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짓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글의 잘못된 곳을 지적해 주면 기뻐하고, 비평을 듣는 일을 즐거워하며, 글을 고치는 것 또한 전혀 꺼리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벌컥 화를 내고, 스스로 잘못된 곳을 알면서도 절대 고치지 않는 사람이다.
고봉 기대승은 자신의 문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가 지제교(知製敎, 왕에게 글을 지어 바쳤던 벼슬)로서 임금의 명을 받아 시문에 지어서 바쳤는데, 승정원의 한 승지가 그 시문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표시를 해 놓았다. 그러자 기대승은 매우 화를 내며 심부름한 아전을 크게 나무랐을 뿐 아니라 단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유근이 도승지가 되었을 때 이호민이 임금의 명을 받아 시문을 지어 바친 적이 있다. 유근은 시문에 수많은 표시를 붙여 이호민에게 고칠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호민은 어떤 부분은 고쳤지만 어떤 곳은 고치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래서 유근이 다시 심부름하는 아전을 보내 고쳐줄 것을 재삼 요청했다. 또한 '합(欱)' 자에 표시를 붙여, 이 글자가 도대체 어떤 글자인지에 대해 물었다. 이호민은 유근의 표시와 질문에 냉소하듯 "유근은 우리나라의 시문만 읽고 중국의 문선(文選)은 보지도 않았단 말이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붓을 들어 주석과 해설을 적어 주었다. "문선부(文選賦)에서 들판을 들이마시고(欱) 산을 내뿜어 예절의 나라인 호(鄗)를 들이마신다(欱)고 했는데, 여기에 쓰인 합(欱) 자는 흡(吸) 자의 고자(古字)다."
그런데 유근은 또 다시 아전을 보내 자신이 표시한 부분을 모두 고치라고 했다. 결국 이호민이 심하게 화를 내자, 그때서야 유근은 매우 부끄러워했다.
이후부터 신진 관료의 변변치 못한 글일지라도 함부로 고치라고 하지 못했는데, 이들 역시 심하게 화를 내며 글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근과 재상 심후수가 태학사가 된 후 자신들의 글 가운데 잘못된 곳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연 화를 내고 분노한 얼굴빛을 드러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감히 말하지는 못했다.
정사룡은 시를 지으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일을 즐겼다. 더러 사람들이 잘못된 곳을 지적하면 기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글을 고쳤는데,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자신의 글을 퇴계 이황에게 자주 보여 주었는데, 혹시 퇴계가 글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 고쳤다. 이 또한 어색하거나 곤란한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퇴계 이황 역시 정사룡이 자신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을 기뻐했다.
일찍이 과거 시험장에서 퇴계 이황이 왕각배율 20운을 지어 꼼꼼하게 고쳐 다듬은 다음, 정사룡에게 지은 율시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정사룡이 초고한 율시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정사룡의 율시 중 "석양녘 처마 먼저 새하얗게 빛을 발하고, 투명한 바람 살랑대니 아직 차가운 가을날은 아니구나."라는 구절을 읽고서는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칭찬했다. 그리고 "오늘 시험에서 정사룡이 아니면 누가 장원급제를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시를 소매에 감춘 채 끝내 보여 주지 않았다. 또한 퇴계는 자신이 지은 율시는 과거 시험장에 제출하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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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도 고치지 않는 자존심 뒤에는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는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한 줄도 바꾸지 않는 자신감 뒤에는 한 줄도 얼렁뚱땅 쓰지 않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