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감독들 중 한 명인 로만 폴란스키의 60년대 문제작 <혐오>를 오늘 만났다. <물속의 칼>에 이어 두 번째다. 역시 등장인물이 제한적이다. 역시 밀폐된 공간이다. 역시 칼 한 자루가 등장한다.
영화 같은 굴곡진 삶을 실제 살아낸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영화란 것은 자신의 삶의 궤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궤적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는,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그 둘이 뒤섞여버리는 그러한 중간적 세계 상태가 단적으로 드러난 영화가 바로 이 영화 <혐오>가 아니었을까?
갑자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생각이 났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본 이상형의 세상이 안견의 붓을 통해 현실 세계로 걸어 나오게 된다. 손으로 만져지고 시각으로 보이는 그림이라는 실체는 현실적 존재이지만 실상은 세상에 존재치 않는 꿈속의 세상일 수밖에 없다.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다.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눈뜬 게 실제인가 눈감은 게 실제인가? 색즉시공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
수도를 튼다. 물이 쏟아진다. 수도를 잠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상황의 벽을 넘어섰는데도 물방울의 떨어짐은 계속되고 있다. 로만 폴란스키 로서는 분명 8살의 나이에 유태인 게토를 스스로 걸어 나옴으로서 전혀 새로운 현실세계로 이동 했지만 과거의 끔찍했던 특별한 기억은 ‘똑똑 떨어지고 있는 수돗물’처럼 길거리를 걷다가도 일하고 있는 순간에도 시도 때도 없이 현실을 비집고 스며들어온다.
이러한 감독의 정신세계는 이 영화 속에서 여배우 까뜨린느 드뇌부의 표정을 통해 알몸 벗겨지듯 표출된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성폭행당하는 장면이 과거에 실제 그랬다는 것인지 그 조차도 환상인 것인지가 불분명하지만, 언니와 언니 남자친구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버린 이후 혼자만의 세계에 떨어뜨리어진 여주인공은 거리의 노숙자에게 강간당하는 환상에 시달린다.
단절. 소외. 고독. 피해망상. 무성영화를 보는 듯 하다. 침묵과 대사의 절제. 그래서였는지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낙숫물 소리, 파리가 나는 소리, 발자국 소리, 벽 갈라지는 소리, 시계 초침 소리, 벨소리가 반복되어 들려진다. 숨이 가빠온다. 주인공의 식은땀이 어느덧 내 손안에서 느껴진다. 서서히 몰입되어가는 자신을 느낀다. 욕조에 물이 넘친다. 한도를 넘어선 것이다. 까뜨린느 드뇌부의 사이코적 내면연기가 절정에 달한다. 현실과 환상이 뒤엉킨다. 현실 인식이 되는 순간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설정이 너무나 리얼하고 허무하다. 호흡과 호흡사이가 죽음이고 곧 최고의 절정이다. 환상이 실제가 되고 실제를 눈앞에 두고도 실제를 보지 못하고 일상의 환상에서 뜨개질을 하고 , 전기 소켓이 뽑혀진 체로 다리미질을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이러한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또 잠시 해본다.
미이라처럼 말라 비틀어가는 오리고기 위에서 파리가 날고, 감자에 싹이 나고 그 감자가 말라 쪼그라져서 그 싹조차 시들어 죽어가고 있다. 세상은 난장판, 그 극도의 지저분함과 혼란의 도가니 속에 그녀가 숨어있다. 방안이라는 폐쇄성도 모자라 이젠 아예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갔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과거로 돌아간다. 어릴 적 가족사진. 가족사진속의 그녀는 여기서도 소외된 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시선 속으로 서서히 카메라 앵글이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까말 것 같은 눈동자 속은 아무 것도 없는 백색으로 끝이 난다. FIN. 이 단어조차 영화의 일부임을 순간 깨닫는다.
2011.6.16
첫댓글 윈디박님께서 올려주신글은 많이배움니다
말과 글은 사실 크게 믿을게 못 됩니다. 저는 김 선생님의 순수한 미소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옵니다.
잠시 머물다 갑니다.... 늘 감사합니다.. ^^*
늘 감사하고 있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줍니다. 저야말로 부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