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위씨의 존재를 알린 존재공
장흥위씨 치고 존재공의 후광을 입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는 위씨 중 특출한 인물이다. 역사사전과 백과사전 등에 등재된 위씨는 고려시대엔 충렬공 휘 계정(繼廷)이고, 조선시대는 존재공 두 분만 기록된 데서 그 희소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존재공은 아버지 영이재와 어머니 평해오씨 사이의 장남으로 1727년 계춘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3·4세 때 책을 읽기 시작, 6세 때 소학(小學), 8세 때 대학(大學)을 읽고 의미심장한 영성(詠星) 등 한시를 지어 주변 사람을 놀라게 했다.
10세 전후에 이미 제가서를 박섭(博涉)하고 이후에는 천문(天文)·지리·율역(律易)·복서(卜筮)·도불(道佛)·병도(兵韜)·산수·공장백기(工匠百技)까지 섭렵하는 천재성을 드러냈다. 공은 17세 때 영암(靈巖) 김고성(金姑聲)의 딸과 결혼했다.
24세 되던 1751년(英祖 辛未)에 간암공(艮庵公)의 주선으로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문하로 들어가 경서(經書)·예기(禮記)에 대해 문답하고, 1765년(英祖 乙酉)에는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복시(覆試)에는 번번이 떨어졌다.
1778년(正祖 戊戌) 이후 과거응시를 포기하고 저술에 몰두했다. 그런데 1794년(正祖 甲寅) 호남연해의 해일피해를 살피러 온 서영보(徐榮輔)가 정조에게 진언, 정조는 공이 지은 환영지(寰瀛誌) 등을 봉상하라는 명을 내리는 한편 1795년(乙酉)에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왕은 1796년에 옥과(玉果)현감에 임명하고 역마(驛馬)를 주어 부임하게 했다. 공은 부임즉시 향약을 실행하고, 지초(紙草)를 혁파하고 승폐(僧幣)를 덜고 어공(魚供)을 없애고, 생은어(生銀魚) 납부제도를 돈으로 대납케 하고 관아의 장인제도를 폐지하고 각 청 계방(契房)과 관사색(官四色)을 혁파했다.
1797년(丁巳) 봄 공은 풍환으로 체직(遞職)을 올렸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해 6월 도백은 그의 치적을 최하등으로 평가했다. 왕은 그의 치적평가가 낮은 것은 병으로 인한 것이라며 그렇게 평가한 도백을 꾸짖었다. 왕은 공을 경직(京職)인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에 임명했으나 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10월에는 경기전령(慶基殿令)에 다시 임명해도 나아가지 않고 1798년(正祖 戊午) 11월 25일 타계했다. 그가 남긴 저서는 90여권에 달하나 왕에게 봉상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게 분실돼 지금은 30여권 정도가 규장각에 남아있다.
1) 족보서문(族譜序文)을 받아오다(지장록p.32)
장흥위씨 최초의 족보(1759년)에는 두 건의 서문이 실려 있다. 하나는 도유사 영이재가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경(申暻)이 쓴 것이다. 공은 집안의 결의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전행 공조참의인 신씨에게 부탁해서 서문을 받아왔다.
신씨는 서문에서 "위씨 자손인 백규보(伯珪甫)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사(譜事)에 미치자 비로소 종중으로부터 의론이 있어 자료를 여러 곳에서 모아 순서를 쫓아 편찬하여(木刻으로) 이에 그 세계와 명적(名蹟)을 밝히려 한다면서 내게 서문을 구함으로"(중략)라는 글의 내용에서 확인되고 있다.
2) 위씨 충의록(忠義錄)을 짓다 (지장록p.92)
"인(仁)은 효(孝)요 의(義)는 곧 충(忠)인데 부자와 군신은 인륜(人倫)의 기본이다. 위씨는 신라 중엽에 동래하여 14세 합문판사(閤門判事) 휘 충(种)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아치 집안이 되었다. 그러나 판사공이 고려왕을 위하여 모사하다가 천호(千戶) 윤구택(尹龜澤)의 고변으로 들통나 귀양에 보내졌다.
태조가 등극하여 그 자손을 사면하였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만은 3세 동안 문무과간에 나아가지 아니하다 우리 8대 숙조에 이르러 진사에 합격하여 그 후로 벼슬길로 나아갔다. 임진(壬辰)·갑자(甲子)·정묘(丁卯)·병자(丙子) 4난이 일어날 때마다 의병과 의곡을 모아 나라에 바치는 등 충성을 다했다.
비록 특기할만한 공적은 없어도 그 충의와 적개한 기풍은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유적(遺跡)이 현저하고 고증이 뚜렷한 분들을 편집하여 책을 만들어 이름을 '위씨 충의록'이라 하고 여러 자손에게 나누어 소장케 하고 후손들로 하여금 느끼고 격려하면 후세에 희미하지 않게 될 것이다."
충의록은 존재공이 38세되던 해인 1765년(乙酉)에 지었다. 충의록 내용은 14세 판사공을 비롯한 조선시대 일어난 4난에 기여한 우리 조상 49분의 행적을 소개한 글이다. 다음은 충의록에 소개된 조상들이다. 다만 개인별 기록은 너무 소략한 경우가 있다. 특히 수사공 등에 대한 기록은 사료의 부실로 과장되기도 했다.
위충(魏种) 위유형(魏由亨) 위용(魏庸) 위방(魏魴) 위대용(魏大用) 위덕광(魏德光) 위덕의(魏德毅) 위대성(魏大成) 위중준(魏重俊) 위덕원(魏德元) 위덕관(魏德寬) 위덕화(魏德和) 위덕후(魏德厚) 위천우(魏天佑) 위홍주(魏弘宙) 위대기(魏大器) 위대택(魏大澤) 위대경(魏大經) 위대홍(魏大洪) 위정망(魏廷望) 위순정(魏舜廷) 위정헌(魏廷獻) 위정철(魏廷喆) 위정훈(魏廷勳) 위정렬(魏廷烈) 위정열(魏廷說) 위정호(魏廷灝) 위정명(魏廷鳴) 위산보(魏山寶) 위정보(魏廷寶) 위흥인(魏興仁) 위동현(魏東睍) 위천회(魏天會) 위천상(魏天相) 위천초(魏天礎) 위정첨(魏廷瞻) 위공달(魏公達) 위공준(魏公濬) 위홍원(魏弘源) 위종(魏鍾) 위국필(魏國弼) 위징(魏澂) 위사진(魏士進) 위한량(魏漢良) 위대업(魏大業) 위세보(魏世寶) 위세기(魏世琦) 위수징(魏壽徵) 위광조(魏光肇)