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氷點) 아래의 주먹밥 / 이원우
오늘은 오랜만에 날씨가 맑다. 수은주가 영상으로 치솟아 오르진 않았지만 외출엔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바깥 기온이 -3도란다. 눈길도 아니다. 새벽부터 주먹밥을 싼다. 다섯 가족의 손길이 드바쁘다. 초등학교 1학년 손자 녀석도 팔을 걷어붙였다.
오늘은 갈 곳이 있다. 추모관(追慕)이다. 가슴에 묻어야 할 혈육이 안치 되어 있는 곳, 살아생전에 너무나 불효를 저질렀었던 장모님도 거기에 계신다. 머지않아 아내와 내가 이승을 떠나면, 같이 들어갈 공간도 그 추모관에 있다.
액션스타 장동휘, 세계 챔프 최요삼도 거기서 영면하고 있다. 참, 아버지가 장성이었다는 가수 임성훈도 거기 있지. 또 다른 유명한 학자 몇몇도.
10여 년 전, 그때도 나는 세상을 허릅숭이와 진배없이 살았었다. 근데 지금에 와서 뜬금없이 내가 주먹밥에 관한 별다른 추억을 들먹인다? 하지만 추모관으로 떠나기 앞서 그걸 다시 한 번 곱씹어야, 진정한 의미가 되새겨질 것 같다. 여긴 고향 부산이 아니니까.
내가 노인 학교를 무료로 직접 운영한 지 15년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간도 크게 전국에서 처음으로 ‘노인 문학상’이라는 걸 제정 운영하게 되었다. 이태에 걸쳐서.
노인 문학은 아동 문학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어서 ‘노인 문학’이 노인들이 쓰는 시나 소설 수필 희곡 등인 줄 아는 모양인데, 천만에 잘못 짚고도 몇 뼘이나 남았다. 아동문학은 아동이 창작한 글이 아니다. 재론할 필요도 없이 아동 문학은 아동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는, 어른들의 손에 의해서 빚어진 글이다. 노인문학은 창작자가 문인 등 사회의 지도자다. 삼척동자라도 내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리라.
한 번 시상에 4백 만 원 이쪽저쪽의 경비가 소요되었다. 내가 백 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을 내밀었고, 노인 학교 봉사자인 이병수 부경대 교수와 백이성 문화원장, 양하윤 공군부대 부사관, 색소포니스트 김광종 조광페인트, 문해진 관리 본부장 등이 주머니를 털었다. 객석에 있던 고금란 소설가가 거금을 쾌척했고.
유네스코 부산 협회장, 부산 문협 회장, 국회의원 둘을 비롯한 공군 3875부대장, 구청장, 각급학교 교장, 유네스코 부산 협회 회원, 지방유지와 내 노인학교 학생 150여 명으로 시상식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특히 여자 노인 학생들은 거의 전부가 치마와 저고리인 교복을 갖춰 입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하였고. 400명이 북적대었다.
그날 백미는 ‘주먹밥’이었다. 쌀과 보리쌀, 김치, 멸치 등 네댓 가지를 버무려 만들었으니, 그거야말로 주먹밥의 원조? 동원된 사람들이 기가 막힌다. 노인 학생, 공군 3875부대 부사관, 경혜여고 학생, 구내식당 종업원들이었다. 비닐봉지에다 두 개씩 넣어 주었는데, 씹으니까 얼음가루가 이 사이에서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 마침내 최상윤 교수는 단상에서 눈물을 훔쳤다. 목에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왜 주먹밥이냐고? 뭔가 노인들을 이해하는 데에 상징적인 메시지를 던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굳세어라 금순아’ 등 6․ 25 관련 가요를 불렀는데, 노인 학생들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내 지휘에 따라 일어섰다 앉는 것이며 노래 시작과 마침이 잘 훈련된 해병대 병사와 흡사했으니까. 내빈이며 하객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오죽하면 우리 가족들까지 입을 모아, 나더러 신흥 종교 교주 같고, 학생들은 광신도들 같다고 했을까?
한데 아직도 노인 문학상은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백년하청!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돈 있는 사람이 하루 저녁 술값만 아끼면 그 기금이 될 텐데…….안타깝다. 노인 문학상 손 놓은 지가 10년이 넘었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니 낭패다.
그러고 보니 오늘 추모관에 들르는 것은 의미가 크리라. 사진으로나마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고, 얼음이 씹히는 주먹밥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장동휘 앞에 가서 ‘굳세어라 금순아’도 한 번 부르고. 나보다 먼저 나서 나보다 먼저 이승을 떠난, 사람들과 묵언으로라도 빙점 아래의 ‘주먹밥’에 대해 몇 마디 얘길 나누는 건 당연하다. 사자(死者)지만 그들과는 섬서하지 않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 부처님을 믿거나 하느(나)님을 믿는 ‘노인’이었으니…….
내가 수제비태껸을 벌이자고 짐짓 이러는 게 아니다. 물론 거기엔 두 번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노인 문학상’, 그 진화에 대한 간절한 모두의 기도도 포함되기야 하겠지. 나는 계속해서 추모관에 발걸음을 할 것이다. 더운 날이 다가와도 주먹밥은 빙점 아래에 있을 거다.
11. 8장
2013년 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