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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문구(023) - 오시팔교(五時八敎)
대한불교천태종 관문사 홈페이지에서 가져옴
경을 강의하는 데는 천태 지자 대사가 창립한 천태종은 여래의 모든 가르침을 오시팔교로 구분한다.
오시(五時)는 여래께서 설하신 법의 순서로 구분하고, 팔교(八敎)는 설하신 법문과 설법의 의식으로 구분한다.
오시는 첫째 화엄시, 둘째 아함시, 셋째 방등시, 넷째 반야시, 다섯째 법화열반시이다.
이 오시에서 다시 팔교를 구분한다.
장교(藏敎) •통교(通敎) • 별교(別敎) • 원교(圓敎)로 구분하는 것은 화법사교(化法四敎)이다.
돈교(頓敎) • 점교(漸敎) • 비밀교(秘密敎) • 부정교(不定敎)로 구분하는 것은 화의사교(化儀四敎)이다.
이것을 모두 합쳐서 팔교라고 한다.
이 팔교는부처님께서 다섯의 다른시기에 분별하여 설하신 것이다.
오시(五時)
이 다섯 시기는 또 다섯 때[五時]와 다섯 가지 맛[五味]의 비유가 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친 법과 교화하신 근기를 분별하여 말한다.
해가 떠서 높은 산을 비추고, 그 다음에 깊은 골짜기를 비추고, 그 후에 평지를 비추는데, 평지를 비추는 해는 다시 아침 먹을 때, 점심이 가까워 오는 때, 해가 정중앙에 이른 때로 나뉜다.
이것이 다섯 때이다.
그리고 다섯 가지 맛[五味]은 우유[乳], 낙(酪), 생소(生酥), 숙소(熟酥), 제호(醍醐)를 말한다.
그러므로 오시오미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순서와 교화하실 중생의 근기도 다섯 가지로 차례차례 순숙되는 것을 비유한다.
따라서 오시팔교를 설명할 때, 이러한 오시와 오미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1. 화엄시(華嚴時)
부처님께서는 성불하신 후 맨 먼저 『화엄경』을 설하셨다.
『화엄경』에는 상 • 중 • 하 세 가지 본(本)이 있는데, 우리 인간세계에는 단지 하본만이 전하며, 상본과 중본은 용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용수보살은 인간의 모든 문자를 다 익힌 후에 용궁에 가서 장경을 열람하였다.
용수보살은 눈으로 한 번 훑어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하본은 그가 용궁에 가서 외워 가지고 온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21 일간『화엄경』을 설하셨는데, 이 화엄법회를 크게 열 때 단지 보살들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었으며 , 소승과 아라한, 비구 들은 모두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다.
이른바 '눈이 있어도 노사나불을 볼 수 없는[有眼不見盧舍那]' 것이다.
비록 눈이 있어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타내는 천 길이나 되는 노사나불의 보신(報身)은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천 길이나 되는 노사니불을 매우 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아미타불과 비교하면 큰 것도 아니다.
아미타불의 미간 백호상은 다섯 개의 수미산만큼이나 크며, 아미타불의 눈은 사대해(四大海)만큼이나 크다.
우리가 하나의 대해도 얼마나 큰지 모르는데 네 개의 대해 만큼이나 크다고 하니, 정말로 큰 눈이 아닐 수 없다.
백호광명 수미산을가득하게 뻗치시며
검푸른 눈 맑은 눈빛 사대해를 밝혀주네
白毫宛轉五須彌
紺目澄淸四大海
이 게송은 누가 지은 것인가?
이것은 과거에 깨달은 조사 스님께서아 미타불의 장엄한 상호를 보고 지은 것이다.
만약 아미타불의 백호상과 검푸른 눈을 노사니불과 비교한다면, 노사니불의 몸은 작고 또 작은 것이다.
따라서 이 천 길 노사나불의 몸은 결코 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승(二乘)에게는 노사니불의 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말하기를, '귀가 있어도 원돈의 가르침은 듣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이승의 성문과 연각은 귀가 있어도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화엄의 큰 법은 듣지 못한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은『화엄경』을 설하여 시방세계의 대보살마하살들을 교화하신 것이다.
그래서 화엄시는 교화하신 법 가운데 원교(圓敎)와 별교(別敎)에 속한다.
그리고 교화하신 의식 가운데 돈교에 속하나 점교를 겸하였다.
그렇다면 오미(五味)에서는 화엄을 설하신 시기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소의 몸에서 나온 우유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방금 소에서 나온 우유는 에너지가 매우 크며 보양의 성질이 충분하기 때문 이다.
오시 (五時)로 말할 때는, 마치 태양이 막 떠서 먼저 높은 산을 비추는 것과 같다.
높은 산은 높기 때문에 태양이 먼저 비추게 된다.
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태양과 같아서 먼저 보살에게 법을 설하신 것이다.
보살은 마치 높은 산과 같으며, 보살은 일체중생 가운데서 가장 높은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초에 설하신 법으로서, 바로『대방광불화엄경』이다.
2. 아함시(阿含時)
두 번째 시기에 설하신 것은『아함경』이다.
아함은 범어이며, 번역하면 비교할 수 없는 법 [無比法]으로서 '이 법과 비교할 법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외도의 법은 이 법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일체의 외도의 법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아함시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경 • 율 • 논 삼장의 교리와 관련이 있다.
생멸의 인연법과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였기 때문에 아함시는 삼장교(三藏敎)에 속하며 , 또한 장교(藏敎)라고 부른다.
오미로 논한다면, 아함시는 우유에서 나온 낙(酪: 요구르트)과 같으며, 아이에게 먹이면 상당히 좋다.
오시로 말한다면, 마치 태양이 떠서 높은 산을 비추고 난 후 깊은 산골짜기를 비추는 것과 같다.
이것은 소인도 불법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도 불법을 이해하게 된 것을 말한다.
3. 방등시(方等時)
세 번째 시기에 설하신 것은 『방등경』이다.
방(方)은사방, 등(等)은 평등이라는 뜻이다.
방등시에 설한 경전은 모두 방등부에 속한다.
방등시는 교화의 법 가운데 통교(通敎)에 속한다.
왜 통교라고 하는가?
전과 후를 통하고 대승과 소승을 통하기 [通前通後通大通小] 때문이다.
앞의 소승의 장교와 통하고 뒤의 대승의 별교와 통하며, 앞의 아함과 통하고, 뒤의 반야와 통한다.
통교는 대승의 시초의 문으로서 막 대승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등은 심증을 융통하여 함께 배우는 것이다.
오미로 말하자면, 낙에서 만들어낸 생소(生酥: 연유)에 해당한다. 어린이와 어른이 모두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다.
오시로 비유하자면, 아침밥 먹는 때[食時]로서 태양이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평지를 비추는 때이다.
소승인도 배울 수 있고 대승인도 배울 수 있는 가르침을 비유한다. 즉 소승과 대승의 사람이 모두 이 경전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4) 반야시(般若時)
네 번째 시기에 설하신 것은 반야부이며, 별교(別敎)에 속한다.
별교는 대승의 초문으로서 대승의 인에 이른 것이다.
무엇을 별교라고 하는가?
전과 후와 구별된다는 뜻이다.
앞의 아함 • 방등과 구별되며, 뒤의 법화 • 열반과 구별된다.
또한 소승과 대승과도 구별된다.
앞의 장교 • 통교와 구별되며 뒤의 원교와도 구별되기 때문에 별(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별교는 대승의 마지막이며, 또한 삼승의 방편의 가르침을 돌려서 법화의 원만한 일불승의 가르침을 설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단계이다.
오미로 말하자면, 생소에서 만들어낸 숙소(熟酥: 치즈)에 해당한다.
이 숙소는 어른에게 먹이면 적당하기 때문에, 대승의 근성을 갖춘 권교보살이라야 비로소 이 돈교의 반야법문을 배울 수 있다.
오시로 말한다면, 오전 10시부터 11시 사이에 태양이 널리 대지를 비추기는 하나 아직 정오에는 이르지 못한 때이다.
그렇다면 궁극에 무엇을 반야라고 하는가?
반야는 범어로서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고 범어 그대로 사용한다.
문자반야 • 관조반야 • 실상반야가 그것이다.
1) 문자(文字)반야
일체의 경 • 율 • 논은 모두 문자반야에 속한다.
이것은 출세간의 문자이며, 결코 세간의 문자는 아니다.
세간의 문자는 반야를 담론할 수 없으며, 단지 세간의 지혜만을 말할수 있을 뿐이다.
2) 관조(觀照)반야
관상하며 지혜로써 관조하여 일체의 법을 비추는 것이다.
마치『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본다는 것과 같이 '비춘다[照]'는 것은 관조(觀照)하는 것으로서 실상의 이치를 관조하는지혜이다.
3) 실상(實相)반야
실상은 본래 상이 없는 것이나 또한 일체의 모든 상을 구족하고 있으며, 일체의 모든 상을 포함하고 있다.
일체의 모든 상은 무상(無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실상반야이다.
따라서 문자반야로써 관조반야를 일으키며, 관조반야로써 자기의 지성 속에 본래 가지고 있는 실상반야에 도달하게 된다.
5.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다섯 번째 시기는 법화열반시이며, 또한 지금 강의하는『법화경』을 설하신 시기이다.
부처님께서는 8년간『법화경』을 설하시고, 만 하루 동안 『열반경』을 설하셨다.
따라서 여러분은『법화경』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경전은 부처님의 궁극의 지극한 말씀이며, 궁극의 법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화엄경』,『아함경』,『방등경』,『반야경』을 설하신 것은 모두『법화경』을 설하기 위하여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경전은 모두 장래 『법화경』을 설하려고 준비하신 것이므로, 『법화경』은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낸 것[開權顯實]'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앞의 화엄, 아함, 방등, 반야 등의 경전은 모두 '진실을 위하여 방편을 설하신 것[爲實施權]'이다.
법화회상에 이르러 비로소 이전의 권교방편의 법문을 모두 버리고 진실만을 남기신 것이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진심(眞心)이며, 부처님의 진신(眞身)이며, 부처님의 법신(法身)이며, 부처님의 응신(應身)이며, 부처님의 보신(報身) 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연구하는 사람이 『법화경』을 연구하여 통하지 않으면, 아직 불법의 진정한 맛을 얻지 못한 것이다.
진정한 불법의 묘한 뜻은 바로『법화경』속에 있다.
그래서 이 법을 묘법(妙法)이라고 부르며, 이 경을 연꽃[蓮華]에 비유하는 것이다.
연꽃은 꽃 중의 왕으로, 꽃 가운데 가장 귀한 꽃이다.
연꽃은 진흙에서 나와서도 오염되지 않으며, 비록 뿌리는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물과 거리를 두므로 '세속에서 세속을 벗어난 것[在塵出塵]'이라고 한다.
연꽃이 꽃 중에서 가장 귀하고 묘하듯이, 『법화경』도 경 중에서 궁극의 경이다.
불교에 이러한 격언이 있다.
지혜를 여는 능엄,부처를 이루는 법화[開慧的楞嚴 成佛的法華]
『능엄경』은 지혜를 여는 경이며, 부처를 이루고자 하면 반드시 『법화경』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법화경』과 『능엄경』이 불교에서 점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법화경』은 경 가운데 왕이므로, 우리가 지금『법화경』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법화열반시는 태양이 중천에 떠올라 높은 산이나 계곡, 평지 어떤 곳이든 두루 비추는 때로서, 심지어 사람의 그림자도 생기지 않는다.
이것은 소승과 이승, 그리고 대승의 초심자들을 교화한 후 대승근기의 보살을 섭수하는 것을 비유한다.
그래서 『법화경』법문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법화경』이라는 이름만 들은 자도 이미 선근을 심은 것이다.
그러나『법화경』이라는 이름도 쉽게 들을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낸[開權顯實]' 법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일대사인연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법화경』을 설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법화경』을 들을 수 있고 장래『법화경』의 묘한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무량 겁 이전에 선근을 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그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경전과 이 법회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법화경』을 들을 수 있는 것에 마땅히 큰 환희심을 내고, 매우 희유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이 개국한 이래, 어떤 사람이 정식으로『법화경』 을 들었으며 『능엄경』을 들었는가?
아무도 없다.
단지 번역문을 보는 것은 마치 개미가 수박의 겉껍질을 돌기만 할 뿐 진정한 수박의 맛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경전을 보는 것도 이와 같다.
바깥 껍질을 아무리 맛본다 하더라도 다디단 수박 속 맛을 알 방법이 없다.
지금 이 수박을 쪼개야 그 안의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법화경』을 오미로 논하면, 바로 제호(醍醐)이며, 무상의 묘한 맛이다.
제호는 세간에서 가장 희유하고 가장 묘한 맛이다.
이제 우리는『법화경』을 열며 사람마다 이 맛을 느끼기를 기다린다.
부처님 일생의 목적은 『법화경』을 설하는 것이었다.
『법화경』은 장교, 통교, 별교의 가르침이 없는 오직 순수하고 원융한 가르침[圓敎]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법화경』은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만약 『법화경』을 독송한 적이 없거나 들은 적이 없다면, 근본적으로 불법을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부처님의 최종 목적이 바로 『법화경』이기 때문이며, 이 경이 가장 중요하고도 중요한 경전이기 때문이다.
불교도로서 이 경을 모른다면, 어찌 불법을 안다고 하겠는가?
마치 태양이 중천에 떠서 그 광명이 모든 산과 강, 대지, 삼라만상을 골고루 비추듯이, 법화회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성불할 수 있다.
경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산란한 미음으로 불탑이나 절에 가서 한 번 '나무불'이라고 칭하면 모두 불도를 이룬다.'라고 한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수기를 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배하는데 두 손으로 합장하든 한 손으로 합장하든, 혹은 한 손을 들거나 혹은 약간 고개를 숙이거나, 이렇게 불상에 공양하면 점차 무량한 부처님을 뵙고 자연히 무상도(無上道)를 이루어 널리 무수한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
한 손으로 합장하거나 한 손을 들고 부처님께 예배하는 것은 공경스럽지 못한 짓인데, 비록 이렇게 공경스럽지 못하게 예배를 해도 반드시 부처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곳에 와서 예배하고 염불하므로 장래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만심이나 자만심을 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불법을 이해하여 성심에 다시 성심을 더하고, 공경에 다시 공경을 더해야 비로소 불교에 대하여 용맹정진을 하는 것이다.
법화회상에서 설하신 『법화경』은 천태종의 관점으로는 원돈(圓頓:
원융하고 문득 깨우치는)의 가르침이다.
원교는 가장 원융한 가르침이며, 여기에 다시 돈(頓)을 더한 것은 바로 즉시 성불하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돈근(頓根)의 중생은 문득 깨달으며 매우 빨리 깨닫는다.
팔교(八敎)
장교 • 통교 • 별교 • 원교는 화법(化法)의 네 가지 가르침이며, 돈교 • 점교 • 비밀교 • 부정교는 화의(化儀)의 네 가지 가르침이다. 모두 합하여 여덟 가지 가르침[八敎]이라고 한다.
이 팔교는 오시(五時)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
화법의 네 가지와 화의의 네 가지 가르침은 약방문과 약의 맛과 같은 것이다.
형식면에서 화의라고 칭하며, 비유하면 의사의 처방과 같다.
내용면에서 화법이라고 칭하며, 비유하면 처방한 약의 맛과 같다.
따라서 네 가지 처방약을 받았더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은 낫지 않을 것이다.
약을복용해야 비로소 병이 낫는다.
1. 화법(化法)의 네 가지 가르침
1) 장교(藏敎)
경 • 율 • 논 삼장을 가리키며, 생멸의 인연법과 사제법을 설한 것이다.
이승을 가르치고 이울러 보살을 교화하는 가르침이다.
2) 통교(通敎)
대승의 시작으로서, 생멸이 없는 네 가지의 진제(眞諦)와 육바라밀을 설한다.
삼승(성문, 연각, 보살)이 공통으로 배울 수 있으며, 삼승이 함께 닦는 법이다.
통교보살을 바른 근기로 삼으며, 이승을 가까운 근기로 삼는다.
3) 별교(別敎)
대승의 마지막이다.
대승의 무량한 법으로 일체가 공하다는 반야법문을 설하며 , 별교의 보살을 가르친다.
4)원교(圓敎)
순수하게 원융하며 홀로 묘하여 이사원융(理事圓融)의 중도실상의 도리를 설하는데, 다른 세 가지의 가르침이 섞이지 않는 일불승의 가르침이다.
원교는 동원(同圓)과 별원(別圓)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심증의 근기와 함께하는 일승법은 동원이라고 하는데, 마치 『법화경』과 같이 최상의 날카로운 근기를 가르치며, 아울러 삼승의 성인을 교화한다.
이와 달리 홀로 원돈의 큰 근기의 일승법을 별원이라고 하며, 마치『화엄경』과 같이 최상의 날카로운 보살을 근기로 삼는다.
2. 화의(化儀)의 네 가지 가르침
1) 돈교(頓敎)
원교는 가장 원융한 가르침이며, 만약 여기에 돈교를 더하면 기다릴 필요 없이 즉시 성불한다.
이 돈(頓)은 어리석은 둔(鈍)이 아니라 '즉시 ', '매우 빨리'라는 뜻으로서, 문득 깨닫는다는 것이다.
『법화경』은 돈교 의 가르침이며, 『화엄경』은 돈과 점의 가르침이다.
2) 점교(漸敎)
점 (漸)은 한 걸음 한 걸음씩 점차적으로 수행하여 천천히 깨닫는 것이다.
『법화경』이전의 아함, 방등, 반야의 가르침은 모두 점교에 속한다.
3) 비밀교(秘密敎)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비밀한 가르침이다.
무엇이 비밀한 가르침인가?
설하신 모든 주(呪)는 비밀한 가르침이다.
비밀이란 이른바 너를 위해 설해서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이다.
어떤한 사람을 위하여 설한 법은 다른 사람은 모르는 법이다.
서로가 모르는 법이다.
4) 부정교(不定敎)
설하신 법에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法尙應捨何況非法]'라고 하셨다.
따라서 일정한 법이 없다.
기왕 일정함이 없으므로 법은 바로 활동하는 것이다.
활동하는 법은 일체의 집착을 떠난다.
이른바 '사람에 따라 가르침을 내리고,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러한 방법으로 교화하고, 저 사람은 저러한 병이 있으므로 그러한 약을 복용하게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오시와 팔교의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49년간 법을 설하시고 삼백여 회 경을 강설하신 것은 온전히 『법화경』을 설하기 위함이었다.
부처님께서 맨처음에 『화엄경』을 설하시자 소승 근기의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후 부처님께서는 큰 법을 감추고 작은 법으로 설하셨다.
즉 깊고 어려운 이론을 설하지 않고 매우 얕고 알기 쉬운 도리를 설하셨는데, 그것이『아함경』이다.
이승의 근기를 인도하여 발심하게 하기 위하여 『아함경』을 설하셨으며, 그런 후 다시 『방등경』을 설하시고, 그 후 『반야경』을 설하여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셨다.
지혜가 있게 되자 비로소 『법화경』의 묘법을 얻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법화경』을 들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법화경』은 가장 듣기 어려우며, 가장 만나기 어려운 경이 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법화경』을 설하실 때 오천 명의 비구가 이 법을 듣고, '이것은 너무나 믿을 수 없구나! 너무나 믿을 수가 없구나!'라고 하면서 법회에서 물러나 가버렸다.
오천 명의 제자가 가버린 것이다.
이처럼 이 경은 믿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만두자, 그만두자, 그만두자!'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그만두자는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설하지 않겠다, 나는 설하지 않겠다. 나는 『법화경』을 설하지 않겠다. 무엇 때문인가? 나의 이『법화경』의 법은 매우 묘하며 생각하 어려워서 사람들이 믿기가 쉽지 않다. 나는 설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나는 설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사리불 존자는 반드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것을 요청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몇십 년을 고생하신 것이 바로 이 『법화경』을 설하려고 준비한 것이며, 『법화경』의 원융한 가르침과 실상의 묘한 이치를 설하기 위하여 『아함경』, 『방등경』, 『반야경』을 설하신 것이다.
이전의 법회는 모두『법화경』을 위하여 길을 놓으신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뉴욕으로 가기 위하여 길을 닦는 것과 같다.
그러나 몇 년간 길을 닦아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으며, 비록 길을 닦았을지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곳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기도 한다.
'당신이 이 길을 닦았지만, 나는 가지 않겠다.' 오천 명의 비구들이 법석에서 물러난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법화경』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로 삼천대천 세계 모두에 방광할것이며, 시방의 제불보살께서 특별히 기뻐하실 것이다.
불법을 연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바쁜 가운데서 짬을 내어 기장 묘한 이 경을 공부해야 한다.
만약 공부할 기회를 놓친다면 묘법을 얻을 수 없다.
묘함을 얻지 못하면, 묘하지 않음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사람마다 묘하지 않음을 원해서는 안 되며, 묘함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이 묘함을 찾으려고 한다면 한 번 힘든 공부를 해야 하며, 견고한 마음으로 바쁜 기운데서 이러한 묘법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견고한 마음으로 노력해야 비로소 이 묘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불광출판사, 선화상인 법화경강설, 2018년 11월 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