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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예배자로 나오신 귀한 성도님들 삶과 가정 가운데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누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모여 있던 120명의 성도들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겠죠. 굉장히 은혜 받는 시간이었을 거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가 이렇게 임하시는구나.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지금 한 곳에 모여서 경험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임재는 천하 각국에서 모여온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도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었겠죠. 아니 저 사람들이 왜 우리 말로 저렇게 이야기를 할까 하면서 신기하고 놀랍다면서 한 명씩 한 명씩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죠.
어느새 기도하던 120명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커다한 무리가 모여 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열한 제자는 서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죠. 베드로는 힘주어서 담대히 주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앞에 살펴본 그 내용, 베드로의 설교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 강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여러분 성령 강림이 어떻게 일어났어요? 이것은 약속하신 즉 예언의 성취라는 것으로 선포해 주었죠.
두 번째 이것을 가능케 한 예수는 도대체 누군가 그 예수는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무슨 일을 하셨어요?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또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을 잘 요약해서 정말 멋지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그렇다면 이 일이 유대인들과 어떻게 연루가 되어 있는가라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죠.
여러분 설교를 이렇게 쭉 작성하면서 작성은 안 하고 이제 바로 이야기를 했겠죠. 하는데 서두가 있고 물론 결론까지 가면서 이렇게 절정에 이르잖아요. 절정에 이르는 대목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너희들과 관련이 있다는 거 유대인들의 마음을 완전히 휘협하는 아주 강력한 메시지로 이 베드로가 그들에게 선언한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의 입장에 서서 베드로가 마지막 핵심적인 말을 하는 그 말씀을 한번 읽어보실까요? 저와 여러분들이 유대인이 되는 거예요. 지금 그리고 한번 36절을 읽어보십시오. 어떤 마음으로 다가오는가 시작
그런즉 이스라엘 운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 누구냐 바로 너희 이스라엘 온 집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렇게 선포한 것이죠.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신성 모독이라는 죄목을 씌워서 나무에 달려 죽게 했기 때문이죠.
반면 예수를 살린 주체는 누구라고 돼 있습니까? 하나님이라 선포하고 있죠. 즉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셔서 주가 되게 하셨고 그리스 구도가 되게 하셨다고 강력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잘 한번 지금부터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베드로가 전한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베드로가 전한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유대인이야말로 어떤 존재예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신성 모독의 죄를 지은 자들이죠.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몰았지만 베드로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못 박은 내가 죄인이 돼버리는 거예요. 내가 신성 모독죄로 몰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얼마나 이것이 나의 삶에 멘붕으로 오겠어? 멘탈이 무너지는 거예요.
야 그러면 예수님이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죽었다면 이것이 사실이 아니고 내가 신성 모독죄라면 난 어떻게 해야 돼 십자가에 죽어야죠. 그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을 모독하고 살 수 있습니까? 구약 율법에 따르면 죽어야죠.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예루살렘 유대인들이요.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듣고 이렇게 반응을 해요. 우리 37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말씀이 검이 되어 듣는 자 마음을 완전히 찔러 쪼개니까 그들이어 찔림을 받고 반응한 것이 어찌 할 것 어찌 할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죠. 여러분 찔렸다는 이 표현은 말 발굽이 땅을 움푹 팬 그러한 상태를 묘사하는 거예요. 즉 말씀이 딱 들어왔는데 양심에 가책을 받고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그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이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몰랐던 죄, 그리스도를 경히 여겼던 죄,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죄,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걸 부정했던 믿지 못했던 이러한 죄악들이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나서 마음의 심한 고통으로 자라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를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먼저 죄를 깨닫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두 가지가 있다는 거 죄를 깨닫게 하는 두 가지 요소입니다.
첫 번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죄를 깨닫게 한다는 거예요. 말씀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한다. 우리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 잘 아시는 말씀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시작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것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모든 부분을 관통한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의도를 간파하신다는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요. 우리가 가장 은밀하게 생각하고 있던 그 부분 내밀한 곳까지 파고 헤친다는 것이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면 가까이 할수록 그리고 자주 대면하면 대면할수록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재돼 있는 죄를 발견하게 된다는 거예요.
실제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가를 말씀하잖아요. 창세기 6장만 봐도 하나님께서 그 노아의 시대에 한탄하셨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과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마음을 보셨다. 인간들이 이렇게 보니까 생각하고 마음에 갖는 이 계획들이 악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 사건을 일으킨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한 예로 우리 다윗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다윗 정군이죠. 그렇죠 성경을 쭉 보다 보면 성경에 등장한 인물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그래서 이세의 아들 사울을 배하시고 2세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얼마나 마음이 기뻤겠어요.
그런데 그의 삶의 여정 가운데 전쟁터에 나가서 싸울 때마다 이깁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승승장구하게 하신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 군사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홀로 남아 눈을 잠시 붙이게 되는데 그 잠이요 깊은 잠으로 빠졌던 것 같아요. 눈을 떠보니 어느덧 해질녘이 되는 거예요.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옥상에 이렇게 쭉 올라가 봤더니 어스름이 깔리는 사방이 눈에 들어오는데 도시가 한눈에 다 들어오는 거 여기 불고 있고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고 어차피 밥 짓는 모습이 있고 연기도 이렇게 보이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에 목욕하는 젊은 여자의 실루엣이 싹 들어오는 거예요. 순식간에 사로잡혀버린 것이죠. 결국 다윗은 사람을 보내서 그녀를 데려오게 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10계명 중에 6개와 7개를 범하는 안타까운 죄를 짓고 만 것이죠.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계명을 범하고도 자신의 죄에 대해서 간과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죄인의 모습이라는 죄를 지었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볼 수 있도록 책망하셨던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죄 죄라는 것은 하마르티아 관역에서 벗어나다 비겨나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벗어난 삶 이것을 우리는 죄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참 아이러니하게도 말씀과 친밀해질수록 내가 관역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보게 된다는 것이죠.
더 잘 알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에는 내가 얼마나 벗어났는지 몰랐는데 말씀을 보니 내가 이만큼 벗어났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3장 20절에 말씀하는 것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거다. 율법 때문에 죄를 깨닫는 거 쉽게 말씀을 드리면 탐내지 말라.
이 말씀 때문에 탐내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참 지혜가 되는 거예요. 이 말씀이 죄악이구나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핵심이고 지혜가 되는 거. 그래서 시편 119편 130절은 말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큰 소리로 읽어봅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추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니
우리 인생은요. 다 우둔한 자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빚으니 우둔한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하더라.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한번 성경이 죄라고 말하는 것 우리 요한복음 16장 9절에 말씀해 주고 있는데 우리 한번 읽어보실까요?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니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음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말씀이 깨달아져야 고백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시고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저와 여러분들은 동의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이야기해도 돼요.
무슨 죄가 그래 살인죄를 지었어요. 강도짓을 했어요. 세상 사람들은 대법원에 그렇게 반응했어요. 아무리 죄라고 해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왜 그럴까 두 번째하고 연결이 돼요. 두 번째는 말씀이 죄를 깨닫게 하지만 두 번째 요 본문에서 느끼는 것은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거예요. 우리 요한복음 16장에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고 있어요. 성령이 오시면 오시면이라는 표현과 함께 무엇을 깨는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깨닫나 세상을 책망하신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죄가 죄라는 것을 여겨지고 찔림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역사에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이죠.
성령께서 죄를 책망하시기 때문에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을 들어도 죄가 죄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지 아니하는 이 죄가 죄라는 사실 여러분 그 사실을 믿으십니까? 여러분들이 아멘하고 동의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백의 나라는 것이죠. 아무리 세상 가운데 나아가서 조리 있게 정말 멋지게 가르쳐도요. 그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께서 그 말씀이 전해질 때 역사하시는 순간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죄라는 사실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또한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은 하나님 내 주변에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저들에게도 성령께서 찾아가 주셔서 그 말씀이 들려질 때에 깨닫고 수용하고 고백하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 기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두 가지는요. 바로 말씀과 성령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요.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을 듣고 성령이 깨닫게 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죠 그래서 아마도 마음 가운데 야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 우리가 이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들에게 나타난 반응이 뭐였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무거운 죄를 어떻게 해야 되냐 우리가 예수 그분을 못 박는 데 앞장서고 우리 유대인들이 그 일을 했는데 어떡하면 좋겠느냐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어찌할 거라는 것은 이들이 뭘 요청하는 거예요? 우리 죄 문제 해결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해결책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시해 줍니다. 38절에 보면 세 가지 해결책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우리 38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첫 번째는 회개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 아시죠? 예수님의 앞선 자로서 예수님을 증거하기로 세례요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했던 대로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걷게 하는 자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요단강 부근에서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전파하면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 전파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운 회개하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죠. 그리고 사탄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찾아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사탄을 무찌르시게 된 거죠.
그리고 하신 말씀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마태복음 4장 17절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때로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공생의 시작 첫마디가 뭐였어요? 회개하라 예수님이 12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의사항을 잘 전달해 준 후에 2명씩 짝을 지어서 전도로 파송했어요. 그들이 둘씩 나아가 보냄 받은 자들이 했던 말 마가복음 6장 12절 뭐라고 기록돼 있습니까? 같이 읽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여러분 복음의 핵심 가치를 선포하기에 앞서서 무엇을 먼저 요구해요? 회개하라 회개해야 된다. 여러분 왜 회개가 필요합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죄 용서 부분이에요. 죄 용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회개가 있어야 된다라는 것이지, 여러분 회개라는 말은 마음과 생각을 바꿀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회개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단순히 깨닫고 후회하는 정도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방향 전환이 일어날 때야 비로소 그것이 참된 회개라고 말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삶 속에서 날마다 회개합니까? 큰 그림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고 회개해서 돌이켜서 지금 천국을 향해 가고 있어요. 그런데 가는 여정 속에서 여전히 세상 가운데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유혹이 있으니까 또 죄악의 길로 왔다 갔다 하는데 이때 죄악의 길에서 회개하고 잡고 바른 길로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있어야 되기 때문에 날마다 회개가 필요한 거 그렇잖아요. 그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길에 사단이 없으면 좋겠는데 이 사단이 자꾸 우리를 꼬십니다.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때마다 다른 길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회개 주님 내가 잘못 길 들어섰네요. 돌아서게 해 주십시오. 바른 길 가게 해 주십시오. 회개하는 것이시오. 누가복음 19장에 보시면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방향 전환을 한 한 사람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삭개오입니다. 그에 대해서 설명할 때 세리장이요 부자라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이요. 순결한 무제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의 삶을 한번 보십시오. 그의 이름과는 걸맞지 않은 전혀 순결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직업 때문이에요. 그의 직업이 당시에 허가받은 도둑이잖아요. 로마에서 허가해 준 도둑이에요. 허가해 준 도둑. 그러니까 그의 삶은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 부정하게 여긴 세리장이었다는 당시 여리고에는 로마로부터 파견된 세리들이 늘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세관들이요. 요단강 동편 지역에서 유대 땅으로 들어올 때 그 물품을 갖고 들어오면 세금을 거둔 것이죠.
삭개오는 바로 그러한 일을 하는 자들의 우두머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교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그 사람이 부자라잖아요. 부자 그러면 통상적으로 우리가 느낄 때 이 부자는 어떤 부자예요? 뭔가 좀 깨끗하지 않은 부자라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죠. 당시 유대인들은 식민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자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대조적인 표현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세리 부자 사기라는 이 단어는 그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데 매우 부족한 단어들이었다는 것이죠. 그런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자신의 죄를 깨달으니 완전히 180도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 회개의 영이 부어지는 은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늘 곁길로 가지 않고 우리 주님께 회개함으로 바른 길로 또 바른 길로 전진해 나아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회개하는 것이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태도의 변화로 놀라운 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 번째는 회개해야 된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라 그렇게 말하죠. 여러분 세례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요. 회개의 외적 표현이죠. 우리가 회개했다라는 것을 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세례라는 의식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고백의 공적 선언이죠. 하나님 내가 예수를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나의 주인입니다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잖아요. 세례가 초대교회 당시에 세례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물론 지금 침례교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약식으로 이렇게 머리에 물을 세 번 찍잖아요. 서부와 서사와 성령의 이름으로 약식으로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 세례는 어떻습니까? 물속에 완전히 수장시키는 거죠. 담그는 거 보니까 이렇게 웃기더라고요. 본인이 혼자 일어나 가면 안 돼 이렇게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물속에 잠길 때 뭘 의미하는 거예요? 나의 에스알은 다 죽습니다. 그리고 들려 울림 받을 때 내가 거듭나서 새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나는 그 고백을 담아서 세례 의식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이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잖아요. 이것은 무슨 의미겠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나도 십자가에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거듭나 부활한 삶을 살겠습니다는 고백이 이 세례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즉 주님과 연합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물론 잘 아십시오. 세례 자체만으로는 절대 구원받지 못합니다. 세례 의식을 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죠. 그 세례 의식은 믿음의 고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잖아요. 그러니까 믿음의 고백이 중요한 것이죠. 따라서 회개하여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 그래서 우리도 문답을 하잖아요. 문답을 하고 여기서 같이 선포하고 그리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뭐가 또 포함되냐 하면 죄사함의 은총이 이 안에 포함이 되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를 갈라놓고 갈라 먹은 다음과 같은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죄 알에 거하는 동안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제시한 대로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 즉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백하는 그 사람은 죄사함을 받겠노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받으셨습니까? 세례 다 받으셨잖아요.
웬만한 분들이 여러분 예수의 이름으로 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가운데 죄사함의 은총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아야 돼 갈라디아서 2장 20절 우리 같이 한번 이 소리를 읽어보면서 마음 가운데 적용시켜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삶 말고요. 내 안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삶 사실 이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늘 다투는 것이거든요. 내가 살고 싶은 욕구와 욕망이 내 안에 가득해 있어요. 그런데 말씀이 찾아와서 그거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그 갈등 속에서 주님 잠깐만요. 이게 지금 더 중요해 하고 이렇게 살아갈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점점 줄어서 하나님 그 말씀을 내가 수용하고 그 뜻대로 살겠습니다. 노력하는 이 방향으로 자꾸 전환시키는 훈련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가 거듭난 삶의 모습이 점점점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로 받고 죄사함의 은총이 있어 우리의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 번째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거예요. 여기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 말하는데 사실은 이것을 구분해 놓고 이야기해서 말하는 거지. 여러분 회개할 때 우리 안에 성령이 있습니다. 됐죠 회개할 때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형으로 보셔야 돼요. 구분을 하자니 이러는 거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그래서 죄 용서의 은총이 일어나는 것이죠.
여러분 오순절에 120명에게 임한 성령은 그들에게만 제한된 성령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모든 인류를 위해서 열어주신 성령이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 39절에 다 이야기하고 이렇게 전개하는 39절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 약 39절 띄워졌네요. 안 돼요. 성경을 보면서 읽어봅시다. 39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 약속은 뭐예요?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베드로가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선포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실 때 하셨던 말씀 있잖아요. 오직 성령이 너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시작해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성령이 실질적으로 임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땅 끝까지 선포되어지는 이 일을 위해서 지금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듣는 너희들도 지금 성령 받아서 뭐 하라는 것입니까?
땅 끝까지 흩어져 버리는 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따라서 누구든지 회개하여서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는 것은 누가 가장 기뻐하는 일이에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 그래서 양 100마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잖아요. 한 마리가 돌아왔을 때 그 기쁨의 잔치 한영원이 돌아오기를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서 저와 여러분들도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수혜자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명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말씀을 듣고 있던 모든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결단을 요청합니다. 말씀을 쭉 다 전하고요. 결단을 요청하는데 우리 40절 말씀 어떻게 요청하는지 한번 읽어보실까요?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이게 핵심이죠. 지금까지 쭉 설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 너희 구원받아야 돼.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받아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죠. 패역하다는 것은 굽다 휘어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부러진 세대 가운데서 구원을 받아야 된다.
여러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보면 아시겠지만 세상이 하도 구부러져 있어 가지고 그래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히 여기고 세상과 발맞춰 사는 분들이 사실 많다는 거예요. 이게 옳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옳은 양 살아가요.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인지 모르고 그냥 그대로 젖어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죠. 잘못인 것을 깨달아야 되는데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중에 뉴스를 보는데 저한테는 너무 또 충격적이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교감 선생님이 양을 해주고 심을 뱉고 보를 하고 저 영상을 보면서 친 게 느낌. 이게 아이랑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해야 되나 제 마음까지 굉장히 복잡하더라고요.
그래도 그건 아니지 혼자 이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다음에 이어지는 보도가 더 저를 충격에 빠지게 했습니다. 부모가 담임 선생님 계속 욕하고 해코지 빠지게 지 그런데 여러분 세상은 이러한 일들이 점점 비일비재해지고 있다는 것이죠. 옳지 않은 길 이것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그냥 저질러지는 일들이 많다는 거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고 당당한 여러분 하지만 성경은 한 예로 들지만 이 세상의 이야기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굽은 길이 아닌 곧은 길을 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고은 길은 무엇인가? 그 도덕적인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고른 길은 말씀이죠. 말씀 카논 성경은 카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곧은 막대기 우리가 30cm 자아 이야기하는 그 자고라는 것을 카논이라고 이야기해. 즉 고른 것은 구부러지는 순간 죄악이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곧잖아요.
그것을 구부려 행동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죄가 된다는 따라서 말씀대로 살면 참된 것이지만 말씀에서 벗어나면 그릇된 것 관역에서 벗어난 삶이 되는 것이죠. 성경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16장 4절, 17장 17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5절을 통해서 어그러지고 거스러 세대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한 세대 가운데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흠없고 순전한 자녀가 되어서 빛들로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는 것이죠.
어둠이 몰아닥칠 때 그래도 빛을 비출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깨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특별히 여러분 로마서 12장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잖아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라. 말씀을 통해서 뭐가 옳은지 어떤 것이 고든지 그것을 분별해야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야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42장 16절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구분대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리
누구를 보내시겠다는 겁니까? 예수를 보내주셔서 이분 곧 곧 뛰하겠다. 이렇게 말씀했는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맞다고 말할지라도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세상 풍토를 열심히 쫓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생각의 기준, 삶의 기준이 세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입니다. 여러분 패역한 세대 가운데 구원받은 삶은 어떠한 삶인가? 오늘 본문 이후에 41절 2절에 기록되어져 있는데 그 이후에 이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살아갈 때에 구원받은 자의 삶의 모습이구나라는 것을 배우게 될 거예요. 앞으로 이제 제가 그 말씀을 계속 이어갈 건데 간단하게 말씀 마무리하면서 그 내용을 잠깐 보겠습니다. 41절 42절 우리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음에 이날의 신도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느라
그 말을 받은 사람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 3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말씀에 동의하고 믿겠다라고 고백한 것이죠.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첫째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둘째 서로 교제했다. 셋째 떡을 뗐다. 넷째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이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겁니다. 그 땅을 뒤흔드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그렇게 믿겠다고 하고 세상 가서 세상에 발맞춰 살고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면 어떻게 그 나라에 변화가 있습니까? 그들이 변화된 그 말씀을 붙잡고 어떻게 하면 주의 말씀을 더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것인가 사도의 가르침 앞에 날마다 나아가는 거예요. 세상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삶을 살아야죠. 열심히 살아야 돼. 그러나 그 삶의 현장 속에서도 언제나 말씀 앞에 서게 되는 이 갈망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교재하기에 힘썼어요. 세상 교재 얼마나 많아요 그렇죠 나가면 이런 모임, 저런 모임 모임 할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에서 모여야 된다. 그래서 우리 신앙 안에서 같이 성장해야 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모였다는 거예요. 떡을 뗐다는 것이죠. 예찬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애찬을 하면서 서로 사랑의 교재를 나눴던 것이죠.
세상에 모임 가면 다 먹잖아요. 그래서 모여서 먹으면서 같이 그 애를 또 뭐 했어요? 기도할 여러분 이렇게 말씀과 기도와 교재의 생활이 이들의 삶 가운데 일어나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지역이 변화될 수밖에 없죠. 여러분 우리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이겠어요? 그래 나 한 사람 잘 살아야지 그게 아니잖아요. 저와 여러분들 외신에 불러주시고 지금 이 자리에 세우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이 지역의 하나님의 나라를 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내가 예수 믿고 성령받고 구원받았으니 이 패역한 세대를 우리 신은 이미 뒤집어야 돼요. 할렐루야 이런 마음이 같이 모아져야 돼요. 그리고 이 세상을 이 패역한 세대를 곱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돼요. 말씀 앞에 자꾸 들어가야 되고 어떻게 하면 말씀을 잘할 것인가 연구해야 됩니다.
그리고요. 모이기에 힘써서 같이 교제하고 사랑의 교제 가운데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그뿐만 아니라 기도하면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오로지 기도하면서 그 일에 앞장서는 자들이 되어질 때에 지역은 변화가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좀 소망하면서 다음 주에는 선교사님이 말씀하신 다음 주부터 이런 것들을 좀 세부적으로 같이 말씀을 좀 강요하려고 합니다. 함께 마음을 모으시고 교회를 세워가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