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접기
조효복
파란시선 0154
2024년 12월 15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45쪽
ISBN 979-11-91897-94-4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혼자라는 말을 접으면 둘이 되고 넷이 되고 점점 단단해지고
[사슴 접기]는 조효복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어제의 꼬리」 「메아리박물관」 「폭설 카페」 등 53편이 실려 있다.
조효복 시인은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으며, 2020년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슴 접기]를 썼다.
조효복 시인의 [사슴 접기]는 빛의 온화함과 어둠의 서늘함이 교차하며 재현하는 어떤 안온함의 이미지로 풍부하다. 물론 그것이 시적 주체가 지닌 정체성의 불안이나 파괴적 고통을 얼마나 오래 궁굴리고 전유해야 가능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빛과 어둠을 넘나들며 스스로를 돌보고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좌표로 삼아 삶의 노정을 기록하는 조효복 시인의 시적 응전의 태도가 분명하게 감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미래를 알 수 없어 뿔을 키우며/방향 없이 몸도 없이” 걷는 “박제된 메아리”를 통해 “벌목된 숲”의 파괴적 형상과 “살아 있는 것 같은 주검”의 영혼의 비참을 시적 주체로 육화하여 우리 앞에 현시하는 데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다(「메아리박물관」). 세계의 폭력과 주체의 불안정성을 상호 교차시키며 폭발적으로 가시화되는 한편 그 안쪽에 흐르는 존재의 고통과 슬픔을 톺는 시인의 시적 수행은 주목할 만하다.
조효복 시인은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끝의 세계를 잊어버린 것 같”은 존재가 삶의 어느 지점에서 “실패하고 금이 가는 중”이라고 느끼는 부정적 감각을 전유하여(「나눌 수 없는 기분」) 비록 “긁힌 자리는 아물지 않”아도 그것을 좌절로 삼기보다는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가려는 능동적 주체를 내세워 “해가 없어도/안부가 닿지 않아도/돌아와 억새의 심장을 붉게 물들이며” “온몸으로 허공을 붙”드는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버드 워칭」). 이를 고된 하루의 끝에서 마주하는 위안의 손길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시인이 재현하고자 하는 바가 그저 위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양태는 존재로 하여금 “던져진 것들의 찢긴 목소리”만을 지닌 채(「서성이는 잠꼬대」) “비극을 껴안고 둥둥 떠다”니게 만들 따름이라서(「여름 영화관」) 시인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에 발을 담그”고 온몸으로 이를 감각하고 재현하려 한다(「퍼핀들」). (이상 이병국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식물원에서 도마뱀의 잘린 꼬리를 찾아 나선 희귀한 시인이 있다. 조효복 시인은 첫 시집 [사슴 접기]에서 남다른 상상력으로 통념에 저항하는 첨예한 감각의 층위를 보여 준다.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해석하고, 의미의 질서를 뒤집어 새롭게 사물을 조우하게 하는 것이 조효복 시의 매력이고 저력이다. 이런 까닭에 가상의 커튼을 찢고 대타자의 문법 너머에서 작동하는 그의 시는 수만 마력의 힘을 가지고 있다.
책상이라는 사물을 바라볼 때 대부분 나무의 존재성은 은폐되거나 사라진다. 특정 개념의 지배 하에 길들어 있는 탓이다. 고착된 의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식물원은 단지 식물의 집합소이지만 조효복 시인은 그곳에서 시적 화자를 환유하는 꼬리가 잘린 도마뱀, 숨어서 상처를 핥는 사향쥐 등을 만나고, 독자로 하여금 돌발적인 정신의 융기를 경험하게 한다.
메아리에서 소리의 발자국을 읽어 내는 눈 밝은 시인의 작품에는 등이 구부러져 우는 영혼의 스산한 모습도 있지만 “뼈대를 잇고 잘 말린 몸”이 홀로 환하게 빛나기도 하여 시의 단단한 근력을 느끼게 한다(「사슴 접기」). 자주 눈길을 멈추게 하는 경이의 순간마다 직관과 영감의 언어로 빚은 감각적 이미지와 개성적인 사유가 힘 있게 와닿는다. 시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에 밑줄을 그어 가며 읽은 이유이다. “빛나는 저 구유는 내 것인 적이 없”고(「크리스 크로스마스」), “도착하지 않는 저편”이 아득한 현실이지만(「조난」) 세계의 숨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조효복 시인의 시편들은 미지의 낯선 지점에서 오래 빛날 것이다.
―홍일표 시인
•― 시인의 말
접는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사슴은 보이지 않고
반듯하고 매끈한 것들은 쉽게 흔들렸다
내가 접어 온 것들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멀리 갈 수 있겠다
•― 저자 소개
조효복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2020년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슴 접기]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카유보트 따라 하기 – 11
어제의 꼬리 – 13
우린 아직 웃는 법을 모르고 – 15
달아나는 밑그림 – 17
메아리박물관 – 19
포즈 – 22
플리마켓 – 24
환절기 – 26
사슴 접기 – 28
오후 건너기 – 30
우산 펼치기 – 32
버드 워칭 – 34
표류 – 36
횡단 – 38
제2부
릴레이 – 43
선인장 테라스 – 45
코끼리 씻기기 – 47
사과 속으로 – 49
종이로 접은 풍경 – 51
옴 샨티 – 53
나눌 수 없는 기분 – 55
오후 세 시의 수프 – 57
내가 너를 아는데 – 59
내 상냥한 표정은 습관일 뿐이고 – 61
접힌 곳은 자꾸 접혀 아프고 – 63
둥근 방을 꿈꾼 적 있다 – 65
폭설 카페 – 67
제3부
아이스크림과 라이딩 – 71
그림자 길들이기 – 73
구름 속으로 발을 넣었다 – 75
우리의 잠시는 푸딩 같고 – 77
찾아가는 물 – 80
오늘은 혁명가 – 82
가위손 – 84
드림 컬렉터 – 86
조난 – 88
잠이 필요합니다 – 90
밤의 푸른 몽타주 – 92
햇빛도 그늘이 됩니다 – 94
크리스 크로스마스 – 96
제4부
보이지 않는 나무 – 101
Salon blue – 103
끝을 모르는 무대 – 105
서성이는 잠꼬대 – 108
잠재적 작약 – 110
걷는 나무 – 112
떠도는 잠 – 114
도시 엔트족 – 116
여름 영화관 – 118
붕어빵 안에는 배고픈 고래가 산다 – 120
퍼핀들 – 122
마린 스노우 – 124
층을 연결합니다 – 126
해설 이병국 ‘나’를 전유한 ‘너’의 자리 – 128
•― 시집 속의 시 세 편
어제의 꼬리
식물원에 동물이 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정글 같다
소리가 나는 방향에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있다
빛이 쏟아지는 대형 창 앞에서
종려나무를 스케치하고 있던 나는 반사된 채 지워지고
밀림으로 들어간다
보이드도마뱀이 떨어트린 나무 열매를 주웠다
그 옆에 잘린 꼬리가 있다
마른 나무토막 같다
몸통만 남은 도마뱀은 웅덩이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은 언젠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종려 잎을 흔든다
사향쥐가 제 꼬리를 잡고 돈다 숨어서 상처를 핥는다
식물원에선 꼬리를 감출 이유가 없다
아프지 않은 것이 없고
바라보는 일은 만지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손을 놓지 않는다는 말은 따뜻한 말일까 감정도 사막화된다
가시가 사라진 선인장이 꽃을 피운다
가짜인 것 같아 만져 봐야 할 것 같다
아열대 식물원을 나가면 연못 정원이다
가까운 데서 바라보면 물고기는 물고기로 보이지 않고
돌아온 것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 종려 잎이 흔들린다
나는 어제의 꼬리를 찾아
야자수 아래 흙더미를 뒤지고 있다
뒤진 곳을 또 뒤진다
축축해지면서 ■
메아리박물관
어느 곳에서 걸어 나온 발자국일까
도시 입구에서 끊어진 메아리에서는
숨은 동물의 움직임이 느껴져
소리를 잃고도 내 안을 서성이는 발자국들
보이지 않는 슬픔을 상상할 때
내 가벼운 심장은 얇아지고
몇 개의 귀가 자라나
너를 크게 그려 두고 읽히지 않는 마음을 찾기도 하지
벽을 통과 중인 뿔처럼
박제된 흉상들이 걸려 있는 자연사박물관
어느 망자의 목에 걸린 뼈로부터 걸어 나온 붉은 발자국
벌목된 숲의 초입을 지나 이곳까지 이어지는데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끄는 안개의 손이 보여
비명처럼 차가운
살아 있는 것 같은 주검은 아름다울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머리 아래에도 영혼이 있을 것 같은데
우린 이곳에서 복원되지 못할 미래를 확인하려는 것 같아
마음이 사라진 아득한 표정들 속에 우리가 보여
기댈 곳을 잃지 않으려는 사라진 하반신 같아
창 너머를 바라보는 산양의 눈 속엔 들소의 발자국이 있지
능선을 덥히는 그 온기를 이해해
죽어서도 감지 못한 눈도 알 것 같아
회벽을 뚫고 푸른 뿔사슴이 걸어 나오고 있어
우리의 발소리가 섞이고
미래를 알 수 없어 뿔을 키우며
방향 없이 몸도 없이
박제된 메아리가 걷고 있어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끄는: 올가 토카르추크. ■
폭설 카페
혼자라는 말은 먼 설원으로부터 온다
한파가 있었고
어떤 예감처럼
네 등 뒤로 눈이 쏟아진다
너는 폭설을 모르고 전조는 좋지 않다
카페의 문이 열릴 때마다 눈이 들이친다
익숙한 한기가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금방 묻혀 버릴 발자국을 따라 눈밭이 펼쳐진다
우린 흰 눈 위로 쏟아지는 빛이
침묵을 어떻게 견디는지 보고 있을 뿐이다
보호구역을 벗어난 야생동물처럼 시선이 멀다
뒤로 펼쳐진 적막은 아득해서 가늠하기 어렵고
눈 뒤의 시간은 얼마나 차가울까 생각한다
멀리 다른 무늬의 발자국을 남기는 나란한 우리가 보인다
폭설이 말을 덮고 온기를 덮는다
카페 안으로 흩날리는 눈
두 손으로 컵을 감싸면 무엇이든 괜찮아지는 마음
컵 안에서 눈이 녹는다
거품이 입술에 닿고 출구는 너에게 닿아 있다
비슷한 눈사람들이 들어서는 설원
감춰진 발을 비비고 팔짱을 놓쳐도
기대고 싶은 믿음처럼 눈사람처럼
서로를 돌아볼 수 없어 앞만 보는 우리는
쌓이는 눈만으로 우린 사라지지 않아
내내 폭설 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