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1. 인간이 갖고 있는 고통의 치유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이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넘어서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결과였다면 고통은 개인의 무력함을 동반하는 거대한 힘으로 잠재되어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사진첩’에서 국민의 군대가 총칼로 한 도시의 사람들을 공격하고 학살했던 장면은 ‘경하’라는 작가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힌다. 상처의 치유를 위해 작업했던 5월을 배경으로 한 소설의 완성을 통해서도 고통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를 위협하는 번민 앞에서 죽음에 대한 유혹에 흔들리게 되고 그러한 혼란이 가져온 슬픔은 어느 순간 ‘고통’ 그 자체로부터 망각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게 만든다. “그때 알았다. 파도가 휩쓸어 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가야 한다.”
2. 고통으로부터의 탈출 시도는 그녀가 꿈꿔왔던 검은 나무를 심어 아픔을 기억하려는 특별한 프로젝트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프로젝트는 출판사 기자 시절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만난 제주도 출신의 ‘인선’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실현하려던 계획이었다. 프로젝트는 경하의 삶의 신난한 여정과 병행하면서 서서히 잊어져갔고 그렇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선의 사고소식이 왔고 제법 오랜 시간 만에 그들은 다시 만난다. 그때 인선은 제주도에 남아있는 새를 위하여 자기 집으로 가달라고 부탁한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단호한 요구였다. 집에 남긴 새를 살리기 위해서 지체되어서는 안 되는 출발을 원했기 때문이다. ‘새의 구출’ 그것은 결국 인선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가 공유했던 역사의 비극과 상처를 만나는 과정이었다.
3. 치매 걸린 제주도의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인선은 그동안에 해왔던 사진과 다큐영화 제작 대신 목공일을 하면서 지내왔다. 힘들게 도착한 인선의 목공소에서 경하는 특별한 체험을 갖는다. 분명 서울의 병원에 있을 인선의 형상이 그녀 앞에 등장하면서 그녀에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마치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관측하려 하는 찰나 한 곳에서 고정되는 빛”과 같은 양자역학의 신비스런 체험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어쩌면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1948년 제주도를 휩쓸었던 ‘4.3’에 관한 역사였다.
4. 인선은 어머니가 남긴 기록을 통해 어머니 또한 끔찍한 역사의 광풍 속에서 가족을 잃었고 특히 오빠에 대한 비극적인 추적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가 스크랩하고 기록한 문서 속에서의 어머니는 그동안 인선이 갖고 있던 소극적이고 순응적인 이미지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제주도에서 대구의 형무소로 이동했던 오빠에 대한 기록을 추적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정열적이었고 실체를 파악하기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마지막 치매 시절 어머니는 딸을 언니처럼 따르며 의존하였다. 어떤 순간에는 딸을 지키려 하는 본능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성의 힘이 사라졌을 때에도 남아있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단절할 수 없는 애정이었다. 인선은 그때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고통으로 연결된 사랑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인선에게 ‘4,3’을 추적하는 힘을 제공했다. 그렇게 망각을 이겨내기 위한 투쟁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5. 결코 시작하지 못했던 프로젝트의 꿈도 인선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특히 자료를 찾으면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라고 느끼기도 했지만, 자신의 부모와 친척들이 살았던 땅을 바라보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은 ’단념‘이 아닌 ’기억‘이라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그들이 왔구나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잃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인한 기쁨 속에서도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6. 인선은 어머니의 치열한 노력을 확인했고 그것을 계승하면서 자신을 옭아매던 고통의 실체에서 벗어나기보다는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극복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들이 약속했던 검은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 ‘작별하지 않는다’를 완성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경하가 압박과 부담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던 프로젝트는 인선의 선언 속에서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두 개의 다른 형태의 비극이었지만, 그것의 근본적 뿌리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폭력이었으며,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존엄을 무참하게 무너뜨렸던 학살이었다. 그것은 비록 지나간 시간이 되었지만, 결코 사람들의 기억과 인식 속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는 비극적 진실임을 확인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작별할 수 없는’ 일이며, 두 사람의 삶에 대한 진실성을 통해 확인한 그들의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7. 『작별하지 않는다』는 결코 가해자에게 질문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가해졌던 상처와 아픔에 대해 망각하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특정한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 벌어졌던 학살의 공포와 비극은 지워버려야 할, 왜곡되어야 할 ‘사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벌어졌든지 그 곳에서는 평범하고 순수했던 인간들의 무참한 죽음이 있었고, 존엄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라진 인간의 비참함이 존재했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비열하고 추악한 실상이다.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공유하기, 어쩌면 거창한 실천적 행위가 없을지라도 우리가 겪었던, 아니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시대적 비극 속에서 중요한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아닐까? 그것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상처입었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던지는 위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것이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첫댓글 - 슬픔과 고통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은 치열하면서도 조용하다. 김지하의 '흰 그늘'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차분하게 응시하고 있다. 불합리한(부조리한) 역사적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고통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