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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노수신이 일찌기 한가하게 앉아 있었는데, 서생 박광전(朴光前)이 산사(山寺)에서 내려왔다. 소재가 물었다.
"산사에 있으면서 무슨 책을 읽었는가?"
"한유(韓愈)의 글을 읽었습니다."
"몇 번이나 읽었는가?"
" 오십 번 읽었습니다."
"읽은 것이 어찌 그리 적은가?"
"마음을 가다듬고 뜻을 음미하느라 읽는 것이 더디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하나 모두 다 마음에 새기고 새겨 헛되이 읽어 넘긴 것은 없느냐?"
"글을 읽을 때면 한 줄에 열 번씩 잡념이 생겼으니, 비록 흐트러진 마음을 거두어들이려 해도 헛되이 읽어 넘긴 것이 반이 넘었습니다."
"그렇다네. 사람마다 모두 이러한 근심이 있다네.
무릇 독서할 때 마음이 흐트러지더라도 읽는 것이 천 번 만 번에 이르면 비록 읽은 바가 정밀하지 못하더라도 끝내는 나의 것이 된다네. 비록 마음을 가다듬어 읽더라도 읽은 바가 오십 번뿐이라면 필경 나의 것이 되지 못하네. 독서하는 방법은 많이 읽는 것이 으뜸이라네."
내가 공사(公事)로 인해 상국(相國)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뵈었는데, 서애가 물었다.
"내가 보기에 그대의 문장은 격조가 매우 높네. 무슨 책을 읽었는가?"
그러고는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소재의 말을 이야기했더니 서애가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네. 생각(思)이란 마음의 밭(心田)이라네. 마음을 집중하여 독서하는 것은 마치 밭 가는 자가 한 치, 한 자씩 흙을 일구는 것과 같다네."
두 재상의 말씀은 각기 터득한 바가 있다. 그런데 내가 일찌기 시험해 보니 흐트러진 마음을 거두어들임이 공부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소재의 말이 이치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