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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문화』2019년 봄호에 실린 『히스테리 미스터리』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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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건너가는 숨은 힘
-이영숙 시집, 『히스테리 미스터리』, 실천문학사, 2019.
-안효희 시집, 『너를 사랑하는 힘』, 푸른사상, 2018 겨울.
박 시 영
이영숙의 『히스테리 미스터리』는 어둡고 소외된 세계를 바라보고 우리들의 비루한 일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주먹을 꼭 쥐고”(「버스의 평균율」) 성큼성큼 어둠을 건너간다. 그런 행보에 대해 “시가 직전이라는 소용돌이와 제자리걸음이라는 뇌관 사이의 구체적 운동임을 믿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안효희의 『너를 사랑하는 힘』은 인간의 내면과 존재론적 탐구를 통해 삶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시인은 따뜻한 관계와 소통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영토에는 “느린 구름을 머리에 이고 천천히”, “두근거리는 의심으로”(「너를 사랑하는 힘」) 걸어가는 한 사람이 있다. 그들 시의 영토로 들어가 보자.
1. 어둠을 헤쳐 가는 힘
『히스테리 미스터리』는 이영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영숙은 1993년 장미출판사에서 출간된 첫 시집 『시와 호박씨』 이후 25년 만에 이번 시집을 상재했다. 오랜 시간 시를 썼지만 시집으로 묶어내지 못한 그간의 고통을 짐작만 할 뿐이다.
25년을 건너뛰어 발간된 그녀의 두 번째 시집 『목요일의 패러독스』는 그동안 갈고 닦은 시인의 내공을 보여준다. 이영숙 시인은 자신만의 감각과 사유에 충실하여 삶과 세계를 드러낸다. 전통적인 서정시가 시적 대상을 묘사할 때 보여주는 소실점이나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볍게 벗어난다. 시적 대상을 설명하지 않고 느낌과 감각을 던져놓는 언어는 생동감 있고 모던하다. 또한 탈서정의 미학을 지녔지만 해체되지 않고 사람살이의 구체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모던하지만 현실을 재현하는 가독성 높은 시를 이룬다.
이영숙 시인은 시집의 서시(「4월」)에서 세계의 근원적 어둠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를 보여준다. 시집의 서시는 대개 시집 전체의 이미지나 시집을 통한 시인의 전언을 함축한다. 더군다나 시의 풍경은 시인 세계관의 반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서시(「4월」)의 풍경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예감하게 한다.
시인은 “햇빛에 동굴을 파”는 뱀과의 유혈목이에게서 어두운 출소자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감옥에서 “갓 출소한” “피 냄새는 가시었으나” “아직 어디로 갈지”(「4월」) 모르는 유혈목이를 묘사한다. 시인은 세상의 온갖 꽃들이 만개하는 4월의 하늘 아래 하필이면 진달래 꽃그늘에서 어둡게 구불대는 유혈목이에게 시선을 준다. 꽃들이 만개하는 세상은 시인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갓 출소한 여리고 작은, 어둡고 외로운 생명의 살아냄, 시인은 그 먹먹한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세계를 아프다 말하지 않는다. 힘 있는 언어로 담담하게 직시한다.
청소물고기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시인은 소외된 자들의 오지 않는 희망을 읽는다. “어항에 담겨서 한 생이 지나가는 동안” “우리가 보지 못한 꽃밭이 어디선가 흐드러질 때/ 뒤섞이지도 못하면서 청소부는/ 물길을 따라 정기적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수목장」). 시인은 우리 사회 소외된 자들의 희망과 절망 너머의 비극을 절제된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자들”에게 시적 자아의 정서를 이입한다. 우리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이거나 소외된 자들을 “어두워오는 중세를 줄곧 날았을”(「까마귀 네트워크」) 까마귀에 비유한다. 까마귀는 도심의 뒤켠 어디에서건 시인에게 말을 건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근원적인 자신의 죄를 생각한다.
위와 같이 시인이 눈길을 주는 시적 대상은 유혈목이, 청소물고기, 까마귀처럼 소외되고 아픈 어둠의 존재들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어둠은 다음의 시 「버스의 평균율」에서 비극적인 힘으로 묘사된다.
관절이 없어서 나는 기차가 되지 못했다
기적소리 대신 클랙슨
목을 쳐들어 울음을 멀리 보내는
늑대가 되지 못하고 개처럼
목전의 먹이 앞에서 컹컹 짖었다
레일이 없어서 기차가 되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귀를 대고 들으면 지구 저편에서
후드득 자기를 뜯어 안고 달려오는 심장
그의 귀는 코너를 돌 때마다
아스팔트처럼 납작하게 지져졌다
번개와 직접 교신하는 시간대를 견디며
우리는 무지개처럼 안이했다
휘발되는 속도로 소식이 지체되었다
나무들처럼 가지런히 서 있는 연대기
태생은 번복되지 않았다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주먹을 꼭 쥐고
버스가 달린다
버스는 버스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우르르 몰리는 슬픔들을 재배치 한 뒤
불면의 차고지에서 조용히 시동을 끄는 것 외엔
-「버스의 평균율」 전문
어느 인생인들 난관 없이 기적소리 울리며 힘차게 달리기만 하겠는가. 그러나 단 한 번도 시원하게 달려보지 못한 사람의 한과 슬픔은 어떠할까. 이 시는 그런 한과 슬픔의 깊이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나는 기차가 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화자인 시인은 불온한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소외받은 마이너리그의 삶을 이야기한다. 시인은 “목을 쳐들어 울음을 멀리 보내는 늑대” 대신 “개처럼 목전의 먹이 앞에서 컹컹 짖었”고 “레일이 없어서 기차가 되지 못”한다. 시인이 레일에 귀를 대고 기차소리를 들을 때면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지구 저편에서 자기를 뜯어 안고 달려오는 심장”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작아지고 낮아져서 “아스팔트처럼 납작하게 지져”지는 바닥의 아픔을 느꼈다.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마이너리그의 삶은 어쩌면 시인을 포함한 우리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시인은 머리와 가슴을 때리는 “번개와 직접 교신하는” 것만으로 힘든 시간을 견디지만 그것은 “무지개처럼 안이”한 꿈에 불과하다. 화자인 시인이 살아온 개인의 내력과 태생은 번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차가 되지 못한 버스는 “더렵혀지지 않으려고 주먹을 꼭 쥐고” 달린다. 방법이 없다. 화자는 버거운 삶의 짐을 내려놓지도 피하지도 않은 채 “우르르 몰리는 슬픔을 재배치한 뒤” 버스의 길을 갈 뿐이다.
마이너리그의 삶에 연민과 지지를 보내지만 시인의 시선은 낙관적이지 않다. “불면의 차고지에서 조용히 시동을 끄는 것 외엔”의 구절에서 마이너리그 삶의 비극성을 담백하게 보여주고 확인한다. 시인은 항상 삶의 구체성을 벗어나지 않는 현실인식을 보여준다. 다음의 시 「장소의 불문율 -고시원」에서 시인은 근원적 어둠을 넘어 힘이 있는 세계를 열어간다.
(생략)
옥상에서 종일 비를 맞는
팬티랑 청바지는 정작 아무 생각 없지
젖은 팬티를 껴입고
생애만큼 무거워진 청바지에 발을 집어넣는 것은
언제나 비의 처음 목격자
두 번째도 세 번째도 하체에서 물이 뚝뚝 흐르지
옥상이 없다면 세상은
그로테스크해졌을 거야
옥상이 자기를 3인칭으로 쓰는 관록으로
오늘은 햇볕의 평수를 두 뼘이나 늘리지
비치파라솔 아래 침이 질펀한 재떨이
나쁜 걸 나쁘다고 말하지 않을 때
나는 어딘가 다녀온 거지
사람이 집을 닮아가는 속도와
집이 사람을 닮아가는 속도가
계단참에서 만나 안부를 주고받지
복도의 표정 구석의 숨결
그렇고 그런 가족이지
스물두 살 뚱뚱한 총무가
고무장갑도 끼지 않고
두툼한 쌀을 건성건성 씻어 안치지
밥과 김치 무료 제공에
밥을 해주는 이는 남자도 엄마만 같지
종지에 담긴 감정이 찔끔 엎질러지지
사소한 질문도 예민한 대답도 비켜가는
나는 내게 식상한 동물이지
침엽수림을 새로 깔아도
체취는 종교처럼 동굴 밖까지 흘러넘치고
-「장소의 불문율 -고시원」 부분
이 시는 고시원의 삶을 형상화한다. 시인의 언어는 누추한 삶이라도 담담하게 살만한 공간으로 만든다. “옥상에서 종일 비를 맞는 팬티랑 청바지” “햇볕의 평수를 두뼘이나 늘리”는 옥상이며, 안부를 주고받는 “그렇고 그런 가족”이 그러하다. 시인의 언어가 비추면 사물이 살아나고 햇볕의 평수가 늘어난다. 흩어진 개인은 가족을 이루고 고시원의 삶이라도 견딜만하게 되어간다. 누추한 삶을 견딜만한 삶으로 바꾸어내는 시인의 언어에는 생명의 환한 힘에 대한 긍정이 담겨 있다. 그녀가 보여주는 소소한 것에 대한 애정, 명랑함을 통한 삶의 치유는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에너지이다.
“비치파라솔 아래 침이 질펀한 재떨이”가 놓인 고시원의 옥상이 매일 살아가는 장소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옥상이 없다면 세상은/ 그로테스크 해졌을 거야”라고 경쾌하게 반전시킨다. 고시원의 삶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거나 가지런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다만 단편적이고 인상적인 느낌을 감각적으로 툭툭 던져 놓는다.
이 시의 결구는 어떠한가. “사소한 질문도 예민한 대답도 비켜가는/ 나는 내게 가장 식상한 동물이지”에서 누구에게도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는 화자야말로 자신이 가장 싫은 존재라고 고백한다. “침엽수림을 새로 깔아도/ 체취는 종교처럼 동굴 밖까지 흘러넘치고”의 구절에서 시인은 동굴 속 동물의 삶 같은 고시원 생활을 정제된 슬픔으로 보여준다. 비극적 정조를 채로 걸러낸 채 고시원으로 상징되는 힘든 삶을 단단한 언어로 형상화한다.
그녀의 언어는 무거운 삶을 가볍게 건너뛰고 어려운 삶을 견딜만하게 바꾸어낸다. 무거운 이미지를 경쾌하고 담담하게 묘사하는 힘 있는 시어는 세계의 어둠을 헤쳐 나간다. 이영숙 언어의 숨은 힘은 어둠을 헤치며 걸어온 그의 시정신의 결과이다.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동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깨 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녀의 앞으로의 행보에 눈 밝은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애정이 기대된다.
2. 존재의 탐색과 소통에의 의지
안효희 시인은 1999년 『시와사상』으로 등단하여 세 번째 시집을 상재한 중년 시인이다. 첫 시집 『꽃잎 같은 새벽 네시』 (2005. 한국문연), 두 번째 시집 『서른여섯가지 생각』 (2012, 시와사상사)에 이어 세 번째 시집 『너를 사랑하는 힘』 (2018, 푸른사상)이 있다. 이번 시집 『너를 사랑하는 힘』에는 관계와 소통, 인간의 내면, 죽음과 현대인의 풍경을 담고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시적 소재를 정확한 이미지를 통해 단정하게 형상화한다. 전형적인 서정시의 작법에 충실한 그녀의 시편들은 구체적 상황의 현실을 재현하고 시인이 느낀 정서와 메시지를 정직하게 드러낸다.
시적 대상인 ‘죽음’은 안효희 시인이 상재한 세 권의 시집을 일관하여 등장한다. 시인은 도처에 마주치는 죽음을 깊이 바라보고 우리의 삶을 환기한다. 죽음에의 천착은 삶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한 방법이다. 삶의 무의미함을 통해 삶을 치유하는 창조적 에너지이기도 하다. 시인이 타인의 죽음을 노래하는 것은 죽음 저편으로 사라져 간 존재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기도 하다.
시인은 사라지고 떠나가는 사람들을 “풍선이 공기 중으로 빠져나가듯”, “누군가의 꿈도 그렇게 날아가겠지”라고 표현한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어머니는 어머니의 나라로”간다고 받아들인다.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바코드가 새겨진 사람들 하나둘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수백 마리의 나비」)로 나타난다. 시인에게 죽음은 감상적이기 이전에 물기를 걸러낸 뒤의 탐구의 대상이다.
사라지는 것들에 무심할 수 없는 시인의 시선은 “로또 뒷면에 유서를 쓰고 죽은 사내”가 보도된 신문의 기사에 눈길을 준다. “같은 DNA를 가진/ 수면제와 술병이 뒹굴고// 같은 유전인자를 지닌/ 로또와 아이스크림이 녹아 뒹구는”(「로또 아이스크림」) 사내의 죽음을 떠올린다. 사내 곁에 놓인 수면제와 술병, 로또와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며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꾸다가 무의미하게 죽은 한 사내의 삶을 연민으로 들여다본다.
시인은 “거미줄로 뒤덮인/ 보일러실에서 발견된 유골”의 한 죽음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보일러실에 누워 발견되지도 못한 채 “죽어서도 죽지 못한 6년” “그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거미줄/ 온몸으로 작성된 마지막 언어”(「유언」)를 발견한다. 죽은 이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거미줄이 보여주는 고독에 주목한다. 그리고 “사람, 그 너머엔 무엇이 있나?” 자문하는 그녀는 죽음에서 거미줄처럼 방치된 인간의 고독을 본다.
시인은 이상과 같은 죽음에의 천착 외에도 인간 존재의 고독, 내면의 어두움을 깊게 들여다본다. 다음의 시 「치유의 방식」을 살펴보자.
(생략)
결코 버릴 수 없는 타임캡슐
내 집에도 가득하다
읽지 않는 책, 걸려 있는 옷
알리바이를 증명하듯 탑승권과 입장권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나날과
먼지처럼 떠다니는 우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수많은 나를 겹겹이 껴안고 살아
습자지 위의 붓글씨처럼
지나간 시간이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몸을 긁는다
(중략)
행복보다 중요한 건 불안하지 않는 것
상처를 차곡차곡 외부에 쌓아 곱씹으며
수천수만의 장면과 비명으로
이루어지는 치유의 방식
오래도록……
하지만 변하지 않는 본질은 없어
모든 것 스스로 내려놓는 날이 올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말 없는 시간이
곧……
-「치유의 방식」 부분
이 시의 화자는 불안한 인간 내면을 치유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자인 시인이 들여다본 인간의 내면은 수많은 자아로 분열되어 있다. 또한 “구겨진 나날”과 “먼지처럼 떠다니는 우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더군다나 거기에는 상처들까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상처로 가득한 인간의 내면을 치유하는 방식으로 시인은 집안에 물건을 쌓아두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물건을 쌓아두는 행위는 저장강박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나를 껴안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읽지 않는 책이나 걸려 있는 옷, 가방 따위에는 지나간 시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시인에겐 그것들 위로 “얼룩말이 뛰고” “폭포 물소리가 들린다”. 추억이 깃들어 있고 시간이 새겨진 도구들은 인간을 불안으로부터 보호해준다. “행복보다 중요한 건 불안하지 않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시인은 인간을 불안한 존재로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인 시인에게 추억이 담겨진 시간을 먹고 사는 도구들은 “결코 버릴 수 없는 타임캡슐”이다. 그러기에 시인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은 그 타임캡슐 같은 상자들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곱씹는 일이다. 그것들은 “수천수만의 장면과 비명으로/ 이루어지는 치유의 방식”이다.
그러나 시인은 결구에서 그것들 또한 “내려놓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말 없는 시간이”며 그 시간은 “곧……”찾아 올 것이라 말한다. 시인이 시선을 보내는 시적대상들은 모두 녹록치 않다. 삶의 무의미함과 덧없음을 드러내는 죽음이 그렇고 어둠과 상처뿐인 인간 존재의 내면, 고독한 현대인의 삶의 풍경이 그러하다. 이 도저한 비극성을 감내하는 시인의 내면은 어둡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가슴한쪽에서부터자신을파헤치는시간”을 통해 발가벗은 “스스로에게서버림받은몸”(「바바리 맨」)을 본다. 그것은 용서할 수 없이 단단한 “철갑옷 바바리 속의 나”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단단한 철갑옷 바바리를 입고 있는 또 다른 자아가 있음을 말한다. 내면에 도사리고 있어 감추고 싶은 자아는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수시로 출몰하는 또 다른 나”이며 시인은 그런 나를 용서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이렇듯 안효희 시인은 내면의 성찰을 통해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탐색의 시를 쓴다. 시로써 죽음과 어두운 인간 존재의 내면을 파고들며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을 직시한다. 그녀의 시는 사유가 많지만 관념적이진 않다. 정확한 이미지를 통해 사유를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서정적이거나 감각적인 시들에 비해 무겁게 다가오지만 시인의 숨은 힘은 탐색의 힘에 있다. 또한 존재를 꽃피우는 따뜻한 관계를 꿈꾸는 데에 있다. 다음의 시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를 살펴보자.
장작 난로에 불 피우려면
기도하듯 무릎 꿇어야 한다
아니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한다면
장작 난로에 불 피워야 한다
신문지 북북 찢어 불쏘시개를 깔고
밤을 견딘 밤나무 잔가지를 모아 불을 붙인다
차가워 냉정했거나
얼었던 마음에서 불씨 붙일 수 있다면
말라
죽어가던 나무가 타닥타닥
다시 살아난다
불이 되면서 생긴 갈등과
증오의 부스러기가 연기로 피어오른다
가만히 무릎을 꿇은 자세,
연기를 핑계 삼아 눈물을 흘려도 좋다
갇혀 있던
불의 씨앗,
생일날처럼 마주 앉아
손바닥 활짝 펼쳐 빈 손을 보여준다
바람이 없어도 흔들린다
바람이 없어도 피어난다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 전문
시인은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불씨가 붉은 맨드라미처럼 피어나기를 희망한다. 시인이 생각하는 ‘불의 씨앗’은 말라 죽어가던 나무를 다시 살아나게 하고, “차가워 냉정했거나 얼었던 마음”을 녹여주는 온기이다. 불의 씨앗이 “불이 되면서 생긴 갈등과 증오의 부스러기”를 연기로 피워 올릴 때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는 피어난다. 시인은 아직 갇혀 있던 불의 씨앗이 불이 될 때 관계는 꽃의 모습으로 피어난다고 말한다. 인간의 불안한 내면과 존재의 비극성을 탐색해 온 시인이 살아있는 한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인간적인 관계와 소통이다. 시인은 인간과 인간이 적극적인 소통의 노력을 할 때 관계를 꽃 피울 수 있다고 말한다.
붉은 맨드라미는 꽃의 이름이지만 의미를 확장하여 시인의 시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언어의 꽃인 붉은 맨드라미, 붉은 칸나는 시인의 시적 지향성으로도 읽혀진다. 인간의 조건을 뛰어 넘어 존재를 꽃 피우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며 따뜻한 마음이라고 시인은 나지막하게 이야기한다.
시집의 표제작인 「너를 사랑하는 힘」에서도 시인은 관계와 소통을 이야기한다. 서로 맛 닿은 사과가 물러지듯, 너무 가까운 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적절한 거리는 몇 미터인가!”라고 시인은 상처 주지 않는 관계를 위해 필요한 적절한 거리를 생각한다. “썩고 싶지 않았던 고백과 뉘우침이, 느린 구름을 머리에 이고 천천히 걸어”(「너를 사랑하는 힘」) 가듯 썩지 않는 적절한 관계를 위해 뉘우치고 천천히 걸어갈 것을 말한다.
시인이 살아있는 한 놓을 수 없는 관계와 소통을 위한 마음이 (「너를 사랑하는 힘」)에 잘 나타나 있다. 발이 빠지고 의심하면서도 느린 구름처럼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시인의 사랑하는 방식이다. 시인은 정확하고 담담한 언어로 삶의 모습을 포착하지만 맨드라미, 칸나가 타오르는 숨은 힘을 독자들에게 선사해준다.
박시영: 2007년 《시와 상상》등단. 시집 『바람의 눈』 있음. 광주대학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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