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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34. [역경의 열매] 조동진 <1-30> “손잡은 남북 정상…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도래”
1946년 2월 고향 평북 용천 떠나 세계선교 사역하며 북한과 접촉
조동진 목사가 지난달 1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미스터 미션 조동진’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글로벌블레싱 제공
내가 해방을 맞은 곳은 압록강 지류, 의주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는 고진강 물가 모래밭이었다. 1945년 8월 7일, 붉은색 딱지의 소집장이 배달됐다. 소집장은 조선반도 청년들을 전쟁터에 보내기 위해 특별 지원병을 모집하는 징병 영장이었다.
소집일은 8월 16일. 초등학교 훈도(교사)였던 나는 8월의 햇볕이 내리쬐는 고진강가에서 원수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갈 운명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학교 급사 소년이 헐레벌떡 달려와 소리를 질렀다. “전쟁이 끝났어요. 천황이 울며 항복했어요!” 그때까지 듣기 어렵던 조선말이었다. 나는 맑고 새파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던 날도 시원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남북 관계가 풀리는 것 같아 기뻤다.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도래한 것이다. 판문점 회담 소식을 접하면서 1991년 6월 6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당시 유엔주재 북한대사였던 한시해 부부장 일행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있는 카터 전 대통령의 자택을 찾았다. 북한 대표는 카터에게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에 와 줄 것을 요청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그러겠다”고 답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북한이 자기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지 분명히 말해줄 것, 그리고 서울을 거쳐 휴전선을 넘어 평양에 갈 것. 두 번째 말에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다. 휴전선은 군사경계선이지 국경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터는 이어서 더욱 놀라운 말을 했다.
“당신들(북한과 남한)은 항상 하나의 조국(One Korea)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나는 국경을 넘으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전 대통령으로서 남쪽 서울에서 휴전선을 넘어 북쪽 평양에 감으로써 한반도가 한 나라임을 증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카터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기도로 마무리했다.
“하나님 아버지, 휴전선을 넘어 평양에 갔다 올 때는 한반도의 긴장,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가 풀릴 수 있는 큰 선물이 서로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것은 그들의 범죄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셨고,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가 되어 70년간 고국을 떠나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고레스 황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한 민족, 한 국가를 이루도록 만드셨다.
한민족 분단의 비극은 이제 끝나야 한다. 나는 1946년 2월, 고향이 있던 북한 땅을 떠났다. 이후 교회 안에서 목회 사역을 했고 1978년, 통일의 길을 이어가기 위해 후암교회 담임을 내려놨다. 이것은 북한에서 태어나 해방과 통일을 위해 사시다 먼저 가신 선친의 유업을 잇는 일이기도 했다. 북한과의 접촉은 세계선교 사역에 뛰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89년 1월 고향을 떠난 지 43년 만에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 24회에 걸쳐 여러 모양으로 북한을 왕래할 수 있었다. 원한의 분단 시대를 종식하고 민족통일의 종이 울릴 그날을 기도한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 [역경의 열매] 조동진 <1> "손잡은 남북 정상…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도래"
* [역경의 열매] 조동진 <2>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로 체포된 아버지
* [역경의 열매] 조동진 <3> 믿음·인품·열정의 윤치병 목사에 큰 감명
* [역경의 열매] 조동진 <4> 주일 출근 강요한 日 교장에 "결근계 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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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24년 평북 용천 출생 △장로회신학교, 미국 에즈베리신학대학원, 윌리엄캐리대학원(박사) 졸업 △후암교회 담임목사 △국제선교협력기구, 동서선교연구개발원 설립 △아시아선교협의회 창립 △김일성종합대(종교학과) 초빙교수 △조동진선교학연구소장
***[역경의 열매] 조동진 <2>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로 체포된 아버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 당해… 아버지 친구들 모두 기독교 지도자
1925년 촬영된 조동진 목사 200일 기념 사진. 오른쪽은 부친 조상항 선생, 왼쪽은 모친 장송실 여사.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께 우리 민족의 교회에서 애국심과 민족 운동이 어떻게 함께 얽혀져 왔는가를 들어왔다. 아버지는 때때로 초대 교회는 주일마다 십자가 깃발과 태극기를 교회 지붕에 휘날렸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훗날 내가 선교학을 전공하면서 이 같은 아버지 말씀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미년 3월 1일 독립선언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다시피 했다. 일본 군벌은 만세운동이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 학교, 교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들은 민족 교회 지도자들을 탄압하면서 한편으로는 선교사들과 타협하는 이중적인 전략을 썼다. 그들의 전략은 먼저 중국 땅에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과 교회 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르면서, 나라 안에서는 소위 문화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정치운동으로 몰았다. 그리고 모든 문화 활동을 교회에서 분리시켰다.
나는 온 겨레가 일제의 민족 압살 음모에 시달릴 때인 1924년 12월 19일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망국의 한을 안고 일제 강점과 억압, 착취의 시대를 굳세게 싸우며 산 독립운동가셨다.
아버지 조상항은 14세 의주 양실학교 시절, 태극기와 일장기를 동시에 들고 평안도를 순례하던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황제 융희를 환영하라는 명령을 거부해 구타와 함께 퇴학 처분을 받았다. 훗날 부친은 신민회 사건과 105인 사건의 학생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지목돼 체포됐다. 1910년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혐의로 또다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과 신문을 당했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모두 한국 기독교의 초대 지도자들이었다. 백낙준 박사는 부친과 선천 신성중학교 동기였고 박형룡 박사는 같은 학교 2년 후배였다. 해방 후에도 끝까지 북한에 남아 의산노회에서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한 홍하순 목사도 아버지와 신성중 동기동창이었다. 부친은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을 꿈꿨다. 출옥 후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학교 설립을 원했다. 그러나 일제가 이를 쉽게 허락할 리 없었다. 1924년 일제가 설립한 양광 공립 보통학교로 유배나 다름없는 발령을 받았다. 압록강변의 독립군과 만나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100일도 채 지나지 않아 전북 부안으로 다시 유배 같은 발령을 받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과수원 지배인 자리였다.
해방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뜨내기처럼 전국을 떠돌았다고 한다. 나는 보통학교를 4번이나 옮겨다녔다.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독립운동 전력이 있는 사람의 아들에게는 길이 열리지 않았다. 결국 일본인 학교인 광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은행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해방 후 조국의 영구 분단을 막아보려고 독립 촉성과 통일운동의 선두에 섰다가 억울한 누명까지 쓰기도 했다. 그 후 정치운동에서 손을 떼고 하나님의 일꾼을 길러 조국의 먼 장래에 대비하는 일로 여생을 마치셨다. 어린 시절 민족의 가락, ‘아리랑’의 뜻을 풀어 일러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밤마다 드리던 가족예배에서 나라 위한 기도를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그 기도가 너무 길게 느껴져 어머니 무릎에 엎드려 잠들기 일쑤였다. 철없던 시절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3> 믿음·인품·열정의 윤치병 목사에 큰 감명
5년여 광주 기독교 공동체 생활… 어린 시절 사상 변천에 영향 받아
조동진 목사가 1927년 당시 가족과 함께 다녔던 오산교회와 교인들 모습.
나는 항상 내 삶의 근원을 생각하곤 한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모두 아버지의 생애에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분들은 모두 한국 기독교 사상의 민족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지도자들이면서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께서 출옥하고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나온 1920년대 후반부터 민족과 신앙문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분이 계신다. 그중 한 분이 조선복음교회 윤치병 목사님이다. 윤 목사님은 내가 열 살도 되기 전 아버지와 더불어 사셨다. 그는 일본 고베 중앙신학교를 졸업한 학자풍 목사이면서 평생 양복을 입지 않고 순전한 조선인으로 일생을 사셨다. 윤 목사님 방은 온통 책과 종이로 뒤덮여 있었고 볼품없는 책상 위엔 먹과 벼루, 흰 종이가 항상 놓여 있었다. 그는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윤 목사님은 책이 손에서 한 번도 떠나는 일이 없었다. 길을 가거나 쉴 때도 책을 펼쳐 들고 읽었다. 그는 교회 건물이나 교인 수, 헌금 액수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인품과 진리에 대한 확신 넘치는 자세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윤 목사님의 사역을 돕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즈음 나는 전북 김제 공립보통학교 4학년에서 광주 숭일학교 4학년으로 전학해 처음으로 기독교학교의 교육을 받게 됐다. 숭일학교 교사 대부분은 장로, 집사였고 맞은편 언덕엔 수피아여고와 이일(李一)학교라는 성경학교가 있었다. 그 옆에는 광주기독병원이, 언덕 위엔 양림교회가 있었다. 양림동 기독교 공동체 안에 살게 된 나는 마치 꿈의 세계로 이사를 온 것 같았다.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신앙의 도시 광주에서의 삶이 어린 시절 사상 변천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복도 잠시 1935년 2월 11일 아침이었다. 숭일학교 학생들은 전남 학무국 지시에 따라 교정(校庭)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낯선 사람의 구령에 따라 신사(神社) 앞까지 끌려갔다. 바로 그때 선생님들은 자기 학급 학생들 앞을 가로막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 2시간이 지나도록 선생님과 학생 전원은 신사의 가미다나(神壇) 앞으로 다가서지 않았다. 이윽고 선생님들은 어디론가 끌려갔고 우리는 강제 해산됐다. 숭일학교는 곧바로 휴교령이 떨어졌다. 이 땅에서 시작된 신사참배 거부의 신호탄이었다.
한편 아버지는 당시 이 나라 민중이 망국노(奴)의 신세를 면하는 길은 독립운동과 민족개량운동, 그리고 기독교 신앙운동을 병행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남 광주에 낙농사업과 방직 단지를 만들었다. 광주목장이란 이름으로 우유와 버터, 치즈를 만들었고 무등양말공장을 세워 농촌여성들이 생산업에 종사토록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너무나 앞선 농업운동을 하셨다. 일제는 이를 가만 보고 있지 않고 온갖 방법으로 아버지를 방해해 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아버지는 유랑 생활을 시작했고 우리 가정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나는 이때부터 겨울이 와도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옷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무명 양복바지에 엉덩이와 무릎은 몇 번이나 천을 붙여가며 기워 입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4> 주일 출근 강요한 日 교장에 “결근계 내겠다”
교사 시절 일제 착취 극에 달해… 항일운동 하던 부친은 옥중서 전도
조동진 목사가 1940년대 초까지 근무했던 평북 의주군 고관국민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모습.
나는 육십갑자의 첫해인 갑자(甲子)년 동짓날에 태어났다. 갑자생(1924년)들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한 데가 있다. 갑자년은 일본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 해다. 일본인들은 이 해부터 조선 사람들의 고혈을 짜서, 지진으로 폐허가 된 일본을 복구하려고 했다. 이렇게 시작한 갑자생의 비운은 일제가 조선 청년을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총알받이로 싸움터에 몰고 가기 위한 징병제를 공포한 1943년부터 시작됐다.
일제는 앞서 1938년 4월 ‘조선 청년 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가난한 보통학교 출신들은 모조리 끌어다가 일본 청년을 대신해 총밥이 되게 했다.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령’을 내려 중산층 자녀 인텔리 청년들을 싸움터로 몰아넣었다. 조선의 두뇌들을 솎아내어 전쟁터에 보냄으로써 반일 잠재 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 말기에 접어든 일본 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조선 사람에겐 중국 땅에서 콩기름을 짜고 남은 콩깻묵을 배급했다. 콩깻묵은 개돼지도 먹기 힘들 정도로 보잘것없었다.
일제는 칡넝쿨 공출이라는 것도 시작했다. 조선의 어린이들은 일곱 살만 되면 아침에 등교할 때 칡넝쿨을 한 짐씩 지고 학교에 가야 했다. 당시 나는 평북 의주군 고관국민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내가 맡은 3학년만은 칡넝쿨을 못 따게 하겠다고 버텼다. 그랬더니 일본인 교장은 나를 불러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며 “당신, 불령선인(不逞鮮人)이야”하며 질타했다.
나는 어차피 징병 대상자였기에 악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뭐가 어째? 천황의 충성스런 황군이 될 나더러 불령선인이라니!” 하며 대들었다. 어느 날에는 “일요일이 없어진다”고 통보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이달부터 나를 교회에 못 나가게 하겠다는 말이지? 좋다. 결근계를 내고 가겠다.” 일제는 조선 민족의 사상 통제를 강화했다. 아침마다 동쪽을 향해 90도 경례하는 ‘동방요배’를 강요했고 집집마다 ‘가미다나(神壇)’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손뼉을 치고 경배하게 했다.
그렇다고 내가 일본인을 증오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일본 사람은 미워하지 않지만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정책은 미워한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항일 투쟁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윤리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을 항상 말씀하셨다. 나 역시 이 원칙을 따르고 있다.
아버지는 성경 지식이 탁월했는데 나가사키 형무소 시절 6년간 얻은 것이었다. 감옥에서 수없이 성경을 읽고 암송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자신에게 성경을 준 사람은 일본인 장로였다. 도쿄 시마노마치교회의 마스도미야스자에몽 장로로,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출정했다가 일본의 대한(對韓) 정책에 회의를 느껴 군을 떠나 교회 일에만 힘썼다. 그는 나중에 조선에 건너와 전북 고창에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세우고 한국 청년을 양성했다.
아버지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일본인 죄수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세노 이로쿠라는 사기범으로 복역 중 병에 걸려 죽게 되자 아버지가 있는 병감에 이송돼 아버지를 알게 됐다. 아버지는 그의 간병도 하고 성경도 가르쳐 신앙이 들어가게 했다. 그는 아버지가 출감한 후 일부러 의주까지 찾아왔고 조선 청년 교육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의주 교회학교인 일신학교 일본어 교사를 했다. 아버지는 그를 ‘옥중에서 낳은 아들’로 불렀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5> 기독교인 숙청 피해 北 떠나 아버지 계시는 서울로
평양신학교 진학 계획 포기… 서울 조선신학교 권유 받아
1946년 조동진 목사의 조신신학교 재학 시절 모습.
8·15는 미완의 해방이었다. 전쟁에 졌어도 독일처럼 두 동강 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일본 군벌은 조선 반도를 소련과 미국이 갈라먹도록 공작했다. 나라는 망했어도 국가를 분단 없이 유지해 주는 혜택을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얻어냈다. 그사이 미 군정 장관에 임명된 아널드 소장은 패전국 일본의 조선총독부 건의서를 그대로 받아들여 미 군정청을 조선총독부 연장선상에서 운영하기로 했다. 친일 주구(走狗)들을 중심으로 미 군정을 구성한 것이다.
어깨에 힘이 실린 총독부 관리들은 다시 조선인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고 패망한 자국민 보호를 위해 온갖 간계와 흉모를 일삼았다. 그들은 조선인들 사이의 정치운동을 방해하는 술책을 꾸몄다. 임시정부와 광복군, 국내 정치세력과 미국 측 이승만의 분열조작을 위해 엄청난 돈을 뿌리며 공작했다. 그러면서 반민족 친일 세력의 후견 조직을 형성했다. 일제는 우리 땅을 떠났지만 군과 경찰, 관료와 정당들 속에 우익이라는 미명하에 친일세력 둥지를 트는 데 성공했다.
나는 1946년 2월 서울로 남하하기 이전까지 해방 후 북녘에서 일어난 혼란상을 목도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북녘땅에 들어온 이후 그들은 미군과 달리 일제 침략 세력을 뿌리부터 뽑아버렸다. 소련군은 자신들을 ‘해방군’이라고 했다. 남쪽 미군은 그들을 ‘점령군’이라 했다. 이런 사소한 것 같은 미·소 군대의 정책 차이는 이후 남과 북의 사회변동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러나 북녘에서의 공산주의 정치세력 역시 분열과 대결을 일삼은 것은 남한 정치 분열상과 다를 바 없었다. 현준혁 중심의 국내파 공산당과 조선 의용군 세력인 연안파, 소련군을 따라온 고려인 2세 중심의 소련파, 김일성 장군의 항일 유격대 중심의 갑산파 등으로 나뉘어 암투를 벌였다.
철저하게 친일파가 제거된 북녘에서도 두 개의 세력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미워하는 지주·인텔리라는 우익세력이었다. 이들은 해방된 지 두 달도 안 돼 북녘땅에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나는 지주가 아니었지만 이름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자 철저한 기독교인이어서 숙청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던 작은 마을 피현에서도 날마다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의 수가 늘었다.
나는 학년 말인 2월 학교 선생직을 끝내기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목사 후보생이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던 때였다. 물론 평양신학교로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새해가 되자 신의주 제2교회 목사이자 의산노회장이었던 김관주 목사는 “서울로 가서 조선신학교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상하게 들렸지만 아버지께서 이미 가 계시는 서울로 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1946년 2월 15일 의주군의 학교를 떠나 평양행 기차를 탔다.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남쪽에서는 존 리드 하지 중장이 미 군정청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는 일제의 앞잡이나 영어 가능한 미국 유학 목사들, 기독교인들에게 의지했다. 상당수 목회자들이 미 군정 고문과 처장, 국장, 도지사로 등용됐다. 아버지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민족 교회 재건과 나라의 통일은 생각하지 않고 미 군정 일에 빠진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6> 조선신학교장 송창근 목사 “아들처럼 길러주겠다”
송 목사 집에서 살며 신학교 문과 입학… 김재준 교수 성경유오설에 학생들 반기
1947년 당시 서울 동자동에 있던 조선신학교 전경.
서울 한복판에 본정이라는 일본거리가 있었다. 지금의 충무로다. 본정 이정목(二丁目)에서 북쪽으로 구부러진 거리가 영락정이었다. 여기엔 일본인들이 만든 천리교 중앙본부가 있었다. 이 자리가 변해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가 된다. 또 다른 두 개의 천리교 절이 있었다. 하나는 장충단에, 또 하나는 동자동 15번지였다. 공교롭게도 이 세 개의 천리교 절들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동창인 세 사람의 목사가 차지했다. 장충단은 김재준 목사가 야고보교회(현 경동교회)라고 이름 붙였다. 동자동에는 송창근 목사가 성바울교회(성남교회)를 세웠다.
남산 위 신궁터에는 나의 고향 목사이며 고고학자인 김양선 목사가 신궁터 집들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의 꿈은 신궁터 위에 신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김 목사는 아버지의 제자이고 어머니와 소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나는 신궁과 절터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운 4명의 목사 행적에서 건국을 앞두고 민족과 종교라는 두 가지 짐을 져야 하는 새 시대 사명 같은 것을 느꼈다.
서울에 오니 인사동 승동교회 아래층을 빌려 쓰던 조선신학교는 동자동 성바울교회로 옮겨져 있었다. 천리교가 쓰던 붉은 벽돌 3층 집이었다. 교장이었던 김재준 목사를 만났다.
“어디서 왔어?” 퉁명스러웠다.
“신의주에서 왔습니다. 의산노회 목사후보생 합격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평안도구먼….”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가봐!” “예?” “입학 시기가 지났어.”
내 귀에는 너 같은 평안도내기는 사라져 버리라는 선언으로 들렸다.
나는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김 목사는 왜 평안도를 그렇게도 싫어했을까. 존경하고 기대했던 신학자에게 예기치 못한 냉대를 당하니 정말 이분이 뛰어난 문장과 박식함을 가진 학자 김재준이 맞나 싶었다. 나는 가을학기를 포기하고 신학교 진학을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가 송창근 목사를 찾아가셨고 내가 김 목사로부터 당한 이야기가 오갔다. 송 목사는 김재준 교수를 대신해 새로 조선신학교 교장이 됐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권사님, 동진군을 내 집에 보내시지요. 아들처럼 길러보겠습니다.”
어머니의 강권으로 나는 송 목사 집 2층에 살게 됐고 조선신학교 문과에 들어갔다. 1947년 봄이었고 장준하와 문동환이 급우였다.
한편 그해 4월 조선예수교장로회 33회 총회는 중대한 신학 문제를 두고 대구제일교회에서 모였다. 조선신학교 신학생들도 내려와 있었다.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평과 성경유오설에 반기를 든 30대 학생들이었다. 김 교수의 구약강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한 학생 중에는 적지 않은 수가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이들이었다. 모두 신사참배를 거절했던 영웅들이었다. 당시 51명 이름으로 총회에 제출된 진정서는 총회 공식문서로 접수됐다. 총회는 진상조사에 나섰고 교계가 소란해지면서 수습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쫓겨났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만주 봉천에서 귀국하지 못했던 박형룡 박사를 초빙키로 했다. 모금이 시작됐고 나는 이 일에 앞장섰다. 서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신학이나 교리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신학교 재건이 문제였다. 조선신학교를 떠난 51명의 신학생은 ‘신앙동지회’를 조직했다. 나는 ‘불기둥’이라는 신앙동인지를 편집하는 주간이 됐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7> 장로회신학교 재건 위해 남산에 천막 쳐
교회 찾아다니며 후원금 모아 교장 숙소·여학생 기숙사 마련
조동진 목사가 1948년 신학생 시절 만들었던 신앙 동인지 ‘불기둥’ 표지 사진.
내가 ‘불기둥’ 신앙동지회 동인지 주간이 된 것은 신학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신학 입문자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입장이 있었다. 51명의 학생을 무기정학과 퇴학 처분을 해 놓고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던 조선신학교 교수들의 자세 때문이었다. 그들은 학문의 귀중함은 알아도 교회의 소중함은 모르는 듯싶었다. 보수 세력에 대한 공격과 정통신학에 대한 거부가 강의와 글에서 무섭게 나타났다. 배우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오만함이 싫었다. 그래서 무식한 사람들의 대변자로서 글을 쓰기로 했다. 나를 그렇게도 아끼던 송창근 목사에게는 미안했다.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 재건은 친일 잔재 세력의 방해로 어렵게 됐다. 우리는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거기엔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항거했던 출옥 성직자들과 봉천신학교 교수였던 박윤선 박사가 있었다. 부산 신사(神社)가 있던 용두산 밑 광복동 산1번지 적산가옥을 교사로 쓰던 이 학교의 이름은 고려신학교였다. 말이 학교이지 신학생 합숙소 같았다. 그래도 나는 신학교를 뛰쳐나온 지 몇 달 만에 또다시 신학생이 된 것이 기뻤다.
부산의 바람은 서울과는 또 다른 회오리바람이었다. 독선과 신앙적 교만이 법통이라는 미명 아래 분장돼 있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온기 없는 신학교 교실(밤에는 침실)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하는 것은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바람이 아니라 오만하고 독선적인 출옥 성도를 자처하는 차디찬 얼굴들이었다.
이름을 일일이 밝힐 수 없지만 당시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해방된 민족교회 지도자들을 길러낼 재목들이 아니었다. 이들 선교사는 태평양전쟁 종식으로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바뀐 것으로 착각했다.
우리 신앙동지회 소속 신학생들은 또다시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다시 세우기로 했다. 나는 남산 신궁터를 타고 앉은 김양선 목사의 말이 생각났다.
“남산이 광복 조국 민족교회의 본산이 되게 하는 것이 나의 꿈이야.” 그 말이 번개처럼 내 머리를 스쳤다.
나는 1948년 4월 18일 서울 남산 신궁터에 천막을 쳤다. 미군이 쓰다 내버린 천막을 기워 만들었다. 남학생들의 임시 기숙사였다. 우리는 교회를 찾아다니며 구걸했다. 교회들은 정치싸움에 말려들까 봐 인색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돈이 마련돼 적산가옥을 구입했다. 교장으로 모실 박형룡 박사의 숙소와 여학생 기숙사였다. 신학교 교사는 성도교회 황은균 목사가 교회 건물을 사용토록 허락했다. 사무실도 책상도, 의자도 칠판도 없었고 돗자리를 깐 공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교장과 70여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학교는 ‘장로회신학교’였다. 48년 6월 3일 개교식을 개최했다.
벅찬 꿈도 잠시, 우리 집안에 또 하나의 비극이 터졌다. 난데없이 아버지가 당시 한국민주당(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살해교사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장덕수는 종로경찰서 순경 박광옥이 쏜 카빈총 두 발을 맞고 사망했다. 부친은 당시 운현궁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부장이었다. 아버지는 미군정 재판을 받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교수형이었다. 남쪽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세력을 거세하는 일이 이 사건의 음모 뒤에 숨은 목적이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8> 강사로 온 손양원 목사, 1주일 뒤 두 아들 잃어
원수를 자녀 삼은 사연 전해 듣고 손 목사에 “졸업 후 이리 오겠습니다”
조동진 목사는 신학생 시절 손양원 목사(왼쪽)를 초청해 학내 부흥회를 열었다. 손 목사는 일주일 뒤 여순사건으로 동인(오른쪽 위)과 동신(오른쪽 아래) 두 아들을 잃었다. 국민일보DB
장로회신학교는 1948년 9월 새 학기를 맞았다. 학생회 총무였던 나는 학내 부흥회 강사 선정 업무를 맡았다. 박형용 박사와 협의해 여수군 신풍면에서 한센인을 돌보는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를 초빙키로 했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손 목사를 만났다.
그는 삭개오처럼 키가 작았지만 차돌처럼 굳고 야무지며 단호한 성품이었다. 그는 평생 가난했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만을 위해 살았다. 돈이 없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강요하는 일제하의 학교에 자녀를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학내 부흥회는 은혜의 도가니였다. 손 목사의 설교는 단호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예언자적 메시지였다. 갈라진 듯하면서도 귀를 찢는 날카로운 음성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이 축복의 시간이 끝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여순사건이 발생,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좌익 학생에게 생명을 빼앗겼다. 나는 이 엄청난 비극에 정신을 잃었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자기 민족과 동료의 피를 땅에 쏟게 하는 이 광란의 땅이 저주스러웠다. 한민족이 두 나라가 된 것도 슬픈데 항일 민족 기독 지도자의 어린 아들들이 왜 이 같은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답답하고 원통했다.
신학교 학우들은 여수 순천의 피바다를 생각하며 통곡의 기도회를 가졌다. 나는 순천으로 내려갔다. 시내는 계엄군으로 가득했다. 나덕환 목사가 시무하는 승주교회를 찾았다. 나 목사에게 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의 최후 이야기를 통해 나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두 아들을 인민재판한 사람들은 10대 고등학생들이었다. 민주학련 간부들인 이들은 동인과 동신의 학우들이기도 했다.
“너 예수 믿는 놈이지?” “예, 예수교인입니다.”
“어미 아비도 예수쟁이지?” “예, 아버지는 목사이십니다.”
“어디, 믿어서 잘 사나 보자. 이놈들의 죄를 변호할 자가 있나?”
민주학련 간부들은 동인 동신의 죄를 열거했다. 동신과 동인은 서로 끌어안았다. 한 학생의 손에서 방아쇠가 당겨졌다. 여러 차례 총소리가 귀를 찢었다. 동인과 동신의 시체는 다른 시체 무더기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나 목사는 말을 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화신입니다.” “예?”
“그는 원수를 사랑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토벌군이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계엄군이 질서를 잡으면서 반란 무리를 색출해 현장에서 즉결 처분을 하고 있었다. 나 목사는 이 와중에 애매하게 체포된 교인들이 처형되는 것을 막으려고 나가던 길에 나를 만난 것이다.
그는 “손 목사님은 자기 아들들을 죽인 그 학생의 처형을 막아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습니다.” 나 목사는 그 학생 이름이 재선이라고 했다. 재선은 풀려났고 손 목사는 그를 만났다고 한다.
“재선아 안심해라. 나는 너를 용서한 지 오래다.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것을 믿어라.”
재선 아버지는 통곡했고 자신은 아들이 넷 있으니 둘을 데려가 키워 달라고 애원했다. 손 목사가 만류하자 재선 아버지는 재선이라도 길러 아들 삼아 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재선은 손 목사의 아들이 된다. 이 얘기를 듣고 나는 곧장 손 목사를 만났다. 그리고 약속했다.
“목사님, 저는 내년에 졸업입니다. 졸업 후 이리 오겠습니다.”
손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말했다. “기도 많이 하십시오.”
***[역경의 열매] 조동진 <9> 서대문형무소 인근 복음화 위해 교회 개척
“가까운 곳에 교회 있으면 좋겠다” 부친 면회 갔다 소장 말 듣고 ‘번쩍’
조동진 목사(왼쪽)가 1948년 박창건 목사와 함께 서대문교회 앞에 서 있다. 사진 오른쪽으로 예배당 공간을 빌려준 인수학원 간판이 보인다.
나는 1948년 5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사형수가 된 아버지가 수감돼 있는 서대문형무소로 면회를 다녔다. 형무소에는 박창건 목사님이 형무소 목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형무소의 교무과 직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고 아버지의 억울한 복역에 마음 아파하는 형리(刑吏)들도 있었다. 그중엔 훗날 목회자가 된 분도 여럿 있다. 박 목사님은 아버지와 연세가 비슷해 나에게도 각별하게 친절을 베푸셨다.
한번은 박 목사님의 안내로 형무소 소장을 만났다. 소장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친절은 생생하다. 소장은 아버지를 자신의 집무실까지 올라오게 했고 차도 대접하며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그런데 소장은 담소를 나누다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얘기를 했다.
“여기 서대문 지역에는 교회가 없어요. 형무소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으면 형무소를 찾아오는 수감자들의 가족들에게도 소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박 목사님과 나는 이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다음 주간, 신학교 학우회 임원들과 논의했다. 그리고 형무소 교무과 직원들과도 얘기했다. 형무소 직원 중에는 황해도 신천 출신 백상건 집사가 있었다. 그는 형무소 옆 200m도 안 떨어진 곳에 신천서부교회 출신 ‘문 장로’라는 분이 살고 있다고 전했다. 박 목사님과 나는 그 길로 문 장로를 찾아갔고, 백 집사는 신천에서 남하한 교인들을 모으는 일에 나섰다.
문 장로는 적산가옥 2층에 살고 있었고 아래층은 용도가 분명치 않았다. 헛간 같은 꽤 넓은 공간이었다. 나는 가마니 10여장을 얻어다가 바닥에 깔았고 30∼40명이 앉을 공간을 만들었다. 나는 찬송을 인도하고 박 목사님은 설교를 했다. 그곳엔 김익두 목사의 지도를 받던 황해도 신천서부교회 장로, 집사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이렇게 교회를 이뤘고 이름은 ‘서대문교회’로 했다.
담임목사는 박창건 목사가, 나는 전도사로 일했다. 문 장로의 2층 집은 얼마 안 가 너무 비좁게 되어 쓸 수 없었다. 주일마다 모이는 신자가 50명이 넘어가면서 새로운 예배 처소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은 게 문 장로 집 맞은편에 있던 2층 양옥이었다. 그 집엔 ‘인수학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몇 번 찾아가 물어보니 소녀들에게 직업 교육을 하는 사회사업 기관인데 주말엔 비어있다고 했다. 그 집을 관리하는 주인이 새문안교회의 박 장로라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박 장로를 만나 서대문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박 장로는 흔쾌히 허락했다.
서대문교회 간판은 그다음 주일부터 인수학원 건물에 붙었다. 인수학원은 서대문형무소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박 목사님과 나는 서대문형무소와 서대문교회를 오가며 특수한 목회를 했다. 나는 형무소 교무과장실에서 아버지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뵙고 책도 여러 권 가져다 드렸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며 교훈을 주셨다.
나의 서대문교회 사역은 아버지와 서대문형무소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특별한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었다. 나는 신학교 졸업과 함께 황해도 신천에서 오신 김경하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청빙하고 지리산 밑의 무교회 지역을 향해 정처 없는 나그네 전도사 길을 떠날 때까지 서대문교회에서 일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10> 결혼 앞두고 김구 선생 서거… 예식도 미뤄
예상 못한 비보에 날짜 두 번 바꿔… 천막교회서 한경직 목사가 주례
조동진 목사와 부인 나신복 사모의 신학교 졸업 사진. 이들은 1949년 7월 7일 한경직 목사의 주례로 결혼했다.
나에게도 짜릿한 사랑의 추억이 있다. 서울 남산에 신학교가 설립되던 그 첫날부터 같은 날 학교 입학등록을 하러 왔던 한 여자 신학생을 좋아하게 됐다. 아내 나신복이다. 나는 그를 ‘나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는 눈이 크고 아름다웠다. 조선신학교에서 마지막으로 자퇴하고 나온 12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나를 ‘조 선생’으로 불렀다. 나는 학생회 총무로, 그는 서기로 활동했다.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관심이 커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나 선생’은 평북 신의주 제2교회 한경직 목사 밑에서 자랐다. 한 목사의 외딸, 외아들과 한마당에서 함께 자랐다고 한다. 그의 고모 나창석 권사 밑에서 딸처럼 자랐다. 내 어머니는 의산성경학교에서 나 권사에게 구약을 배웠다고 했다. 나 권사는 평양숭의학교와 평양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신의주에서 한 목사와 동역했다.
우리의 약혼식은 1949년 4월 26일 열렸다. 영락교회에서 운영하는 영락보린원이라는 고아원 마루방에서였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다이아몬드 반지나 진주 목걸이가 아니었다. ‘존 밀턴 전집’ 한 권이었다. 가죽 장정으로 옥스퍼드 1900년도 판이었다. 밀턴의 ‘실낙원’과 ‘복낙원’ 그리고 몇 편의 시를 담은 이 책은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고서에 속했다. 아내는 18금으로 된 네모난 시계를 선물로 준비했다. 내 사랑의 언약은 이렇게 밀턴에서 시작됐다.
우리의 결혼식은 7월 1일로 잡았다. 졸업식 3일 후였다. 그런데 약혼식 두 달 후 국가적 참변이 발생했다. 국군 장교 정복을 입은 이 나라 군인이 서대문 경교장에 들어가 백범 김구 선생 앞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을 향해 연거푸 세 발을 쏘았다. 백범은 그를 향해 “네 이노옴∼” 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쓰러졌다. 범인은 육군 포병대위 안두희라고 했다. 이날 흉사로 온 겨레가 놀랐다. 49년 6월 26일이었다.
졸업식은 6월 28일이었다. 가장 슬프고 우울한 졸업식이었다. 온 나라가 길거리에서 통곡하는데 우리는 남산 위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졸업장을 받아야 했다. 나는 결혼식을 뒤로 미뤄 7월 5일로 청첩장을 고치고 교회에서도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김구 선생의 국민장이 7월 5일로 발표됐다.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을 이틀 더 연기해 7월 7일로 바꿨다. 슬펐다. 이 세상에 누가 결혼식 날짜를 연거푸 바꾸고 싶었을까. 교수형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서대문형무소에 계시는데 무심한 아들은 그래도 결혼식을 올려야만 했다. 졸업식 다음 날 아내 될 나신복과 형무소를 찾았다. 아버지는 소리 없이 우셨다. 내 슬픈 결혼식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니라 김구 선생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었다.
서대문형무소 형목(刑牧) 박창건 목사는 내가 결혼식 날 신을 구두를 구해줬다. 형무소에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검은 모닝코트 예복을 결혼식 들러리가 입으라고 빌려 주었다. 김양선 목사는 자기가 아끼는 예복을 나에게 입혀줬다. 나는 온몸에 남의 것을 걸치고 결혼식을 올렸다. 장소는 영락교회였다. 당시엔 천막교회였다. 주례는 한경직 목사가 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박형룡 박사가 내 어머니 곁에 앉으셨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11> 극심한 생활고에 아내는 결혼반지 팔아 김장
여수교회 순회전도사로 단칸방 생활… “주님, 너무하십니다” 함께 울어
조동진 목사는 신학교 졸업 후 여수교회 순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사진은 당시 여수교회와 성도들.
졸업과 결혼 이후 나는 전남 여수와 순천 지역으로 내려갔다. 손양원 목사와 약속한 대로 무교회 지역을 향한 발걸음이었다. 애양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쌍봉면은 당시 여수군(현 여천군)의 무교회 면이었다. 순천에는 평안도 출신 목사님들이 있었다. 숭실대를 나와 미국 컬럼비아신학교에서 공부한 김규당 목사님이 계셨고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남한 팔도에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2개 노회가 있었는데 전남에만 3개가 있었다. 경기노회가 친일 변절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전국교회를 호령했을 때였는데 순천노회만은 신학적 입장이 뚜렷했다. 노회는 1948년 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생부터 강도사 고시와 목사안수를 실시했다. 이런 연유로 순천노회는 48년 이래 6·25전쟁이 끝나는 53년까지 장로회총회와 정통신학 옹호를 주장하는 젊은 성직자들의 아성이 된다.
나는 신학교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한 우등생이었다. 조직신학으로 신학적 입장을 정립했고, 신·구약학을 공부하며 성경해석의 원칙을 세웠다. 도시전도와 교회 설립에도 관여하면서 전도에도 자신감이 있었다. 더구나 여수 순천은 유혈사태를 겪은 곳이라 주민들이 쉽게 예수를 믿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서울에서의 경험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나는 면장에게 부탁해 주민들을 마을 정자나무 밑으로 모아 달라고 했다. 30명 정도 모이면 열심히 설교했다. 그리고 예배당으로 정해 놓은 학교 교실로 주일예배에 오라고 했지만 헛일이었다. 주민들은 말로는 “믿어야지요” 하면서도 오지 않았다. 그들은 면 직원이 동원한 군중에 불과했다. 여순사건 이후 예수 믿는 사람들의 세도가 큰 것 같으니 말로는 긍정했던 것이다.
나는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다. 어느 주일 저녁엔 나 자신을 한탄하며 울었다. 그리고 회개했다. 사랑으로 전도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전도를 학문으로 하고 신학교 교과목으로 삼는 일이 민족 교회가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전도학 정립의 꿈을 꾼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후 나는 여수 시내로 집을 옮겨 여수교회 순회전도사로 일했다. 전도비 명목의 돈이 교회에서 지불됐지만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중학생인 여동생까지 단칸방 신혼부부인 우리 내외와 함께 지냈던지라 내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아내는 목공소에서 황토색칠을 한 앉은뱅이책상을 가져왔다. 결혼 후 마련한 첫 가구였다.
1949년의 겨울은 추웠다. 돈도 땔감도 양식도 없었다. 전도비를 미리 달라고 아내를 여수교회 회계집사에게 보내는 일도 계속할 용기가 없었다. 아내는 연일 시무룩했다. 김장철 배추 한 포기 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도심방을 다녀왔는데 아내가 없었다. 통금시간이 거의 다 됐을 때 인기척이 들렸다. 웬 남자 소리였다.
“되게도 높은 데 사시는구먼.”
남자가 배추와 무를 지게에 가득 짊어지고 와서 부엌 앞에 내려놨다. 그는 아내에게 돈을 받자마자 떠났다. 차가운 아내 손을 방바닥에 대줬는데 손을 펴지 않았다. 가만 보니 손가락에 있어야 할 결혼반지가 없었다. 아내는 소리 내어 울었다. “당신 반지를 팔았구만….” 나 역시 울었다. “주님, 너무하십니다.” 나는 기도인지 한탄인지 넋두리로 밤을 지새웠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12> 영락교회서 예배 중 “38선 전역서 전쟁” 들어
아내가 있는 여수 가려고 서울역으로 앳된 인민군과 탱크 행렬 목격
조동진 목사는 1950년 6월 14일 전남 순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사진은 당시 순천노회 소속 교역자들. 점선 원 안이 조 목사.
1950년 3월 순회전도에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을 때 나는 윤하영 목사님을 전남 여수에서 만났다. 윤 목사님은 내 고향에서 존경받는 목회자였다. 해방 직전까지 신의주제일교회를 담임했던 그는 성품이 곧고 타협을 모르는 민족주의적 종교인이었다. 해방 후 남쪽으로 내려온 윤 목사는 한때 미군정청 여론조사국장을 하다가 충북도지사를 역임했다. 정부 수립 이후엔 문맹퇴치운동 본부장이 됐다. 문맹이 많던 지리산 벽촌 사업을 위해 일꾼을 찾다가 여수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문맹퇴치와 무교회 지역 전도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을 모르지 않겠지?”
6월 중순까지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여수로 내려와 문맹퇴치 일꾼을 양성하라는 일방적 지시만 남기고 떠났다. 여수교회 김 목사님은 곧바로 나를 전도담당 동사목사로 청빙키로 당회에서 의논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50년 3월 14일 순천노회에서 강도사 고시를 받기로 했다.
당시 남대문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치선 박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300만 전도부흥운동’은 전국으로 퍼졌다. 남대문교회 평신도 야간신학교에서 길러낸 전도인들이 방방곡곡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 빨치산은 총을 들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전도인들은 성경과 찬송을 들고 지리산에서 신령한 전투를 벌였다. 그들의 보고가 무교회면 퇴치와 문맹퇴치 병행의 절대 필요성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나는 목사 안수식과 동사목사 위임식을 6월 14일 치르고 서울로 올라갔다. 아내는 여수에 있었다. 종로 기독교서회 4층 대한계명협회 사무실이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고 일주일 뒤 영락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긴급광고를 들었다. “38선 전역에서 전쟁이 시작됐으니 모든 장병은 속히 부대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서울은 온통 난리였다. 6월 27일 정부는 수도 서울을 사수할 테니 요동하지 말라고 방송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는 녹음테이프였고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벌써 대전으로 떠난 뒤였다. 어머님처럼 모시고 있던 처고모 라창석 권사님은 나에게 여수로 내려가라고 했다. 나는 표를 구하러 서울역에 나갔다가 인민군과 탱크 행렬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군인들이 모두 어린 애들로 보였다. 열댓 살 정도나 됐을까. 적진에 들어오는 모습이 아니라 뭐가 뭔지 모르면서 허공을 보고 정신없이 걸었다.
아버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전쟁을 만났다. 그날 붉은 군대의 탱크가 와서 형무소 문을 부수어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형무소 문을 부순 탱크 장교는 나의 셋째 삼촌의 둘째 아들이었다.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던 그는 인민군에 입대해 탱크부대를 이끌고 내려와 서대문형무소로 직접 온 것이었다. 항일 운동가였던 큰아버지의 수감 소식을 듣고 비분에 싸여 있다가 구하려 했던 것이다. 이 전쟁이 보여주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라 권사님은 남대문교회 맹관호 장로와 결혼하셨다. 맹 장로의 아들은 아내와 동갑내기였던 맹의순이었는데 그가 라 권사를 찾아와 어머니가 돼달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라 권사님은 우리 내외가 어머님처럼 모셨는데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결혼을 하셨다. 맹의순은 착한 젊은이였다. 그는 나중에 포로가 되어 ‘내 잔이 넘치나이다’란 고백을 남기고 포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중공군 포로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13> 신문지에 성경 싸들고 광나루 건너 남쪽으로
대전까지 걸어가… 인민군 검문소도 통과 여수 교회 무기한 철야기도회 시작
6·25전쟁 당시 피난민 행렬. 작은 사진은 조동진 목사가 여수에서 탈출할 때 도움을 줬던 나희필 장군.
나는 1950년 7월 3일 서울 서대문구 합동 28번지 14호에 있던 처가를 떠나 전남 여수로 향했다. 맹관호 장로와 그의 아들 맹의순 전도사, 그리고 라창석 권사의 환송을 받았다. 농부와 같은 차림에 밀짚모자를 쓰고 무명바지에 고무신을 신었다. 성경책을 신문지에 뭉쳐 싸들고 수건 하나를 허리춤에 찼다. 서울 거리를 뒤로한 채 광나루를 건넜다.
나는 대전까지 걸어서 갔다. 가는 길에 비무장 국군 패잔병을 만나 한 무리가 되어 걸었다. 길을 물어물어 남쪽을 향했다. 경기도 신갈 부근에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인민군들이 검문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가는 피난민을 보내고 있었다. 노인과 아이들, 아낙네들을 살피며, 가라고 손짓했다.
그때 갑자기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인민군 소년병이 애를 업은 여자의 머리 위 짐 보따리를 들어주려 하다가 그만 허리의 따발총 탄창을 건드렸고 방아쇠가 당겨지고 만 것이었다.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내 새끼 죽네….” 여인의 등에 업혔던 어린애의 고개가 옆으로 늘어지며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병사들이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총 하나 건사 못하는 게 생사람 잡았구나!”
이 틈에 우리 일행은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 뒤 인민군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린 병사들은 착하기만 했다. 자신의 따발총 오발로 무고한 어린 것이 죽는 충격적 장면에서 그는 목메어 울고 있었다. 누가 이 소년의 손에 총을 들려주었는가.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여수에 도착했다. 여수는 평온했다. 사람들은 전쟁을 강 건너 불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여수의 고요도 몇 날 가지 못했다. 미군 장군들이 죽고 포로가 되면서 전쟁은 남한 방방곡곡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교회에서는 무기한 철야기도회를 시작했다. 7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은 날마다 밤마다 기도 열기로 가득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전주에 들어섰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다. 장로들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기도하던 권사님도 하나둘 보이지 않았다. 나중엔 담임목사님마저 어디를 다녀온다며 가셨다. 다음 날 새벽기도회엔 아내와 흰머리 할머니인 임태화 권사님 외엔 없었다. 아내는 울고 있었다. 나는 찬송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만 불렀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당시 여수엔 군산에서 철수한 부대가 와 있었다. 군부대뿐 아니라 장교 가족들도 있었다. 예배당에서 끝까지 기도하시던 임 권사님 아들이 육군 대위였는데 그가 마침 이동명령차 여수에 온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나희필이었다. 아내는 짐을 꾸려 헌병대로 가자고 했다. 부대가 군함을 타고 철수한다며 임 권사님이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헌병대로 가니 임 권사님은 우리에게 군인 가족으로 군함에 타야 한다고 말했다. 마침 아내와 나 대위는 성이 같았고 아내의 호적 이름인 나신필과 항렬까지 같았다. 그렇게 배를 탄 게 50년 7월 28일이었다. 나희필 대위는 나중에 육군대학 총장, 조폐공사 이사장, 새문안교회 장로를 지냈다. 우리 내외를 친누이, 친매부처럼 대해줬다. 그는 술과 담배를 철저히 멀리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술 권유를 물리친 몇 안 되는 장군으로도 유명하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14> 빨치산에 담임목사 잃은 구례읍교회 부임
만삭 아내가 마음에 걸렸지만 결단… 빨치산 장례식 치러주며 민족관 형성
조동진 목사가 1951년 7월 부임한 구례읍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 직접 작성한 설교문.
“너밖에 갈 사람이 없다.”
모두 나를 지켜봤다. 뒷자리에 쭈그리고 있던 나는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이 노회의 막둥이 목사입니다. 여순사건 직후 이 노회를 찾은 것은 지역민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수에 온 지 1년 하고 아홉 달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나를 놓아주고 노회가 허락한다면 구례군 여덟 교회의 담임목사로 가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나는 만삭이 된 아내를 생각했다. 노회는 나의 구례읍교회(현 구례중앙교회) 담임목사 위임과 구례군 내 7개 교회 당회장직을 결의했다. 구례읍교회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창립된 교회가 아니라 1894년 고형표라는 분이 미국을 유람하다가 복음을 듣고 예배처소를 정하고 시작했다. 5대 담임이었던 양용환 목사는 3·1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사했다. 그런데 6·25전쟁에 또 한번 담임목사를 잃었다. 7대 이선용 목사가 빨치산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던 것이다.
구례읍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7개 교회는 전도사들이 돌보고 있었는데 전쟁 이전에 빨치산에 모두 학살당했다. 그래서 구례읍교회 담임목사가 이들 7개 교회까지 돌보고 있었다. 이선용 목사가 죽자 아무도 이 지역 교회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노회 회원은 모두 나이 든 목사님이었고 20대 젊은 목사는 나와 몇 명 있기는 했으나 모두 가난한 마을과 섬의 목회자였다. 한 교회 안에서 두 목사가 일하던 곳은 여수교회밖에 없었고 내가 지목을 받은 것이다.
나는 결단했다. 반야봉과 노고단, 섬진강의 아름다운 산천이 시체 더미가 됐다고 해서 8만 구례군민과 영혼들마저 버려둘 수는 없었다. 교회 부임은 1951년 7월이었다. 첫날밤은 충격적이었다. 목사관 앞에서 토벌대와 빨치산의 전투가 벌어졌다. 박격포와 총알이 집 앞 감나무 밭 위로 불꽃처럼 쏟아졌다.
8월엔 내 평생 잊지 못할 장례식을 인도했다. 빨치산 ‘산(山) 사람’ 시체가 경찰서 정문에 일렬로 뉘여 있었다. 끔찍한 시체를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 방치했다. 경찰서 뒤에도 시체 다섯 구가 있었다. 광목천을 덮은 시체였고 토벌 경찰대의 희생자였다. 그 중 세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경찰서장은 나에게 장례식을 부탁했다. 나는 갑자기 산 사람 시체가 생각났다. 거적이라도 덮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장례식 조건을 제시했다.
“저는 원수의 생명이라도 긍휼히 여겨야 하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은 저 산 사람과 토벌대를 함께 치르도록 합시다.”
서장은 내 뜻은 알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다음 날 서장은 나의 공동 장례식 요구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오전에 희생 경찰들을 합동 장례하고 오후엔 목사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나는 망설였지만 이를 받아들였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구례읍에 온 목사가 경찰에 명령해 빨치산 시체를 고이 덮어주었다는 얘기가 산동네까지 퍼졌다. 희생 경찰 장례를 오전에 한다는 소식으로 온 고을이 떠들썩했다. 산 사람 시체 일곱의 가족 가운데 다섯 명의 식구들이 나를 찾아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사망자 중 진짜 인민군 빨치산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두 번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손양원 목사님을 생각했다. 가장 아리고 슬펐던 지리산 밑에서의 첫 장례식은 이렇게 나의 민족관과 인간관의 바탕이 됐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15> 은사 박형룡 박사에게 이끌려 기독교 문서운동
지리산 사역 17개월 만에 막 내려… 출판사 ‘은총문화협회’ 설립
조동진 목사(앞줄 가운데)가 구례읍교회를 떠날 무렵인 1953년 1월 27일 구례연합제직회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나의 지리산 사역은 1951년 8월부터 1953년 1월까지 17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기억에는 18년의 긴 세월을 살았던 것처럼 여겨진다. 52년 겨울, 지리산 밑에서 내 인생을 바꿔 놓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은사인 박형룡 박사께서 푸른 잉크로 또박또박 친히 쓰신 서신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기독교서회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손에 들어가 정통주의 보수신학 도서출판의 길이 막혔네. 어서 속히 부산으로 와서 나를 도와 기독교 도서출판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주시게.”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갱지로 된 붉은 괴지 두 장에 쓴 문구다. 황공하게도 “敎弟 朴亨龍 頓首 再拜(교제 박형룡 돈수 재배)”라고 쓰셨다. 너무도 지나치게 낮아지셔서 나의 지리산 생활 청산을 강권하셨다.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여드리니 어머니는 내가 지리산 밑에서 해방된다는 기쁨에 눈물까지 흘리셨다. 교회엔 부산에 다녀온 뒤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부산까지는 여수에서 배로 갔다. 타야 할 배의 이름은 창경호였다. 그런데 부두에서 여수교회의 한 집사가 창경호보다 몇 시간 늦게 떠나는 자기 회사 부정기선이 있다고 했다. 배는 작지만 철선으로 튼튼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호의에 배를 바꿔 탔다. 삼천포를 지나면서 기상이 악화돼 바람과 파도가 거셌다. 여수 부산 간 연락선을 여러 번 탔지만 이날은 달랐다. 뱃멀미가 심했다. 배는 광풍 속에서 이른 새벽에야 겨우 당도했다.
부산에서 만난 친구 이정윤은 나를 보더니 “조형, 너 살아왔구나!” 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부산일보 호외를 보여줬다. ‘麗水 釜山間 旅客船 沈沒, 二百五十名 乘客 溺死(여수 부산간 여객선 침몰, 이백오십명 승객 익사).’
나는 그날 대구로 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박 박사의 뜻을 받들어 기독교문서출판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제일 먼저 출판할 책은 ‘표준성경주석’과 ‘조직신학’이라고 했다. 출판사 이름도 정했다. ‘은총문화협회’라고 했다.
구례로 돌아갔더니 아버님이 전에 없이 내 손을 잡으시고 어머님은 내 온몸을 쓸어 만지셨다. 창경호를 탔다던 목사는 죽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구례군 내에 퍼지고 있었다. 집안 식구들도 내가 온다던 날이 일주일이나 지났어도 소식이 없자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난 것이다.
나는 교회 장로님들에게 대구에서 박 박사를 만난 일과 그곳에서 결성된 기독교 문서운동 계획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순천노회는 무명 목사인 나의 중앙 진출을 대견하게 여겼다. 부모님은 더 남아계셨다. 아버지는 구례 곡성 지역 전도사로 일을 보셨다. 목사 안수를 받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기독교서적을 더 많이 보셨고 성경도 달달 외우셨다. 아버님은 이후 63년까지 순천노회에서 많은 일을 하셨다. 덕분에 순천 작은 마을의 교회에서도 여러 명의 목사가 나왔다. 박종구 월간목회 발행인도 그중 한 명이다.
그동안 기독교출판사 설립과 사업계획이 진행됐고 출판사 이름은 그대로 은총문화협회로 하고 박 박사를 총재로, 나는 대표이사가 됐다. 우리는 박 박사의 6·25 피난 시절 설교집부터 내기로 했다. 이름은 ‘우리의 피난처’였다. 이후 나는 ‘기독공보’ 편집국장으로 가게 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공식 기관지였고 국내 유일의 기독교 신문이었다.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김경래씨가 당시 기자로 활동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16> 매국노 이완용 집터에 세운 옥인교회의 담임목사로
복잡하게 얽힌 교회 내분 수습… 윤보선 전 대통령 부부도 출석
조동진 목사는 1954년부터 3년간 서울 옥인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옥인교회 앞에 선 조 목사(가운데).
1949년 봄 중국 선양(瀋陽)에서 피난 온 신학생 중에 이무호라는 이름의 전도사가 있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와 비슷하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전도사였다. 그가 어느 날 학생회 총무였던 나에게 서울 효자동에 교회를 세울 테니 후원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교회 세울 땅은 구했냐고 되물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역적 이완용의 집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한동안 쳐다봤다. “옥인동 15번지인데 효자동 대로변 넓은 뜰만 점령하기로 했지요.”
학생회 지도교수인 김양선 목사에게도 데려가 소개했더니 김 목사도 놀랐다. 학생회 전도부에서는 이 전도사에게 ‘효자동교회 개척전도사’로서 약간의 전도비 지급을 결의했다. 이것이 6·25전쟁 이후 옥인교회가 이완용 집터에 들어서게 된 동기다. 이 전도사는 그 터 위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해 1952년 165㎡(약 50평) 가까운 예배당을 지었다. 이후 김학철이란 신학생이 이 교회 담임목사가 됐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교회는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경기노회는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풀기 위해 김양선 목사에게 분쟁 수습 전권을 위임했다. 그러던 54년 어느 날 김 목사는 기독공보 편집국장이었던 내게 찾아와 “이 교회 원조는 조 목사야!”라고 했다. 교회 분쟁에 나서달라는 요청과 함께 나를 옥인교회 담임목사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내 의견은 듣지도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 옥인교회 담임으로 봉사했다. 내분은 간단히 수습됐다. 내가 부임한 첫 주일, 당시 임시 당회장이 강단 위에서 끌어내림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내가 강단에 오르자 조용해졌다. 나는 이렇게 일제와 공산당, 미군과 인민공화국이 엉켜 자리를 잡고 있던 매국노의 집터에 세워진 교회를 섬기게 됐다.
이완용 저택은 전형적인 조선 정승의 99칸짜리 기와집이었다. 이완용은 그 한 모퉁이에 2층짜리 양옥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이 양옥은 해방 후 유명했던 조선 공산당의 제2인자 이강국의 첩이었던 김수임이 살던 곳이었다. 그녀는 미 점령군 사령부 특별수사기관의 최고 책임자인 페루 대령과도 동거했다. 공산당 간첩이었던 김수임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돼 체포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옥인교회는 이완용의 집터를 김수임과 함께 나눠 쓰고 있던 셈이다.
나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당시 NAE)에서 총무 일을 맡고 있었다. 총무 업무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 오는 미국 교회 지도자들을 영접하는 일이었다.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총무였던 웰윈 라이트 박사, WEF 2대 총무였던 프레드 페리스 등 거물급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방한했고 그들을 위한 일정을 담당했다.
그때 자주 찾던 곳이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안국동 집이었다. 종로구 국회의원 시절 윤 전 대통령은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옥인교회에 나오곤 했다. 공 여사는 결혼 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 교수로 있었기에 아내도 크게 반겼다.
윤 전 대통령은 내 아버지와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다. 한번은 안동교회 유경재 목사가 나를 초청해 부흥회를 했는데 윤 전 대통령은 매 시간 제일 앞자리에서 설교를 들었다. 그는 나에게 “좋은 아버지를 모셨다”며 “어지러운 정치에 나서지 않고 목사가 되어 봉사하고 있는 모습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17> 美 유학 뒤 후암교회 부임, 버림받은 사람들 섬겨
폐병 환자 등 방문전도 3년 만에 교회 신자 150가구서 600가구로
조동진 목사는 서울 후암교회 담임을 맡아 지역 전도에 힘썼다. 사진은 1971년 교회 창립 25주년 기념식 모습.
나는 1956년 8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복음주의협의회 도움으로 필라델피아 제10장로교회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미네소타주의 베다니선교대학과 켄터키주 에즈베리신학교 대학원을 다녔다. 기독교 확장사와 선교학을 연구했다.
60년 7월 말 시카고에서 귀국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후암교회가 나를 담임목사로 청빙한다는 서신이었다. 교회가 나를 청빙하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장로교회가 두 갈래가 됐으니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선언해 달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교회 건축에 주력해 달라고 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적합한 새 일터를 주신 것에 감사했다. 그해 9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후암교회는 1946년 후암동의 이북 피난민들에 의해 시작됐다. 해방 후 후암동은 한국은행 사택과 일제가 남긴 고급 주택들이 있었던 반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군중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특히 서울역에서 남산을 향해 오르는 후암동 101번지와 400번지는 가난한 이들의 골짜기였다. 수도여고 뒤쪽엔 미군 병사를 대상으로 했던 양부인(윤락여성)들이 집단으로 세 들어 사는 집으로 꽉 차 있었다. 교회는 후암동 일대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전도’에 나섰다.
나는 금요일마다 구역장과 권찰을 모아놓고 전도학교를 시작했다. 전도의 원리와 방법을 한 시간 강의하고 네 시간 동안 후암동 일대를 샅샅이 누비는 방문전도 실습을 했다. 후암동 도동 동자동 갈월동 용산동 남영동 일대가 실습장이었다. 나는 전도대원들이 돌아와 보고한 것을 듣고 주민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렇게 3년을 방문하면서 교회 신자도 늘어 150가구에서 600가구로 증가했다.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101번지의 판잣집을 찾아갔다. 몇 차례 방문 전도대가 다녀갔었다고 했다. 얼굴이 창백한 30대 남성이 누워있었다. 그는 폐병 3기로 각혈이 심했다. 50대 어머니가 품팔이를 하면서 아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를 품에 안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했다. 그는 “나 같은 사람도 교회에 나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다음 주일 청년은 어머니 등에 업혀 교회에 나왔다. 나는 광고시간에 그를 소개했고 집에 데려다 주라고 집사님들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그가 그날 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그가 후암교회 신자이기에 교회에서 장례를 정중히 치르자고 했다. 장례식에는 모든 장로 권사 집사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장례식 날 아침 후암동 101번지 판자촌은 큰 소동이 일어났다. 폐병으로 죽은 가난한 청년의 장례에 검은 양복 차림의 남신도와 흰옷의 여신자들 100여명이 온 것이었다. 근처 105번지 군중도 구경을 했다. 이후 그 어머니와 함께 위로예배를 드리고 집을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여보 목사 양반.” “네” “당신 마음에 들었어. 오늘부터 101번지 사람들은 후암교회를 지지하기로 했소. 교회 문패, 있는 대로 다 주시오. 내가 집집마다 후암교회 문패를 붙여놓을 거요.”
나는 어처구니없었지만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에 굶주렸으면 그럴까 싶었다. 그 후 후암교회 교적부에는 101번지 사람이 많아졌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18> “미아 신세 민족 살리자” 전국복음화운동 발족
61개 지역위원회 조직 위해 전국 순회 ‘굴욕 한·일협정’ 반대로 구속 위기까지
조동진 목사가 1965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 기독교 구국대회’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나에게 전도신학과 전도원리,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미국 에즈베리신학교 로버트 콜먼 교수였다. 그의 ‘주님의 전도계획’은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이다. 1965년 나는 전도신학과 원리를 적용할 기회를 얻게 됐다. 기독교 전래 80주년을 기념해 전국복음화운동이 발족된 것이다. 나는 기획과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표어는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였다. 우리는 민족의 현실을 길 잃은 미아 신세로 인식했다. 그래서 민족의 살길을 복음화운동에서 찾기로 했다.
운동본부는 64년 가을부터 발기위원회를 두고 한경직 목사와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을 명예위원장으로 위촉했다. 또 감신대 홍현설 학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77인의 중앙위원과 33명의 실행위원을 구성했다. 나는 17개 분과위원회로 구성된 전국복음화운동의 조직을 담당했다. 61개 지역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을 맡아 전국을 다녔다.
전국복음화운동에서는 전도 책자와 전도지 374만부가 배포됐고 매일 정오마다 공동기도문으로 일제히 기도하는 캠페인도 진행됐다. 전국 모든 교회와 기독교 학교, 병원과 군대, 교도소까지 참가했다. 서울에서만 500개 이상의 전도 집회가 연쇄적으로 열렸다.
전국복음화운동의 하이라이트는 초빙강사 조세광 박사의 전도 집회였다. 그는 중국이 낳은 위대한 전도자였다. 상하이 출신으로 2차 대전 이후 홍콩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에 앞장선, 아시아 선교운동의 선구자였다. 그의 설교는 탁월했고 능력이 넘쳤다.
5월 1일부터 전북 김제를 시작으로 45일간 순회 집회를 열었다. 서울 배재고 운동장에서 개최된 집회에는 매일 5000명이 몰렸고 마지막 날에는 학교 담장이 무너질 정도로 사람이 운집했다. 그날은 폭우가 쏟아지며 극심한 가뭄도 해소됐다.
조 박사는 당시 방송에 출연해 “내가 온 것은 6%의 한국 기독교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94%의 예수를 알지 못하는 한국 민족을 위해서”라고 말해 모두를 감동시켰다. 그의 설교는 쉬웠다. 어려운 말이 없었고 ‘예수는 누구인가’를 시작으로 ‘최후의 대심판’을 열정적으로 전했다. 나는 이때 교회가 모든 반목과 분열의 길에서 돌아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도를 통하는 길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한편 당시 교계에서는 ‘한일협정 반대 기독교 구국대책위위원회’가 조직됐고, 영락교회에서 ‘한·일 굴욕외교 반대 기독교 구국대회’가 열렸다. 나는 이 대회 강사로 지목됐다. 반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던 터라 강사 지명을 사양하지 않았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고 방송은 내 강연의 매서운 부분을 보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무장관 양찬우에게 나를 즉시 구속하라고 지시했다. 구속 대상은 나만이 아니었다. 한경직 강신명 목사도 리스트에 올랐다. 중앙정보부의 압력이 워낙 거세 대회 간부였던 강원용 전경연 목사 등은 한걸음 후퇴했다. 정보부가 ‘기독교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북한 간첩이 스며들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만 홀로 남았다.
나의 구속은 내무차관이었던 김득황 장로가 막아줬다. 그는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고 아버지의 광복군 시절 부하였다. 사법처리는 면했지만 정보부는 법무부를 통해 나에게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고 정보기관의 감시하에 두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19>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여의도광장 개최 관철
“이 광장에 서울시민 꽉 채웁시다” 군사정권 상징서 신앙의 힘 보여줘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직후 조동진 목사가 그레이엄 목사와 인사하고 있다.
나는 1965년 열렸던 전국복음화운동이 당시 박정희 정권에 위협이 됐던 것을 기억했다. 또 한·일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교회가 곧 박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72년 7·4남북공동성명 직후부터 준비하던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는 유신정권에 대한 응전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나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준비위원회에 깊이 관여했다.
처음엔 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조촐하게 치르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반발했고 군사정권의 상징인 여의도 5·16광장을 장소로 하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가당치도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서울에는 전도대회 선발대로 헨리 할리라는 사람이 와 있었다. 그 역시 놀랐다. 하지만 정작 그레이엄 목사는 여의도에서 세계 옥외 전도집회 역사상 가장 큰 대회를 치르자는 내 주장에 찬성했다.
나는 대회장인 한경직 목사와 당시 서울시 부시장이었던 차일석 집사(여의도순복음교회), YMCA 전택부 총무, 상공부 장관을 지낸 김일환 장로 등과 함께 마포대교 북단에서 영등포쪽 입구까지 2.5㎞를 함께 걸었다. “이 광장에 서울 시민을 꽉 채웁시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한 목사는 간단하게 “이 여의도가 복음의 섬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후 나는 할리에게 미국대사를 찾아가 여의도광장 사용 계획을 알리라고 말했다. 이어 국방부 유재흥 장관도 찾아갔다. 연합성가단 1만명이 올라갈 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공병대를 동원해 달라고 했다. 그는 연동교회 집사였다. 하지만 유 장관은 미8군사령관 승인이 없으면 군사용 철제빔을 사용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나는 결국 건설회사들을 대상으로 입찰에 부쳐 낙찰된 회사가 공사를 맡는 것으로 했다. 대회 강단과 성가대석, 강사실과 귀빈실 등은 정림건축 명예회장을 지낸 김정철 당시 후암교회 집사에게 부탁했다.
이런 계획을 밀어붙이자 유신정권에서 연락이 왔다. “나 육군참모총장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성가대 계단석은 우리 공병대가 맡겠습니다.” “아니, 못하신다더니….” “각하의 명령입니다.”
그때까지 여의도광장엔 수도 시설이 없었다. 임시 수도를 100곳에 마련했지만 아스팔트 밖 모래밭은 날마다 물을 뿌려 먼지를 가라앉혀야 했다. 나는 서울시의 모든 급수차를 동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시는 말도 안 된다며 비웃었다.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전도대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서울 시민입니다. 그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급수차를 그들을 위해 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강하게 요구했고 서울시는 결국 매일 100대 이상의 급수차를 6일 동안 보내줬다.
광장엔 공중화장실도 없어서 100개 이상의 임시 화장실을 200m 간격으로 설치해야 했다. 변기는 빈 드럼통 500개를 구해 반쪽으로 잘라 화장실당 10개씩 묻었다. 기독 의사와 간호사 500명이 동원됐고 당시 서울시경은 일주일간 교통정리와 경비인력으로 연인원 1500명의 경찰을 편성했다. 대회 안내위원만 2000명, 결신자 상담위원 3000명도 훈련시켰다. 이렇게 전국의 교회가 단결해 거대한 기독교 축제를 준비했다.
전도대회 이야기를 모두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종교가 정권을 이기는 길은 정치가 아니라 신앙의 힘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종교의 무기는 신앙밖에 없고 우리의 힘은 성령의 권능밖에 없다. 73년 5월이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20> 非서구 처음으로 ‘선교사 훈련센터’ 세워
서구인들 “시기상조” 냉소 이겨내고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길 닦아
조동진 목사가 1968년 3월 개설된 국제선교신학원 이사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나는 후암교회 담임으로 일하면서 교회갱신과 교회성장 운동, 목회갱신을 위한 문서선교 활동도 적극 펼쳤다. 특히 한국교회가 세계를 향해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을 쏟았다. 그 일환으로 당시 선교 전문지에 서구 선교의 몰락을 비롯해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아시아 교회의 선교 지도자들을 소상히 소개했다. 그러면서 선교학 연구의 국내 환경을 조성하려고 했다.
한국교회의 본격적 해외선교를 위해 1968년 3월 국제선교신학원(International School of Mission)을 개설했다. 신학교 졸업자들이 선교신학과 선교역사, 문화인류학 등을 연구해 세계선교에 참여토록 길을 닦는 역할이었다. 요란하게 홍보하지 않고 선교사 지망생을 개별적으로 찾아 입학시키는 방법으로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에 선교대학원이라면 미국 풀러신학교가 같은 해 개설한 선교대학원 하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이런 소식을 듣게 된 미국 에즈베리신학교의 J T 시맨즈 선교학 박사는 “선교사 훈련센터가 서구 밖에서 처음으로 극동의 한국에서 시작됐다”고 학교 기관지 ‘헤럴드’에 발표했다. 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 윌리엄 가필드 선교사와 OMF선교회 존 왈리스 선교사를 교수로 초빙하고 한철하 박사를 선교변증학 교수로 위촉했다. 나는 원장직을 맡았다.
첫 졸업생은 홍콩 선교사로 파송된 윤두혁 목사와 고옥현 선교사, 태국으로 떠난 신홍식 목사와 이순영 선교사, 이란으로 파송된 윤만서 목사, 브루나이로 파송된 임홍빈 목사와 오인혜 선교사 등 10여명이었다.
아시아 첫 선교기관의 탄생에 서구인들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한국에는 아직 전도할 곳이 많다’ ‘세계선교는 시기상조’라는 식이었다. 나는 선교가 백인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에 놀랐다. 더욱이 한국교회 선교는 미국 선교사들의 밑에서 진행돼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에 경악했다. 영국에서는 ‘어떻게 감히 동양의 작은 나라가 대영제국의 선교단체와 동반적 관계를 갖느냐’며 힐난했다.
세계 2위 선교대국으로 성장한 지금의 현실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지만 당시 서구교회는 한국교회의 선교 저력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가 아시아에서 해같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힘과 용기를 준 사람도 있었다. 뉴욕 비블리컬신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이며 1920년대부터 20년 동안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스탠리 솔토 박사였다. 테네시주 멤피스제일장로교회 목사로 일하는 그는 많은 조언을 해줬다. 선교사 선발은 교회 중심이어야 하며 충분한 선교사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철저한 훈련이 선교 실패를 막는 첩경이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73년 8월 서울에서 제1회 아시아선교지도자회의를 열어 아시아의 선교 지도자들을 초청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대표적 선교 지도자들을 만나 상호 협력을 위한 범아시아 국제포럼 개최를 호소했다.
당시 한국 선교사들은 선교계에서 지도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국제적 지도력을 얻기 위해선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풀러신학교나 댈러스신학교 등에 연결시켜 공부하도록 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60년대 초반부터 파키스탄 선교사로 일하다 이화여대 교수로 간 전재옥 박사도 그중 한 명이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21> 미국에 밀고한 간첩으로 몰려 中情 끌려가
1970년대 중반 민족통일운동 시작, 정보 당국 감시 대상 … 집 안도 뒤져
조동진 목사가 평화선교운동을 펼치기 위해 경기도 화성군에 세운 ‘바울의 집’ 전경.
나는 1970년대 중반부터 기독교 민족통일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 교단의 40대 목회자, 평신도 지도자, 기업인 등과 함께 ‘민족해방 기도운동’을 펼쳤다. 정부에서는 민족해방이란 용어를 싫어했다. 우리는 ‘북한 해방’이라고 바꿨다. 나는 이 운동의 대북활동 위원장을 맡고 제2세계(공산권) 연구소 소장을 겸직했다. 당시 통일원 원장이었던 이용희 박사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신변을 걱정했다.
“통일원조차 북한 문헌과 정보에 깊이 관여를 못하는데 중앙정보부(중정)가 가만히 있을까.”
그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희망하면서 미·남·북 3자회담을 제의하고 나서자 박정희정권은 극도로 긴장했다. 나는 국회 평화통일위원회와 관련된 사람들과 접촉하고 기독교 원로들의 동의를 얻어 ‘민족통일을 위한 기독교선언문’을 작성했다.
이런 활동이 정권의 비위를 건드린 것 같았다. 한번은 국제 통신 관계를 담당하는 정부 고위 관리가 전화했다. “목사님은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국제우편과 국제전화를 가장 많이 하는 열 분 중 한 명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이 얘기가 정보 당국의 최우선 감시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고지하는 의미인 줄은 나중에 알았다.
나는 75년 아세아선교협의회 사무총장으로 피선된 이후 많은 국제관계 문헌, 특히 외교문서와 국가수반들의 강연, 브리핑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매주 발행되는 백악관 보고서와 국무부 보고서도 꼬박꼬박 챙겼다. 이러한 자료들은 기독교 민족통일 운동의 기초를 다지게 했다.
그러던 78년 5월, 서울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아세아방송 이사장직을 맡고 있던 김형근 회장을 만나 입수한 미국 기독교 상·하원 의원, 백악관 비서진, 보좌관 명단을 적은 종이를 건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검은 점퍼 차림의 남자들이 집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당신들 수색영장 있소.” “잔말 말아.”
그들은 남산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끌고 갔다. 중정 지하 취조실이었다. 내 혐의는 미국 정보조직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 혈압 검사를 네 번이나 받으면서 철야조사를 받았다. 당시 미국 윌리엄캐리대 총장 랄프 윈터 박사가 나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가 허탕을 쳤다. 정보부원들은 그에게도 따라붙었다. 훗날 윈터 박사는 이 일이 동기가 돼 나의 대북활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조사는 일주일간 이어졌고 나를 한국의 중정 구조와 동태를 미국에 밀고하는 간첩으로 몰았다.
나는 그제야 김형근 회장을 만나 전해준 종이쪽지가 문제 됐다는 것을 알았다. 쪽지는 국회의원에게 전달됐고 몇몇 의원도 중정에 불려왔다. 나는 사흘이나 더 심한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에겐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11일 만에 풀려났다.
나는 이 일로 18년간 섬겨오던 후암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교회 밖 사역을 위한 성령의 강권하심 때문이었고, 이로 인해 후암교회에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 유신정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평화선교운동을 펴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해서 79년 8월 27일, 경기도 화성 팔탄면 월문리의 거친 산등성이에 ‘바울의 집’을 세우기로 하고 그 첫 삽을 떴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22> 핀란드서 열린 北 기독학자와의 통일대화 참여
성경에 근거한 ‘통일 신학’ 연구 계기 전금철 당시 조평통 부위원장도 만나
조동진 목사가 1978년 북한을 위한 기도 모임인 ‘망향조찬기도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나는 1978년부터 미국의 선교학자인 랄프 윈터 박사가 세운 윌리엄캐리대에 적극 관여했다. 윈터 박사의 간청에 따라 이듬해 12월 ‘고려연구소’를 대학 안에 설치하고 교수가 됐다. 이 대학은 전통적 개념의 학교가 아니었다.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선교이론을 창출하는 연구 중심 대학원이었다. 윈터 박사는 ‘미전도종족’ 선교이론을 주창한 바 있다.
나는 윈터 총장, 데일 키츠맨 부총장 등과 함께 지구상에서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평화선교의 이론적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내는 연구를 전개했다. 또 기독교가 더 이상 서구문명의 틀에 매이지 않게 하기 위해 기독교의 ‘탈(脫)서구 운동’을 펼쳤다.
탈서구 운동은 반(反)서구 운동과는 구별된다. 전통적 서구 선교가 식민주의 정복 선교의 방법을 택했던 것을 거부하는 성경적 평화선교운동이었다. 이는 한민족이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과 교회의 관계를 성경적 근거 위에서 회복하기 위한 ‘민족통일 신학’으로 발전됐다.
80년대 중반 나는 국내 ‘통일신학동지회’ 임원으로 일했고 기관지인 ‘통일신학’ 편집인을 맡았다. 나는 서구 선교가 얼마나 피선교지 민족의 자주와 번영 욕구를 짓밟는 식민통치 세력에 이용됐는가를 보여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러던 중 88년 7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북과 해외동포 기독학자 간 대화’에 초청받았다. 거기서 나는 북녘 사람들과 처음으로 만났다.
북녘 사람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뿔 달린 적귀(赤鬼)가 아니었다. 관료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고향 가서 만난 한 동네 사람들처럼 우리를 맞았다.
“조 목사님이지요?” “잘 오셨습니다. 전금철입니다.”
그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우리는 헬싱키 주재 북한대사관 관용차 안에서 창밖의 이국적 풍경을 바라보며 대화했다. 전 부위원장 이외에도 북측의 안병수 서기국장, 사회과학원 박승덕 박사, 경제학자인 김구식 박사 등이 기억난다. 이들은 예를 갖추고 대했다.
그들은 내가 기독교 복음주의 진영 목회자이자 보수 학자로서 진보적 기독교인의 통일 대화 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을 놀라워했다. 나는 이 모임에 앞서 통일신학운동에 참여하면서 나의 정치·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통일은 민족운동이어야 하며 민족운동은 해방 초기 민족운동 주체들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민족통일과 민족교회 형성이 나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모임 둘째 날 나는 안 서기국장과 대화했다. “안 박사께서는 민족통일 문제와 미국과의 관계개선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북쪽에서는 항상 미국의 진보적 학자와 정치인만 초청하는데 그래 가지고 미국과 관계가 잘되겠습니까. 미국을 움직이는 것은 보수 세력입니다.” “그렇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항상 세계교회협의회(WCC) 사람들만 평양에 불러들이는데, 그 사람들은 정치권에는 힘이 있어도 교회를 움직이는 힘은 없어요.” “….”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다음 말을 던졌다.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그분을 평양으로 초청하십시오. 그의 북한 방문은 미국에 큰 충격을 줄 것이고, 미국이 북한에 대해 호의적 관심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23> 北 초청장 보내와 방북, 봉수교회서 예배
1989년 1월 홍근수 목사도 동행… 민족화해 운동 남과 북으로 확대
조동진 목사가 1989년 1월 22일 평양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신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1988년 7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북녘 학자와의 만남은 나의 민족화해와 평화선교 운동을 남과 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됐다. 헬싱키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곧 서울로 가 당시 향린교회 담임을 맡고 있던 홍근수 목사와 새문안교회 부목사였던 홍성현 목사를 만났다. 이들은 모두 나의 민족교회 형성을 위한 신학적 이론에 동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의 신학 정립을 위한 학술회의’를 갖기로 뜻을 모았다.
보수 진영에 속했던 내가 진보적 정치신학을 지향하는 인물들과 손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진보 진영의 오해와 불신이 있었다. 보수 쪽에서는 나를 친북세력으로 전향한 배신자로 매도했다. 두 장벽 사이에 낀 나는 양측 모두에게서 경계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민족 통일에 대한 나의 이론의 틀은 진보와 보수 양 세력이 손을 잡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확신 위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제3세계 선교단체협의회 의장 자격으로 ‘통일신학동지회’ ‘제3세계신학연구소’와 손잡고 학술회의를 소집했다. 미국 윌리엄캐리대 북한연구실장 홍동근 목사를 비롯해 해외에서 활약 중인 한인 목사를 참가시켰다. 이 모임에 국내 보수 진영 학자로 정성구 당시 총신대 학장, 한명수 기독신문 주필, 이만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을 참석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모임은 분단 44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외 진보 보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자리를 함께한 일대 거사였다.
한편 헬싱키에서 만났던 전금철 안병수 등 북한 대표는 나에게 약속한 대로 평양 초청장을 보내왔다. 88년 8월 5일부로 찍힌 초청장은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장’ 명의로 돼 있었다. 방문할 수 있는 날 중에 가장 이른 시일에 방북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1989년 1월 20일 나는 마침내 베이징에서 중국 민항 903편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한 지 한 시간쯤 지나자 압록강 상공을 지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공에 들어섰다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당시 홍근수 목사도 동행했는데 그 역시 나와 동향(同鄕)이었다. 홍 목사는 고향 산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강토는 모두 잿빛과 흙빛이었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우리를 맞아준 사람은 헬싱키에서 만났던 노철수 참사관 등이었다. 우리는 입국심사대를 거치지 않고 귀빈실로 안내됐다.
평양 일정은 두 번에 걸친 주일 봉수교회 예배가 하이라이트였다. 봉수교회는 해외 기독교인들과 통일신학동지회가 여러 해 동안 간청하던 교회 설립 요청을 조선노동당이 공식으로 수락해 이루어진 역사적 교회였다. 조선노동당은 80년대 들어서면서 종교활동의 부분적 개방정책을 논의해온 것으로 보인다. 83년부터는 성경과 찬송을 출판했고 89년엔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를 설치했다.
1월 22일 주일 아침예배는 10시 시작됐다. 성가대원은 중년여성들뿐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부인은 목사의 딸이라고 들었는데 계속 키를 헛 누를 만큼 서툰 것으로 보아 음악 전공자는 아닌 것 같았다. 한 해 후 다시 평양을 방문했을 때 알게 됐는데, 그때 피아노를 치던 여신도는 나의 친척 문중의 몇 안 되는 목사의 딸로 이름은 조인옥이었다. 당시 봉수교회 집사들은 대부분 남한과 해외에 있는 목회자들의 가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24> “왕래 없으면 북·미 관계는 풀리지 않는다”
美 선교대학원 총장단 이끌고 방북… 냉랭한 한시해 부부장에게 방미 권유
조동진 목사(왼쪽)가 1990년 11월 25일 평양에서 주 유엔대사를 지낸 북한의 한시해 부부장(가운데)과 미국 윌리엄캐리대 데일 키츠맨 부총장을 만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북한 당국은 남한의 사업가와 정치 지도자, 종교인을 대거 초청했다. 당시는 김일성 시대 말기의 대전환기였다. 89년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평양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했고, 함흥 출신 재미교포 실업가 황규빈씨도 평양에 갔었다. 황씨는 오래전 내가 미국 유학을 주선했던 후암교회 출신 신자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세계적 경제인이었다.
나의 두 번째 평양 방문은 1990년 11월 이루어졌다. 미국 윌리엄캐리대 랄프 윈터 총장과 데일 키츠맨 수석부총장, 개발 담당 찰스 위크맨 부총장 등과 함께 초청받았다. 김일성종합대와 김형직사범대에서 초청했다. 윈터 총장은 학교의 급한 사정으로 떠나지 못했다. 미국의 대표적 선교대학원 총장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북·미 관계는 여전히 정전 상태의 교전 당사국인 것이 문제였다. 평양 당국의 어느 부처에서도 미국 대학 총장단의 입국허가 수속을 처리하려 하지 않았다. 조선노동당과 정무원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최종 결정에서도 대미 정책을 다룰 수 있는 최고위 간부들과 부처 간에 토론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90년 11월 23일부터 12월 4일까지 방북했다. 미국에 대한 북한 당국자들의 인식은 학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한시해 부부장과의 대화는 벽이 느껴졌다. 그는 주체사상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미국 측 말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키츠맨 수석부총장이 노련한 선교학자답게 경청하면서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리의 평화선교 노력이 극적으로 풀리기 시작한 것은 11월 25일 저녁 평양 옥류관에서였다. 주 유엔대사로 뉴욕에서 7년간 살았던 한 부부장은 공식석상에서와는 달리 통역 없이 영어로 담소했다.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바로 그때 키츠맨 수석부총장이 한 부부장에게 미국 방문을 권유했다.
한 부부장은 “미국 국무부가 나에게 비자를 내줄 리 없다”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키츠맨 수석부총장은 한 부부장에게 확신을 주는 말로 답했다.
“오고가는 것이 없으면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풀리지 않습니다.” “….”
“미국에 오라는 말은 빈손으로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북한과 미국이 화해할 수 있는 평화 사절로 오십시오.” “….”
“우리가 온 것은 순수 민간사절이며 비정치적 방문이지만 북·미 간 평화와 화해의 다리를 놓기 위한 기초작업차 온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조선그리스도연맹 대표들과 김일성종합대학 학자들도 초청하겠습니다. 당신이 미국을 방문한다면 국무부와 의회 지도자들, 그리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보겠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간 총장단은 이들을 초청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윈터 총장은 직접 워싱턴 국무부를 방문했고 키츠맨 수석부총장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국무부 고위 간부에게 전화해 자신의 북한 방문을 설명하면서 한시해 일행의 방미를 미국 정부의 대북전략 전환 기회로 삼으라고 설득했다.
마침 북미기독학자회와 미국장로교총회도 북한의 학자들과 조선그리스도연맹 목사들을 초청하려고 국무부와 접촉 중이었다. 우리의 삼각 노력에 국무부는 마침내 반응했고 세 가지 초청 계획을 일괄 취급키로 했다고 연락이 왔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25> 카터, 남한 목사와 北 부부장 함께 찾아오자 놀라
미국 前 대통령 낡은 사택에 충격받아… 북 초청받은 카터 “휴전선 통해 가겠다”
조동진 목사(오른쪽)가 1991년 6월 6일 한시해(오른쪽 두 번째) 전 북한 유엔대사와 함께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즈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사택을 방문해 카터와 면담하고 있다. 왼쪽은 로잘린 카터 여사.
북한의 유엔대사를 지낸 한시해 부부장 일행이 미국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한 것은 1991년 5월 25일이었다. 이들은 북미기독학자총회가 주최하는 학술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홍동근 목사, 윌리엄캐리대 개발담당 부총장 위크맨 박사와 함께 워싱턴으로 갔다. 북한 대표 일행도 이어 워싱턴에 도착했다. 6월 5일 위크맨 부총장은 “아직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방문 시간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만 내일은 다른 약속을 하지 마시고 비워두십시오”라고 했다. 그날 밤 위크맨 부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 애틀랜타로 가야 합니다. 카터 전 대통령 자택이 있는 플레인즈로 갑니다.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한 부부장과 참사관, 통역, 그리고 조 목사와 내가 동석합니다.”
미국의 대북한 정책 전환점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고 계셨다. 다음 날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렌터카를 빌려 약속 시간 5분 전 도착했다. 전직 대통령의 사저는 작고 낡은 건물이었다. 나는 그 집이 저택의 수위실인 줄 알았다. 마중 나온 사람은 로잘린 카터 여사였다. 미국 대통령의 평범한 삶을 본 북쪽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남한 목사와 북한의 부부장이 직접 찾아온 것을 놀라워했다. 그는 내가 앉은 자리를 가리키며 “지금은 대통령이 된 조지 부시가 앉았던 자리”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한 부부장에게도 말했다. “당신이 앉은 자리는 베이커 국무장관이 내 선거운동 계획을 가지고 와서 만나던 자리입니다.”
한 부부장은 “대통령 각하의 환대를 받아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카터는 “김일성 주석께서는 건강하신가요?”하며 응답했다. 둘의 대화는 단도직입적이었다. 미국과 북한 간 현안을 풀기 위해서는 카터의 평양 방문이 매우 필요하다는 얘기가 오갔다. 카터는 말했다.
“김 주석이 나를 초청하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
“나는 북한 관광이나 하고 돌아오는 여행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이징으로 돌아서 평양으로 가는 것은 거절합니다.”
“…?”
“김 주석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서울에 가서 한국 대통령(당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나의 평양 방문의 뜻을 전하고 그가 김 주석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가지고 갈 것입니다.”
“그리고 휴전선을 통해 평양으로 가야 합니다.”
“각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휴전선은 군사분계선이지 국경선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귀국은 항상 ‘하나의 조국(One Korea)’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나는 국경을 넘으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으로서 남쪽 서울에서 휴전선을 넘어 북쪽 평양에 감으로써 한반도가 한 나라임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한시해는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터는 덧붙였다. “내가 평양에 갔다 올 때는 한반도의 긴장과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가 풀릴 수 있는 큰 선물을 북한과 미국, 그리고 남한에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마치 목사처럼 이 모든 이야기를 기도로 마무리했다. 91년 6월 6일 오후 7시의 일이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3년 후인 94년 6월 휴전선을 넘어 방북해 김 주석을 만났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26> 김일성 “아시아 평화 위해 미군 남아 있을 필요”
주석궁 방문, 자유롭고 유용한 대화… 김일성대학에 기독교 서적 기증
조동진 목사(왼쪽)가 1992년 5월 김일성종합대 관계자들에게 남한의 기독교 서적 2517권을 기증하며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는 화해와 평화의 종교다. 나에게는 사랑과 소망, 믿음, 정의, 자유도 모두 화해와 평화의 틀 안에서의 진리이다.
그리스도는 화해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다. 나는 우리 민족 분단의 극복을 화해의 진리에서 찾는다. 그것은 절대 죄악이나 불의와의 타협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기초이며 나 같은 죄인까지도 용서하신 그 용서의 진리를 통한 화해이다. 나는 민족 화해를 위한 대북활동을 이런 믿음 안에서 실천했다.
나는 북녘 노동당 간부들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 공산당이 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을 위해서는 나와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우리 민족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이런 입장은 북녘 지도층을 만나기 위해 핀란드로 갔던 일이나 북녘 고위 관리들을 미국으로 초청한 일로 실천했다. 미국 윌리엄캐리대 고려연구소가 한시해 전 북한 유엔대사 일행을 미국으로 초청했을 때 나는 그에게 김일성종합대 종교학과 발전을 위한 학사 교류를 하자고 약속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김일성종합대 종교학과 교재의 출판과 도서 기증을 약속했다. 이는 공식 문서로 전달됐고, 나는 1992년 4월 김일성종합대 총장 박관오 박사의 공식 초청장을 받고 평양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 국내 기독교출판 단체에서 2000권의 책을 모았다. 정확하게는 2517권이었다. 둘째 딸은 출판사별로 분류하고 일련번호로 구분해 컴퓨터에 입력했고 도서목록을 만들었다.
5월 22일 나는 한시해, 김수만 두 부위원장의 점심 초대를 받았고 다음 날 주석궁 방문 절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김일성 주석과의 대화는 자유롭고 유용했다. 김 주석은 나의 가정 배경과 미국에서의 활동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대미 활동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미국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40년 전 전쟁의 적국이 지금도 적국은 아닙니다. 아시아 평화를 위해 미군이 조선반도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과 우리의 공동 적은 일본입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평양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후 나는 김일성종합대 별관의 대강의실로 이동해 강연했다. 150여명의 교수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사회를 맡은 최장룡 부총장은 “조금 전 남한에서 가져온 기독교 도서 기증식이 거행됐다”고 밝히고 “이 특별강의는 도서기증을 기념해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나는 이데올로기는 한 시대를 지배하지만 민족은 역사 속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리고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은 종교와 문화라고 했다. 이데올로기 블록시대가 끝난 후 남는 것은 민족과 종교뿐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기독교는 박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적 사례와 함께 말했고 결론적으로 통일 조국의 기독교는 외래종교가 아닌 민족교회라고 했다. 기독교가 민족 독립운동의 선봉이었던 것처럼 21세기 통일 조국의 교회는 50년 전 사라졌던 민족교회를 소생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시간은 내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나를 흥분케 한 시간은 다음 주일 아침 봉수교회에서의 특별설교로 이어졌다. 교회는 평소보다 더 많은 신도가 아래위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27> 北 전쟁박물관 소재지에 ‘화해의 예배당’ 건립 제안
판문점∼개성 사이엔 ‘평화의 예배당’… 지금도 이 소망 이룰 수 있도록 기도
조동진 목사(왼쪽)가 나신복 사모의 묘 앞에서 아들 조응천씨와 함께 한 모습.
1992년은 미국 공화당 부시 정권이 클린턴 당시 민주당 후보에게 정권을 내주면서 미국의 세계 정책이 진보적 방향으로 선회하는 해였다. 한반도에서는 61년부터 30년을 이어온 장성 출신 대통령들의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던 해였다.
그해 9월 나는 미국 윌리엄캐리대 부총장 데일 키츠맨 박사, 미국-북한바로알기센터 사무총장 찰스 위크맨 박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초청자는 김일성종합대 박관오 총장이었다. 당시 북한 지역을 방문했는데 나는 그들이 제시한 장소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대학 측은 묘향산 국제친선관을 제안했으나 나는 황해도 신천 전쟁박물관을 제시했다. 또 평양의 혁명박물관 대신 개성과 휴전선 지역의 콘크리트 장벽과 판문점에 가자고 말했다. 그들은 내 제안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나는 두 미국인 학자와 함께 6·25 최대 격전지 황해도 신천과 휴전선 일대를 이틀간 답사할 수 있었다.
황해도 최고 기독교 도시인 신천은 6·25전쟁 당시 500여명을 함께 묻었다는 수십 개의 거대 분묘와 이 분묘들 복판에 전쟁박물관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일행은 이 참담한 전쟁의 현장에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화해의 예배당’을 세워야겠다는 데 뜻을 모았다. 그리고 개성으로 향했다. 콘크리트 장벽을 둘러보고 판문점에 왔을 때 부총장 키츠맨 박사는 이곳에 ‘평화의 예배당’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자 한시해 전 북한 유엔대사가 소감을 물었다. 키츠맨 박사와 나는 황해도 신천에 화해의 예배당을, 판문점과 개성 사이에는 평화의 예배당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위크맨 박사는 그 이유를 소상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지금도 이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원한이 맺힌 죽음의 골짜기에 화해의 예배당이 세워지는 날이 꼭 오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휴전선이 그어져 있는 세계의 흉물, 판문점에 평화의 예배당이 서야 한다는 기원은 그날 이후 나의 기도에서 빼놓은 적이 없다.
그즈음 아내 나신복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92년 10월 8일 미국 LA 선한사마리아인병원 수술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90년 직장암 수술을 받고 어려운 방사선 치료까지도 이겨냈던 아내였다. 91년 10월에는 금강산 만물상을 따라 비로봉 정상에 오를 만큼 건강을 유지하는 듯싶었다.
하나님은 아내와의 평화롭고 복된 동반 생활이 50주년 금혼식까지 계속되도록 허락하시지 않았다. 아내는 그날까지 민족과 함께 풍운을 헤쳐 가는 한 불우한 독립운동가의 며느리로 살아왔다. 그리고 교회 울타리 속의 안전하고 고요한 목회의 길보다 거친 세파 속에서 광야의 목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아내로 모든 것을 희생했다.
장례예배와 하관예배는 경기도 화성 바울의 집에서 거행됐다. 평소 아내를 아껴주던 많은 벗들이 찾아줬다. 후암교회 장로님들도 한 분도 빠짐없이 그 먼 길을 찾아주셨다. 아내를 사랑하던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슬피 울며 애도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아침마다 아내의 무덤을 가꾸며 그 묘비를 쓰다듬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남긴 모란봉 언덕에서의 모습을 담은 사진 앞에서 손을 흔들고 집무실로 나가곤 한다. “에스라처럼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오늘도 당신과 함께….”
***[역경의 열매] 조동진 <28> 우리 민족의 ‘에스라·느헤미야’ 나오기를 기도
김일성 조문 갈등으로 남북관계 악화, 전환기 지도자의 역할 중요성 깨달아
1995년 민족통일에스라운동 대표 시절의 조동진 목사(왼쪽 세 번째)가 관계자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1994년 7월 9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세계 언론은 일제히 그의 급서 소식을 톱뉴스로 보도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리던 G7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자리에서 “미국의 모든 국민을 대신해 조의를 표한다”는 성명을 즉각 발표했다. 성명과 함께 “북·미 3단계 고위급 회담을 성사토록 한 김 주석의 지도력에 감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 주석의 사망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김 주석과의 대담을 마치고 한 주간 일본 방문을 마친 뒤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소식을 접했다. 그는 김 주석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뒤 북한의 새 지도부가 김 주석의 평화 공약을 준수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세계 언론은 김 주석의 사망 이후 한반도 정세 변화에 대해 여러 가지 추리를 하고 있었다. 국내 언론도 한반도 주변 역학 구도와 동북아 정세를 집중 분석했다. 포스트 김일성 정권의 조기 붕괴 가능성을 예상하는 전문가들이 가장 많았다.
서울 민심은 청와대와 집권당의 풍향에 좌우되고 있었다. 소위 조문 여부를 둘러싸고 민심은 갈렸다. 조문 파동은 서울과 평양 사이의 냉각관계를 심화시켰다. 나는 이런 민족사의 전환기에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세계관과 역사관은 성경 예언자들의 충고에서 배워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당시 한 신문사에 글을 기고했다. 다른 전문가들의 시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일부 북한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호들갑스러운 사태 진단과 예측은 비뚤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김 주석 없는 북한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없어질 것이라는 단정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경고했다. 많은 지식인은 당장 북한 땅이 남한으로 변화될 것처럼 떠벌렸다. 큰 오산이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소위 ‘북한 붕괴론’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국토와 남과 북의 상황 변동만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세계의 변화와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이다.
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민족 단위로 기록한 구약의 민족 역사 전개과정을 연구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과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의 망국, 그리고 70년 후의 국권 회복에 하나님이 어떻게 민족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를 쓰셨는지 말이다. 나는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를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서 찾았다. 이 두 역사서에서 민족 흥망의 역사 해석의 원리를 찾고 그 원리를 민족통일을 위한 평화선교운동의 운동 원리로 적용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서는 우리 민족 분열과 국토 분단의 원인을 민족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범죄에서 찾아야 한다는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회개와 고백이 민족 통일운동의 기초가 돼야 한다. 이는 학사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으로 민족을 가르친 일부터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 후기 새로운 시대의 국제 환경을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국권 회복을 위해 지혜롭게 대처해 간 민족 지도자들이었다. 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2000년대 문턱에서 우리 민족의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출현을 위해 기도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29> “모든 민족교회들이 만민을 위해 기를 들라”
1999년 모든 선교조직서 은퇴하고 저술·강연하며 후학 격려에 온 힘
조동진 목사(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2009년 3월 인도네시아 스마랑에서 열린 아시아선교협의회 회의에 참석해 참가자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서구 중심의 선교가 해체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조직되면서부터였다. ‘선교사 철수론’이 채택된 WCC 암스테르담 회의는 사실상 서구 선교의 종식을 선언한 회의였다. 이후 1961년 개최된 뉴델리 회의는 서구 선교구조의 틀을 무너뜨려 버린 회의였다.
하나님은 세계 선교의 옛 틀이 무너지는 도상에서 나 같은 미천한 사람을 불러 교회 밖으로 나가게 하시고 새로운 세계질서와 재편성되는 국제 구조에 발맞춰 새로운 선교운동의 등장에 대비하도록 하셨다.
나는 미국 윌리엄캐리대 고려연구소장으로 봉사하는 한편,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웨스턴신학교의 선교학 교수,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의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의 방문교수로도 일했다. 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로잔복음화운동 전체회의에서는 ‘선교 구조의 쇄신’을 강의했다.
같은 해 소집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총회에서는 선교위원회 조직위원 3인의 한 명으로 선정됐다. 이 일은 75년 8월 서울에서 창립된 WEF선교위원회 소집을 주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88∼89년 나는 제3세계 선교 발전을 위한 지도자회의를 소집해 95년까지 회장으로 봉사했다. 90년대는 미국 휘튼대 대학원을 시작으로 무디성경학교와 트리니티선교대학원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댈러스신학교 리폼드신학교 등 여러 복음주의 신학대학원에서 강의했다.
나는 그때마다 ‘돌을 제하라’ ‘서구 선교의 무너진 대로를 수축하라’ ‘모든 민족교회들이 만민을 위해 기를 들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소리가 내 귀에 울렸고 나는 사람들에게 이를 전했다.
나는 한국의 안팎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선교갱신운동 동반자들과 새로운 시대의 선교 역군들이 내가 이루지 못한 21세기 선교 구조의 완성을 위해 앞장서고 있는 것을 한없이 기뻐하고 감사한다.
내가 아시아에서 뿌렸던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육성한 선교운동이 새 시대의 국제적 선교지도력을 가지고 역사 앞에 우뚝 서게 된 것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옛것은 무너져 가고 새것은 싹이 나고 자라서 이제는 열매가 풍성한 큰 나무가 되고 있다.
나는 1999년 바울의 집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세계선교회(GMS)에 이양하고 만 75세 나이로 모든 선교 조직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21세기 세계선교 지도력 개발을 위한 노력은 계속 추진했다.
2000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김바울 선교사와 함께 러시아선교지도력개발원을 세우고 러시아 교회 지도자들의 신학 재교육을 시작했다. 2002년에는 여기서 수료한 30여명의 목사를 중심으로 러시아기독교 모스크바 시노드(Synod·회의)를 조직하고 러시아 정부에 공식으로 등록했다.
2004년 이후 나의 사역은 주로 세계선교 역사에 대한 저술과 강의 초청을 받아 선교 후학을 격려하는 일이었다. 2010년은 놀라운 한 해였다. 내가 조직한 제3세계선교협의회가 주최한 에든버러선교대회 100주년 기념 도쿄대회에서 나는 ‘사도 바울 선교대상’을 받고 대회의 주강사로 추대됐다. 아시아선교협의회는 제10차 대회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새로 지어진 마와르 샤론 대성전에서 개최했다.
***[역경의 열매] 조동진 <30·끝>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은 하나님의 섭리”
한반도 평화와 화해로 가는 길목 한국교회 ‘통일행전 29장’ 써야
조동진 목사가 2016년 네팔을 방문해 한 건물 위에 앉아 있다.
지난 12일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봤다. 남북 정상회담에도 만감이 교차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만남은 두 나라가 한 발자국 크게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은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나 벼랑으로 치닫던 북핵 위기를 반전시켰다. 당시 카터는 개인 자격으로 방북했다. 이를 계기로 백악관은 군사적 대치에서 외교적 해결로 의제를 바꾼다. 언론은 카터의 행보를 ‘극적’이라고 표현했다.
이번 두 정상의 만남은 놀라운 역사의 전환이자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닐 수 없다. 언론들은 ‘역사적’ ‘세기적’ 만남이라고 평가했다. 언제나 그렇듯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을 쓰시는 방법은 늘 인간의 예상을 벗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그분의 뜻을 구해야 한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더욱 겸손케 만든다.
그동안 북한을 총 24번 다녀왔다. 신의주부터 백두산 자강도 원산 통천 금강산 평양 강서 강동 황해도 판문점까지 다녔다. 처음에는 미국 시민 자격으로 시작했다. 윌리엄캐리대 고려연구소장 자격으로 김일성대에 초빙교수로 임명받고 다녔다. 남쪽에서 김일성에게 직접 교수로 임명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북한을 왕래하며 했던 일은 북한 사람들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일이었다. 북한 관리들을 미국 조지아주 해일즈에 있는 카터 집까지 데리고 갔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게 하고 로스앤젤레스 시장까지도 만나게 했다. 김일성은 고맙다며 나를 세 번이나 주석궁으로 초대해 환영해줬다. 나는 북·미 관계를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일을 기쁘게 여기며 열심히 했다. 그 결과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김일성대에서 강의까지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김 주석을 94년 7월 세상을 떠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통일의 길을 여시기 위해 다른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위로부터의 통일을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래로부터 통일을 준비하고 계셨다. 수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통일을 위한 기도에 나섰고 지금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 아래로부터의 통일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새로운 세대들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면 중앙아시아 선교사였던 이민교 형제의 경우 북한 장애인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북한에 들어갔다. 그는 북한의 장애인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그는 북한에 농아인을 위한 축구장을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사용하고 계신다.
지금은 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목이다. 분열된 종파주의 교회를 북녘 땅에 이식하지 않기 위해서는 민족교회의 뿌리를 되살리는 민족교회운동이 절실하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와 우상숭배, 자기교만에 빠졌던 역사가 있다. 통일로 가는 길은 회개의 여정을 포함한다. 그래야 ‘통일행전 29장’을 쓸 수 있다.
바울의집 언덕 위에서 아침 해와 저녁노을을 감상한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지만 외롭진 않다. 90년 인생을 여한 없이 살아왔던 탓일까. 그동안 미천한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어 고맙다. 부디 주님의 역사와 일하심만 기억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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