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이별의 아쉬움이 크게 다가오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옛 주인은 떠나버리고 여기저기 흩어지고 묻힌 것들이, 발굴되어 보관 전시되어있는 ‘경주 박물관’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전시된 오랜 유물들을 바라보며 남겨진 것에서 남아야만 하는 아픔을 위로받고 싶은 속내가 있었다.
정오 무렵, 경주 박물관으로 들어선다. 종각에는 에밀레종으로만 알고 있었던 ‘성덕대왕신종’의 몸체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사방으로 트인 야외 종각에 매달린 채 맨몸으로 오랜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시간에 맞추어 들려주는 종소리가 마치 사라진 왕국으로 안내하는 신호인 듯하다. 경주는 신라인들이 남겨놓은 유적을 잘 보존하고 있다. 불법을 전하는 나라답게 박물관에 수장(收藏)된 유물들은 옛 신라인들의 자비로움이 영혼의 빛을 발하고 있다. 사람들이 유물을 눈으로 새겨보며 신라의 옛 시절로 빠져든다. 누구나 생을 영원할 것처럼 살고 있지만 때가 다가오면 흔적들만 남기고 떠나기 마련이다.
한국 조각의 걸작이라 평가받는 ‘금동반가사유상’ 앞에 섰다. 오른손을 턱에 괸 채 묵상하는 작은 부처다. 유리관에 소중히 모셔져 있다. 지금도 살아있는 붓다 같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다. 젊은 싯다르타를 나타낸 것이다. 왠지 반가사유상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인간 태자 상의 형상으로 상체는 곧고 당당하다.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맑은 정신적 문제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모습이다. 무릎 아래에서 사방으로 천의 주름이 넘실거리는 호수의 물결 같다. 무한한 평정심과 자비심이 느껴진다.
내게는 또 다른 반가사유상이 있다. 꼿꼿한 자세와 긴 팔다리로 이젤 앞에 앉아있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캔버스에 붓질로 묻어가는 색감을 응시하는 눈길은 진지하다. 오똑한 코 선 아래 일자로 다문 입은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다. 이럴 때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아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림이 완성 단계에 도달하면 그는 습관처럼 턱을 고이고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며 예술의 깊이를 고뇌한다. 그 모습이 너무나 뚜렷하게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난다.
그는 화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루종일 그림만 그렸다. 방해될까 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나는 언제나 그의 뒷모습만 보았다. 눈을 감아도 떠도 반가사유상처럼 그림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였다. 붓질에서 의도하는 예술의 본질이 느껴질 때면 기쁨을 안으로 다스리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가 떠났다. 화실에는 주인 잃은 크고 작은 이젤들만 오도카니 서 있다. 통에 꽂혀 있는 여러 가지 용도의 붓들도 언제나 잡아주던 따스했던 손길을 기다리는 듯 무료한 시간을 견디고 있다. 가장자리에 남겨진 물감이 켜켜이 쌓여있는 팔레트도 퇴색되어 윤기마저 잃어가고 있다. 내 얼굴보다 더 많은 시간을 마주하고, 내 손길보다 더 오래 잡았던 것들이 박물관의 유물처럼 남아 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볼 수가 없다. 끝나버린 예술적 재능의 아쉬움까지 남겨 놓았다.
아마도 그는 먼 나라의 화공이었을 게다. 윤회하여 21세기의 현대화를 그리는 서양화가로 태어난 거다. 다음은 어떤 세상에서 어떤 예술가로 태어날까. 부처님의 자비가 내 앞에 있듯,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는 그가 남긴 그림들도, 바라보는 이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안겨주는 자비의 공양이 될까.
실내의 침침한 조명에도 작은 유리관 속의 금동반가사유상이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다.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본다. 몸체가 작아서만은 아니다. 볼수록 마주한 눈길이 아늑해진다. 눈길을 주고받는 만남에는 영원한 이별은 없다. 인간의 고통과 번뇌, 죽음을 잘 묘사했다는 세계적인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작품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 눈앞에 있는 금동반가사유상과 오직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또 하나의 조각상일 뿐이다. 떠나온 곳에서의 뜻하지 않은 해후가 반갑고 슬프다.
신라 예술 문화에 감탄한다. 예술이란 천년을 뛰어넘었건만 잊히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이 세월을 견뎌준 인내가 더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신라 여인들은 무덤 속에까지 화려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짧은 생을 마쳤지만, 전신에 치장했던 장신구만은 무덤까지 가져가서 지금껏 남아 유리관 안에서 영혼의 빛을 발하고 있다.
‘수막새’의 미소를 본다. 흙을 빚어 구웠던 옛 신라 장인의 아픔이 없었을까마는, 그래도 수막새는 고통을 감추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이제 이별의 슬픔은 훌훌 털어버릴 일이다.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라도 사람들은 그가 남겨 놓은 그만의 예술세계를 볼 것이다. 말없이 캔버스에 붓질로만 기록으로 남겨놓은 화가로서의 아픈 얘기들을 눈으로 보고 귀 기울여 들어줄 것이다. 언젠가는 대한민국이 말하는 예술혼으로 그도 천년의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 곳곳에 오월의 햇살이 내려앉는다. 신라의 시간이 흐르고, 신라인의 미소가 번져가고, 서라벌의 소리가 퍼져간다. 그 햇살 받아 짙어가는 초록 나뭇잎도 잔잔하고 고요하다.
마음속에 하나의 조각상이 그리운 날이 올 것이다. 나는 다시 또 하나의 조각상을 만나러 경주 박물관으로 향할 거다. 그날도 오늘처럼 진정 보고 싶은 나의 금동반가사유상 조각상과 마주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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