봉이다.
산은 동사면을 흐르는 연곡천(連谷川)과 서사면을 흐르는 홍천강의 발원지를 이룬다. 상원사(上院寺)와 미륵암은 계곡과 더불어 명승지를 이루는데, 최근 오대산국립공원에 포함되었다.
[두로령] 1310m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진부면의 경계. 비포장도로이지만 명색이 446번 지방도.
신배령新梨嶺 (1173m)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강릉시 연곡면 삼산동 부연동을 이어주는 고개이다.
명개리 사람들이 신배령을 넘어오면 부연동사람들과 합류하여 전후치(앞과 뒤가 같다고 하여 “전후치”라 한다)고개를 넘어 주문진으로 장을 보러 다니던 고개로 신맛이 나는 돌배가 많아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신배령은 연곡면 삼산 3리와 홍천군 내면 조개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예부터 맛이 신 돌배가 많이 자생하여 신배령이라 불리운다.
이 지역의 역사를 되짚어보니 갑오농민항쟁의 피어린 역사가 되새겨진다.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대접주였던 차기석(車基錫)은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한 강원지역의 뛰어난 동학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풍암리 전투에서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의 최후의 전투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차기석은 관동대접주 이원팔,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과 함께 1893년의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고,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있었음)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1894년 농민항쟁에서 세를 떨쳤다. 홍천군 서석지방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한강기맥의 구간 구분지점인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쪽으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다. 토벌군은 신배령·응복산·응복령·약수산 등 험산준령을 넘어 봉평에서 내면에 이르는 보래령·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응복령을 장악하고 협공했고,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결국 생포 당하고 강릉으로 압송되어 효수 당했다.
농민군 수천명 조직 '反봉건·침략' 항쟁
1894년 갑오농민항쟁은 봉건제도와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침략반봉건 투쟁으로, 봉건제를 타도하여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인 동시에 반식민지 사회로의 길에서 이탈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즉, 그 이전까지 진행되어가던 봉건제 해체의 과정이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에 의해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강화되자 봉건지배층과 피지배농민층 사이의 모순이 첨예화됨으로써 폭발한 농민항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민족의 자주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열고자 한 내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갑오농민항쟁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894년 농민항쟁에서 보여준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영웅적인 반침략 반봉건투쟁은 봉건지배층과 일본침략자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애국적 기개와 민족적 단결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특히 군사적으로 우세한 일본 침략자에게 맞서 총알이 비 오듯이 퍼붓는데도 불구하고 공격을 계속했던 농민군들의 용감성과 희생정신은 그 후 우리 민족의 반침략 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갑오농민항쟁에서 차기석(車基錫)은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한 강원지역의 뛰어난 동학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풍암리 전투에서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함으로서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의 최후의 전투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강원도 지역에도 일찍이 동학이 포교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제우에 의해서 홍천 북방면 지역에서 포교활동이 있었고,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곧은골 지역에도 동학당이 설치되어 몰래 동학이 포교되고 있었다. 또 최제우가 체포되고 동학이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강원도로 피해 온 많은 동학교도들에 의하여 강원도 각지에도 널리 동학이 포교되었다.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동학의 조직과 활동이 어떠했는지 잘 드러나지 않으나 홍천대접주 차기석이 관동대접주 이원팔,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과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대접주로 불리워지던 차기석은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있었음)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1894년 농민항쟁에서 세를 떨쳤다. 그는 9월 말경에 군대를 일으켜 창고를 불지르고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모아, 포목·어곽·화우(貨羽) 등 상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물자를 충당하는 등 세력을 모았다.
한편 내면에서 가까운 봉평면에서도 차기석의 영향아래 윤태열·정창해·조원중·정헌심 등이 백성을 결집하여 군대를 이루어 창사 곁에 목책을 세우고 각 촌락의 집집마다 좁쌀 6말과 미투리 1쌍씩을 거두어들이는 등 농민항쟁을 준비하였다.
이렇게 농민항쟁을 준비한 차기석은 박종백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10월13일 밤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東倉)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동창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중요한 사창으로, 세곡을 거둬 보관해 두었다가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면 뗏목에 실어 한강을 통해 서울로 보내던 곳이었다.
동창을 치고 보은 장내로 향하던 차기석은 동창이 농민군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경기도에서 홍천으로 들어온 농민군 토벌대 지평현감 맹영재와 10월 21일 장야평에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장비의 열세로 3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서석으로 후퇴하였다.
서석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10월 22일 홍천 서석 풍암리 진등위에 진을 친 차기석은 농민군을 이끌고 맹영재의 토벌군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농민군은 총이 모자라 버드나무를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을 하기도 했고, 주문을 외우면 토벌군의 총에서 총탄이 아니라 빨간 물이 흘러나온다고 하면서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식무기로 무장을 하고 경기도 일대에서 농민군 토벌에 맹위를 떨치고 있던 맹영재와 접전을 벌인 차기석의 농민군은 많은 희생은 치르었다. 이 날 희생당한 농민군과 동네사람들의 수는 800여명에서 1,000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있는 `자작고개'라는 이름도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고 해서, 또 이곳에서 싸우다 죽은 농민군들을 묻은 시체가 썩어 땅이 내려앉으면서 잦아진 고개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자작고개를 중심으로 진퇴를 거듭하며 토벌대에 맞섰던 차기석은 홍천군 내면으로 퇴각하여 다시 세를 모으기 위해 기린·양양·간성의 농민군에게 봉평을 치자는 통 문을 보내었다. 그러자 봉평의 농민군을 토벌한 포군대장 강위서가 11월 6일 토벌군을 이끌고 내면 1리로 들어왔다.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차기석은 산위에 매복해 있다가 밤중에 강위서 토벌대를 습격하여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강위서의 포군 부대는 8명의 부상자를 이끌고 패배한 채 내면에서 쫓겨났고, 그 후 전열을 정비한 토벌군은 각 지역의 관군과 연합작전을 펴면서 사방에서 농민군을 조여들었다.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계방산과 오대산 기슭의 자운리, 흥정리와 계방천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잡은 원당리·청두리·약수포 등지에서 차기석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농민군을 이끌고 토벌군을 맞아 치열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청두리에서 약수포까지는 토벌군도 70리를 벽을 기어오르며 전진하였다고 할 정도로 험난한 곳이다. 이 계곡은 구룡령에서 오대산 두루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를 이루어 양양·강릉의 영동과의 경계선이 되며, 그 사이에 모두 해발 1,000m가 넘는 신배령·응복산·응복령·약수산 등 험산준령이 놓여있다. 잎이 무성한 계절이라면 험난한 이곳 지형이 유격투쟁을 벌이기 적합할 것이나 활엽수의 잎이 모두 지고 눈이 쌓이기 시작한 11월 중순이어서 사방에서 협공하는 토벌군을 맞아 농민군이 싸우기에는 매우 불리하였다. 봉평에서 내면에 이르는 보래령·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응복령이 토벌군에게 장악된 상태에서 협공을 당한 농민군은 토벌군 뿐 아니라 지형에도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11월 11일, 내면 자운의 농민군은 보래령을 넘어온 봉평 포군대장 강위서와 60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합세한 홍천의 허경의 공격을 받아 접주 위승국 형제와 접사 심성숙, 박군오, 정창호 등 17명이 포살 되었다.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12일, 운두령을 넘어온 강릉의 박동의와 양양의 이석범이 이끄는 토벌군의 협공을 받아 생포되었다. 이때 성찰 오덕현, 집강 박성원, 지덕화 3인은 포살 당했다.
13일에는 내면 청두리에서 홍천의 농민군 지도자 권성오, 권수청 등 12명이 포살 당하였다. 약수포 쪽으로 쫓겨간 500여 명의 농민군은 청두리 쪽에서 추격한 토벌대와 신배령을 넘어온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 응봉령을 넘어 온 이석범의 부종 김익제의 토벌군에게 세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여 접주 김치실 등 11명이 포살 당하고 접사 박학조는 생포되었다. 농민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3처의 별당과 37채의 집도 불태워졌다. 자운·흥정·신흥 등의 농민군도 강위서가 이끄는 토벌군에 밀리면서 임정호 등 38명이 포살 당했다.
차기석은 생포된 뒤 강릉으로 압송되어 11월 22일 박학조와 함께 강릉 교장에서 효수 당하므로 일생을 마쳤다. 강원동학군의 지도자인 차기석이 이끌던 동학혁명군의 전투는 강원동학혁명군 전투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엄찬호(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문학박사)
만월봉 滿月峰 (1280.9m)
약200년전 조선조 말 어느 시인이 이 봉을 바라보고 시를 읊었는데 시중에 바다에 솟은 달이 온산에 비침으로 만월이 가득하다 하여 만월봉이라 한다.
- 소양강, 강원도 인제군과 춘천시를 남서류하는 강
길이 169.75㎞. 한강의 제2지류이며, 북한강의 제1지류이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 만월봉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며 계방천이라 불리다가 척천천·자운천·방대천 등을 합류하고 내린천이라 불린다.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에서 서화천이 흘러들며, 소양호를 이룬 뒤 춘천시 우두동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 건설된 소양강 댐은 다목적 댐이며,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서 인제읍까지 배가 운항하여 강원도 내륙산간지역의 교통로뿐만 아니라 설악산국립공원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유역 내에는 대승폭포·12선녀탕계곡·구성폭포·용소폭포·쌍룡폭포·황장폭포 등의 폭포와 백담사·청평사·봉정암·오세암·영시암 등의 명승 사찰이 있다. 유역의 연평균강수량은 1,100~1,200㎜이며, 강에는 어름치·열목이 등의 냉수성 어종을 비롯하여 쏘가리·뱀장어·메기·붕어·잉어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인제읍 합강리에서 뗏목을 타고 소양강, 북한강, 한강 본류를 따라 서울의 노량진까지 내려오면서 부른 〈합강리 뗏목아리랑〉이 전한다.
위치 : 두로봉 5.4km - 만월봉 - 응복산 1.5km
응복산鷹伏山 (1369.8m)
산의 모양이 매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매복산 또는 응복산이라고 함. 강원도 양양군 서면과 현북면, 홍천군 내면에 걸쳐 있는 산. 설악산과 오대산을 잇는 중간 지점에 있는 산으로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해당한다. 이 산에서 오대산 두로봉까지는 약 10km 정도로, 두로봉과 약수산·구룡령을 잇는 구간을 산행코스로 잡을 수도 있다.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한계령과 대관령의 중간에 있어 미천골·통마람골·약수골·합실골 등 사방에 골짜기가 발달해 있다. 산행은 명개리에서 구룡령을 넘어 갈천으로 이어지는 56번 국도가 포장됨에 따라 구룡령을 기점으로 하는 당일 산행이 가능해졌으나, 미천골을 따라 불바라기약수까지 다녀오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산행 시간은 구룡령에서 정상에 오른 뒤 통마람골을 따라 약수동까지 가는 데 7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에는 주목 한 그루만이 있어 전망이 좋다. 주변에 708년(신라 성덕왕 7)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水墮寺)와 철분을 비롯한 유리탄산·불소·칼슘 등이 들어 있어 만성위장병과 고혈압·빈혈·당뇨 등에 효과가 있다는 삼봉약수터가 있다.
'708년(신라 선덕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와 철분을 비롯한 유리탄산, 불소, 칼슘 등이 들어있어 만성 위장병과 고혈압과 빈혈,당뇨등에 효과가 있다는 삼봉약수터가 있다
높이 1,360m이다. 설악산과 오대산을 잇는 중간 지점에 있는 산으로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해당한다.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한계령과 대관령의 중간에 있어 미천골·통마람골·약수골·합실골 등 사방에 골짜기가 발달해 있다. 산행은 명개리에서 구룡령을 넘어 갈천으로 이어지는 56번 국도가 포장됨에 따라 구룡령을 기점으로 하는 당일 산행이 가능해졌으나, 미천골을 따라 불바라기약수까지 다녀오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산행 시간은 구룡령에서 정상에 오른 뒤 통마람골을 따라 약수동까지 가는 데 7시간 정도 걸린다.'
마늘봉 1126m
약수산과 응복산의 한가운데 독립적인 하나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다. 마늘처럼 동그랗게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대간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 몇 안되는 우리말 이름이다. 규모가 작은 봉우리인데도 별도의 이름을 가진 것이 의외다. 남쪽으로 오대산의 비로봉과 상왕봉, 호령봉, 계방산 등이 건너다보인다. 북쪽계곡 1.5Km 지점에 유명한 불바라기약수가 있지만 내려서는 길은 마땅치 않다. 응복산 방향으로 10분 거리에 평평한 야영장과 샘터가 있다.
거리 : 응복산 1.93km - 마늘봉 - 약수산 3.4km - 구룡령 1.38km
약수산 (1306m)
위치 : 강원도 홍천군 내면 명개리
수종:주목.전나무. 분비나무. 구상나무. 종비나무.
약수산이란 이름은 흔히 명개리 약수라 불리는 이 산 남쪽 골짜기의 약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약수산의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淵源을 좇으니, 약수산에서 발원하는 미천골에는 불바라기약수(미천약수)가, 약수산과 갈전곡봉 사이 구룡령 계곡에는 갈천약수가 있다. 갈천이라는 이름은 칡뿌리로 허기를 달랠 때 냇가에 칡물이 떠날 날이 없다는 데서 유래했다. 「양양군지」에 함께 실린 오색약수에 눌려 늦게 알려졌지만, 양양 주민들은 이 약수를 더 쳐주는 편이란다. 예부터 내려온 갈천의 4가지 보물(葛川四寶)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치는 약수인데 약수가 솟는 너럭바위 주변은 용출되는 철분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어 쇳물 맛이 많이 나는 편이며 톡 쏘는 맛이 강하단다. 성분은 철분,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 칼륨, 망간 등으로 빈혈, 충치예방에 효과가 있는데 주민들은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강원도 홍천군 내면(內面)에 있는 산. 높이는 1,306m이다. 산이름은 남쪽 골짜기에 있는 명개약수에서 생겨났다고 전해지며, 명개약수 외에도 이 산에서 발원하는 미천골계곡에 불바라기약수(미천약수)가 있고, 갈전곡봉(葛田谷峰:1,204m)과의 사이에 있는 구룡령계곡에 갈천약수가 있다. 많은 용이 뒤엉켜 있는 것 같다고 하여 九龍嶺(1,100m)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개 동쪽에 솟아 있다.구룡령 너머 서쪽으로 갈전곡봉, 동남쪽으로는 응복산(鷹伏山:1,360m), 만월봉(1,279m)이 나란히 솟아 있어 약수산과 함께 종주하는 산행코스가 있다.
구룡령(九龍嶺) 1013m
백두대간 구룡령은 북으로는 설악산과 남으로는 오대산에 이어지는 강원도의 영동(양양군)과 영서(홍천군)로 가르는 분수령이다.
구룡령은 일만골짜기와 일천봉우리가 일백이십여리 구절양장 고갯길을 이룬곳으로 마치 아홉마리 용이 서린 기상을 보이는 곳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양양군 서면 갈천리와 홍천군 내면 명개리를 넘는 고개로 해발1013m이다.
구룡령은 명개리와 갈천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아흔아홉 고개가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구룡령의 옛길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72년경으로 임산물과 자철광을 운반하기 위해 개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94년에 아스팔트 포장된 현재의 구룡령은 일제 강점기에 자원찬탈을 목적으로 개설 된 도로를 확포장 한 것으로 옛날 사람들이 넘나들던 옛 구룡령은 현재 샛령으로 불리는 곳이다.
신구룡령에는 동물이동통로가 있고 휴게소가 있었으나, 운영이 되지않아 산림청에서 인수하여"산림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설명
강원도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양양군 서면 갈천리 경계에 위치한 구룡령은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마치 용이 구불구불 기어오르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룡령은 높은 고도로 인하여 밝은 날에도 엷은 안개가 끼어 있으며 비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은 날에는 정상 부근에 짙은 안개로 시야를 가리는 일이 많다고 한다.
구룡령 정상주변으로 가을에는 단풍이 절정을 이루며 특히 봄철에는 철쭉꽃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백두대간 조침령에서 구룡령을 거쳐 진고개로 연결되는데 구룡령 옛길은 사람과 노새가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완만하게 이어져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광산이 개발되면서 일대 주민들이 강재로 징집되었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리
갈전곡봉 3.6km-구룡령 1.1km-약수산3.1km - 마늘봉 1.8km - 응복산
오대산
오대산은 원형으로 감싸고 돌아가는 1.호령봉.2.비로봉.3. 상왕봉.4. 두로봉.5.동대산을 5산으로 보았고 오산의 줄기에서 “대”를 이루는 1.만월산 2..기린산.3.장령산.4.상왕산.5.지로산의 정상을 5대(산등성이에 가장 돌출 된 부분으로 사방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지형을 가진 산등성이를 “대”라 한다)라 하여 5山과 5臺를 합하여 五臺山이라 하였고 그 아래 다섯암자를 지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臺)와 다섯 암자”는 .1.북대(상왕산). 2.(만월산). 3중대(지로산). 4.서대(장령산) 5.(남대.기린산)과 1.미륵암(북대).2서대(수정암).3.사자암(중대).4지장암(남대).5.관음암(동대)을 이름이다.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 된 상원사와 월정사의 거리를 원형을 그리며 병풍처럼 감싸고 돌아가는 산줄기가 중국 “산서성“의 오대산과 닮은꼴이라 하여 같은 지명을 얻게 되었다.( 중국의 오대산는 산약숭배를 모태로 하는 문수신앙과 밀교가 번창하였는데 이것은 산에 거주한다고 생각하여 山神을 崇拜한데서 유래한 신앙으로 일명 “오대산신앙”이라 한다.
자장율사에 의해 “석가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함께 창건 된 상원사는 160여년이 지난 후 신문왕의 왕자인 “보천”과 “효천”이 수도하면서 만월산(동대)에는 지장보살을, 기린산(남대)에는 지장보살을. 지로산(중대)에는 비로나자를, 장령산(서대)에는 무량수여래를, 상왕산(북대)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다섯의 암자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보천”이 임종할 때 신라의 안위를 위해 아래와 같은 방안을 남겼다고 한다.
"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臺)는 진신(眞身)이 상주하는 곳이다"
1."靑"은 동대의 北角아래와 북대의 남쪽 기슭에 있다.
그 곳에 “관음방“을 두어 원상관음과 푸른 바탕에 1만 관음상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오원을 두어 낮에는 “팔권금경”과 “인왕반야” “천주주”를 읽게 하고 밤에는 관음예참을 念하게 하여 그곳을 “원통사”라 이름하라.
2. "赤"은 남대의 남면에 있다.
그곳에 “지장방“을 두어 ”원상지장”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을 수반으로 1만 ”지장상”을 그려 봉안하고복전5전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를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찰“을 念하게 하여 ”금강사“라 이름하라.
3.“백색방“은 서대의 남쪽에 있다.
그곳에 “미타방“을 두어 ”원상무량수”와 흰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수반으로 하는 1만 대세지를 그려 봉안하고복전5원을 두어 낮에는 “팔권법화”를 읽게 하고 밤에는 “미타예참”을 念하게 하여 “수정사”라 이름하라.
4. "흑색지"는 북대의 남쪽에 있다.
그곳에 “나한당“을 두어 원상석가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수반으로 “오백나한”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5원을 두어낮에는 “불보은경”과 “열반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을 “백련사”라 이름하라.
5."황색처"는 중대에 있다.
그곳에 “진여원“을 두어 가운데에다 “이상분수부동“을 모시고 후벽에는 누런 바탕에 ”비로나자”를 수반으로 섭삽육화형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오원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을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예참”을 念하게 하여 ”화엄사“라 이름 하라.
“보천암“을 개창하여 “화장사”로 하고 “원상비로나자삼존“과 ”대장경“을 봉안하고 복전오원을 두어 낮에는 장문장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念하게 하고 해 마다 100일 동안 “화엄회”를 열게 하여 “법륜사“라 이름 하라. 이 ”화장사”로 오대사의 본사를 삼아 굳게 호지하고 정행복전을 명하며 길이 향화를 받들게 하면 국왕이 장수하고 백성이 안태하고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할 것이다.
보천의 지시에 의해 행하여진 이러한 방안은 오대산 각 봉우리에 대한 신앙형태와 수행실천에 대한 것을 엿볼 수 있으며 또 한 신라인들은 산악에 신이 거처한다고 생각하여 산악을 숭배하는 습성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토속신왕과 불교가 혼합한 산악신앙으로 가장 융성한 곳이 오대산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복령] 百卜嶺 780m
백복령은 강릉, 동해, 정선,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석회암지대로 예로부터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나무를 벌채하면 나무 뿌리에 수액이 응고되어 생성된 것으로 복령(茯笭)이라 하며, 복령 가운데 특히 백복(白茯-흰 분말)이 많이 나는 것을 이름한다고 한다. 정선과 동해를 잇는 42번 국도가 지나고 정선과 강릉을 가르는 마루금엔 '아리랑의 고장 정선'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또한 백복령은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우리댁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찌거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께눈에 노가지나무 뻐덕지개 부끔덕
세쪼각을 세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 석양
웃짐 지고 강능 삼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 부디 잘다녀 오세요
「정선엮음 아라리 중에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라와 기껏 영월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을 의지하여 살았다.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하여는 누구에게 물어도 선뜻 일러주는 이가 없다. 이즈음은 그저 어디든 한결같이 백복령(白伏嶺)이라 쓰는데 『택리지』에는 백봉령(百福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면서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만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이는 등 명확하지는 않다.
고갯길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백복령을 '뱃복이재'라고 부른다. 고갯마루에서 북쪽 산등성이에 올라가게 되면 둘레가 300-400m 쯤 되는 웅덩이가 있는데 이 웅덩이가 여자들 배꼽에 뜸을 뜬 자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뱃복이라 부른다는 마을 노인들의 말을 옮기고 있다. '뱃복'은 배꼽의 옛말이다. 카르스트지형에서 나타나는 돌리네의 움푹 파인 웅덩이가 신체의 배꼽처럼 보인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한자다. 한자로 쓰였던 지명은 앞에서 본 것처럼 제법 복잡 하지만 현재에 널리 쓰이는 백복령(白伏領)은 일제 때 지도 제작에 의해 고의든 실수든 잘못 기록되면서 전해 온 것이다. 백두대간보전회에서는 백복령(白福領) 보다는 주민 정서에서도 좋고 택리지에 근거가 있는 흰 봉황의 뜻인 백복령(白鳳領)으로 부르기를 홍보하고 있다.
산행기 참고
오대산 등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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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녀온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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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single-mt/PP1L/333?svc=cafeapi
https://cafe.daum.net/single-mt/PP1L/572?svc=cafeapi
백두대간 산행기 참고
백두대간 북진 진고개-구룡령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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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lovetogether2/ZHFP/5310?svc=cafea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