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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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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예안파종택(光山金氏 禮安派宗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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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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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산 28-1 (원소재지 : 안동군 와룡면 오천리 132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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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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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필(金富弼, 1516~1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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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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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대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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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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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안동댐 건설로 이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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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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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식(관리자 : 김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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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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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유형문화재 제227호, 1973년 8월 31일 지정, 1동 | |
건축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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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군자리, 오늘날 그것은 문화재 단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단지 내에 있는 옛 건축물들은 문중에서 대대로 유지 보존하여 온 종택, 묘우(廟宇), 정사(亭?), 강당 등으로, 지난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될 때에 원 지점으로부터 약 2km 떨어진 이곳으로 집단 이건되어 아쉽기는 하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행정 구역은 안동군 예안면 오천동이었으나, 현재는 와룡면 오천동으로 편입되었다.” 안동에서 예안으로 나가는 굽은 길의 한쪽으로 산 중턱을 문지르고 들어앉아 있는 오천 문화재 단지. 그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군자리’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
건축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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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당의 좌측 끝에는 참으로 날렵하게 생긴 작은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통상적인 건물의 비례에 비해서는 가로의 길이가 세로(높이)보다 짧게 지어져 있다고 느껴지는 건물이었다. 실제로 가로보다 세로가 짧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눈에 익은 건물들 보다 깔고 앉은 터의 가로면 길이가 짧고, 높이가 더 길어 보이는 건물이라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우리 눈이 익숙한 비례로부터 조금 벗어나 있으므로, 이 건물은 실제보다는 날렵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사당 건물의 문 앞쪽으로는 가로 5m, 세로 1.5m 정도의 뜰이 시멘트로 지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비닐로 짠 자리가 사방 모서리가 돌로 눌려진 채 깔려 있었다. 사당의 문은 창호지가 여러 군데 찢겨져 나갔고, 그곳을 통해서는 그 안쪽이 들여다보였다. 이 사당은 광산김씨 예안 입향조 김효로와 임난 의병장 김해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
건축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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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락을 깎아 2층의 넓은 터를 만들고, 아래쪽에는 주차장을, 위쪽에는 앞으로 터진 부분을 마당으로 비워두고 산기슭의 밋밋한 경사면을 이용하여 10여 채의 고옥들이 반월형의 호를 그리며 배치되어 있다. 위쪽의 마당 끝에서 앞을 향하면 산자락 사이의 좁직한 분지가 횡으로 열리고, 그 정면으로 뚫고 들어온 앞산이 호박덩이 같은 형상으로 자리 잡고 앉아 분지에 만곡의 선을 만들어 낸다. 둘러싼 산들은 다 나지막하였으며, 어느 한 군데 터진 부분이 없이 잘도 좁은 분지를 감싸 안아 주고 있는데, 사방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사선으로 열리는 하늘이 시원한 안계를 마련하여 주고 있다. 후조당종택의 별당은 기름칠 하여 잘 관리된 오래된 송판의 미끈한 색감으로 우리의 눈 속으로 파고든다.
별당의 오른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후조당종택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 앞으로는 반 칸 규모의 마루가 깔렸고, 난간이 세워져 있다. 뒤쪽으로도 길이 2칸, 폭 1칸 정도 넓이의 뒷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후조당종택 옆은 읍청정이다. 두 형제의 집은 그렇게 한집처럼 옆으로 늘어서 오늘 우리에게 형제가 한 몸처럼 손잡고 몇 백 년의 세월을 타고 넘어온 역사를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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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당(後彫堂) |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의 호이다. 이황(李滉)이 써 주었다고 하며 별당의 마루방 안에 걸려 있다.
후조당 주인의 굳은 절개 벼슬을 내려줘도 즐거워 않네 매화를 마주해 앉아 빙설의 향기 풍기고 도의 실재를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도리를 읊조리네
이황이 김부필에게 보낸 시이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당시에도 후조당이 당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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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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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김씨의 파조 '김효로' |
광산김씨 예안파의 외내 시대는 김효로(金孝盧)로부터 시작된다. 이 계열을 파보에서 지칭하듯이 ‘예안파’라는 이름으로 부를 때에는 파조를 김효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천 문화재 이건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오천 군자리』라는 책자의 기록이다. “(김회의) 아들 효로가 성종 연간에 출사하였으나 영달을 단념하고 유벽하면서도 풍광이 아름다운 예안에 터전을 잡았다.”
김효로(金孝盧, 1454~1534)는 자가 순경(舜卿)이고, 호는 농수(聾?) 또는 춘포(春圃)이다. 『예안파보』의 기록이다.
“단종 갑술생이고 경자(庚子)에 생원이요, 조행(操行)이 탁이(卓異)하여 일천(逸薦)으로 장차 현달할 전망이 있었으나, 무오사화를 당함에 덕을 숨기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 이조참판을 증직으로 받았으며, 후학이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향사한다.” 『오천 군자리』의 김효로 관계 기록이다.
“숙종 임오년에 사림이 현 동쪽에 사당을 세우고 이계양(李繼陽:퇴계의 조부)과 김효로를 병향하고, 사우 이름을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 『오천 군자리』에 보이는 이황의 김효로 「묘갈명」의 한 구절이다.
“공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외조(外祖) 경산현령(慶山縣令) 노응(盧膺)에게서 자랐으므로 이름을 효로라 하였고, 그 후로는 종조부(從祖父) 효지(孝之)에게 양육을 받아서 이내 예안현 오천마을에 살았다.”
김효로의 부친 김회는 김효원(金孝源)과 김효로 두 아들을 두었는데, 김효원은 후사가 없었다. 김효로는 양성(陽城)이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김효로의 아들 김연(金緣)은 자가 자유(子由)이고, 호가 운암(雲巖)이다. 1487년(성종 18) 출생으로, 생원시, 진사시, 문과, 중과(重科)를 거치며, 가선대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1544년(중종 39)에 타계하여 와룡에 묻혔다. 그의 이력 중에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다가 출척(黜斥)되어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된 일이다. 김연은 창령조씨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오천은 원래 봉화금(琴)씨 터전이었어요. 봉화금씨 터전으로 우리 광산김씨가 들어간 것이지요. 그래서 오천은 금씨와 김씨가 어울려 사는 터전이 된 것인데, 입향조(김효로)의 손자이신 후조당(後彫堂)의 형제 종반들 사이에서 7군자가 나셨지요.” 라고 김준식이 말하였다.
『오천 군자리』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후조당(金富弼)?, 읍청정(?淸亭:金富儀), 산남(山南:金富仁), 양정당(養正堂:金富信), 설월당(雪月堂:金富倫), ?일휴당(日休堂:琴應夾), ?면진재(勉進齋;琴應壎) 등을 칭하여 ‘오천7군자(烏川七君子)’라고 한다.”
후조당과 읍청정은 형제분이고, 산남 양정당?설월당은 후조당의 사촌 형제분들이고, 일휴당과 면진재는 외사촌들이라고 김준식이 말하였다.
관련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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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부필의 가계 |
후조당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은 광산김씨의 23대에 속하고, 22대 김연(金緣)의 큰아들이다. 그의 자는 언우(彦遇)이며, 후조당(後彫堂)은 그의 호이다. 1516년(중종 11년)에 태어나서 1577년(선조 10년)에 타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출중하였고, 1537년(중종 32)에는 사마시에까지 합격하여 명망이 드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과거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한 사정을 『오천 군자리』에 수록되어 있는 김조순(金祖淳)의 김부필 시장(諡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알려준다.
“갑진년(1544년)에 운암공이 별세했고, 다음 해에 중종이 승하하였고, 또 그 다음 해에 복을 벗었으나, 과거에 대한 공부는 하지 않았다. …… 명종 말년에 조정에서 공의 착한 행의를 듣고 비로소 사관(祠官)으로 등용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렇게 김부필은 벼슬에는 별 뜻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한 그의 입장은 1568년(선조 1)에 효릉참봉에 제수되었을 때 퇴계가 서울에서 편지를 보내 출사를 권유하자 그가 화답하였다는 시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건너산 구름에게 한마디 묻는다. 골짜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승천을 바라는 건 무슨 마음인가? 펼치고 모음은 내게 달려 있는 것이지만 또한 신룡의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구름은 말한다.
이 시는 정황상 벼슬길에 나가고자 하지 않는 김부필의 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정황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과연 출사를 마다하는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인가, 선망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인가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어쩌면 이것은 시대 상황 속에서 벼슬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김부필의 답답한 소회를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후조당 김부필은 배위가 진주하씨인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아우 부의의 자식 김해(金垓)로 후사를 이었다. “읍청정(김부의)은 하나뿐인 아들 근시재(김해)를 형님인 후조당에게 양자를 보내고 당신께서는 따로 양자를 들이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두 분을 다 모십니다.” 라고 김준식이 말하였다.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는 김부필의 아우 김부의(金富儀)와 안동권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김부의의 자는 신중(愼仲)이고, 호는 읍청정(?淸亭)이다.
“일찍이 퇴계 문하에 종유하여 독지위학(篤志爲學)하니 선생(퇴계)이 ‘선기옥형’(璿璣玉衡:혼천의)을 만들도록 명하고, 또 호를 지어 주었다.”고 『예안파보』에 기록되어 있다. “처음 역동서원을 다 지은 후 고을에 어진 장자가 적지 않았으나 선생이 특히 공을 산장(山長:원장)으로 추천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선생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니, 선생에게 중하게 보인 바가 이와 같았다.”
김부의는 1525년에 태어나 1582년에, 향년 58세로 타계하였다. 근시재 김해가 태어나는 것은 1555년의 일이다.
김해의 자는 달원(達遠)이고 호는 근시재이다. 『근시재문집』에 의하면 그는 1587년(선조 20)에 행의(行義)로 추천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다음해에 다시 참봉에 제수되었을 때에는 서울에 있었던 관계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사마시를 치르고는 얼마 후에 사직서를 내고 돌아와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더불어 병산서원에서 『퇴계선생문집』을 수정하는데 참여한다.
그러다가 1589년(선조 22)에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로 보임되고, 예문관 검열(檢閱)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 해에 동료들이 사초를 태운 일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김해는 원래 이 일에 관계가 없었으나 변명하지 않고 전리로 돌아온다.
김해의 사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임진난에 창의해서 …… 좌도의진(左道義陣)을 편성하여 대장으로 추대됨에 적을 추격하여 남하하다가 1593년(선조 26) 6월 19일 경주 진중에서 졸(卒)하다.” 『예안파보』의 기록이다.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안동의병장 이공 정백(庭栢), 배공 용길(龍吉)을 좌우 부장으로 삼았다.” 『근시재 문집』에 보이는 ‘좌도의진’의 모습이다. 의진의 모습은 꽤 규모 있게 갖추었으나 세력이야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의병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김해를 수장으로 하는 ‘좌도의진’도 의기만이 드높은 집단이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사령의 명을 받았고 병사들의 세력은 외롭고 약할 뿐이니 …… 마땅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세력이 궁진하면 죽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근시재 문집』에 보이는 김해의 이러한 말은 당시의 사정을 말하여준다.
김해는 계사년 5월에 밀양에서 부인의 부음을 들었다. 그는 집으로 달려와서 하루를 부인의 시신 옆에서 머물고는 다시 의병진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병을 얻었다. 그리하여 경주 진중에서 타계하니, 향년 39세, 아까운 나이였다.
『근시재 문집』에 실려 있는 김해의 「절명시」이다.
백 년 사직을 안존시킬 계책으로 6월에 전복을 입고 나섰네. 나라를 위하여 몸이 먼저 죽으니 모친 생각에 혼이 홀로 돌아가누나.
후조당 김부필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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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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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필(金富弼) , 1516년 ~ 1577년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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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光山) |
자 |
: |
언우(彦遇) |
호 |
: |
후조당(後凋堂) |
시호 |
: |
문순(文純)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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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오천(烏川) |
출신지 |
: |
안동(安東) |
분묘지 |
: |
안동(安東) 금학산(金鶴山) |
입사경로 |
: |
1537년(중종 32) 사마시(司馬試) 합격 |
증직및기타 |
: |
이조판서(吏曹判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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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을 포기하다 |
김부필은 22세에 사미시에 합격하였으니 늦은 편이 아니었다. 이 해 부친이 귀양에서 풀려났고 해서 대과에 도전해 볼 요량으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그러나 그가 목격한 것은 비이성적인 정치 싸움과 선비들의 억울한 죽음이었다. 성균관에 함께 기숙하고 있던 유생들 가운데도 말을 잘못해서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가 결정적으로 과거시험을 포기하게 된 계기는 인종(仁宗)의 죽음이었다. 인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소문이 있지만, 결국 대윤과 소윤 간의 정치 싸움의 와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실제로 인종이 죽고 명종이 등극하면서 세력을 잡은 소윤 일파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연이어 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김부필은 닥쳐올 상황을 미리 예견한 것일까, 인종의 죽음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호곡하였다. 그리고는 과거시험과 입신 출세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 후 퇴계 선생이 같은 예안 고을에서 도학을 창도하자 그는 그 문하에 입문하여 오로지 도학에 몰두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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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지어 김하서와 성청송을 흠모하다 |
김부필을 일찍이 시를 지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을 흠모한 일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을사년, 즉 인종이 승하한 이후로 벼슬을 포기하고 은거했던 인물들이다. 처지나 상황이 달랐고 함께 어울린 적도 없지만 그 정신과 의리는 하나로 투합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명분을 중시하고 원칙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역시 예안지역 퇴계 학파의 특징이 드러난다. 그들은 스스로 추로지향이라는 자부심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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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사양하다 |
김부필은 도학에 전념하면서 50대에 접어들었을 때 유일(遺逸)로 조정에 천거되었다. 유일이란 벼슬이 없이 학문에만 열중하고 있는 선비들을 말한다. 조정에서는 자주 각급 지방관에게 나라에 활용하기 위한 인적 자원으로 유일의 천거를 지시하였다. 김부필은 특히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서 능참봉 등 지위는 비록 낮지만 관직이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도학을 고집하였다. 퇴계 선생이 마침 당시에 서울에서 벼슬을 하고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냈다. “비록 즐겨서 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임금의 은혜가 저러하니 나와서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어떠한가?” 그러나 김부필은 답장에다 벼슬을 뜬 구름에 비유하면서 끝내 사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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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건립에 힘쓰다 |
김부필은 도산서원의 건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서원을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동문 제유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퇴계 선생이 남긴 뜻을 계승하는 사람이 없어서 평소 선생께서 거처하고 노닐던 장소가 꼴 베고 나무하는 아이들 놀이터가 되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부터 노비와 전토를 내어 서원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탬으로써 도산서원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가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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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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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로(金孝盧) |
생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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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金緣) |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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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昌寧曹曺) 조치당(曹致唐)의 딸 |
형제 |
: |
김부인(金富仁), 김부신(金富信), 김부의(金富儀), 김부륜(金富倫)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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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에 정착하기까지 |
김부필의 집안은 신라 때부터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발전하였는데, 그들이 안동 사람이 된 것은 김부필에게 21대조가 되는 조상이 고양(高陽)에 살다가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이사하면서부터였다. 또 오천(烏川)으로 옮기게 된 것은 조부인 김효로(金孝盧)가 기묘사화 때 화를 피해 오천에 은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의 부친 김연(金緣)도 간관으로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처벌을 주장했다가 원한을 쌓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들은 도회지를 버리고 예안 고을 오천에 터를 잡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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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리 군자마을 |
한강 정구가 오천 고을과 사림들을 둘러보고 “오천 고을에 사는 사람은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부의 주변에는 인물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형제와 친척으로 긴밀하게 교유하였다. 김부의는 읍청정 김부필의 동생이다. 종형 산남공 김부인, 그 동생 양정공 김부신, 설월공 김부륜, 외종 형제 일휴당 금응협, 면진재 금응훈 등과 함께 어울리면서 퇴계 문하에서도 함께 공부하였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시를 논하고 의리를 밝히며 과실을 규제하고 길흉사에 있어서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오천 고을의 풍속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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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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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 |
향사 |
: |
낙천서원(洛川書院) |
학파 |
: |
퇴계 학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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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최응룡(崔應龍), 서극일(徐克一), 김성일(金誠一), 금응협(琴應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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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부주의 존숭 |
김부필은 중국 송대 성리학자인 진덕수(眞德秀)의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존숭했다. 이러한 경향은 퇴계 학파의 일반적인 학문 경향인데 특히 김부필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평소 본령을 돈독히 하고 실천에 힘쓰는 학문을 지향하였다. 퇴계 문하에 입문하고 나서 견해가 더욱 밝아지고 정밀해졌는데, 그가 가장 힘을 기울여 공부한 것은 바로 『심경부주』였다. 눈을 감고 바로 앉아 마음속으로 깊이 체험하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빠져들었고 의문 나는 점이 있으면 퇴계 선생에게 나아가 질의하였다. 심학에 관한 한 그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퇴계도 그의 견해를 인정했다는 증거는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그의 심학에 관한 조예는 문집 속에 있는 「심경차록(心經箚錄)」에 잘 나타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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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좌 문제 |
퇴계선생언행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연이 실려 있다. 어느날 김부필은 김부의(金富儀), 김부륜(金富倫), 금응협(琴應夾), 금응훈(琴應壎)과 함께 퇴계 선생을 뵈었다. 선생께서는 선비들이 고을에서 앉는 자리 즉 향좌(鄕坐)를 정하는 문제를 논하면서 벼슬의 귀천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되었고, 단지 옛날 방식대로 나이에 따라 앉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김부필과 나머지 제자들은 옛날과 지금은 매우 다른데 이와 같이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종일토록 극렬히 변론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자 제자들은 귀로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선생께서는 상고를 논하시고, 제자들은 말세를 말하고 있네. 서원의 규모가 정해져 있는데, 어찌 반드시 향좌를 나누리오.” 퇴계는 행례의 판단에 고례를 기준으로 했으며, 동시에 제자들은 시속을 반영하여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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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의 계승 |
김부필은 퇴계와 같은 고을에 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학문에 있어서도 예안 학맥의 일반적인 특징이 잘 드러난다. 즉 퇴계학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을 계승한 것인데, 출처관과 학문관에 있어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퇴계와의 유사한 성격을 보였다. 또한 퇴계가 그에게 보낸 편지가 40통이 넘는 것을 볼 때 퇴계 문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저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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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저작 |
「심경차록(心經箚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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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명 |
『후조당선생문집(後凋堂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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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당선생문집(後凋堂先生文集)』 |
김부필의 문집인 『후조당선생문집』은 오천세고(烏川世稿) 안에 포함되어 있다.
오천세고는 김부의 집안의 문집으로 부친인 김연(金緣)의 문집인 『운암일고(雲巖逸稿)』, 김부필의 문집인 『후조당선생문집』, 동생 김부의(金富儀)의 『읍청정유고(?淸亭遺稿)』, 그리고 조카 김해(金垓)의 문집인 『근시재선생문집(近始齋先生文集)』, 김해의 장자 김광계(金光繼)의 문집인 『매원유고(梅園遺稿)』, 김광계의 손자 김순의(金純義)의 문집인 『과헌일고(果軒逸稿)』로 구성되어 있다.
『후조당선생문집』은 문집 4권과 부록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발이 없어 간행 과정은 알 수 없다.
1, 2권에는 시가 있고, 3권에는 서가 있는데 주로 퇴계를 비롯하여 동문 사우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4권에는 「심경차록」, 「주자연보」, 「연평문답」, 「서설문청독서록후」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심경차록」으로서 김부필이 퇴계 선생에게 『심경부주』에 관해 질의한 내용과 퇴계의 답변을 합쳐서 묶은 것이다. 행장에서 강조된 심학에 대한 조예와 심경의 존숭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심경부주』에 관한 수많은 주석서 가운데 급문 제자 단계에서 작성된 주석서로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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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차록(心經箚錄)」 |
김부필이 『심경부주』에 관하여 의문나는 점을 퇴계 이황에게 질의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그의 심학에 관한 조예가 잘 나타나 있으며, 조선시대 『심경부주』 주석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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